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제7대(재위:1455~1468) 왕.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대군으로 있을 때,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이에 7월부터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 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폭력으로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의 대권을 한 손에 쥔 세조는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요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즉위한 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해 우리 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다.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文宗實錄)』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했으나 일이 발각되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뒤따라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經筵)을 정지시켰으며, 집현전에 장치(藏置)된 서적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 정하였다. 1457년 정월에 비로소 원구단(圜丘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선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였다.
이 해 6월에 상왕(上王)주 01)이 사육신의 모복사건(謀復事件)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다. 뒤따라 경상도의 순흥에 유배된 노산군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노산군 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 등 대신의 주청(奏請)에 따라 이 해 10월에 사사(賜死)하고 노산군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1458년에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 해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수하였다. 즉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治法)·정모(政謨)를 편집,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했는데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따라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최항(崔恒) 등에 명해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 1462년에 각 고을에 명해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켰다. 1464년에는 제도(諸道)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해 장정(壯丁)의 군적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1466년에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시직(時職)주 02)·산직(散職)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주 03)에 그 지방 출신을 등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 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다.
또 문화 사업으로서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周易口訣)』·『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을 편집, 발간하였다.
외국과의 관계로는 왜인(倭人)에게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주 04)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하였다.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다. 즉,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이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였다.
하지만,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게 굴며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하기까지 했는데도,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정치 운영에 있어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보다는,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어린 단종 때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 직계제로 대체,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고자 한 목적에서였다.
1456년 6월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을 계기로 학문 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 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다.
때문에 국정의 건의 규제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된 반면,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소관의 사무 외에도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 때문에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다. 즉, 신숙주·한명회·박원형(朴元亨)·구치관(具致寬)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여하였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 중심으로 운영했으므로 정부의 중요 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軍事通)인 한명회는 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財務通)인 조석문(曺錫文)은 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여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다. 따라서 승정원 기구는 점차 강화되고 이러한 추세 하에서 1468년에 원상제(院相制)가 설치되었다.
원상은 왕명의 출납 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신숙주·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 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조 대의 정치는 실행 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했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 정치는 왕권 강화 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만, 정치 발전 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대화 정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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