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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 1139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1938-전시통제 기본법

1938년 4월에 일제가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해 제정·공포한 전시통제의 기본법. 전문 50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1938년 4월 1일에 공포되어 그 해 5월 5일부터 일본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에서는 ‘국가총동원법을 조선·대만 및 화태(樺太)주 01)에 시행하는 건’에 의하여 같은 날 이 법이 의용(依用)되었다. 이 법에서 국가총동원이라 함은 전시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의 경우에 이른바 국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함을 말한다. 이 법은 이러한 입법 목적을 위해 이 법은 일체의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 물자와 총동원 업무로 양분하여 강력한 통제 밑에 있게 하였다. 총동원물자는 ① 병기·함정·탄약 기타 군용 물자, ②..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1918-상해 독립운동단체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일명 신한청년당이라고도 한다. 1918년 11월 말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새로운 질서의 개편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독립지사들 사이에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체의 조직임을 알고, 이를 구체화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발기인으로 국내에서 망명해 온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문일평(文一平)·정인보(鄭寅普)·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조용은(趙鎔殷)·장덕수(張德秀)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 1918년 12월 15일경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파견한 특사 클레인(Clain)이 상해에..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1908- 국책회사(國策會社)

1908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국책회사(國策會社). 이 회사는 일반회사법에 의거해 창립된 것이 아니라 한일 양국에서 제정, 공포 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라는 특수법에 의거해 설립되었다. 따라서 이 회사는 일본 국적과 한국 국적을 가지는 이중 국적회사로 창립된 것이다. 일본은 1908년 3월 제24회 의회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에 설치된 일제통감부는 이 법안을 한국정부에 강요해, 1908년 8월 26일에 국왕의 재가를 얻어 그 해 8월 27일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공포하였다. 이 법률에 의거해 그 해 12월 28일에 한일합작회사로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이 회사 창립에는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116인의 창립위원이 임명되었다. 그 가운데 일본인측 위원은 83인, 한..

회사령(會社令), 1910, 조선총독부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회사 설립에 관한 제령(制令). 조선을 강점한 1910년 이후의 10년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한반도 전역을 전율(戰慄)의 상태에 두면서 한반도 경제의 제국주의적 재편작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작업에는 두 가지 큰 시책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토지조사사업은 농토의 약탈과 농민수탈의 농업정책을, 다른 하나인 이 「회사령」은 일제식민지 상공업정책을 집약하고 대표하였다. 1) 실시목적 이 「회사령」은 실시 목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한반도 내에 한민족 자본의 발생을 처음부터 억제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일본자본·외국자본의 진출도 막아 한반도를 원시적인 원료공급지이면서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

권업회(勸業會)1911-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 단체.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瑢)·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 등 재연해주(在沿海州)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1911년 5월에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으며,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얻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회의조직을 의사부(議事部)와 집행부(執行部)로 나누었다. 의사부는 총회에서 선출한 3∼9명의 의사원으로 구성하며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집행부는 신문부(新聞部) 등 13개부로 나누어 업무를 분장하게 하였다. 창립 이후 회세를 확대한 결과 1913년 10..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1914-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정부, 권업회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 1911년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가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대전학교(大甸學校)라는 사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러시아의 극동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 군영지(軍營地)를 조차하는 한편,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인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를 운영하였다. 그 결과 1914년 권업회 의사부 신임의장 이상설(李相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훈련받은 무장 병력 약 3만여 명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해로,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개전설이 나돌았다. 이에 발 맞추어 권업회는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에 널리 퍼져 있는 무..

광무개혁(光武改革)1897 - 대한제국 근대적 개혁

✽광무개혁(대한제국) 제국긍지 광무굵지 1897 광양시 간식평 실무 광무 - 칭제건원 양전사업-지계발급 시위대, 원수부 간도, 울릉도 식산흥업정책 실시 평식원平式院(도량형) 실업 기술학교 설립 무관학교 설립 1897 고종 및 대한제국 정부의 개명(開明)된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 1897년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이 개혁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른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獨立協會)세력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자주 비교된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주로 보수파가 주도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은 비록 외세의 종용과 간..

임술 농민 봉기 1862 -철종, 삼정문란, 안핵사, 삼정이정청

1862년(철종 13)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항쟁. 임술 농민 봉기(1862) 1. 원인 삼정의 문란 등 지배층의 탐학 2. 전개 진주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 3. 진주 농민 봉기 원인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 봉기 몰락 양반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 → 자진 해산 영향 다른 지방의 농민 봉기 자극 → 삼남 지방의 70여 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남 → 전국으로 확대 세도 정치기인 19세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계속되었는데, 특히 1862년에는 함흥에서 제주까지 전국 72개 군현에서 개별적∙산발적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남 4. 정부의 대응 안핵사·암행어사 파견, 삼정이정청 설치 → 성과 미흡 18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급속..

손진태, 신민족주의사관, 진단학회

일제강점기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국사대요』 등을 저술한 학자.국사학자. 부산 출신으로 중동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에서 동양문화사와 문명사 등을 강의했으며 해방 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문교부 차관 및 편수국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장으로 재임시 일어난 한국전쟁 때 납북돼 1960년대 중반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 온돌,민간설화,원시신앙 등 민속학 분야를 왕성하게 연구했던 그는 이른바 '신민족주의사관'을 제창하며 민족 내부의 균등과 단결,여기에 기반한 민족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국사를 서술하는 등 역사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1970년대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조명을 받았다. 저서로는..

문일평, 조선심

일제강점기 「한양조의 정치가군상」, 「사상의 기인」, 「사와 시의 도 강화」 등을 저술한 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1905년 유학을 떠나 일본의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서 이광수(李光洙)와 같이 공부하였다. 1908년 귀국하여 평양의 대성(大成), 의주의 양실(養實),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광문회(光文會)에 관여하였다. 1911년 정치학 연구를 목적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다. 이 때 안재홍(安在鴻)·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가 주로 상해(上海)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생활하였다.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 근무하면서 논설을 쓰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조소앙(趙素昻)·정인보(鄭寅普..

정인보(鄭寅普)-『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민족혁명당 1935-난징,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의열단

1935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정당. 1920년대 후반의 국외 독립운동은 국민대표회와 민족유일당운동의 실패로 침체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만주사변과 상해사변 이후 독립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게 되어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김규식(金奎植)은 광복동지회(光復同志會) 대표로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최동오(崔東旿), 의열단(義烈團)의 한일래(韓一來),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이유필(李裕弼)·김두봉(金枓奉)과 협의하여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보다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1935년 7월 5일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 5당 대표가 난징[南京]에서 민..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1894-구미인들의 사교친목단체club

1894년(고종 31)서울에서 조직된 구미인들의 사교친목단체. 국내인으로 이 구락부에 가입한 회원은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서재필(徐載弼)·이완용(李完用) 등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미국공사 실(Sill,J.M.B.,施逸)과 프랑스영사 플랑시(Plancy,C.de.)를 비롯해 당시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초빙된 다이(Dye,W.M.)와 리젠드르(Legendre,C.W.),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와 아펜젤러(Appenzeller,H.G.) 등이 있었다. 구락부의 주요 회원으로 일본인들이 전혀 가담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열강 세력의 성쇠 속에서 친구미파 인사와 주한구미외교관들의 연대를 위한 연락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행하였던 것 같다. 이들은 러시아·프랑스·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1919, 만주 독립군 양성학교, 의열단, 광복군

1919년 5월 3일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군 양성학교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 건설지 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0년 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그 뒤 토착민의 배척이 심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았으나,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소장 이동녕, 교관 김창환(金昌煥)·남상복(南相復)·이장녕(李章寧)·이세영(李世永) 등에 의해 운영되어, 1911..

임야조사사업(林野調査事業)

일제가 한국에서 식민지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임야에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일제의 임야수탈정책상 일반토지와 마찬가지로 임야도 자본투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적 의미의 소유권 확립과 그 이전(移轉)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적 임야소유관계 확립이 필수적이었다. 일제는 종래 한국의 토지·임야소유제를 반(半)봉건적 소유제도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근대적인 사적 소유제를 형식적으로 도입한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해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식민지 수탈의 양대 기초로 삼았다. 일제는 한국을 병합하기 이전부터 전 국토의 73%에 해당하는 임야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삼림조사를 시도했다. 이 조사는 임야의 상황, 한국의 삼림제도와 임정(林政), 삼림식물분포, 임산물(목재)의 수급상태 및 압록강유역의 벌목사업을 위시한 지권(..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 1912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일제 하의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1910년 우리 나라를 완전히 식민지로 강점한 전후 식민지체제 수립을 위한 제1차적 작업으로 실시한 종합적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다. 일제가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서둘러 실시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한 토지소유의 증명제도(證明制度)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왕조 말기에도 토지는 사유권이 확립되어 상품으로서 자유롭게 매매되고 있었으나 등기제도(登記制度) 등 사유권을 법제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또한, 토지에 사유권 외에도 농민층의 각종 권리가 토지에 부착되어 있어서 일본자본의 토지 점유에 장애요소가 되었다. 이 ..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 개정 조일통상장정

1884년(고종 21) 이후 곡물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사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 거기에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1883년 6월에는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 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제한적이나마 법제적인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1) 1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1876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에 달..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은 조선과 미국 간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다. 미국은 1844년(헌종 10년) 청국과, 1854년(철종 5년)에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며 양국의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후 미국은 1866년(고종 3년) 제너럴 셔먼 호 사건으로 조선의 개항에 적극적 관심을 가졌고, 1871년(고종 8년) 포함 외교에 의해 강제로 조선의 개항을 성취하려고 하였으나 무력 충돌로 좌절되었다. 1876년(고종 13년) 「조일 수호 조규」가 체결된 이후 미국은 1878년(고종 15년) 3월 상하원 합동으로 조선 개항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무역상의 이익과 표류하는 자국 선박을 구조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는 동아시아 함대 제독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50~19..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1882년(고종 19년) 8월 23일 조선의 주정사(奏正使) 조영하(趙寧夏, 1845~1884)와 청국의 직예총독(直隷總督) 이홍장(李鴻章, 1823~1901) 사이에 조선과 중국 양국 상인들의 무역 통상을 규정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일부이다. 청국은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자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또한 아편 전쟁 및 청불 전쟁의 여파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기존의 조공국(朝貢國)이던 조선에 대한 정치⋅외교적 지배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1882년 5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주도적으로 체결토록 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조..

개정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1883-방곡령 관련 규정,관세 규정,최혜국 대우 인정

1883년 7월 25일 조선과 일본 간의 근대적 통상관계를 전반적으로 규정한 통상조약. 조선 측의 전권대신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과 일본 측 전권대신인 판리공사(辦理公使) 다케조에(竹添進一郎) 사이에 조인된 전문 42조의 조약이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가 체결된 직후 「조일무역규칙(朝日貿易規則)」에 의해 양국 간의 통상관계에 대한 간단한 약조가 맺어졌다. 이때 양국 대표 간에 교환된 조인희·미야모토의정서(趙寅熙·宮本小一議定書)에 의해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無關稅)가 약정되어 조선의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이 침해되었다. 개항 후 조선 정부는 근대경제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서 관세자주권의 침해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벌여 1881년 부산두모포(豆..

6·10만세운동 1926 - 순종 인산일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도 미국이나 서구열강의 원조가 소극적이고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 모인 청년정객들의 이상주의에 불과하여 처음부터 많은 분란과 오해의 요인을 안고 수립된 망명정부였다. 그런데 1921년 레닌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원조자금문제와 1925년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면직결의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결정적으로 난파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방면으로 밀려났다가, 1921년..

정우회(正友會) 선언 1926 - 사회주의 단체

1926년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4개의 사회주의단체로 성립된 4단체합동위원회의 발전적 해체로 성립되었다. 1925년에 들어서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희망하는 태도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 내부의 극심한 파쟁에서 기인하였다. 같은 해 5월 일제가 「치안유지법」(4월 공포)을 실행하자, 사회주의자들도 파벌을 초월해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되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은 이에 대비, 각각 자체 내에서 조직적인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 결과 먼저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曜會)·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가 결합, 4단체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청구학회 1930 - 친일 어용 학술단체,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1930년에 한국, 만주 등을 중심으로 한 극동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하여 조직한 어용 학술 단체. 경성 제국 대학 법문학부,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의 간부들로 구성되었는데 한국인으로는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등이 참여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공무원 국어 PDF 다운로드 공무원 영어 PDF 다운로드 공무원 한국사 PDF 다운로드 공무원 행정학 PDF 다운로드 공무원 행정법 PDF 다운로드 경찰학, 헌법, 형법, 형소법 PDF 다운로드 경영학, 경제학, 회계학 PDF 다운로드

한국독립당 1930- 상해, 민족주의, 이동녕, 조소앙, 김구, 안창호, 김두봉, 지청천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이자 광복 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하고 제1공화국 때 몰락하였다가 1962년에 재건된 보수정당. 약칭 한독당이라고도 한다. 1930년 당의 결성식에 조완구(趙琬九)·윤기섭(尹琦燮)·김구(金九)·엄항섭(嚴恒燮)·김홍숙(金弘叔)·이시영(李始榮)·옥성빈(玉成彬)·김철(金澈)·안공근(安恭根)·한진교(韓鎭敎)·김갑(金甲)·김두봉(金枓奉)·선우 혁(鮮于赫)·송병조(宋秉祚)·조상섭(趙尙燮)·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백기준(白基俊)·박창세(朴昌世)·최석순(崔錫淳)·장덕로(張德櫓)·이탁(李鐸)·강창제(姜昌濟)·박찬익(朴翊翊) 등 26명이 참석하여 독립투쟁전선 통일과 지방파벌 청산을 목표로 내세웠다. 당의 조직으로는..

흥경성전투, 1933, 조선혁명군, 한중연합군

1933년 한중연합군이 전개한 항일전투. 1932년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항전하기로 하고 한중연합군을 편성, 이듬해 5월 8일영릉가(永陵街)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패전한 일본군은 같은 해 6월 15일 양대령(楊臺嶺)을 넘어 흥경(興京)·청원(淸原) 지방으로 공격하여 왔는데,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조선혁명군은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의 지휘하에 1,000명의 병력으로 청원지방을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 명의 병력으로 흥경성을 사수하도록 작전계획을 세웠다. 조선혁명군은 기습공격으로 비행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패전함으로써 남산성(南山城)으로 퇴각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3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

국민부(國民府)1929-남만주 3부 통합 항일독립운동단체

1929년 4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1925년 이래 남북만주 일대에서 분산적으로 활약하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가 통합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흥경(興京)에 본부를 두고 조직되었다. 1928년 5월 정의부 소속 김동삼(金東三)이 중심이 되어 길장연로(吉長沿路) 서쪽 30리에 있는 신안둔(新安屯)에 집결, 3부의 통일을 위한 유일당을 형성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5일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池靑天) 계열과 신민부의 군정위원회측, 그리고 참의부의 김승학(金承學) 계열이 모여 혁신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해 신민부의 민정위원회측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활신[高豁信, 일명: 고할신(高轄信..

민족유일당운동 -1920년대 독립운동 단체 통합 전개

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 1920년대 초 만주에 산재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수행을 위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우선 부분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1922년 8월환인현(桓仁縣)에서 군정서(軍政署) 등 7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주도 세력간의 분열로 일부 세력들이 1923년 분리되면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를 각각 조직하였다. 한편, 통의부 인사들은 공화주의를 지지하며 이주한인의 생존을 위한 통합 조직을 구성하려는 운동을 추진한다. 1924년 3월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조직하고 10월 주비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

미쓰야 협정-재중한국인 단속에 관한 협정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중국 펑톈성(奉天省) 경무처장 위전(于珍) 사이에 체결된 재중한국인 단속에 관한 협정. 중국의 동북3성(東北三省), 곧 만주에는 일찍부터 많은 한인이 거주했고, 이를 배경으로 한인의 항일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이에 일본은 1920년 간도를 침공하여 만주 일대 한인 거주지를 초토화하고 독립군과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군 활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간도 지역의 경찰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또한 한국 민족 해방 운동에 근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만주의 사실상 지배자였던 펑톈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3~1928)을 상대로 만주 지역 한인 단..

훈춘 사건(琿春事件)1920-일제 사주 받은 마적단 훈춘(琿春) 습격

1920년 9월 만주 무장 독립군을 탄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훈춘(琿春)을 습격한 사건.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선 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은 이른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워 독립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 없이 한중 국경을 넘어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일제는 훈춘 사건을 일으켜 군사 행동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훈춘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모두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의 소행이었다.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경 마적 300여 명이 약 3시간에 걸쳐 훈춘 시가를 습격하여 약탈, 방화하고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홍범도, 최진동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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