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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인물 170

인조(仁祖), 조선 제16대(재위:1623~1649) 왕

조선후기 제16대(재위:1623~1649) 왕. 재위 1623∼1649.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종(倧)이다. 자는 화백(和伯)이다. 호는 송창(松窓)이다.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주 01)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 이어 능양군에 진봉(進封)되었다. 광해군 때는 대북(大北)이 정권을 잡아 왕으로 하여금 영창대군 의(永昌大君㼁)를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게 했으며, 또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정치가 혼란해졌다. 그러자 1623년 ..

명종(明宗), 조선 제13대(재위:1545~1567) 왕

조선전기 제13대(재위:1545~1567) 왕. 재위 1545년(명종 즉위년)∼1567년(명종 22).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환(李峘), 자는 대양(對陽). 중종의 둘째 아들로 인종의 아우이고,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

중종(中宗), 조선 제11대(재위:1506~1544) 왕

조선전기 제11대(재위:1506~1544) 왕. 재위 1506∼154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역(懌)이다. 자는 낙천(樂天)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다.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 9월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홍문관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주 01)·..

연산군(燕山君), 조선 제10대(재위:1494~1506) 왕

조선전기 제10대(재위:1494~1506) 왕. 재위 1494∼150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융(李㦕). 성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성종(成宗), 조선 제9대(재위:1469~1494) 왕

조선전기 제9대(재위:1469~1494) 왕. 재위 1469년(성종 즉위년)∼1494년(성종 2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혈(李娎).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주 01)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다. 천품(天禀)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에도 능해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세조(世祖), 조선 제7대(재위:1455~1468) 왕

조선전기 제7대(재위:1455~1468) 왕.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

세종(世宗), 조선 제4대(재위:1418~1450) 왕

조선전기 제4대(재위:1418~1450) 왕.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해,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킨 일련의 행동과 사건들로 인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

태종(太宗), 방원(芳遠)

조선전기 제3대(재위:1400~1418) 왕. 재위 1400∼141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방원(芳遠)이다.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때 원천석(元天錫)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 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을 요청하는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조선전기 제1대(재위: 1392~1398) 왕. 재위 1392∼139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처음 자는 중결(仲潔)이다.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이단(李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에서 태어났다.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했다.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주 01)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이..

인종(仁宗), 묘청의 난

고려전기 제17대(재위:1122~1146) 왕. 재위 1122∼1146. 이름은 왕해(王楷), 초명은 왕구(王構). 자는 인표(仁表). 예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덕왕후(順德王后) 이씨(李氏)이다. 비(妃)는 이자겸(李資謙)의 3녀·4녀인 폐비 이씨,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의 딸 공예왕후(恭睿王后), 병부상서 김선(金璿)의 딸 선평왕후(宣平王后)이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1115년(예종 10) 태자로 책봉, 이자겸 등에 의해 1122년 4월에 15세로 왕위에 올랐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인종 재위 때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했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예종(睿宗), 고려 제16대(재위:1105~1122) 왕, 여진정벌, 신기군, 윤관

고려전기 제16대(재위:1105~1122) 왕. 재위 1105∼1122. 이름은 왕우(王俁). 자는 세민(世民). 숙종(肅宗)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의태후(明懿太后) 유씨(柳氏)이다.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해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대한 서소(誓疏)주 01)를 간직했다가,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神騎軍)주 02)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썼다. 1107년에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였다.[함흥평야에서 두만강 북쪽 일대에 이르기까지 9성을 설치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 그러나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 9성 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

문종(文宗), 고려 제11대(재위:1046~1083) 왕, 경정전시과

고려전기 제11대(재위:1046~1083) 왕. 재위 1046∼1083. 이름은 왕휘(王徽), 초명은 서(緖), 자는 촉유(燭幽). 고려 현종(顯宗)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 김씨(元惠太后金氏)이다. 형인 제10대 왕 정종(靖宗)에게 아들이 있었지만,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해 1046년(정종 12)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1비(妃)는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의 딸인 인평왕후 김씨(仁平王后 金氏)이다. 인평왕후의 어머니는 현종의 제3비인 원성태후 김씨(元成太后 金氏)로 문종의 어머니인 제4비 원혜태후와는 자매지간이었다. 따라서 문종과 인평왕후는 왕과 왕비의 관계 이전에 이복남매지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시대 근친혼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는 혼인관계이다. 또한 이자연(李子淵)의 딸들을 비(妃)로..

현종(顯宗), 5도양계, 공복제정, 중앙집권체제확립, 북진정책추진, 호족세력억압

고려전기 제8대(재위:1009~1031) 왕. 재위 1010~1031. 이름은 왕순(王詢). 자는 안세(安世). 아버지는 태조(太祖)의 여덟 째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이다. 어머니는 경종의 비 효숙왕후 황보씨(孝肅王后皇甫氏)이다. 처음에는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있다가 강조(康兆)의 정변에 의해 목종이 폐위되자, 1009년 2월에 왕위에 올랐다. 고려 왕조가 성립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였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十訓要)」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해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우왕(禑王), 고려 제32대(재위:1374~1388) 왕, 폐가입진(廢假立眞), 우창비왕설, 신우전

고려후기 제32대(재위:1374~1388) 왕. 재위 1374∼1388.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우왕은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

충선왕(忠宣王), 고려 제26대(재위:1308~1313) 왕

고려후기 제26대(재위:1308~1313) 왕. 재위 1298년, 1308년∼1313년. 이름은 왕장(王璋). 초명은 왕원(王謜), 몽고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자는 중앙(仲昻). 아버지는 충렬왕이며, 어머니는 원 세조(元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몽고명은 쿠두루칼리미쉬[忽都魯揭迷述矢])이다. 비는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몽고명은 보다시리[寶塔實憐]), 몽고 여인으로 의비(懿妃), 서원후 왕영(西原侯 王瑛)의 딸 정비(靜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허공(許珙)의 딸 순비(順妃)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77년(충렬왕 3) 세자에 봉해지고, 1295년 8월 동첨의사·밀직사..

충렬왕(忠烈王), 원종, 김약선, 순경태후, 장목왕후, 제국대장공주

고려후기 제25대(재위:1274~1308) 왕. 재위 1274년∼1308년. 이름은 왕거(王昛), 초명은 왕심(王諶)·왕춘(王賰). 원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약선(金若先)의 딸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이다. 비는 원(元) 세조(世祖)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구비(舊妃)는 시안공 왕인(始安公 王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이다. 1260년(원종 1) 태자에 책봉되고,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았다.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 풍속인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어 고려인들이 탄식하였다고 한다.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처음으로 치러진 대륙국가와의 왕실 혼인..

숙종(肅宗), 은병(銀甁), 해동통보(海東通寶), 별무반(別武班), 여진정벌,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고려전기 제15대(재위:1095~1105) 왕. 재위 1095∼1105. 초명은 왕희(王熙), 이름은 왕옹(王顒), 자는 천상(天常). 문종의 3남이며 순종·선종의 동모제(同母弟)이다. 비(妃)는 유홍(柳洪)의 딸 명의태후(明懿太后)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는 평을 받았다. 1065년(문종 19) 2월에 계림공(鷄林公)에 봉해졌다.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 1095년에 즉위하였다. 1096년(숙종 1)에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다. 1097년(숙종 2) 12월에 주전관(鑄錢官)주 01)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는데, ..

목종(穆宗), 전시과 개정, 과거시행법

고려전기 고려의 제7대(재위:997~1009) 왕. 재위 997∼1009. 이름은 왕송(王誦). 자는 효신(孝伸). 경종의 큰아들로서, 어머니는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경종이 죽었을 때 겨우 2세여서 당숙인 성종이 뒤를 잇고, 성종이 목종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하고, 후사로 지명된 뒤 7년 만에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첫해 12월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를 개정하고, 1004년 과거시행법을 정하는 등 자못 왕정체제의 확립을 꾀함이 있었으나, 시종 모후(母后)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009년 정월 모후와 김치양이 그들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고자 태조의 손(孫)으로서 유일하게 왕위계승 자격을 ..

성종(成宗), 고려 제6대(재위:981~997) 왕, 최승로, 서희, 지방제도

고려전기 제6대(재위:981~997) 왕. 재위 981년∼997년. 이름은 왕치(王治), 자는 온고(溫古). 할아버지는 태조(太祖)이고, 아버지는 대종(戴宗) 왕욱(王旭)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 유씨(宣義太后柳氏)이다. 981년 경종(景宗)의 내선(內禪)주 01)으로 왕위에 올랐다. 성종의 치세(治世)동안 고려는 지방제도 및 중앙관제를 정비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이끌기 위한 정치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이는 등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982년(성종 1) 6월에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주 02)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史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시무(時務) ..

광종(光宗), 고려 제4대(재위:949~975) 왕, 왕권강화,,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공복제정, 쌍기

고려전기 제4대(재위:949~975) 왕. 재위 949년∼975년. 이름은 왕소(王昭), 자는 일화(日華). 아버지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이며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다. 정종(定宗)의 친동생으로 그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妃)로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가 있다. 그런데 대목왕후는 광종에게 있어 이복누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의 혼인관계는 고려왕실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근친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생으로는 경종(景宗)·효화태자(孝和太子)·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문덕왕후(文德王后)가 있다. 경화궁부인 역시 광종과는 숙질(叔姪)간이 된다. 부인의 아버지는 고려 제2대 혜종(惠宗)으로 광종..

태조(太祖), 고려 제1대(재위:918~943) 왕, 왕건

고려전기 제1대(재위:918~943) 왕. 재위 918년∼943년.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岳)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융(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 지금의 강원도 철원(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廣州)·충주·청주(靑州) 및 당성(唐城)·괴양(槐壤)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湌)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때 궁예는 금성군을 나주(羅州)로 개명하였다. 또한 양주수(良州帥)..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 대흥(大興), 보력(寶曆),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3대(재위:737~793) 왕. 이름은 대흠무(大欽茂)이며 무왕(武王)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에 따르면,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737년에 즉위해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774년(대흥 38)에 보력(寶曆)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병사할 때까지 그 연호를 지켰다. 1948년돈화현(敦化縣)육정산(六頂山)에서 출토된 정혜공주 묘의 비문을 보면 ‘보력’이라는 연호가 7년 이상 쓰였던 것이 분명하다. 문왕(文王)은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이후 30년간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 안에 있던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드는 해란하(海蘭河) ..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대조영(大祚榮), 계루군왕(桂婁郡王), 인안(仁安), 흑수말갈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2대(재위:719~737) 왕.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며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나라가 고왕(高王)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722년 쑹화강[松花江] 하류에서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걸쳐 거주하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 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는 흑수말갈이 외교 관계를 취할 때 발해의 사전 양해를 얻었던 전통을 파기한 것이었다. 당은..

고왕(高王), 발해 제1대(재위:699~719) 왕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1대(재위:699~719) 왕.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 와 거주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696년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끄는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해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했으나 그들은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혜공왕(惠恭王), 통일신라 제36대(재위:765~780) 왕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6대(재위:765~780) 왕. 재위 765∼78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건운(乾運). 경덕왕의 적자(嫡子)로서 760년(경덕왕 19)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이다. 비는 이찬 유성(維誠)의 딸인 신보왕후(新寶王后)가 원비(元妃), 이찬 김장(金璋)의 딸인 창창부인(昌昌夫人)이 차비(次妃)이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혜공왕대에는 집사부(執事部) 중시(中侍 또는 侍中)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진성여왕(眞聖女王), 통일신라 제51대(재위:887~897) 왕, 의공대왕, 광화부인, 문의왕후, 황룡사, 위홍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1대(재위:887~897) 왕. 재위 887∼897.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황(晃)·윤(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의 조세를 면제해 주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 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던 상대등(上大等)위홍(魏弘)이 죽자 정치 기..

흥덕왕(興德王), 통일신라 제42대(재위:826~836) 왕, 상대등(上大等)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2대(재위:826~836)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수승(秀升)이다.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元聖王)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淑貞夫人金氏)이다. 비(妃)는 소성왕(昭聖王)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金氏)로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흥덕왕(興德王)은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으며, 특히 복색(服色)·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 등의 골품제(骨品制) 규정을 한층 강화하여 신분의 구분을 엄히 하였다. 아울러 김헌창(金憲昌)의 난(亂) 진압에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의..

원성왕(元聖王), 통일신라 제38대(재위:785~798) 왕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8대(재위:785~798) 왕. 재위 785∼798.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 또는 訓入)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할아버지 의관(義寬, 義官)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할아버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또는 知烏夫人) 박씨이며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고, 비(妃)는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혜공왕 16),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良相)과 더불어 지정(志貞)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때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

경덕왕(景德王), 통일신라 제35대(재위:742~765) 왕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5대(재위:742~765) 왕. 재위 742∼765.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憲英). 제33대 성덕왕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효성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비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이다. 743년(경덕왕 2)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경덕왕 때에는 신라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새로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경덕왕은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개혁정치의 주역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에서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였다. 744년 이찬 유정(惟正)이 중시에 임명된..

성덕왕(聖德王), 통일신라 제33대(재위:702~737) 왕, 정전(丁田)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3대(재위:702~737) 왕.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704년(성덕왕 3)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 또는 嚴貞王后)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성덕왕이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국인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음을 감안하면, 그는 자신이 무열왕과 신문왕의 정통임을 인식시켜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고 다방면에서 노력하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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