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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 1139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단종,수양대군,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사육신(死六臣)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왕세자가 즉위하자, 이 때부터 조정 안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어린 왕의 보필을 맡은 이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원로대신과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문신이었다. 하지만 원로대신들은 이미 칠순 고령이어서 정치 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경주할 수가 없었고,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위가 낮아 국가 대사에 직접 참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왕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심복 대신을 제거하고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14..

단장의능선전투(斷腸─稜線戰鬪),1951년, 6·25전쟁,양구군 ,UN군,공산군,고지전

1951년 6·25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연봉에서 UN군과 공산군 간에 벌어진 전투. 내용 전투기간은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이다.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은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에도 실세(失勢)를 되찾으려는 의도에서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이에 UN군측은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로 하고, 그 해 8월 18일부터 일련의 제한적인 목표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공세의 일환으로 미 제2사단은 9월 5일양구 동북방 ‘피의 능선’을 빼앗고 9월 13일부터는 그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단장의 능선’은 양구와 인제의 중간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양구 북방 문등리 일대의 연봉들로, 능선 동쪽의 사태리계곡과 능선 서..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1950년,국군 제1사단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선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년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제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고, 당시는 7월 20일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던 직후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게 된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 둘째,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공격, 셋째,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 차단, 넷째, 남해안을 따..

다루가치살해사건, 1232년, 몽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고가 고려에 배치한 다루가치(荅嚕噶齊, darughachi)를 고려인이 살해한 사건. 다루가치는 몽고어로서, 그들이 경략(經略)한 지역의 민정을 감시하는 관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1231년 몽고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등 북방요지를 휩쓸고, 서경을 거쳐 개경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별동부대를 남하시켜 광주(廣州)·충주·청주 등지를 유린하였다. 이것이 바로 몽고의 제1차 침입이다. 고려는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侹)을 몽고의 살리타(撒禮塔, 薩里台)가 주둔하고 있던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주 01)에 보내어 강화를 맺었다. 이 때 살리타는 개경과 그들이 경략한 주군(州郡)에 다루가치 72인을 두고 물러갔다. 그런데 그들이 이듬해 고려에서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내용은 모두 원..

농지개혁(農地改革), 1949년 농지개혁법, 1950년 실시

농업경영의 합리화와 농촌의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토지소유권을 경작자에게 이양하여 경작인의 보호에 중점을 두는 개혁조처. 농지개혁은 1949년 6월 21일에 제정, 공포된 「농지개혁법」에 의거 1950년에 실시한 것이다. 당시 농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는 첫째, 8·15광복 직후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민주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데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우리 나라 농지의 소작비율은 전농지 222만6000㏊의 65%인 144만7000㏊가 소작지였다. 그와 같은 많은 소작지에서 가혹한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던 농촌경제는 매년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민주의식과 평등의식이 고조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적지 않던 때에 일본인 소유농지였던 29만1..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1894년,고종,일본,조선의 내정 개혁 요구,속방론,청일전쟁

1894년(고종 31) 대군을 출병시킨 일본이 조선측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면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한 회담. 1894년 봄,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조선에 7천여 명의 대병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동학 농민군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일본군이 계속 조선에 주둔할 명목이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권 획득을 도모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촉발시키려는 속셈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측은 청나라를 상대로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 뒤 조선은 6월 26일 이래 일본측이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해 오자, 7월 7일 내아문독판..

노량해전(露梁海戰),정유재란,1598년,선조,이순신(李舜臣),진린(陳璘),조·명 연합함대,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이순신 전사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

냅코프로젝트,OSS(전략첩보국),1944년,한인 공작원,한반도침투작전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전략첩보국)이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걸쳐 한인 공작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미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한반도침투작전. 한반도침투계획을 기획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첩보국)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던 1941년 7월 11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립된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 정보조정국)를 발전시켜 1943년 6월 13일 조직된 미국 정보기관이다. OSS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활약하였고 종전 후에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군과 국무성에 분할되었다가 1947년 다시 CIA(중앙정보국)로 재현되었다. OSS는 재미 한인 중 민간인과 군인, 미국 내 포로..

남해민란(南海民亂),1862년,철종,경상도 남해현

1862년(철종 13) 12월 21일 경상도 남해현(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일어난 민란.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2월 23일 난민들이 읍 창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환곡 16석을 향청으로 옮겨가고 문부(文簿)를 불태웠는데, 7개 면민이 낸 등장(等狀)주 01)에 의하면 환곡의 폐단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28일 남해현령의 첩정(牒呈)주 02)에 의하면 난민들은 흰 수건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집을 부수거나 불지르거나 하였다. 22일에는 각 면이 일제히 일어나 그 수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였다. 고현면(古縣面)의 향민인 이민형(李敏馨)의 집을 불지르고 곧 성에 들어가 지난날 서리였던 김대일(金大鎰)·정직모(鄭直謨)·박의록(朴義祿) 등의 집과 말단향리인 김약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南韓社會主義勞動者同盟事件),1991년,백태웅,박노해,조국,사노맹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조직원들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체포된 사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조직이었다. 사노맹의 탄생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정치투쟁의 중심 기축 이동과 관련이 있다. 1970년대까지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으나, 광주항생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지원하게 되었으며, 그 성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구성되었다. 1985년 말 학생운동은 변혁론을 바탕으로 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가 대립하게 되면서 이후 변혁운동진영은 NL진영과 반 NL진영으로 양분되었다. 다양한 전위조직 중의 하나이자 1986년 초부터..

남한대토벌작전,대한제국,일제,의병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할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인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에 일본군 등을 배치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한 국내 의병세력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의 조직과 역량이 더욱 강화되었다. 의병의 활동지역은 충북과 강원도 접경지역을 넘어 1908년에는 지리산 서쪽의 호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전라도의 전투 횟수는 전국 대비 25%였고, 전투의병수는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이런 상황이 더욱..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1976년,반유신 민주화,민족해방,비합법 지하 조직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비밀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월 9일과 16일 그리고 11월 3일 등 3차례에 걸쳐 구자춘 내무장관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민전 결성을 주도한 이재문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가담해왔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된 상황 하에서 남민전을 결성한 것이었다. 남민전은 1977년 1월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 ‘민중의..

남북협상(南北協商),1948년,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단독정부수립

1948년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등 단독정부수립노선에 대항한 일련의 정치회담. 1947년 5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과 소련 대표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고, 그 해 11월 국제연합 총회는 미국이 제안한 한국통일안을 통과시켰다. 1948년 1월 이 결의에 의한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 방문을 소련과 북한측이 거부함으로써 남북의 통일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민족내부적으로는 남북협상을 통해 자주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종래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 뒤에 ..

남북한동시유엔가입(南北韓同時─加入),1991년

1991년 남한과 북한이 각각 유엔 회원국이 된 사건.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1991년 9월 17일(18일, 한국시간) 남·북한은 동시에 그리고 각각 유엔 가입국이 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며 단독 가입을 추구했다. 한편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이완되자 남북 간에 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등 적대적 대립관계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남한은 소련과의 국교 수립(1990년 9월), 중국과의 무역대표부 설치 합의(1990년 10월) 등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1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남·북한 유엔 가입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같은 해 9월 17일 유엔총회는 남북한과 마셜군도 등 7개국의 유..

나제동맹(羅濟同盟),433년,신라,백제,고구려남진정책,비유왕,눌지왕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맺은 동맹. 최초 나제동맹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삼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초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요동(遼東)방면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고구려는 한반도 쪽으로의 팽창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는 당시 북진정책을 전개하고 있던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한편, 내물왕(奈勿王, 356∼402)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66년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호(和好)를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관계는 형제관계처..

나선정벌(羅禪征伐),1654년,조선 효종,청의 요청,러시아 공격

조선 효종 때 조선이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공격한 사건.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은 흑룡강(黑龍江)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 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군사를 보내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

나당전쟁(羅唐戰爭),백제 고구려 멸망,신라, 당나라,7년 전쟁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 당나라가 7년간 싸운 전쟁.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였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한반도의 영토 문제로 신라와 당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670년 3월 신라의 오골성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어,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크게 패하였다. 나당전쟁의 분수령은 675년 9월에 발생한 매소성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전세는 신라로 기울었다. 이후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역사적 배경 7세기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특히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면서, 신라의 위기감이 고..

김헌창의 난(金憲昌─亂),822년,헌덕왕,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김헌창,제2차왕위계승전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반란 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역사적 배경 김헌창의 난은 작게는 원성왕(元聖王, 785∼798)계 귀족들과 무열왕(武烈王, 654∼661)계 귀족들 간의 제2차 왕위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계승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김지정의 난(金志貞─亂),780년,혜공왕,이찬(伊飡) 김지정

780년(혜공왕 16) 2월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일으킨 반란. 『삼국사기(三國史記)』혜공왕(惠恭王) 16년조에 “왕이 어려서 즉위해 장성했는데 성색(聲色)주 01)에 음란하고 순류(巡遊)에 절도가 없어 강기(綱紀)가 문란했으며, 재이(災異)가 자주 일어나 인심이 반칙하고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어,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모반(謀叛)해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을 포위해 이를 범하였다. 그런데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주살하고 혜공왕(惠恭王)과 그 후비(后妃)까지도 난중에 시해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사적 배경 혜공왕 대는 신라 중대(中代)의 전제 왕권이 한계점에 도달한 시기로, 진골(眞骨) 귀족들의 대대적인 모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대..

김자점의 옥(金自點─獄),1651년,효종,인조반정,김자점 역모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역모로 일어난 옥사(獄事). 이귀(李貴)·김류(金瑬) 등과 더불어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자점은 인조가 즉위하자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훈녹되었다. 그리고 집권 공서파(功西派)의 영수가 되어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淸西派)를 탄압하였다. 또한,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주 01)와 혼인시켜 외척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49년효종이 즉위하자 평소 김자점의 독주를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金餘慶)과 집의 송준길(宋浚吉) 및 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

김옥균암살사건(金玉均暗殺事件),1894년,상해(上海),홍종우(洪鍾宇),청일전쟁시발점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 갑신정변으로 일대 타격을 받은 민씨척족정권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의 주모자들을 대역 죄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그들의 체포 및 송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와 범죄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만국 공법상 망명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1885년 말 망명 중인 김옥균이 일본의 구자유당계(舊自由黨系) 불평정객 및 낭인들과 결탁해 한국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조선 정부는 그의 송환을 다시 요구하는 한편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統..

김사미의 난(金沙彌─亂),1193년,명종,무신정권기민란,신라부흥운동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 운문에서 김사미가 일으킨 반란.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의 귀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해,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은 약 1백년간(1170∼1270) 존속하지만 무신 집권 초기의 정국은 매우 혼란하고 불안정해,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은 이 틈을 타서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은 무신정권의 전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나, 그 규모나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은 무신정권 초기의 약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 시기에 삼남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민란의 하나였다. ..

김보당의 난(金甫當─亂),고려 명종,동북면병마사,반무신란(反武臣亂)

고려 명종 때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이 일으킨 반란. 계사년(1173)에 일어났으므로 계사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은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173년(명종 3) 8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동북면병마사로 있으면서 앞서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정중부·이의방(李義方) 등을 토벌하고 전왕(前王) 의종(毅宗)을 세우고자 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 등과 모의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장순석·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고, 내시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동시에 군사를 발하게 하니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이에 합세하였다. 장순석 등은 거제(巨濟)에 이르러 유배되었던 의종을 받들고, 경주로 나와..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헌종,제2차 천주교 박해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 기해사옥이라고도 한다. 1839년 3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되어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僻派)의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김대왕대비는 순조의 계증조모(繼曾祖母)이며 벽파에 속하였는데,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에 속했던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순조의 비로 삼자 정권을 빼앗겼다. 이 후 36년간에 걸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순조는 1827년 2월 28일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사를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장인이 조만영(趙萬永)이었고 당시 어영대장의 자리에 있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정여립, 동인, 서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광해군, 에도막부,강화조약,통신사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통교를 위해 에도막부[江戶幕府]와 맺은 강화조약. 임진왜란으로 서로 적대시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일본은 전쟁 뒤 10년 만에 그들의 지속적인 요청을 받아들여 이 조약이 성립되었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 측에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이에 앞서 우리나라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이러한 끈질긴 요청에 우리 측도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국교를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할 계획을 세웠..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숙종,인현왕후,소의 장씨(昭儀張氏),서인,남인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

기벌포전투,676년,문무왕,기벌포(伎伐浦),신라,당나라,대당전쟁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8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조광조,,주초위왕(走肖爲王),김정(金淨),김식(金湜),남곤(南袞),심정(沈貞)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그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유생 200인의 ..

금성전투,후삼국, 왕건(王建),후백제(後百濟),견훤(甄萱),나주싸움,금성(錦城),나주성(羅州城)

후삼국시대 초기에 궁예(弓裔)의 장수였던 왕건(王建)이 나주 일대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군에게 크게 이긴 싸움으로서 금성(錦城)이 전라남도 나주의 옛 이름인 데에서 ‘나주싸움’이라고도 함. 견훤은 전라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를 차지해 후백제라 칭하고, 궁예는 경기·황해·강원도 등 중부 지방을 장악해 후고구려라 하였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중부 지방을 공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왕건의 선조는 대대로 해상 무역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아 상당한 세력을 키웠으며, 이 지방의 일부 해상 세력과 궁예 휘하의 왕건 세력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왕건의 세력은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을 장악해, 후백제가 중국과 통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고립시키고 구백제 세력의 분열을 노렸다. 금성전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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