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제32대(재위:1374~1388) 왕.
재위 1374∼1388.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우왕은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 복잡한 외교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다.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러자 크게 분개한 우왕은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 뒤 여흥군(驪興郡)으로 이치(移置)되었다. 다시 1389년 11월 김저(金佇)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 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해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高麗史)』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 건국을 합리화시키려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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