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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濊貊), 예맥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예(濊)족, 맥(貊)족, 한(韓)족

Jobs 9 2024. 1. 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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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濊貊)

예(濊)와 맥(貊)으로 나누어 파악하기도 한다. 예·맥·예맥의 상호관계와 그 종족적 계통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논란이 되풀이되어 왔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으로 나누어 보거나, 예맥을 하나의 범칭(汎稱)으로 보는 견해, 예맥은 맥의 일종이며, 예는 예맥의 약칭이라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예맥(濊貊), 혹은 예맥족이란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살던 고대 부족 집단으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삼한족과 함께 한민족의 조상들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 관해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현대에 우리의 민족인 한민족은 모든 예맥과 삼한이 통합된 단일민족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하는 존재이다.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맥은 종족 명칭이고, 예는 지역 또는 강의 이름이라고 보아, 예맥은 맥족의 아홉 갈래(九貊) 중의 하나를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능순성(凌純聲)도 예는 예수(濊水)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하였다.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는 선진(先秦)문헌에 보이는 맥은 북방족에 대한 범칭이며, 예는 진대(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한대(漢代)에 범칭되는 예는 고구려·부여·동예를 포괄하는 민족명이라고 보았다. 예맥이라는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과 고전적인 북방족에 대한 범칭인 맥을 결합시킨 편의적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하면서, 고구려를 지칭한 맥은 민족명인 예족 내의 특정한 부족명이라 하였다. 곧 한대 이후의 맥은 예와 동일한 계통의 실체라 하였다. 

윤무병(尹武炳)은 예맥이라는 명칭은『사기(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예족과 맥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맥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한대 이후의 예와 (예)맥은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어졌던 실체였다고 보았다.

한편, 예일부(芮逸夫)는 한민족을 예맥과 한(韓)의 양계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예맥족 중 예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눈강(嫩江)지역 등에 살았고, 맥족은 산동·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해,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동일계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의 차이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이종설(異種說)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미카미(三上次男)인데, 그는 예족은 유문토기문화(有文土器文化)를 영위했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중이 컸던 고아시아족(古Asia族)계통이고, 맥족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족계통으로 파악하였다. 미카미의 주장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후하는 문화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되어졌다. 

한편, 이옥(李玉)은 맥족과 예족은 원래 중국의 산시성·허베이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왔는데, 서기전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예족은 이어 이동해온 맥족에게 밀려 남으로 왔다가 고조선에 쫓겨 요동군(遼東郡)에 예속하게 된 것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집단이었고,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서기전 2세기경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했으니 이것이 고구려족(高句麗族)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백가쟁명 식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더라도 다른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대 한민족의 조상들인 예맥은 요하강 유역에서 처음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연해주, 북쪽으로는 만주, 남쪽으로는 한반도까지 뻗어나가 번영하고 있던 민족이다. 예맥은 크게 예(濊)족, 맥(貊)족, 한(韓)족으로ㄹ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언어가 통하는 같은 민족이었으나, 향유하는 문화가 명백하게 달라서 서로 다른 취급을 했다. 일반적으로 예(濊)족은 반농반목을 하던 세력이었고, 맥족은 고조선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목축과 사냥 그리고 채집 생활을 하다가 고조선시기부터 고구려 초까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로 변경했다. 반면 예맥에서 가장 늦게 출현으나 한(韓)족은 애초부터 농경문화를 했으며, 특히 벼를 재배하여 쌀 중심의 농경문화를 만들었다.

한(韓)족이 가장 늦게 출현했고, 한(韓)족의 최초국가인 진(辰)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찾기가 힘든고로 고대 조선민족계 민족들의 이름은 '예맥(濊貊)족'이 되었다. 예(濊)족과 맥(貊)족 사이에 문화적 경계가 워낙 애매해서 '예맥(濊貊)족' 자체가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 또한 존재한다. 고대기록에서도 예(濊)와 맥(貊)으로 기록했지 예(濊)족이나 맥(貊)족으로 기록하지 않았음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예맥족이라 부른 기록은 있어서 '예(濊)족'과 '맥(貊)족' 두 민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설 또한 있는데, 뭐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처피 예맥은 고구려에 의하여 통합되어서 고구려 중기만 가도 예(濊)족과 맥(貊)족은 완전히 융합하여 다른 민족으로 볼 수 없게 된다.참고 현대에 예(濊)족과 맥(貊)족으로 나누지 않고 예맥족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서구권의 노르만족, 슬라브족, 게르만족, 라틴족 등의 여러 민족들이 짜잘한 여러 민족들로 나뉜 것과 다르게 고대 조선민족은 오히려 나눠져 있던 것이 통합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역사가 이렇게 흘러가게 된 당연한 이유는 우리민족이 다른 민족들에게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해 뺏기면서 우리민족의 영역이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예맥한으로 나뉘어 있던 조선민족계가 처음으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은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맥(貊)족 인구가 대거 한(韓)족의 영역인 진(辰)으로 내려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서에서는 준왕이 한(韓)왕을 자처했고, 진(辰)은 삼한이 되어 사라진다. 이 때부터 맥(貊)족과 한(韓)족 사이에 문화가 확실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이후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대규모 조선유민들이 남쪽의 삼한에 유입되는데, 이로인하여 삼한도 확연한 철기시대로 진입하는 등, 맥(貊)족과 한(韓)족이 섞이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북부에서는 맥(貊)족 국가인 고구려가 예(濊)족국가들을 정복하여 예맥을 통합 융합시켰다. 한(漢)족에게 정복당하여 그들의 영향을 받아온 맥(貊)족들인 낙랑까지 정복해 예맥족을 깔끔하게 통일했다. 

현대 한민족 문화의 틀이 완성된 것은 한(韓)족인 신라가 맥(貊)+한(韓)족 국가인 백제와 맥(貊)+예(濊)족 국가인 고구려의 남부를 정복하여 통일신라를 형성하면서 부터이다. 이때 북부에서는 예맥의 문화를 온존했던 발해가 형성되었고, 남쪽에서는 예(濊), 맥(貊), 한(韓)의 문화를 모두 가진 대신라가 형성되었다. 이 덕에 예맥한의 모든 문화가 차등없이 혼합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렇게 통합의 근간이 완성된 이후, 훗날 발해가 멸망하고 신라가 분열되어 고려 재통합되는 과정에서 현대 한민족이 완성된다. 발해 유민 중 일부는 돌궐 • 중원 • 거란 • 여진 일부로 동화되었지만 순수한 예맥계의 인구가 가장 많았던 대동강 유역은 결국 고려가 가져갔고 무엇보다 북방유목민족의 강압적이고 적대적인 동화시도 때문에 발해유민들이 대규모로 남쪽의 고려로 넘어와 고려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예맥족이 우리 민족의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현대에서 새로 만든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났을 때, 삼한지역에 내려가 저항없이 정착하여 한왕을 선언한 일이나, 마한의 목지국이 자신과는 다른 분파인 맥(貊)계의 십제가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한강 유역에 정착할 때, 아무런 박해없이 지원하고 공동으로 한(漢)족의 지배를 받는 낙랑과 싸우려 했다거나 신라의 삼한일통 당시, 신라가 제시한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였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할 당시, 발해령 대동강 유역이 자발적으로 고려로 귀속한 사실들, 발해 유민들이 거란의 박해를 피하여 고려로 피난을 온 사실들, 그리고 고려가 그들을 동족으로 인식하고 발해인들을 박해한 거란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한 사실 등은 한민족이 고대에 이미 존재했고, 이러한 의식이 계승되어 발전해 왔다는 것을 알 수있으며, 근대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한민족이 수용하기 전까지 민족관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근본과 그들과는 이질적인 역사를 지녔음도 알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을 부르는 명칭인 한민족은 예맥(濊貊)족의 시초인 고조선을 이은 것은 물론 예(濊)족의 대표적인 국가이자 한국에 전해지는 예(濊)족 문화의 원류로 여겨지는 부여[1와 맥(貊)족 계통이자 이들 부여의 정신적 후예인 고구려[, 백제 그리고 한반도 북서부의 옥저와 동예를 모두 빠짐없이 계승했다. 반면 북방민족들과 중국의 한족은 예맥의 문화를 일체 계승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과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인 흐름속에서 5000년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났으며, 현대 단일민족인 한민족이 존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맥족과 삼한족이 마치 종족조차 다른 듯 구분해서 말하는 일각의 습관은 엄밀히 잘못 된 것이다. 애초에 한(韓)도 예맥(濊貊)이 주류이다.《삼국사기》등에 따르면 고조선 유민들이 부여와 마한, 변한, 진한(진국)으로 상당수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나 유전적으로 보아 고조선에서 파생한 민족들이니 결국은 모두 한민족계라고 할 수 있고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국 고대사의 기록이 불충분하기도 하고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예맥(濊貊)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접한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편
...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편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1,000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옥저 편
역사속에서 예맥이란 명칭으로 우리 민족을 처음 분류한 사람들은 한나라 사람들이었다. 은나라시절부터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나누었는데, 한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다른민족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을 처음 정립하고 이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5방이라는 규범단위를 만든지 한참 지나서 예맥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고대 사료에서는 이민족들을 거대한 규범단위로 먼저 나누고 그것을 다시 문화권으로 다시 나누어 그들을 구분했다. 그들의 구분 중에서 예맥은 동이로 나뉘었는데, 왜와 말갈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전부 예맥으로 분류되었다. 본래 동이는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가 등장하기 전인 하, 상, 주 시절에는 중원 동쪽의 이국 세력들이나 왕국 동쪽의 비중화권 제후국들이 동이족으로 분류되었었다. 하지만 최초의 통일 중화제국인 진나라가 들어선 다음에는 오직 예맥만이 유의미한 동이로 남았다. 북방의 유목민족과 명백하게 차별되는 문화를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유목민족보다는 그나마 덜 싸웠던 예맥이 동이의 주류로 남은 뒤에는 그들을 책봉체제 안에 넣으려고 상당히 공을 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쪽의 기록을 기반으로 예맥(濊貊)족이 원래 하나라는 가설을 세운 학자들과 예(濊)족과 맥(貊)족은 서로를 구분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통합되었다는 학자들로 나뉜다. 예맥쪽이 원래 하나였다는 가설을 세우는 학자들은 기록에서 예족과 맥족을 구분하는 것은 중국 쪽에서 임의로 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예족과 맥족의 언어에는 차이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고조선 이전에 예족과 맥족에 언어적 차이가 있었다면 삼국시대가 시작되는 때 쯤에는 돌이킬 수 없을정도로 언어적 차이가 나야하는데, 고구려어와 신라어와 백제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반면 예(濊)족과 맥(貊)족이 실체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언어와 민족관은 별개라고 보는 것을 기반으로 하며, 이를 기반으로 맥족이 예족을 흡수-동화해가는 것이 북방에서의 우리민족 역사라고 본다. 단군신화를 예(濊)족과 맥(貊)족의 통합과정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당시 반농반목을 하던 예족을 목축과 방목을 하던 맥족이 정복한 것으로 보며, 실제로 고조선을 세운 것은 맥(貊)족이다. 이러한 학설의 근거는 외국의 사료에 있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예족은 호랑이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호랑이를 예족으로 본다는 것이다. 중국 외의 자료로는 곽박의 《이아(爾雅)》와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맥'(貊)이 곰을 의미하므로 '''단군신화에서 예(濊)족이 호랑이이고 맥(貊)족이 곰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단군은 제사와 정치를 같이하는 제정일치사회의 수장이었고, 고조선이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보니, 하늘과 태양에 제사를 지내던 샤머니즘세력이 곰을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던 맥족과 손을 잡고 호랑이를 숭배(토템)하던 예족을 복속하여,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볼 수 있다고 이 학설에서는 설명한다. 여담으로 한(韓)족인 삼한 사람들이 곰을 토템으로 했다는 설도 있다.

 

예(濊)
일단 아래의 모든 항목은 학문적으로 현재 완전히 정립된 관점은 아니다. 예는 다양한 형태로 사서에 제시되는데, 동예라고 흔히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알려진 영동 지역의 예(濊)가 예족의 대표적인 일파이다.
당나라 가탐(賈耽)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강릉)는 예(濊)의 고국’이라고 썼다.
또 다른 하나의 예와 관련해서는 예 세력을 말한다. 이 '예' 세력은 위만조선의 북부, 한사군 중 현도군 등의 고대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전한 세종 무제 시기에 있었던 창해군 복속 사업과 당시의 군주였던 예군 남려와 관련된 기록으로 인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위만조선과 느슨한 형태의 연맹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무제에 의한 별도의 창해군 복속사업은 실패했고, 이후 위만조선 멸망(BC 108) 당시 현도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등의 기반 지역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명확한 구분 기준은 아직 알 수 없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기록된 《후한서》와 《삼국지》에 나오는 동예의 역사 파트는 《사기》와 《한서》의 <조선열전>을 복붙해놓았다.

 

맥(貊)
맥이라는 민족에 관해서는 조선시대 실학자들 이후 다양한 가설들이 나왔으나 근래의 가설은 맥을 주로 고구려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고구려를 맥과 관련하여 '무크리'(Moukri)라고 불렀는데 이는 '맥+고려'라는 의미이다. 돌궐 역시 '맥고려'라는 의미의 '뵈퀼리'(Böküli)라고 고구려를 칭했는데,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

여호규, 송호정, 김현숙 등의 고대사 사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가설은 '예맥'으로 분류되는 지린성과 랴오닝성 일대의 집단 중에서 기원전 3세기 이후 구별되어 구려, 고구려 등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주변의 '예'와 구별되는 '맥'의 정체성을 발현시켰다는 것이다.

맥계는 이와 같이 고구려 건국 및 확장시에 보다 확실하게 대두된다. 물론 고구려 세력이 유일한 맥계 공동체는 아니었고, 고구려 통합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이 편입된 것이다. 중원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세력이었기 때문인지, '맥'을 고구려 세력의 비칭으로 사용한 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북송 시대에 고려 사신의 행패를 소식이 비난할 때 비칭으로 '맥적'이라 부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사학자들의 경우, 과거 《맹자》 등의 중국 고서에 나오는 '맥적' 내지 '맥'을 예맥과 연관시켜 왔지만 《맹자》나 《한서》가 저술되던 시대에 이민족의 족보를 따져 가면서 종족 명칭을 기술하지는 않아 역사학계에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대체로 선진시대 문헌의 '맥'은 북방민족의 범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맥'이라는 명칭은 예맥 외에도 '호맥, 만맥' 등 매우 많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맥'은 이민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고 인지해야지 아무 맥이나 다 '예맥'에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적 관점이다. 이 “일반적인 이민족을 뜻하는 호칭”으로서 쓰인 것 때문에 위말갈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中.

《삼국유사》의 지역 인식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한다. 여기에 나오는 명주는 영동이며, 삭주는 영서 지방을 의미하는데, 현대의 영동 지방은 '예'로 불렸으며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 세력과 평양성 등 고구려계 세력을 주로 '맥'으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에 드날렸다.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의 '양맥'은 '두 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예맥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시점에서는 단순히 예와 맥을 영동/영서로 구분하지 않기도 하며, 이러한 인식은 예맥이 예+맥으로서, 또는 예맥이라는 삼한 일통 이후의 단일민족적 관점에서도 동시에 인지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바이다.

이후에도 맥은 예와 함께 고구려 세력을 의미했다. 고유 풍습과 관련된 말로 '맥궁'(貊弓)이나 '맥적'(貊炙) 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맥적은 한국 요리인 너비아니와 맥적구이의 기반으로 추측되고 있다. 참고로 백제 기록에서도 '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책계왕 때 낙랑군이 주동이 되어 맥인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가서 책계왕이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낙랑군이 주동이 되어 고구려계 용병과 함께 백제(한성백제)와 대결했다고 하면 해석이 매우 부드럽다.

백제에서는 숙적 고구려에 대한 멸칭으로 '박적'(狛賊)을 사용했는데, 외관에서 알 수 있듯이, '박(狛) = 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어 훈독은 Koma이며, 안장왕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그들의 성씨를 狛으로 개칭했다. 백제의 경우, 웅진을 《일본서기》에서는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기 일본으로 이주한 장수인 답본춘초(答㶱春初)가 고조선 준왕의 후손이었단 기록이 《신찬성씨록》에 있다. 특이한 게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하여 조선왕이 백제에 종속되었던 듯한 모양새로 적혀 있다. 이후 자손 혹은 친척으로 보이는 답본양춘(答本陽春)이 724년 아사다노무라지(麻田連)씨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한편 준왕이 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마한에 정착하여 생성된 나라가 2024년 행정구역 기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일대에 있던 건마국으로 추정된다.

 

한(韓)
예맥(濊貊)은 고대 만주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종족명으로, 삼한계 민족들과 함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들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동안 예족과 맥족을 사실상 동질적인 민족들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에 관한 다양한 이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 令備洒掃言教如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한예'(韓穢)를 '한'과 '예'가 섞인 별도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한'과 '예'를 연칭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는 동예, 옥저와 같이 고구려 이외의 한반도 북부인을 지칭하는 언급이며, '한'은 당연히 '삼한' 즉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제 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이 매우 타당하다.

북쪽의 한민족과 남쪽의 한민족, 즉 예인(穢人)과 한인(韓人)들의 차이에 대해서는 백제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간의 언어 차이를 하나의 단서로 들 수 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 의하면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어라하'(於羅瑕)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자어로 왕(王)과 같다. 처는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한자로 비(妃)가 된다."
고 하여 부여계 언어와 한계(韓系) 토착 언어와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배층 언어와 일반민의 용어 차이로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나 동시대 신라 사회나 고구려 사회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왕을 서로 달리 부른 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히 '백제만의 특징적인 차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의혹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백제어 문서의 '이중언어체계' 문단과 반도 일본어설을 참고. 다만 특기할 점은 ~지 계통의 존칭접미사는 고구려(막리지 등)부터 가야(한기 등)까지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반도 일본어설과는 다소 궤를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 가야, 탐라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도 일본어설과 관련해 미국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에 의한 비슷한 지적이 있다. 위처럼 명시적으로 차이가 있는 단어가 있었다고 기록된 건 아니지만 각국의 인명, 지명 등으로 파편처럼 남아있는 각종 단어의 연대에 따른 변천을 근거로 정체불명의 토착어를 예맥계로 보이는 고대 한국어가 대체해나간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했다. 다만 보빈의 경우, 일본어족이 상당히 늦게까지 한반도 남부에 잔류해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여러모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대응관계가 발견되지 않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보빈은 이에 대해 튀르키예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언어적 변동과 고고학적 물적 변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방어하나, 이는 따지자면 물적 증거를 언어학적 추정을 통해 일방적으로 기각하는 접근이므로 보빈의 시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맥=고구려'라는 관점을 보강해서 설명하자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저 구절만으로는 고구려가 같은 예맥계인 예족까지 아예 다른 민족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로 삼기 힘들다. 우선 고구려가 예족을 동질적으로 인식했든, 이질적으로 인식했든, 기존 고구려 영토의 바깥에 거주하다가 잡혀온 예족 계통 속민들을 "약취해온 예인" 외에 달리 뭐라 표현하겠는가. 게다가 애초에 고대에는 같은 민족끼리도 부족별로, 또는 다른 나라들로 나뉘어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서로를 별개의 집단으로 구분하고, 더 나아가 대우를 달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유하자면 6.25 전쟁 때 북한이 "약취한 남조선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당시 고구려 또한 전쟁 포로들을 활용했다고 해서 같은 부여계인 예족과 맥족이 서로 아예 다른 별개의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맥인'인 광개토대왕이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굳이 '한인'과 '예인'만을 골라 언급한 점으로 보았을 때, "예, 맥, 한을 고구려 천하관으로 포함해서 생각한 사례가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진시황이 당시의 중원 천하관에 해당하는 나라들만 통일 대상으로 삼고, 이와 관련이 없는 이민족 국가인 고조선은 제외한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전근대에는 혈통과 언어가 비슷한 같은 민족들을 부족이 서로 다르고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침략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가 매우 흔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시대 당시 여진족들만 해도 서로 부족별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었고, 정복한 타 부족민들을 전부 노예로 만든 경우가 많았었다. 극단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부족들을 아예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의 대상으로 삼았던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이 있다. 

또한 앞서 명기했듯이 예맥이 항시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나타날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인류유전학적 관점이나 고고학과 반드시 조응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 왜곡되며, 이를 후대에 압축해서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편향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근대사학이나 현대의 재야사학의 대표적 오류이다.  

예맥의 뿌리는 같으나 시대에 따라 예와 맥으로 분류되어 호칭되기도 했으며, 다만 그 기준이 과학적이고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 동예/옥저 등 영동계열, 후대 백제 등으로 이주한 북방계 한반도 남부인, 부여인 등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표기 문제
이들 세력이나 종족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헌상으로 예와 맥은 예(濊), 맥(貊)으로만 존재할 뿐 '예족', '맥족'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대로 예맥을 예와 맥이라는 특정 혈연 민족으로 보는 경우, 이들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헌상에는 羌(강), 氐(저), 凶奴(흉노)라고 나타나는 민족을 강족, 저족, 흉노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극 초반에 등장하여 충돌하는 영서, 영동의 말갈 세력을 활동 영역과 기록 시기로 보아, 한반도 중남부에서 활동하던 이질적인 예맥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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