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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계획(北伐計劃),조선 효종,청나라 정벌,숭명반후금

Jobs 9 2021. 4. 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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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 때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

 

17세기 초 동아시아 3국, 즉 한(韓)·중(中)·일(日)에는 새로운 국제질서 체제가 편성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청의 세력 교체가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豊臣家)가 타도되고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개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응하여 조선 사회는 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면서 다각적으로 중흥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광해군(1608∼1623)의 왕실 재건(王室再建)·전제 정리(田制整理)·군정 강화(軍政强化)·문화 사업(文化事業) 등의 내정 개혁이 그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명·청 교체에 따른 위기를 맞이해 대명·후금 중립외교 정책을 추구,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이 때 서인세력은 광해군의 배명부후금(背明附後金)을 반정(反正)의 명분으로 삼고 반정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서인세력은 집권 명분을 위해 현실을 외면한 채, 숭명반후금 정책(崇明反後金政策)을 폈다. 이 때문에 반정 초기 잇단 사회 혼란과 반정세력의 분열 등으로 그 방비책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결국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다.

청나라의 침략을 받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상황을 도외시한 채 대의명분만을 앞세우다가 남한산성에서 패전,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오랑캐로 멸시해오던 여진족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그 속국이 됨으로써 조선의 명분과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또한 병자호란 중 청태종(淸太宗)에 의해 볼모로 잡혀 청나라 수도인 심양(瀋陽)으로 간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소현세자(昭顯世子)도 포로로 잡혀 온 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그 곳에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접하였다. 또 청나라와의 관계도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식견(識見)을 가지고 환국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뒤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한 이후, 왕위는 동생 봉림대군에게 계승되었다. 새 임금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주 02)의 인물을 등용, 북벌을 준비하였다. 먼저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守禦廳)의 군사력을 정비했고, 이완(李浣)을 대장으로 어영청군(御營廳軍)을 크게 증가시켰다.

한성에 있는 어영청군은 종래 약 7,000명의 3개월 근무 비상비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인데, 이 때 2만 1000명으로 증가시키고 그것을 21패로 나누어 1,000명이 항상 한성에 상주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국왕의 친병(親兵)인 금군(禁軍)을 전부 기병화(騎兵化)하는 한편, 훈련도감군·어영청군의 기병도 강화하였다. 또, 어영청군에는 대포부대인 별파진(別破陣)을 만들기도 하였다.

효종은 또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재야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하고 전력 증강에 힘쓰는 한편,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을 시켜 명나라와 대청전선(對淸戰線)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의지에 영합하여 권력을 추구, 자신의 정치 목적, 즉 주자(朱子)와 기호사림(畿湖士林)의 전통적 정치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동시에 당시 중원세력(中原勢力)의 불안과 청정(淸廷)의 내부 사정의 악화 등 대외적 요인은 효종의 북벌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북벌이 촉진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즉, 농민들은 농번기에 축성(築城)·군기수조(軍器修造) 등의 역사(役事)로, 농한기에는 군사 훈련·점호(點號) 등으로 고달픈 생활을 하였다. 또 지방의 수령들도 북벌계획의 실적에 따라 상벌이 정해졌기 때문에 일반 행정은 제쳐두고 오직 북벌계획에만 매달리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도 수많은 유신(儒臣)들이 친청분자(親淸分子)로 몰려 극도의 멸시와 함께 중형을 받는 등 무신세력이 갑자기 증대, 기존의 문신 우위 정치체제에 동요를 일으켰고 이것이 효종과 문신세력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후 중국의 정세는 조선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명나라는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불행하게도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면서 북벌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북벌계획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존명주의(尊明主義) 내지 존주주의(尊周主義)가 바탕이 된 명분적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연장이었다. 북벌계획에 의해 실제로 강화된 군대는 왕의 친위군과 수도경비 군사력의 강화에만 그쳤고 국론 통일의 화합을 이루지 못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북벌계획은 백성들을 긴장시키고 그 관심을 밖으로 돌려 전쟁 패배의 책임과 전쟁 뒤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지배계층의 논리였던 것이다.

게다가 현실성없는 지배계층의 지속된 북벌의식은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청나라 문화를 선진 문화로 인정하지 않아 중국 문화의 수입 통로를 막았으며, 이로써 정치적 쇄국주의, 문화적 폐쇄주의를 낳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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