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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101

토하라인. Tocharians, 인도유럽인, 아파나시에보 문화

토하라인. Tocharians기원전 2000년경부터 9세기경까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에 거주한 코카소이드계 민족으로, 인도유럽어족 계열 언어를 쓰는 민족들 중에서는 가장 동쪽에 거주한 민족이다. 타림 분지 일대의 옛 주민이자 현 위구르인의 조상중 하나로 그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누란의 미녀 미라 등으로 미루어보아 꽤 오랜 옛날부터 중국의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명인 '토하라'는 알란족의 언어로 '무사'를 뜻하는 토하르(tokhar)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기록에서 고전 그리스어로 '토카로이'라고 하였는데, 로마인들이 라틴어로 '토카리'라고 음역하여 그대로 민족명으로 굳어졌다. 토하라인은 달리, 토하리인, 토카리아인으로 불린다.  기원 토하..

한혈마 전쟁, War of the Heavenly Horses, Han–Dayuan war, 汉攻大宛之战, 천리마 전쟁, 한-대원 전쟁, 토하라인

한혈마 전쟁, War of the Heavenly Horses, Han–Dayuan war, 汉攻大宛之战, 천리마 전쟁, 한-대원 전쟁 기원전 104년~102년 동안 한 왕조가 대원(大宛)의 명마였던, 한혈마(또는 천리마)를 무력으로 찾아오기 위해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기원전 2세기경의 중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제국, 한나라는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제국 중 하나였다. 특히 한나라는 끊임없는 정복 전쟁을 통해 서쪽으로는 인도의 북부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한민족 국가들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베트남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제국이었던 한나라에도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북쪽의 거대한 유목 연합 제국이 끊임없이 한나라의 북부 영토를 침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100년 이상, 끊이지..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유방(劉邦), 왕망(王莽)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로서 진(秦)에 이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왕조이다.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  건국고조 유방은 원래 정장(亭長)으로 의병을 일으켜 패공(沛公)의 자리에 올라 초(楚)의 의제(義帝)를 섬기다가 그 세력이 커져 또다른 거대 세력인 항우와 경쟁하였다. 처음에는 거듭 패배하였으나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를 위시해 많은 인재를 기용하여 기원전 202년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했고 최종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격파하고 한(漢)을 건국했다. 수도를 장안으로 삼았다.  전성기 문경지치(文景之治)로 일컬어지는 문제..

고구려 기원, 고구려 성립과 발전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 건국설화인 朱蒙說話는001) 백제나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복잡할 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전 주몽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廣開土王陵碑>의 서두 부분이고,<牟頭婁墓誌>와≪魏書≫고구려전의 주몽설화도 5세기경의 기록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나≪三國遺事≫·<東明王篇> 등 국내문헌은 5세기경의 기록에 후대적 윤색이 가해진 것을 전하고 있다.002)   주몽설화는 부여의 東明說話에 바탕을 두고,003) 4세기 후반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건국설화로 확립되었다.004) 그리하여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한 주몽설화의 경우, 주몽의 出自를 비롯..

삿초 동맹,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조슈번(야마구치현), 에도 막부 타도, 사카모토 료마

삿초 동맹(일본어: 薩長同盟 삿초도메이) 일본의 에도 시대 후기에 사쓰마번(오늘날 가고시마현)과 조슈번(오늘날 야마구치현)이 맺은 정치적, 군사적인 동맹을 가리킨다. 1866년 3월 7일에 맺었으며, 에도 막부를 타도하는 게 목적이었다. 삿초 맹약, 삿초 연합이라고도 한다. 원래 사쓰마번은 1864년에 금문의 변 사건을 일으켜 교토에서 조슈번을 추방하였고, 몇 차례 조슈번을 공격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도사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 중재로 동맹을 맺었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교토를 중심으로 에도 시대 막부 말기의 정계에서 웅번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쓰마가 공무합체의 입장에서 막부의 개국 노선을 지지하면서 막부의 정치 개혁을 요구한 반면, 조슈번은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양이..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천황의 명으로 세상이 새로워졌다는 의미, 근대 국가 체제 확립, 1867년, 왕정복고 쿠데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근대 국가의 체제를 확립, 1867년, 왕정복고 쿠데타 1867년 왕정복고의 쿠데타를 계기로 약 250여 년간 유지된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은 일련의 정치 변혁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당시 천황의 명으로 세상이 새로워졌다는 의미에서 고잇신(御一新)이라고 하였고, 이후 메이지 유신이라 불린다. 대체로 메이지 유신의 시기는 1850~1870년대 미국 함대에 의한 개국,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 보신 전쟁(戊辰戰爭), 폐번치현(廢藩置縣),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등을 포괄한다. 다만 그 시작과 종결에 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메이지 유신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변혁으로서 메이지..

메이지 유신, 성공 요인, 개방성, 지방의 힘

메이지 유신 성공요인 일본의 개방성, 지방의 힘 270여 개로 나뉘어 진 번은 각각이 국가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막부체제 이후로 각 번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경쟁 시스템이 있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경쟁은 급격히 치열해집니다.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개혁의 경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각 번은 군사, 행정조직이 갖춰져 있고 이를 운용할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군사와 상업에 있어서 각 번끼리는 경쟁하는 체제였으므로 이를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생존경쟁을 하였습니다. 이는 훗날 메이지유신이 가능하게 한 기본 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른 번보다 앞선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네델란드어와 중국어(한문)을 잘하는 인재의 양성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과 출판의 양성이 적극 장..

한자, 동이족, 근거 학설

한자, 동이족, 근거 학설 ▷중국 倉힐(吉+頁) 문화연구회 쑨펑(孫鵬) 회장 “(한자를 처음 만든)창일은 동이족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는 한서 예기 오제편에도 논증이 있다. 동이가 문자를 창조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의 사학자 쩌우쥔멍(鄒君孟), “중국 민족, 곧 화하족(華夏族)은 원시사회 말기 炎帝((염제)와 皇帝(황제) 집단을 기초로 하여 동방일부의 蚩尤(치우)와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집단이 융합해 형성됐다.”(華夏族起源考論에서) **동이: 후한시대 동방쪽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쓰였으며 활을 잘 쏘는 우리 민족의 조상을 일컬음. ▷중국의 사학자 왕위저(王玉哲), “한자의 연원은 ‘大汶口文化時代’(대문구문화시대)로 소급된다.”(‘中華遠古史’에서) **대문구문화: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

한(韓) 유래, 한국(韓國)

우리나라를 뜻하는 한(韓)의 유래 지금 우리는 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대륙의 중심, 우리가 중심’이라는 의미를, 일본은 “해가 뜨는 나라, 모든 것의 처음이다. 우리가 제일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왜 한국(韓國)인지, 한국문화, 한민족이라 하는데 자기 나라 이름의 연원이나 내력도 모르면서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며 살죠. 한(韓)이 무슨 의미인지 찾겠다고 오랫동안 고심하다 추적을 했고 그 성과가 만족스럽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성씨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알았는데 한(韓)씨만은 우리나라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 한자였습니다. 여기서 출발했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읽고 또 읽었던 시경(詩經, 사서오경의 하나)에 한후(韓侯)가 나오는데도 우리나라 사..

한자, 갑골 문자, 상나라, 은나라, 은허

중국의 문자, 한자와 갑골 문자의 발견, 상(은) 전설상의 왕조에 지나지 않았던 상나라, 1899년 갑골 문자가 발견되어 존재를 드러내다. 갑골문은 아주 먼 옛날 중국 은나라 때 쓰던 글자였다. 은나라는 중국 한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라는 책에 나온다. 그렇지만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은나라가 실제 있었던 나라라고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은나라 유물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골에 은나라 사람들이 농사짓고 자식 낳고 전쟁하며 살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책에 이름만 나오던 고대 왕국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은허란 상나라의 마지막 수도였던 은의 유적이다. 1928년부터 행해진 조사에서는 크고 작은 분묘·궁전·종묘지·움집터·청동기·토기·옥석..

예맥(濊貊), 예맥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예(濊)족, 맥(貊)족, 한(韓)족

예맥(濊貊) 예(濊)와 맥(貊)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예·맥·예맥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 왔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예맥(濊貊), 혹은 예맥족이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살던 고대 부족 집단으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삼한족과 함께 한민족의 조상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현대에 우리의 민족인 한민족은 모든 예맥과 삼한이 통합된 단일민족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하는 존재이다. 일찍이 정약용(..

동이(東夷), 동이족, 동쪽 이민족, 설문해자(說文解字), 이(夷), 큰 활(大弓), 은(殷), 갑골문자, 관련 기록

동이(東夷)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종족명칭. ‘동이(東夷)’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과는 종족 · 언어상으로 구분이 된다. 이들은 태호(太皡) · 소호(小皡) · 유제(有濟) · 서방(徐方) · 제부(諸部) · 풍족(風族)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동이의 시원과 종족적 성격 · 활동범위 · 문화단계에 대해서 고대부터 깊은 관심이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동이라는 기록이 나온 이래 기자(箕子)와 관련지어 관심을 가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동이를 상고사 문제와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단군조선보다 앞서 동이총..

한자, 동이족, 한자 연원 동이족 문화권

“(중국 고대국가인) 하(夏)·은(殷) 시대를 소급해 볼 때, 중국인과 한국인이 국경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마치 장벽을 쌓아 갈라놓은 것처럼 전혀 다른 문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일반상식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한자 창제에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동이족(東夷族)이 깊숙이 관여했다.”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한자가 중국만의 글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자를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고(故) 진태하 전국한자교육총연합회 이사장이 가장 대표적인 학자다. 진 이사장의 ‘동이족 한자 창제설’은 중국에도 소개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자의 연원은 동이족 문화권” 한자는 중국의 한족이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서기전 3세기경부터 한자를 차용해..

퉁구스족, 퉁구스족과 예·맥·한족의 관계

시베리아 동부와 연해주, 만주를 중심으로 주로 분포해 있는 퉁구스어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또는 그들의 조상으로, 퉁구스라는 단어는 사하 공화국에 사는 튀르크 퇼레스(Töles)인들의 "아홉 부족"이라는 뜻의 "도쿠즈"에서 유래했다. 뭉뚱그려서 퉁구스계 제민족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튀르크계 제민족과 마찬가지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유전학적 연관성을 제외하곤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단절되었다. 수많은 퉁구스계 제민족 중 가장 유명한 여진족은 농업과 수렵을 주 생업으로 삼았으며, 다른 퉁구스계 제민족도 유목보단 반농반렵 위주의 생업을 유지해왔다. 이것이 순수 유목인이었던 튀르크 및 몽골계 제민족과의 대표적 차이점이다. 만주족의 경우는 과수 재배를 한 사례도 있어서 영농 기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물론..

조선 망한 이유

조선 망한 이유 근대에 조선과 일본은 둘 다 외압에 의해 개국을 강요당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일본만 식민지화되지 않고 자주적 근대화를 성취하였다. 그 이유는 외압의 차이를 기준으로 비교사적 관점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는 관점은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 비해 개국 이전의 생산력 발전 조건이 앞서 있었거나, 지도층이 뛰어났다고 보는 일본 학계의 통설(通說)보다 설득력이 크다. 일본이 식민지화를 면한 이유를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 도야마 시게키(遠山茂樹)와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 가운데 일본의 사회 발전 단계가 앞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외압이 조선이나 중국보다 느슨하였다는 점, 개국 시기가 중국보다 늦었지만 조선보다 앞섰던 점 등에 있다고 보았다.347) 특히 강..

이슬람교 성립, 성립 배경,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다툼, 동서 교역로 단절, 메카·메디나, 이슬람 제국 발전

이슬람 문화의 발달 ▶ 종교적 색채가 강하고 국제적 성격을 띰 1. 학문 ▶ 수학, 천문학, 화학(알코올·알칼리 등, 연금술), 의학 발달, 지리학(성지 순례 의무에 따라) 발달, 문학("아라비안나이트"), 법학, 신학(쿠란의 해석) 발달 2. 건축 ▶ 모스크(둥근 지붕, 뾰족한 탑), 아라베스크 무늬 발달 ▶ 모스크 이슬람교도들의 예배 장소, 둥근 지붕(돔), 뾰족한 탑(첨탑), 아치 모양의 천장이 특징 → 이슬람 사회의 중심지 ▶ 아라베스크 무늬 기하학적인 직선 무늬와 넝쿨무늬가 특징 → 우상 숭배 금지 교리로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지 못함 이슬람 문화의 확산 ▶ 중국의 제지법·나침반·화약 등을 유럽에 전파, 이슬람 학문을 중국에 전파 이슬람교의 성립 1. 이슬람교 성립 배경 ▶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

한사군, 낙랑군, 대방군, 고구려, 광개토대왕, 새로운 무역로 개설

중요한 것은 한나라가 망하면서 낙랑과 백제 중심의 무역로가 깨지고 고구려와 신라가 득세했다는 사실이다. 한나라 멸망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고구려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오랑캐가 중국으로 들어가자 빈집털이를 한 것이다. 새로운 무역로 개설이다. 낙랑군(樂浪郡, 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로, 현도군과 함께 최후까지 남은 변군(邊郡)이다. 대략 한반도 북부를 관할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중국의 변군으로 존속하였으며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약 420년에 걸쳐 한반도 및 만주 일대의 민족들과 대립하고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미천왕 1..

일본 근대화, 네덜란드 난학, 메이지 유신,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일본 근대화, 네덜란드 난학 일본 에도시대에 서양의 의학과 과학지식이 보급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정립되었다.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되었다는 의미에서 난학(蘭學)이라 한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한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네덜란드에게는 제한적인 교역이 허용되었고,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유입되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상인층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보급된 서양의 기술서적을 연구하는 학문활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들을 난학자라고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앞서서 먼저 적극적으로 서양의 앞선 문물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선비(鮮卑), 북위, 탁발선비족, 수나라, 당나라, 동호, 튀르크계 민족, 돌궐, 탁발부(拓跋氏),

선비(鮮卑)는 남만주와 내몽골, 다싱안링 산맥 지역에 분포했던 동호 또는 튀르크계 민족이었으며, 유목·수렵·목축·농업 등을 영위하였다. 이후 일부는 한족에 동화되었다. 선비족의 언어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고 있으나 남아있는 언어로는 튀르크계 언어가 많다. 한자 기록에 의하면 동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흉노의 동쪽에 있어 그들에게 복속되어 있다가 흉노가 멸망한 후 자립하여 각지로 진출했다. 하지만 튀르크계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10만 명의 흉노 지배층을 선비족에 남겨 통솔하다 국가를 성립했다고 하여 지배층 일부를 튀르크계로 보기도 한다. 일단 선비족 자체가 혈연을 기반으로 한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내몽골~서만주의 여러 부족이 선비 라는 이름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초대형..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에도 말기의 양학자, 난학, 조어(造語) 사례, 산소(酸素), 수소(水素), 세포(細胞), coffee 일본어 珈琲(가배)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 에도 말기의 양학자 이름은 榕. 종종 緑舫라고도 불렸다. 일본에 없던 식물학, 화학 등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 중 하나이다. 14세에 大垣藩医가의 양자가 되어 번의(藩医)가 되었다. 우다가와 집안은 난학의 명문가로 양아버지 宇田川玄真, 양할아버지 宇田川玄随도 난학자이며 요안의 양자인 宇田川興斎 역시도 난학자, 양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이름은 요(榕) 또는 료쿠호(緑舫)라고도 일컬어졌다. 宇田川榕庵(우다가와 요안)이라고도 표기된다. 당시까지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던 식물학(植物学), 화학(化学) 등을 처음으로 서적을 통하여 소개한 인물이다. 겐푸쿠(元服) (나라시대 이후 일본에서 성인[成人]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졌던 의식이다. 통과의례의 하나이다. 元[겐]은 '머리', 服[후쿠]..

임나일본부설, 가야

임나일본부설과 가야 가야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남조선경영론)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안습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 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205]가 ..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説, みまなにほんふせつ, 임나(가야) 일본부 존재설, 일본 서기, 임나=가라국(금관가야)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説, みまなにほんふせつ, 임나(가야) 일본부 존재설 임나=가라국(금관가야) 일본 서기 일본서기의 문제가 되는 기록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 책에서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일본부' 기록의 원형이 된 어떤 왜인 위주의 기관이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데는 현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관의 성격은 '통치기구'가 아니라 ‘백제-가야의 여러 나라-신라-왜국’이란 고대의 국제 다자구도에서 일종의 교섭 용도, 그것도 왜왕과 왜국 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6세기 중엽 사이에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으며 이 지역을 속국, 제후국(..

후지무라 신이치, 일본 구석기 사기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고고학 유물을 조작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자신이 미리 만든 유물을 발굴 예정 장소에 몰래 묻고 나중에 공식 발굴 작업을 통해서 찾아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후지무라의 유물 조작 사건은 일본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었으며 교과서에 실린 그의 업적을 변경하는 등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 1972년에 후지무라는 고교 졸업 후 고고학을 독학하고 유물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화학회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981년 미야기(宮城) 현 사사라기(座散亂木) 유적지에서 4만 년 전 유물을 발굴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3만 년 전의 유물이 없던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그의 발견에 크게 고무되었고 결국 그는 일본에 최초 인류가 6..

가짜 유적 발굴, 필트다운, 일본 구석기 사기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남을 교묘히 속이거나 가짜를 내세워서 사기를 치는 사례들은 의외로 많았다. 또한 실험 데이터의 조작이나 가공 등 크고 작은 연구부정 행위들도 최근까지 세계 각국에서 지속되어 왔다. 과학사상 사기사건(Hoax)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찰스 도슨(Charles Dawson; ?-1916)의 가짜 화석 발굴 사건이다. 20세기 초반에 인류 조상의 두개골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가짜 화석을 조작하여 빚어진 이 사건은 필트다운 사건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의 데자뷔라고 할만한 가짜 구석기 유적 발굴 사건이 최근 일본에서 일어난 바 있다. 오랑우탄의 뼈를 가공해서 붙인 ‘필트다운인’ 1910년대에 영국 필트다운(Piltdown) 지방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던 찰스 도슨은..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리, 이시다 미쓰나리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 3대 전투의 하나로, 일본이 중세에서 근대로 도약하는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역사가 시바 료타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규모나 영향력이 워털루 전쟁 못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전쟁의 승패가 일본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봉건제가 엄격하게 정착됨으로써 일본사의 특수성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노우라壇浦 전투, 도바鳥羽·후시미伏見의 전투와 함께 일본 3대 전투로 불리는 대전투이다. 서기 1600년 일본 중부의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최대 실력자로 떠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옹립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각각 동군 8만, 서군 10만을 이끌고 격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의 중세와 근세를..

삼국지 인물, 관계

촉나라 인물 1. 유비 현덕(劉備 玄德 161~223) ●출신지 : 탁군 탁현 ●직위 : 안희현위 - 좌장군 - 한중왕 - 황제 ●영웅성 : ★★★★★ 촉한의 초대 황제. 자는 현덕(玄德).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혐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

임팔 전투, 제2차 세계대전, 버마 인도 국경, 무타구치 렌야

임팔 전투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 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전투. 명칭은 국경선 인도 측의 도시 임팔에서 유래했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 작전(ウ号作戦)'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이 둘을 섞어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본 작전의 주목표는 임팔이었고, 코히마는 임팔 점령을 지원하기 위한 조공에 가까워서 임팔 전투라 부른 경우가 많지만, 코히마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임팔-코히마 전투'라고 부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작전자체는 오랫동안..

버마 로드(Burma Road), 중일전쟁, 장제스, 루즈벨트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중국 윈난성 쿤밍에 이르는 기나긴 수송로였던 버마로드는 그 길이가 장장 717 마일(11.54km)에 이르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이었다. 중국 본토를 침공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군을 위하여 미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인도양을 통하여 버마로 하역된 미국의 군수물자를 지원하게 된다. 1937년과 1938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일본군은 영국령 버마를 침공하기 위하여 중국인 인부 20만명을 동원하여 이길을 닦았다. 일본군은 전쟁물자를 실어나를 랭구운(지금의 양곤)과 리사오를 잇는 철로가 버마에서 인도를 향한 전략적 분깃점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1942년 버마를 침공한다. 연합군은 처음에는 일본군에 맞써 싸우는 중국 장제스 국..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 데지마(出島, でじま、Dejima), 선교, 전도(傳道)

데지마(일본어: 出島, でじま、Dejima)란 1636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이다. 부채꼴 모양 섬으로, 전체 넓이는 약 1.3ha정도다. 1641년에서 1859년 사이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쇄국일본 시기 서양과 교류라는 숨통을 터놓았던 상징적인 장소다. 당시 일본은 1년에 한 번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한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서양을 이해했다.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 관심사는 일본과 무역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 전도(傳道)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조총을 전해 준 포르투갈은 막부 정권의 골치 거리였다. 기독교 금지령을 수차례 발동했음에도 선교에 나서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나..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 차이, 메이지 유신, 지리적 여건

메이지 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일본은 분명한 명분, 방향성(화혼양재, 급진 개혁),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인식이 적지 않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이고, 다수의 요인들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의 영향도 컸다. 조선보다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의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은 상태였다. 당시 막부의 사실상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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