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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성공 요인, 개방성, 지방의 힘

Jobs 9 2024. 4. 1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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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성공요인

일본의 개방성, 지방의 힘


270여 개로 나뉘어 진 번은 각각이 국가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막부체제 이후로 각 번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경쟁 시스템이 있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경쟁은 급격히 치열해집니다.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개혁의 경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각 번은 군사, 행정조직이 갖춰져 있고 이를 운용할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군사와 상업에 있어서 각 번끼리는 경쟁하는 체제였으므로 이를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생존경쟁을 하였습니다. 이는 훗날 메이지유신이 가능하게 한 기본 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른 번보다 앞선 지식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네델란드어와 중국어(한문)을 잘하는 인재의 양성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과 출판의 양성이 적극 장려되었지요. 그 당시에 출판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1861년)이란 책은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출판업은 날개를 달고 있었습니다. 번끼리의 선의의 경쟁은 치열했고 이는 군사, 경제, 교육 등 다방면에서 발전을 촉진하였습니다.    

유럽의 경우, 봉건제로 인한 지방성와 다양성이 토대가 되어 다양한 지식인이 나오고 이것이 르네상스를 통해 열린 개방사회로 이어지면서 유럽의 근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개방성 또한 번주를 비롯한 관료들의 열린 사고와 다양성이 또 하나의 근대화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조선과 비교해 볼 때 교육과 독서 수준의 차이로 나타난 양국 간의 일반적 지식의 차이(지적 수준의 차이)는 개방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일본인의 서양 정보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흡수 노력은 놀랍습니다. 1862년부터 5년간 막부와 각 번이 보낸 해외 유학생 수는 135명에 달합니다. 유학생 뿐만이 아니라 막부는 1860년대 내내 다섯 차례에 걸쳐 대규모 해외 사절단을 파견하여 미국, 유럽, 러시아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메이지 정부의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이어집니다.   

 
서양에 대한 반응

일본 국토의 방어와 안보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쿠마 쇼쟌(1811-1864)의 역할은 큽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이고 개방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서양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외국어를 습득하고 사전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주에 진리가 둘일 수 없다. 서양인이 발명한 다양한 학술도 모두 진리이므로 우리의 성학을 돕기에 충분하다.’라는 말로 그의 앞선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조선의 위정척사파의 대부인 이항로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는 제자인 요시다 쇼인에게 미국으로 갈 것을 적극 권유하였으며 그가 써 준 편지가 존왕양이파에게 발각되어 9년간 가택 연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지만 그 와중에도 난학(네덜란드 연구학)을 연구하며 외국을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일본은 난학을 통해 이미 서양의 힘과 앞선 문물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어느 정도 있었으며, 막부 또한 방대하고 정확한 국제정세 정보를 열심히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서양 열강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벌이는 일들을 대체로 파악하고 있었고, 유럽 대륙의 사정도 대강은 알고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정권 핵심들이 개항과 무역을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1858년 미일 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양이론자들이 굴욕외교라고 하며 비판이 거셌지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864년 조슈번이 시모노세키 전투에서 서양 세력에 패하자 더 이상 양이를 표방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은 서양 주도의 국제사회에 대한 참여, 군사기술의 도입과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과 일본의 독립유지,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해외진출이라는 대외론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오히려 더욱 문을 걸어 닫고 쇄국정책을 폈더 조선과는 정반대의 길을 일본은 택했습니다.

 


일본의 칼잡이(사무라이정신)와 조선의 붓잡이(주자성리학)의 “패함에 대한 승복”의 차이

 대개 사무라이라 불리는 칼잡이들은 싸움에서 지는 순간 그것으로 승패를 결정짓고 패자는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대부라 불리는 붓잡이들은 무력에 지더라도 정신적으로 우리는 지지 않았다고 ‘정신승리’의 길로 가면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후 조선은 오래전에 망해 없어진 명나라를 받들고, 세계 제국으로 떠오른 청나라를 거부하는 바람에 당대의 선진 문명의 유입을 배척하는 결과를 야기하였습니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던 소중화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 중원 문화(명)가 오랑캐(청)에 의해 파괴되었으니 우리가 중원 대륙, ‘아버지의 나라’의 중화문명을 계승하는 존재다. 중화의 문명적 정통은 오랑캐의 나라 청이 아니라, 조선이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청나라보다 우월한 정신과 문명을 보유하고 있는 ‘소중화’의 나라이다”
 
두 나라의 대조적인 현실 인식은 시대적 변화에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국가가 국민의 운명을 어떤 길로 내몰았는지 이후의 역사는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존왕양이파’와 ‘개화파’의 절묘한 결합이 메이지 유신의 성공 요인

일본에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을 해야 한다는 존왕양이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것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는 남의 것도 들여와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쇄국이지만 막무가내 쇄국은 아니었습니다. 양이론자들의 목표는 적극적 개국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이들은 장래의 개국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고 다만 시기상조라고 보았을 뿐입니다. 장래의 개국을 위해서는 일본을 전면적으로 쇄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고 이런 면에서 수구세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혁신론자에 가깝습니다. 존왕양이파들이 주도하는 쇄국 와중에도 조슈번에서는 조슈 Five (장주 5걸)를 영국에 보내서 미래를 도모하였습니다.
 

‘독서하는 사무라이’의 등장

1750년 이후 학교 설립 붐이 일어나면서 각 번들은 사무라이 자제들에게 번교 출석을 독려했고 음미 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설립 붐은 많은 교육기회를 제공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배움의 길로 들어 섰습니다. 장기간의 평화가 지속되자 사무라이들은 점점 군인으로서의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고 대신 행정능력과 정치 역량이 중요해졌습니다. 사무라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것이 점점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유교적 소양이 깊어지면서 사무라이들의 정체성에도 변화가 나타납니다.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은 점차 ‘사대부화’ 되어 갔습니다. 이런 흐름은 결국 사무라이의 정치화를 촉진합니다. 유학이 확산되면서 군주의 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고 전국에서 모여든 하급 사무라이들도 존왕양이를 지지하며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대부적 정치 문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메이지 유신은 이루어졌습니다. 

 

기득권의 신속한 판단

 그동안 존재가치가 없었던 천황을 옹립하고자 하는 고구가쿠 정신이 미토학에서 나오는데, 미토번은 도쿠가와 영지로 마지막 쇼군 배출한 곳입니다. 막부말기 존왕양이파와의 대립에서 막부가 쉽게 전권을 내려놓고 천황에게서 복속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판적봉환’(옛날 천황이 준 봉토이므로 다시 돌려주는 일) 사건도 당대의 시스템으로는 나라를 살릴 수 없다는 판단하에 서로 목숨을 건 사투를 하지 않고 체제를 바꾸게 되는데 일조를 합니다.

왕정복고는 했지만 어떤 시스템으로 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을 보내어 모든 행정 시스템을 연구하는 등 선진 문물 시찰단을 미국 유럽 아시아등 세계각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렇듯 기득권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사무라이들의 사회적 자살) 계급간의 큰 충돌없이 화합할 수 있던 것이 메이지유신의 성공 배경이었습니다 

 
체제를 위협하지 않은 반란들

물론 모두가 다 새 체제에 순응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징병제(1871년)의 실시가 선포되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들의 반발은 지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대외적으로 조선에서는 일본의 새로운 황제 칭호를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외교적 마찰이 발생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은 국내의 국론 통일이 시급한 문제였으므로 이를 위해 외부에 적을 만들자는 정한론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 중에서 오쿠보와 이와쿠라가 돌오게 되고 오쿠보는 놀라운 논리로 이러한 주장을 물리칩니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세력은 낙향하고 이들 세력을 정리하는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혁명적 체제 변화라는 정국의 혼란한 틈 속에서도 해외에 사절단을 보내고 유학을 시켜서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심을 내었고 크고 작은 내전도 치렀지만, 서서히 사회적 봉합을 이루면서 하면서 하나의 근대적 국가라는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5개조 서약문과 유신혁명 
제1조 널리 회의를 열어, 공론에 따라 나라의 정치를 정한다. 
제2조 상하가 마음을 합쳐 국가 정책(경륜)을 활발하게 펼친다. 
제3조 중앙관리, 지방무사가 하나가 되고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뜻한 바를 이루어 불만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제4조 엣날부터 내려오는 낡은 관습을 깨고 천지의 공도에 따른다. 
제5조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황국의 기반을 크게 진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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