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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법(宗法), 종법제, 적장자(嫡長子) 중심 가족 질서, 호주제 폐지

Jobs 9 2025. 3. 2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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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법제(宗法制)는 중국 고대부터 형성되어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가족 질서를 운영하는 데 기본이 되었던 제도이며, 조선 시대에는 가족 윤리를 기반으로 한 사회 규범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원리 중 하나였다. 

 

종법제는 '대종소종지법(大宗小宗之法)' 또는 '종자법(宗子法)'에서 유래된 말로,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방계 친족을 결속시키는 고대 중국의 친족 제도

 

주요 내용

장자 중심: 적장자에게 특권과 책임을 부여하여 가족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가족 윤리: 가족 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5종: 5종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이종(禰宗),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조종(祖宗), 증조부를 중심으로 한 증조종(曾祖宗), 고조부를 중심으로 한 고조종(高祖宗)의 4종과 대종을 합한 것

 

역사적 배경

중국 고대: 은대 말기에 출현하여 주나라 초기에 제도화된 것으로 보이며, 강력한 장자 존중 의식과 함께 종자와 지자의 지위를 구별하고 종자에게 권위를 부여하여 가족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는 종법제 가족주의가 사회의 가치관, 규범, 관습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근본을 변화시켰다. 

현대 사회:

현대 사회에서는 호주제 폐지 등으로 종법제 가족주의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가족 윤리와 관련된 일부 관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법도




종법(宗法)

 

유교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동양 전통 사회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제사의 계승자에게는 가계(家系, 종통)·신분·관작(官爵)·재산 상속의 특권과 의무가 뒤따랐다. 제사의 계승에는 일정한 원리가 있었으며, 엄격한 원칙과 절차가 요구되었는데, 그것이 곧 종법(宗法)이다. 종법은 종통 계승법(宗統繼承法), 곧 ‘제사의 계승 원칙’을 말한다. 종법의 기본 원리는 적장자(嫡長子)와 적장손(嫡長孫)으로의 계승, 곧 ‘적적상승(嫡嫡相承)’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교 문화권의 가계 계승에는 종법이 불변의 대원칙으로 전해 오게 되었다.

 

종법이란 말은 ‘대종소종지법(大宗小宗之法)’ 혹은 ‘종자법(宗子法)’에서 온 것이다. 이는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하여 방계(傍系) 친족을 일정한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고대 중국의 독특한 친족 제도(親族制度)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종법은 하나의 오랜 관습이며, 특정한 형식을 갖추어 인위적으로 제정한 이른바 ‘법’이나 ‘제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기원전 12세기 이전의 은(殷)나라 시대 종묘 제도와 친족 제도에 기원을 둔 오랜 습속으로, 장자 상속법(長子相續法)을 기초로 한 일종의 친족 제도 혹은 상속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시대에 따라 내용이 풍부해지고 성격이 변화하기도 하면서 유교적 예법으로 정립되었고, 국가의 법령에 반영되기도 하였다.

 

주(周)나라 시대의 종법에 따르면 왕(天子)은 왕실의 대종(大宗)으로서 대대로 적장자가 계승하고, 왕의 방계인 형제나 자손은 제후(諸侯)에 분봉(分封)되어 왕실의 소종(小宗)이 된다. 제후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대종이 되어 대대로 그들의 적장자가 계승하고, 그 방계의 형제들(別子)은 경대부(卿大夫)로 다시 분봉되어 공족(公族)의 소종이 된다. 주나라 종법의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을 통치 체계와 결부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은나라의 종법도 정치적 성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친족 조직을 국가의 통치 구조에 결합시켜 강력한 정치 조직으로 제도화한 것은 주나라 때부터였으며, 이것이 분봉 제도와 결합하여 이른바 ‘종법 봉건 제도(宗法封建制度)’를 만들게 되었다.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르는 동주(東周)시대에 이르면 종주국인 주(周) 왕실보다 제후국들이 더 강성하게 되어 각지에 할거(割據)하였다. 이 시대에는 종법에서도 이들 제후가 중심이 되어 공족들을 결합시키고 정치 단위로 편성하는 종법 체계가 정립되었다. 이것은 후대에 하나의 예제(禮制)로 정비되어 종법의 고전적 형태가 되었다. 이는 제후의 별자(別子,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들을 직접적인 편제 단위로 하였기 때문에 ‘별자종법(別子宗法)’이라고도 하였다.

 

별자종법의 내용은 『예기(禮記)』 「대전(大傳)」에 비교적 소상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별자는 조(祖)가 되고, 별자의 계승자(繼別)는 종(宗)이 되며, 아버지를 이은 자는 소종(小宗)이 된다. 100세(世)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종이 있고, 5 세가 되면 옮기는 종이 있다. 100세토록 옮기지 않는 것은 별자의 후계이니, 계별자의 시조를 종으로 하는 자는 100세토록 옮기지 않는 것이다. 고조(高祖)를 이은 자를 종으로 하는 자는 5세가 되면 옮기는 것이다. 조상을 존중하는 까닭에 종자(宗子)를 공경하니, 종자를 공경하는 것은 조상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제후의 별자를 시조로 하여 그의 적장자 직계의 종통이 곧 대종이 되며, 그 방계 곧 별자의 아우들의 가계는 모두 소종이 되는 것이다. 별자의 직계인 대종은 100세토록 변함없이 유지되나, 그 방계는 5세가 되면 친족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는 별자의 신주는 100세가 되어도 사당에서 옮기지 않지만, 그 방계의 자손은 5세 후에 조천(祧遷)하기 때문이다.

 

 

이 종법의 대략적인 원리나 운영 형태는 크게 친족 편제적 측면과 가계 계승적 측면의 두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친족 편제적 측면에서 보면, 별자의 제사와 계통을 잇는 적장자(繼別)의 종가를 대종으로 하고, 그에서 파생된 4종(四宗)의 지파들(고조를 잇는 소종, 증조를 잇는 소종, 조부를 잇는 소종, 아버지를 잇는 소종)을 소종으로 하여 5종(五宗)의 친족 집단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대종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소종을 통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종법에서는 종자(宗子)와 종부(宗婦)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종족 전체에 대해 가부장적(家父長的) 권위를 행사하게 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종자만이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지자(支子)는 직접 제사하지 못한다. 지자가 제사 드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종자에게 고해야 한다.176)

 

지자(서자)는 벼슬이나 지위가 높더라도 제사를 드릴 때는 종자의 이름을 빌려야 한다.177)

 

종자는 나이 70이 되더라도 반드시 주부(主婦)를 둘 수 있으며, 지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178)

 

중자(衆子)와 서자(庶子)들은 종자와 종부를 공경하여야 하며, 종가에 대해서는 부귀로써 행세할 수 없다.179)

 

좋은 물건이 있으면 종자에게 먼저 바친다.180)

 

종자는 동종의 족인들을 거두고 통제한다.181)

 

이러한 종법 체제는 제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종 친족 집단의 화목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되고 유지되었다. 대종의 종자는 위로 조상의 제사를 주재하고 아래로 동종의 친족을 거두고 통할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존중되었다.

 

가계 혹은 종통 계승의 측면에서 보면, 종법은 제사, 관작 등의 승계에서 수립된 적장자 상속의 원칙을 말한다. 적장자가 죽으면 그의 적자인 적장손이 가계를 계승하는 것이다. 적장손이 없을 때는 대종의 경우라면 같은 항렬(行列)의 동종 지파에서 입후(立後)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기타의 여러 아들이나 서자가 계승하는 것도 ‘형망제급(兄亡弟及)’이라 하여 하나의 변례(變禮)로 인정되었다.








종법제의 원리

 

 宗法은 조선시대 가족제도의 근간이었으며, 가족 윤리를 기반으로 한 조선사회의 규범적 체제를 지탱시켜 준 중요한 원리의 하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개인이 개인으로 평가받기보다는 宗中이라고 하는 친족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 될 정도로 종법의 영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宗法制에 관한 연구가 미진했기 때문에 종법제의 시대적인 변화상이나 그것이 조선사회에 미친 실제적인 영향 정도 등이 아직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종법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것인가. 종법은 유학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가족간의 질서를 규정하고 그 질서가 부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제도화한 것이었다. 종법은 적어도 周나라 초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長子를 중심으로 가계를 계승하며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고대 종법의 원형을 알게 해 주는 제한된 자료 가운데≪禮記≫大傳의 다음 구절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別子가 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이가 宗(大宗)이 되며 아버지(禰)를 계승하는 이는 小宗이 된다. (따라서) 百世토록 옮기지 않는 종(대종)이 있고 五世가 되면 옮기는 종(소종)이 있다.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종은 별자의 후손으로 별자의 출계한 자를 계승하여 종으로 삼아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것이며, 高祖를 계승하여 종으로 삼는 경우는 5세가 되면 옮기는 것이다(≪禮記≫권 16, 大傳 16).

 

 이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諸侯의 아들 중에 嫡長子를 제외한 아들을 별자라고 한다. ② 적장자는 제후의 뒤를 잇고 별자들은 각각 하나의 대종의 시조가 된다. ③ 그리고 그 시조의 적장자들은 시조를 잇는 자로서 대종이 되며, 이 경우에는 백세가 지나도록 그 廟를 옮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④ 소종은 별자의 衆子로서 아버지를 잇는 宗이다. 아버지를 잇는다는 것은 직접 자기의 아버지를 시조로 한다는 뜻이다. ⑤ 즉 별자의 적장자는 별자를 계승하여 대종으로 되지만, 별자의 衆子는 대종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하나의 종의 시조로 되고 그 적장자가 시조를 계승하여 소종을 이루는 것이다. ⑥ 소종은 아버지를 계승하는 자의 총칭이고, 반드시 별자의 중자의 자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大宗은 제후의 별자를 시조로 하여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종을 말하며, 小宗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5세까지 제사하고 그 사이에 친족 관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周의 天子는 周王이면서 同姓 諸侯의 대종이었고, 제후는 제후국의 군주이면서도 주왕에 대해서는 소종이었고, 동족의 경대부에 대해서는 대종이었다. 그리고 경대부는 제후의 소종이었다. 조선시대로 말하면 大君 혹은 君들이 대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대종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시조를 잇는 아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며, 혹은 이러한 百世不遷의 친족 집단 전체를 뜻하기도 하는 반면, 소종은 본인을 포함하여 5세까지의 친족 집단을 말할 뿐이다. 이와 같이 설명을 해도 대종ㆍ소종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만 파악될 뿐 보다 구체적인 종법의 실체는 규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종법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강력한 長子相續의 친족체계라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禮記≫喪服小記의 “庶子는 아버지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그 종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0371)라는 규정은 종법의 嫡長子相續主義를 뒷받침해 주는 대표적인 근거가 된다. 서자는 사당을 지을 수가 없으며 비록 관직이 높아졌다고 해도 좋은 제물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제사를 주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0372) 이는 종법이 장자 위주로 실시되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고대 종법의 특성을 정의한다면 바로 ‘장자 위주의 家系繼承과 그를 바탕으로 한 祭祀儀禮’라고 할 수 있다.

 

 종법 관련 사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종법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에 의해 가계가 계승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계승된 가계는 어느 대까지 제사라는 형식을 통하여 유지·보존되어야 하는가를 거듭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종ㆍ소종은 제사를 받아야 할 대상의 대수를 정한 것이며 종자는 그러한 제사를 주관할 자이다. ‘百世不遷’, ‘五世則遷’이라고 하는 것도 백세가 지나도록 제사를 계속한다는 것, 혹은 5대가 지나면 더 이상 제사하지 않는다는 제사의 범위를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종법의 골자는 가계계승 원리와 그를 유지하기 위한 제사의례에 불과한 것이나, 그 주관자에 대한 명분을 세우는 과정에서 세분화되고 보다 복잡해지게 된다.

 

 종법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고대의 종법에 관심을 가졌던 연구자들도 일치된 결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종법관계 자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법관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는 자료는 두 세 가지에 불과한 실정이다. 따라서 종법의 기원에 관한 연구도 현재까지 周公創制說0373)을 비롯하여 周族固有貫習說,0374) 殷起源說0375) 등 몇 가지가 제기되어 있으며 아직 합의된 결론에 이르

 

 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해서는 씨족사회 내부로부터 진행된 계층분화가 殷代 이래 왕후 귀족의 봉건적 家父長 家族의 성립을 촉진시키고, 한편으로 소종적 집단을 사회 단위로 일반화시켜 거기에서 촌락공동체의 새로운 기초가 형성되도록 한 제도적 장치라는 주장 등이 있다.0376)

 

 이러한 논의들이 아직 정설로 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그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 볼 때, 조상숭배와 제사, 그에 따른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발달이 곧 종법 출현의 배경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종법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종법의 특성을 추론해 본 것과도 일치한다. 즉 종법이 가계계승과 제사라는 문제에서부터 기원했고, 그것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에 종법의 가부장적인 성격은 불가피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종법은 고대인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당시인들은 종법의 필요성에 대해 親親, 尊祖라는 친족간의 화목과 위계질서 그리고 宗廟·社稷의 위엄을 들고 있다.

 

어버이를 친히 하면 祖上을 존중하게 되고, 조상을 존중하면 宗을 공경하게 되며, 종을 공경하게 되면 친족을 거둘 수 있으니(친족이 흩어지지 않으니) 친족이 거두어지면 종묘가 엄격해지고 종묘가 엄격해지면 사직이 중해지며 사직이 중하면 백성을 사랑하게 된다. 백성을 사랑하게 되면 형벌이 균형 있게 되고, 형벌이 균형 있게 되면 백성이 편안해지며, 백성이 편안해지면 재용이 충족되고, 재용이 충족되면 백가지 뜻이 이루어지고, 백가지 뜻이 이루어지면 禮俗이 이루어지게 되며, 예속이 이루어지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禮記≫권 16, 大傳 16).

 

 이는 앞에서 인용한≪禮記≫宗法에 관한 규정 바로 다음에 나오는 기사로서 당시 종법의 효용성을 알게 해준다. 여기에 종법이라는 용어가 직접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尊祖’와 ‘敬宗’은 바로 종법을 떠받치는 기본 정신이므로 이는 곧 종법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서술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예문에서는 어버이를 친히 하고 宗을 공경하는 종법을 잘 준용함으로써 집안과 국가, 나아가서는 천하가 예속에 이르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고대인들은 종법이란 사회의 유지·통합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예법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종법은 한 집안의 가족질서이지만 이는 가족내의 위계질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바로 하는 기반이 되며 아울러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고대사회에 있어서 종법은 그야말로 모든 사회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임을 알 수 있다. 종법이 발생할 당시 종법의 사회적 의미는 이와 같이 친족간의 화목과 질서에 의한 사회, 국가의 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정되어 있지만 종법관계 사료를 면밀히 고찰해보면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庶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과 존조ㆍ경종의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서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은 앞의≪禮記≫大傳의 기사를 통하여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같은 책의 曲禮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支子는 제사를 지낼 수 없으며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宗子에게 고하여야 한다”0377)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한 주자의 주에는 지자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으며, 만일 종자가 병이 나서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경우 대신 행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종자에게 알리고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종자는 위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기 때문에 族人들이나 형제 등은 모두 그를 받들어야 한다고 하였다.0378)

 

 물론 이것은 주자나 송대의 다른 학자들의 해석이지만, 전적으로 새로운 해석이 아니며, 또한 古經에서 이미 강하게 의도되었던 장자 존중의 의식과 그 이유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법은 곧 하나의 질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핵심인 제사를 아무나 지낼 수 있게 한다면 종법질서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종자와 지자의 지위를 구별하고 종자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하여 가족질서 나아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종법은 부계적, 부권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0379) 모든 계승은 아들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 존조ㆍ경종한다는 것은 바로 부계의 질서를 수용하여 존중하는 것이며 부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종법이 강력한 가부장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강력한 부계적인 혈연관계와 그에 의한 가부장권이 일찍이 형성되어 보급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 고대 종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살리카법

 

살리카법(Lex Salica, Salic Law)은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 프랑크 왕국의 법전이다. 살리(Salic)라는 표현은 당시 프랑크족 중에서 주도적 부족이었던 '살리족'에서 나왔다. 클로비스 1세 말년에 만들어진 법전으로 게르만족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어서 게르만적 관념이 많이 들어가 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중간 단계 언어로 쓰였으며, 프랑크족의 원래 언어인 고대 네덜란드어로도 적혀있어서 네덜란드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법전 자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여성의 왕위 즉위 금지법을 뜻하기도 한다.

 

 

살리족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

 

살리카법의 어원이 프랑크 부족의 일원이었던 "살리족"이라는 견해는 19세기까지 정설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초부터 살리카법의 어원, 더 나아가 살리족의 실존 여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전통적 견해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Zosimus)가 저술한 『새역사(Nova historia)』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조시무스는 해당 저서에서 "Lex Salica(살리카법)"에서의 "Sal-"은 서부 지역 프랑크족인 살리족을 가리키며, 살리카법이 살리족의 부족법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프랑크족엔 살리족과 리푸아리아족이 있었는데, 이후 살리족이 리푸아리아족을 흡수하면서 살리족의 법이 프랑크의 법이 된 것이라고 저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견해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은 독일의 역사학자 지몬 슈타인(Simon Stein)으로, 그는 1926년, "살리카"라는 단어는 특정 부족과 관계가 없으며, 라틴어로 "영주가 직접 다스리는 영지"를 뜻하는 "Terra Salica"에서 유래한, "영주지배관계"의 의미를 내포한 형용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독일의 중세 역사가 마티아스 슈프링어(Matthias Springer)는 1997년 논문 『Gab es ein Volk der Salier?(살리족은 과연 존재했는가?)』를 발표하며 살리족의 실존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살리카"는 "공통의, 공유의"라는 의미를 지닌 고대 게르만어 "Saljon"와 연관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메로베우스 왕조 시기에 "영주지배관계"로 의미가 변화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살리족과 리푸아리아족이 등장하는 사료는 조시무스의 저서뿐이며 살리카족을 부족법으로 갖추고 있던 살리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살리카법이 프랑크 부족의 일원이었던 살리족의 부족법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살리카법이 부족법이 아닌 프랑크족의 법의 일부를 지칭한다는 근현대 역사가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즉 살리족이 없었다고 현재로서 단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고,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와 프랑스어 위키백과 모두 살리 프랑크족의 존재를 일단은 인정한다.

 

 

사례

 

살리카법의 민법 규정 가운데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프랑크족 전통에 따르면 작위는 토지에 붙어 다니는 것이었다. 이 얘기대로라면 '딸은 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다'. 이는 토지의 주인이 그 토지에서 얻은 수입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장을 갖추고 병력을 부양하며 전시에 그 병력을 지휘해 전투에 참여해야 했기에, 그러니까 군역을 치러야 했기에 군역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여성의 토지 및 작위 계승을 막은 것인데,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시대에 이미 모계를 통한 계승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조항은 만들어진 지 100년도 안 지나서 사문화된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딸이 토지를 상속받고, 병역은 사위나 외손자에게 맡길 수 있는데다, 살리카법에서도 외손의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손의 나이가 어리면, 딸이 그 어머니된 자격으로 후견인이 되어 토지를 관리할 수도 있었다. 토지와 작위의 주인된 입장에서도 조카나 형제, 또는 더 먼 친척보다는 딸에게 땅을 주고 싶었을 테니까. 즉, 살리카법을 굳이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왕에게 왕자는 없고 왕녀만 있어서 왕이 사위를 골라 왕녀와 결혼시킬 경우, 딸이 여왕으로 즉위하고 사위가 국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위가 아내의 계승권을 통해 왕으로 즉위하고 딸은 왕비가 되는 것이다. 다만 엄밀하게 둘을 구별하기는 어려운데, 이런 경우에는 보통 부부의 공동 통치에 가까운 형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별하기 편하자고 여왕과 왕비를 구별해 쓴 거지 어차피 유럽의 언어로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왕 이외의 하위 작위들 역시 마찬가지로, 공작부인이나 백작부인과 여공작, 또는 여백작 모두 표기는 똑같다. 물론 굳이 구분을 한다면 배우자를 의미하는 Consort를 붙인다.

 

그러다 1316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유복자 장 1세마저 5일 만에 죽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루이 10세의 동생이자 장 1세의 삼촌이었던 섭정 필리프는 즉시 국왕 필리프 5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 10세의 딸 잔이 살아있었기에 그의 정통성은 떨어졌다. 이에 1317년 랭스에서 그는 서둘러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도유식을 행한 후 귀족, 고위 성직자, 파리 대학의 박사, 법학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그들은 파리 대학교를 뒤져 먼지투성이 법전 속에서 이 조항을 발굴했고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모계를 통한 왕위 계승권을 폐지했다. 즉, 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잔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잔은 즉위하지 못했고 그 뒤로도 부계를 통한 계승이 내내 이어졌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여왕이 즉위하지 못했다. 대신 잔은 샤를 4세 사망 후 살리카법이 미치지 않는 나바라 왕국의 여왕 호아나 2세가 되었다. 이 조항으로 훗날 발루아의 필리프가 부계 혈통을 통해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게 되었으며, 부르봉 왕조에서는 루이 16세가 프랑스 대혁명 와중 사망한 이후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유일하게 남은 루이 16세의 자식이었던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대신 즉위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필리프 5세의 이 해석은 확대 해석이다. 살리카법에서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지만, 외손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만약 외손도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면 외손자의 자격으로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은 전력이 있는 카페 왕조나 발루아 왕조의 정통성도 상당히 취약해진다. 카페 왕조와 발루아 왕조의 왕위는 부계 혈통으로 확보한 것이지만, 모든 토지와 작위를 부계 상속으로 얻진 않았다.

 

발루아 왕조는 발루아 영지와 작위부터 원래 외조부의 소유였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왕조들은 왕자들을 유력 영주들의 상속녀와 결혼시켜 영토를 넓혀왔다. 게다가 필리프 5세는 딸만 4명을 낳고 유일한 아들은 1살에 죽어버려서 본인이 확대해석한 살리카법 때문에 자녀들이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만약 정석적으로 올라왔다면 장성한 딸이 여왕이 될 수도 있었으니 완전히 자업자득. 법을 억지로 바꿔가면서까지 왕위를 빼앗았으나 딸을 넷이나 낳은 후에야 어렵게 얻은 아들마저 아기일때 죽어버렸으니 결국 본인 업보를 본인이 돌려받은 꼴이 되었다. 어쨌건 필리프 5세의 이 해석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나라에도 퍼졌고, 그 결과 온갖 전쟁이 벌어졌다. 당장 필리프 5세 본인부터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딸들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동생이 샤를 4세로 즉위했고, 샤를 4세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사촌 발루아의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하면서 카페 왕조 직계가 끝나고 방계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샤를 4세의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루이 10세의 딸 잔이 있었지만 이 조항으로 왕위 계승이 불가능했기에 필리프 4세의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6세, 필리프 4세의 외손자(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의 아들) 잉글랜드 왕국의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또 다른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 나바라의 왕 펠리페 3세가 왕위를 주장했다. 결국 필리프 6세가 발루아 왕조를 개창하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인정했지만 나중에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의 해방을 요구하고 가스코뉴를 침공하면서 백년전쟁이 일어나자 필리프에게 보내는 경고 겸 도발로 모계 계승(필리프 4세의 외손자이자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의 조카)을 들어 자신이 진정한 프랑스 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살리카법은 프랑크 왕국의 법률이므로 유럽 국가라도 그 기원이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당장 백년전쟁도 잉글랜드 왕국은 살리카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백년 전쟁 이후로도 잉글랜드는 모계 계승을 통해 왕위계승을 이어왔고, 왕녀들의 계승도 인정했다. 실제로 대중들에게 유명한 엘리자베스 1/2세와 빅토리아 여왕을 포함해 여왕들 대부분이 바로 잉글랜드,영국 왕들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확대해석한 살리카법 때문에 발발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본거지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전통적으로 살리카법을 따르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기존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남성인 카를 6세는 아들을 낳는 데에 실패했기에 결국 딸에게 토지와 작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살리카법 때문에 발발했다면 다른 국가들은 여성을 통한 토지와 작위 계승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작센 선제후국이나 바이에른 선제후국 등 다른 국가들도 여성의 계승 자체에는 동의했다.

 

실제로 쟁점이 된 부분은 계승 서열이었는데, 카를 6세는 본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문제는 카를 6세에게 요제프 1세라는 형이 있었다는 점이다. 요제프 1세는 아들 없이 딸만 두어서 살리카법에 따라 남동생인 카를 6세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물려받았다. 카를 6세는 남성이었으므로 살리카법 내에서 요제프 1세의 딸들보다 계승 서열이 높았는데, 문제는 카를 6세의 딸들까지 요제프 1세의 딸들보다 계승 서열이 높은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요제프 1세의 딸들은 장남의 딸이고 카를 6세의 딸들은 차남의 딸이었으므로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이 카를 6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카를 6세는 이를 1713년 국사조칙을 통해 스리슬쩍 뒤바꿨다. 원래대로라면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와 결혼한 요제프 1세의 장녀 마리아 요제파나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와 결혼한 요제프 1세의 차녀 마리아 아말리아에게 토지와 작위가 상속되었을 것이므로 다른 국가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다. 즉 살리카법에서 준 살리카법으로의 전환과 별개로 여성 후계자들의 계승 서열을 임의로 바꾼 점이 불씨가 되어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 살리카법을 적용하지 않았지만 살리카법을 쓰던 왕가와 같은 계통의 왕조가 들어서거나, 왕위 계승 원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살리카법을 차용하는 등의 이유로 살리카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나라들도 있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 국가가 아니기에 본래는 살리카법이 없었다가 보르본 왕조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살리카법이 도입되었다. 이후 살리카법을 두고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카를로스파 전쟁'이라 한다. 페르난도 7세가 아들을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계획으로 살리카법을 폐지하였고, 이에 따라 페르난도 7세의 사후 그 장녀가 이사벨 2세로 즉위하자 살리카법에 따른 계승권자였던 삼촌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왕을 자칭한 것인데, 카를리스타 내전은 여러 번 있었고 전부 다 카를리스타들이 졌지만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했고, 훗날 스페인 내전에서 우파들의 주요 세력으로 참전했다.

 

러시아 제국도 처음에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 시대가 끝나고 표트르 3세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의 황제이지만 살리카법을 따르는 문화권인 독일계였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실상 아버지를 살해하여 황제가 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던 파벨 1세는 아버지의 고국에 있던 살리카법을 끌고와 1797년에 문서화시키면서 공식화했다.

 

한편, 영국의 하노버 왕조는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하노버 왕국과의 동군연합이 끝났다. 영국은 아들 우선 상속법[10]을 채택하고 있었으나 하노버는 살리카법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 이후 빅토리아의 숙부가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로 즉위했고 하노버 가문의 당주 자리 역시 그의 후손들이 이어가게 되었다.

 

살리카법은 국가의 안정성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 일단 국토의 보존에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국내에 봉토가 주어지는 왕자들은 상속이 진행됨에 따라 영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경우가 적은 데 비해 외국 왕가로 시집가는 공주들의 경우, 상속된 영토가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봉신이자 부인인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엘레오노르가 남편과 이혼하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결혼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보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땅을 더 많이 가지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의 왕녀들은 대부분 귀천상혼을 고려하여 해외의 왕족들과 결혼하기 때문에 모계를 통한 상속을 택하면 외국인 남편이 왕이 되거나 외국인 손자가 즉위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이 독일 하노버 가문으로 시집간 공주의 딸이 낳은 아들이 영국 왕위를 계승했을 때 국왕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바가 있다. 이렇듯 외국인이 권력을 쥐는 것을 막고 왕조를 보존하기 위해 영국 메리 2세, 스페인 이사벨 2세처럼 국내의 왕족, 즉 같은 가문의 친척들과 여왕을 결혼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 역사에서는 가끔 엄청나게 먼 촌수에서 계승자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거의 대부분 살리카법 때문이다. 프랑스 왕국에서도 나바라 왕국의 헨리케 3세가 부계로는 21촌이지만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부르봉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바이에른 선제후국에서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비텔스바흐 가문의 먼 부계 친척인 팔츠 선제후국의 카를 4세 테오도어가 영지를 이어받았다. 룩셈부르크는 한술 더 떠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의 37촌인 전 나사우 공국의 공작 아돌프가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즉위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5세'에서 이 프랑스의 살리카법의 적용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In terram Salicam mulieres ne succedant:'

살리카 영지 상속 법전에 따르면

'No woman shall succeed in Salique land:'

여인은 살리카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

Which Salique land the French unjustly gloze to be the realm of France, and Pharamond, the founder of this law and female bar.

프랑스인들은 이 살리카 영지를 프랑스 왕국으로 자칭하고, 파라몬드, 이 법을 만든 자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Yet their own authors faithfully affirm that the land Salique is in Germany, between the floods of Sala and of Elbe;

허나, 법전의 저자들도 살리카 영지는 독일에 있고, 그 땅은 살라와 엘베강 사이에 있다라고 서술한다.

Where Charles the Great, having subdued the Saxons, there left behind and settled certain French;

카롤루스 대제가 작센족을 정벌하고, 프랑스인들을 정착시킬 때

Who, holding in disdain the German women for some dishonest manners of their life, establish'd then this law;

독일 여인들의 불결한 생활을 혐오하였으므로, 이 법을 적용했다.

To wit, no female Should be inheritrix in Salique land:

서문으로, 여성은 살리카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

Which Salique, as I said, 'twixt Elbe and Sala, is at this day in Germany call'd Meisen.

그 영지라 하면, 전에 말했듯이, 엘베강과 잘레강 사이에 있다. 현재는 독일의 마이센 지방이라 불린다.

Then doth it well appear that Salique law was not devised for the realm of France:

그러하면, 이 살리카법은 프랑스 왕국 안의 적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Nor did the French possess the Salique land until four hundred one and twenty years after defunction of King Pharamond, idly supposed the founder of this law;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이 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파라몬드 왕의 죽음으로부터 421년 후에나 이 살리카 영지를 점령했다.

Who died within the year of our redemption four hundred twenty-six;

그 왕은 426년 죽음을 맞았다.

And Charles the Great subdued the Saxons, and did seat the French beyond the river Sala, in the year eight hundred five.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가 작센족을 지배하고 프랑스인들을 살라강 너머로 이주시킨 것은 805년이었다.

Besides, their writers say, King Pepin, which deposed Childeric, did, as heir general, being descended of Blithild, which was daughter to King Clothair, make claim and title to the crown of France.

게다가 그쪽 서술자들에 의하면 피핀 왕이 힐드리히를 폐위시키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때, 그는 클로타르 왕의 딸, 비틸드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Hugh Capet also, who usurped the crown of Charles the duke of Lorraine, sole heir male of the true line and stock of Charles the Great, to find his title with some shows of truth, 'through, in pure truth, it was corrupt and naught, convey'd himself as heir to the Lady Lingare, daughter to Charlemain, who was the son to Lewis the emperor, and Lewis the son of Charles the Great.

위그 카페가 카롤루스 대제의 진정한 남계 후손, 로렌의 공작 샤를의 왕위를 찬탈할 때, 그는 무의미하고 부정하지만, 진실을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샤를메인의 딸 린가레의 후손, 즉 황제 루트비히의 외손,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자란 것이다.

Also King Lewis the Tenth, who was sole heir to the usurper Capet, could not keep quiet in his conscience, wearing the crown of France, till satisfied that fair Queen Isabel, his grandmother, was lineal of the Lady Ermengare, daughter to Charles the foresaid duke of Lorraine:

또한 그 찬탈자 카페의 후손, 루이 10세는, 그의 할머니 이사벨이 로렌의 샤를의 딸 에르만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편하게 있지 못했다.

By the which marriage the line of Charles the Great was re-united to the crown of France.

바로 이 결혼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핏줄이 프랑스 왕위와 다시 합쳐졌다.

So that, as clear as is the summer's sun.

그러므로, 아침 태양처럼 분명한

King Pepin's title and Hugh Capet's claim, King Lewis his satisfaction, all appear to hold in right and title of the female:

피핀 왕의 작위와 위그 카페의 명분, 루이 왕의 후손임을, 모두 정당하게 여인의 작위를 인정한다.

 

 

 

 

비교: 동아시아의 종법제(宗法制)

동아시아에서는 일명 '종법제'라는 원칙이 있다. 역대 중화제국과 그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일본·베트남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부자 상속의 원칙이 같고, 고대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여성의 왕위 계승 자체를 인정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유럽의 살리카법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유럽의 살리카법은 종법제와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남계혈족 한정

종법제에서는 가문이 아니라 남계혈족을 더 중시한다는 점이 있다. 살리카법으로는 사위나 외손자가 계승을 할 수도 있었지만, 종법제에서는 부계 혈통이 일치해야만 계승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아들이 없으면 딸이 아니라 동생이나 조카가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 살리카법에서는 딸의 남편이나 아들이 간접적으로 상속을 받을 수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아예 상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인식과 순위

계승에 대한 인식도 좀 달랐는데, 살리카법에서의 상속이 '권리'로 취급되었다면, 종법제에서의 계승은 '의무'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살리카법에서는 물려받는 당사자가 '상속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지만, 종법제에서는 원칙적으로 거부권이 없어서 순서를 무시하고 물려줄 수도 받아야 하는데 안 받을 수도 없었다. 후손으로서 조상의 보위를 잇는 것은 당연하다는 관념으로서, 엄밀히 말하면 군주의 보위는 본인이 아니라 창업군주의 소유로 취급했다. 한나라 애제가 총신인 동현에게 농담삼아 선양한다고 했을 때 대신인 왕굉이 "천하는 태조 황제의 것이지,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종묘를 계승한 몸으로서 자손에게 이를 물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라는 직언을 남긴 사례나, 동진의 간문제가 재상 왕탄지에게 후사를 맡기면서 어린 아들의 행실이 좋지 않을 시 찬탈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자 왕탄지 본인이 기겁해 "나라는 선제와 원제의 나라이거늘 어찌 폐하께서 오로지 하려 하십니까?"라는 발언을 하며 조서를 찢으며 거부한 사례를 통해 이러한 관념을 알 수 있다.

또한, 순위에 관해서도 차이가 있었다. 두 법제 모두 적장자를 우선시하는 것은 동일하였다. 대체로 먼저 장자에게, 장자가 죽고 없으면 그 장자에게, 장자에게 자손이 없으면 차자가, …, 아들이 없으면 동생(이나 그 아들에게), …, 형제도 없으면 4촌에게 넘어가는 식이었으나, 종법제에서는 숙부나 종조부가 이어받는 역상속은 철저하게 막혀있었다. 더 나아가 형제나 4촌 형제가 이어받는 것까지 막은 사례도 좀 있었다. 왜냐면 제사 문제 때문에 계승받는 윗사람이 계승하는 아랫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서 계승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관계의 영향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무조건 일부일처를 해야만 했으므로 본처를 제외하면 다른 여자들은 전부 정부(情婦)로 취급되었으며, 살리카법에서는 본처의 자식인 친생자만이 계승권을 오롯이 인정받고 사생아는 계승권이 부인되거나 제한적으로 승인되었다.

반면 종법제에서는 적자들의 뒷순서일 뿐 서자와 얼자, 심지어 사생아에게도 엄연히 계승 자격이 있었다. 물론 본처와 첩은 공식적으로 지위가 다르니만큼, 이런 경우 대부분 본처의 양자(봉사손)로 승적(承嫡)하는 형태였다.

 

대종과 소종의 구분

마지막으로 종법제에서는 적장자로서 계속 대를 잇는 대종과 달리 다른 아들들은 한 급 낮은 소종이 되었으며, 그 결과 대를 거듭할수록 방계의 격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부모의 신분은 자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장자상속제가 정착한 경우에조차 신분만은 그대로 물려주었다. 후대로 가면서 봉건제도 해체되고 영지도 재산도 없는 귀족들이 많아졌으나 이들도 여전히 법적 신분은 귀족이라서 알량한 특권이나마 계속 누렸고, 왕족의 경우 따로 작위와 영지를 받고 분가하는 게 아닌 한 여전히 왕족이었으며, 분가 후에도 방계로서 왕위계승권 자체는 보유하였다. 유럽 내에서 가장 비슷한 방식을 보인 것은 잉글랜드였는데, 이쪽도 왕족은 계속 왕족이었고, 귀족들은 작위보유자 및 계승자만 원래 신분을 유지하였지만, 차자 이하는 아버지 신분이 공작이든 백작이든 남작이든 간에 전부 동일하게 젠트리가 되었다는 점이 종법제와는 다르다.

 

 

 

폐지

 

유럽에서는 20세기 들어 양성평등 사상의 확산과 함께 살리카법은 점점 폐지된다. 현재 재위 중인 유럽 왕가들 가운데는 리히텐슈타인 공가만이 살리카법을 꿋꿋이 유지 중이다.

 

20세기 후반 들어 왕실의 살리카법을 폐지한 나라는 다음과 같다. 준살리카법이었던 왕실은 # 표시한다.

 

그리스 왕국: 1952년 아들 우선 상속법으로 이행

덴마크: 1953년 아들 우선 상속법으로 이행하였다가 2008년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한다.

노르웨이: 1971년 아들 우선 상속법으로 이행하였다가 1990년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한다.

스웨덴: 1980년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

벨기에: 1991년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

룩셈부르크#: 2011년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

 

재위 중인 현대의 군주 가문들은 양성평등이라는 대의를 거스르기도 어렵고 의회와 국민들의 눈치도 봐야 하며, 왕좌라는 '확실한 인증장치'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를 통한 모계 승계가 이루어져도 정체성 유지에 지장이 없다. 예전처럼 왕족끼리 결혼하느라 왕권이 현대 국가의 국경을 넘어다닐 일도 없는데다 살리카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군주가 직접 병력을 데리고 참전할 것도 아니니. 오히려 영지나 작위를 잃은 옛 왕가나 옛날 귀족 집안이 악착같이 살리카법을 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살리카법 같은 전통 수호를 통하지 않으면 집안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안들이 가문 계승법을 뜯어고쳐서 절대적 맏이 상속제나 아들 우선 장자상속제로 바꾸고 있다면, 아마 손이 귀해져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황실의 계승법은 살리카법과는 다르다. 살리카법은 토지와 작위 혈통을 이어서 규정하는 법이지만 일본 황실은 봉토에 귀속되는 가문이 아니다. 아마테라스의 직계혈통이라는 명분으로 가주가 신토의 최고제사장을 독점하는 가문이므로 천황은 반드시 아마테라스의 가문이어야한다. 따라서 현행 황실전범으로는 아예 여자천황이 불가능하지만 남계의 씨가 마른다면 이론적으로는 여계천황이 가능하고 전례도 있다. 하지만 결혼대상자는 반드시 황족이어야하므로 숙부와 근친혼을 해야하거나 혹은 평생 미혼이어야한다. 일본의 관념으로는 결혼하면 여자는 남자의 가문으로 이적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황녀는 결혼과 동시에 가문의 이적이 발생하므로 황녀 지위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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