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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修信使) 1876

Jobs9 2020. 9. 2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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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신사(通信使)라 불렀으나,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수신사로 바뀌었다. 이는 양국이 근대적 입장에서 사신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내용

1. 제1차 수신사(1876)

임진왜란 이후 조선수신사일기은 일본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간청으로 국교를 재개하고 고종 초년까지의 260여 년 동안 10여 차례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다. 일본의 사절 역시 여러 번 조선에 와서 양국 사이에는 평화적 외교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부산에서는 왜관무역(倭館貿易)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자 쇄국주의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은퇴하고 왕비 민씨 측이 정권을 잡자, 일본은 다시 우리나라와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森山茂)를 동래에 파견하였다.

일본측은 동래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과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에 보내 조선 군대와 충돌하게 하였다. 이것이 ‘운요호사건’으로서, 책임을 묻는 체하며 전권대신 구로다(黑田淸隆)와 이노우에(井上馨)를 강화도에 보내 조선측 대표 신헌(申櫶)·윤자승(尹滋承)과 회담하고, 1876년 2월 2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체결 후 일본은 계획된 절차에 따라 조선에 초대외교(招待外交) 형식을 취하여 사신을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부는 사례의 뜻을 표하는 의미로 사신 행차를 보내기로 결정,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수신사 일행 76명은 그 해 4월 4일서울을 출발하여, 그 달 29일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수신사 일행은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뒤 약 2개월간의 시찰을 마치고 윤5월 7일부산에 돌아와 6월 1일서울에 도착한 뒤 고종에게 그 동안의 일을 보고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예정에도 없던 일황(日皇)과 만나고,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三條實美)와 이토(伊藤博文)·이노우에 등 일본 정계 요로로부터 연회에 초대를 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또 원로원(元老院)·의사당(議事堂)을 비롯해 육군성·해군성·내무성·공부성·문부성·대장성(大藏省)과 경시청·개척사 및 육해군의 군사시설과 훈련 상황, 박물관·소방 조련 등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화한 모든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사신 행차가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국내 여론은 일본에 대하여 경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김기수의 견문기인 『일동기유(日東記游)』·『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를 보면 일본행 이후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일본관과 그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復命別單)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척신과 조신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강요에 의했다고는 하나 그 뒤 우리나라가 대일 관계, 나아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2. 제2차 수신사(1880)

한편, 일본은 이사관 미야모토(官本小一)가 우리나라에 와서 수호조약에 따르는 여러 가지 세목(細目)을 협정하고, 1879년에는 하나부사(花房義質)가 변리공사로 파견되어 여러 차례 교섭 끝에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을 임시 공사관으로 정하고 상주하게 되었다.

일본은 하나부사를 내세워 부산에 이어 원산을 개항하게 한 다음 서울의외항인 인천의 개항까지 강요하였다. 그밖에도 부산의 관세 배상, 미곡금수(米穀禁輸) 해제까지 제기하여 난처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절충하고 일본 정부의 진의와 개화 실정도 탐색해 보기 위해 1880년 수신사로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그 해 5월 28일서울을 출발하여 일본 기선 센자이마루(千歲丸)로 6월 25일부산을 떠나, 그 해 11월에 다시 부산에 돌아왔다.

당시 일행은 김홍집 등 총인원 58명으로, 그들의 목적은 현안의 외교 문제와 일본의 물정 탐색이었다. 이들 역시 제1차 수신사 때나 다름없이 당당한 진용이었고, 일본 정부측의 접대하는 절차와 태도 역시 예전과 다름없는 상당한 우대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변리공사 하나부사를 접대위원으로 명하고,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외무대보 우에노(上野景範) 등에게 교섭을 담당하게 하면서도 당시 양국 사이에 문제시되었던 관세 개정(關稅改正)·미곡금수·개항·주경 문제(駐京問題)에 관해서는 확답을 피한 채 뒤로 미루기만 하였다.

그러나 김홍집은 외무성을 예방하는 등 정계를 비롯해 교육계·재계 등 각 방면의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며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일행 역시 각각 일본 정부의 각 기관과 시설을 견학하여 일본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의 동향을 살피고 강력한 개화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아직 구미 제국, 특히 미국과 수교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던 때로서, 주일 미국사절이 이노우에를 통해 김홍집에게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청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김홍집은 동경 체류중, 청국공관에서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과 여러 차례 필담(筆談)을 통해 조선이 모르는 국제 정세에 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황준헌은 청국의 구미통(歐美通)으로서 그의 지론(持論)은 김홍집의 마음을 끌었다.

3.『조선책략』과 위정척사운동

그리하여 황준헌으로부터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받아 귀국한 김홍집은 고종에게 경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조선책략』과 다른 신서(新書) 등도 바치게 되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 세력을 막으려면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의 외교정책을 써야 하며, 그 위에 구미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하며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서양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강대·공명·정의의 나라이며, 기독교는 주자학·양명학(陽明學)과 같다는 등 조선의 당면한 외교정책과 부국강병책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 책략은 고종을 비롯해 척신과 대신들 및 신진기예인 청년층에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은 구미 여러 나라와 평화적으로 수교를 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좌의정 김병국(金炳國)과 협의를 하였다. 그런 다음 조선이 고립하는 것보다 열강 여러 나라와 통교할 것을 결정하고 전통적인 이적관(夷狄觀)이나 척사론(斥邪論)에서 탈피하도록 일깨워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책략 내용이 일반에 알려지자 개화·혁신에 대해 반발하던 쇄국·보수의 척사사상에 젖은 유림측으로부터 맹렬한 반대론이 일어나 각처에서 반대 상소가 답지하였다. 유림측은 이러한 내외의 정세 변화에 어두웠고,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사로잡혀서 밖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그 책략과 같은 개국책에 관한 외교 의견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좌서(左書)로 알았고, 이를 물리치는 것만이 애국애족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국내의 유림들은 궐기하여 위정척사운동의 상소를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 책자를 고종에게 바친 김홍집 개인에 대한 공격이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고종을 비롯한 척신과 대신들의 실정을 통격하게 되었다. 이 척사론은 더욱 치열해져서 국내의 유림들이 궐기, 위정척사운동의 상소가 전국적인 규모로 지속되어, 민비 중심의 척족 정권으로는 큰 걱정거리이며 불안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반대 상소 중에는 영남 유생 이만손(李萬孫) 등을 소두(疏頭)로 한 「만인소(萬人疏)」와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복합 상소(伏閤上疏)가 만인의 원성을 대변한 듯 당면한 국정을 통박하였으며, 과감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로써 김홍집은 일시 인책, 사직하고 이만손 등 과격분자는 처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홍재학은 그의 상소가 조정에 사설(邪說)로 널리 퍼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검거, 투옥되어 참형을 받았다. 이에 대한 고종의 비답(批答)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일시 미봉책으로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반포, 각 지방의 거소운동(擧疏運動)을 막는 데 급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배·강제 축출·주륙 등 탄압책을 취해 강화도조약 이후 표면화된 국내의 개화와 척사의 갈등은 날로 커져 갔다.

4.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유림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을 비롯한 세계 정세에 대처하려는 조선 정부 대신들은 문호를 개방, 외국의 새로운 문물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1년 1월 11일조준영(趙準永)·박정양(朴定陽)·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 등 양반 자제의 소장 인물을 망라한 조사시찰단 38명(위원 12명, 수원 26명)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70여 일에 걸친 그들의 사명도 단순한 유람이 아니고, 일본의 내무·농상무·외무·대장·문부·사법(司法)·공부(工部)·육군·세관(稅關) 등 여러 부문에 걸쳐서 골고루 조사하고 연구하자는 것이었다.

의의와 평가

개항 이후 조선에 개화 혁신 풍조가 나타난 것은 일본의 권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세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던 청국 이홍장(李鴻章)의 역할도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 외교 방침의 지도를 청하는 외에, 근대식 무기의 제조 또는 근대식 군대의 편제에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1881년 10월 25일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이 기계·군물(軍物)·함선(艦船) 등 기술 전습을 목적으로 유학생(학도·공장 38명)을 데리고 톈진〔天津〕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말에 나타나는 이러한 움직임은 세계의 진운(進運)에 보조를 같이하려는 조선 정부의 의욕적인 노력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에 대해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미치려는 청·일 양국의 기도도 함께 스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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