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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국어/현대문학 540

성탄제, 김종길 [현대시]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

매미 울음에, 박재삼 [현대시]

매미 울음에 박재삼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한낮은 뒤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 울음. 머언 어린 날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 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뻐 기뻐 그려 낼 수 있는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 매미가 우네. - 갈래: 자유시, 서정시 - 표현: 청각적 심상 - 제재: 매미울음 - 주제: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절절한 서러움 - 특징: 이 시의 화자는 춘향이다. 춘향이는 한여름 대낮에 집 뒤의 숲에서 우는 매미 울음 소리를 듣고 임의 말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대님 푸는 작은 소리까지 떠올리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매미의 울음..

슬픔을 위하여, 정호승 [현대시]

슬픔을 위하여 정호승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리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를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표현 : ① 제재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인식이 드러남 ② 역설적 표현을 다양하..

자수(刺繡), 허영자 [현대시]

자수(刺繡) 허영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 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성 싶다. 개관 - 제재 : 자수 - 주제 : 수(繡)를 통한 번뇌의 극복 - 성격 : 서정적, 여성적, 성찰적 - 특성 ① 여성적인 섬세한 정서가 드러남. ② 불교적인 배경이 바탕을 이룸. ③ 간결한 문체와 담담한 태도를 드러냄.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 수를 놓는다. → 화자에게 있어 '수 놓기'가 생산성을 지닌 실질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임을 알 수 ..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현대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개관 - 화자 :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 관련작품 : 부정적 상황의 긍정적 ..

사령(死靈), 김수영, 정의와 자유가 활자로만 존재하는 부도덕한 현실 [현대시]

사령(死靈)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는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덜릐(正義)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수영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비판적, 참여적, 반성적, 자조적 어조 : 자유와 정의가 실종..

서울길, 김지하 [현대시]

서울길 김지하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길 몸 팔러 간다 개관 - 화자 : 고향을 떠나 서울로 몸 팔러 가야 하는 서러움을 애절한 어조로 노래하는 사람 - 주제 :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의 비애 - 성격 : 의지적, 애상적, 현실 참여적, 비판적, 고발적 - 표현 : 반복과 점층적 확대를 통해 화자의 처지와 의지를 ..

하나씩의 별, 이용악 [현대시]

하나씩의 별 이용악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

그 여름의 끝, 이성복 [현대시]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개관 - 화자 : 폭풍 속에서도 붉은 꽃을 피운 백일홍의 생명력을 보고, 화자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의 절망 극복은 백일홍이 힘겹게 이루어 내는 것과는 달리 장난처럼 쉽게 이루어진다. 이는 백일홍처럼 힘겨운 싸움이 없이는 절망이 극복될 수 ..

무심(無心), 김소월 [현대시]

무심(無心) 김소월 시집와서 삼년(三年) 오는 봄은 거친 벌 난벌에 왔습니다 거친 벌 난벌에 피는 꽃은 졌다가도 피노라 이릅디다 소식없이 기다린 이태 삼년(三年) 바로 가던 앞 강(江)이 간봄부터 구비 돌아 휘돌아 흐른다고 그러나 말 마소, 앞여울의 물빛은 예대로 푸르렀소 시집와서 삼년(三年) 어느 때나 터진 개 개여울의 여울물은 거친 벌 난벌에 흘렀습니다. 개관 - 제재 : 고된 시집살이 - 화자 : 고된 시집살이로 인한 어려움과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인한 외로움을 토로하면서도 어디론가 떠나 버린 무심한 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말함. - 주제 :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한 - 성격 : 전통적, 애상적, 여성적, 독백적 - 표현 : 반복과 대칭의 구조 / 의도적으로 리듬감을 만들어 운율의 아..

돌의 노래, 박두진 [현대시]

돌의 노래 박두진 돌이어라, 나는 여기 절정(絶頂). 바다가 바라뵈는 꼭대기에 앉아 종일을 잠잠하는 돌이어라. 밀어 올려다 밀어 올려다 나만 혼자 이 꼭대기에 앉아 있게 하고 언제였을까 바다는 저리 멀리 저리 멀리 달아나 버려 손 흔들어 손 흔들어 불러도 다시 안 올 푸른 물이기 다만 나는 귀 쫑겨 파도 소릴 아쉬워할 뿐. 눈으로만 먼 파돌 어루만진다. 오 돌. 어느 때나 푸른 새로 날아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 몸 속속들이 하늘이 와 스미면 어느 때나 다시 뿜는 입김을 받아 푸른 새로 파닥거려 날아오르랴. 밤이면 달과 별 낮이면 햇볕. 바람 비 부딪히고, 흰 눈 펄펄 내려 철 따라 이는 것에 피가 잠기고, 스며드는 빛깔들 아롱지는 빛깔들에 혼이 곱는다. 어느 땐들 맑은 날만 있었으랴만, ..

향수(鄕愁), 정지용 [현대시]

향수(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

들국화, 이하윤 [현대시]

들국화 이하윤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나는 그들이 읊은 시를 사랑합니다. 이 시에서 들국화는 비유적인 의미를 갖는다. 시적 화자는 들국화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인 빛과 향기 때문에 들국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들에 자유롭게 피고지는 정신 때문에 사랑한다고 한다. 이는 오상고절(傲霜孤節), 즉 서릿발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는 절개를 상징하였던 국화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벗어난 것이다. 2연에서는 들국화의 이미지가 이 땅의 시인들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 시적 화자는 그들의 시가 빛과 향기에 가식이 없..

성에꽃, 최두석 [현대시]

성에꽃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개관 - 제재 : 성에꽃(고달픈 현실에서도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아름다운..

민들레꽃, 조지훈 [현대시]

민들레꽃 조지훈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개관 - 주제 ⇒ 임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외로움 속의 위안. - 소재로 ' 민들레꽃 '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 민들레는 국화과 식물로 노란색과 흰색이 있다. 국화가 절개를 상징하는 관습적 소재라는 점에서, 시적 자아가 지닌 영원한 사랑을 암시하는데 적합할 수 있다. 또한 민들레는 한 송이씩만 피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자아의 외로움을 ..

석상(石像)의 노래, 김관식 [현대시]

석상(石像)의 노래 김관식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먼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 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개관 - 제재 : 석상 → 한없는 그리움의 갈망 - 관련 작품 : 백제 가요 , 신라의 부전가요 , 김소월의 - 화자 : 사별하여 더 이상 소통할 수 없는 임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 - 주제 : 사별한 임에 대한 애틋하고 간절한 그리움 - 성격 : 애상적, 서정적 - 표현 : 산문적 율격 / 망부석 설화 모티프 차..

승무(僧舞), 조지훈, 청록파 [현대시]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 번뇌를 종교적으로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현대시]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리켰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의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개관 - 화자 : 아버..

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현대시]

산이 날 에워싸고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개관 - 제재 : 산 - 화자 : 순수한 삶을 꿈꾸는 이 - 주제 : 자연 속에서의 순수한 삶에 대한 소망 - 성격 : 자연친화적, 탈속적, 달관적 - 특성 ① 동일한 문장 구조의 반복으로 운율을 형성하고 주제를 강조함. ② '생계 → 생활상 → 정신의 달관'으로 자연과의 동화가 점층적으로 진행됨.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산 → 순수한 자연의 세계, 탈속적 세계 * 씨나 뿌리며 ~ 살아라 한다. → 자..

청산도(靑山道), 박두진 [현대시]

청산도(靑山道)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 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

장수산 1, 정지용 [현대시]

장수산 1 정지용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 개관 - 제재 : 장수산의 겨울 정경 - 주제 : 탈속적 삶에 대한 동경, 암울한 시대 현실에 대응하는 태도 - 성격 : 탈속적, 초월적, 동양적, 감각적 - 표현 : 청각과 시각을 통해 ..

아마존 수족관, 최승호 [현대시]

아마존 수족관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팔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끓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새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개관 - 제재 : 여름철 도시의 풍경 - 화자 : 수족관 속 열대어를 바라보는 이 - 주제 : 도시의 삶에 대한 비판과 현대인들의 생명력 회복에 대한 소망 - 성격 : 문명 비판적, 우의적, 풍자적, 상징적..

소야(小夜)의 노래, 오장환 [현대시]

소야(小夜)의 노래 오장환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自由)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里程表)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더러운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墓)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正月) 기울어 낙엽송(落葉松)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山)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로 나려 비애(悲哀)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刑囚) 발은 무겁다. 개관 - 제목의 의미: 밤의 이미지로서 "암담한 현실/어두운 시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가 있고, "小夜"는 "초경" 즉 저녁 무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점차로 어두워져 가는 시대적 현실..

마음의 태양, 조지훈 [현대시]

마음의 태양 조지훈 꽃 사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자. 가시밭길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만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른다.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자. 개관 - 주제 : 높고 아름다운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과 지향 / 맑고 높은 영혼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 - 성격 : 이상적, 의지적, 낭만적 - 특성 ① 의인화를 통해 대상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

강원도의 돌, 마종기 [현대시]

강원도의 돌 마종기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 냄새 매일을 그 물 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 속에 누워서 한 백 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향토적, 낭만적 - 어조 : 일상적 대화의 어조 - 사상적 배경 : 동양의 도교(노장사상) - 제재 : 돌 - 표현 ㆍ 반복과 변조를 통해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ㆍ 중심 대상(돌)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ㆍ 친근감이 느껴지는 일상 대화식 어투를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고향, 윤동주 [현대시]

또 다른 고향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세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개관 - 성격 : 상징적, 관조적, 자의식적 - 표현 : 자아의 대립에 의한 갈등 구조 - 주제 : 진정한 고향(영혼의 고향, 이상 세계)에의 동경 - 제재 : 자의식의 세계 중요시어 및 시구 * 나 → 개인적 자아. 백골과 아름다운 혼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

성호부근(星湖附近), 김광균 [현대시]

성호부근(星湖附近) 김광균 Ⅰ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Ⅱ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 머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다. Ⅲ 앙상한 잡목림(雜木林) 사이로 한낮이 겨운 하늘이 투명한 기폭(旗幅)을 떨어뜨리고 푸른 옷을 입은 송아지가 한 마리 조그만 그림자를 바람에 나부끼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논둑 위에 서 있다. 개관 - 제재 : 호수 - 주제 :..

설일(雪日), 김남조 [현대시]

설일(雪日)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개관 - 주제 : 신의 존재를 느낌으로써 고독을 극복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가려는 새해의 다짐 - 성격 : 감각적, 서정적, 기원적 - 표현 : ..

춘향유문, 서정주 [현대시]

춘향유문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개관 - 주제 ⇒ 시공을 초월한 여인의 불변불멸의 사랑 - 성격 : 전통적, 고전적, 낭만적, 이상적, 초월적, 불교적 - 표현 * 여성적이고 섬세한 어투 * 독백 형식의 문체 * 4음보의 안정된 율격 * 대조법, 대구법 중요 시어 및 시구풀이 *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

너에게, 신동엽 [현대시]

너에게 신동엽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 순 돋듯 허구 많은 자연 중(自然中)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개관 - 제재 : 너(소중한 이) - 주제 :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소중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 소망과 의지 / '나'의 사후에도 이어지게 될 연인(혹은 후손)의 삶에 대한 배려 - 성격 : 서정적, 의지적, 자기희생적, 미래지향적 - 표현 : 유언의 형식, 희생양 모티프 /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으로 운율감과 화자의 의지 강조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나 돌아가는 날 → 화자가 죽는 날 * 너 →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데, '사랑하는 사람', '죽음을 통해서라도 얻어 내야 할 이상과 희망', '더 나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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