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조선총독부 조선산림회에서 발행한 <반도의 취록>에 삽입된 경성시가의 모습. 극도로 낙후하고 정체된 조선 사회가 식민지 지배를 통해 경제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지배의 정당성을 공간의 변화를 통해 홍보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
현대 한국의 경제적 · 정치적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역사적 관점.
일제강점기를 해석하는 국내 역사학계의 관점은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크게 갈린다. 내재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조선사회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함으로써 발전을 방해받았다는 것이 종전 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수탈론)이라면,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된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 안병직, 이영훈 등 낙성대연구소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한국 역사학은 일제 시기부터 계속되어온 식민사관과 실증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김용섭을 비롯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 연구를 내놓으면서 가능해졌다. 내재적 발전론이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세계사적 발전 법칙을 따라 설명함으로써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데 기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 근대사연구의 주류가 되어갔다. 일제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도 만약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조선사회도 스스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었는데, 일제의 강제 침략에 의해서 가능성이 꺾여 버렸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항일민족운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기본 동력으로 주목하였으며, 일제의 침략 만행과 야만적 수탈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흔히 ‘수탈론’이라고 부르는데,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론과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일 정서에 기반을 두고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역사학 연구를 이끌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한국역사학계의 연구 방향, 즉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는 주장이 안병직, 이영훈 등 경제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주장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부른다.
안병직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중심 패러다임인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 부정하였다. 더불어 일제의 지배와 수탈 때문에 한국경제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식민지 수탈론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동안 한국사 연구자들이 지나치게 일제의 수탈과 이에 맞선 조선민중의 저항이라는 틀에 얽매어 있었다는 것이다(안병직, 1993).
그는 한국 자본주의를 이식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한국 경제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오늘날까지 개방체제를 유지해왔다고 보았다. 초기에는 조선정부의 저항으로 개항 수준이 낮았으나,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병으로 개방성이 높아졌고, 1905년 화폐정리사업과 1923년 관세 철폐로 일본의 ‘엔 통화권’으로 포섭되었으며, 일본과 동일한 관세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로써 조선 경제가 일본 경제의 한 지역경제로 전락하였지만, 동시에 일본과 조선 간의 무역을 촉진시키고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및 기술의 유입이 자유롭게 되어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하였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경제에의 예속성보다는 한국 경제의 개방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처럼 개방체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과 같은 저개발국에서 후발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발자본주의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개방체제가 기본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는 조선사회의 수탈을 위해 무작정 억압으로 일관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억압과 착취를 함과 동시에 식민지 개발을 위한 근대적 개혁도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재정계획과 광무양전을 실시했는데, 재정개혁은 황실이 재정의 핵심을 틀어쥐면서 실패했고, 광무양전은 국가적 토지소유를 원칙으로 하는 결부제를 기본제도로 채용함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 제도를 수립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지 권력은 화폐정리사업과 재정정리사업을 단행하여 근대적 재정제도를 수립했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근대토지 소유권제도를 확립하는 한편 토지소유자를 명확히 함으로써 안정적 지세수입을 확보하고 재정제도를 뒷받침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산미증식으로 농업기반을 구축하고 농사방법을 개선함으로써 한국 농업이 한 단계 발전하였으며, 식민지 공업화 정책으로 한국인들이 최초로 자본주의적 고통을 겪었지만, 이를 통해 나름의 근대적 변신을 꾀해갈 수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개발과정에서 조선인은 소농사회를 바탕으로 농민, 자본가, 노동자 등이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담당주체로 활발히 성장해 갔다고 보았다.
이영훈도 안병직과 같은 논리적 바탕 위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의 문제점을 3가지로 정리하였다(이영훈, 1996).
첫째, 조선 중세경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수공업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조선후기에 농촌공업이 성립한 적이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공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자주 거론되어 온 광업·제철업·유기업 등이 국역(國役)체제에서 벗어나 사적 상품생산체계로 진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과대평가되어 왔다고 했다.
둘째, 농업의 발전방향을 설명할 때, 조선 고유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의 특질을 무시하고 영국 근대농업을 설명하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농업에서의 양극분해의 추세와 부농의 존재를 찾아냄으로써 맹아론의 이론적, 실증적 기초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성과로 이른바 광작농민(廣作農民)이나 경영형 부농(經營型 富農)이 자본주의적 농업의 주도층이라고 파악하였지만, 양극분해의 추세나 부농의 성장이 장기 시계열의 사례로 입증되지는 못했다고 설명하였다. 오히려 장기 추세는 역의 방향, 말하자면 조선 농업경제가 상층 경작농이 감소하고 균등한 규모의 하층 소농이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17세기 이후 농촌의 정기시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시장경제의 성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동안 내재적 발전론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장시 밀도와 상호 연계 유통망은 세계적 수준이었고, 17세기 후반부터 금속화폐인 동전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등의 발전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시장 경제의 발전 자체를 내재적 발전론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평가하였지만, 그 이론적 기초가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평가하면서, 조선후기 농촌 장시를 단위로 한 시장경제의 발전은 전국적 물류 가운데서 국가적 배분체계가 점했던 비중을 전제한 위에, 농업에서 전개된 소농경제의 성숙이라는 발전방향과의 관련성에서 다시 파악해야 하며, 시장경제의 근대적 발전을 지나치게 평가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조선후기상의 토대 위에서 이영훈은 개항 이후 일제 시기까지 경제구조의 변화를 안병직과 같은 논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개항이 한국적 근대의 기점이었다면, 식민지 초기 1905년∼1918년 간 일제에 의해 화폐·금융·재정의 근대적 제도가 이식되고,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됨으로써 제도적 형식의 제1단계가 성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의 형식·제도가 불행하게도 전통에 의해 재규정된 형태로 소화되지 못하고 순전히 외래적인 근대로, 그래서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 그대로 이식된 것이다.”(이영훈, 1996)라고 하여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을 서구의 자본주의가 한국사회에 도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일제침략기가 되면 “근대적 제도의 정비에 따라 식민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이영훈, 1996)고 평가하였다. 그리고는 “식민지기의 경제는 1930년을 전후한 공황기의 단절이 있지만, 평균적으로 연 3.7%의 성장률을 보였다. 근대 경제에 고유한 장기지속적·자기유지적 경제성장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중략) 성장의 동력은 일본과의 수출입 및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에 있었다. 미곡생산의 증대로 일본으로의 수출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국내 공산품 수요시장이 확대되었으며, 이 시장을 상대로 일본상품의 수입 및 직접투자가 이루어진 것이 식민지기 경제성장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농·공간의 다이내믹스가 국민경제로 성립하지 않고, 식민지 농업과 제국주의 공업 사이에서 성립한 점에서 기본적으로 식민지적 공업화의 유형이었다.”(이영훈, 1996)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이영훈은 조선후기의 역사상, 특히 19세기를 진단하면서 “위기는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外勢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19세기의 역사상은 1950년대 이래 그들의 전통사회가 정상적인 경로로 발전해 왔으며, 그들의 역사가 왜곡된 것은 제국주의의 침입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온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있다.한국의 역사학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역사학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 확인과 관련하여 지난 50년간 구축해 온 모든 방면에서의 言說體系(담론체계)가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이영훈, 2004)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후기 사회의 자주적 발전과 개항 후 외세,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수탈, 그리고 이에 맞섰던 저항운동 연구를 통해서 식민사관을 극복하였다고 자부하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충격적이었다. 그들의 눈에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주적 근대화를 부정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를 긍정하는 주장이며, 지나치게 경제성장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한다고 생각되었다. 이에 대해 신용하, 정태헌, 고석규 등 여러 학자들의 반론이 이어졌고, 이 반론에 대한 반론이 이어지면서 일대 논쟁이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낙성대 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발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에서도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의하는 학자들의 움직임도 합쳐지면서(호리 가즈오, 2003; 마이클 로빈슨·신기욱 엮음, 2006; 카터 에커트, 2008) 점차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처음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던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의 입장에선 학자들도 논쟁이 거듭되면서 점차 자신의 논리를 수정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내재적 발전론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이라는 단선적인 역사발전론에 입각해 자본주의 맹아론을 고집해 왔고, 서구중심적인 역사발전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은 이제 상당히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 경제의 긍정적 연속성을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실증적 기초를 결여하고 있지만, 부정적 연속성만을 내세우던 수탈론도 문제가 있으므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합리적인 문제제기는 수용하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내재적 발전론과 수탈론을 중심으로 한 기존 역사 연구의 흐름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역사 연구의 입장이다. 분명히 식민지 근대화론은 기존 연구자들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으며, 상호 비판, 반비판을 통해서 연구의 다양성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논쟁이 진행되었지만,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 논쟁이 단순한 연구 내용의 차이만이 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史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신용하, 나남출판, 2009)
『제국의 후예』(카터 에커트, 푸른역사, 2008)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마이클 로빈슨·신기욱 엮음, 삼인, 2006)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이영훈 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윤해동, 『역사학의 세기』, 휴머니스트, 2009)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연구사적 접근」(이수빈,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9)
「조선 전통사회의 경제적 유산: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우대형, 『역사와 현실』68, 한국역사연구회, 2008)
식민지 근대화론
현대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개발 경제학에서 1960~1970년대의 생산 요소, 1980년대의 내재적 기술 발전에 따른 경제 성장 모델이 한국에 잘 들어 맞지 않자 1990년대 들어서 결국 개발경제학자들이 제도로 이를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그에 따른 연구 결과 제도연구가 개발경제학의 흐름이 되자 1986년 North and Weingast의 논문 이후로 경제사에서도 제도연구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적 사유재산 제도, 회사법, 행정-사법 분리가 잘 갖추어져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이 제도들이 시기상 일제강점기에 기원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 식민지 근대화론이 대두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두고 한국에서 논쟁이 있다.
한편, 당대를 살던 친일파 출신 윤치호는 일본이 한 것은 일본인을 위한 행위이지 조선인을 위해서 발전시킨 것은 아니라고 식민지 수탈론과 비슷한 논지로 반박한 바 있다. 그 근거로 윤치호는 일본이 놓은 철도와 산업시설이 파괴된다면 조선인보다 일본인들이 수백 배는 더 경제적인 손해를 볼 것이라 주장했다. 비슷한 논점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부분적인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에서 그다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일제강점기 후반부 민족말살기와 중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피폐화 등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체감적 효과가 매우 떨어진 점도 있을 것이다.
뉴라이트 계열의 안병직, 이영훈 전 교수 등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고 있다. 이의 반대론으론 조선 시대부터 이미 근대화적 요소가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내재적 발전론이나 일제가 식민지를 수탈했다는 식민지 수탈론이 있다. 반대론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부실한 통계와 일부 근대적 요소만으로 침소봉대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일제가 주도해 작성한 자료 자체에 대한 신뢰성 의문도 제기한다. 사대주의적 역사관이라는 비판도 있다. 다만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은 동시성을 가졌다는 주장도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
현대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성장의 원동력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역사 관점이다.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기에 이어 문화통치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식민통치로 조선에 문명이 이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설치 이후 설치된 각종 도로, 철도, 항구, 공장 산업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겸 민권운동가였다 친일파로 전향했던 윤치호는 당시 일제가 조선을 문명화시킨 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지 조선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비판
일제강점기에 한국이 그 이전 시기보다 경제 면에서 발전했음을 부정하는 역사학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윤치호도 지적했듯 그 의도가 조선인을 위한건 아니었으며, 실제 조선인은 후술되어있듯 억압당했고 종국엔 전쟁까지 치르면서 재산 몰수나 위안부, 강제징용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일본이 근대화한 곳 또는 공업지대를 만든 곳은 한국 북부가 많았는데, 남부에서 이뤄진 발전상은 그마저도 한국 전쟁을 통해 대거 파괴되었다. 즉, 이후의 발전은 식민지 근대화론과는 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여지도 있다.
정치면에서도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고, 일제강점기 조선의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은 모두 조선총독부 총독이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같은 시간 일을 해도 임금을 적게 받는 것과 같은 차별을 당했고, 전혀 근대적이지 못한 법도 존재하였는데 그러한 면을 확실히 보여주는 예로 조선태형령, 국가 총동원법 등이 있다.
문화 면에서도, 조선인은 조선말과 한글을 마음껏 쓸 수 없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는 등 억압을 당했다.
반론
언급된 한계는 사실 근대화의 기초를 오로지 '생산시설의 비축'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영훈 전 교수는 일제가 우리 시대에 남긴 유산으로 저러한 생산시설 뿐 아니라 근대적인 법과 제도, 시장경제 같은 제도적 유산과 일본 유학생들로 대표되는 인적 자본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반론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유산으로서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꼽을 수 있으려면, 일제강점기 이전의 대한제국의 법과 제도가 근대적이지 못하였거나 근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의 법률과 제도들이 확실히 근대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정부는 토지개혁을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자본주의화를 위해 소유권의 국가적 법인인 지계(地契)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였고, 상공업 진흥책(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의 법과 제도 중에는 태형령과 같은 무단법령이 존재하여 전혀 근대적이지 않은 법률이 존재하였으며, 조선인의 집회, 결사 등의 자유가 모두 탄압되었다는 당시 상황을 통해서 결코 일제강점기의 법률과 제도가 쉽게 근대성을 띠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또한, 대한제국기에 교육진흥책이 추진되어 기술학교와 사범학교 및 관립학교가 많이 설립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에 의해 수많은 근대적 사립학교가 세워졌으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간섭을 강화한 일제가 1906년 학교령을 내림으로써 수많은 사립학교가 폐쇄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제가 식민지배의 일환으로 황국신민교육을 실시하며 조선인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였고, 이에 1920년대 민족운동가들이 민립대학설립운동을 할 때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여 좌절시키기도 하였다.
2차 반론과 재반론
그러나 이들 반론측 의견은 한쪽으로 편향된 의견이 일부 존재하며, 반론측 의견과 달리 일제가 일제강점기 당시 도입한 것들은 현대 한국의 정치-사회-교육등 다방면에서 쓰이고 있다. 참고로 해방 이후 식민지배 이전의 제도와 법을 도입하려 했지만 일본이 도입한 서구식 제도와 법의 효율성과 편리성이 지금도 쓸 수 있을만큼 높았기 때문에 무산됐다. 먼저 교육면에서는 여고와 남고의 개념, 고등교육(고등학교)의 개념이 현대 한국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매년 한국 초-중-고등학교에서 개최하는 운동회, 학예회, 수학여행 등은 모두 일제가 도입한 잔재이다. 또한 문화적으로 보면 한국에서 1년이 끝나고 새해를 맞이할 때 섣달 그믐날 밤에 울리는 제야의 종은 신토의 문화요소 중 하나로서, 일제때 도입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면에서도 일제강점기 당시 모든 체육부분을 총괄하던 조선체육회는 후에 대한민국의 대한체육회가 되었으며, 야구와 축구 등의 한국의 인기스포츠 역시 일제가 시초이다. 역사기관 역시 일제가 조선에 두었던 조선사편수회가 진단학회를 거쳐 진단학회의 대표 이병도가 서울대학교 역사학과를 차리면서 한국의 역사학과 역시 일제강점기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도 일본제 한자어가 한국인의 생활-문학적으로 다방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한국의 많은 단어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일본제 한자어이다.
기존에 조선에 없었던 것들이 일제 도입 이후에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면, 이는 결국 일제강점기가 조선민족이 일제의 것들을 받아들여 교육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근대화된 시기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생활-문화적 영향력을 부분적으로 끼친 근거가 될 순 있지만, 식민지 근대화 운운하며 근대화적 발전의 근거라고 하기엔 반론의 여지가 많다. 당장 상기된 글에는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한 사례가 적고 그렇기에 침소봉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또 이렇게 사회 전 분야적으로 따지면 사실 한국이나 일본이나 2차세계대전 이후 근현대화 기반의 모태는 제도적으로나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다수는 미국이 제공한 것이니 '미국 근현대화론'이라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
교육
수학여행 - 메이지 유신 이후 1907년 일본에서 행해지던 것.
체육복
일본제 한자어
실업교육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편수회 - 한국 최초의 역사기관으로, 이후 진단학회를 거쳐 서울대학교 역사학과로 계승된다.
유치원 - 과거 일본학자들이 독일어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유치원으로 번역한 데서 비롯된 말로 일제강점기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
문화/사회
제야의 종 - 일본 종교 신토의 치례이다. 1992년 경성 방송국이 일본인 사찰에서 종을 빌린 뒤 라디오로 생방송한데서 유래.
훈화 - 교내 교사와 교장이 학생에게 하는 말씀으로, '훈화'는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일제 용어에서 비롯됐다.
회고사 - 교내 교장이 졸업식에 하는 말씀으로, 일제 칙령 148조 '국민학교령'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선도부 - 일제 권위주의 상징이다.
두발 제한 - 일제 때 도입되었다.
조회 - 일제 때 도입되었다.
화투 - 고스톱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こいこい'(코이코이)라고 부른다.
전국체전 - 조선체육회가 개최하던 전국운동대회. 후에 같은 이름으로 계승된다.
한국 표준시 - 원래는 동경 127.5°가 기준이었는데 1912년 일본에서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표준시 기준을 동경 135°으로 변경.
평(坪)수 - 아파트, 건물의 집넓이를 말할때의 단어로 토지계량 일제잔재.
벛꽃축제
일제강점기 근대성장
산업근대화
농업비율 85% → 52%(33%p 감소)
공업비율 8% → 26%(18%p 증가)
한국인 보유공장
39개(1910년) → 3963개(1938년)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GDP)
연평균 3.6%(1911년~1940년)
1인당 GDP 증가율
연평균 2.3%(1911년~1940년)
경제성장 요인(1911~1940년)
기술진보 36%
기계·설비와 같은 자본 투입 44%
초등학교 취학율
1925년 12.2% → 1940년 33.8%
조선인 노동자수
1930년 200,000명 → 1941년 770,000명
조선인 기업(회사)
1921년 124개 → 1931년 781개 → 1935년 1243개 → 1939년 3137개
1938년 조선인 공장 수는 3963개로 일본인 공장 수(2627개)보다 1300여개나 더 많았다.
도시화율
1789년부터 1920년까지 정체. 1920년부터 30년까지 도시인구 폭증.
일본이 주도한 근대화였지만, 일본인이 독차지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인도 그로부터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당대의 시각
좌옹 윤치호
구한 말의 독립운동가 겸 민권운동가인 윤치호는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의 혜택론을 반박하였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일본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며 일본의 덕에 조선이 개화가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으며 1938년 수양동우회와 흥업구락부 사건,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 그는 공공연히 일본이 조선을 위해 일한 것이 없다,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이후 조선을 위해서 해준 것이 무엇이냐는 항변을 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한국의 일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일제가 무단으로 한국을 점령해서 통치한다, 따라서 이는 혜택이라 볼수 없다고 봤다. 그는 일제가 힘을 앞세워 조선을 강제로 병합해놓고 조선인들에게 동화를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수탈과 차별을 실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억지로 한국을 합병해놓고 식민 통치를 찬양하게 해 놓고 이것을 은혜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억지라는 것이다.
일본 통치자들이 조선인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특히 토지강탈정책과 조세정책을 중심으로 한 일제의 경제 정책과, 모든 부문에서 관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던 민족차별정책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침략자 내지는 지배자, 정복자로 이해하였다.
윤치호는 일제가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조선을 개발, 곧 근대화시키는 것이 조선과 조선인들보다는 일제와 일본인들에게 더 득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철도 및 도로의 확장, 관개사업 및 조림사업의 진전 등을 자랑삼아 자기들이 조선에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에 대해, '당장 그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제거되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적어도 100배 이상의 (경제적) 손해를 볼 것'이라고 반박했다.
윤치호에 의하면 일제가 한국에 철도를 놓고, 도로를 놓고, 항구를 개척한 것은 일본을 위한 일이지 한국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이 조선의 공물과 곡식과 조선 땅에서 나오는 자원을 일본으로 약탈, 공출해가기 위한 것이지 조선인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는 일제의 통치에 의한 조선의 발전이란 것이 사실은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발전'일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1938년경까지 일제가 한국에 문명화와 선진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 일본을 위한 것이지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니라며 일본과 총독부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기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근대화론에 대한 기타 반박으로는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등의 민족자본 육성론과 박정희의 1960년대 한국 산업화 육성론, 강만길의 대한제국 시절의 근대화 맹아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