발해의 전성
발해국은 연경(燕京)이나 여진(女眞)의 수도에서 모두 1500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고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 나라의 왕은 옛날부터 대씨(大氏)를 성으로 삼았다. 유력한 성씨는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이나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씨)을 따른다.
부인들은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씨는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폈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모여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었다. 남자들은 지모가 많으며 날래고 용감함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심지어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 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거란의 아보기(阿保機)가 그 나라의 왕 대인선(大諲譔)을 멸망시키고, 그의 호적장부에 있는 발해인 1000여 호를 연(燕)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에게는 토지를 지급하여 부세를 바치게 하고, 국경의 시장에서 왕래하며 무역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으며, 싸움이 있을 때는 선봉으로 이용하였다.
천조(天祚)에 난이 일어나자 그들은 무리지어 고국에서 대씨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금나라가 토벌할 때,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귀족인 고씨가 집을 버리고 와서 항복하고 허실을 말해 주어, 성이 나중에 함락되었다. 거란이 강제 이주시킨 백성이 늘어나 5000여 호에 달하였고 훌륭한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금나라는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몇 년 동안 산둥[山東] 지방의 국경을 지키도록 보내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불과 몇백 집만 보내다가 신유년(辛酉年)에 이르러 모두 몰아 보내자, 이 사람들은 크게 원한을 품었다.
부유한 집은 200년 넘게 편안히 살면서 흔히 정원이나 연못에 모란꽃을 심었는데 많은 집은 200~300포기에 달하며 어떤 것은 수십 줄기가 무더기로 자랐는데 모두 연(燕) 지역에는 없는 것이라 하여 십수 천 혹은 5000전에 사갔다. 그들이 살던 옛 땅은 모두 거란에 귀속되었다. 옛 동경(東京)에 유수(留守)를 설치하였는데, 소주(蘇州)와 부주(扶州) 등이 있었다. 소주는 중국의 등주(登州) 및 청주(靑州)와 서로 마주하고 있어서, 큰 바람에 따라 개와 닭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도 한다.
아보기의 큰아들인 동단왕(東丹王) 찬화(贊華)가 이곳에 책봉 받았는데 그를 인황왕(人皇王)이라 하였다. 그는 황제에 오르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짓누르나 큰 산은 아무런 힘도 없어라. 고향 사람 보기가 부끄러워 이로부터 외국에 투신하리라” 드디어 소주(蘇州)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당나라 명종(明宗)에게 귀부하였다. 말을 잘 그렸고 경서도 좋아하여 배에 싣고서 그 나라를 떠났다.
처음에는 당나라를 모방하여 관청을 두었다. 나라에는 승려가 적었다. 조숭덕(趙崇德)이라는 사람이 연도(燕都)에서 미곡 장사를 하다가 예순이 넘어서야 그만두고 승려가 되었다. 스스로 큰 사원을 만들고 연(燕)의 죽림사(竹林寺) 혜일(慧日) 스님에게 주지를 요청하며 스님들의 3년 비용을 공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죽림은 곧 사명인(四明人)인데 조씨와 나는 서로 안 지가 퍽 오래되었다. 옛 숙신성(肅慎城)은 사방이 약 5리쯤 된다. 낮은 담의 유적은 아직 있고 발해의 수도에서 30리쯤 떨어졌는데, 역시 성 밑을 돌로 쌓았다.
『송막기문』 ; 김육불 편, 『발해국지장편』권1, 총략 상
사료는 『송막기문(松漠紀聞)』에 실려 있는 발해 전성기 때의 사회상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송막기문』은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저술한 것으로, 발해의 건국부터 멸망, 체제 및 풍속 등 사회⋅문화적 특징을 개괄하고 있으며, 특히 발해의 전성기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주의를 끈다.
대조영(大祚榮, 재위 698~719)이 발해를 건국한 후, 역대 왕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제10대 선왕(宣王, 재위 818~830) 때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선왕은 내치에 힘쓰면서 동시에 밖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여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 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여 당나라와 말갈의 교류를 막았다. 또한 남쪽인 요동 지방을 공략하여 요양 일대까지 차지하였으며, 신라 방면으로도 진출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응하여 826년(헌덕왕 18년) 대동강 부근에 300리가 되는 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발해의 활발한 대외 정복 활동의 결과, 발해는 선왕 대에 이르러 옛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회복하고 오히려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또한 문왕 때에 설치한 3경에 서경(西京)과 남경(南京)을 더하여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하는 행정구역도 완비하였다. 선왕의 중흥 노력에 힘입어 그 다음에 즉위한 제11대 왕 대이진(大彛震, 재위 831~857)으로부터 제12대 대건황(大虔晃, 재위 857~871), 제13대 왕 대현석(大玄錫, 재위 872~893)에 이르기까지 크게 융성하여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의 국가적 위상을 갖게 되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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