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전기 제6대(재위:981~997) 왕.
재위 981년∼997년. 이름은 왕치(王治), 자는 온고(溫古). 할아버지는 태조(太祖)이고, 아버지는 대종(戴宗) 왕욱(王旭)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 유씨(宣義太后柳氏)이다. 981년 경종(景宗)의 내선(內禪)주 01)으로 왕위에 올랐다. 성종의 치세(治世)동안 고려는 지방제도 및 중앙관제를 정비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이끌기 위한 정치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이는 등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982년(성종 1) 6월에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주 02)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史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시무(時務) 28조(條)를 올렸다. 성종(成宗)은 최승로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지방제도의 정비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983년(성종 2)에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지방관의 설치는 고려 건국 이래 처음 있었던 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12목의 설치와 함께 금유(今有)·조장(租藏)은 혁파되었다. 12목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했으며, 가족의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986년(성종 5) 12목에 처음으로 처자(妻子)를 데리고 부임하게 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12목사(牧使)와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씩을 뽑아 보내어 지방교육을 맡아보게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醫術)이 있는 사람을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93년(성종 12)에는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다. 또한 지방 각 관청의 경비 지출을 위한 공해전시(公廨田柴)의 법을 정비하는 등 지방행정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와 같은 지방행정의 정비·강화는 지방세력 통제책과 관계가 있었다. 우선 12목이 설치되던 983년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이직(吏職)을 개편하였다. 이후에도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책은 여러 가지 형태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특히, 995년(성종 14)의 지방관제 개편은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995년의 개편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10도제(道制)의 실시이다. 당(唐)의 10도제를 모방해 제정한 것으로 생각되는 10도제는, 곧 그 실시과정에서 유명무실해졌으나, 우리나라 도제(道制)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절도사체제(節度使體制)로의 개편이었다. 즉, 종래의 12목을 12절도사로 개편한 것은 군정적인 지방행정을 통해 지방의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통제함으로써 완전한 중앙집권을 꾀하려한 조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종의 치적으로서 특히 주목할 것은 삼성체제(三省體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비였다. 이 개혁은 이미 982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태조 이래의 정치기구를 중국식 제도로 개편한 것이다. 우선 982년부터 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기구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병관(兵官)·민관(民官)·형관(刑官)·예관(禮官)·공관(工官)의 6관(六官)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중앙관제는 995년에 다시 삼성육부(三省六部)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관제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의 관제내용은 998년(목종 1)에 개정된 전시과(田柴科) 관계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평가와 의의
성종은 이처럼 새로운 정치체제를 중국의 제도를 수용해 마련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시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적·사회적 여건의 성숙과 발전이 그러한 선진제도의 수용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임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고려 건국 이래 엄청나게 늘어난 새로운 정치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정치체제로서는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세력의 성격은 그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성종대 전반기에는 신라 6두품(頭品)계통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가, 후반기에는 이들 대신 개국공신(開國功臣) 혹은 호족계열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신라시대에 비해 권력구조의 핵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층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성종은 이와 같은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선진제도를 도입하고, 정치·교육의 지도이념으로서 유교적 이념을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성종은 유학을 숭상하고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위해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폐지하는 등, 유교주의적 정치이념을 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이념의 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자 애썼다.
992년(성종 11)에 교(敎)를 내리기를 “학문을 많이 쌓지 아니하면 선(善)을 알 수 없으며, 어진 이를 임용하지 아니하면 공을 이룰 수 없다. 이로써 서울에는 학교를 열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지방에는 학교를 설치해 생도를 가르치며, 문예를 경쟁하는 장소를 열고,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업을 넓혔으나, 오히려 포부를 가진 뛰어난 선비를 얻지 못했으니 어진 이를 가로막고 재능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지 어찌 알리요. 무릇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이 있는 자는 대궐에 나와서 자천(自薦)함을 허한다.”라 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교를 내려 “경관(京官) 5품 이상에게 각기 한 사람씩 천거하게 하고, 그 덕행(德行)과 재능은 성명 밑에 기록해 아뢰어라” 한 것 등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정했으며, 태학(太學)에 재물을 넉넉하게 하여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로써 어진 사람을 구하였다. 그리고 수령을 독려해 백성을 구휼하고, 효도와 절의를 권장해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등,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책을 정력적으로 편 결과 새로운 고려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993년(성종 12)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 서희(徐熙)의 외교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강동(江東) 6주(州)를 얻어 영토를 넓혔다. 997년 10월에 병이 위독해지자 조카인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에게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 거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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