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鮮卑)는 남만주와 내몽골, 다싱안링 산맥 지역에 분포했던 동호 또는 튀르크계 민족이었으며, 유목·수렵·목축·농업 등을 영위하였다. 이후 일부는 한족에 동화되었다.
선비족의 언어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고 있으나 남아있는 언어로는 튀르크계 언어가 많다. 한자 기록에 의하면 동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흉노의 동쪽에 있어 그들에게 복속되어 있다가 흉노가 멸망한 후 자립하여 각지로 진출했다. 하지만 튀르크계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10만 명의 흉노 지배층을 선비족에 남겨 통솔하다 국가를 성립했다고 하여 지배층 일부를 튀르크계로 보기도 한다. 일단 선비족 자체가 혈연을 기반으로 한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내몽골~서만주의 여러 부족이 선비 라는 이름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초대형 부족연합이기 때문에 다양한 형질과 언어를 가진 것은 당연하다. 단석괴 이전에는 확고한 맹주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부족 추장에 해당하는 여러 대인이 난립했다.
중국어: 鮮卑, 병음: Xiānbēi, 상고한어: 사르페(*S[a]r-pe), 중고한어: Sjen-pjie
현재 알려진 대선비산의 위치는 대흥안령 북부의 알선동이라고 하는데, 알선동 동굴에는 선비족 중에서 훗날 북위를 건국한 탁발선비의 원거주지를 알려주는 북위 시대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알선동 비석은 북위가 화북에서 위세를 떨치던 태무제 시기에 세워진 것이었다. 알선동 지역에 사는 오락후국에서 사신이 와서 북위 황제들의 선조들이 살던 옛터가 바로 자신들의 거주지라고 말하니, 태무제는 중서시랑 이창 등을 보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축문을 이곳에 세웠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대선비산은 지금의 하얼빈 근처에 있는 산의 명칭으로서 고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대선비산'(大鮮卑山)이라는 명칭이 청나라 시대 《만주원류고》가 쓰여질 때 나타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선비에서 갈라진 오환 역시 대흥안령 남부 오환산에서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다. 유물 또한 남만주 지역에서 더 많이 출토된다. 또 하나의 설은 원시 튀르크어로 벨트, 혁대를 뜻하는 '샤르비'(Sarbi)에서 나왔다는 것이며, 실제로 선비족 유물에도 벨트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고대에는 진나라(Chin)가, 중세 후반에는 거란(Китай/Cathay)이, 근세에는 청나라(Qing)가 서양에서 중국을 대표했다면, 중세 전반 서양에선 '선비'가 중국을 대표했다. 돌궐이 중국을 일컫는 단어 '타브가치'(Tabgach)는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선비족의 부족 중 하나인 탁발부(拓跋氏)에서 온 것이었다
역사
처음에는 훗날 거란족의 근거지가 되는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흉노의 피지배 민족으로 지내다가 흉노가 남·북으로 나뉘어졌을 때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했다.
후한 말기에는 단석괴의 등장으로 한때 북방 제민족을 통일하여 중국을 위협했으나 단석괴의 사후, 선비는 분열하여 그 세력이 빠르게 쇠락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같은 동호의 일원이었던 오환족의 세력이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오환은 공손찬을 멸망시킨 원소에게 복속했고, 원소 사후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에게 대항했다.
한편 오환이 멸망한 후 조용히 세력을 기르던 선비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 팔왕의 난이라는 심각한 내전에 휩싸이고, 이 틈을 타 각지의 이민족들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자 이때 같이 독립했다.
선비족은 위진남북조시대에 남하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착하면서 한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탁발선비족이 침투왕조인 북위를 세운 후, 북중국은 그야말로 선비족의 무대가 되었다. 탁발선비의 북위는 육진의 난과 이주씨의 난을 통해 서위, 동위로 양분되었고, 각각 우문씨의 북주, 고씨의 북제로 이어졌다.
선비족은 한족을 정복하여 화북을 제패했으며, 우문씨의 북주에서는 청나라의 만주족이 한족(漢族)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피지배민인 한족들에게 선비족의 풍습과 선비족의 성씨를 따를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원에서 선비족이 확실한 지배층이 되어가는 과정은 탁발선비족이 북위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선비계의 무천진 출신 8주국이 중심이 된 관롱집단이 북주·수·당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선비족 탁발부의 북위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5호 16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그 후 탁발씨, 즉 원씨의 북위는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나뉘어졌다. 그 후 수나라의 양견에 의하여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수문제 양견은 북주 우문씨 황실의 외척인 선비계 보륙여(普六茹)견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북위 때부터 계속 무천진 출신 선비족 8주국 관롱집단이 한족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의 다얀씨(大野氏, 대야씨), 즉 훗날 당나라의 황실이 된 농서 이씨는 북주의 최고 귀족이었다. 탁발선비족의 북위 효문제는 한자라는 문자를 가진 한족(漢族)의 풍습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화 정책을 실행했다. 하지만 당시 한족(漢族) 출신의 북위의 명신 최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복된 피지배민이었던 한족(漢族)이 얻을 수 있는 높은 직책들은 한정적이었다.
수, 당 이후 만주 서부에 남아있던 선비계 후손들은 거란·해족·습족·실위였으며, 훗날 습족은 해족에 흡수되었고, 해족과 일부 습족들, 실위의 대부분은 거란에 정복되었으며, 거란은 요나라를 세워 해족과 함께 중국 북방에서 맹활약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북중국을 정복하여 많은 왕조를 세웠다. 이 시대의 5호 계열의 왕조를 침투왕조라고 부르는데, 훗날 등장하는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정복왕조와는 다르다. 특히 유명한 선비족 왕조로는 모용부(慕容部)의 모용황이 세운 정복국가 전연, 모용수가 세운 후연과 탁발부(拓跋部)가 세우고, 균전제를 실시했던 효문제가 집권했던 북위가 있다.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으나 결국 북주 무제에 의해 통일되었다.
당시 선비족은 북중국을 정복하고 점점 우수한 한족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한족에 동화되어 중국 역사에서 소멸했다. 하지만 황실 문화나 개방적인 국가 성향은 당나라까지 이어졌다. 당장 수나라의 황족 양씨와 당나라의 황족 이씨부터가 한화된 선비족이었으며 북위의 황족 탁발씨(원씨), 연의 모용씨, 독고씨, 북주의 우문씨도 선비족이었다.
고구려-수 전쟁 때의 수나라 장수 우문술 등도 선비족이었으며, 수문제는 서위의 권신인 우문태가 하사한 성씨를 사용했다.
선비 모용부에서 갈라져 나온 유목민족 토욕혼(吐谷渾)의 후예 몽구오르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현존하는 선비계 민족으로 추정된다. 다만 투족은 티베트 계열의 강족(羌族. 삼국지에 이민족으로 등장하는 그 강족)과 혼혈된 민족으로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 티베트화된 민족이다.
부여, 고구려와의 관계
국내 역사에는 고구려와 부여에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3세기경 부여에 꽤 많은 피해를 입혔는데, 부여를 공격해서 무려 50,000명을 포로로 끌고가기까지 했다. 특히 전연의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재위 중이던 고구려를 공격해서 수도 환도산성을 함락시키는 동시에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시신을 도굴했다. 이후 계속 수세에 몰리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전연의 후신인 후연을 몰아내고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북주의 무제와 배산 전투를 치러 온달이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고구려는 선비족 출신의 국가인 수나라, 당나라와 나라의 존망을 건 대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국내에서 선비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 계열의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다소 멸칭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역사 기록상으로는 그럴 수 있는데, 다만 문화사적으로는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초기 부여와 관련된 유적인 중국 지린성 유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고분군의 발굴조사 내용을 보면 선비족과의 관련성이 매우 높다. 동북지역, 내몽골자치구 동북쪽에서 발원한 선비족들과 관련된 무덤들의 장법(葬法)상의 특징은 사다리꼴 형태의 결구된 목곽묘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또한 피장자의 머리 쪽에 동물뼈를 놓는 선비 계열 무덤의 장례 풍습이 마찬가지로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나며, 특히 선비족의 아이덴티티를 표상하는 유물─조개로 만든 돈(?), 특유의 그물 형태의 청동 방울 등의 청동 유물 구성, 동물 문양의 장식, 꼬아 만든 귀걸이 등이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추가적인 해석과 분석을 요하는 부분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선비족과 초기 부여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봐야하지 마냥 상호 적대적이라고 볼 순 없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그러하듯, 위의 밀접한 관계는 중기에 가서도 비슷하다. 위의 서술된 내용과는 다소 상반될 수도 있지만 한국의 삼국시대 무렵에 건국된 선비 계열의 몇몇 국가들은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북연을 보더라도 선비족 계열이되 고구려 출신이 황제가 된 고운의 케이스도 있었는데, 북연은 줄곧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되었다. 북위 같은 경우에는 패권국끼리의 으레 존재하는 긴장으로 전쟁위기에 몰리기는 했지만 전면전에는 이르지 않았고, 서로의 패권을 존중하여 고구려를 남조와 동등하게 대접했으며, 효문제의 문소황후를 비롯하여 고구려인 권력자들이 집권하거나 당파를 이루는 등 서로간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고고학적, 문화사적으로도 3~5세기 고구려의 유물들은 선비 계통 또는 선비와 관련된 것들이 매우 많다. 기와의 끝부분 장식인 와당인 권운문 와당과 연화문 와당의 기원을 북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삼연계 유적인 랴오닝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의 출토품들에서도 각종 마구(馬具)의 갖춤새들이 비슷하고, 특히 딸랑거리는 계통의 장식류들, 흔히 보요장식(步搖粧飾)이라고 지칭되는 금공품의 장식들 또한 선비와의 관련성이 돋보이는 것들이다. 소위 삼연계 대장식구(허리띠 장식) 또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유물로써 한반도와 동북 지방에서 널리 확인된다. 더 많은 사진자료들이 간단히 서술되어 있는 블로그를 참고바람. 그리고 선비족들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한 교류관계가 확인되고 있으며, 그 흔적들이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나 그 모체였던 부여의 역사고고학적 이해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보니 단순히 선비는 한국사에서의 주적이었다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주천(酒泉)·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사기』 위현전
고대 사서에는 고구려와 부여, 고조선과 유라시아 유목민족과의 관계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자세한 정황은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고구려와 부여 이전, 이미 고조선이 흉노 연맹의 왼팔이었다는 사마천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이미 부여 이전 고조선부터가 내몽골 지역 유목민들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과 동호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특히 비파형 동검 문화를 공유하였다는 점이 잘 알려져 있다. 동호의 뒤를 이은 선비족의 초창기 발흥지는 내몽골 동부로 만주와 인접해있다. 고조선과 동호 사이의 연계점이 부여와 선비족 사이로 이어졌다고 해서 특이한 일은 아닌 것이었다.
민족집단의 피아식별이 세부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양분되어 있지 않고, 또한 선비와 한반도와 그 북부의 역사상의 국가들이 무수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어왔다는 것이다. 특히 선비는 다양한 계열로 나뉘어져 있어서 각각 이해관계가 복잡했을 수 있다. 당장 같은 민족일지라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며, 원래 친했어도 전쟁하여 미워하는 경우가 있어서 "선비= 한국사의 주적들" 이라는 수식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애초에 근대 이래의 만족 개념을 과거에 적용한다는 것도 어폐가 있고
언어학 관점
전한(前漢) 또는 신나라 시기의 언어학 《방언》은 양웅(揚雄)이 27년간 조사한 저서였으며, 세계 언어학상 최초의 방언 어휘 조사기록이기도 하다.
알렉산더 보빈 교수가 제시한 관점에 의하면 선비어는 한국어족과 많은 교류를 하며, 많은 차용어를 주고받았다. 이전 편집본에서는 보빈 교수가 선비어를 부여어로 분류하는 가설을 내놓았다고 설명되었으나 이는 논문을 오독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 실제 해당 논문의 주장은 선비-거란 계통의 언어에 한국어와 친연성이 있는 외래어가 다수 발견되는데 위치와 시기상 한국어와 연관이 있을 법한 언어는 고구려어밖에 없으므로 선비어와 거란어에는 고구려어에서 들어온 외래어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유하 얀후넨은 선비어를 거란어와 함께 몽골어족의 자매 언어군인 준몽골어족으로 분류하는 가설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