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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국어 1521

수철리, 김광균 [현대시]

수철리 김광균 산비탈엔 들국화가 환 ―― 하고 누이동생의 무덤 옆엔 밤나무 하나가 오뚝 서서 바람이 올 때마다 아득 ―― 한 공중을 향하여 여윈 가지를 내어 저었다. 갈 길을 못 찾는 영혼같애 절로 눈이 감긴다. 무덤 옆엔 작은 시내가 은실을 긋고 등 뒤에 서걱이는 떡갈나무 수풀 앞에 차단 ―― 한 비석이 하나 노을에 젖어 있었다. 흰나비처럼 여윈 모습 아울러 어느 무형(무형)한 공중에 그 체온이 꺼져 버린 후 밤낮으로 찾아 주는 건 비인 묘지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뿐. 동생의 가슴 우엔 비가 나리고 눈이 쌓이고 적막한 황혼이면 별들은 이마 우에서 무엇을 속삭였는지. 한 줌 흙을 헤치고 나즉 ―― 히 부르면 함박꽃처럼 눈뜰 것만 같애 서러운 생각이 옷소매에 스몄다. 개관 - 주제 : 죽은 누이동생에 대한 ..

파초(芭蕉), 김동명, 전원시파 [현대시]

파초(芭蕉) 김동명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개관 - 제재 : 파초 - 주제 : 잃어 버린 조국에 대한 향수 - 성격 : 상징적, 우의적, 의지적, 전원적 - 표현 : 화자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파초를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함. 감정이입. / 상징적 시어의 사용(밤, 겨울 등)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조국을 언제 떠났노 /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 ..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현대시]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 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내려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 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

산, 이형기 [현대시]

산 이형기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시어와 시구 풀이 ▪ 진좌(鎭座)→ 자리잡고 앉음 ▪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할 경이로운 존재 ▪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자연의 모습을 ..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이용악 [현대시]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이용악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고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모것두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 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대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우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은 덮어 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 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절망을 위하여, 곽재구 [현대시]

절망을 위하여 곽재구 바람은 자도 마음은 자지 않는다. 철들어 사랑이며 추억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싸움은 동산 위의 뜨거운 해처럼 우리들의 속살을 태우고 마음의 배고픔이 출렁이는 강기슭에 앉아 종이배를 띄우며 우리들은 절망의 노래를 불렀다. 정이 들어 이제는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이 땅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짓밟고 간 많고 많은 이방의 발짝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이웃에게 눈인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불태우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두려움에 떠는 눈짓으로 술집을 떠나는 사내들과 두부 몇 모를 사고 몇 번씩 뒤돌아보며 골목을 들어서는 계집들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들의 낯선 슬픔이 되지 않았다.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 오르지 않는 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 우리..

날개 1, 김용호 [현대시]

날개 1 김용호 거리에 서면 부후연 먼지와 거센 바람 파아란 하늘이 그리워 발돋움하면 넌, 나를 절름발이라 하는구나 어디메로 가는 구름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보던 구름이기에 움패인 마음 한구석에 철늦은 비를 따루느냐 먼지도 바람도 비도 모두 멎어라 천길 땅속, 뻗은 뿌리에 싹은 터라 내 날고 싶구나 짧은 한쪽 다리를 어루만져 내 날고 싶구나 날개 돋칠 두 어깨에 힘은 솟아라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공무원 국어 PDF 다운로드 공무원 영어 PDF 다운로드 공무원 한국사 PDF 다운로드 공무원 행정학 PDF 다운로드 공무원 행정법 PDF 다운로드 경찰학,헌법,형법,형소법,민법,상법 다운로드 경영학, 경제학, 회계학 PDF 다운로드..

날개, 이상,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상징적 분열 고뇌 [현대 소설]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기 소모적인 삶을 통해 현대인의 분열된 자의식과 고독, 자기 극복 의지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한 실험적인 소설이다. * 갈래 : 단편 소설, 심리 소설 * 성격 : 고백적, 상징적 * 배경 ① 시간 - 1930년대 어느 날 ② 공간 - 경성(서울)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제 : 무력한 삶과 자아 분열 속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아를 찾고자 하는 의지 * 특징 ① 내적 독백을 중심으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됨. ② 상징적 장치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어두운 내면을 드러냄. * 출전 : “조광”(1936) 어휘 풀이 * 아달린 : 최면제나 진정제로 쓰이는 약품. * 아스피린 : 해열제의 일종. * 일주야 : 만 하루. 24시간을 이름. * 맑스 : 마르크스. ..

상하(上下), 박목월 [현대시]

상하(上下) 박목월 I 시(詩)를 쓰는, 이 아래층에서는 아낙네들이 계(契)를 모은다. 목이 마려워 물을 마시려 내려가는 층층대는 아홉 칸. 열에 하나가 부족한, 발바닥으로 지상(地上)에 하강(下降)한다. II 열에 하나가 부족한, 발바닥으로 생활을 질주(疾走)한다. 달려도 달려도 열에 하나가 부족한 그것은 골인 없는 백열경주(白熱競走). III 열에 하나가 부족한 계단을 오르면 상층(上層)은 공기가 희박했다. 개관 - 주제 : 시인이 겪는 시 창작의 현실적 어려움 - 성격 : 의지적, 비유적, 고백적 - 특성 ① 공간의 대비를 통해 주제의식을 강조함. ② 공간의 이동(위층 → 아래층, 아래층 → 위층)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③ 현실적 공간과 이상적 공간의 대비를 통해 주제를 강조함. 중요시어 및 시구..

재로 지어진 옷, 나희덕 [현대시]

재로 지어진 옷 나희덕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개관 - 주제 : 현실을 이겨내고 참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시인의 모습 - 성격 : 의지적, 역설적 - 특성 ① 시어의 대조를 통해 주제의식을 강조함. ② 역설과 도치법을 통해 의미를 강조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봄비를 건너간다 / 비를 맞으며..

선제리 아낙네들, 고은 [현대시]

선제리 아낙네들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

하류, 이건청 [현대시]

하류 이건청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 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에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등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

한(恨), 박재삼 [현대시]

한(恨) 박재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도 몰라, 그것을 몰라! 개관 - 주제 :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 성격 : 애상적, 낭만적, 감각적, 영탄적 - 특성 ①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남. ② 어순을 도치하여 화자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나타냄. ③ 유..

적막강산, 백석 [현대시]

적막강산 백석 오이밭에 벌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정주 동림 구십여 리 긴긴 하룻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개관 - 주제 : 적막강산에서 느끼는 외로움 - 성격 : 감각적, 향토적, 애상적 - 특성 : 산과 벌에서의 체험을 청각적으로 제시함. / 평안도 사투리의 사용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벌배채 → 들 배추. 야생 배추의 방언 * 통이 지는 때 → 배추의 속이 실하게 찰 때. 산과 벌의 계절적 배경을 드러냄. * 덜거기 → 늙은 장..

비, 김수영 [현대시]

비 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

서해, 이성복 [현대시]

서해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개관 - 주제 : 사랑하는 이에 대한 배려와 그리움 - 성격 : 감각적, 역설적 - 특성 ① 의인법과 도치법, 경어체의 사용 ② 감각적(시각적) 심상을 통해 화자의 현재 상황을 나타냄. ③ 서해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당신'에 대한 역설적 태도를 드러냄.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1연 → 역설적 표현, 당신..

노신, 김광균 [현대시]

노신 김광균 시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갯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五臟)을 씻어 내린다. 노신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작품 해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과 시를 쓰는 것 사이에서..

동백-미황사에서, 박남준 [현대시]

동백-미황사에서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 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다만 꽃의 무상함도 일별 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갔던 건 거기 내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

부드러운 직선, 도종환 [현대시]

부드러운 직선 도종환 높은 구름이 지나가는 쪽빛 하늘 아래 사뿐이 추겨세운 추녀를 보라 뒷산의 너그러운능선과 조화를 이룬 지붕의 부드러운 선을 보라 한다 어깨를 두드리며 그는 내게 이제 다시 부드러워지라 한다 몇발짝 물어서서 흐르듯 이어지는 처마를 보며 나도 웃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저 유려한 곡선의 집 한채가 곧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을 본다 휘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있어야 할 곳마다 자리 잡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걸 본다 사철 푸픈 홍송숲에 묻혀 모나지 않게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

지리산 뻐꾹새, 송수권 [현대시]

지리산 뻐꾹새 송수권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로 흘러들어 남해 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

들길에서 마을로, 고재종 [현대시]

들길에서 마을로 고재종 해거름, 들길에 선다. 기엄기엄 산 그림자 내려오고 길섶의 망초꽃들 몰래 흔들린다. 눈물방울 같은 점점들, 이제는 벼 끝으로 올라가 수정 방울로 맺힌다. 세상에 허투른 것은 하나 없다. 모두 새 몸으로 태어나니, 오늘도 쏙독새는 저녁 들을 흔들고 그 울음으로 벼들은 쭉쭉쭉쭉 자란다. 이때쯤 또랑물에 삽을 씻는 노인, 그 한 생애의 백발은 나의 꿈. 그가 문득 서천으로 고개를 든다. 거기 붉새가 북새질을 치니 내일도 쨍쨍하겠다. 쨍쨍할수록 더욱 치열한 벼들, 이윽고 또랑물 소리 크게 들려 더욱더 푸르러진다. 이쯤에서 대숲 둘러친 마을 쪽을 안 돌아볼 수 없다. 아직도 몇몇 집에서 오르는 연기. 저 질긴 전통이, 저 오롯한 기도가 거기 밤꽃보다 환하다. 그래도 밤꽃 사태 난 밤꽃 향기..

흙을 만지며, 조지훈 [현대시]

흙을 만지며 조지훈 여기 피비린 옥루(玉樓)를 헐고 따사한 햇살에 익어 가는 초가삼간(草家三間)을 나는 짓자. 없는 것 두고는 모두 다 있는 곳에 어쩌면 이 많은 외로움이 그물을 치나. 허공에 박힌 화살을 뽑아 한 자루 호미를 벼루어 보자. 풍기는 흙냄새에 귀기울이면 뉘우침의 눈물에서 꽃이 피누나. 마지막 돌아갈 이 한 줌 흙을 스며서 흐르는 산골 물소리. 여기 가난한 초가를 짓고 푸른 하늘이 사철 넘치는 한 그루 나무를 나는 심자.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쩌면 이 많은 사랑이 그물을 치나.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의지적, 기원적, 가정적, 자연 친화적 ▪ 특징 : 대조적 속성을 지닌 시어를 통해 주제를 강조 청유형 어미를 통해 소망의 간절함과 의지를 표명 ▪ 주..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최남선, 최초 신체시 [현대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최남선 1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2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 3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者)가, 지금까지, 없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겨울날, 김광섭 [현대시]

겨울날 김광섭 마당에서 봄과 여름에 정든 얼굴들이 하나 하나 사라져갔다 그렇게 명성이 높던 오동잎도 다 떨어지고 저무는 가을 하늘에 人家의 정서를 품던 굴뚝 보얀 연기도 찬 바람에 그만 무색해졌다 그런 늦가을에 김장걱정을 하면서 집을 팔게 되어 다가오는 겨울이 더 외롭고 무서웠다 이삿짐을 따라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두만강을 건너는 이삿군처럼 회색 하늘 속으로 들어가 식솔들이 저녁상에 둘러앉으니 어머님 한분만 오시쟎아서 별안간 앞니가 무너진 듯 허전해서 눈둘 곳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축대에 검정 포장을 치고 초롱을 달고 가던 이튿날 목없는 아침이 달겨들어 영원한 이별인데 말 한마디 못하고 가라진 어머니시다! 가신 뒤에 보니 세월 속에 묻혀 있은 형제들 공동의 부엌까지 무너져 낙엽들이 모일 데가 없어졌다 ..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현대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지은이 : 김영랑(金永郞)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순수시 - 성격 : 유미적(탐미적 :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거기에 빠지거나 깊이 즐김), 낭만적(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또는 그런 심리..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현대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개관 - 주제 : 당신을 향한 그리움, 당신과 하나의 꿈을 이루며 살고 싶은 소망 - 성격 : 서정적, 낭만적, 의지적 - 특성 ① '당신'과 '나'를 날실과 씨실에 비유하여 시상을 전개함. ② 수미상관의 기법을 통해 화자의 소망을 강조함. ③ 가정적 표현으로 시를 끝맺음으로써 여운을 남기고 있음...

쥐, 김광림 [현대시]

쥐 김광림 하나님 어쩌자고 이런 것도 만드셨지요 야음을 타고 살살 파괴하고 잽싸게 약탈하고 병폐를 마구 살포하고 다니다가 이제는 기막힌 번식으로 웬 쥐가 이리 많습니까 사방에서 갉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연신 헐뜯고 야단치는 소리가 만발해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 세상을 살고 싶도록 죽고 싶어 죽고 싶도록 살고 싶어 이러다난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교활한 이빨과 얄미운 눈깔을 한 쥐가 되어 가겠지요 하나님 정말입니다. 개관 - 제재 : 쥐(인간의 부정적인 모습) - 화자 :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 - 주제 :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 - 성격 : 현실 비판적, 풍자적, 우화적, 우의적 - 표현 * 자연물(쥐)에 빗대어 세태를 풍자함. * 유사한 통..

비에 대하여, 신경림 [현대시]

비에 대하여 신경림 땅에 스몄다가 뿌리를 타고 올라가 너는 나무에 잎을 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때로는 땅갗을 뚫고 솟거나 산기슭을 굽돌아 샘이나 개울이 되어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들고 먼 데 사람까지를 불러 저자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심술이 나면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으로 물고 할퀴어 나무들 줄줄 피 흘리고 상처 나게 만들고 더러는 아예 뿌리째 뽑아 들판에 메다꽂는다. 마을과 저자를 성난 발길질로 허물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을 거친 언덕에 내팽개친다. 하룻밤 새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나무들 열매 맺고 사람들 새로 마을을 만들게 하는 너를 보고 사람들은 하지만 네가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좇아 만들고 허물고 다시 만들면서 너보다도 더 사나운 발길질과 주먹질로 할퀴..

누룩, 이성부 [현대시]

누룩 이성부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無力)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개관 - 제재 : 누룩('민중'의 상징) - 화자 : 역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할 ..

대설주의보, 최승호 [현대시]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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