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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기원, 고구려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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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 건국설화인 朱蒙說話는001) 백제나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복잡할 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전 주몽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廣開土王陵碑>의 서두 부분이고,<牟頭婁墓誌>와≪魏書≫고구려전의 주몽설화도 5세기경의 기록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나≪三國遺事≫·<東明王篇> 등 국내문헌은 5세기경의 기록에 후대적 윤색이 가해진 것을 전하고 있다.002)  

 주몽설화는 부여의 東明說話에 바탕을 두고,003) 4세기 후반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건국설화로 확립되었다.004) 그리하여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한 주몽설화의 경우, 주몽의 出自를 비롯하여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전승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 줄거리는 대체로 비슷하다.005) 이들은 대체로 “天帝와 水神(河伯)의 혈통을 이어받은 朱蒙이 하늘신과 地母神으로부터 부여받은 神的 權能을 가지고 여러 곤경을 극복하고, 卒本地域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구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고구려왕들의 통치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주몽의 신적 권능 또는 주몽집단의 독자적 힘으로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 건국설화 서두 부분의 주몽설화는 매우 주목된다.  

㉠ 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에 도착한 鄒牟(朱蒙)는 後嗣가 없던 졸본부여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즉위년조 서두 축약).006) 

㉡ 백제 시조 沸流王의 아버지 優台는 북부여왕 解扶婁의 庶孫이고 어머니 召西奴는 졸본인 延陁勃의 딸이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은 뒤 과부로 지냈다. 扶餘에서 남하한 주몽이 건국한 뒤 소서노를 妃로 맞아들여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비류와 온조를 아들처럼 대하다가, 부여에서 孺留가 내려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위와 같음). 

 위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방면에서 남하하기 이전부터 졸본지역에는 卒本扶餘나 召西奴集團 등 선주토착집단이 있었고, 주몽은 이들과 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고 한다.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일찍부터 토착세력의 성장, 이주민집단의 유입, 토착세력과 이주민집단의 결합이라는 정치적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주몽의 신적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건국된 것이다.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하는 주몽설화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시조의 신적 권능으로 신비화하였지만,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주체는 주몽집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압록강 중류일대 각지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선주토착집단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중류일대 토착집단의 성장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지역은 서북으로 요동지역, 동으로 동해안으로 통하는 동서 교통로상의 중간지점이다. 그리고 서남으로 황해, 남쪽으로 대동강·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 북쪽으로 松花江유역의 대평원지대나 遼河 상류방면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고구려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이 지역은 흔히 “큰 산과 깊은 골짜기는 많고 넓은 들은 없어” 고구려인들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하지만,007) 압록강과 그 지류 禿魯江·慈城江·渾江 유역에는 충적지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특히 國內城이 있는 通溝地域이나 五女山城이 위치한 桓仁縣 소재지는 상당히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기후는 만주일대에서 가장 온난하며 강수량도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한다.008) 

 이러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청동기시대 이래 이 지역 주민들은 강 연안의 충적대지를 배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가축기르기·사냥·물고기잡이 등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009) 신석기시대 유적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나010) 청동기시대 주민과 동일 계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바닥이 편평한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돌도끼나 돌괭이 등의 농공구, 그물추, 돌활촉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생활양식은 청동기시대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두께가 얇은 돌괭이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신석기시대에도 농업의 비중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토기와 석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혼강 지류인 大葦沙河 연안의 二道崴子유적처럼011) 한곳에서 대량으로 토기와 석기를 제작하게 된다. 다양한 용도의 석기를 대량 생산함으로써 농업이 발전하였고 주민집단 상호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 청동기문화는 遼東∼靑川江의 古朝鮮文化나 송화강유역의 西團山文化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시대적 지역적 특성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토기의 모양새에 있어 양 지역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꼭지달린 바리모양 단지는 서단산자형 토기의 그것과 비슷하며,012) 고조선지역의 美松里型 土器가 중강군 토성리와 通化市 王八悖子에서 발견되었다.013) 이 지역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고조선 주민이나 부여를 이룬 송화강유역의 주민과 활발히 교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4·3세기경 중국 戰國·秦·漢 교체기에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전국 燕과 대립하다가 기원전 3세기초 연의 공격을 받고 요동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014) 이에 따라 전기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세형동검문화로 변화하였고, 철기문화가 요동과 한반도 서북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유이민 파동이 요동과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밀려왔다.015)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이러한 정세변화는 압록강 중류일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丹東地區와 桓仁·集安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세형동검 과도기 형식의 銅劍이나016) 철제농공구와 무기류를 공반하는 明刀錢유적을017)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 주민집단은 이러한 정세변화와 유이민 파동의 영향 아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독특한 묘제인 積石墓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적석묘의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는 압록강 중·상류와 대동강·청천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초기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018) 적석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매우 다양하지만,019) 단동지구와 집안·환인의 청동단검묘와 연결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020) 그 중 集安 五道嶺溝門의 청동단검묘는 계단적석묘로 보고된 이래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021) 일반적으로 적석묘에서는 청동제 장식품과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철제 농기구·무기·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었고,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에서는 전국·진·한 시기의 화폐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석묘는 대체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 과도기의 청동단검묘에서 기원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전국말∼진한초(기원전 3세기 중엽∼기원전 2세기초)로 추정된다.022) 

 또한 독로강과 압록강 연안에는 적석묘 축조집단과 관련된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독로강변의 노남리유적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기철기시대층에서 冶鐵址와 온돌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었고 도끼·손칼·활촉·낚시 등의 철기와 함께 明刀錢·五銖錢이 출토되었다. 압록강변의 토성리에서도 신석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집자리가 발견되었다.023)

 이처럼 이 지역 주민집단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적석묘를 축조하면서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문헌상 늦어도 기원전 2세기 후반경에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024)

 종래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관련하여 濊·貊·穢貊 등의 명칭을 주목하여 왔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정설이 없는 형편이고, 특히 고구려의 종족기원에 대해서는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모두 제시되었다.025) 그러므로 현재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고 대체적인 상황만 파악할 수 있다.

 예·맥·예맥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고구려를 ‘貊’이라 표현한 것은 기원 이후의 중국사서에 집중되어 있다.≪漢書≫王莽傳에서 ‘高句驪侯 騶’의 집단을 ‘貊’ 혹은 ‘穢貊’이라 칭한 이래,≪三國志≫·≪後漢書≫등에서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퇴축을 ‘夷貊의 공격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여026) 句驪와 貊을 관련시키고 있다.≪三國志≫에는 “大水 유역에 나라를 세운 句麗는 大水貊, 서안평으로 흘러드는 小水에 사는 句麗別種은 小水貊”이라 하여027) 고구려를 명확하게 貊族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북방의 돌궐인도 고구려를 ‘매크리(Mökli)’ 곧 貊句麗라고 불렀다.028) 이처럼 기원 이후에 저술된 대다수 중국문헌이나 북방 유목민은 고구려를 貊族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貊’은 원래 중국북방에 거주하던 종족에 대한 명칭이었다. 이에 비해 발해만 동부지역은 先秦 시기에 대체로 ‘夷穢之鄕’ 곧 穢族의 거주지역으로 인식되었다.029) 예족 가운데 朝鮮이 가장 일찍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030) 그 뒤 夫餘·眞番·臨屯 등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史記≫에서는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치세력과 주민집단을 통칭할 때 ‘穢貊’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031) 원래 중국의 북방종족에 대한 명칭이던 貊이≪史記≫ 이후로 ‘예’라는 명칭과 결합하여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던 예족 일반에 대한 표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032)

 따라서 고고학 및 문헌자료상 중국 북방의 맥족과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을 직접 연결시킬 수 없는 한, 고구려가 처음부터 예족 혹은 예맥족으로 불린 주민집단과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맥족’이었다고 볼 수 없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원래 예족 혹은 예맥족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2세기초경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전 2세기 후반경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 주민집단은 처음에는 ‘句驪’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高句麗라는 국가명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貊’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렸던 것이다. 

 고구려를 형성한 주민집단이 예맥족에서 분화하였다는 것은 3세기경 고구려의 언어와 법속이 부여·옥저·동예와 비슷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033) 그러므로 이 주민집단의 사회상태는 원래 예맥족의 일원인 동예나 옥저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3세기경 동예와 옥저는 각 邑落 長帥가 개별적으로 邑落民을 통제하였고, 동예는 生口·牛·馬 등의 부가 축적되었으나 ‘山川이 각 읍락별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를 받았다. 이는 생산력 발달이 상대적으로 낮고, 고조선 이래 한군현과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 원래의 사회상태가 존속된 결과이다. 고구려를 형성한 주민집단 역시 처음에는 이와 비슷하거나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가 더 강한 상태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성립
(1) 나집단의 성장
 이상과 같이 압록강 중류지역에는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초경 사이에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주민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문헌자료상 기원전 2세기 후반경에는 ‘薉君南閭’·‘句驪’ 등과 같은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예군남려’·‘구려’를 구성한 지역정치집단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 중엽경에 성장하였다고 파악된다. 이 지역정치집단은 이후 여러 단계의 통합과 복속을 거쳐≪三國史記≫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那’를 이루었다. 那는 음이 奴·內와 통하고 川·讓으로도 기록되는데, 地 또는 川·川邊의 평야라는 뜻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집단을 가리킨다.034)≪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나의 용례로 태조왕 20년(72)과 22년 고구려에 통합된 藻那와 朱那를 비롯하여 沸流那部·桓那部·貫那部·椽那部 등이 나온다.035) 비류나부 등의 ‘那部’가 중앙국가권력의 통제를 받는 나라는 의미에서 部를 冠稱한 반면, 조나와 주나는 중앙국가권력의 통제를 받기 이전의 독립적인 단위정치체라는 의미에서 부를 관칭하지 않고 있다. 또한 주나와 조나는 정복되기 이전에는 왕과 왕자로 상징되는 독자적 운동력을 가졌고 상당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지역정치집단을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那國’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용례는 없지만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이전의 那는 ‘那國 이전 단계의 지역정치집단’이라는 의미에서 ‘那集團’이라 할 수 있다.036) 

 나집단은 철기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장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보급된 철기는 기존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 도끼와 낫은 농업생산력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쇠도끼는 무기의 성격도 지녔지만 개간을 위한 벌목에도 많이 사용되어 토지이용효율을 향상시켰고,037) 쇠낫은 수확작업의 효율을 제고하였다. 특히 선철제 주조도끼의 위약성을 보완한 강철제 도끼가 보급되면서 개간작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038) 그런데 대규모 개간과 일시적인 파종·수확작업은 상당한 규모의 경작지 점유, 노동도구의 집적, 노동력의 동원을 필요로 한다. 농업생산력 발달은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의 약화와 사회경제적 분화를 초래하여 계층화의 진전과 세력집단의 형성을 촉진하였고, 그 결과 농업생산력은 더욱 급속히 발달하였다.  

 기단적석묘 축조집단의 등장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적석묘는 대체로 무기단에서 기단으로 발전하면서 축조재료도 강돌 등 자연석에서 다듬은 돌(切石)로 변화한다.039) 그런데 기단적석묘는 축조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채석·가공·운반·축조를 위한 노동력의 동원을 필요로 한다.040) 기단적석묘는 무기단적석묘 축조지역 가운데 충적평원이 비교적 넓게 발달된 지역에 자리잡고 있고, 철제 농공구도 주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다. 이 지역은 개간 가능한 대지가 넓을 뿐 아니라 生口·牛·馬 등 동산적 富도 상대적으로 풍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철제농공구의 보급에 따라 사회경제적 분화가 상대적으로 빨리 진전되었고, 특정세력이 철제농공구를 다량 집적하고 넓은 대지를 점유하여 읍락민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면서 우세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읍락민을 통제하는 한편 주변의 후진적인 지역집단을 장악하여 지역정치집단 곧 나국의 모체인 나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엽경 衛滿朝鮮의 압력과 함께 漢의 영향력이 압록강 중류일대로 뻗어왔다. 특히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초 眞番과 臨屯 등을 복속시켜 대세력을 형성한 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주변 집단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과의 교통을 통제하였다.041) 이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유력집단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는데, 기원전 128년 한에 투항한 薉君南閭집단은 이를 보여준다.042) 南閭의 투항을 받은 한이 滄海郡을 설치하고 도로개설에 나섰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예군남려의 집단은 요동군에서 동해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분포하였다. 28만 명이라는 집단의 규모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제1현도군의 인구가 약 4만5천 호·22만 구였고, 3세기경에도 고구려 3만 호, 동옥저 5천 호, 동예 2만 호였던 것으로 미루어 예군남려의 집단은 이들 전체를 포괄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예군남려의 집단은 강력한 통치조직을 갖춘 국가체라기 보다는 각지의 세력집단이 외압에 대응하여 완만하게 결집한 연맹체로 파악된다.043) 다만 각 지역별 집단규모로 보아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연맹체의 중심지역인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은 여전히 끊임없는 교류와 상쟁을 진행하였다. 특히 기원전 126년 한의 창해군 설치 계획이 좌절된 뒤044) 나집단들은 대외적 결속보다 내적인 통합과 복속을 더욱 활발히 벌여 주변 요새지마다 ‘溝漊’나 ‘忽’이라고 불린 성을 축조하였는데,045) 여기에서 ‘句驪’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은 대외적으로 예맥 혹은 예라는 일반적 명칭이 아니라 ‘구려’라는 특정한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진번군·임둔군을 설치한 다음 기원전 107년에는 압록강 중류일대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는데, 현도군의 여러 현 가운데 高句驪縣이 보인다.046) 이제 압록강 중류일대는 대외적으로 구려 내지 고구려라는 단일 정치사회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2) 나부체제의 성립
 현도군이 설치되면서 압록강 중류지역은 漢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갔다. 최근 漢代 土城址가 압록강 중류일대 곳곳에서 발견되었는데, 현도군이나 속현의 治所로 추정된다.047) 토성지는 대체로 주변에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진 교통로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에는 현도군 설치 이전부터 유력한 那집단이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은 유력한 나집단이 성장한 교통로상의 요지에 군현의 치소를 설치하여 토착집단을 통제하였던 것이다. 

 현도군 설치 이후 토착사회의 변화상은 전하지 않지만, 낙랑군의 예를 통해 대체적 양상을 추론할 수 있다. 고조선은 원래 法禁이 8조에 불과하였고 문도 잠그지 않고 살았는데, 군현 설치 이후 한의 상인과 군현의 관리가 진출하면서 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다.048) 또한 武帝대에 설치된 西南夷의 한군현들은 軍役과 租賦를 부담하였는데, 낙랑군의 토착민 역시 이러한 부담을 짊어졌을 것이다.049) 그리하여 한군현의 일방적인 수탈로 토착사회에는 급격한 사회변화가 일어났다. 현도군 지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현도군 설치 이후 한군현과 결탁한 일부 那集團은 한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다른 토착집단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050) 대다수 토착민은 한군현의 일방적인 수탈과 지배에 강하게 반발하였을 것이다.051)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다시 유력집단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연맹체를 형성하고, 마침내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치소를 구려 서북의 蘇子河 방면으로 물리쳐 한군현의 직접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났다.052) 

 그런데 현도군은 夷貊 곧 句驪의 무력침공을 받고 쫓겨났다. 현도군을 퇴축시킬 무렵 압록강 중류지역에는 이전의 예군남려집단보다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연맹체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나집단들이 위만조선의 압력이나 한군현의 지배를 받으면서 결속력을 키워온 결과이며, 우세한 나집단이 주변 지역집단을 복속·통합하여 확대된 지역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곧 나집단은 현도군 퇴축을 전후하여 보다 확대된 정치집단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태조왕대의 朱那나 藻那와 같이 王이라는 정치적 수장에 의해 통솔되고 상당한 무장력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치집단은 정치적 수장이 있고 무장력을 갖춘 독자적 정치세력이라는 의미에서 ‘那國’이라 할 수 있다.053) 따라서 이 시기의 연맹체는 나국의 결집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那國聯盟體’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消奴集團이 나국연맹체의 맹주권을 장악하였다.054) 소노집단의 본거지로 비정되는 桓仁일대는 농경과 군사방어에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055) 또 환인지역에서는 大甸子 청동단검묘를 비롯하여 청동기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며, 渾江과 그 지류 유역에는 초기의 적석묘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056) 환인일대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다수의 주민집단이 거주하였고,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라 나집단이 곳곳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들 사이의 통합과 복속으로 소노집단이 등장하여 나국연맹체의 맹주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소노집단은 나국연맹체의 구성집단뿐 아니라 환인일대의 지역집단도 강력하게 장악하지 못하였다. 이에 漢은 연맹체의 맹주인 고구려왕에게 북·피리·악공을 내려주어 대표성을 인정하면서, 각 집단에게 朝服과 衣幘을 주면서 개별적 관계를 맺는 등 다양한 형태로 영향력을 미쳐왔다.057) 

 이처럼 현도군 퇴축 이후 이 지역의 주민집단은 소노집단을 중심으로 나국연맹체를 이루었지만, 각 집단은 현도군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는 분립적 상태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각 집단간 통합과 복속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집단간 통합·복속은 외압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우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이 무렵 부여계 이주민집단의 유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백제 건국설화의 서두에서 보듯이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이주민집단의 유입 및 토착세력과의 결합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058) 朱蒙集團은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059) 주몽집단은 沸流水(渾江)의 卒本지역에 정착하여 召西奴·毛屯谷 등 토착집단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대함으로써 소노집단과 맹주권을 놓고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다. 주몽설화 가운데 주몽과 沸流國王 松壤의 쟁투기사는 이를 설화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松壤의 ‘壤’은 那·奴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송양은 ‘松의 땅’ 곧 ‘松那·松奴’로서 消奴部를 가르킨다.060) 이처럼 주몽집단은 토착집단과의 연합을 통해 소노집단을 누르고 나국연맹체의 맹주로 등장하였다.061) 

 새로운 연맹주로 등장한 주몽집단 곧 桂婁集團은 강력한 군사 조직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력집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환인일대는 소자하 방면의 현도군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군사방어뿐 아니라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을 제어하기에 불리하였다. 이에 계루집단은 농경·어로·수렵에 적합한 생산력 기반과 군사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춘 國內地域으로 천도하였다.062) 계루집단은 국내천도 이후 谷·川 등 규모가 큰 집단과 연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原·澤·野로 표기되는 개별 나집단을 賜姓 등의 방법으로 직접 편제하고,063) 나국 이상의 독자적 정치세력을 해체시켜 강력한 세력기반을 확보하였다. 계루집단은 이를 바탕으로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에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한편 현도군 퇴축 이후 卒本과 국내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나국이 형성되고 이들간의 통합과 복속으로 보다 큰 단위정치체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통합·복속의 과정을 거쳐 이 지역의 주민집단은 국내지역의 계루집단과 졸본(沸流水)지역의 소노집단을 비롯하여 그 외 몇몇 큰 단위정치체로 통합·복속되었다.064) 그렇지만 계루집단을 제외한 단위정치체는 내부의 나국들이 여전히 상당한 독자성을 지니고 있었다. 현재의 적석묘 분포상황으로 보아 계루집단·소노집단 이외의 단위정치체는 대체로 禿魯江 아래와 운봉댐 위의 압록강 유역과 그 지류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지역에는 곳곳에 기단적석묘가 분포되어 있어 나집단·나국으로 성장한 집단이 각 지역별로 몇몇 상정되지만 이들간의 우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나국간의 통합으로 형성된 단위정치체 내부에는 여전히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루집단이 우월한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단위정치체를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제하였다. 계루집단은 新의 王莽이 고구려 군대를 동원하여 胡를 정벌하려던 계략을 물리친 뒤,065) 현도군의 高句麗縣을 공격하여066) 한의 분리통제책을 저지시켜 각 단위정치체의 대외적인 운동력을 통제하여 일원화하였다.

① 한나라 때에 북·피리·악공을 내렸고, 항상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高句麗令이 名籍을 관장하였다. ② 뒤에 차츰 교만해져 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 곳에 두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 갔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라고 부른다. 구루는 句麗의 말로 성이라는 뜻이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①은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의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②는 한군현의 분리통제책이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각 정치세력이 한군현과 개별적으로 맺어왔던 독자적인 대외교섭권은 책구루라는 단일창구로 일원화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권력의 성립을 의미한다.067) 1세기초 왕망의 계략을 분쇄한 것과 32년 한에 사신을 보내 ‘王’을 칭하였다는 기록으로068) 보아 계루집단은 1세기 전반경부터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국가권력으로 등장하였던 것 같다. 태조왕 20년(72)과 22년 藻那와 朱那 정벌은 이러한 과정이 계루부왕권과 하부단위정치체의 결합으로 완성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태조대왕 혹은 國祖王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이 왕대에 고구려가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국가로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069) 1세기말∼2세기초 한군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은 이러한 국가적 성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주민집단은 이제 계루부와 그의 통제를 받는 몇몇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제되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椽那部·貫那部·沸流那部·桓那部 등 4개의 那部는≪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의 5族 가운데 왕실인 桂婁部를 제외한 絶奴部·灌奴部·消奴部·順奴部와 각각 대응된다.070) 那部나 奴部는 동일한 정치적 실체로 계루부와 대비되는 존재이다. 태조대왕 20년과 22년 조나와 주나가 고구려에 통합된 이후 ‘那’라는 명칭은 이들 4개에만 사용되었다. 나부는 자체의 관원을 두었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지니고 대외정복에 참여하였으나, 독자적인 대외운동력은 상실하여 계루부의 통제를 받았다. 각 ‘那部’는 자치권을 지닌 동시에 계루부의 통제를 받는 ‘하부단위정치체’였고, 계루부는 이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으로 성장하였지만 나부를 통하여 통치력을 관철하는 한계를 지녔다. 계루부와 4개의 나부는 고구려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로서 이 지역 전체에 통치력을 행사하는 두 축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의 국가체제는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那部統治體制’,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의미에서 ‘那部體制社會’라 할 수 있다.071) 

 이처럼 고구려는 기원전 3세기∼2세기초 이래 여러 단계를 거쳐 국가적 성장을 이루었다. 고구려는 철기보급 이래 나집단의 성장과 통합이라는 긴 연속선상에서 국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구려의 존속기간에 대하여≪三國史記≫고구려본기의 705년설과<高慈墓誌銘>의 708년설을 비롯하여 800년설이나 900년설 등이 전하는 것은072) 이러한 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의 성립시기는 관점에 따라 주몽집단의 등장이나 나부체제의 성립뿐 아니라 현도군의 퇴축과 나국연맹체의 형성, 예군남려집단이나 句驪의 등장, 나집단의 성장 등 여러 시점으로 파악될 수 있다.073) 곧 고구려는 전체적으로 볼 때 독자적인 주민집단 형성 이후 연속적인 역사과정을 밟아왔으므로 계루부왕실 등장 이전도 고구려의 역사로 포괄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800년유국설이나 900년유국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001) 고구려 건국설화를 東明說話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朱蒙과 東明은 별개의 인물이고 고구려 건국설화와 부여 건국설화는 성립배경이 다르므로 이 글에서는 양자를 ‘朱蒙說話’와 ‘東明說話’로 구분한다.
李弘稙,<高句麗의 興起>(≪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84∼99쪽.
002) 특히≪三國史記≫高句麗本紀 및<東明王篇>의 주몽설화에 나오는 북부여의 解慕漱說話와 동부여의 金蛙說話는 5세기 이후에 첨가되었다고 이해된다(島田好,<東夫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靑丘學叢≫16, 1934, 91∼94쪽).
003) ≪梁書≫고구려전과≪隋書≫백제전 등은 동명설화와 주몽설화를 혼동하였다. 또 양자를 모두 고구려 건국설화로 보는 설, 동명설화는 주몽설화의 誤傳이라는 견해도 있다(리준영,<고구려의 국가기원에 대하여>,≪력사과학≫1964-4 및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004)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Ⅹ, 全南大, 1981).
徐永大,≪한국고대 神觀念의 社會的 의미≫(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213∼214쪽.
005) 5세기의 기록은 (북)부여출자설이며, 국내문헌은 동부여출자설이다.
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3), 38∼43쪽.
006)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 割註에도 나옴.
007)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008) 吉林省文物志編委會,≪集安縣文物志≫(長春 ; 1983), 1∼4쪽.
009) 리병선,<압록강 중·상류 및 송화강 유역 청동기시대 주민의 경제생활>(≪고고 민속≫1966-1), 8∼15쪽.
010) 陳大爲,<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1960-1).
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吉林通化市江口村和東江村考古發掘簡報>(≪考古≫1960-7).
陳相偉,<吉林集安渾江中游的三處新石器時代遺址>(≪考古≫1965-1).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集安縣文物管理所, <吉林集安大朱仙溝新石器時代遺址>(≪考古≫1977-6).
정찬영,≪압록강·독로강유역 고구려 유적발굴보고≫(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3).
011) 吉林省文物志編委會, 앞의 책, 32∼37쪽.
012) 리병선,<압록강류역의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들과 그 분포정형>(≪고고민속≫1963-1), 25∼36쪽.
013) 宋鎬晸,<遼東地域 靑銅器文化와 美松里型土器에 관한 考察>(≪韓國史論≫24, 서울大 國史學科, 1991), 43∼46쪽.
014) 盧泰敦,<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관한 연구>(≪韓國史論≫23, 1990), 31∼54쪽.
015) ≪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016) 桓仁 大甸子 동검은 명도전 및 쇠칼과 함께 석곽묘에서 출토되었고, 丹東地區의 동검은 돌무지 중의 석관묘에서 발견되었다. 集安 五道嶺溝門의 동검은 계단적석묘에서 다량의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曾昭藏·齊俊,<桓仁大甸子發現靑銅短劍墓>(≪遼寧文物≫1981-1).
許玉林·王連春,<丹東地區出土的靑銅短劍>(≪考古≫1984-8).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發現靑銅短劍墓>(≪考古≫1981-5).
017) 池炳穆,<高句麗 成立過程考>(≪白山學報≫34, 1987), 57∼60쪽.
손량구,<료동지방과 서북조선에서 드러난 명도전에 대하여>(≪고고민속론문집≫12, 1990).
田村晃一,<樂浪郡設置前夜の考古學>(≪東アジア世界史の展開≫, 汲古書院, 1994).
018) 余昊奎,<高句麗 초기 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韓國史論≫27, 서울大 國史學科, 1992), 31∼34쪽의 도표와 지도.
田中俊明·東潮,<積石塚の成立と發展>(≪高句麗の歷史と遺跡≫, 東京 ; 中央公論社, 1995).
019) 정찬영,<기원 4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5, 1973), 47∼54쪽.
020) 박진욱,<초기 좁은놋단검문화의 내용과 발전과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87-1), 6∼9쪽.
田村晃一,<高句麗の積石墓>(≪東北アジアの考古學≫, 六興出版, 1990), 151∼155쪽.
021)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근거로 고구려에 선행한 노예제국가인 구려국이 기원전 5∼3세기경에 존재하였다고 상정하기도 한다(손영종,≪고구려사 Ⅰ≫,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13∼20쪽). 한편 이 무덤은 내부구조가 명확하지 않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고, 계단적석묘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魏存誠,<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1987-3, 328쪽).
022) 적석묘에 대한 대표적 견해는 林永珍,<高句麗 考古學>(≪國史館論叢≫33, 國史編纂委員會, 1992), 110∼115쪽에 소개되어 있으며, 적석묘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주영헌,<고구려 적석무덤에 관한 연구>(≪문화유산≫1962-2).
정찬영, 앞의 글(1973).
李殿福,<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1980-2).
魏存誠, 위의 글.
田村晃一,<高句麗積石塚の構造と分類について>(≪考古學雜誌≫62-2, 1982).
023) 정찬영, 앞의 책(1983).
024) 이 책 제2장 1절 참조.
025) 盧泰敦,<高句麗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東方學志≫52, 1986), 195∼196쪽.
026)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東沃沮.
027)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028) 盧泰敦,<高句麗·渤海人과 內陸아시아 주민과의 교섭에 관한 일고찰>(≪大東文化硏究≫23, 1989), 239∼243쪽.
029) ≪呂氏春秋≫恃君覽篇.
030) ≪管子≫권 23, 輕重甲篇 및 揆度篇.
031) ≪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032) 三品彰英,<濊貊族小考>(≪朝鮮學報≫4, 1953).
황철산,<예맥족에 대하여>(≪고고민속≫1963-1·2).
033)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濊·東沃沮

034) 三品彰英,<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朝鮮學報≫6, 1954), 16∼24쪽.
035) 余昊奎, <高句麗 초기 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韓國史論≫27, 서울大 國史學科, 1992), 8·9쪽의 도표.
036) 余昊奎, 위의 글, 11∼13쪽.
037) 일반적으로 鐵製農器具 특히 鐵製手農具가 보급되던 초기에는 개간이 생산량 증대에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崔德卿,≪中國古代 鐵製農具와 農業生産力의 발달≫, 建國大 博士學位論文, 1991, 4쪽).
038) 황기덕,≪조선원시 및 고대사회의 기술발전≫(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4), 47쪽.
崔德卿, 위의 책, 11∼14쪽.
039) 적석묘의 외부구조는 無基壇에서 基壇(方壇·階段)으로, 내부구조는 石壙(槨)에서 石室로 변하였다. 무기단에서 기단으로의 발전은 기원 이전, 석광에서 석실로의 변화는 3세기 중·후반경에 이루어졌다. 특히 최근 발굴된 桓仁 望江樓 적석묘는 길이 10.5m, 너비 9m, 높이 1.5m의 장방형으로 기원전 2세기 중엽∼기원전 1세기초로 편년되는데, 형식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규모로 보아 기단적석묘 또는 그에 버금가는 무기단적석묘로 추정된다(梁志龍·王俊輝,<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硏究≫1994-2).
040) 정찬영,<기원 4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5, 1973), 30쪽.
041) ≪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042) ≪漢書≫권 6, 本紀 6, 武帝 元朔 원년.
043) 李丙燾,<玄菟郡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173∼176쪽.
盧泰敦,<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147∼148쪽.
044) ≪漢書≫권 6, 本紀 6, 武帝 元朔 3년 春 및 권 24, 志 4下, 食貨.
045) 今西春秋,<高句麗の城 ; 溝漊と忽>(≪朝鮮學報≫59, 1971).
046) ≪漢書≫권 28, 志 8下, 地理 玄菟郡.
047) 國內城 아래층의 토성, 桓仁縣의 下古城, 通化縣의 赤柏松古城 등.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高句麗國內城址的調査與試掘>(≪文物≫1984-1).
蘇長淸,<高句麗早期平原城>(≪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論文集≫, 1985).
邵春華·滿承志·柳嵐,<赤柏松漢城調査>(≪博物館硏究≫1987-3).
田中俊明,<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1, 東京大, 1994).
048) ≪漢書≫권 28, 志 8下, 地理.
049) 權五重,<樂浪郡 運營의 內部的 實態>(≪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78∼80쪽.
050) 고구려 초기 관직 가운데 主簿·丞은 현도군 때에 토착민이 속리직에 참여한 것의 잔영이라는 견해가 있다(權五重, 위의 책, 82∼83쪽).
051) 기원전 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의 폐지는 토착민의 반발에 따른 결과인데, 汶山郡이 설치되었던 冉駹夷의 경우 “토착민이 부역을 부담스러워 하자 기원전 67년 郡을 폐지하고 蜀郡의 北部都尉에 소속시켜 부역을 감소시켜 주었다”고 한다(權五重, 위의 책, 41쪽).
052) ≪漢書≫권 7, 本紀 7, 昭帝 元鳳 6년 정월.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徐家國,<玄菟郡二遷址考略>(≪社會科學輯刊≫1984-3).
053) 那國에 비견되는 정치체는 종래 部族國家로 이해되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小國, 城邑國家, 君長社會, 초기국가, 노예제소국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展史>(≪韓國文化史大系≫1,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4).
李鍾旭,<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歷史學報≫94·95, 1982).
李基白,<高句麗의 國家形成問題>(≪韓國 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琴京淑,<고구려의 那에 관한 연구>(≪江原史學≫5, 1989).
金基興,<고구려의 국가형성>(≪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 1990).
강맹산,<고구려의 5부>(≪東方學志≫69, 1990).
054) 소노집단이 현도군 설치 이전부터 맹주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주몽집단이 현도군 퇴축을 주도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池內宏,<高句麗の開國傳說と史上の事實>,≪東洋學報≫28-2, 1941, 184∼188쪽).
055)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
056) 田中俊明·東潮,≪高句麗の歷史と遺跡≫(東京 ; 中央公論社, 1995), 125∼133쪽.
057)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058) 기원전 2세기 중엽∼1세기초로 편년되는 桓仁 望江樓 積石墓에서 西岔溝 遺蹟과 동일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주민집단의 유입 및 토착사회와의 융합양상을 보여준다(梁志龍·王俊輝, 앞의 글).
059) 주몽집단의 出自는 문헌상 북부여·부여·동부여 등으로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두만강 하류로 비정하기도 하며, 최근 길림지역의 부여방면으로 보면서 중심부보다는 諸加 휘하의 한 작은 집단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李龍範,<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및 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1993, 59∼63쪽).
060) 李丙燾,<高句麗 國號考>(앞의 책), 359∼360쪽.
061) 연맹주의 교체시기에 대해서는 동명왕대설, 유리왕대설, 태조왕대설 등이 있다. 또 이와 관련하여 慕本王까지의 解氏王系와 태조왕 이후의 高氏王系의 관계에 대해 直系와 傍系로 파악하는 견해, 해씨왕계는 消奴部王室이고 고씨왕계는 桂婁部왕실로서 별개의 왕통이라는 견해가 있다.
金基興,<高句麗의 成長과 대외무역>(≪韓國史論≫16, 서울大 國史學科, 1987),32∼37쪽.
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앞의 책), 124쪽.
金龍善,<高句麗 琉璃明王考>(≪歷史學報≫87, 1980), 60∼62쪽.
李鍾泰,<고구려 太祖王系의 등장과 朱蒙國祖意識의 성립>(≪北岳史論≫2, 國民大, 1990).
田美姬,<高句麗初期의 王室交替와 五部>(≪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上, 探求堂, 1992).
金賢淑,<고구려의 解氏王과 高氏王>(≪大丘史學≫47, 1994).
盧泰敦,<高句麗의 初期王系에 대한 一考察>(≪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062)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22년.
063) 余昊奎, 앞의 글, 41∼42쪽.
064) 林起煥,<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體制>(≪慶熙史學≫14, 1987), 44∼50쪽.
065) ≪漢書≫권 99, 列傳 69, 王莽.
金基興, 앞의 글, 32∼37쪽.
066) ≪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33년.
067) 盧泰敦,<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2, 1977), 152∼155쪽.
068)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後漢書≫권 1下, 本紀 1下, 光武帝 建武 8년 12월.
069) 종래 연맹주의 교체시기와 국가체제의 확립시기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현전하는 자료상 주몽집단이 연맹주로 등장하는 시기와 계루부왕권을 중심으로 국가체제가 확립되는 시기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慕本王代까지의 解氏王系와 태조왕 이후의 高氏王系는 별개의 왕통이 아니라 동일 王系내에서 傍系의 등장으로 파악된다(주 28) 참조).
070) 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5∼7쪽.
071) 한편 고구려가 태조왕대부터 강력한 집권력을 지닌 집권국가로 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光洙,≪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연구≫, 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83, 51∼61쪽).
072) 李弘稙,<高句麗秘記考>(≪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264∼266쪽.
073) 그러나 기원전 277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북한의 최근 연구경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손영종,≪고구려사 Ⅰ≫,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4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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