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제10대(재위:1494~1506) 왕.
재위 1494∼150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융(李㦕). 성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연산군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주 01)·착흉(斮胸)주 02)·촌참(寸斬)주 03)·쇄골표풍(碎骨瓢風)주 04)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되어 있을 만큼 연산군은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중국에 대한 현명한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國朝寶鑑)』·『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지만, 여기에는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그들의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연산군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이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에 있다. 이 곳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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