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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민란(晉州民亂), 1862년, 철종,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Jobs 9 2021. 4. 1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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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철종 13) 2월 18일에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철종 때의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직접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 탐학에 있었다. 그는 부임한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한 금액이 줄잡아 4만∼5만 냥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진주목의 역대 불법 수탈곡인 도결(都結) 8만4000여 냥을 일시에 호별로 배당해 수납하려 하였다. 우병영(右兵營)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신구범포곡(新舊犯逋穀)인 환포(還逋) 7만2000여 냥을 농가에 분담, 강제로 징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극도로 분격시켰다.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유곡동(杻谷洞)에 사는 유계춘(柳繼春)은 김수만(金守滿)·이귀재(李貴才)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농민운동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보다 많은 농민을 동원할 방법과 군중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나아갈 행동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 이웃 단성(丹城) 주민의 봉기에 자극된 그들은 언방(諺榜)주 01)·회문(回文)·통문(通文) 등을 지어 발표하면서 마침내 2월 18일 이른 아침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먼저 서쪽에 있는 수곡(水谷) 장터를 휩쓸고 이어 덕산(德山) 장터로 몰려가서 철시(撤市)를 강행하였다. 여기에서 위세를 떨치게 된 농민 시위대는 스스로를 ‘초군(樵軍)’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쥐고서, 유계춘이 지었다는 노래를 부르며 구름처럼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시위에 불참하는 자에게는 벌전(罰錢)을 받았고, 반대하는 자는 집을 부셔 버렸다. 이 때문에, 이제까지 잠잠하던 다른 지역의 농민들도 속속 이 대열에 가담해 그 세력이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하룻밤을 성밖에서 지샌 농민 봉기군은 19일 우병사 백낙신과 목사 홍병원(洪秉元)으로부터 통환(統還)과 도결을 혁파한다는 완문(完文)을 받아 냈다. 그러나 흥분한 군중은 우병사를 첩첩이 둘러싸고, 그의 죄상을 하나씩 들추어 협박하는 한편, 부정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權準範)과 김희순(金希淳)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그들이 자진 해산하기까지 4일 동안에 부정 향리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4명을 타살하고 수십 명은 부상을 입혔다. 또 평소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부호들을 습격해 23개 면에 걸쳐 126호를 파괴하고 재물을 빼앗으니, 그 피해액이 모두 10만냥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2월 29일에 부호군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晋州按覈使)로 임명해 수습하게 하였다.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이 민란을 수습했는데, 그 처벌 상황을 보면 농민 측은 효수(梟首) 10명, 귀양 20명, 곤장 42명, 미결 15명이었고, 관리 측은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미결 5명이었다.

그러나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다른 지방의 농민을 자극해 이 해에 전국에 걸쳐 30여개 지역에서 농민이 봉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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