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 네덜란드 난학
일본 에도시대에 서양의 의학과 과학지식이 보급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정립되었다. 주로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되었다는 의미에서 난학(蘭學)이라 한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한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네덜란드에게는 제한적인 교역이 허용되었고, 이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유입되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상인층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보급된 서양의 기술서적을 연구하는 학문활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들을 난학자라고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이들 난학자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앞서서 먼저 적극적으로 서양의 앞선 문물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메이지유신의 토대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꾸준히 오랜세월동안 역량을 축적해서 20세기에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을 한다. 우리는 그당시에 완전한 쇄국정책을 했고 일본은 서양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연구해서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는 국가가 되었다. 지금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는 바로 앞선 제도와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자기것으로 소화시키고 발전시킨 일본과 그렇지 못한 한국과의 차이다.
메이지 유신,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19세기 중후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당시 조선과 일본의 현실을 비교
한국인들 사이에는 당시 일본은 분명한 명분, 방향성(탈아입구, 화혼양재),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인식이 적지 않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이고, 다수의 요인들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의 영향도 컸다. 일본은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의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았다. 당시 에도 막부의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발전한 도자기 생산 및 이와미 은광의 개발 등 상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경제적으로 획기적으로 번영하고 있었고 현대 일본의 중심권역인 간토 평야를 개간하면서 인구가 폭증했다. 물론 19세기까지는 공식적으로 나라의 문을 닫았으나, 어쨌든 네덜란드와 교류을 이어왔고(나가사키에 인공섬 데지마 설치해서 사실상 무역특구 조성) 그것도 단순히 몇몇 사치품을 들여오는 수준이 아니라 정밀한 인체골격도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가라쿠리 로봇을 만들었으며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난숙)를 설립했으며 나아가 도자기나 우키요에같은 일본의 문화예술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포네스크를 유행시켰다.
조선은 그에 비하면 서양과의 직접적 교류는 아예 전무했고 조정은 외척에 의해 시달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사회적으론 빈곤과 삼정의 문란에 의한 반란, 신분계층의 동요가 지속되어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일본은 이미 서구와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외교 경험을 쌓아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급동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일찍 문을 열었으면..."하고 아쉬워 하지만, 물론 분명 매우 늦은 근대화의 시기 또한 실패의 요인 중 하나인 것은 맞다. 그러나 수많은 실패 요인들과 악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냥 문 연다고 해서 근대화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문을 여는 순간 되돌아갈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대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서구 열강이 각종 문물을 공짜로 베푸는 것도 전혀 아니다. 당장 일본만 해도 19세기 당시 인구가 조선의 2배에 달하고 상공업의 발달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었음에도 에조 공화국과 내전을 치르고 러일전쟁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구사일생하고 연이어 벌어지는 칼부림과 암살 등 내/외부적인 위기가 엄청나게 많았고, 결국 계속되는 위기 끝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계에 도달해 몰락했다. 조선보다 자체 여건이 훨씬 우수했던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하다 겨우 성공했는데, 조선이 과연 문을 일찍 열었다고 해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 의문이다. 즉, 개항을 얼마나 빨리 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개항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했냐가 관건이다.
한국인의 '일본은 빨리 개혁개방 했다'라는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일본은 원래 조선처럼 쇄국을 했고 흑선개항, 즉, 무력을 통해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이 시기에 대한 인식은 지나치게 구조적인 면을 무시하고 무슨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는 운좋은 시대의 로또를 맞은걸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동시대 조선인들에 대한 자학적 인식으로 이어지는데 이거야 말로 너무나도 역사의 구조적, 장기적인 요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애초에 정치적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무슨 동시대에서 한줌거리도 안되는, 막말로 요즘 세상으로 치면 마이너 취향 난학자 지식인 쪼가리들이 중심이 된게 아니다. 대서양 관계에 치중하는 것이야 말로 무슨 본인들을 아시아인이 아니라 피부만 누렇고 눈만 좀 째진 유럽인들로 보고싶어하던 1980년대 버블경제 시절의 일본인들의 탈아입구적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당장 조슈, 사쓰마 양대 웅번 중심으로 존황양이란 호소력 있는 반체제 이데올로기를 가공하고 퍼뜨려서 토막 혁명을 이룩하고 근대국가를 설립한건 17세기 임진왜란기 조선 유학자 포로들에서부터 시작한 일본 성리학의 자체적인 발전에 따른 지극히 동양적인 문명 교류 덕분에 생긴 결과였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선 체제유지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던 성리학이 일본에선 왜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됐는지는 사무라이가 만들었으면서 막상 그 사무라이는 지극히 살기 팍팍한 시대, 성리학에 대한 열망은 높은데 이미 지방 유림과 서원 중심으로 사대부 사회가 발전한 조중과 달리 막상 직업으로 이를 다룰 기회는 막부의 관학자 밖에 없어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쁘라스 여긴 일본이라 칼도 다룰줄 아는) 재야 유생들이 쏟아졌다는 에도 시대 자체의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성리학이 자리잡은 사회라도 조선 같으면 정적인 사회구조와 맞물려 한국에선 오히려 200년 지난 지금까지 유교가 한국을 망쳤다니 이런 소리가 나오게 하는 반면, 막상 그 시대에선 구경온 조선통신사들이나, 일본 유학자들 본인들이나 비분강개하던 일본에선 아무리 경전 잘 외워도 잘해봐야 관에 쫒기는 동네 서당 훈장밖에 못한다는 모순적인 사회적 현실이 오히려 성리학을 폭발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로 키웠던 것이다.
이렇게 진지한 역사학적 주제로 일본 메이지 유신의 성공 비결을 파고 들자면 고려해야 하는 역사적 조건이 너무나도 많다. 당장 동시대 산업화 초기 서양 강대국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던 에도 시대 일본의 자체적인 상업적, 경제적 발전상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막부 말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본적인 물질적 인프라는 탄력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내제화하는 과정과, 막상 무진전쟁 이전에도 기본적인 근대화에 대한 필요성 자체는 토막, 좌막 세력을 넘어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던 당대 정치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며,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어떻게 일반적인 관점에선 일본이란 나라 안에서도 가장 촌구석에 쩌리였던 조슈, 사쓰마 지방 세력이 혁명의 주역이 되었는지 이런 세밀한 과정을 알기 위해선 골치아프고 복잡한 근대 이전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일본 봉건제 특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필요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 시기 일본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이 이런 굉장히 핵심적이고 중요한 일본 내부적인 역사적 요소, 구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이해는 하나도 없이 마치 메이지 유신을 일시적인 로또로 취급하고 "우리 조상은 왜 따라하지 못했을까?" 자문하고 있는 상당히 비생산적이고 몰역사적인 자학적 사고방식에 기반해 있다.
개혁 세력의 집권 여부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즉, '기존의 집권자들이 개혁 의도가 있었는가', 혹은 그러지 않았다면 '개혁 의지를 가진 이들이 수구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일본
일본은 적어도 위기 상황이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선과 서민의 생활과 인식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일본의 집권층은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직시했다. 무진전쟁부터 애초에 근대화 할거냐 말거냐 이걸로 싸운거 아니다. 근대화를 해야된다는 필요성은 당시 막부측이나 유신측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초당파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애초에 이런 시대적 공감대가 있었던 덕분에 카츠 카이슈부터 멀리는 그 에조 공화국의 에노모토까지 패배한 막부측 인사도 대부분은 큰 문제 없이 신정부에서 등용, 재능을 필 기회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17세기 에도 시대부터 막부는 네덜란드와의 정기적 교역과 그 무역항구인 데지마의 상관을 통해 서구의 정세와 기술, 문화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다. 이 때문에 다른 어떤 아시아 국가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서구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봉건적 구체제로서 근본적인 개혁에 한계를 보였던 에도 막부를 사쓰마, 조슈 등의 웅번의 실력자들과 하급 무사들이 뒤엎는 데 성공, 구체제 자체를 갈아엎었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막부라는 구체제를 갈아엎으면서도 훨씬 더 구체제의 유산인 천황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유는 그 천황이 자신들의 집권의 명분을 가져올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메이지 덴노가 서구에 우호적이지 않아서 잘못하면 개혁의 속도가 지지부진해질 수도 있었다. 사실 신정부 측의 각 번들도 무진전쟁 이전까지는 존황양이를 주장하거나 막부 편이었지만,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열강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전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개혁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신정부는 현명하게도 존황을 계속 유지하여 천황의 권위를 인정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유신을 이끈 신정부의 실력자들이 그대로 가져갔다. 이들은 신정부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뒤 작정하고 총체적인 근대화를 진행시켰다. 천황이라는 민심 장악 수단과 실제 성과가 이어져 불만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 당시 대표적 보수파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도 너무 급한 개혁과 사무라이들의 집단 실권만 막자는 입장이었지 적극적 개혁 자체는 찬성하는 경우였다.
정리하자면 실제 역사속의 막부 타도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신세력이 구세력인 막부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서양에게 굴복하고 일본을 개항한 막부에 분노한 존황양이 세력이 일으킨 것이다. 심지어 사쓰마 번주의 경우는 그냥 자기들이 새막부를 열고 싶어했다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그 존황양이파가 열강의 힘을 직접적으로 체감한 후 매우 재빠르게 태세전환하여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던 것. 오히려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존황양이세력이 막부를 몰아냈냐가 아니라, 도바 후시미 전투 이전에만 하더라도 그리 환장하던 양이란 대의가 막상 그 유신 웅번들이 집권하자마자 어찌 그렇게 간편하게 버릴수 있었을까 더 미스테리이다. 이 때문에 신정부 수립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잡음과 숙청이 끊이지 않았는데, 존황양이 사상이라는게 고위층에게는 그냥 막부와의 정치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우에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존황양이 지사들 사이에선 신주일본을 외국에 바친 막부를 타도한다고 해서 충성을 바쳤는데 이놈들이 막부랑 다를 것 없이 서양에 고분고분 하네? 하는 불만이 팽배했던 것.
결국 메이지 유신의 명분은 왕(천황, 사실상 일본 그 자체)을 드높이고, 외세(오랑캐, 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본 골자로 하여 근대화를 시작하였다. 이후 급진파와 온건파가 알력 다툼을 하는 양상이 된 것이다.
지리적으로 열도 동부를 기준으로 태평양과 접하고 그 넘어로 바로 미국 서부까지 마주하고 있으며 서양인들 또한 이러한 지리적 특성에 주목하여 일본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두기도 하였다. 게다가 섬이라는 독립적인 지형이나 중국을 숭상하는 영향이 조선에 비해서 덜 하였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백두산이나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 대륙과 경계를 하면서 그로 인해서 중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온 조선과는 다르게 섬이라는 독립적인 지형으로 인해서 중국 대륙과도 바다 사이로 떨어져있으며 이러한 지형의 혜택과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기도 하고 국제적으로도 섬이라는 특성과 태평양과 접한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에 서양인들 입장에서는 밀접하기가 유리해보일 수 있다.
조선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들 가운데 화성돈(워싱턴)이라는 자가 있어, 도시를 개척하고 터를 다졌으며, 바다 밖 양이들과 서로 통교하니…이들은 바다를 왕래할 때 약탈하는 습성이 있고, 해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종의 질문에 대해, 영의정 김병학이 답한 내용. 당시 조선 조정의 좁은 국제적 식견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문답이다. 단, 저기서 나오는 '부락(部落)'이라는 단어는 미국의 개별 주(State) 즉, 행정구역상의 주(州)를 뜻하는 것으로 정말로 촌락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실제로 국역본이 아닌 원문과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海國圖誌)》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락(部落)의 진짜 뜻을 알 수 있다. 과연 신미양요 시점에서 조선은 미국을 몰랐는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18~19세기 미국이 다른 유럽권 국가들처럼 국가 공인 해적선인 사략선을 운용했으며 1856년 파리선언을 통해 사략선이 금지될 때에도 이 선언에 가입하지 않고 그 후에도 사략면장을 발급한 사례들이 있는 점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당대 조선의 유학자 지식인들이 서구의 정치관계에서 외면적인 세련됨 이면에 전통적인 동양적 중화사상 싸다구 때릴만큼 살벌한 사회진화론적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포착했던건 전혀 우물안 개구리적 짦은 식견이 아니라 제대로 본 통찰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법을 고안해내지 못했다는 것이었지.
당시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문벌 가문들은 국제정세에 대해서 별반 지식, 관심, 대책이 없었고, 이들의 대외관은 중화사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역외 문화를 전부 오랑캐의 문화로 보는 그것이었다. 이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을 '우월한 중화 문명의 유일한 계승 국가'라는 '소중화(小中華)'론의 대두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소중화론은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의 멸망 이후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이 북벌을 외치면서 제기된 것이 본격적인 소중화론의 시작으로, 중국의 정통 왕조인 명나라를 계승한 것은 오랑캐인 청나라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즉, 이제 중원에서 유일한 문명이었던 중화가 파괴되고 야만적인 오랑캐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정통이 아니며 조선만이 유일하게 중화(문명)의 정통을 이었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소중화론의 가장 큰 원인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명나라의 멸망과 북벌론 즉, 인조와 효종 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 영조 대에 이르면 담배와 고구마, 감자가 들어왔고 안경, 망원경, 지도, 자명종, 서구의 책자까지 다 들어왔다. 하지만 이런 선진 문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정치 권력과는 인연이 없던 박지원과 같은 일부 실학자들 뿐이었고, 후일 정치 권력을 쥔 안동 김씨는 전혀 선진 문물에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안동 김씨 가문의 권력유지에만 혈안이 된다. 이 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였던 셈이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각종 개혁을 시행하며 내치에는 힘을 썼지만 권력의 중앙집권화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서양에는 거부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흥선대원군이 아예 처음부터 반대한 것은 아니다. 흥선대원군이 대외개방을 염두에 둔 흔적은 남아있으나(천주교 신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 시도), 두 번의 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면서 쇄국 정책이 정점에 달한 것도 있으며 개혁을 통해 권력이 축소된 양반계층과 경복궁 중건으로 과도한 세금을 매겼던 것때문에 불만이 있던 평민계층도 양이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하나가 되다보니 내부사정 정치로 인해 결정된 사안인것도 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으로 노동력이나 돈을 반강제로 걷거나 서원을 철폐하는 등 오로지 중앙집권화를 위한 행동을 위주로 했다. 물론 근대화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화 자체에만 신경썼지 더 나아가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서원 철폐 등 백성에게 이득이 된 정책도 없지는 않았지만, 경복궁 중건을 보면 진정으로 민심을 신경쓰는 것도 아니었고 서원 철폐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원칙대로 시행한 정책이었을 뿐이다.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에 고종은 왕이 된 이후에도 명성황후와 함께 국고를 채울겸 매관매직에 빠지긴 했지만 고종 또한 매우 많은 노력을 하였다. 특히 군사와 돈에 관련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노력을 가했다. 거기에 프랑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의 후견국을 자처하며 갖은 노력을 다해줬다. 이러한 상황으로 육군은 프랑스식과 미군식을 가저오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이 근대화 개혁을 시작한 것이 매우 늦어 주어진 시간은 매우 적었고. 조선과 비교도 못할정도로 서구의 간섭도 별로 없이 해왔던 것이다. 그니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이 본격적으로 공장을 짓고 자체적인 소총 생산을 시작한때가 1905년 그니까 을사조약때다. [A]결국 뭔갈 제대로 해볼려고 한 시기에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을사조약을 맺고 5년 정도밖에 안되는 시간이 남지않게 되버렸다. 결국 조선은 근대화에 대해 엄청난 노력을 행했지만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결국 조선은 매우 적었던 세금으로 인한 텅텅빈 국고(이건 사실 체급의 차이가 크다.)과 너무 적었던 시간이 매우 컸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고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처럼 훗날 이름을 날렸던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쯤에나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나마도 갑신정변 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박영효 같이 살아남은 자들은 외국에 의탁하거나 친일파로 변모해 버렸다.
조선의 경우는 지리적으로도 중국 대륙과 백두산과 압록강 등을 경계로 접해있는 영향으로 중국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점이 있으며 또한 조선의 양반들 또한 공자와 맹자 등 중국 학자들이 지은 고서를 통해서 학문을 익혀왔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색채와 상업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짙다. 또한 중국 대륙과 경계하면서 일본 열도와 바다 사이로 마주하고 있어서 서구 기준으로는 지리적으로 은둔의 나라로 알려졌을 정도로 일본에 비해서 뒤늦게 알려진 점도 있다. 또한 쇄국정책을 오랫동안 취해왔던 조선왕조의 보수적인 기여도 한몫한다.
근대화 기반 마련
지리적 배경
조선과 일본이 각각 자리잡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유라시아의 극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 세계와의 연결 길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로부터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극동이라는 같은 악조건에도 이들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한반도에 자리한 조선은 대륙 국가였고 일본은 태평양을 마주하는 해양 국가이다. 이러한 지리적 차이는 조선과 일본의 운명에 쐐기를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해양국가라는 특성상 외세의 침략이 거의 없었고 거대 국가인 중국의 영향을 받긴 받되 중국->조선->일본이라는 루트때문에 적은 것과 도입된 문화를 자기들에게 맞게 변형시킨 독자적인 문화와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고립된 국가라는 이유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적었기에, 쇄국을 하기는 했지만, 해양 교류에 유리한 지리를 활용해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같은 서구와 비교적 유동적으로 접촉했다.
더군다나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가 시작됨에 따라 문물은 대륙의 실크로드가 아닌 바다를 통해 이동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돌출된 해양 국가라는 지리적 이점을 통해서 외양선을 타고 온 유럽인들을 조선보다 한걸음 더 빨리 마주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300여 년 전 이미 일본은 포르투갈과 접촉하고 이들과 교류하여 화승총을 알게되고 이를 일본의 기술력으로 카피하여 타네가시마 총을 개발 및 양산하였으며,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도 정기적으로 직접적인 일대일 교역을 하게 되면서 서쪽 세계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고 난학을 발전시킨다. 지리적 이점을 통한 서양과의 300년 간의 교류 경험은 곧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조선은 서쪽과 북쪽이 중국으로 인해 교류의 길이 꽉막혀 있어서 중국을 통하지 않으면 서쪽 세계와는 도통 교류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극동이라는 악조건은 조선을 체계적으로 화이관이라는 대외관으로 물들게 했다. 세상을 중국 중심을 바라보는 탓에 조선은 결국 중국과 중국의 간섭을 받는 세력외의 외부 세계와 유동적으로 교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조선이 자리한 한반도는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남해와 동해 역시, 일본 열도로부터 길게 가로막혀 있어 지도를 볼때 지리적으로 외부 길이 꽉막혀 있는 구조이다.
예외로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제주도는 바다와 곧장 연결되는 터라 헨드릭 하멜이 타고 있는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한 적이 있었고 조선도 서양과 직접적으로 교류할 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외 몇번의 외양선 표류도 있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 직접적으로 교역하기를 원하기도 했다. 다만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조선이 서양을 무시해서 성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선이 네덜란드와의 교역에 끼어드는 것을 경계한 일본의 반발, 그리고 여러 불운들이 겹쳐 성사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선 조선과의 직교역을 위해 여러 차례 원정대를 보냈지만 풍랑에 휩쓸리거나 길을 잃는 등 여러 불운들이 겹친 바람에 조선에 도착한 원정대는 한 척도 없었다. 여기에 일본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러한 시도에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네덜란드는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 주었던 일본과의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 시도를 완전히 중단했다.링크 이후에도 흥선대원군때 개화의 길이 왔지만 상술한 여러사건과 정치적인 이유로 이 기회마저 놓치게 되어 결국 이러한 운명을 맞이했다. 즉, 조선의 쇄국 마인드를 논하기 이전에 중일에 비해 서양과의 접촉이 극악 수준으로 적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일본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근본적인 측면을 살펴 볼때 서구화에 대해 일본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준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비밀리에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기술을 도입하였고 전국적으로 쇄국했던 에도 막부 시절에도 본토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만, 인공섬을 거점으로 네덜란드와는 제한적으로나마 교류하면서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국제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서구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 개혁 자체가 급했을 뿐이지 그것을 보고 적응할 정도의 준비는 이미 이루어졌었다는 것. 흑선개항 역시 하급관리나 농민들은 놀랐어도 막부나 유력 번에서는 '올 게 왔구나'라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네덜란드 풍설서를 통해 이미 1년 전부터 페리가 미국 동부에서 출발하여 희망봉을 타고 접근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함대의 규모, 이동경로, 내항 목적, 무장 수준 등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1852년 초부터 일본의 해안 주요 거점의 방어시설이 보완되었고, 1853년 초부터는 에도를 포함한 주요 해안 거점에서의 방어훈련이 주기적으로 열렸다. 페리가 우라가 만으로 접근했을 때에도, 일개 요리키가 부부교쇼를 사칭하고 승선하여 내부의 구체적인 사정을 파악하고 돌아와 보고할 정도였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 군사기술을 받는 등 근대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기술, 난학이라 이름붙여진 서양 학문은, 19세기 초 조선의 서양에 대한 이해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미 개항 이전부터 서양 각국의 정치체계,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페리의 일기에 따르면, 미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일개 막부 관료가 놀라운 수준의 이해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
조선은 서양과 직접적인 교류하진 못했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도착한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할 수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기회가 있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던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구인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 하멜 표류기를 보면, 당시 조선정부는 그들을 단순노동력으로만 활용할 뿐, 그들을 통해 지식을 얻거나, 외부와의 통로로 활용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정의 높은 관료들의 시선에서조차, 하멜과 같은 서양인은 그저 '신기하게 생긴 사람'이었을 뿐이었고, 그들로 인해 서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각 지방들이 서로 나뉘어 서구와의 교류나 근대화에 관한 경쟁을 벌였지만, 명분상으로나마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에서는 지방의 세력들은 서로 손잡아 재산이나 불리기 바빴지 성장이나 대외교류 따위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일본은 사츠마 같은 일개 지방도 군함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짐배에 포얹은 양무호와 광제호가 전부였다.
외국어 통번역
일본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민간인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나 백과사전을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막부가 영어 통역사로 발탁한 인물로 존 만지로가 있다. 그는 무인도에서 표류했다가 미국 포경선에 구조되어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고 왔다. 만지로는 일본에 들어와서 미국에서 겪은 일들을 전해, 많은 지식인들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시바 료타로는 만지로에 대해 "그러한 인물이 쇄국 시대에, 「표류」라고 하는 우연한 기회로 북미 대륙의 문명을 보고, 게다가 페리 내항 소동의 직전에 돌아왔다는 것은, 일본의 행운이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덤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 수도 있었다.
조선
조선은 서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자체적으로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러한 실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 → 포르투갈어 → 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즉, 이미 17세기에 불과한 이 시점에서도 일개 무역도시의 행정관이 일국의 군주보다도 정보력이 앞섰다는 뜻이다.
정치 구조
일본
서구에 대한 접촉이나 학문적 이해도 면에서 결코 일본에 뒤떨어지지 않았던 중국의 경우도 전면적 개화에 실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사회적 구조적인 측면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경우, 조정은 실권이 없으며 막부라는 이원정부가 통치하는 불안정한 체계였을 뿐 아니라, 막부가 그나마 중앙집권단체에 해당하긴 했지만 일본 전국시대나 도쿠가와 막부로 바뀐 상황 등을 보면 일본의 막부라는 존재는 제일 강한 다이묘 가문의 의미가 강했을 뿐이었다. 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탓에 여러 유력자들이 힘을 잃는 동안 와신상담을 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대로 막부를 꿀꺽한 시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중앙집권체제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체제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근거도 미약했고, 무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각종 지방세력들을 굴복시켰던 막부가 크게 쇠퇴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외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막부의 실정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있는 지방세력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존황과 근대화를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을지언정) 새 캐치프레이즈로 내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중국과 조선의 경우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중앙집권화를 완성하였으며, 철학적(이데올로기)으로 뒷받침되는 체계적이고 탄탄한 정부 제도 및 관료제 하에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었다. 기존의 정치체계가 이론적으로는 근거가 탄탄하고 대단히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고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권력이 대대로 상속되며 고착화해 속된말로 고인 물이 되어버리며 웬만한 사회적 충격으로는 이를 뒤바꿀 만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를 일거에 변혁시킬 정치세력도 생성되기 어려웠다. 실제로도 조선은 이러한 체계적인 정치 체계로 임진왜란, 병자호란, 경신대기근 등의 국가가 무너질만한 대혼란 속에서도 국가를 건재하게 이끌어갈수 있었다.
덤으로 일본이 했던 개혁은 중국, 조선에선 이미 예전부터 비슷하게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체계적인 관청도 6조로 어느 정도 있었다. 고종이 통리기무아문을 세웠음에도 근대관제로 바꾸지 않은 것도 갑오개혁을 보듯 궁내부, 외부를 제외하곤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6조는 각각 인사, 재정, 교육, 군사, 외교, 법집행, 공공공사를 담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학문을 학습하기도 했기 때문에(열린연단 문중양 편에 나온다.) 역설적으로 동도서기의 이념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시기적인 행운
앞서 언급한 개혁세력의 집권과 의지가 내부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면, 이 시기적인 행운은 외부적으로 가장 큰 요인이다. 참고로 근대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개항을 했지만 결국 영국에게 농간을 당해, 결국 보호령으로 들어가버린 이집트와 역시 근대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개항을 했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영국령 인도제국 사이의 완충지대의 역할을 통해 독립을 유지했던 태국,철저한 준비와 침략국가가 유럽 최약체, 자국 군대의 근대화로 겨우겨우 막아내고 아주 잠시 식민지 시절을 겪었던 에티오피아, 심지어 일본보다 국력이 앞서고 유럽의 바로 옆이고 일본보다 100년이상 더빨리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영국과 러시아의 훼방에 의해 근대화를 실패한 오스만 제국의 차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일본의 각 번들이 서로 대립하고 여기에 막부와 토막파까지 대립하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이 때 서구 열강이 개입해서 더욱 분열을 조장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까마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진전쟁 등 일본의 분열이 극에 달한 1860년대 무렵의 시기는, 하필이면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주요 서구 열강들이 모두 일본에 신경을 쓸 수 없던 시기였다. 그나마 일본 시장을 노리던 미국은 쿠로후네 사건 이후 본격적인 일본 반식민화를 시도할 즈음에 중부와 서부에서는 서부개척시대가 겨우 시작했으며 동부는 노예제도로 인해 발발한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다. 영국 역시 세포이 항쟁 및 애로호 사건으로 인한 제2차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 등으로 인해 인도와 중국에 눈길이 가 있었다. 프랑스는 이후 멕시코 제2제국을 건국하게 되는 멕시코 내전에의 개입, 베트남 침략, 애로호 사건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와 이탈리아 통일전쟁에도 병력을 파병한데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인한 중부 유럽 정세의 변화 등으로 바쁜 상태였고, 그나마도 인도차이나에 눈길이 가 있었다. 러시아 역시 이제 막 연해주를 차지해 새로 획득한 영토 정리에 바쁜 상태인데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영국과의 대립 상황으로 인해 아직 일본에 관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 세 나라 모두 일본에서는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난 해와 같은 1853년부터 3년간 크림 전쟁을 치렀으며, 50만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패배한 러시아는 패전의 충격으로 인해 전쟁 중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죽고, 크림 전쟁으로부터 15년 후에야 겨우 흑해 함대를 재건할수 있었을 정도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사실 각종 서구 열강들이 제대로 침략의 손아귀를 뻗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이런 천금 같은 시기에 개항한 나라는 동양 각국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이렇게 일본이 천재일우의 기회 속에 개항할 수 있었던 상황은 미국에 의해서 유발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초강대국이 아니라 아직도 노예제를 운영하며 농산품과 원자재를 유럽 공업국들에 수출하는 게 주요 산업이던 국가로, 먼로 독트린이 나온지 불과 30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시기었으며 유럽 각국들에 비하면 열강에 포함시키기도 어려운 정도의 나라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중반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세력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중국을 본격적으로 넘보기 시작하자, 이렇게 되면 미국 입장에서 어물쩡대다간 태평양 너머에서는 자국의 지분을 하나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에 미국의 국력이 아직 태평양 너머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어나가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일단 태평양 너머에 자국의 지분을 확보해 두기 위해 먼저 일본을 강제 개항시키기로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동했던 것이다. 이렇게 2번의 방문 끝에 일본을 강제로 개항 시킨 미국은 정작 기껏 개항시켜놨더니 식민지 확장을 위한 기반을 다져야 할 서부는 아직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던데다 얼마 못 가서 노예제도 갈등을 계기로 남부연합의 연방탈퇴와 남북전쟁에 빠져들며 자국 내부상황을 수습하기 바빠 일본에 신경 쓸 상황이 되지 못했고 강제개항이라는 악재가 남북전쟁이라는 바다건너의 사건탓에 일본이 20년간 문제 없이 개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유례없는 행운이 되어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결국 미국은 미국이 없는 사이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였으므로 식민화내지 속국화하는게 힘들어졌기 때문에 러시아를 견제를 위해 영국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지원해주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러일전쟁 이후 영국과는 인도영토 지배인정,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서로 필리핀과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밀약을 맺을정도의 파트너십을 가졌다. 러일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사례처럼 전쟁 한번 잘못해서 이기고도 나라가 파산해서 망할수도 있는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전쟁특수로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들이는 수준과 맞먹는 이득을 보며 성장한다.
조선
조선이 개항할 당시에 놀랍게도 모든 상황이 정리된 서구 열강들의 관심도는 한반도로 향하고 있었는데, 쿠로후네 사건 이후 20년 사이에 메이지 유신을 거치고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 서양의 무기와 전함으로 무장에 성공한 상황이었지만 국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정한론이 대두된 일본뿐만 아니라 청나라 역시 아편전쟁이 끝나고 이홍장을 중심으로 해 양무운동을 통해 북양함대를 구성한 후 자신감이 생겨 조선에 대해 기존의 자주국 체제하의 조공 관계가 아닌 근대적 종속 체제의 형태로 영향력을 뻗으려고 시도하는 상태였으며 러시아 또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중국, 일본 중 가장 가깝고 만만한 조선을 노려 한반도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이러한 러시아를 막는다는 구실 하에 거문도를 무단 점거하는 등, 이외에도 미국, 프랑스 등 온갖 서구 열강들이 지금까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유일한 먹거리인 한반도를 향해 자원이나 이권을 챙겨가기 위해 맞부닥치고 침탈하려고 달려드는 상황 아래 이를 전부 외교적 혹은 군사적으로 막아내며 개화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조선이 사실상 자주적으로 개혁했던 광무개혁도 그나마 러시아의 개입으로 다른 열강이 거리적인 면도 있어서 절대로 얼씬 못했으며 일본도 당시에는 아직 러시아를 상대할 전력이 미비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의 차이에는 이러한 차이도 상당히 작용했으며 실제로 러일전쟁 중 러시아는 더 상대할 여력이 있었지만 국내에 터진 대형사건 때문에 그냥 물러가자마자 일본은 을사늑약을 성사시켜버렸다.
외교
일본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할 당시 세계에서는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그레이트 게임이 벌여지고 있던 시기였다.
크림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부동항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러시아는 제2 차 아편전쟁 때 중재를 해 준 대가로 연해주를 확보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즉 부동항을 손에 넣는데까지 성공하자 대영제국은 러시아를 경계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당시의 서양 열강들은 자기 식민지 관리하기도 벅찬 까닭에 머나먼 아시아까지 견제할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러시아를 견제할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 일본이었다. 그때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뒤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아시아의 패자로 자리잡은 반면 중국 청나라는 양무운동의 한계와 열강개입으로 인해 여러 군벌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상태가 되는 바람에 영국 입장으로는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결론이 나버렸다.
이후 일본은 대영제국과 영일동맹을 맺으면서 같이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게 됐고, 러일전쟁 이후 더 이상 경쟁자가 사라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조선
반면에 조선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일단 조선에게 가장 치명적인 점은, 열강들이 조선의 처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단 점이었다. 근대화에 성공해 강대국으로 우뚝 선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이제야 막 개항을 한 약소국이었고, 거리도 멀고 얻을 것도 별로 없는 조선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었던 열강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양 열강들은 조선에서는 적당히 이권을 먹는데만 중점을 두었고, 근대화에 성공해 자신들처럼 열강으로 우뚝 선 일본을 파트너로서 선택하게 되었다.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인 일본을 두고 약소국인 조선과 손을 잡으려는 국가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한마디로 조선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시작하려 할 때쯤에는 진작에 일본을 중심으로 판도가 짜여 있었고,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파트너인 일본이 무얼 하든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최후로 택한 국가가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더 이상 조선의 처지를 신경써줄 나라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조선은 헤이그 특사로 마지막 도움을 요청했으나 열강은 아시아 유일의 강대국 자리에 오른 일본을 저버리고 약소국인 조선을 편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었고, 조선은 그대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국부(國富)와 세금 제도
일본
이미 당대의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국력차가 벌어졌다. 물론 인도나 청나라를 보면 단지 국력이 강하다고 해서 서구화도 수월했으리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인구가 많았고 영토도 넓었다. 1869년 홋카이도가 일본 행정구역으로 완전히 편입되기 전에도 일본 면적은 조선의 1.3배 정도였다. 홋카이도를 완전히 개척하는 과정도 소수의 수렵채집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무주공산 수준이라 장애물이나 방해요인이 거의 없었다. 야마토 민족이 혼슈 북쪽까지 확장하는데 들인 수고조차 한민족이 북쪽 영토를 확보, 사수하기 위해 여진족(9성, 4군 6진 등), 거란족(강동 6주, 대거란전) 등과 죽기살기로 사투를 벌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선보다 덥고 습한 기후 탓에 넓은 지역에서 2모작이 가능한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 또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교차가 크면서도 강수량은 고른 기후(대신 그 습도 때문에 한여름에는 정말 답이 없다. 나라 전체가 한증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서 농사 짓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이다. 반면 조선은 겨울이 일본보다 길고 건조해서 농사짓기에 매우 불리했다.
또한 화산지형이라는 지질학적 특성 상 은과 구리의 매장량이 많은 것도 일본의 큰 이점이었는데, 에도 막부 시절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와미 은광의 은은 17세기 전세계 은 유통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고, 일본은 이 은과 구리를 이용하여 화폐를 만들었고 특히 은으로 만든 화폐이자 조선에서 왜은이라 불린 이 것은 네덜란드, 중국, 조선과 무역을 할 기초자본을 축적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와미 은광의 은이 고갈 조짐을 보여 일본에서 은 수출을 감소시킨 것이 19세기 초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삼정의 문란을 촉발한 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해 이 시기에 많은 기업들이 출몰하였고 대상인들이 득세하여 사농공상의 계급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각지에 할거하는 영주들이 전략적으로 성하촌(조카마치)을 거점화하면서 도시화율도 더 높았으며,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내외 무역도 활발해 이미 에도 중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시장 경제를 이룩하고 있었다.
세율은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가 "농민은 살려만 둔다"일 정도로 처음부터 강한 세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후술된 대로 막부에서만 거두는 세금이 통상 35% 였는데, 이는 번국에서 자체적으로 거두는 세금을 제외한 비율이다. 즉, 35%를 세금으로 내고나서도 번국에서 또 따로 세금을 거두었다는 것. 이는 참근교대를 비롯한 에도 막부의 번국 쥐어짜기 정책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잇키를 막기 위했던 점도 있었다. 반란도 최소한 먹고 살아야 일으키는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농부들에 대한 공식적인 세율은 내려갔지만 문제는 체계적인 토지조사로 그동안 막부나 다이묘들이 암묵적으로 수취하지 않거나 신고되지 않는 토지까지 찾아내서 세금이 부과되면서 일본 농민들 부담은 메이지 유신 이전 보다 더욱 커졌고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서 식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팔고 노동자들은 저임금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등, 농민을 포함한 일본 국민들 부담이 매우 늘어나서 여러번의 폭동과 시위 심하면 내전까지 벌어져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일본은 대대적인 개혁과 근대화를 할 수 있게된다.
조선
조선은 건국부터 민본주의 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세종대왕 시절 전분 6등법 등으로 구체화하여, 세율은 10%(공식적인 세금 5%+잡세 등)에 불과하였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이 급격화되지만, 이건 정부에 들어가는 세수가 폭증한 게 아니라, 자주농이 몰락하고 소작농화 하면서 생긴 농민에 대한 지주의 소작료 착취 및 지방 세무관들의 세금 착복 문제이다.
또한 18세기 이전까지는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획득했던 조선은 18세기~19세기에 들어서면서 환금작물이던 인삼의 대외 수요 급감과 조선을 거치지 않은 직계무역 활성화 등으로 오히려 대외무역이 위축되었다.
조선 정부는 백성(농민)들을 나라의 근본으로 명시하고 이들의 생활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여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했고 그 덕택에 전근대 사회 단계에선 전세계적으로도 안정된 국가에 손꼽힐만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변질되었다. 조선의 세금체계를 보면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을 내는 전정과 사람의 노동력을 대상으로하는 부역, 그리고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는 공납이 있었다. 조선도 정말 다채롭고 어마어마한 종류의 세금을 걷어들인 국가였다. 훈련도감의 병사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세금이라 하여 삼수미를 걷고, 세금 걷는 관리들이 고생한다며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인정미를 걷었으며, 세금을 운반하는 와중에 부패나 재해로 손실이 발생할테니 손실분 예상치까지 미리 걷는 곡상미, 항구에서 조운선에 실린 곡식을 하역하는 인부들의 임금을 주기 위해 걷어들이는 하선입창미, 조세행정에 쓰이는 종이값을 백성들에게 전가시키는 창작지미 등등 정말 별의별 세금을 다 운용한 나라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여러 종류의 세금은 중앙정부, 즉 조정에서 걷는 세금만 늘어놓은 것이며 지방세인데 곡식의 품질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기 위해 미리 쌀 몇 섬 챙겨놔야겠다며 간색미를 걷어들이는 기록을 보자면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조선에는 유럽의 부르주아나 일본의 조닌(상인)처럼 기존의 지배계층과 맞먹으며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는 신흥 상인집단이 끝내 나타나지 못했다. 단 분명 조선이 일본의 농노보다 세금이 적은건 사실이다. 환곡 제도를 보면 조선은 일본보다 백성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조선은 땅의 비옥도로 세금을 걷는 결부제를 운영했으나 18세기 전반이후 양전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부역실총으로 각도 각군에 세금을 액수를 조사해서 문서화시키고 그것을 동결했다. 이를 비총제라고 한다. 그러나 잡세 특히 수송비는 완전하지 않았고 그리 문서화 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의 문제점이다. 그러나 조금더 생각해봐야 되는게, 중앙재정만이 아니라 지방재정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앙 재정과 더불어 비공식적인 지방재정이 공존했다. 그래서 세금도 지방마다 차이가 나고 부과방식도 차이가 컸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은 최대한 세금을 아끼려고 노력했고 그것은 이원적인 재정구조로 나타났다. 다만 문제는 그 지방재정의 세금부과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은 최대한 합리적으로 세금을 매기려고 노력한 거다.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
18세기 말 부역실총을 통해 당대 조선의 실질세율을 계산해볼 수 있는데 당시 지세는 전세가 1결당 4두, 대동미가 1결당 12두였고 여기에 삼수미 등을 합치면 결당 20두 수준이였다. 여기에 지세의 수송에 필요한 비용이 결당 2두~6두 정도 추가적으로 부가되었고 여기에 지방세 결작 17두가 부가되었다. 당시 1결당 생산량은 알곡 기준으로 240두였으니 실질세율은 비정규적인 세금까지 합해서 16~18%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금은 세도정치 시대가 되며 증가했는데 정약용이 저술한 경세유표에 따르면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에서 징세되던 세금의 양은 불법적인 세금들까지 합해서 결당 45두 9되, 엽전 9전 4푼이였다. 이는 결당 수확량의 20~23% 수준이다. 여기에 군포도 내야 했는데 군포는 균역법 실시 이전엔 장정 한 명당 1년에 2필이였으며 실시 이후엔 장정 한 명당 1년에 군포 1필을 내야 했다. 면포의 가치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면포 1필의 가치는 쌀 4두의 가치와 같았다. 다만 주의해야할 점은 저 수치는 법적으로 경작지인 수세 전결에 대한 실효세율로 토지의 누락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라는 점이다. 일본의 세금제도 항목에서 제시된 일본의 실효세율은 토지의 누락이 반영된 수치라 단순비교는 어렵다. 실효세율을 계산할 때 토지의 누락까지 반영한다면 조선의 실효세율은 저 수치보다 낮았다고 봐야한다.
요약하자면, 명목상 세율은 낮았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갈수록 부실한 토지 조사와 부정부패로 인해 걷어들이는 것에 비해 낮아지는 세수, 회계와 재정관리 능력부족으로 비효율적으로 운용되던 재정, 그것을 매꾸기 위해 각종 잡세의 남발, 지방에 대한 통제능력이 부실해지고, 행정체계가 무너져 폭등하는 지방세 등등의 이유로 실질적 세율은 폭등했지만 정작 정부에서 운용 가능한 재정은 세종시절보다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지면 조선의 상업이나 경제가 일본에 비해 못하다고 하는데 물론 일본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업은 수공업수준에서는 상당히 발달했다. <개항기 면업에서 볼 수 있는 시장구조의 함의>에 조선은 일본과는 다르게 장시를 중심으로 한 농민시장이 발달했고 농가겸업으로 면포를 생산했는데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나누어져 있고 그 면포는 도를 넘어 유통되었다. 그리고 그 수준은 1780년대 영국의 면포생산량에 필적했고 수입품까지 합치면 면포 절반을 시장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조선의 시장은 도시중심으로 발달한 일본에 비해 세금을 부과하기 힘들었다.
자원 문제 또한 비슷하다. 물론 조선의 자원이 없는건 아니였지만 중국과 일본에 비해 부족했고 금 같은 자원은 북부에 몰려 있었다.
전근대에 금과 은은 곧 화폐를 의미했고 화폐의 유통량은 곧 경제력을 의미했다. 전근대 한국이 지독하게 상업 발전이 더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근대 조선의 경제력은 곧 농업생산량이었고 이것을 물물교환 형태에서 화폐경제로 변화하려면 막대한 량의 금과 은이 있어야 했다. 운산금광은 전근대에는 채광이 안 됐고 은도 조선의 농업생산량을 커버해주지 못했다. 일본의 은을 수입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중국에 조공을 하기 위해서 줄줄 새던 것도 은이었다. 즉, 조선은 일본처럼 엄청난 양의 은광도 없었고 금광은 있었지만 전근대에 채광이 안 되었다.
물론 흥선대원군 시기 북부에 있는 자원들을 개발하기 시작하며 조선 후기에는 이를 바탕으로 개항말 조선 세수에 크게 도움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