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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낙랑군, 대방군, 고구려, 광개토대왕, 새로운 무역로 개설

Jobs 9 2023. 4. 2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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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한나라가 망하면서 낙랑과 백제 중심의 무역로가 깨지고 고구려와 신라가 득세했다는 사실이다. 한나라 멸망의 혜택을 가장 크게 본 나라는 고구려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오랑캐가 중국으로 들어가자 빈집털이를 한 것이다. 새로운 무역로 개설이다.

 

낙랑군(樂浪郡, 기원전 108년~기원후 313년)은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점령하고 세운 한사군 중 하나로, 현도군과 함께 최후까지 남은 변군(邊郡)이다. 대략 한반도 북부를 관할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중국의 변군으로 존속하였으며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약 420년에 걸쳐 한반도 및 만주 일대의 민족들과 대립하고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사군의 위치
낙랑군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204년)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송서≫·≪남제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미천왕 14년(313) 10월에 낙랑군을 침입하여 남녀 2천여 명을 노획했으며, 이듬해 7월에는 대방군을 침입했다. 미천왕대의 낙랑·대방에 대한 침략기사를 마지막으로≪삼국사기≫에서 이들의 역사활동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후의 낙랑·대방에서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중국측의 사료를 살필 수밖에 없다.≪자치통감≫에 의하면 낙랑군이 이 당시 요서지방에 웅거하고 있던 모용씨에게로 귀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454) 하지만 거기에는 대방의 귀속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동에 따른 자세한 내용도 알 수 없다.≪위서≫에서는 북위 때에 낙랑과 대방이 함께 유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455) 이 때의 이동이 어느 곳으로부터의 이동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유주로 옮겨진 낙랑·대방의 위치는 요서의 龍城 부근의 어느 곳으로 추정되며, 용성은 바로 수나라 때의 柳城을 가리킨다.456) 한편≪진서≫지리지에 의하면 平州의 속군 가운데에는 창려군·요동군·낙랑군·현도군·대방군이 속해 있었다. 그런데≪위서≫지형지에 의하면 낙랑군이 南榮州 및 營州條에 모두 나타나 있다.457) 이처럼 같은 책에 낙랑이 2개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낙랑의 위치가 때에 따라 이동하였던 사실을 알게 한다. 하지만 이 중에서 남영주는 북위의 孝明帝 延昌연간에 영주가 거란에 점령당하자 永熙(효무제) 2년(533)에 현재의 保定府 근처로 옮긴 이후의 명칭이다. 그러므로 영주조에 기록된 낙랑의 위치에 대한 고찰이 곧 낙랑의 추이를 추적하는 데 보다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458) 영주조의 기록에 의하면 다시 대방이 낙랑에 속하게 되었으며 낙랑군의 치소를 連城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의 속현으로서 영락이 있었는데 이곳은 錦州에 해당된다.459) 그러므로 효명제 正光 말년경 낙랑군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금주 부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낙랑은 용성·금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낙랑군의 위치가 시기에 따라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다 더 자세한 추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의 사민책이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대방에 대해서는 더욱 영세한 자료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다. 대방에 대하여는 진민제 건흥 원년(313)의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낙랑과 함께 요서지방으로 이동하였는지 또는 그 후 이동하였는지도 잘 알 수 없다. 하지만≪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천왕 15년에 고구려가 대방을 남침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서 낙랑이 이동한 이후에 이동한 것 같다.≪자치통감≫에는 대방태수 王誕을 左長史에 임명한 내용이 있다.460) 이는 慕容皝이 慕容廆의 뒤를 이으며 관작을 주는 기록으로써 이미 모용외 때 대방이 이동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국양왕 2년(385)에 後燕王 慕容垂가 고구려의 요동 침공에 대항하여 대방왕 佐로 하여금 용성을 지키게 한 것으로 보아461) 대방의 위치 비정에 시사하는 바 크다. 곧 낙랑과 인접된 지역에 위치하였던 것 같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가 발전하던 시기에 커다란 영향력을 과시했던 낙랑·대방은 4세기에 이르면 이미 중국의 예속을 벗어나 토착세력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고구려·백제의 성장에 따라 요서지방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모용씨에게 귀속되는 시기는 진과 모용씨가 대치하던 시기였으니 진으로서는 커다란 세력의 변화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낙랑·대방이 모용씨에게로 귀속된 사건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주목하여야 할 정세변동이었다. 그런데 사료상에는 낙랑·대방의 요서이동이란 역사적 사건과, 백제의 요서영유란 국제적인 세력 변화가 진대에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북조계의 사서에서는 낙랑·대방의 요서이동에 관련된 것들만 기록하였고, 백제의 요서영유 사실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남조계의 사서에서는 반대로 요서영유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요서영유 기사는 남조측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울러 이 시기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북조와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남북조시대 남조의 백제관과, 문제의 발단이 된≪송서≫·≪남제서≫편찬 전후의 백제와 남조와의 외교관계를 통하여 뒷받침된다. 남조에서는 전시대부터의 전통적인 관념에 의하여 동시대적인 백제보다도 낙랑과 대방이 그들의 인식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의례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백제왕의 봉책명을 여전히 낙랑·대방과 연계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전제로 백제의 요서영유 사실이 처음으로 기록된≪송서≫·≪남제서≫가 편찬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이루어진 남조와 백제와의 관계는 주목된다. 

 ≪송서≫·≪남제서≫의 내용은 송이나 남제의 외교자료에 의한 사실만을 기록한 사서이기462) 때문에 요서영유 기사도 당시의 외교적 사실의 반영이다.≪송서≫의 편찬은 양나라의 심약이 남제 때인 영명 6년(488)에 완성하였다. 그러므로≪송서≫가 편찬된 5세기 후반경의 백제와 남조의 외교관계 사료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 남조에서 백제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가졌던가 하는 것이 참고되어야 할 것이다.≪송서≫에 보이는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사는 다른 내용과 달리 송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시대에 이루어진 사실의 기록이다. 이는≪송서≫의 편찬 시기에 이루어진 외교관계에 의하여 전시대에 이루어졌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남제서≫의 내용 또한≪송서≫와 성격을 함께 한다.≪남제서≫의 내용도 모두 남제 때의 사실에 관한 기록인데 오직 요서영유의 사실만은 전시대의 내용이다. 이 또한 외교적 상황에 의해 전시대의 사실을 기록했다고 해석된다. 이 때의 외교적 상황들로 주목되는 것은 바로≪남제서≫백제전의 내용이다. 

 ≪남제서≫백제전의 전반 부분은 결실되어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백제가 제에 대하여 관작을 청구하는 내용과 이를 허락하는 글이다. 결실된 앞부분에 백제의 요서영유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463) 그런데 그 뒤를 이어 기록된 상표문은≪송서≫가 편찬된 직후에 백제에서 남제로 보낸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백제는 동성왕 12년(490)에 ‘建威將軍廣陽太守’인 高達을 ‘龍驤將軍帶方太守’로 봉해줄 것을 청하였으며, 동성왕 17년(495)의 상표문에서는 慕遺를 ‘樂浪太守’로 봉책하도록 청하여 허락받았다.464) 동성왕이 직접 남제에 청구한 관작이 ‘대방태수’·‘낙랑태수’란 점이 주목된다. 왜냐하면 이에 앞선 개로왕 18년(472)에도 백제에서 북위에 보낸 사신 가운데 帶方太守 張茂가 있었으므로465) 이 시기에 나타나는 백제의 대중관계에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선 4세기 후반에는 남북조에서 모두 낙랑·대방이 동시대적인 백제보다 강하게 인식되어지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변하지 않고 백제와 남조의 외교문서상에 다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4세기 후반의 관념이 이어져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백제에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공공연하게 대방태수를 일컫고 관작을 청하였으며, 또한 낙랑태수의 관작을 청하여 이를 허락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백제의 태도는 4세기 중엽부터 대립관계에 있던 고구려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인 듯하다. 이러한 백제의 대중관계는 문주왕 원년(475) 고구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한성이 함락당하자 심화된 것 같다. 백제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즉≪송서≫가 편찬되는 전후에 중국으로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공공연히 ‘대방태수’·‘낙랑태수’의 관작을 청하여 허락받았으며, ‘대방태수’를 사신으로 보내었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낙랑과 대방에 대한 백제의 영유권 주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남북조의 첨예한 대치상황에서≪송서≫의 편찬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면≪송서≫의 찬자인 심약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대에 이루어진 낙랑·대방의 요서이동을 백제와 관련된 사실로 기록하였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다른 내용과 달리 전대의 사실이더라도 초시제적으로 오직 요서영유의 사실만은 기록하게 된 것 같다.≪송서≫가 편찬되기 이전인 개로왕 때에 이미 백제의 이러한 주장이 외교문서상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남제서≫의 내용 또한≪송서≫의 답습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편찬된 것으로 이해된다.≪남제서≫의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는 내용도 낙랑·대방군을 지칭하는 듯하다.≪남제서≫에 나타난 백제에서의 ‘낙랑태수’·‘대방태수’의 관작청구에 따른 허락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북조의 대치상태에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기 위하여≪송서≫·≪남제서≫에서는 당대의 외교적 사실에 국한된 내용들만 기록하였으나, 오직 요서영유 기사만은 전대의 사실에 관한 내용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요서영유를 방증하는 자료로 간주되던≪남제서≫의 백제와 魏虜와의 전쟁기사 및≪삼국사기≫동성왕의 북위와의 전쟁기사는 잘못 해석된 것으로서 실제는 고구려와의 전쟁기사가 아니었는가 추측된다.466) 그러므로 이를 통해≪남제서≫찬자의 역사인식상의 문제가 또다시 지적되는 것이다. 당시 고구려와 북위는 밀착된 세력으로 고구려의 세력을 무찌른 백제에서는 이 결과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던 남제에 보고하고, 전쟁의 공로자들에 대한 봉책을 요구한 것이었다. 바로 이 봉책요구를 위한 상표문이≪남제서≫백제전의 동성왕 상표문이며, 이를 통해 낙랑·대방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고 허락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상황에서≪남제서≫의 찬자 역시≪송서≫처럼≪남제서≫편찬 이전에 이루어진 낙랑·대방의 요서지방으로의 이동을 백제와 관련되게 기록함으로써≪남제서≫의 당대적 서술의 성격과 달리 전대의 초시제적 내용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더욱 뒷받침하는 것이 역시 남북조시대에 편찬된≪양직공도≫의 기록이다.≪양직공도≫에는 낙랑이 요서영유의 주체로 되어있다. 백제국의 사신도에 낙랑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양대에도 백제·낙랑에 대한 관념상의 혼란이 있었으며 시대적 상황에서 동일시하였던 까닭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는 남조에서 낙랑과 백제와의 관념상의 관계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더욱이≪통전≫에 의하면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한 후 두었던 치소가 柳城과 北平의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467) 이 유성은 바로 낙랑이 요서로 이동한 후 위치하였던 지역이었다.

 그 밖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인≪양서≫는 당대의 편찬사서로서,≪송서≫·≪남제서≫를 답습하였고,≪남사≫는≪양서≫를 옮겨 적은 것이었다.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내용이 남조계 사서에 국한된 것은 남조에서 전통적인 낙랑·대방의 관념에 의하여 백제관이 분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5세기 후반 고구려·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던 남조는 백제국으로부터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낙랑·대방의 영유권 주장을 북조에 대항하기 위해 이를 인정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낙랑·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5세기 후반 고구려에 의한 백제의 한강유역 상실로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 바로 백제 요서영유의 기록이 처음으로 발단되는≪송서≫가 편찬되는데, 이 때 이러한 백제와 남조와의 외교적 관계가 반영된 것이 요서영유에 대한 기사이었다. 그러므로≪송서≫의 내용 가운데서 전대에 이루어진 낙랑·대방의 요서이동과 관련한 백제의 요서영유 기록만이 초시제적 사실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남제서≫도 같은 남북조시대에 편찬된 사서로서≪송서≫와 같은 인식에서 비롯되었고,≪양서≫·≪통전≫등 당대 편찬사서는 모두≪송서≫·≪남제서≫를 답습함으로써 요서영유에 대한 기사는 오직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나 고구려관이 보다 동시대적이었고, 보다 구체적으로 지정학적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요서지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당사국들에 관한 기록인 북조계 사서에서는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될 수 없었다. 단지 낙랑·대방의 이동에 따른 역사활동만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서영유의 당사국인 백제의 기록에도 요서영유에 관하여 전혀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兪元載>

 

 

낙랑군과 대방군
 한의 무제 때 설치된 漢四郡 가운데 낙랑과, 그 후의 대방은 삼국의 발전기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삼국사기≫를 통해 그들의 역사활동을 살펴보면 백제와의 관계가 중심이었다. 그 내용은 백제가 온조왕 때부터 영역을 확대해 나가며 이루어지는 활동과, 그 후 고이왕·책계왕·분서왕대에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나누어진다. 온조왕대의 기록은 주로 백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낙랑과의 관계로서, 도읍지가 그들에 의하여 불타버리는 사태에까지 이르고 있다.448) 이를 보면 낙랑은 초기 백제에 있어서 극복되어야 할 최대의 현안문제였던 것이다. 그 후 고이왕대 이후인 3∼4세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제와 대방과의 관계이다. 책계왕대에 고구려가 대방을 침략하자 대방은 백제에 군대를 청하였고, 백제에서는 대방「舅甥之國」이라 하여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낙랑에 비교할 때 대방은 백제와 이 시기에 상당히 밀착된 관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백제왕이 시해당하는 등 낙랑과는 계속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대방과는 적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백제와 대방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後漢 교체기에는 낙랑군에서 王調가 태수 劉憲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다. 광무 6년(30) 한에서 파견된 낙랑태수 王遵에 의하여 난이 평정되고, 낙랑은 다시 후한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이 때 후한은 낙랑의 동부 7현을 포기하고 그 곳에 토착인으로 현후를 임명하였다. 특히 환제·영제대에는 이 지역에서 한·예가 강성하였으므로 낙랑주민이 한의 영역으로 유입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낙랑 屯有縣 이남의 땅은 황무지화되었고 마침내 요동의 公孫氏가 대방군을 설치하게 되도록 이르렀다. 그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공손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들이 魏에 멸망한 다음에는 위의 幽州刺史에게, 西晋이 위를 대신하면서는 서진의 유주자사에게 속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낙랑은 대방군을 분리한 이후 11현에서 대동강 이북의 5현은 없어지고 이남의 6현만이 남게 되었다. 

 ≪후한서≫에 의하면 유주의 속군으로 낙랑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낙랑의 속현 중에 대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진서≫지리지에 의하면 평주에 속하게 되는데 대방군이 낙랑군과 함께 독립된 군으로 되어 있다.449) 이 때의 대방은≪후한서≫에 낙랑의 속현으로 되어 있던 列口·昭明·長岑·提奚·帶方·含資·海冥 등을 관할하였다. 이른바 남부도위 소관의 7현을 관할하고 그 치소를 대방현에 두었던 것이니, 오늘날의 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속칭 唐土城이 치소가 되는 곳이었다.450)≪진서≫지리지에서 당시의 군세를 살펴보면 낙랑보다 대방의 군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451) 이러한 대방군은≪위서≫지리지에서는 다시 영주에 속하는 낙랑군의 속현으로 개편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낙랑·대방은 진대에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세력이었으며 더욱이 대방은 요동군 다음가는 군세였다. 이들은 4세기에 이르면 이미 중국의 예속상태에 놓여 있지 않고 토착호족들에 의하여 지배되었다.452) 이러한 세력집단이 바로 요서지방에 웅거하고 있던 모용씨에게로 귀속되어지는 것이다. 이는 실로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는 중요한 세력의 변화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특히 동진으로서는 모용씨세력과 대치하던 시기이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들이 이동하였던 요서는 요동과 마주하는 지역이다. 이들이 나뉘어지는 곳은 요하이다. 요하는 남만주를 동서로 가르고 발해만으로 유입된다. 요서군은 한대 이전에 이 지역의 서쪽에 설치되었는데 때에 따라 변동이 심했던 지역이다. 요서군의 중심지는 大凌河 하류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대에는 烏丸의 침입에 의하여 지역이 축소되기도 하였고, 요동속국이라는 특수한 행정구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후한 말기에는 鮮卑에 의하여 부활되었으나 다시 개편되었다가 晋末까지는 진에 속했었다. 그 후 이곳은 선비족이 건립한 前燕·北燕·北魏 등의 중심지로 되었다. 백제가 요서를 영유했던 시기가 진나라 말기로 규정될 때 이 시기의 요서지방은 선비족들에 의하여 점령된 역사활동의 중심 마당이었다.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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