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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난,1174년,명종,서경민 반란,무신정권,서북민,민란

Jobs 9 2021. 4. 1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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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4년(명종 4)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일으킨 난.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에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해서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해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西京)주 01)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윤임첨과 두경승 등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만다.

경과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주 02)와 북계(北界)주 03)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고 격문을 돌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로 인해 현담윤(玄覃胤)을 도령(都令)으로 하는 연주성(延州城, 영월 부근)을 제외한 절령(岊嶺,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의 조정에서는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에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절령역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정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서경병에게 대패하여 서경병이 개경에 육박할 정도였다. 적에게 포위된 윤인첨은 적과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정균(鄭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한편 동계(東界)주 02)에서는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昇)과 조관(趙冠) 등이 화주영(和州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낭장 이거(李網)가 문을 열어주어 병마사 대장군 이의(李儀)와 병마부사(兵馬副使) 최균이 죽었다. 또한 두경승(杜景升)이 동로에서 서로로 길을 돌려 북계의 몇 개 성을 점령했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절령에서 승리한 서경병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경병을 격파하였다. 당시 그는 서경인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저자에 내걸었다. 최숙(崔淑) 등은 적진을 기습해 서경병을 크게 무찔렀다. 이처럼 승세를 타서 대동강까지 쫓아 서경의 성밖에서 진을 쳤으나 이의방이 이끈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조정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로 삼아 서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관군이 출정 준비를 하던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을 받은 승려 종감이 이의방을 죽인 일이 발생했다. 명종이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내세우며 반란군의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위총군의 기세는 여전했다.

그러자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평남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별로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청했다가 다시 반발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은 드디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폈다.

주변의 성과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냈으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이의방의 의종 시해 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보냈다.

그 뒤 서경에서 공방전을 1년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공격해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무리 10여 명을 가둠으로써 조위총의 반기는 22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결과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북민의 항거운동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재봉기했다가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했다가 곧 진압되는 등 서북민들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

의의와 평가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위총의 거병은 무신 집권 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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