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멸망을 초래한 흉노 정벌의 영웅, 곽거병
기원전 2세기 한 무제는 흉노와 총력전을 펼친 끝에 흉노를 고비 사막으로 몰아냈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사건이었지만,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서쪽으로 이동해간 흉노족(훈족)으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나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늘날 유럽 각국의 원형이 탄생했다. 한 무제는 흉노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했는데, 장건의 모험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다. 지구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있을까?
흉노는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이다. 단일 민족은 아니고 몽골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까지 포함한 혼성 국가였다. 흉노 정벌은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모험이었다. 흉노는 유목 민족이고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어 타격을 줄 전략 거점이 적고, 흉노의 왕과 주력을 포착하기도 힘들었다. 풍토병과 낮은 의학 수준 때문에 한나라 군대는 1년 이상 지속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말도 버티지 못해 전쟁에 동원한 말의 80%가 죽거나 부상으로 버려졌다. 한군이 진격하면 흉노는 마을을 비우고 도망갔다가 재집결해 한군의 퇴로를 끊거나 소부대를 포위했다. 따라서 한군은 흉노족을 제대로 찾지도 못했으며, 황량한 초원을 헤매고 다니느라 엄청난 전비를 들여야 했다.
전형적인 기마 민족인 흉노는 인구가 적어도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兵馬俑)을 보면 기병 대신 전차부대가 있다. 기원전 3세기까지만 해도 중국군의 기동 전력은 기병이 아닌 전차였다. 병마용을 만들 때쯤부터 기병이 크게 육성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말과 함께 자라는 유목 기병의 기마술과 활 솜씨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밭을 갈고 전차를 끌던 투박한 말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고의 전마로 명성을 날리는 날렵한 아랍종과 몽골 말을 당할 수 없었다. 흉노 정벌 후반기, 한 무제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고, 달릴 때는 피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를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 전쟁은 가끔 ‘말 몇 마리 때문에 일어났다’고 희화화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군의 말로 인한 스트레스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한군의 정예 기병 100명이 3명의 흉노 기병에게 몰살당한 적도 있었다.
진정한 영웅으로 부상한 곽거병
힘들고 무모했던 전쟁은 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최초의 영웅인 위청(衛靑)은 노예 출신의 양치기였다. 기녀였던 이복누이 위자부(衛子夫)가 잔치에서 한 무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자, 이 인연으로 장군이 됐다.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위청은 일곱 번이나 출정해 큰 성공을 거뒀다. 오르도스로 출정했던 기원전 124년의 네 번째 원정에서 그는 흉노왕의 막사를 기습적으로 포위해 왕족 10명과 남녀 1만5000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쟁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기원전 123년 위청의 여섯 번째 출동에 18세였던 조카 곽거병(去病)이 따라갔다. 800명의 기병을 배당받은 그는 대부대로 움직이는 한군의 약점을 깨닫고, 주력부대를 이탈해 단독으로 흉노 땅 깊숙이 들어갔다. 대담하고 능력 있는 기병 지휘관만이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습격 작전이었다. 이 공격에 흉노의 부족장급 인물까지 포로가 됐다. 기원전 121년, 곽거병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지역으로 출동해 흉노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 그의 부대는 기련산(祁連山)이라는 곳까지 진출했다. 지금 남아 있는 곽거병의 봉분은 이 전투를 기념해 기련산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전투로 흉노는 전력의 30%를 잃고, 서쪽 방어 체제가 무너졌다. 화가 난 선우(單于·흉노의 총 수령)가 이 지역을 다스리던 혼야왕을 비난하자, 혼야왕은 한나라로 투항했다. 투항한 흉노군만 10만 명에 달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투항한 흉노 왕자에게 한 무제가 ‘김일제’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나중에 신라 왕가는 자신들이 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 성공으로 한나라는 감숙성과 돈황(敦煌)을 손에 넣어 실크로드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수도인 장안(長安·서안)과 섬서성(陝西省) 지역이 흉노의 약탈 위협에서 벗어났고, 한군은 선우가 있는 몽골 지역으로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은 각각 5만 명의 군대로 흉노의 본거지를 향해 출병했다. 선우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주력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위청 군에게 대패해 겨우 수백 명만 데리고 간신히 탈출했다. 다른 쪽의 세력은 곽거병에게 격파됐다. 곽거병이 잡은 포로만 7만 명에 달했다. 충격을 받은 흉노는 중국 침공을 중단하고 고비 사막으로 이주했다. 돌아온 곽거병은 최고 관원이 되고, 그의 일족은 한나라 정치를 좌우하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곽거병은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아들도 없어 그가 이룩한 권력을 향유한 사람은 그의 동생 곽광(光)과 곽광의 후손이었다.
위청과 곽거병은 대조적인 성품을 가졌다. 위청은 인자하고 신중하며 조심스러웠다. 이 성품은 전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의 원정은 항상 성공을 거두었지만,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유독 119년의 원정에서 흉노의 선우와 격전을 치르고 사로잡기 직전까지 갔지만, 이는 곽거병을 두려워한 선우가 위청을 찾아와 공격해준 덕분
곽거병
중국 전한 시대의 장군. 위청과 더불어 한무제 때 활약한 명장으로, 한고조 시절부터 한왕조를 압박하던 흉노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현재 중국, 한국의 곽(郭)씨와 관련 없다. 한자부터 다르다.
집안 내력
곽거병의 아버지는 곽중유(霍仲孺)로 이름을 날린 아들과 달리 평범한 하급 관리였다. 곽거병의 친모 위소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도 아니었다. 곽중유는 후에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았다. 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곽거병의 이복동생 곽광이다.
어머니 위소아도 진장(陳掌)이라는 새 남자와 살게 되었다. 동생 위자부가 한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위소아 집안도 높은 대접을 받았다. 나이가 찰 때까지 곽거병은 곽중유가 친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장성하고 나서 사실을 알게 됐는데 곽중유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위소아의 어머니 위온(衛媼)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다. 위온은 정계(鄭季)라는 하급관리와 남몰래 정을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 이 사람이 한나라의 또 다른 명장 위청이다. 즉, 위청은 곽거병의 외숙부이다.
평양공주는 한무제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이 난감했다. 평양공주와 한무제의 어머니인 효경황후 왕씨는 자식을 네 명 낳았지만 아들은 하나, 한무제밖에 없었다. 동복남매 중에 남자가 한무제 하나뿐인데 한무제가 자식이 없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괜찮은 여자들을 계속 소개하지만 한무제는 영 뚱한 태도만 보였다.
그렇게 평양공주 집을 들락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여자가 평양공주의 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찮은 여가수 위자부였다. 한무제는 마음에 든 그녀를 궁정으로 데려와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위자부가 존귀해지면서 위자부의 언니 위소아도 자연히 위치가 높아졌다. 곽거병은 어렸을 때 이미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어느날 곽중유가 일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고, 그때 곽거병은 처음으로 친아버지를 방문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거병은 지금껏 당신의 아들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자 곽중유도 옷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 앞에서 이 늙은이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이 가호해준 덕분이오.
곽거병은 곽중유에게 많은 땅을 사주고 재물을 주고 노비를 사주고 떠났다. 이때, 배다른 동생인 곽광도 장안으로 데려왔는데 곽광의 나이 10살이었다.
풋내기 천재 장군
어렸을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한무제의 총애를 얻어 시중이 되었는데, 기원전 123년 위청은 한무제의 조서를 받고 곽거병을 표요교위(剽姚校尉)에 삼고 흉노 공격에 동행을 시켰다. 여기까지는 한무제가 아끼는 처조카에게 적당히 공을 세울 기회를 준 느낌이 든다.
이때 전투에서 곽거병은 기병 800여 명을 거느리고 본대를 떠나 수백 리를 진격하는 폭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보통 이러면 각개격파당하고 포위당하기가 일반적이지만, 오히려 곽거병은 흉노 2천 명 이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뻘 되는 자약후 산(籍若侯产)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 숙부 나고비(羅姑比)를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가 18살, 첫 출정 때의 일이다.
이 공격이 곽거병 본인의 폭주인지, 총사령관 위청의 지시인지는 불분명하다.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이나 한서의 위청곽거병전(衛靑霍去病傳) 모두 그저 곽거병이 대군에서 벗어나 수백 리를 진군해서 적을 물리쳤다고만 서술하였다. 일단 그 후 곽거병의 행적을 보면 이와 비슷한 천제적인 공격적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인다.
곽거병이 거둔 승전보가 장안까지 전해지자 무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곽거병을 관군후(冠軍侯)에 삼았고, 군에서 으뜸의 공이라고 치켜 세워주며 1,600호를 내려주었다.
원수(元狩) 2년, 곽거병 날아오르다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는데, 좋은 저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무제 원수 2년(기원전 121년)은 곽거병의 인생에서 한없이 빛나는 해였다. 이해 봄에 무제는 곽거병을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했는데, 초대 표기장군이 바로 곽거병이다. 이때 곽거병은 21살, 군문에 몸을 담은 지 고작 3년이다. 표기장군이라는 관직이 처음 나옴을 감안하여도, 이게 대장군 바로 다음 자리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2년 뒤에는 아예 대장군과 같은 녹봉을 받는다. 이는 중국역사상 유례가 없는 파격적 행보였다. 날고 긴다하는 중국의 대장군들도 21살에 이러지는 못했다. 춘추전국시대와는 달리 나라가 많고 전쟁이 빈번한 시절도 아니었으므로 더욱 그렇다.
곽거병의 대우가 이처럼 파격적이었으나, 후에 곽거병이 세운 막대한 공을 생각하면 오히려 타당할 지경이었다. 표기장군이 되기가 무섭게 농서(陇西)에서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오려산(烏戾山)을 넘고 호노하(狐奴河)를 건너, 엿새동안 다섯 부족을 지나 무려 1천 리를 나아가 백병전을 벌인 끝에 적을 모두 격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참수했으며, 죽이거나 사로잡은 무리가 무려 8천여 명이 넘었다. 또한 흉노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금인(金人)까지 탈취했다.
인상적인 사항은 이 당시 기록에 '우리 군은 갑옷 하나 잃지 않고' 라는 식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과장일 수 있으나, 대체로 흉노원정에 대한 기록이 '우리가 흉노 놈 10명을 족쳤다. 그런데 우리 병사 3명이 죽었다.'는 식의 내용의 연속임을 생각하면 묘사가 특이하다. 그만큼 완벽한 승리였을 수 있다는 뜻. 이때 세운 공훈으로 곽거병은 2천 호를 더 받아 식읍이 3,600호가 되었다. 이 정도면 평생놀고 먹어도 될법하나 이는 시작에 불과해 위의 그 말을 하여 순수한 의미에서 전쟁을 즐기러 다시 떠났다.
그해 여름, 한무제는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合騎侯) 공손오(公孫敖)를 북지에서 출발시키고, 다른 쪽으로는 장건과 이광을 파견하여 흉노를 공략코자 하였다. 이광은 4천여 명, 장건은 1만여 명, 도합 1만 4천의 병력은 흉노 수만 대군에게 포위당했는데, 이광은 홀로 분전해서 4천여 명 가운데 2천여 명이 전사했지만 버텼고 장건이 도착하자 간신히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장건은 늦게 도착한 탓에 참형을 받을 처지가 되지만 속죄금을 내서 서민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런 양상은 북지에서 출발한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곽거병은 이미 흉노 땅 깊숙이 진격을 하였지만 뒤따르던 공손오가 길을 잃어 한참을 지체하게 된다. 연락이 끊겨 공손오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곽거병은 그야말로 과감한 행동을 취한다. 공손오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흉노 땅 한복판으로 진격한 것이다.
곽거병은 거연수(居延水)를 배를 타고 건넌 후, 소월지(小月氏)까지 나아가 기련산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추도왕과 2500여 명을 사로잡았고 적들을 3만여 명 넘게 참수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흉노의 왕 중 다섯 명과, 그들의 어머니, 선우의 연지, 왕자, 상국에 장군, 당호, 도위 등 수백여 명을 사로잡았고, 맞붙었던 흉노군의 7할을 분쇄하는 경이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에 곽거병은 5000호를 더 받아 식읍이 8,600호가 되었다. 곽거병을 따라왔던 조파노(趙破奴) 같은 장수들도 짭짤한 보상을 받았다. 반면에 공손오는 참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나 속죄금을 내어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다.
이 전투의 결과는 흉노에게 있어서도 매우 뼈아픈 패배였다. 사기의 ‘흉노전 색은(索隱)’조에는 ‘서하구사(西河舊事)’란 흉노 민요 한 수가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기련산 잃으니 육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고(失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육축(六畜)은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인들에게 중요한 여섯 가지 가축, 즉 말·소·양·닭·개·돼지를 말한다. 유목민들에게 이런 동물들, 특히 말을 대규모로 키울 곳을 잃어버림은 정말 어마어마한 피해였다.
흉노의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서 계속 한나라 군대에게 부서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곽거병 때문임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혼야왕을 죽이려 했다. 혼야왕은 휴저왕과 논의하며 곽거병을 이길 자신도 없고 선우도 무섭고 하니 차라리 한나라에 투항해버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무제는 이 소식을 들었지만, 만약 항복하는 척하면서 공격을 하면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에 이 일을 곽거병에게 맡겼다.
곽거병은 군대를 이끌고 혼야왕의 부대와 대치했는데, 혼야왕의 비장들 중 항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8천여 명을 죽이고 수만여 명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 공에 한무제는 근심거리가 없어졌다면서 크게 치하하고 1,700호를 더해주었다.
이 모든 전투가 단 1년 만에 거둔 전공이다.
기린아의 마지막 불꽃, 막북전투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시성의 북방에 있는 후흐호트 지역에서 출발하였고, 후자는 베이징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上谷郡에서 출발하였다 ─ 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서 현재 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산시성의 셴양(咸阳)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밟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원수 4년(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봄, 한나라는 믿는 도끼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을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을 모조리 참전케 했다. 근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함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이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하여 진격하기로 하였다.
흉노 쪽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면 매우 피로하여 지치리라 판단, 군수물자를 전부 먼 북쪽에 두고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천천히 기다리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런 흉노 선우의 군대가 곽거병도 아닌 위청의 군대에게 포착되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고, 위청은 압도적인 병력의 숫자와 힘으로 흉노 선우의 좌우익을 둘러싸 완벽하게 격파해버렸다.
그 시기 곽거병은, 우주를 뚫을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외몽골~시베리아까지 쳐들어간 중국 한족 왕조의 장군들이 정말로 몇 없다. 그것도 곽거병은 기원전에 바이칼호까지 도달했으니 대단하다. 이 정도 기세로 중화제국 왕조들이 다시 진격하려면 당나라, 명나라 때 대몽골초원 원정까지 기다려야 한다.
곽거병은 장장 1천여 리를 행군하여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가며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따르면,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오르콘 강 상류 바이칼호 부근까지 이른다.
그 자체만으로도 위업이라 할 만한데, 그렇게 사막의 모래폭풍을 뚫고 제대로 보급도 못 하면서도 전투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흉노 선우의 근신인 장거(章渠)를 사로잡고 왕호 비거기(比耆)를 참살했다. 흉노 좌대장의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그들이 쓰는 깃발과 북을 빼앗았으며, 산과 강을 건너 흉노의 왕 3명을 죽이고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을 83명 이상 주살하였다. 그렇게 죽이고 사로잡은 흉노의 숫자가 무려 7만 443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흉노 땅 한복판에서 거창하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흉노는 이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본국에서의 보급은 요원하고, 흉노 땅에 딱히 거두어서 쓸 만한 논과 밭 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보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 해결법이라는 것이 군 전략적으로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흉노 적군을 때려부수고 흉노 군사의 식량을 빼앗아서 보급을 해결했다고 한다. 말이야 쉽지 전투력이 저들보다 떨어지면 오히려 시도하다 패배하고, 결국 사막 한가운데서 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모하면서도 대단한 싸움이었다.
이렇게 힘든 싸움이었던 만큼, 곽거병의 밑에 있던 부하 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많은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가 않았다. 곽거병 또한 한번에 식읍 5,800호를 증봉받았다.
한나라 군대가 이번 싸움에 동원한 말이 무려 14만 필이었는데,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는 3만 필도 되지 못하였다. 그만큼 힘든 싸움이었는데도 위청은 곽거병에 비하여 그 대가를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대사마의 직위를 새로 두어 표기장군과 대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일컬었고, 둘의 녹봉이 똑같아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곽거병과 위청의 입지가 대놓고 차이가 나자, 야속하게 사람들도 모두 바람처럼 곽거병쪽으로 움직여 버렸다.
이렇게 곽거병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지만, 하늘이 기린아를 시기한 탓인지 어이없이 급사하고 만다. 한무제는 이 위대한 장군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검은 철갑을 입은 군대를 장안에서부터 무릉까지 벌려 세우고는 무릉에 기련산을 본떠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산시 곽거병 묘다. 그리고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무용을 뜻하는 ‘경(景)’과, 땅을 넓혔다는 ‘환(桓)’을 합친 것이다. 즉 나라의 땅을 넓힌 무용을 가졌던 장수라는 뜻인데 장수로서 이보다 명예로운 시호가 또 있을까.
평가
곽거병의 전공은 그 당시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국이 조나라 무령왕의 시기부터 기병전술을 확립하긴 했지만 기마대는 유목민족의 전매특허였고, 중원의 군사가 성을 쌓거나 혹은 평원에서 방진을 펼쳐 기마대를 상대해서 이기는 경우는 많아도 기병전력을 중심으로 하여 이긴 경우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유목민족이 자신들의 땅 깊숙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포위하여 승리함은 그들의 주특기였다. 당장 유방이 묵돌에게 패배했던 백등산 포위전이나,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가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마사게타이(Massagetae)와의 싸움에서 죽었을 때의 상황을 연상해보자.
하지만 한무제 때부터 정예 기병을 육성한 한나라는 곽거병의 지휘 아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정주민족의 군대가 오히려 자진해서 흉노 땅 깊숙히 들어가 완전히 휩쓸어버리고 격파한 것이다. 이는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곽거병의 부대전술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로 인해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런 식으로 계속 싸우다간 언젠가 큰 패배를 당할지 모른다고 말하는 의견도 있다. 확실히, 본대를 이탈하는 모습이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싸우는 형태, 위험천만한 보급은 정석적인 용병술에서 한참을 벗어난 것이었다.
한무제가 곽거병에게 병법에 대해 묻자 대답하기를
지금 쓸 전략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 병법을 체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즉 정상적인 범주의 용병술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했다고 하겠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전략가로서는 범용하나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과 재치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면서 좀 까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비슷한 평가는 곽거병에게도 할 수 있다. 확실히 그의 전술은 너무 위험하고 또 모험적이었다. 사마천조차도 "군대에 천행이 따라주어 곤경에 처한 일이 없다"고 쓸 정도다.
하지만 최근 평가로는 곽거병이 사용한 전략은 흉노의 전략과 비슷하며 알맞은 병법을 사용한 것으로 연구된다. 곽거병은 출정때 군량을 아주 적게 휴대했고 흉노인과 마찬가지로 적에게 빼앗아서 먹었으며 좋은 물건을 빼앗으면 그것은 자기의 것이라는 인식을 병사들에게 각인시키며 전투에 임하게 했다. 또한 곽거병이 흉노와 상대하면서 사용한 대표적인 병법은 흉노 기병과 정면 전투를 맞이하면 무강거(武剛車)로 방어하는 방법이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곽거병이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본인의 능력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한무제가 밀어준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순신이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이미 한나라의 국력은 몇 배로 튼실해졌고 흉노는 쇠퇴기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죽을 쓰고 위청과 곽거병만 공을 세움은, 무제가 위황후의 동생과 조카를 열후로 만들기 위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팍팍 밀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장비와 최강의 정예병을 팍팍 밀어주었으니 군사적 천재라는 것은 과장이라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위청이 처음 출전했을 때를 보면 양이나 치던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여 보냈던 것이다. 또한 곽거병에 대해서는 항상 따로 정예병을 선발하였는데, 그 군사와 말과 병기가 다른 장수들이 거느린 수준에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아무나 밀어준다고 해서 팍팍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입증되지 않은 졸장을 밀어줬다가 처참한 결과로 돌아오는 경우는 많았다. 대표적으로 전국시대 조나라의 조괄은 그렇게 밀어줬다가 장평대전에서의 패배로 국력이 반토막이 나는 대참사를 낳았다. 또 먼 훗날 조선 선조 시절 선조가 그렇게 밀어준 원균 역시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바가 있다.
그에 비해 곽거병은 처음 출전했을 때의 상황은 볼 것도 없이 빽을 써서 들어간 수준이지만, 다른 장수들이 모조리 패배했을 때 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무제는 훗날 이광리를 곽거병처럼 밀어주었지만 그 결과는 곽거병에 비할 바가 못된다. 결국 곽거병의 전공은 한무제의 밀어주기도 있지만 큰 원인은 본인의 넘치는 재능 + 타고난 운 등이 결합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