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
19세기 후반 서양 문명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 삼국(중국, 조선, 일본)이 각각 내세운 이념
즉, 동양의 정신이나 문화는 그대로 유지하고 서양의 과학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전략
동도서기 (東道西器): 조선에서 쓰인 말로,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
중체서용 (中體西用): 중국에서 사용된 말로,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제도(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과 문물(용)을 받아들이자는 주장
화혼양재 (和魂洋才): 일본에서 사용된 말로, 일본의 전통 정신(혼)은 그대로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과 지식(재)을 받아들이자는 주장
이 세 이념은 모두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와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동아시아적 대응: 동도서기와 중체서용, 화혼양재
제국의 시대가 조선을 엄습하는 당대에 지식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민중이 동학을 꿈꾸면서 척이왜양의 길로 나아갔을 때, 지식인들이 생각하던 개화사상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은 서구문명 수용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견해차를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측면이다. 즉, 조선 후기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서구문명 수용이라는 과제가 많은 지식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서교와 서학 논쟁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자리를 내주었으니, 그 논의의 전개과정을 감고계금(鑑古戒今) 차원에서라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근대사에서 개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한때 근대론적인 시각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기도 하였고, 민중사학의 입장에서 실제의 역사상 이하로 평가절하되기도 하였다. 지난 시기를 평가하면서, 민중적 당파성으로서의 조선 후기 민중들의 변혁운동과 이의 좌절을 고려해야 하면서, 동시에 당대 지식인들의 고민과 실패에 관한 경험을 되살려 보아야 할 것이다.
동도서기론은 사실상 조선 후기의 유교적 지식인들이 벌였던 서학 과 서교 논쟁의 연장선이다. 물질문명은 서구 것을 받아들이되, 정신문명은 동양 것을 지키겠다는 논리다. 실학파로서 서학을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수용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성호 이익은 천주교에 대한 유교의 우월성을 믿고, 과학에서는 서양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동도서기론의 초보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당대의 실학자들은 편차는 있다 하더라도 대개 동도서기론 입장에 서 있었다. 가령 정약용 같은 이는 도와 기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무릇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 뿌리를 두고, 성현의 책에 명확히 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확충하고 잘 다스리면 되는 것이지, 예속은 원래 밖에서 가져오기를 기다리거나 나중에 빌려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해 필요한 백공(百工)의 기예는 외국에 나가서 새로운 제도를 구하여 몽애와 고루함을 타파하지 않으면 이로운 혜택을 일으킬 수 없다. 이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연구해야 할 바이다.)
동도서기론의 본격적인 전개는 서구문명에 대한 충격과 대응방식에서 나왔으니, 중국과 일본의 대응방식과 비교해봄으로써 동도서기론의 뿌리가 보일 것이다. 동도서기는 중국 양무운동(洋務運動)에서 내걸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材論)과 같은 궤적을 지닌다.
1860년부터 1894년까지 이홍장(李鴻章) 등이 주동이 되어 서양 근대 기계문명을 채용하여 중국의 자강 근대화 운동을 일으켰으니, 이를 양무운동이라 한다. 청나라는 구미인을 서양 오랑캐로 바라보는 이적(夷狄) 정책을 고수하다가 북경조약(1860) 이후 양무정책으로 전환하니, 양무는 구미인과의 외교통상 등 교섭사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양무는 구미문물의 섭취 모방을 중심적 내용으로 한다. “양이의 장점을 배워 양이를 제압하자(師夷之長技以制夷)!”가 그 것이다. 이는 중체서용, 즉 “중국 전통의 문화 제도를 본체로 하고, 서양의 기계문명을 말기(末技)로 이용한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중체서용론의 핵심은 중국 본래의 유학을 중심으로 삼고, 부국강병을 위하여 근대 서학을 취하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도서기는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材論)과도 같은 궤적을 지닌다. 화혼양재론은 일본 고유의 정신을 기본으로 하면서 서학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이니, 메이지유신 이후에 화혼한재론(和魂漢材論)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어졌다. 기본적으로 중체서용론, 화혼양재, 동도서기는 다를 게 없다.
동도서기론은 우리의 사상사적 측면에서는 성리학의 이기론적 우위관(優位觀)을 고수함으로써 동양의 정신적 우월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표방하는 소중화사상인 화이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기(理氣) 관계는 주희의 설을 따른다면, 부잡불리(不雜不離)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서양 문명 자체에 이미 정신과 사상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기로 갈라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동도서기론은 전통적 지배질서와 이해관계를 온존시키면서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보수적 개량주의 이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도서기론적 개화 논리도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의정척사론자들과 민중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음을 주목해야 한다.
동도서기론의 논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은 신기선의 『농정신편(農政新編)』(1885) 서문이다. 서양농법의 수용문제를 서법(西法) 전반의 수용문제로 확장하여 이해하고 여기에 도기론(道器論)을 적용함으로써 동도서기론의 논리를 확립하였다. 그는 도기론을 적용함으로써 동도서기론의 논리를 확립하였다.
도기론은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형 이상의 것을 도라 하고 형 이하의 것을 기라 한다形而上者 胃之道 形而下者 胃之器’, ‘일음일양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胃道’라는 말에서 나왔다. 신기선이 착안한 점은 ‘도와 기가 서로 분리된다道器相分’는 논리였다. 그는 동도(東道)는 정덕(正德)을 위하여, 서기(西器)는 이용후생을 위한다고 보았다.
1882년까지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를 주장하던 이들은 대체로 이와 같은 동도서기론의 논리 위에 서 있었다. 동도서기론은 위정척사파와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으니, 1882년 임오군란이 그것이다. 임오군란 이후에 서기가 동도서기론의 논리 위에서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일단 국론으로 자리잡았다. 기울어져가는 국운과 다급한 국제정세 속에서 동도를 보존하면서 서기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려는 방책이었다.
김윤식이 대신 쓴 고종의 「개화윤음(開化倫音)」은 이를 잘 표현해 준다.
그(서양)의 교는 사악하므로 당연히 음성미색(淫聲美色)과 마찬가지로 멀리해야 한다. 그 기(器)는 이로워서 진실로 이용후생할 수 있는 것이니, 농상·의약·갑병·주거의 제도를 꺼려해서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교를 내치는 것과 그 기를 본받는 것은 상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대저 강약의 형세가 이미 현격한데, 진실로 저들의 기를 본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로부터 모욕을 막고 저들이 넘겨다보는 것을 방지하겠는가.
동도서기론의 논리구조에 대해 위정척사론자들은 어떤 견해를 가졌을까.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서양의 종교는 배척하지만 서양의 우수한 기술문명은 받아들인다는 동도서기의 논리가 도를 보존하는 논리이므로 위정척사론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위정척사론자들은 서양의 기계를 ‘기기음교 (奇器淫敎)’로 지목하여 추호도 그 수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는 당시의 기술교육과 서양과의 조약을 맺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논의하는 자들의 말이, “안으로는 서사(西師)를 맞이하여 기술을 배운 뒤에야 부국강병을 할 수 있으며, 밖으로는 서양의 나라를 맞이하여 결속을 하여야 러시아를 막을 수 있으니, 이같이 하면 나라를 보호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조석으로 화가 일어날 것이다. 다만, 야소(耶蘇)의 학을 경계하여 배우지 않으면 된다.”고 하니, 그 또한 생각이 깊지 못하도다.)
위정척사론자들은 동도서기론을 분명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단 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국론화되자, 동도서기론자의 입장도 둘로 갈린다. 김윤식·어윤중 등은 서양과학 기술의 우수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신문화는 동양의 유교가 훨씬 우월하다고 보았다.
김윤식의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교는 배척하지만, 서양의 기는 이용후생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형 이상을 도라 하고 형 이하를 기라 하는데, 도는 형상이 없이 기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가 기를 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도를 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의 학문은 체(體)와 용(用)을 서로 의지하고 기와 도를 함께 익혀야 한다.17)
김윤식의 동도서기론은 당시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가던 관료 집단의 대표적인 이론이었다. 반면에 김옥균과 박영효처럼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에 대해서까지도 보편성과 우월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 자들도 있었다. 후자의 김옥균은 동도서기론의 틀을 벗어나 문명개화론자의 범주로 이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18)
동도서기론은 개화 논의의 확산과 함께 그 논리를 풍부히 해갔으나 그 과정에서 김옥균 등은 개혁론으로서의 변법개화론을 형성하고 분화되어 나갔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사상은 전반적으로 위축되었고, 동도서기론자들의 활동도 수구세력에 의해 견제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화의 추세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다.19)
동도서기론은 언뜻 사라진 것 같아도 늘 잠복되어 흘렀다. 『황성신문』의 논조도 동교는 고수되어야 하지만, 서기의 우수성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황성신문』은 ‘오늘의 대한의 형세는 변법(變法)이 필요한 시기’라고 주장하였다. 변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변법자강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중체서용론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던 동도서기론에서 변법운동으로 나가갔음은 당시 국제적인 동향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양무운동도 변법자강운동으로 이미 변화를 꾀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측이 어처구니 없이 패배하자 새롭게 나타난 운동이 변법운동이다. 변법의 주역은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담사동(譚嗣同)·엄복(嚴復) 등이었다. 이 운동은 혁명적 방식에 의하나 청나라를 타도하고 민주입헌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던 손문(孫文)의 신해혁명파와는 대조적으로 사회 개량주의적 입장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대사조를 호흡하면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심을 바쳤던 살아있는 지성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들은 민중의 주권과 중국의 영토를 지키는데 무력한 통치체제와 사상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으며, 국가운명에 관심을 갖도록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구국의 길을 탐구하도록 사람들의 적극성을 계발하였다. 양계초 등의 글이 국내의 개화지향적인 민족지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변법자강파 엄복의 체용(體用)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자. 엄복은 체용을 한 대상의 두 측면, 또는 차원으로 이해함으로써 중학에는 중학의 체용이 있고, 서학에는 서학의 체용이 따로 있다고 말하였다. 서로 이질적인 중학과 서학을 체와 용으로 결합시킨 중체서용론은 오류라는 것이다. 일본의 나까무라中村敬直는 서양의 도덕과 기예는 본래 표리일체라고 하여 자신의 스승을 극복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은 중국과 일본이 근대사회로 개변을 현실화하는 가운데 획득한 새로운 안목에 기초한 것이다.20)
우리의 동도서기론도 체용을 애써 구분하는 모순을 애초부터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이와 기가 구분되는 문화가 가능할까. 문화는 사회지리적 여건과 토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외적 표출로서의 기는 결코 이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동도서기론은 불완전성으로 인해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매듭짓지 못하고 소멸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동도서기론은 서기수용보다는 동도보존의 논리로 후퇴하는 퇴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 오로지 개화문명만을 부르짖는 세상이 되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우리의 정신을 보존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겠다는 논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오로지 개화파만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우리의 개화론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강력한 그늘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당대의 비극이 있었다. 이제 논의는 동도서기론에서 문명개화론으로 옮겨야할 순서이다.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에 대하여
중국 본래의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하기 위해 근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청말(淸末)에 근대교육 수립에 공헌이 큰 장지동(張之洞)이 그의 저서인 《권학편》(勸學篇)에서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中學爲體西學爲用. 이러한 교육사조는 중국의 근대학교 설립에 깊은 영향을 미치어 경사대학장정(京師大學章程)·진정학당장정(秦定學堂章程) 등에 반영되었다.
청(淸)나라 때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이후 일어난 양무(洋務) 운동의 기본사상.
청왕조 말기 외국 열강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이 주도한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운동의 기본사상은, 중국의 전통적 유교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서양의 과학기술과 그 성과를 도입, 강화해 가는 것으로서 ‘중국의 학문을 체(體)로 하고 서양의 학문을 용(用)으로 한다’는 것이 ‘중체서용론’이다.
청일전쟁이 그 빛을 잃은 이후에도 장지동(張之洞)은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당시의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을 비판한 《권학편(勸學篇)》을 써서 ‘중체서용론’을 내세워 국민에게 강한 이념을 심어주었다.
이 논리를 한국에서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중국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으로 표현했다.
"중국 것을 모체로 하되 서양의 유용한 것들만 사용하자는 것."
동도서기(東道西器)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은 동양의 도덕, 윤리, 지배질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발달한 기술, 기계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이다. 1880년에 들어와 동도서기론은 한층 체계화되고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888년 이후 일본의 압력이 가중되어 감에 따라 당대 지식인들은 양왜를 배격하는 일파(위정척사파)와 동도서기를 주장하는 일파(온건개화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항로,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양왜배격론이 우세하였으나 점차로 서양의 기술만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두 유파는 팽팽한 균형을 유지한다.
온건개화파가 주장하는 동도서기론은 대체적으로 청국에 갔다 온 인사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1872년에 입연(入燕)했던 박규수의 보고, 1873년의 민영목의 "자뢰(資賴)하여 이(利)가 되는 것은 곧 공사기교(기술)이다"라는 결론,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에 기록된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의 외교정책, 1881년의 일본 시찰단의 구성, 1882년 박기종, 변옥금, 윤선학의 "기(器)는 이로운"것인 즉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등이 모두 동도서기론으로 발전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동도서기론은 북학파의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과 맥락이 닿는 논의인데, 근 일백여년 만에 제도적 개혁의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도서기적 사고는 비단 조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서양과학과 기술이 물밀 듯이 밀려오던 17~18세기에 중국인들은 서양 과학이 본래 중국 것이었는데 잠시 서양에 건너갔다가 다시 들어온다는 서학중원(西學中源)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후 서양의 기술(用)을 가지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면서 중국의 가치와 문화(體)를 발전시킨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철학이 나왔다. 이러한 '중체서용'의 일본판이 '화혼양재'(和魂洋才)이고 한국판이 '동도서기'(東道西器)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가치, 문화, 세계관을 보존하고 이것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결합시킨다는 생각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의 철학은 모두 서양의 과학기술을 기(器), 용(用), 재(才)로 보고 부국강병과 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동도서기론은 사상사적 측면에서는 성리학의 이기론적 우위관을 고수함으로써 동양의 정신적 우월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존왕양이를 표방하는 소중화사상인 화이론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결국 동도서기론은 전통적 지배질서와 이해관계를 온존시키면서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했던 보수적 개량주의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도서기적 개화논리도 당시로서는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위정척사론자들과 민중의 거센 반반을 일으켰다. 1882년까지 부국강병을 위한 개화를 주장하던 이들은 대체로 이같은 동도서기론의 논리 위에 서 있다.(진선영)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과 중국이 구미문명과 만났을 때의 기본 입장을 나타내는 말로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한국에는 그것과 비슷한 말로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것이 있다.
먼저 일본의 ‘화혼양재’에 관해서 검토보보자. 일본에서는 이 말에 앞서서 ‘동양도덕 서양예술’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동양도덕 서양예술’이라는 말은 동양과 서양을 대비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쿠메의 경우도 동양의 공통점으로서 도덕을 운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동양도덕 서양예술’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이 말이 널리 화자되지 않고 대신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첫째, ‘동양도덕’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동양의 공통점으로 도덕을 지목한다는 것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과거시험을 통해 유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인정된 사람이 정치를 담당하는, 그런 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어느 사회에서도 나름의 도덕이 존재할 터인데 그런 도덕을 동양의 전매품과 같이 말하는 ‘동양도덕’이라는 구호나 쿠메의 담론 자체가 특수한 일본적 현상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은 동양과도 다른 일본의 고유성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동양’을 대신해서 ‘화(和)’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일본의 고유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본에서 ‘화혼양재’가 등장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쿠메는 일본의 고유성으로 기술적 우월성을 강조했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서양 예술’이라고 할 때의 예술, 즉 기술과 통하는 것으로, 일본과 구미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자세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쿠메의 입장은 메이지유신 초기에 있어서는 천황의 존재가 아직 뚜렷하지 않았다는 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일본의 고유성을 천황의 존재에서 찾는, 1880년대에 와서 분명해지는 상황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國敎’를 일본의 고유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다만 그 국교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덕이가 지적한 그대로 ‘망탄(忘嘆)’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애매한 것이었다. 쿠메처럼 일본과 구미의 공통성을 보려고 하지 않고, 구미, 중국, 한국과도 다른 일본의 고유성을 찾으려면 이런 국교 혼은 국교를 체현한 천황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도덕’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수반하는 말을 대신해 ‘혼(魂)’이란 실체가 없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구호는 일본의 일국적 정체성 강조함과 동시에 그 정체성의 근거를 애매모호한 데 두게 된 결과였다. 그리고 정체성의 내실이 그렇게 애매한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보다 훨씬 쉽게 서양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말은 중국과 구미를 대비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으로, 동양 혹은 동아시아라는 인식의 부재를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중체서용(中體西用)’은 ‘중체(中體)’에 대한 깊은 확신도 말해주는데, 그 핵심에는 유교가 존재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교에 대한 깊은 신뢰는 일본과 달리 충분히 역사적 근거를 가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19세기적 패러다임에 입각한 연구에서는 장덕이의 이러한 입장은 이른바 양무운동가들의 공통된 입장으로서, 그 한계성으로 지목되어 왔다. 그리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변법파와 혁명파가 거론되어 왔는데, 그렇다면 변법파나 혁명파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대신해서 ‘서체서용(西體西用)’을 추구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중역 이후의 중국에서는 ‘중체(中體)’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는 구호도 ‘화혼쟝재(和魂洋才)’와 마찬가지로 일국적인 입장에서 구미문명에 맞서려고 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말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국 중국에게서 아시아나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자세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세기후반 일본과 중국이 구미문명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관한 이상과 같은 고찰을 전제로 한다면, 21세기 현시점에서 그 과정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주목하고 싶은 것은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의 함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東)’은 동양의 동일 수도 있고 동국 혹은 오동(吾東)이라고 할 때와 같이 조선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가령 후자의 경우라도 동양의 ‘도’를 체현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조선이라는 뜻이므로 거기에는 당연히 동양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도(道)’가 쿠메처럼 단순히 더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19세기 후반 한국에서 어째서 ‘중(中)’이나 ‘화(和)’가 아닌 ‘동(東)’을 내세우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었는가다. 그것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도(道)’에 대한 깊은 확신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한국을 고유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동양에 속한 존재로 보려고 하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공동연구의 핵심개념인 ‘유연한 주체성’이라는 것이 19세기 후반에는 일국적인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범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표어는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표어로서는 약한 것일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필요한 ‘유연한 주체성’은 일국적 정체성을 넘어설 수 있는 ‘매개’적인 정체성이어야 된다. 따라서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구호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19세기 후반에 왜 한국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란 태도가 제창되었는지, 그리고 그 태도에 이후 어떤 의미가 부여되면서 전개되었는지, 이런 문제를 구명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