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만주사변, 중일전쟁의 서막, 9.18 사변, 류탸오후 사건, 만보산 사건, 나카무라 사건

Jobs 9 2025. 5. 9. 09:06
반응형

 

만주사변(滿洲事變) / 9.18 사변(구일팔사변)

 

천연 자원이 풍부한 만주를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의 관동군이 본국의 승인없이 독단적으로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킨 침략 전쟁이다.

 

만주를 점령하고 난 후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옹립하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국했으며, 이후 소련과 몽골 인민 공화국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존속했다.

 

사변(事變)의 기본 의미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천재(天災)나 그 밖의 중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사변'이라는 명칭이 붙은 여러 사건에 의해, 무력을 사용하게 되는 난리 또는 상대국에 선전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일본어와 중국어에도 유사한 쓰임이 있다. 널리 쓰이는 명칭의 경우 명성황후 살해 사건을 을미사변(을미년의 변)이라 부르는 예, 1.28 사변과 쑹후(淞沪, 송호) 회전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부르는 예가 있고, 6.25 전쟁을 6.25 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어권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날짜에서 따와 9·18 사변(九一八事變)이라는 명칭을 주로 쓰고, 선양 사변(瀋陽事變)이라는 표현도 쓴다.

 

일본에서는 '만주사변'을 쓰나,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의 제안으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서 보는 '15년 전쟁'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배경

 

일본 제국의 군국주의화와 경제적 위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뒤 간도협약으로 만주와 연해주 등에 관한 권리를 포기했었지만, 일본 제국의 대륙에 대한 확장주의는 제국의 태동기부터 존재했다.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번영을 위해선 만주를 식민화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었으며, 후에 삼국간섭으로 무효화되긴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는 등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바가 있었다. 이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주 남부 지역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 대표되는 일본 자본의 경제적인 식민지였다. 한편, 하얼빈을 중심으로 한 만주 북부 지역은 러시아 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사변의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 물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쟁 보상과 할양받은 타이완 섬의 재개발로 경제를 부흥시켰다. 이후 러일전쟁에서도 비슷한 콩고물을 기대했지만 정작 자금이 바닥난 쪽은 일본이라 포츠머스 조약에서 배상금 획득은 없었고, 얻은 건 한반도에서의 우위와 남사할린 정도였다. 결국 여론은 엉망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인 조선은 통치를 위한 기초 작업인 철도와 도로건설에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구조에다가 인구는 너무 많고, 석유나 특산품이라고 내세울 것은 없어 1945년 해방까지 적자만 본 식민지였고, 타이완 섬이 사탕수수 산업 덕분에 그나마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식민지였다.

 

제1차 세계 대전도 떡고물을 노리고 참전했지만, 칭다오 조차와 기존 독일 영토였던 북태평양의 섬 몇 개의 할양에 그쳐 생각보다 소득은 없었다. 중국 시장을 노리고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들이밀었다가 중국 민중의 반발로 5.4운동이 일어나면서 반일감정이 폭발했고, 미국을 위시한 여타 열강의 개입으로 제5항5을 포기했고, 결국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완전히 백지화되었다. 그 대신 엄청난 해운업의 성장으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경제가 부흥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이 경제 회복기로 접어들면서 이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의 1차 북벌로 친일적인 북양정부가 무너지고 국민당의 2차 북벌로 국민정부가 본격적으로 자주외교에 나서면서 더 이상 중국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진데다가 내부적으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군부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군축이 진행되면서 군 내부, 특히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이 축적되어가던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1929년 말 대공황까지 닥치자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극우 정치권에서 위기 탈출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1928년 이를 감지한 관동군의 장교들이 총대를 메고 황고둔에서 장쭤린을 죽여버렸다. 장쭤린은 미쓰야 협정을 맺고, 반봉사건 당시 관동군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가장 일제에게 협조적인 군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제스에게 두들겨맞은 뒤 만주로 쫓겨난데다가 일본이 그에게 제시한 만몽신오로 협약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간 만주에 뿌려둔 떡밥들이 헛수고가 될 것을 우려한 관동군이 1928년에 장쭤린을 폭살하고, 만주를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차지하려 했지만, 장쭤린의 아들이었던 장쉐량은 아버지의 가신이자 자신의 경쟁자였던 창인화이와 양위팅을 없애고 봉천군벌의 자리를 계승했다. 일본은 장쉐량을 압박하여 만주에서의 일본 이권을 보장받으려 했으나 아버지를 잃은 장쉐량은 그말을 무시하고 동북역치를 통해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그렇다고 장쉐량이 급격히 반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일본을 자극하면 만주로 쳐들어올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관동군의 탐욕은 장쉐량이 반일을 하든, 친일을 하든 상관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관동군의 장쭤린 암살은 천황의 재가도, 내각의 승인도 받지 않은 독단적인 행위였고 이때까지 완전히 군국주의에 미쳐 돌아가지는 않았던 일본에서 관동군의 만행은 큰 비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국제사회까지 일본을 비판하자 관동군은 장쉐량이 만주를 장악하는 혼란기를 이용하지 못하고 방관해야 했으며, 대만주 정책은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주도하게 되었다. 다나카 내각은 만주를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한 후, 친일 괴뢰국으로 만들 심산이었지만 장쉐량이 동북역치로 일본의 만주 분리정책에 정면으로 빅엿을 먹이면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나마 일본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장쉐량이 자신의 기반인 동북 3성과 러허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대신에 무리한 관내 진출에만 몰두했고 만주 내부의 구파와 신파 사이의 정쟁이 심해져서 결국 만주사변에서 허망하게 무너지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신은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를 비롯한 월권행위자들을 애국자란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이는 큰 패착이었다. 이후 관동군 사령관이 혼조 시게루로, 참모장이 이타가키 세이시로로 교체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시와라 간지가 등장했다. 관동군 작전참모에 임명되어 만주에 도착한 이시와라 간지는 이시와라 간지 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일본군 내부에서도 매우 독특한 인물에 속했는데, 미래에 동양의 일본과 서양의 미국이 한판 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단아였다. 이시와라는 이에 대비하여 만주와 몽골을 점령하자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그런 그가 만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이시와라는 일본의 만주 병탄이 절대 일본의 사적인 이익이 아닌, 일본·중국·조선 3국의 인민들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시와라만이 그렇게 외쳤을 뿐이지 실제론 땅도둑과 폭군들이 군침을 흘릴 뿐이었다. 애초에 이시와라는 강제로 병탄된 피점령지의 주민들이 품을 반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예전에 그랬다고 해서 지금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는 궤변을 지껄였다. 어쨌거나 그의 막나가는 주장에 대해서 참모본부는 일본의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우려하여 반대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시와라는 참모본부의 반대를 묵살하고 청년 장교들을 선동하여 만주 침략의 길에 나서게 된다.

 

 

 

중국의 혼란으로 인한 침공 기회

 

이 와중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최대의 내전이었던 중원대전이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던데다가 1931년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시키는 탕산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광둥 파벌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1931년 5월 광저우 국민정부를 세우고 독자적인 북벌을 선포하며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고, 대공황의 여파가 중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거기에 장강에선 대홍수가 발생하여 엄청난 숫자의 재산, 인명피해, 이재민이 발생했고 이를 수습하는 것을 두고 국민당 내부에선 격렬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중동로 사건으로 봉천군벌과 소련이 전쟁을 벌이게 되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들은 이때야말로 관동군이 만주를 침공할 적기라고 생각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사건

 

그 와중에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에 대한 떡밥을 뿌리기 위해 수면 밑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바로 1931년 6월의 나카무라 사건과 7월의 만보산 사건이었는데, 이시와라는 각각의 사건을 통해 만주 침공의 명분 축적과 조•중의 관계 악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의외로 장쉐량은 화북 확보에 중점을 두느라 본진인 만주에서 관동군이 벌이는 획책을 무시하고, 일본의 모든 요구를 승낙했다. 동북정무위원회 주석 겸 동북변방군 사령관이었던 장쭤샹과 난징 국민정부의 외교부장이었던 구웨이쥔이 군대를 물려 만주를 지켜야 한다는 조언과 경고를 했으나 이를 모두 묵살하고, 일본의 어떤 트집에도 침략 구실을 제공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장쉐량이 이렇게 나오자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도, 외무부도 일본이 만주에 출병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으나, 문제는 관동군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이시와라 간지는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결탁하여 유약한 본국 정부의 대처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만주를 장악하자는 계략을 꾸몄다. 만약 정부가 이를 끝까지 막을 시에는 쿠데타도 불사할 계획이었다.

 

 

 

전개

 

류탸오후 사건

 

관동군은 9월 28일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 육군참모총장 가나야 한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육군의 후원하에 만•몽을 침탈하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인진 알 수 없으나 강경파였던 혼조 시게루가 8월 1일 관동군 사령관에, 이타가키 세이시로 및 이시와라 간지 등이 관동군의 요직에 배치되었다. 8월 중순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육군 군사과장 나가타 테츠잔 대좌, 보임과장 오카무라 야스지 대좌,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 대좌, 작전과장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 등과 회담을 가지고 만•몽 침탈을 계획했다. 만주로 돌아간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혼조 시게루 사령관에게 중국과 충돌했을 때 중앙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는지 독자적으로 행동이 가능한지를 문의했고, 혼조 시게루가 군사령관으로서 중앙의 명령에는 복종하겠으나 독단전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자 침공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그 계획이란 것이 바로 만철을 폭파시킴으로서 소동을 일으키고, 관동군 사령부 조례 제3조에 의거하여 소동 진압을 위해 관동군을 출동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쇼와 덴노와 일본 정부는 만•몽에 대한 일본군의 무력대응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1년 6월 4일 쇼와 덴노는 미나미 지로 육군대신에게 군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다스릴 것을 주문했고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에게도 따로 중국과 친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 등도 대중 유화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군부의 폭주 기운이 유지되자 덴노는 9월 11일 미나미 지로를 다시 소환하여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 사건 등이 중국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되었으니 메이지 덴노가 만든 군대에 문제가 생겨선 안된다고 엄히 지시했다. 그리고 사이온지 긴모치도 미나미 지로에게 만•몽은 중국 영토인데 외무대신이 아닌 군이 끼어드는 것이 건방지다고 질책했다. 이에 처음엔 관동군의 계획을 지지하던 육군 중앙은 생각을 바꾸어 9월 14일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을 만주에 파견하여 침공 계획을 저지하기로 했다. 다테카와 소장은 만•몽 침탈계획에 찬성하는 인물이었으나 중앙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만주로 향했는데, 명령에 불만을 품고 비행기 대신에 기차를 타며 느긋하게 출발했다. 그가 늑장을 부리는 사이, 참모본부의 러시아 반장이었던 하시모토 긴고로 중좌가 관동군에 다테카와가 봉천에 도착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 한다는 비밀 전문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하시모토 긴고로의 비밀 전문 3통을 전해 받은 관동군 참모장 등의 주요 간부들은 뤼순의 혼조 시게루 사령관에게로 달려갔고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하나야 타다시, 헌병 분대장 미타니 기요시, 주재 분대장 이마다 신타로 등이 봉천에 모였다. 이들은 침공 작전의 실행 여부를 놓고 긴 회의를 가졌으나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9월 16일 9시 반부터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다시 회의를 했는데 9월 17일 오전 3시에 이르러서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이렇게 된 바에야 운을 하늘에 맡기고 나무 젓가락을 세워서 정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즉 점을 쳐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중지, 왼쪽으로 구르면 결행으로 결정한 후 점을 쳤는데 세 번 연속으로 굴렸을 때 모두 오른쪽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이들은 처음에는 계획을 중지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어영부영 정한 '계획 중지 결정'에 젊은 강경파였던 이마다 신타로와 미타니 기요시 등이 반발하여 다시 행동에 옮기자는 주장을 했고, 9월 18일 오후 7시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이 도착하자 애주가였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다테카와도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기쿠분'이란 요정에 데려갔다. 여기서 다테카와가 이타가키에게 설득당했다는 말도 있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렸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다테카와는 이타가키에게 "뒷 일을 자네에게 맡긴다"며 자신은 묵인할 것을 약속했고, 이에 이시와라는 혼조 시게루 사령관을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는 와중에 관동군은 작전을 열흘 앞당겨 침공 계획에 들어갔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20분, 펑톈 외곽 북쪽 7.5km 떨어진 류탸오후6에서 관동군 휘하 독립수비대 2대대 3중대의 공작으로 철도가 폭발했다. 폭발의 규모가 매우 영세해 폭발 30분 이후로 특별열차가 시속 80km로 통과할 정도였으나 애초에 침공의 명분용이었기에 폭발의 규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만철을 폭파시키고 그걸 중국 동북군의 소행이라는 거짓보고를 올렸다. 이에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가 즉시 혼조 시게루 사령관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그를 사칭하여 독립수비대 2대대와 5대대에게 동북군 7여단을, 2사단 29연대에게 펑톈성(봉천성)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면서 만주사변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술을 마시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즉시 요정을 뛰쳐나와 11시에 29연대장과 독립수비보병 2대 부장에게 장쉐량의 동북군이 공격해온다면서 봉천성과 북대궁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사건 보고를 들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 다음에 봉천으로 이동했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와 미야케 고지 참모장은 만주의 장쉐량 군대가 250,000명을 넘고 봉천에만 20,000명을 넘는데 관동군은 10,000명을 조금 넘는다면서 조선군을 출동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시와라 간지는 이미 조선군 작전참모였던 간다 마사타네 소좌와도 이미 조선군의 출동에 대해 조율한 상태였다. 이에 대해 혼조는 대답하지 않은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9월 19일 새벽 1시 7분 관동군은 도쿄에 장쉐량이 선빵을 때렸다는 거짓보고인 205호 전보를 보냈다. 오후 6시 가나야 참모총장이 불확대 방침을 알려오며 쓸데없는 공격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혼조 시게루는 이에 정전할 것을 명령하며, 하얼빈을 공격하려는 이시와라 등의 계획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에 이시와라는 "이제 내 알 바 아니다."라면서 체념했다. 하지만 이타가키는 실망하여 벌렁 드러누은 이시와라에게 하얼빈이 안된다면 길림성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고, 이에 이시와라는 다시 힘을 얻어 봉천을 지키기 위해 길림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며 길림성 진공을 결정했다. 그들은 즉시 다테카와 요시쓰구에게 길림성의 재류 일본인 보호를 구실로 출병할 것을 제안했고 이들을 말리러 온 다테카와는 그 계획에 감탄하여(...) 미야케 참모장과 함께 그들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막료 전원이 혼조 사령관을 설득하여 길림성 출병을 허락받으려고 했지만 '돌부처'란 별명이 있었던 혼조 시게루는 요지부동이었다. 12시 쯤에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뺀 모든 막료들이 포기했고, 곧이어 이시와라도 포기했는데 이타가키는 새벽 3시까지 남아 혼조를 설득한 끝에 그의 승인을 받아냈다. 이렇게 관동군의 고삐는 완전히 풀려버렸다.

 

한편 장쉐량의 항의를 받고 경악한 일본 총영사가 장쉐량과는 협상을 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소좌 하나가 군도를 뽑아 "이 칼이 아무 것도 베지 않고 도로 칼집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오.7"라고 위협했는데 그가 바로 훗날 부하들에 학대로 유명했던 인간 말종 하나야 타다시였다. 

 

 

 

봉천 공략과 남만주의 함락

 

한편 2대대 3중대 소속 105명의 병사들이 가와시마 다다시 대위의 지휘하에 중국 동북군의 북대영을 공격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가와모토 스에모리의 거짓보고가 올라간 이후 그들은 즉시 북대영을 습격했다. 뤼순의 관동군 사령부는 밤 11시에 동북군이 철도를 폭파시켰다는 거짓보고를 받았는데 혼조 시게루 사령관은 의아해하다가 모든 부대에게 만철을 보호하고 동북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9월 19일 오전 8시 30분에 관동군은 조선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쥬로8는 천황의 재가도 참모본부의 승인도 팽개친 채 1개 여단과 2개 비행중대를 급파했다.

 

관동군 2사단은 요양에서 봉천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봉천을 포위했다. 동북군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뜻밖의 습격을 받은 데다가 일본군의 화력이 동북군에 비해 월등하여 곧 패주하고 말았다. 관동군은 봉천의 주요 정부 청사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9월 20일에 봉천을 완전히 함락시켰다. 관동군 사령부는 뤼순에서 봉천으로 이동했고, 펑톈 특무기관장이었던 도이하라 겐지 대좌가 봉천의 임시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 20일 오전 7시엔 관동군 독립수비대들이 장춘을 점령했고, 9월 21일에 혼성여단이 지린성으로 진군하자 지린성 주석대리 겸 동북변방군 참모장이었던 시치아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이리하여 남만주가 통째로 일본 관동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괘씸하나 어쩔 수 없다"

 

더욱 황당한 일은 9월 21일 오후, 조선 주둔 혼성 제39여단 소속 10,000여 명의 병력이 본국의 명령이나 승인없이 무단으로 압록강을 넘어간 행동을 본 일본 정부의 반응이었다. 훗날 "월경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가 명령도 없이 월경을 했으니 이건 군사재판감이었다.

 

실제로 사건을 알아차린 도쿄의 참모본부 역시 정부의 방침과 경비, 국제분쟁 등의 문제를 들어 조선군의 월경을 금지하기로 하는 한편, 각료회의 소집을 요청하여 9월 22일 오전 10시에 각료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은 만주사변이 육군의 계획된 행동이었다면서 육군을 규탄했다. 미나미 지로 육군대신은 우물쭈물하며 대응하지 못했는데 이때 조선군의 월경 소식이 각료회의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반응은 놀랍게도 "씁 어쩔 수 없지였다."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가 9월 19일에 내각을 소집하여 사태를 확대시키지 말라며 관동군과 조선군의 원대 복귀를 명령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주둔 일본군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우왕좌왕하면서 일관성있는 태도를 보이지 못하다가 이런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뭐라고? 이미 만주로 들어갔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예산에서 특별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명언이 남게 된 이유는 그 시절 일본 내각의 구조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의 일본 내각은 국무대신 한 사람만 사퇴해도 내각 전체를 해산해야 했기에 강경파 한 명이 쿨하게 사퇴하면서 내각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잦았다. 황고둔 사건 당시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초기에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이라면서 쇼와 덴노에게 처벌을 요청했으나 육군의 강력한 반발로 "묻어둘 수 밖에 없다."라며 말을 돌렸다. 덴노는 이에 역정을 내며 "다나카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는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7월 2일, 사건이 터진지 한 달만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총사퇴하게 되었다. 뒤이어 다나카의 후원으로 총리가 된 동창 야마나시 한조 조선 총독도 비리로 물러났다. 게다가 다나카 기이치는 내각 총사퇴가 있은 후, 얼마 가지 않아 지병이었던 협심증으로 인해 사망했고, 쇼와 덴노는 다나카의 지병이 악화된 것에 자기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 죄책감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이렇게 내각이 단기간에 여러 번 무너지자 천황과 궁내대신들은 가급적 군과 내각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은 사태 확대를 막아야 한다면서도 군부 강경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조선군의 불법적인 압록강 월경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과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도 즉시 특별 예산을 승인해주었다. 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는 사후 재가를 내려주면 관동군이 남만주를 점령하는 수준에서 진정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남만주를 먹은 관동군은 더욱 미쳐 날뛰며 북만주를 향해 칼날을 돌리고 있었다. 보고를 받은 쇼와 덴노는 조선군의 월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다가 와카쓰키 총리가 이미 각료회의의 결정이 난 것이라 하자 재가에 동의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책임 추궁도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이상의 사정만으로 당시 일본 내각과 천황에게 중국 침략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은 만주사변 전후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 당시 관동군의 월권행위는 명백히 사후 승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오히려 천황과 일본 정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군부, 특히 육군 과격파에게 침략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아래에 언급된대로 만주 점령 이후 일본 제국은 일관되게 중국을 식민지화하고,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본격화했으며, 만주 침략에 있어서 관동군의 독단은 그 시기와 방법에 국한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편, 이때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일본 내각은 결국 과격파 해군 장교들에 의해 벌어진 5.15 사건이라는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결말

 

동북 군벌 장쉐량의 대응

 

당시 장쉐량은 300,000명에 달하는 정규군과 180,000명의 비정규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중국 군벌 중에 최대 규모의 함대와 300대에 달하는 전투기를 가진 공군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펑톈의 병기창은 25,000명의 근로자들이 150문의 대포, 200,000발의 포탄, 1,000정의 기관총, 60,000자루의 소총, 1억발의 탄환을 생산했다. 반면 침략자인 관동군은 15,000명에 불과했으니 단순 숫자 대비로만 해도 대략 50만 대 1만의 싸움이었다. 숫자도 많고 질도 중국 군벌들 중에서 수준급이었던 동북군이 이 상황에서 패배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장쉐량이 측근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대군을 관내의 톈진과 베이핑(베이징)에 주둔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장쉐량은 일본 관동군에게 전면전의 빌미를 줄까봐 두려워했다. 만약 일본이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해온다면 장쉐량이 이길 리 만무했고, 그렇다면 장쉐량은 기반을 모조리 날리게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장쉐량은 일본이 만주를 통째로 점령할 야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일본군이 도발을 해온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이번 도발 역시 그러한 도발의 일환 정도로 가볍게 본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 외무성이 영토에 대한 야욕이 없으며 만철을 보호하기 위한 부득이한 출병 운운하자 장쉐량의 오판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사실 일본이 왜 쳐들어왔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장제스 역시 마찬가지라서, 난징 국민정부가 만주를 아예 병탄하기 위해 일본군이 쳐들어왔다고 확신한 것은 1931년 11월 치치하얼이 함락된 이후였다.

 

사변 발발 당시 장쉐량은 베이핑의 미국계 병원에서 장티푸스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급보를 받자 회의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

2. 난징 (국민)정부에 알려 국제연맹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도록 건의하라.

3. 뤼순으로 대표를 파견해 일본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9월 19일에는 외교관 구웨이쥔과 만나 대책을 논의했는데 구웨이쥔은 국민정부에 연락을 취하여 국제연맹에 본 건을 제소하는 한편,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와 속히 회담할 것을 제안했다. 구웨이쥔은 냉정한 국제외교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국제연맹에 조금도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원론적인 입장에서 일단 제안했고, 그것의 효력을 의심했기에 혼조 시게루와의 면담도 제안했지만 장쉐량은 혼조 시게루와의 면담은 거부했다. 이날 장쉐량은 국민정부의 대표 장췬과 우톄청을 만나 만주사변에 관해 국민정부에 보고했다.

 

9월 23일 장쉐량은 동북변방군 사령장관 공서와 요녕성 정부를 금주로 이전시키고, 9월 26일 휘하의 동북군에게 이번의 무저항주의는 사변을 국제공판에 맡기기 위해서라고 변명했으나 이런 장쉐량의 무저항 지시에, 저항하고 있었던 많은 동북군 부대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관동군에 투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쉐량과 원수지간이 된 만주 구파는 관동군의 회유에 넘어가 미운 상전인 장쉐량을 팽개치고 즉시 일본이 내미는 손을 잡았으니, 대표적인 사람들이 훗날 만주국의 수상까지 하게 되는 당시 동삼성 특별장관이었던 장징후이와 지린성의 주석대리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위안진카이, 장하이펑 등이었다. 장쉐량에게 충성하던 장쭤샹과 완푸린, 왕이쩌(왕이철) 등은 베이핑으로 달아났다.

 

외교적인 대응의 경우에는, 구미 열강들이 현명한 대응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이미 난징 국민정부조차 이것이 별 소용이 없을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후 리턴 조사단의 결정을 일본이 씹어버리고 국제연맹 탈퇴를 강행한 막장 행위를 본다면 난징 정부의 예상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미 장쉐량 본인이 난징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걷어찬 바가 있었지만 가령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하더라도 난징 정부의 수장 장제스 역시 이미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내부의 갈등에 휘말려서 장쉐량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장쉐량의 대응은 여러모로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장쉐량은 훗날 죽은 뒤까지 부저항(不抵抗)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이런 장쉐량의 대응에 대해, 애초에 당시 장쉐량 본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추측도 있다. 그때 장쉐량은 아편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건강을 크게 해쳐서 상황을 판단할 능력도 떨어진 것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장제스는 제3차 초공작전으로 공산당과 격렬하게 싸우던 와중에 1차 양광사변을 맞아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만주사변을 보고받았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독단적으로 협상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왕징웨이에게 나라를 위해 내전을 중지하자고 제안하며 광저우 국민정부와 싸우던 병력을 북상시키고 9월 20일, 제3차 초공작전도 중지한 후 군대를 북상시켰다. 또한 일본 외무성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정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비난만 했고, 일본에게 광둥 정부를 지원하면 만주 점령을 승인하겠다는 어이없는 제안을 했지만 일본에선 왕징웨이가 장제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일본 관동군의 북만주 공략

 

9월 23일 장쉐량은 장제스를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협상하려 했지만 이미 관동군은 만주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10월 15일, 투항한 동북군 병사들을 앞세운 관동군이 치치하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헤이룽장성 성장 완푸린은 달아났고, 장쉐량은 마잔산에게 치치하얼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11월 4일 치치하얼 전투 당시 넌장 강 철교에서 마잔산은 일본군을 습격하여 섬멸했고, 이에 온 중국이 고무되어 마잔산을 군신으로 칭송했다. 하지만 마잔산에게 13,000명의 병력과 30문의 대포밖에 없었는데 반해 일본군은 각종 전차를 앞세우며 진격해왔고 결국 마잔산은 패주하고 말았다. 11월 9일에 치치하얼이 함락되었고 마잔산은 중•소 국경 지대에서 항전했다. 그나마 마잔산 정도가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저항다운 저항을 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만주는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국제연맹의 대응이 지지부진한 것과 관동군의 도를 지나친 공격을 지켜본 장쉐량은 그제서야 맞서 싸우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베이핑에 주둔한 병력을 만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주의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50,000명의 병력으로 진저우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 결정을 난징 정부는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장쉐량은 만주 전역의 동북군에게 저항을 호소했지만 너무 늦은 호소였다. 관동군은 진저우 함락이 쉽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2개 사단을 동원하여 진저우를 공격하려 했다. 국민정부는 진저우 사수와 포기를 놓고 분열되었는데 국민혁명군 참모장 주페이더와 다이지타오는 철수 후 협상을 주장했고, 구웨이쥔은 사수를 주장했다. 그런데 관동군은 생각지도 못한 우군을 만나게 되었다. 다름 아닌 화북 군벌들이었다.

 

장쉐량이 진저우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한 것을 본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군벌들은 즉시 장쉐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이핑이 위험에 처하자 장쉐량은 진저우 주둔군을 롼저우로 철수시켰지만 갑작스러운 철수와 혼란한 전황 속에 결국 동북군은 와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1932년 1월 3일에 진저우가 조선군 20사단에게 함락되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하얼빈도 1932년 2월 5일 일본군 2사단에게 점령되었다. 그렇게 만주 전체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국제연맹의 대응

 

일찍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 배상으로 요동반도를 삼켰다가 삼국간섭으로 도로 토해낸 일이 있었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 제국이 가장 우려하던 상황도, 중화민국이 바랬던 것도 삼국간섭 같은 일이 재현되어 일본군이 만주를 도로 토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자신들의 코가 석자였던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 열강은 일본의 만주 침략을 지지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권에 연계되는 일도 아니라 수수방관했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군에게 원 주둔지로 철수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일본이 상임이사국이라서 무산되었고, 중립 위원을 파견해 일본군 철수를 감시해달라는 중국의 요청도 거부되었다. 미국은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을 제외하곤 더 중요한 교역국인 일본의 비위를 거스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고, 영국도 극동에서 소련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일본을 방패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국은 장제스의 반제국주의와 주권회복 운동 때문에 장제스를 싫어했고, 그래서 "무능한 중국을 위해 일본과 같은 '활동적인 나라'의 발전을 왜 방해해야 하느냐?" 는 개소리까지 했다. 소련도 중동로 사건으로 장쉐량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중국을 무시했다. 게다가 소련 역시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 장악 기간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러워 정신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북만주 이권을 바탕으로 일본에 협조했다. 결국 국제연맹은 평화적 해결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며 시간을 죽였고, 일본이 자발적으로 철병하겠다는 말을 어기며 북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도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1932년 1월 17일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일본 대표는 15,000명의 관동군이 어떻게 만주를 먹을 수 있겠냐며 중국 대표의 비판에 대응했는데 이는 결국 장쉐량에 대한 조롱이었다. 대다수의 열강들은 일본을 지지하거나 방관했고, 국제연맹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일본의 만주 침탈 야욕이 가시화되자 국제연맹은 1931년 12월 10일 영국의 리턴 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의 파견을 결정했다. 1932년 2월 29일부터 시작된 조사는 1932년 9월 4일까지 수 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리턴 조사단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만주국을 해체한 뒤 만주에 대한 중국의 명목상 주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만주를 일본이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만들어 친일 지방정권을 수립할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도 중국도 여기에 반발했다. 일본은 이에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 탈퇴로 대응했고 국제연맹은 자신들의 무능력함만 드러내며 설립 초반에 받은 기대와 그나마 거둔 성과마저도 빛을 바래게 하고 말았다.

 

 

친일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수립

 

사실 일본 제국은 만주를 침탈할 계획은 있었지만 조선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 완전히 합병시키거나 만주국같은 괴뢰국을 세울 생각은 아니었고, 그냥 친일 지방정권(역시나 괴뢰는 괴뢰지만)을 세우는 수준에서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즉 중국의 명목상 주권은 존중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관동군 참모장 미야케 미쓰하루 등은 이시와라 간지와 결탁하여 만주를 멋대로 침공했듯이 만주를 멋대로 분리하려 들었다. 그들은 괴뢰국 수립을 위해 장징후이를 비롯한 만주 구파들을 대거 포섭했고, 이들에게 감투를 뿌렸다. 괴뢰국 정부의 수족이 될 이들은 포섭했으나, 괴뢰국의 권좌엔 누굴 앉힐까 고민하던 관동군은, 자금성에서 추방당해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거주하던 선통제 푸이를 뤼순으로 데려왔다. 이는 일본이 그 동안 외쳐온 영토 야욕이 없음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행위들이었다. 일본은 만주국 수립을 위하여 중국과 전세계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또 하나의 만행을 저지르니 바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이었다.

 

1932년 3월 1일 동북 3성을 관할하는 동북행정위원회는 만주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신징(현재의 창춘시)이었고, 집정에는 푸이, 총리직에는 정샤오쉬가 추대되었다. 또한 그때까지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었던 열하성도 만주국의 영토로 선포되었다. 일단은 만주인의 국가니 대청제국의 부활이니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실제론 600,000명도 되지 않는 일본인과 관동군이 만주국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며 모든 것을 자신들의 뜻대로 좌지우지했다.

 

국제연맹은 리튼 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채택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 제국은 국제연맹 탈퇴로 맞섰다. 15,000명의 관동군은 1932년 94,000명으로 증강되었고 1935년에는 164,000명으로 늘었다. 이후 일본군은 열하사변을 일으켜 열하성마저도 점령했다. 1934년 만주국은 제국을 선포하고, 푸이가 황제에 즉위했으나 허울좋은 일본 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여파

 

"적을 죽여라! 적을 죽여라! 모두 일어나 적을 죽여라!"

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을 전해들은 《중국시보》의 헤드라인.

 

"일본은 만주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 북부를 침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중국 북부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 중부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리하여 아시아 전체를, 나아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결국 불가능을 행하려는 것이며, 스스로 짊어진 무거운 짐에 의해 압도당하게 되는 것이다."

미키 기요시(三木淸), 1935년 12월.

 

1차 양광사변과 제3차 초공작전에 매달리던 장제스에게 그야말로 뒤통수를 제대로 날려버린 사건으로 결국 충격을 받은 장제스는 탕산 사건으로 감금되었던 후한민을 석방하고, 남방의 반장파들도 동조하면서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광서파 등 강경한 반장파들이 협력 조건으로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했으며 슝시링 등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헌정운동을 벌여 장제스를 압박함에 따라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뒤를 이었던 쑨커는 1개월 만에 버티지 못한 채 사퇴해버렸고 장제스는 라이벌인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장왕합작 체제를 구축, 1932년에 군사위원장으로 복귀했다.

 

또한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된 군수공업지대를 날려버린 재앙이었다. 만주는 일찍이 열강들과 봉천군벌의 투자로 근대적인 통신망과 교통망을 부설하고 공업화를 이룩했던 바, 봉천군벌이 소유한 동3성 병공창 하나에서 생산되는 화포와 탄약이 나머지 군벌 소유 병공창에서 생산되는 화포와 탄약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이것이 전부 일본 관동군의 아가리로 들어갔으니 국민혁명군의 무장이 더욱 열악해진 것은 안봐도 비디오였다.

 

만주사변으로 중국 본토로 도망친 장쉐랑은 훗날 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결국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대륙을 제패하는 복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제2차 국공내전 발발 직전까지만 해도 국민당의 우세는 확정적이었으며 장제스가 잘만 대처했어도 공산당을 제압하거나, 최소 만주를 제외한 중국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무리한 만주 진공 작전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공산당의 목숨을 붙여둔 1등 공신이 바로 일본의 침략이었다.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중국 공산당의 패퇴 직전이라는 참으로 적절한 상황에 일본 군부가 만주사변을 저질러준 덕에 중국 공산당은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군인들 몇 명의 광기가 역사를 크게 바꾼 셈이었다.

 

한편 도쿄의 정부에서 내린 명령을 씹고, 불법적인 행패를 부린 이시와라 간지 등이 일본 군부 내에서 처벌받긴 커녕, 잘도 진급하고 영전까지 하자 하나같이 저들처럼 한바탕 해보자! 라는 모험주의 열풍이 불게 되었다. 이후 타이완 섬의 장교들이 (관동군이 만주를 먹었듯이) 푸젠성을 먹기 위해 푸저우에서 부랑자들을 매수하여, 일부러 일본인 교사들을 살해하는 자작극을 벌이기도 했고, 무타구치 렌야는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결국 중일전쟁을 발발시키고 말았다. 신나게 논 이시와라 간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일본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지 뒤늦게 깨닫고, 노구교 사건에 이르러선 일본군의 개입에 반대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자업자득이었다. 무엇보다 이시와라 역시 일시적이나마 대중 확전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적인 날이다 보니 당연히 중국 대륙 전체가 폭발했다. 난징, 상하이 등 중국의 주요 대도시마다 흥분한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일본을 규탄하면서 일본과 무역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당장 대일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고, 수천 명의 학생들이 자원 입대를 요청했다. 다만 국민당은 해당 반일 공작을 국민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판단해 선전포고를 끝까지 거부하고 대신 군벌 토벌과 경제 안정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세한 설명은 중일전쟁 항목 참조.11 무엇보다 당시 중화민국은 일본 제국을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6년이나 더 준비한 중일전쟁에서도 그렇게 큰 피해를 냈는데 군 현대화와 공업화 정책이 시작도 되지 않은 1931년 시점에 일본에 덤빈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이후 공산당은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라며, 일본군에게 만주를 빼앗긴 것은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중국 공산당의 고위 인사들과 친밀했던 에드거 스노우 등이 공산당의 일방적인 모략을 진실인양 세계에 퍼뜨리면서 장제스에게 실지의 책임을 뒤집어씌웠지만 애초에 중국 공산당도 1935년까지 일본이 침략 좀 하면 어떻냐, 우리 세력권 확대하면 그만이지로나 일관하는 막장 세력이었다(...).

 

정작 공산당은 만주사변과 열하사변 때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이동하는 국민혁명군을 습격하며 이득을 취했고, 대장정 이후 섬서성의 옌안에 정착해서는 기동사변, 수동사변 등 일본군이 내몽골과 화북을 장악하기 위해 도발하는 틈을 타서 '동정항일'을 운운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국민당군을 습격하는 것이 항일이라는 억지 주장을 뻔뻔하게 하고 다녔다. 이러한 태업을 넘어선 통수는 중일전쟁 때 절정을 달렸다.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후 마오쩌둥 본인부터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애초에 '항일은 뒷전이고 공산당 토벌에 정신이 팔린 장제스' 때문에 만주를 잃었다는 공산당 측의 비난과 달리 난징 국민정부는 만주에서의 세력이 그리 확고하게 자리잡은 상태가 아니었다12. 설사 장제스가 정말로 장쉐량에게 만주를 절대 사수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하더라도13 결국 결정은 장쉐량의 몫이었지, 장제스가 뭐라고 판단했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난징의 국민정부가 군벌들을 통제못하는 사분오열된 정부였다고 비난한 것이 ‘혁명사관’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앞뒤가 환상적으로 맞지 않는 기묘한 비난이라 하겠다. 한편 장쉐량은 훗날 만주사변은 자신의 판단 오류로 인한 참사였고, 일본 관동군의 의도를 알았다면 목숨을 걸며 싸웠을 것이라면서 대만에서 한탄한 바가 있다.

 

지금도 이 날이면 중국에서 반일 시위와 일본인에 대한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편인데, 특히 2012년 9월 18일을 전후한 반일시위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문제와 국내의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2024년에는 선전 일본 초등학생 피습 사건이 발생했는데, 마침 사건 발발일도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9월 18일이라 중일 양국에서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범죄라는 주장이 나왔다.

 

 

참고 자료

 

《중일전쟁》(권성욱)

《장제스 평전》(조너선 펜비)

《일본의 전통과 군사사상》(하정열)

《만주사변기의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남경정부의 대응>, 김영신, 원광대학교

《쇼와사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루비박스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사토 요코, 어문학사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만주사변 [滿洲事變]

중일전쟁의 서막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계획한 류탸오후(柳條湖) 사건을 발단으로 한다. 이후 일본은 만주지역을 점령하고 이듬해 1932년 3월 만주국을 수립했으며, 동년 5월 탕구(塘沽)에서 중국과 정전 협정을 맺었다. 만주사변은 일차적으로 1931~1933년 류탸오후 사건부터 정전 협정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중국 만주 및 내몽고 지역을 침략한 전쟁을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고 부른다. 당시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으로 판단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불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1920년대 협조 외교 지향의 워싱턴 체제를 무너뜨리는 한편, 국내에서 파시즘 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측면에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

 

 

만주사변의 전개

 

1931년 9월 18일 밤, 중국 펑톈(奉天: 현재 선양) 교외 류탸오후에서 일본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파되는 사건(류탸오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인근에 장쉐량(張學良) 군대(당시 동북변방군)가 주둔하는 베이다잉(北大營)이 있었다. 폭파 사건 즉시 일본 관동군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장쉐량 군대 주둔지와 평톈을 포격하였다.

 

다음날 관동군은,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부대가 펑톈 서북쪽 부근에서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일본의 수비대를 습격하였다 ... 원래 남만주철도는 조약에 근거해 일본이 정당하게 획득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본 신문 『오사카 아사히신문』도 호외를 발행하고, 중국군이 류탸오거우(柳條溝)당시 알려진 류타오거우(柳條溝)라는 지명은 1980년대 연구에 기초해 류타오후(柳條湖)로 정정되었다.를 폭파하고 계획적으로 일본 철도수비대를 습격했다고 보도하였다. 중국군이 먼저 공격을 했고 그에 대응해 일본은 자위 목적으로 군대를 파견했으며, 군사 점령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켈로그-브리앙 조약’ 혹은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General Treaty for the Renunciation of War)이 체결되었는데, 자위를 위한 전쟁 즉 자국의 이익과 관련된 군사 행동은 침략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만주사변이라는 호칭에도 국제법상 전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관동군이 선로에 폭약을 설치했고, 폭약의 양은 열차 운행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계획되었다. 관동군은 펑톈에 이어 이튿날 9월 19일 계획대로 잉커우(營口), 안둥(安東), 펑황청(鳳凰城), 창춘(長春) 등 남만주철도 선상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한편 관동군은 규모가 약 1만 명에 불과해 애초 조선 주둔 일본군 즉 조선군의 출병을 계획하였다. 지린(吉林)에 소동을 일으켜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파병하고, 조선군의 출병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21일 조선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가 칙령 없이 독단으로 압록강을 건너 관동군에 합류하였다.

 

주목할 것은 관동군이 이미 1931년 6월 만주지역 침략을 구체화한 점이다. 주도 세력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젊은 장교들로, 그들은 육군 내 조직을 형성하고 주요 실무를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사변은 관동군의 돌발적인 군사 행동이 아니라, 육군성 및 참모본부와 함께 논의해 전개된 것이었다. 일본정부도 9월 22일 조선군의 월경을 추궁하지 않고, 관동군의 군사 행동을 추인하였다. 다만 군사 행동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관동군은 진저우(錦州)를 공격하며 남만주를 장악하는 한편, 치치하얼(齊齊哈爾)을 점령하고 북만주로 전선을 확대하였다. 동년 12월에 이르러 일본정부는 기존의 방침을 바꿔 만주사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병력을 증원하였으며, 1932년 1월 일본군의 계획에 따라 만주국 건설을 용인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진저우와 하얼빈(哈爾濱) 등을 점령하고 만주지역의 주요 도시 대부분 장악한 상태였다. 결국 동년 3월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국가원수로 하는 만주국을 세우고, 동년 9월 만주국을 승인하고 협정(일만의정서)을 맺었다.

 

한편 일본군은 만주국에 대한 저항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1932년 3월 청더(承德)를 점령하고 장성(長城) 이남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듬해 1933년 3월에는 러허성(熱河省: 현재 내몽고자치구, 허베이성, 랴오닝성 일부)을 만주국의 영역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 근처까지 남하하자, 동년 5월 중국과 일본은 탕구(塘沽)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양국은 란허(灤河) 동부 즉 장성 이남에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고 일본군은 장성 밖으로, 중국군도 루타이(蘆台)-퉁저우(通州)-옌칭(延慶) 라인 이남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만주국과 함께 장성 라인을 국경으로 사실상 인정하였고, 일본은 만주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예견된 충돌 그리고 준비된 침략

 

만주지역은 이미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남하를 배경으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1858년)과 베이징 조약(1860년)을 통해 아무르 일대와 연해주를 획득했고, 1890년대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철도, 즉 동청철도 부설권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청철도의 창춘(長春) 이남 지선 및 부속 토지를 획득하고 관동주(關東州)를 조차했으며, 1906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하였다. 만철은 철도 이외 푸순(撫順)·옌타이(煙台) 등의 탄광을 경영하는 한편, 철도 부속 지구의 행정을 담당하고 철도 10㎞ 당 15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일본은 만철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에 대한 권익을 확대하였다.

 

이후 만주지역의 상황은 중국정부와 군벌 및 공산당 세력 등이 분열하고, 각각의 이익을 위해 열강과 관계를 맺거나 대립하면서 한층 복잡다단해졌다. 1922년에는 장쭤린(張作霖)의 평톈 군벌이 동삼성(東三省)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 철도 건설, 산업 장려, 조선인 이주, 토지 상조(商租) 즉 차용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내셔널리즘의 고조와 함께 국권회복 운동이 확산되었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은 중국 통일을 목표로 내세우고 외국에 빼앗긴 권익을 되찾기 위해 군벌과의 전쟁, 즉 북벌(北伐)을 시작하였다. 이때 제1차 국공 합작(1924~1927)도 이루어졌다.

 

그렇게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에서 중국정부와 군벌의 대립, 국민당과 공산당의 견제 등이 전개되는 이면에는 일본, 소련, 미국 등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관여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자국의 권익을 행사하는 데 방해받았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외교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장쭤린이 반공·반일의 태도를 취하며 서구 열강과 관계를 맺고 투자를 도모하였고, 한편으로 국민당은 다시 북벌에 나섰다. 이에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보내 국민당과 장쭤린 양측을 무장 해제하고 만주지역을 지배하려 했다. 다만 일본정부가 국제 여론에 고심해 군대 파견을 주저하자, 1928년 6월 관동군이 펑톈에서 장쭤린이 타고 있던 열차를 폭파하였다. 군벌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괴뢰정권을 세워 간접 통치를 하기로 계획하고 장애가 되는 장쭤린을 배제한 것이다.

 

일본은 처음에 폭파 사건의 책임을 중국 측에 돌리려 했지만, 곧바로 관동군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 측이 중국정부와 합류해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 이권 회수와 일본상품 배척을 주장하는 운동도 거세어져,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하였다. 이미 일본의 투자처, 상품시장, 중공업 원료공급지 등으로 기능하는 만주지역의 변동은 일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세계 대공황으로 만주지역에서 불황이 이어지는 중에, 중국이 서구 자본을 이용해 독자적으로 철도를 건설하여 만철이 위기에 처했다. 그것은 일본에게 ‘만몽(만주·몽골) 위기’로 인식되었다.

 

일본 국내에서 장쭤린 사건 이후 총리가 교체되었고, 일본정부는 재정 긴축과 함께 미·영과의 협조 외교, 대중국 외교의 쇄신, 군축 촉진 등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일본 역시 불황에 빠졌고 사회 불안이 격화하였다. 무엇보다 해군 군축을 계기로 정계와 군대의 반발이 거세어졌다. 대표적으로 당시 추밀원 부의장인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황실 중심을 강조하는 고쿠혼샤(國本社)를 결성해 국민정신의 함양을 도모하며, 실상 정부를 공격하고 정당 기반의 정권을 흔들었다. 결국 우익(右翼)에 의한 총리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1931년 3월에는 육군 장교들이 주도하는 쿠데타 미수 사건, 즉 3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관동군은 만몽 지역을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강조하며 만몽 영유 계획을 입안하였다. 구체적으로 1930년 9월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는 만몽에 대한 점령 통치를 제기하고, ‘일본 존립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 사명’이라고 하였다. 관동군과 조선군을 동원해 ‘만몽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고 일본 정치를 전환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일본군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1931년 1월 중의원 의원 마쓰오카 요스케가 중의원 예산총회에서 ‘만몽은 경제적으로, 국방의 면에서도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했으며, 같은 해 2월 구체적으로 회령(會寧)과 지린(吉林)을 잇는 철도(吉會鐵道)의 공사가 지연되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조선을 경유해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과 일본 도쿄를 잇는 최단의 간선철도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만주지역에 관해 일본이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중·일 양국의 관계를 악화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먼저 1931년 7월 창춘 서북의 완바오산(萬寶山) 일대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약 200명의 조선인이 완바오산으로 이주해 토지를 빌려 개간했는데, 관개수로 공사로 중국인의 소유지를 침범하였다. 이에 중국이 공사를 중지시켰는데, 일본은 교민 보호를 명분으로 영사관의 경관을 파견해 공사를 속행시켰다. 결국 중국인이 수로를 파괴하는 등 조선인과 중국인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일본과 중국 간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조선에서 중국인 배척의 사태가 전개되는 한편, 일본 국내에도 중국에 대한 강경 외교가 제기되었다. 이어서 일본 육군대위의 피살 사건이 공개되었다. 동년 6월 참모본부 소속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가 농업 기사로 위장해 다싱안링 지구(大興安嶺地區) 내 금지 구역을 조사하던 중 중국군(동북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일 양국은 일단 외교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했지만, 일본이 사건을 공개하면서 일본 국내에 중국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인 이주 문제로써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하고, 육군대위 피살 사건을 공개해 중국에 대한 강경한 여론이 조장되자 관동군이 주도적으로 만주지역을 침략하였다.

 

 

일본,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선택하다

 

만주사변이 발생한 후 중국은 국제연맹에 일본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였다. 당시 우선적으로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던 중국정부는 국제연맹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략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국제 여론의 압력으로 일본이 물러나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서구 제국은 만주지역의 무력충돌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은 시종 일본에 유화적이었다.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을 수용해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첫째, 국제연맹은 만주지역에 대해 영토 확장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둘째, 일본정부는 국민의 안전 및 재산 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가급적 빨리 군대를 철수한다.

 

그런데 1931년 10월 일본군의 진저우 공격 이후 서구 열강은 일본의 태도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이 장성 이남으로 전선을 확대하려는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국제연맹은 미국을 이사회의 입회인으로 참가시키고 이어서 동년 12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곧이어 1932년 1월 일본이 상하이에서 중국과 무력 충돌 하였는데(1차 상하이사변), 항일 세력에 대응한다는 명분을 강조했지만 민간인의 피해가 컸던 격전이었다. 상하이 일대가 자국의 이권과 긴밀히 연관된 만큼 서구 열강은 이전보다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상해사변은 물론 만주사변을 국제연맹 총회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동년 3월 제네바에서 국제연맹 임시총회가 개최되고, 국제연맹은 규약과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에 반하는 만주지역의 변동을 부인하였다.

 

한편 당시 국제연맹 이사회가 임명한 조사단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국의 리튼 백작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Lytton Commission)은 도쿄를 거쳐 중국에 도착한 후 상하이, 난징, 한커우, 베이징 등을 시찰하고 약 1달 간 만주지역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1932년 10월 국제연맹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조사단은 보고서에 중국과 만주지역의 실정, 중·일 양군 간 분쟁, 만주사변의 경과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만주사변을 일본의 침략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군사 행동은 정당방위가 아니며, 만주국은 자발적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고 보고하였다. 즉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일부로서 자치권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만주지역에서 일본의 권익을 인정하고, 중국과 일본 간 경제협력을 주장하는 등 매우 타협적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서구 열강은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1933년 2월에 이르러 국제연맹이 특별총회에서 조사단의 보고서를 반영한 권고안을 채택하였다.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며, 만주국을 합법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현상 재건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제안한 것이다. 이에 중국은 국제연맹의 권고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거부하였다. 국제연맹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미 만주국을 승인하였고, 국제연맹에 대표단을 파견해 만주국 건국의 정당성을 열변하였다. 그리고 국제연맹이 권고안을 채택하자, 일본 대표단이 국제연맹의 회의장에서 퇴장하였고 이어서 동년 3월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버리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까지 만주국에서의 권익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1930년대 중엽 동아시아의 변동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사실상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전개된 이른바 협조 외교의 워싱턴 체제가 무너졌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간 관계에 기본적으로 만주지역 즉 ‘동북 요인’이 작용하게 되었다. 1933년 만주사변에 대해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만주국의 귀속 문제가 양국 간 현안으로 남겨졌을 뿐 아니라, 일본이 화베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기반이 마련되어 향후 양국 간 전쟁의 씨앗이 생겨났다.

 

당시 일본에서는 군대 내 파벌 대립이 격화하는 한편, 일본군은 점차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가진 집단으로 세력화하였다. 구체적으로 만주사변 직후 육군 장교의 주도로 쿠데타가 계획되었고, 이어서 새로 육군대신에 임명된 아라키 사다오를 중심으로 청년 장교 조직이 형성되어 극단적으로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 개조를 주장하였다. 1932년에는 해군 장교가 총리대신을 저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정당 기반의 정권이 무너졌다(5·15 사건). 경제적으로도 일본은 긴축 재정에서 적극 재정으로 전환하고 전시체제에 상응하는 구조가 갖춰졌으며, 그 과정에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재벌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국위 발양과 개척지 확보 등을 기대하는 여론이 커져, 대외 강경의 목소리는 정부가 조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사회는 점차 파시즘 체제로 전환되었고, 결국 화베이 문제를 계기로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점에서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1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30년대 중국 정부는 공산당 평정을 우선시하는 방침을 유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민중은 일본의 침략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예컨대 1932년 상하이에서 중국 민권 보장 동맹이 결성되었고, 반공과 독재 강화에 몰두하는 정부를 비판하며 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중국 공산당 역시 1932년 대일 항전을 선언했지만, 국민당 정부의 압박에 밀려 1934~1935년 대장정을 감행해 옌안(延安)으로 이동하였다.

 

만주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이주한 만큼 조선인에게도 만주사변의 영향은 상당하였고, 조선인의 대일 저항이 거세어졌다.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 주도로 1932년 1월 도쿄에서 이봉창의 의거에 이어, 동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있었다.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1명이 사망하고 주중 일본 공사와 총영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한인애국단의 활동으로 중국에서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호전되고, 임시정부도 곤경에서 벗어났다.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일본 경찰이 임시정부 인사를 체포하면서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 한편 중국에서 한국독립당을 필두로 정당 중심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만 좌우 연합과 통일전선에 대한 이견으로 정당의 분열 및 결성이 빈번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은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함께 항일 전투에 나섰다. 이후 만주지역에서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동북인민혁명군 등을 중심으로 조선인의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