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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국어 1520

자화상, 윤동주 [현대시]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개관 - 성격 : 성찰적 - 특징 ① 화자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아 성찰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② 구어체의 산문적 진술을 통해 화자의 내면 고백을 효과적으로 ..

감자 먹는 사람들, 김선우 [현대시]

감자 먹는 사람들 김선우 어느 집 담장을 넘어 달겨드는* 이것은, 치명적인* 냄새 ​ 식은 감자알 갉작거리며* 평상에 엎드려 산수 숙제를 하던, 엄마 내 친구들은 내가 감자가 좋아서 감자밥 도시락만 먹는 줄 알아. 열한 식구 때꺼리*를 감자 없이 무슨 수로 밥을 해대냐고, 귀밝은 할아버지는 땅 밑에서 감자알 크는 소리 들린다고 흐뭇해 하셨지만 엄마 난 땅속에서 자라는 것들이 무서운데, 뿌리 끝에 댕글댕글한* 어지럼증을 매달고 식구들이 밥상머리*를 지킨다 하나둘 숟가락 내려놓을 때까지 엄마 밥주발엔 숟가락 꽂히지 않는다 ​ 어릴 적 질리도록 먹은 건 싫어하게 된다더니, 감자 삶는 냄새 이것은, 치명적인 그리움 꽃은 꽃대로 놓아두고 저는 땅 밑으로만 궁그는,* 꽃 진 자리엔 얼씬도 하지 않는, 열한 개의 구..

태양의 풍속, 김기림 [현대시]

태양의 풍속 김기림 태양아 다만 한 번이라도 좋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나는 두루미의 목통을 빌려 오마. 나의 마음의 무너진 터를 닦고 나는 그 위에 너를 위한 작은 궁전(宮殿)을 세우련다. 그러면 너는 그 속에 와서 살아라. 나는 너를 나의 어머니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나의 희망이라고 부르마. 그리고 너의 사나운 풍속을 좇아서 이 어둠을 깨물어 죽이련다. 태양아 너는 나의 가슴 속 작은 우주의 호수와 산과 푸른 잔디밭과 흰 방천(防川)에서 불결한 간밤의 서리를 핥아버려라. 나의 시냇물을 쓰다듬어 주며 나의 바다의 요람을 흔들어 주어라. 너는 나의 병실을 어족들의 아침을 다리고 유쾌한 손님처럼 찾아오너라. 태양보다도 이쁘지 못한 시. 태양일 수가 없는 서러운 나의 시를 어두운 병실에 켜 놓고 태양아 네가..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 김현승 [현대시]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 김현승 무르익은 과실의 밀도(密度)와 같이 - 공감각적 이미지 잠든 내 어린것들의 숨소리는 작은 벌레와 같이 이 고요 속에 파묻히고, 별들은 나와 자연(自然)의 구조에 질서 있게 못을 박는다. 한 시대 안에는 밤과 같이 해체(解體)나 분석(分析)에는 차라리 무디고 어두운 시인들이 산다. 그리하여 이 끝나는 곳에서 - 낮, 이성의 시간 밤은 상상으로 저들의 나래를 이끌어 준다. 비유적 표현. 꽃 - 낮 / 열매 -밤 ​ 그리하여 시간으로 하여금 새벽을 향하여 이 풍성한 밤의 껍질을 서서히 탈피케 할 줄을 안다. * 밤 : 중의적 의미로 활용되었다. 과일인 밤과 시간의 밤 ​[해제] 이 작품에서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는 밤(夜)을 생명을 품은 시간으로 인식하고, 밤이라는 추상적인 시간..

녹을 닦으며 -공초(供招)14, 허형만 [현대시]

녹을 닦으며 -공초(供招)14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개관 - 제재 : 녹(삶의 부정성, 삶의 부끄러움) - 화자 : 녹이 슨 대문을 닦는 행위를 통해 부끄럽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성하..

살구꽃, 장석남 [현대시]

살구꽃 장석남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굴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환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튿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新과 新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 서정주 [현대시]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 서정주 외할먼네 마당에 올라온 海溢엔요. 예쉰살 나이에 스물한살 얼굴을 한 그러고 천살에도 이제 안 죽기로 한 신랑이 돌아오는 풀밭길이 있어요. 생솔가지 울타리, 옥수수밭 사이를 올라오는 海溢 속 신랑을 마중 나와 하늘 안 천길 깊이 묻었던델 파내서 새각시때 연지를 바르고, 할머니는 다시 또 파, 무더기 웃는 청사초롱에 불 밝혀선 노래하는 나무나무 잎잎에 주절히 주절히 매여달고, 할머니는 갑술년이라던가 바다에 나갔다가 海溢에 넘쳐오는 할아버지 魂身 앞 열아홉살 첫사랑쩍 얼굴을 하시고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마당 → 삶의 터전 * 해일 → 마당(산 자)과 바다(죽은 자)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 * 천 살에도 이젠 안 죽기로 한 → 할머니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 풀..

다섯 살 때, 서정주 [현대시]

다섯 살 때 서정주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길든 건 다섯 살 때부터다. 부모가 웬 일인지 나만 혼자 집에 떼놓고 온 종일을 없던 날, 마루에 걸터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다듬잇돌을 베고 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맨 처음으로 어느 빠지기 싫은 바닷물에 나를 끄집어들이듯 이끌고 갔다. 그 바닷속에서는, 쑥국새라든가 —— 어머니한테서 이름만 들은 형체도 모를 새가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초파일 연등밤의 초록등불 수효를 늘여가듯 울음을 늘여 가면서, 침몰해가는 내 주위와 밑바닥에서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뛰어내려서 나는 사립문 밖 개울 물가에 와 섰다. 아까 빠져 있던 가위눌림이 얄따라이 흑흑 소리를 내며, 여뀌풀 밑 물거울에 비쳐 잔잔해지면서, 거기 떠 가는 얇은 솜구름이 또 정월 열나흩날 밤에..

고야(古夜), 백석 [현대시]

고야(古夜) 백석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山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뒤로는 어늬 山골짜기에서 소를 잡어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山 어늬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고무가 고개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삿..

선우사 - 함주시초 4, 백석 [현대시]

선우사(膳友辭) - 함주시초 4 백석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플라타너스, 김현승 [현대시]

플라타너스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개관 - 성격 : 서정적, 명상적, 감각적, 자연친화적 - 표현 * 색채 이미지의 적절한 활용 * 대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함. ..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현대시]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개관 - 주제 : 사랑의 상실로 인한 슬픔 / 암울한 시대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망 - 성격 : 현실 참여적, 연가풍, 서정적, 상징적, 감상적, 성찰적, 애상적 - 표현 * 애상적이고 안타까운 어조 * 비약과 압축을 통해 시적 모호성을 추구함. * 서경을 통해 화자의 서정을 은근히 드러냄. * 상실과 소멸의 이미지(동여맨, 사라지고, 가리고, 깨어진,..

포스터 속의 비둘기, 신동집 [현대시]

포스터 속의 비둘기 신동집 포스터 속에 들어 앉아 비둘기는 자꾸만 곁눈질을 하고 있다. 포스터 속에 오래 들어 앉아 있으면 비둘기의 습성도 웬만치는 변한다. 비둘기가 노닐던 한때의 지붕마루를 나는 알고 있는데 정말이지 알고 있는데 지금은 비어 버린 집통만 비바람에 털럭이며 삭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 속에는 비둘기가 날아 볼 하늘이 없다. 마셔 볼 공기가 없다. 답답하면 주리도 틀어보지만 그저 열없는 일 그의 몸을 짓구겨 누가 찢어 보아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불속에 던져 살라 보아도 잿가루 하나 남지 않는다. 그는 찍어 낸 포스터 수 많은 복사 속에 다친 데 하나 없이 들어 앉아 있으니 차라리 죽지 못해 탈이다. 개관 - 주제 : 자유와 순수를 잃은 존재의 비극 - 성격 : 문명비판적, 우의적, 상..

대바람 소리, 신석정 [현대시]

대바람 소리 신석정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 핵심 정리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주제 : 세속적 부귀영화를 초월하는 삶의 여유, 은둔과 달관의 삶에 대한 다짐,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 3. 표현상의 특징 - 공감각적 심상 : 청각의 시각화, 후각의 시각화 - 생략법 : 여운을 남기는 효과 - 깨달음이 드러남 (= 인식의 전환) ..

찔레, 문정희 [현대시]

찔레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 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개관 - 제재 : 찔레꽃 → 찔레꽃은 가시를 품고 있는 꽃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아픔을 상징한다. 가시를 품고 있지만 찔레꽃은 봄날 흰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점에서 사랑의 승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뾰..

수의 비밀, 한용운 [현대시]

수의 비밀 한용운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深衣)*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 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B]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심의..

성숙, 고재종 [현대시]

성숙 고재종 바람의 따뜻한 혀가 사알작, 우듬지에 닿기만 해도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짜갈짜갈 소리날 듯 온통 보석 조각으로 반짝이더니 바람의 싸늘한 손이 씽 씨잉, 싸대기를 후리자 갱변의 미루나무 그 이파리들 후둑후두둑 굵은 눈물방울로 온통 강물에 쏟아지나니 온몸이 떨리는 황홀과 온몸이 떨리는 매정함 사이 그러나 미루나무는 그 키 한두 자쯤이나 더 키우고 몸피 두세 치나 더 불린 채 이제는 바람도 무심한 어느 날 저 강 끝으로 정정한 눈빛도 주거니 애증의 이파리 모두 떨구고 이제는 제 고독의 자리에 서서 남빛 하늘로 고개 들 줄도 알거니 시어 풀이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정정한 : 반짝반짝 빛나는 애증 : 사랑과 미움 이해와 감상 1995년에 발표된 고재종의 이 시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한..

새에 대한 반성문, 복효근 [현대시]

새에 대한 반성문 복효근 춥고 쓸쓸함이 몽당빗자루 같은 날 운암댐 소롯길에 서서 날개소리 가득히 내리는 청둥오리떼 본다 혼자 보기는 아슴찬히 미안하여 그리운 그리운 이 그리며 본다 우리가 춥다고 버리고 싶은 세상에 내가 침 뱉고 오줌 내갈긴 그것도 살얼음 깔려드는 수면 위에 머언 먼 순은의 눈나라에서나 배웠음직한 몸짓이랑 카랑카랑 별빛 속에서 익혔음직한 목소리들을 풀어놓는 별, 별, 새, 새, 들, 을, 본다 물속에 살며 물에 젖지 않는 얼음과 더불어 살며 얼지 않는 저 어린 날개들이 건너왔을 바다와 눈보라를 생각하며 비상을 위해 뼈 속까지 비워둔 고행과 한 점 기름기마저 깃털로 바꾼 새들의 가난을 생각하는데 물가의 진창에도 푹푹 빠지는 아, 나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냐 내 관절통은 또 얼마나 호사스러운 ..

구름의 파수병, 김수영 [현대시]

구름의 파수병 김수영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 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 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 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위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들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시를 ..

향현(香峴), 박두진 [현대시]

향현(香峴)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다른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개관 - 주제 : 영원한 화합과 평화에 대한 갈망 / 갈등을 극복한 평화와 공존과 화해와 ..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김혜순 [현대시]

납작납작 -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레 물어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개관 - 제재 : 박수근의 그림 - 주제 : 서민들의 고달픈 세상살이에 대한 서글픔과 연민 - 성격 : 애상적, 비판적, 시각적 - 표현 : 설의적 표현을 통한 주제 암시 대상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현대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개관 - 주제 : 암울한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허무 의식 현실적 삶의 위선과 억압에 대한 비판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구 - 성격 : 낭만적, 현실비판적, 풍자적 - 표현 : 대조적인 상황 설정(새↔우리)..

동물원의 오후, 조지훈 [현대시]

동물원의 오후 조지훈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 난 너를 구경 오진 않았다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詩)를 써도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다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異邦)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된 위치에 통곡과도 같은 낙조(落照)가 물들고 있었다. 주제 : 망국민의 비애/ 식민지 지식인(시인)의 고독과 비애 해제 : 이 시의 제목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정보를 짐작할 수 있다. 화자가 처한 시적 공간(공간적 ..

즐거운 나의 집, 신경림 [현대시]

즐거운 나의 집 신경림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 건넌방에는 아버지가 계신다. 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할머니는 헛간에서 국수틀을 돌리시고 어머니는 안방에서 재봉틀을 돌리신다. 찌걱찌걱찌걱…… 할머니는 일이 힘들어 볼이 부우셨고, 돌돌돌돌…… 어머니는 기계 바느질이 즐거워 입을 벙긋대신다.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 이렇게 옮겨 살아도..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현대시]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세한도(歲寒圖), 송수권 [현대시]

세한도(歲寒圖)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개관 - 제재 : 추사 김정희의 그림 - 주제 :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통한 세한의 극복 - 성격 : 비유적, 상징적 - 특성 ① 말줄임표를 이용한 생략으로 시적 여운을 남김. ② 현재형 시제를 활용하여 현장감을 부여함. ③ 동일한 시행을 반복하여 시적 상황을 드러냄. ④ 미술 작품을 활용해서 의미를 확장시킴.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세한 →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

세한도, 고재종 [현대시]

세한도 고재종 날로 기우듬해 가는 마을 회관 옆 청솔 한 그루 꼿꼿이 서 있다 한때는 앰프 방송 하나로 집집의 새앙쥐까지 깨우던 회관 옆, 그 둥치의 터지고 갈라진 아픔으로 푸른 눈 더욱 못 감는다 그 회관 들창 거덜 내는 댓바람 때마다 청솔은 또 한바탕 노엽게 운다. 거기 술만 취하면 앰프를 켜고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이장과 함께. 생산도 새마을도 다 끊긴 궁벽, 그러나 저기 난장 난 비닐하우스를 일으키다 그 청솔 바라보는 몇몇들 보아라. 그때마다, 삭바람마저 빗질하여 서러움조차 잘 걸러 내어 푸른 숨결을 풀어내는 청솔 보아라. 나는 희망의 노예는 아니거니와 까막까치 얼어 죽는 이 아침에도 저 동녘에선 꼭두서니빛 타오른다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의지적, 희망적 - 특징 : 색체 ..

인동차, 정지용 [현대시]

인동차 정지용 노주인의 장벽에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바깥 풍설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동양적, 관조적, 회환적 - 주제 : 시련을 묵묵히 견디는 인내 - 해제 : 이 시는 겨울의 추위를 이겨 내기 위해 인동차를 마시는 노주인의 모습을 통해 어려운 현실을 묵묵히 견디려는 인내와 기다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 특징과 표현 1. 여백미와 절제미를 통해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함 2. 색채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견인의 태도를 드러냄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추운 겨울 산중에서 홀로 인동차를 마시며 겨울을 견디고 있..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나태주 [현대시]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나태주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 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 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트고 있다, 다시 눈트고 있다.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 냇가에서 손 바닥 벌려 잡다 놓쳐 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향수, 김광균 [현대시]

향수 김광균 저물어 오는 육교 위에 한 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위에 갈매기 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 ―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푸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져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 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 오지.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핵심 정리 - 갈래: 자유시, 서정시 - 어조: 그리움과 추억이 있는 회상적인 어조 - 제재: 고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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