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등이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사건.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禑王)이 왕족이 아니라는 의심은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恭愍王)이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 등에 의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었다.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당시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으로써 왕위를 잇게 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미 대군에 봉해져 있던 우왕의 옹립을 고집해 결국 우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에 이성계측의 윤소종(尹紹宗)·조인옥(趙仁沃) 등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우왕이 폐위되고 강화로 유배되자, 같은 회군공신인 조민수(曺敏修)가 중신 이색(李穡) 및 외척 이림(李琳) 등과 결탁,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함으로써 관철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성계측은 대사헌 조준(趙浚),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 등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계기로 조민수를 탄핵, 창녕에 유배하고,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에 올라 실권을 잡으면서 창왕 폐위의 가능성을 고조시켜갔다.
」이듬해 9월에 마침 명나라에서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우왕 즉위의 부당함을 비난하는 계문(啓文)을 고려에 전해왔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최영(崔瑩)의 족당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전 부령 정득후(鄭得厚)가 황려(黃驪)에 옮겨져 있던 우왕의 밀지를 받아 이성계를 살해하려던 계획이 누설됨으로써 창왕 폐위의 직접적인 단서가 마련되었다.
경과
이때 이성계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정몽주(鄭夢周)·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律長壽)·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威)·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 등 9명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신종의 7대손인 정창부원군 요(定昌府院君瑤)의 옹립을 결정하였다.
이에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에 유배되고, 공양왕이 즉위하였다. 이어 창왕의 외척인 이림·이귀생(李貴生) 부자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달에는 우왕과 창왕이 유배지인 강릉과 강화에서 각각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창왕 옹립을 주장했던 이색·이종학(李種學) 부자와 이숭인(李崇仁)·하륜(河崙)·이분(李芬)·문달한(文達漢)·권근(權近) 등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었다. 한편 흥국사에 모여 창왕 폐위를 논의했던 이성계·심덕부 등 9명은 모두 공신에 책봉되어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이듬해에는 변안열(邊安烈)·홍영통(洪永通)·우현보(禹玄寶)·왕안덕(王安德)·우인렬(禹仁烈)·정희계(鄭熙啓) 등을 김저의 옥사에 연루시켜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는 등 반대파 구신들의 숙청에 박차를 가하였다. 결국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은 이성계 일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
이러한 사태에 대한 구신들의 반발이 1390년(공양왕 2) 5월에 일어난 윤이(尹彛)·이초(李初) 옥사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이성계 등의 세력확대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이어져 우왕·창왕의 비왕설(非王說)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우왕·창왕을 신우(辛禑)·신창(辛昌)으로 이름하고, 세가(世家)에서 탈락시켜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편, 여말 선초에 생존했던 원천석(元天錫)은 우왕이 공민왕과 신돈의 비첩 반야 사이의 소생이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 역시 뚜렷한 근거가 없어 진위를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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