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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 1125

정미의병(丁未義兵)-고종의 강제 퇴위·정미7조약 체결·군대해산

1907∼1910년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정미칠조약 체결·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무능한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력저항세력을 제거하였다.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은 규모면·전력면에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장을 하여, 거국적인 의병항일전인 정미의병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을사의병(乙巳義兵)-신돌석, 최익현, 민종식, 안병찬

1905·1906년 을사5조약 등 일련의 일제침략을 계기로 일어난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특히 1906년(丙午)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까닭에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고도 한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을미의병은 1896년 10월을 고비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동기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잇달아 체결되어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가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민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였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은 을미의병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던 원..

을미의병(乙未義兵), 허위, 기우만, 이소응, 유인석, 근왕창의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뒤이어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보수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 등을 바쳐 친일정부의 폐위조처에 반대함은 물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8월 22일 서울 창의소(倡義所)에는 고시문이 나붙기 시작하고, 10월 중순을 전후로 충청남도 회덕·유성·진잠 등지에서는 문석봉(文錫鳳) 등이 토적(討賊)의 뜻을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일정권이 공포, 시행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백성의 반일·반정부 ..

한일신협약 1907-정미7조약(丁未七條約), 헤이그특사, 고종퇴위, 한국군 해산

1907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 조처로서 체결한 7개 항목의 조약.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部)를 설치,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해 오던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사건(Hague, 海牙特使派遣事件)을 계기로 한층 강력한 침략 행위를 강행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본은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우선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물어 퇴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1907년 7월 24일 전격적으로 흉계를 꾸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내용의 원안(原案)을 제시하였다. 이완용(李完用)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

대한인국민회-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 통합

1910년 미국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그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멕시코 지방회는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로 조직되었으며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변천하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 자리매김하였다. 191..

공립협회(共立協會)-샌프란시스코, 미주항일운동단체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운동단체. 1903년 9월 안창호(安昌浩)·박선겸(朴善謙)·이대위(李大爲)·김성무(金聖武) 등이 상호 친목을 목적으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조직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류 한인 20여 명 중에 친목 회원은 9명에 불과하였다. 그 뒤 1904년 하와이로 한국인 이주가 이뤄지고, 그 중 일부가 미국 본토로 이주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교민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당시 본국에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5년 4월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공립협회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목적을 확대하여 애국 운동의 전개, 동족간의 상부 상조, 환난상구(患難相救) 등으로 정하였다. 초대 회장은 안창호였으며 송석준(宋錫峻)·정재관(鄭在寬)이 각각 제2대·제..

흥사단(興士團) (1917년) 샌프란시스코

민족통일, 민주주의 발전, 시민사회 성장, 건전한 청소년 육성을 위한 사회교육·국민훈련기관.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의 일등국민이 되고, 인류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모범 민족이 되기 위하여 국민 개개인의 인격혁명을 통하여 민성혁신(民性革新)과 민력증강(民力增强)을 도모함으로써 민족 앞길에 번영의 기초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경기도홍언(洪焉), 강원도염만석(廉萬石), 충청도조병옥(趙炳玉), 황해도민찬호(閔燦鎬), 경상도송종익(宋鍾翊), 평안도강영소(姜永韶), 함경도김종림(金宗林), 전라도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민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하다가 1919년..

대조선국민군단-하와이 군사교육, 박용만

1914년 6월 10일 하와이에서 독립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군사교육단체. 국민군단의 편성과 설치에 대한 주무(主務)는 하와이 각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추진해 온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練武部)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을 주도한 주역 인물은 박용만이었다.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미주한인사회에 항일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이에 따라 국민군단의 핵심 사업은 ‘산넘어병학교’라 불리는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설립을 통한 독립군사관 양성이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박종수·구종곤·이호·안원규·김세은·이정권·노훈·임응천·한태경·한치운·이치영 등이었다. 국민군단의 군사교육 ..

혜상공국(惠商公局)-갑신정변 14개조

1883년(고종 20) 보부상(褓負商)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상인조합. 보부청을 설치해 전국 8도의 보부상단을 통합한 대원군은, 자신이 도반수(都班首)가 되고 맏아들 재면(載冕)을 총리로 하여 전국에 있는 3,000여 개의 시장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 단체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철혈국수당(鐵血國粹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이어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인천·원산·부산 3개 항이 개항되어 일본 상인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구미 상인의 조선 침입도 본격화되었다. 대원군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했던 보부청으로서는 이들 외상(外商)의 침투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83년 8월김병국(金炳國)의 건의를..

청일전쟁(淸日戰爭)-동학농민, 경복궁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킨 동양 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간의 영토분할경쟁을 촉발시킨 계기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전쟁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는 벗어났으나,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으로 바뀌어 인적·물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수난을 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

교조신원운동, 최제우, 동학, 교조의 원을 풀어 줌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운동의 성격은 동학 상층부의 순수 종교적인 측면과 동학 하층부 농민들의 반봉건적·반외세적이라는 정치적인 측면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의 움직임은 교조 최제우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있었으나, 최제우가 사형 당한 뒤 교조 신원 운동으로 통일되어 더욱 성장·발전되어 갔다. 개항 후 반봉건·반외세운동으로서의 농민들의 요구가 보다 절박해져 가는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이 요구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때 일어난 교조 신원 운동은 종교적 성격 외에도 강한 정치성을 띠게 되었다. 나아가 1894년..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조병철, 조병식, 오준영

1884년(고종 21) 이후 곡물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사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 거기에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1883년 6월에는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 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제한적이나마 법제적인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1) 1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1876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에 달..

톈진 조약(天津條約)-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 사후

1885년(고종 22)_ 4월 18일,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 사후 처리를 위해 체결한 조약. 1882년 청은 임오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청은 청국 군대를 출동시켜 정변 세력을 진압했다. 일본은 정변을 피하여 귀국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를 다시 보내어 조선과 교섭하게 하였으나, 친청 세력이 재집권한 조선 정부는 일본이 정변 주동자들을 비호하였고, 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책임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2개 대대의 병력을 보내어 조선 정부가 협상에 응하도록 위협하였고, 오히려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이 입은 피해..

부들러, 유길준, 한반도 중립화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중립론」을 집필한 것은 1885년(고종 22년) 말이다. 그는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하자마자 유폐되었다. 그의 「중립론」은 이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갑신정변 이후 1885년 3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청일 간의 톈진 조약 체결과 그에 따른 공동 철병, 5월 제1차 조러 밀약 사건 폭로 등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조선에 부임했고,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정책을 심화할 목적으로 조선의 안전을 청국에 의지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조선으로서는 독자적인 주권 수호를 도모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할 시기였다...

미쓰야 협정-미쓰야, 장쭤린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중국 펑톈성(奉天省) 경무처장 위전(于珍) 사이에 체결된 재중한국인 단속에 관한 협정. 중국의 동북3성(東北三省), 곧 만주에는 일찍부터 많은 한인이 거주했고, 이를 배경으로 한인의 항일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이에 일본은 1920년 간도를 침공하여 만주 일대 한인 거주지를 초토화하고 독립군과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군 활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간도 지역의 경찰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또한 한국 민족 해방 운동에 근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만주의 사실상 지배자였던 펑톈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3~1928)을 상대로 만주 지역 한인 단..

이범윤(李範允)-간도관리사, 동의회 회장, 권업회 총재, 의군부 총재

일제강점기 권업회 총재, 의군부 총재, 신민부 고문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02년 6월 간도시찰원, 1903년 7월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가 되어 간도지방의 한인보호에 힘썼다. 특히,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고 연발총을 비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 및 두도구(頭道溝) 등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한인의 지위는 향상되었고 청국의 조세징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중에는 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범윤의 부대는 사포대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구한국군과 의병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어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다. 1905년 청국측의 강력한 철수 요구를 받은 정부로부터 소환명령이 내려졌으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청국령을 떠나 노령..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독도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일본 /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85년 제작 / 96.4×74.1cm / 서정철 기증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18세기 후반 일본의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한국과 일본 주변 4국의 위치와 관계, 각 나라의 영역과 그 경계 및 주변 각국의 지리 및 풍속을 소개한 군사지리서『삼국통람도설』을 간행하면서 부록으로 첨부했던 지도이다. 울릉도와 독도 옆에 '朝鮮ノ持二(조선소유)'라고 적혀있어 당시 일본인 스스로 두 섬이 조선의 영토가 분명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울릉도 독도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고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할 것 제2조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것 제3조 개국(開國) 504년(1895) 8월 16일자 〈관보〉 중 ‘관청 사항란’ 내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고 개국 505년(1896) 칙령 제36호 제5조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安峽郡) 아래에 울도군 ‘3’자를 추가해 넣을 것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아전의 정원도 갖추어지지지 못하고 제반 업무가 처음 만들어지므로 해당 도(島)가 거..

원수부(元帥府)-대한제국, 황제 직속 최고 군통수기관.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1897년 2월아관(俄館)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해 자강(自强)을 꾀하는 동시에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 갔다. 이러한 자강의 의지를 바탕으로 1899년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즉, 군통수권자인 황제가 대원수로서 모든 군기(軍機)를 총괄하고 육해군을 통령하며, 황태자는 원수로서 육해군을 하나로 통솔하기 위해 황궁(皇宮) 안에 원수부를 둔 것이다. 내용 원수부는 국방·용병(用兵)·군사의 명령을 장악하고 군부(軍部)와 경외(京外) 각 대(隊)를 지휘, 감독하기 위해 원수부 안에 군무국(軍務局)·검사국(檢査局)·기록국·회계국을 두었다. 이들 각 국의 관장사무를 보면 대략 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갑오개혁

조선 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1894년(고종 31)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하였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다음 흥선대원군을 추대한 친일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제도 개혁을 실시하고 새로운 정권의 탄생에 따른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합의체의 형식으로 구성된 초정부적(超政府的)인 입법·정책결정기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구는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가 발의하고 대원군과 친일파 개혁 관료들이 동의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1882∼1883년간에 존속하였던 기무처(機務處)의 이름을 따서 대원군이 명명한 것이다. 내용 1) 조직구성 발족 당시 ..

관민공동회-독립협회, 박성춘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독립협회가 서울 종로에서 대소관민을 모아 국정 개혁안을 결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개최한 집회. 독립협회는 열강의 침탈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지배층의 압제로부터 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정 개혁에 의한 근대적 자강 체제(自彊體制)의 수립이 긴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근대적 자강의 실현은 관민의 협력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진보적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개혁 내각을 수립하게 하고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민선 의회를 설립해, 개혁 내각과 민선 의회의 협력을 통해 국정 전반에 걸쳐 근대적 자강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요컨대, 독립협회가 근대적 자강 체제의 수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국정 개혁안을 관민이 공동으로 선언하게 하고 이를 함께 추진해..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조직된 재러 한인 독립운동 단체. 개설 1917년 8월 러시아 혁명이 계기가 되어, 러시아에 입적한 한인의 대단결을 위해 전로한족회가 조직되었고, 회장에 김야코프가 취임하였다. 1917년 12월에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우수리스크[소왕령]에 만들어졌고 회장으로 문창범이 취임했다. 연추, 추풍, 수청, 하바롭스크, 하마탕 등 각처에 전로한족회를 설치하였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는 7명의 의원을 두었다. 의원들은 회장과 부회장을 선거하는 권한이 있었고 회장과 부회장은 집행 위원이 되어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에서는 각 지방의 인구릍 계산하여 지방 대표를 뽑았고 그 외에 또 각 단체의 대표를 참여하게 하였다. 설립 목적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는 러시아..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안재홍

안재홍이 -우리나라 고대사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모아 수록한 역사서 안재홍은 민족주의 사학자 중 드물게 고등교육[일본의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받았다. 동제사(同濟社), 3·1운동, 신간회(新幹會), 조선어학회 등과 관련을 맺으며 독립운동에 나섰고 여러 번 투옥되었다. 또한, 조선일보 사장 재직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지면에 연재하도록 하였다. 어릴 때부터 술사가(述史家)를 희망했으나, 일제의 강점으로 말미암아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대 전시체제의 강화로 거듭 투옥되는 상황에서 ‘정치로써 투쟁함은 한동안 거의 절망의 일이오 국사(國史)를 연찬(硏纘)하야 써 민족정기를 불후(不朽)에 남겨둠이 지고한 사명임을 자임(自任)’하고 10여 ..

낭가사상(郎家思想), 풍류[風流], 신채호

신채호가 1920년대에 한국고대사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전통적인 민족사상. 당시 민족사학자들은 일제식민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던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맞서, 왜곡되고 날조된 한국사를 재정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들 역사인식의 일반적인 특징인 정신사관은 신채호의 낭가사상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의 ‘혼’, 문일평(文一平)의 ‘조선심(朝鮮心)’, 정인보(鄭寅普)의 ‘얼’,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정신’ 등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낭가사상은 여타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사관에 비해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 서술되고 있어 단연 이채롭다. 낭가사상은 민족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과 당시 서구의 주된 사상 조류인 민족주의를 수용..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채호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

백남운(白南雲)-「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

일제강점기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 등을 저술한 학자. 경제학자, 정치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李順鐸)·노동규(盧東奎) 등 동료 교수 그리고 학생 10명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조선학술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로 미군정의 임명사령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6년 2월에는 김두봉(金枓奉)·한빈(韓斌)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후에 남조선신민당으로 발족)의 위원장을 맡는 한편,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의장 및 상임위원·경제대책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

정약용(丁若鏞)-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

지청천(池靑天)-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군인.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

삼균주의(三均主義), 조소앙, 임시정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소앙이 독립운동의 기본방략 및 미래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내용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균등생활을 실시하려는 주의’이다. 완전균등을 대전제로 하면서 이의 실현을 위해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주장하고 있다. 1920년대 말 기본적 구상이 정립되고, 한국독립당의 정강에 채택되었으며, 1941년 11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공포하였다.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이후 가혹한 정치적 유린과 토지수탈 등 경제적 파탄 및 심한 교육차별대우를 받았던 한민족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추구하며, 무차별 평등교육의 실현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임오군란, 수호조규속약

1882년(고종 19) 8월 30일(음력으로 7월 17일) 임오군란으로 빚어진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 6개조의 본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 임오군란 이후 청일 양군의 한성진주와 흥선대원군의 청국 납치 문제 등이 민씨정권의 재집권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이후 군란 뒤처리를 위한 조ㆍ청ㆍ일 3국의 절충 협의가 다각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때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에 의해 공사관이 습격당했고, 별기군(別技軍) 교관 호리모토(堀本禮造)등 수 명이 살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면서 청국의 정치적 영향은 커졌다. 이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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