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 박남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시집 신의 쓰레기,1964 / 새의 암장,197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박남수의 후기 대표작으로 이미지에 의한 표현을 중시하고, 인간 존재의 가치를 탐구한 주지시다. 종 소리를 의인화하여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확신을 남성적, 역동적 심상으로 노래하였다.
관념의 표상으로 인식되기 쉬운 ‘종’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면서도 현대적 지성과 융합된 세련된 통일체를 이루었다.
울려 퍼지는 종 소리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것은 무엇의 의인화인가? 종 소리의 이미지 변신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 성격 : 주지적
▶ 어조 : ‘청동, 진폭, 칠흑, 천상, 터지는’ 등의 시어들을 선택하여, 객관적 상관물을 사용하는 주지시치고는 어조가 격앙됨.
▶ 표현 : 의인법, 도치법, 은유법
▶ 구성 : ① 울려 퍼지는 종 소리의 이미지---새, 울음, 소리(1연)
② 인종(忍從)의 끝(2연)
③ 종 소리의 변신---푸름, 웃음, 악기(3연)
④ 종 소리의 변신---뇌성, 음향(4연)
▶ 제재 : 종 소리가 환기하는 역사의 의미
▶ 주제 : 자유의 확산과 그 기세
<연구 문제>
1. ㉠의 동기는 무엇인가?
<모범답> 자유를 구속당했던 역사의 암흑 시대를 벗어나기 위함이다.
2. 제2연의 시점과 진술상의 특징을 다른 연과 대조하여 쓰라.
<모범답> 다른 연은 모두 화자인 ‘나’의 독백 형식이나, 제2연은 화자가 외부에서 독백하는 형식이다.
3. ‘종 소리’의 심상을 환기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을 모두 찾아 그 이미지가 환기하는 공통점을 7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종 소리’의 심상은 ‘새, 울음, 소리, 푸름, 웃음, 악기, 뇌성, 음향’인데, 모두 공통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으로의 지향과 확산의 기세를 함축하고 있다.
4. ㉡이 표상하는 것을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종 소리의 떨리며 울려 퍼지는 상태를, 날아가는 새들의 몸짓으로 비유한 말로서 ‘새’는 자유를 표상한다.
5. ㉢이 암시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모범답> 자유를 억압하는 횡포에 저항한다는 뜻이다.
<감상의 길잡이>
박남수의 시는 본디 사상이나 윤리 같은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관념은 깊이 감추어지고, 드러나는 것은 참신하고도 낯선 이미지들이다. 이미지가 거느리는 배경이나 언어 표현의 암시성이 그의 시에서는 중요시된다. 이 시도 예외는 아니다. 참신하고 역동적인 심상들이 출렁이고 있다.
‘나’는 ‘종 소리’를 의인화한 것인 바, 오랜 인종(忍從) 끝에 역사의 질곡을 박차고 나가는 시인의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신념을 이 시는 노래하고 있다.
소리가 청동의 벽에 갇혀 있는 동안, 즉 종이 울리지 않는 동안은 칠흑의 감옥과도 같다고 화자는 말한다. 오랜 인종(忍從) 끝에 ‘나’는 ‘진폭의 새’가 되고, ‘울음’이 되고, ‘소리’가 되어 청동의 표면을 떠난다. 그 종 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들의 ‘푸름’을 되찾아 주고, 꽃의 ‘웃음’을 되찾아 주고, 천상의 ‘악기’를 울리게 하여 역사의 질곡에 갇힌 세상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한다. 소리가 청동의 벽에서 풀려나는 순간 그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물론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 이 시에는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 시의 어조는 우람하고 그에 걸맞게 포괄하는 세계도 광막하다. 참신하고 질감 있는 심상 속에 삶과 역사의 심상까지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를 한국 모더니즘 시에서 드물게 성공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한다.
한편, 김광균의 심상들은 그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감상적인 색조에 젖어 있음에 반하여 박남수의 심상들은 정감을 상당 부분 거세하고 있어 주목된다고 하겠다.
아침 이미지
- 박남수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物像)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勞動)의 시간(時間)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太陽)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사상계, 1968.3)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일상 생활에 젖어 살다 보면 별다른 감회 없이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어둠으로부터 빛 속으로 나온 사물들의 인상을 개벽(開闢)을 보는 듯한 감격과 경탄으로 맞이하고 있다. 밝고 건강하고 즐겁고 생산적인 아침의 근원적인 모습을 그려 보게 하는 즉물적(卽物的)인 시이다.
이 시는 논리적인 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가슴으로 시를 쓰기보다는 머리로써 시를 쓰고자 하면 시의 이미지가 신선하고 다양해야 한다. 아침의 영상미를 어떻게 그려 내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 성격 : 주지적, 즉물적, 회화적
▶ 특징 : 시간적 적개.
① 공감각적 표현 : ‘금으로~울림’. (아침의 절정)
② 시상을 응결시킨 주제어의 제시 : ‘개벽’
▶ 표현 : 언어 기능이 갖는 색채, 음향, 내용을 조화롭게 구사함.
▶ 구성 : ① 기 : 물상의 생성(1,2행)
② 승 : 어둠의 소멸(3-5행)
③ 전 : 물상의 잔치(6-10행)
④ 결 : 아침의 보람(9-12행)
▶ 제재 : 아침의 본질
▶ 주제 : 광명한 아침을 맞이하는 만상의 생동미. (아침의 본질적 건강미)
<연구 문제>
1. 시간의 진행에 따라 작품 전체의 이미지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5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시간의 진행에 따라 마치 천지가 처음 생겨나는 개벽(開闢)과 같이 어둠의 세계에서 밝음의 세계로 변한다.
2. ‘어둠은~땅 위에 굴복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을 표현한 것인지 7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어둠은 만상을 잉태하고 포용하는 근원자로서, 만물을 품고 있다가 아침에 존재의 모습을 하나하나 드러나게 하고 사라진다.
3. 이 시에 쓰인 공감각적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시상 전개에 어떻게 이바지하고 있는지 12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앞 부분의 어둠에 대한 묘사로부터 출발하여, ‘금으로~울림’이란 공감각을 사용하여 태양의 햇살을 즐거운 메아리와 겹치게 함으로써 선명함, 강렬함, 신선함의 절정을 제시하여 다음에 ‘개벽’을 하는 듯하다는 마무리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4. 이 시에서 다음 각각에 해당하는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1) ‘새’, ‘돌’, ‘꽃’을 포괄하는 시어 : 물상(物象)
(2) 시상이 응결되어 있는 시어 : 개벽(開闢)
<감상의 길잡이>
지은이는 이 시에 대해서 “밤에는 모든 물상(物象)들이 어둠에 묻혀 버려 그 형상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던 것이 아침이 되면 밝음 속에 그 본래의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다. 그리하여 어둠의 세계인 밤과는 전혀 다른, 생동하는 밝음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아침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 본 즉물적(卽物的)인 시다.”라고 말한다.
이 시에서 어둠은 긍정적, 생산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아침에 사물들이 빛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이 시인은 어둠이 그 사물들을 ‘낳는다’고 표현했다. 즉 어둠이 만물을 품고 있다가 내어 보내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 어둠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우리의 통념인데 시인은 이 시에서 만상을 포용하고 잉태하는 근원, 생명의 모태로 보았다.
그리고 시간적 순서에 의해 시상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시 전반부의 주제는 ‘어둠’이고 후반부의 주제는 ‘물상’으로 되어 있다. 또, ‘노동의 시간’은 자연적 생의 율동에서 의욕적인 삶의 움직임으로 건강하게 확대된 이미지다. ‘금으로 타는~울림’은 활기차고 밝은 아침의 절정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도 어둠 속에 있던 사물들이 빛 아래 움직이는 모습은 한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는 ‘개벽’과도 같게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도 이 시의 매력이다. 이미지는 주로 비유에 의해 형성되고 독자들에게 감각이라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 체험과 관계가 있는 일체의 낱말은 모두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된 이 작품은 의미와 함께 독자들이 상상적 체험을 통하여 느끼는 인상이 중요시된다. 그러므로 ‘어둠은~낳는다’는 구절이나 ‘금으로 타는~울림’ 같은 구절은 독자들이 체험을 되살리면서 그려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아침의 건강성과 생동하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든 이미지가 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미지의 신선한 감각이 이 시의 특징이다.
마을
- 박남수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문장 9호, 1939.10)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그의 첫 번째 추천작으로 평화로운 농촌의 여름날 오후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서경적 경향의 서정시이다. 향토적 분위기의 간결한 시어와 ‘나른나른’․‘대록대록’과 같은 의태어를 3연 7행의 짧은 형식에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인 표현을 이루고 있다.
1연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부분으로 시골 마을의 정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느낀 이미지를 평화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2연에서는 무대를 하늘로 옮겨, ‘솔개’가 바람개비처럼 빙빙 돌고 있는 원경을 그리고 있으며, 3연에서는 시선을 땅으로 이동하여 솔개에게 겁먹고 뜰안 한구석에 숨어서 눈알만 대록대록 굴리고 있는 암탉의 모습을 근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겁을 삼킨 ‘암탉’의 눈알을 클로즈업시켜 생동감 있는 표현을 이루는 한편, 오수에 잠겨 있는 외로운 마을 속으로 녹아들게 함으로써 이 작품을 더욱 평화롭고 한가로운 분위기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와 같이 평화로운 농촌의 정경을 풍경 그 자체로 표현해 낼 수 있었던 시작 능력이 있었기에 박남수는 후일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후에도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새>, <종소리> 등과 같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롱불
- 박남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
(문장 10호, 1939.11)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박남수의 두 번째 추천작으로 그의 초기시가 지향했던 섬세한 서정과 토속적인 시세계를 짐작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초롱’이란 대나무를 잘게 잘라 만든 살 위에 종이를 씌우고, 그 속에다 촛불을 켜는 기구이다. 그것을 막대기에 매달아 들고 다닐 때면, 촛불이 꺼질 듯 흔들린다. 이 ‘초롱불’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점차 사라져 가는 모든 전통적인 것의 대유로, 시인은 이것을 통해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초롱불’․‘원두막’․‘옛 성터’ 등과 같은 향토적 정서를 드러내는 시어로써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2․3․4연을 모두 산문투의 문장으로 배치시킴으로써 유장한 리듬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일반적 산문시와는 달리 간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
1연에서는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 풍경을 제시하여 초롱불을 잃어버린 화자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으며, 2연에서는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과 ‘풀 짚는 소리 따라’라는 구절을 통해 소멸되어 가는 우리의 향토적인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고 있다. 3․4연에서는 초롱불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턱 원두막’이나 ‘무너진 옛 성터’를 찾아갈 때면, 언제나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던 초롱불이었지만,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을 통해 이제는 더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利器)에 밀려 사라져 버리는 현실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5연에서는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의 아련한 모습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말없음표 속에 함축하고 있다.
밤길
- 박남수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 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문장 12호, 1940.1)
<감상의 길잡이>
청록파 세 시인이 등단 초기에 주로 자연을 노래한 것과는 달리, 박남수는 그들과 같은 문장지 출신이면서도 특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표현 기법을 사용하여 일제 식민지 하의 농촌을 소재로 현실 상황을 암시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이 시는 그의 세 번째 추천작으로 그의 초기시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멀리 산턱에 등불 몇 개가 보이는 어느 농촌 마을의 여름 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개구리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한 사내가 논둑이 끊어진 탓인지 번개치는 개천 길을 달려가고, 번개가 그치자 조용하던 논에서 다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서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여름 밤의 서경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시제가 ‘여름 밤’이 아닌 ‘밤길’로 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품 전편에 깔려 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전반부의 동적 이미지와 후반부의 정적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방법을 통해 더욱 짙은 어둠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2행으로 구성된 연과 1행만으로 구성된 연을 교차시키는 시행 배열 방법으로 교묘한 리듬감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과거 시제의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주관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 상황으로 시상을 제시하고 있다.
훈련
- 박남수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 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 보고
국도 끓여 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 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 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시집 그리고 그 이후, 1993)
<감상의 길잡이>
박남수는 언어 표현의 암시성을 중시하는 이미지의 시인이다. 시사적(詩史的) 측면에서 그는 정지용과 김영랑에 버금가는 언어와 형태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언어에 형이상학적 깊이도 부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모더니스트인 그의 시적 경향은 암시적인 이미지로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함축시킴으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성을 지적(知的)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서정을 이미지화하였다.
그러한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 주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생활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음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는 평범한 사실의 제시로만 그치는 하나의 산문적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고도의 시적 장치나 비유로 장식되어 있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생생한 감동의 깊이를 전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시인이 노년에 이르러, 그것도 아내의 죽음을 체험한 후 더욱 깊어진 삶의 깊이를 담담한 어조로 보여 주고 있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시인은 늙어 불편한 혼자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을 단순히 ‘불편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찌 불편함뿐이겠는가? 그러므로 그 ‘불편함’의 이면엔 그가 아내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숱한 부침(浮沈)의 긴 세월을 동고동락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팬티 /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 남편의 고충’까지를 예견한 아내가 그러한 불편을 대비하여 자신에게 이런저런 집안일을 ‘훈련’시켰다는 것을 알고 그간 성가시다며 짜증을 냈던 자신의 무지함을 뉘우치는 과정을 통해 아내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생의 진솔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불편’을 겪을 때마다 시인은 아내의 빈 자리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준비하는 생의 원숙함이 드러나 있다.
밤차
- 박팔양(필명: 김여수)
추방되는 백성의 고달픈 백(魄)을 실고
밤차는 헐레벌덕어리며 달어난다
도망군이 짐싸가지고 솔밭길을 빠지듯
야반(夜半) 국경의 들길을 달리는 이 괴물이여!
차창밖 하늘은 내 답답한 마음을 닮었느냐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하고나
유랑(流浪)의 짐 우에 고개 비스듬히 눕히고 생각한다
오오 고향의 아름답든 꿈이 어디로 갔느냐
비닭이*집 비닭이장같이 오붓하든 내 동리
그것은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차바퀴 소리 해조(諧調)*마치 들리는 중에
희미하게 벌려지는 괴로운 꿈자리여!
북방 고원의 밤바람이 차창을 흔든다
(사람들은 모다 피곤히 잠들었는데)
이 적막한 방문자여! 문 두드리지 마라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울고 있다
그러나 기관차는 야음(夜音)을 뚫고 나가면서
‘돌진! 돌진! 돌진!’ 소리를 질른다
아아 털끝만치라도 의롭게 할 일 있느냐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가 있느냐
피로한 백성의 몸 우에
무겁게 나려 덥힌 이 지리한 밤아
언제나 새이랴나 언제나 걷히랴나
아아 언제나 이 괴로움에서 깨워 일으키랴느냐
(조선지광, 1927.9)
* 비닭이 : 비둘기.
* 해조 : 아름다운 가락.
<감상의 길잡이>
김여수(金麗水)라는 이름으로도 많은 시를 발표한 박팔양은 임화를 중심으로 한 단편 서사시 계열과는 달 리 서정성 짙은 프롤레타리아 시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러한 서정성은 일찌기 요람을 만들기도 하였던 시적 감수성이기도 한데, 이러한 성격에서 그는 초기 계급 문단에 관여하기도 하고 1930년대 중반 ‘구인회’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 시는 추방당하는 유랑민의 비애를 거친 호흡과 직설적인 어법으로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각 연의 영탄적 표현에서 보듯 박팔양의 젊은 시절의 낭만적 어조가 짙게 배어 있다. 이 시에는,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한 ‘추방되는 백성’의 회한과 ‘무겁게 나려 덥힌 지리한’ 국경의 밤의 이미지가 ‘괴물’ 같은 기차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식민지 현실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주된 시어도 ‘추방’․‘고달픈’․‘헐레벌덕어리며’․‘달어난다’․‘답답한’․‘숨맥힐 듯’․‘가슴 터질 듯’․‘캄캄하고나’․‘괴로운’․‘적막한’․‘피로한’․‘무겁게’․‘나려 덥힌’ 등에서 보듯 피압박의 이미지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어휘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추방되는 백성’으로, 그는 ‘백성’이라는 시어에서 보듯 나 혼자만이 아닌 식민지 백성 전체를 대유한다. 그리하여 2연의 1행 ‘내 답답한 마음’은 4연 마지막 행의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으로 밤차를 타고 있는 모든 승객―모든 유랑객의 마음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비닭이집’ 같은 오붓한 고향을 등지고 ‘도망꾼’처럼 ‘솔밭길을 빠지듯’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나선 신세이다. 그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밤차에 몸을 실어 낯선 북방의 산하를 헤맬 것이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을 따스하게 맞아 줄 ‘아름답든 꿈’은 없으리란 것을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단지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할 뿐이다. 모두 피곤히 잠들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말없이 울고 있을 뿐인데, 차창에는 북국의 거친 바람이 부딪히고, ‘괴물’ 같은 밤차는 이러한 백성들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그저 ‘돌진’할 뿐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는 이러한 추방된 백성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의롭게 할 일,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를 찾는다. 그것만이 이 괴로움에서 백성들을 깨워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추방의 원인이, ‘고향의 아름답든 꿈’이 사라지고 ‘비닭이집’ 같은 평화로운 고향이 지금은 황폐화된 것에서 보듯, 식민지 현실의 질곡에 있는 한, 시적 자아는 그러한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데에 한 목숨을 바치려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서정성 짙은 프롤레타리아 시를 통한 박팔양의 작품 행동인 것이다.
너무도 슬픈 사실
- 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 박팔양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비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다
화려한 꽃들이 하나도 피기도 전에
찬 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 있는
봄의 선구자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셨으리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야 이 나라에 태어난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속에 그리면서
찬 바람 오고 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고 ―
(학생, 1930.4)
<감상의 길잡이>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대표적인 시의 제재로 선택되는 것 중의 하나가 꽃이며, 그 중 진달래꽃은 우리 주위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친숙한 꽃이어서 그 동안 많은 시인들에 의해 주로 사랑과 관련된 주제를 취급하는 제재로서 특히 애용되었다. 그 비근한 예로 우리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들 수 있거니와, 위의 박팔양의 작품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달래꽃’을 그 제재로 취급하고 있는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이 시의 진달래꽃은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 하로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이다. 다른 꽃들처럼 피었다가 지면 열매를 맺는 결실도 없이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일홍’과 같은 화려함이나 ‘국화’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도 없어서 노래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는 꽃이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봄이 되면 가장 먼저 피어서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이다.
그러나 선구자는 불행하다. 자신의 희생이 가져오는 화려한 결실을 직접 맛보지도 못하며 스러진다. 시적 화자는 따라서 그 동안 희생된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에 진달래꽃을 부여잡고 운다. 시제에서 보듯 시적 화자는 ‘진달래꽃’을 ‘봄의 선구자’로서 인식하지만, 그것은 ‘찬 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서는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희생자로서의 이미지를 지닌다. 그러나 정작 진달래꽃 자신은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고.
결국 시인은 ‘진달래꽃’에 의탁하여 그냥 ‘오래오래’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적 삶을 비판하고, 순간에 스러지더라도 뚜렷이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삶은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박팔양이 선택한 삶의 방향인 것이다.
교외(郊外)
- 박성룡
Ⅰ
무모(無毛)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 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욱이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果物)과도 같은 붉은 낙일(落日)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 틈에 비벼 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 포기 |
그 구름 포기 하나 떠오름이 없다.
Ⅱ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無風)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 가는
피 비린 종언(終焉)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Ⅲ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愛撫)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 다오,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교외Ⅰ: <문학예술>(1955.12)
▶교외Ⅱ : <문학예술>(1956.4)
▶교외Ⅲ : <문학예술>(1967.12)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196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인은 위의 교외Ⅰ, 교외Ⅱ, 교외Ⅲ 세 편의 작품을 시차를 두고 발표했는데, ‘교외(郊外)라는 공간에 끊임없는 집착을 보여 주는 바, 제작 순서는 발표 순서와 반대였다고 한다.
이 시는 박성룡의 초기 작품으로 눈에 보이는 작고 사소한 사물들에서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적확성(的確性, 관찰의 예리함)은 세상 모든 것까지 사랑할 수 있는 보편성의 정서로 닿아 있다.
▶ 성격 : 서정적
▶ 표현 : 교외(郊外)의 사물을 들어 외로움의 서정을 노래함.
▶ 구성 : ① Ⅰ: 자연에 대한 생각
② Ⅱ: 젊음과 푸르름에 젖고 싶은 생각
③ Ⅲ: 아름다움과 사랑
▶ 제재 : 풀꽃, 바람
▶ 주제 : 외로움의 서정과 자연에 대한 사랑
<연구 문제>
1. 이 시의 화자는 어떤 생활 태도를 거부하며, 어떤 생활 태도를 지향하고 있는지 적당한 시구를 인용하여 설명해 보라.
<모범답> 무모(無毛)하고 무풍(無風)한 도회의 소시민적인 생활,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진 생활을 거부하고 저 교외의 풀꽃처럼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싱그럽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2.
구름 포기 |
가 상징하는 것은 ‘평화와 ( )이다.’라고 할 때, Ⅲ의 ‘바람’의 함축적 의미를 참고하여 ( ) 속에 가장 적당한 말을 써 넣어 보라. <모범답> 자유
3. Ⅲ 전체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나타낸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사랑
<감상의 길잡이>
한 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자가 어떤 사람이며, 그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고,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도회에서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해질 무렵 모처럼 교외로 나가서 풀꽃들을 바라보고 그 싱그러운 풀냄새에 젖으며 자신이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진 채 무풍 지대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보고,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 아, 사랑이여’라고 외치고 있다.
바람이 잘 때 사물들은 제자리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자는 바람이 다시 한번 불어와 달라고 기원한다.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무모(無毛)하고 무풍(無風)한 도회의 메마른 생활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저 들의 풀꽃들처럼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람은 단순한 자연 현상에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진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 숨결로 이해된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시인은 풀잎 하나를 제대로 노래할 때 그것은 온 우주를 노래한 셈이 된다. 구체적으로 본질적인 노래, 그러면서 보다 적확(的確)하고 아름다운 언어와 운율로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 박세영
장마물에 파진 골짜기,
토막토막 떨어진 길을, 나는 홀로 걸어서
병풍같이 둘린 높은 산 아래로 갑니다.
해 질 낭*이 멀었건만,
벌서 회색의 장막이 둘러집니다.
나의 가는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멀리 산아래 말에선 연기만 피어 오를 때,
나는 저 마천령*을 넘어야 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 산을 넘다니,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리라도 돌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터진 북쪽을 바라보나,
길은 기어이 산 위로 뻗어 올라 갔습니다.
나는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산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이,
나의 마음은 떨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빠삐론* 사람처럼,
칼을 빼어 든 무녀(巫女)처럼,
산에 절할줄도 몰랐습니다.
나는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겼습니다.
불긋불긋 이따금 고갯길 토막이 뵈는 듯 마는 듯,
이몸이 어디로 가질지도 모르는, 사로잡힌 마음이여,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갑옷을 입은 전사(戰士)와 같이,
성난 이리와 같이,
고개길을 쿵쿵 울리고 올라갑니다.
거울 같은 산기슭의 호수는 나의 마음을 비처 보는 듯,
올라가면 오를수록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습니다.
나는 마천령 위에서 나의 오르던 길을 바라봅니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W자, I자, N자,
이리하여 나는 승리의 길, WIN자를 그리며 왔습니다.
모든 산은 엎디고,
왼 세상이 눈 아래서 발버둥칠 때,
지금의 나의 마음은 나를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되었습니다.
이 장쾌함이여,
이 위대함이여,
나는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학등, 1936.3)
* 마천령 : 함경남도 단천(端川)과 함경북도 성진(成津) 사이의 고개. 해발 725m.
* 해 질 낭 : 해 질 양, 해가 지려 하는 것.
* 빠삐론 : 바빌론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우리 시문학사에서는 아주 드물게 식민지 시대 혁명 전위(前衛)의 역사적 전망을 뚜렷이 보여 주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지금 오후의 마천령을 넘고 있다. 이 시는 이러한 등정의 길을 따라 구성된다. 시적 화자는 1연에서 산길로 접어들어, 2연에서는 어느새 마을이 산 아래 놓여 있는 위치에 올랐으며, 5연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험한 마천령을 넘어서 6연에서 드디어 그는 마천령 위에 올라 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가 힘들게 올라온 꼬불꼬불한 길은 위에서 내려다보니, 영어의 W자 I자 N자 등으로 생겨 마치 WIN의 의미로 보인다. 이는 시적 화자의 성취감과 전위의 혁명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이 시의 주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망이 확보되었을 때, 시적 화자의 마음은 자신을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마음껏 ‘장쾌함’과 ‘위대함’을 느끼고, 결연한 의지로서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직접 ‘나’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감 없이 산을 오른다. 그의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그는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리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며,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 산 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 마음이 떨린다. 그러면서 그는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 먹’으며 자신을 반성해 본다. 그리하여 그는 강한 의지로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약한 패배주의적 감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비록 그는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북쪽’으로 활동 중심을 옮기고 있지만, 이제는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아 ‘갑옷을 입은 전사와 같이 / 성난 이리와 같이 / 고갯길을 쿵쿵 울리고’ 고개를 넘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그는 ‘장쾌함’과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이처럼, 기존의 여성적 편향의 고향 상실을 노래하는 작품이나, 북방 정서를 바탕으로 유이민의 비애를 노래하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혁명 의지와 역사적 전망이 강하고 장중한 남성적 어조를 바탕으로 형상화되어 있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시로 꼽힌다.
산제비
- 박세영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구나.
창(槍)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때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아 깃을 가다듬을 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너희는 맘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 것이요,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멧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때
너희는 별에 날아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렁거릴 때,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천리조(千里鳥)일 것이다.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날아라 너희들은 날아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날아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낭만, 1936.11)
<감상의 길잡이>
박세영은 초기에는 주로 서술시를 발표하여, 사회적인 이념이나 사상을 표출하고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는데, 이러한 특징의 시들이 한 데 모인 성과물이 바로 시집 산제비이다. 이 시집에서 박세영은 당대의 궁핍화한 농촌 현실에 대한 탄식과 식민지 시대의 박탈감을 짙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렇듯 그의 시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응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산제비>는 식민지 상황 속에서의 지성인이 추구하는 자유 의지를 ‘산제비’를 통하여 표출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 의지가 단순히 억눌린 상황하에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대의 농촌 현실에 대한 애정과 식민 통치에 대한 은근한 비판까지도 드러내고 있어서, 지식인의 민중 연대 의식 또는 공동체 의식까지를 넉넉히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산제비’는 ‘자유의 화신’이자 ‘천리조’이지만, 그저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는’ 장한 새일 뿐 아니라, 시인이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서 시인 자신의 안일하고 나태한 허위 의식을 꿰뚫어 보는 역사 의식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4연에서 보듯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라는 탄식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렇듯 이 시는 식민지 현실하에서 현실을 극복하여 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산제비’에 의탁하여 표현하는 데에 성공한 작품이다.
시대병 환자(時代病患者)
- 박세영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單葉機)*같이 날른다.
소란한 도시는 떠는 듯 무장을 하였다.
청년단원들이 나팔을 불고 지나 가고
트럭이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납작한 보루같이 그 병원의 집 위론 고사포(高射砲) 둘이 솟았다.
금방에 나르던 솔개미가 사라지니
연기가 무럭무럭 콩크리트의 굴둑은 길기도 하다.
내 눈이 미쳤나 보면 볼수록 늘어가는 고사포,
공장마다 솟는 굴둑,
이리하여 도시는 완연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독까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
시대병 환자다.
그러나 나를 환자라고 보는 이가 없다.
보아주는 이조차 없다.
(풍림, 1936.12)
* 단엽기 : 몸체 양편에 한 개 씩의 날개가 달려 있는 비행기.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지식인이 겪는 시대고(時代苦)와 불안 의식이 내면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전쟁 준비에 더욱 몰두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일제의 병참 기지로 전락하게 되고,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지식인의 위기감은 더욱 팽배해진다. 이 시에는 이러한 1930년대 후반의 현실이 숨을 쉴 수 없는 질식의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스스로를 ‘시대병 환자’라고 여긴다. 그러나 자신을 ‘환자’라고 보아 주는 이가 전혀 없을 정도로 현실은 이미 회복 불능의 중증의 상태에 빠져 있으며, 사람들은 무감각하게[익숙하게] 이러한 식민지 현실을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시적 자아는 이러한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시는 전체 내용으로 보아 2단락으로 구성된다. 1~4연은 ‘완연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 도시의 일상적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도시의 객관화되어 있는 풍경의 모습 속에는 은연중 시적 자아의 불안 심리가 투영되어 있어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들여다 보인다. 1연에서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같이’ 날고 있는 모습에서는 먹이를 찾아 헤매는 ‘솔개’의 살기 등등한 눈매가 느껴지는 동시에, ‘단엽기같이’라는 비유에서 보듯, 솔개를 ‘단엽기’, 즉 전투기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은 역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은근한 풍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연에서의 ‘나팔을 불고 지나가’는 ‘청년단원’과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는 트럭, 3연에서의 ‘보루’ 같은 ‘고사포’와 ‘콩크리트 굴둑’ 등의 시어에서 보듯,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자아의 불안 의식이 드러난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늘어만 가는 ‘고사포’를 깨닫는 자신의 눈이 미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지경에 빠지게 되고, 결국 5연에서 보듯 자신을 ‘독까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로, ‘시대병 환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자신을 불안하게 하고 무력감에 빠뜨리는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을 ‘환자’로 보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시는 그 시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실 의식을 잘 보여 준다. ‘솔개미’․‘단엽기’․‘무장’․‘청년단원’․‘나팔’․‘트럭’․‘도심지대’․‘보루’․‘병원’․‘고사포’․‘콩크리트 굴둑’․‘공장’․‘독까스’․‘질식’․‘환자’ 등에서 보듯, 도시와 전쟁의 이미지의 시어들이 각 연의 ‘―다’의 단정적 진술과 어울려, 현실의 암담하고 질식할 것 같은 시대적 분위기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순아
- 박세영
순아 내 사랑하는 동생,
둘도 없는 내 귀여운 누이
내가 홀홀이 집을 떠날 제
너는 열 여섯의 소녀.
밤벌레같이 포동포동하고
샛별 같은 네 눈,
내 어찌 그 때를 잊으랴.
순아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너는 오빠 없는 집을 버리려고
내가 집을 떠나자마자
서울로 갔드란 말이냐.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어찌하면 못살어
놈들의 꼬임에 빠져 가고 말었더냐.
어머닌 어쩌라고 너마저 갔더란 말이냐.
그야 낸들 목숨이 아까와 떠났겠니,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달포나 걸어가지 않었겠니.
어느듯 그 때도 삼년 전 옛 일,
내 몸은 헐벗고 여위고
한숨의 긴 날을 보냈을 망정,
조국을 살리려는 오즉 그 뜻 하나로
나는 양식을 삼었거니.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여
왜놈의 넋이 타 버리고,
오빠는 미칠듯 서풍모냥 왔는데도
너는 병든 몸으로 돌아오다니.
딴 시악씨드냐,
그 고왔던 얼굴이 어디로 가고
내 그 옛날 순이는 찾을 길 없고나.
가여워라 지금의 네 모습
어쩌면 그다지도 해쓱하냐,
어린 너의 피까지 앗어가다니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넋이 아직도 씨였니.
그러나 너, 내 사랑하는 순아,
집을 돌보려는 너의 뜻 장하고나,
낮과 밤, 거리거리로
입술에 북홍칠*하고 나돌아다니는
오직 행락만 꿈꾸는 시악씨들보다야.
왜놈의 턱찌끼를 얻어먹고 호사하며,
침략자와 어울리여 민족을 팔아먹으랴던
반역자의 노리개가 아닌 너 순아
차라리 깨끗하고나,
조선의 순진하고 참다운 계집애로구나.
(시집 횃불, 1946)
* 북홍(北紅)칠: 매우 붉은 색칠
<감상의 길잡이>
해방공간에는 해방의 감격이나 분단의 비극을 노래한 시들뿐 아니라, 이 시처럼 과거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일제 잔재 청산의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작품도 많이 창작된다. 이 시는 그러한 작품들 중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오빠가, 동생 순아가 열 여섯 살일 때 조국을 떠나, 해방이 된 뒤 동생을 만나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에 대한 감흥을 읊고 있는, 평이한 서술의 작품이다. 이러한 이 시의 서사 구조를 따르자면, 이 시는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은 1~4연으로 시적 화자의 누이의 과거에 대한 회상 장면이다. 그 때 ‘사랑하는 순아’는 ‘밤벌레같이 포동포동하고 / 샛별 같은’ 눈을 지닌 ‘열 여섯의 소녀’였지만, 시적 화자가 ‘집을 떠나자마자 / 서울로 갔’다. 시골에서는 살 수 없어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놈들의 꼬임에 빠져’ 서울로 떠난 것이다. 시적 화자의 회한이 여기에 이르자, 2단락인 5~6연에서는 먼저 집을 떠났던 자신에 대한 회상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은 살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망명하여 간, 조국의 광복을 위한 선택이었음이 강조된다.
3단락인 7~9연에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순아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시적 화자의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다.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병든 몸으로 돌아’온 누이의 모습을 보고는 시적 화자는 절망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것은 가장으로서 집을 돌보지 못하여 어린 누이까지 공장으로 내몰게 된 데 대한 자책감이자 동시에 일제의 간악한 수탈에 대한 뼈저린 분노의 표현이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넋이 아직도 씨’어 있다는 직설적인 어구로 드러낸다. 마지막 단락인 10~11연에서는 시상(詩想)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제 해방의 현실로 돌아와 시적 화자는 다시 적극적인 의지로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고, 그럴 때 순아는 집을 돌보면서 오빠의 일을 뒷바라지하고자 한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그러나’라는 강한 부정의 접속어로 새 단락을 이끌면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굳세게 살아가려는 새 시대의 민중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 단락은 과거의 타락했던 죄과들을 반성하지 않은 채, 오히려 해방이 되었다고 다시금 시대의 전면에 나서 부귀영화를 꾀하고자 하는 친일 모리배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시대적 메시지로 읽혀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동생을 앞에 놓고 대화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어체의 표현이 그 묘미를 얻고 있다. 이와 함께 익숙한 일상적인 시어들을 통해 순아의 존재가 해방공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생자로서의 이웃으로 표상될 뿐 아니라, 그럴수록 과거 친일파의 무리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높아지게 된다. 이처럼 이 시는 분명하고도 선동적인 표현이 없이도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적 색채를 잘 드러낸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떠나가는 배
- 朴龍喆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안윽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가치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뫼ㅅ부리 모양
주름쌀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닛는 마음
ᄶᅩᆺ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도라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네.
㉡압 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잇슬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시문학 창간호, 1930.3)
* 희살짓는다 : 짓궂게 일을 훼방 놓는다는 뜻으로 ‘헤살짓는다’의 전라도 사투리.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용철의 시는 김영랑이나 정지용의 시에 비하면 대체로 시어가 밝지도 맑지도 못하나 서정의 밑바닥에는 사상성이나 민족 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한 젊은이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갈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를 무기력하게 눈물로만 보낼 수 없어 어디론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고자 하지만, 특별한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 터라 막상 떠나려고 하니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자기가 오래 발 붙이고 살던 땅에서 떠나 떠돌 수밖에 없던, 근거 잃은 유랑민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 시작 배경
1930년대에 우리 민족은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일제의 탄압은 특히 젊은 사람들의 의욕을 꺽고 실의에 빠지게 하기에 청년들은 참다운 일을 찾아 ‘앞 대일 언덕’도 없이 떠나가게 된다. 고국을 떠나는 사정이 타의에 의해서이기 때문에 ‘헤살짓는다’라고 말한다. 망명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국을 떠나는 배로 비유하면서 울적한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 성격 : 서정적
▶ 표현 : 수미쌍관법, 반복법
▶ 운율 : 4음보 율격
▶ 구성 : 수미 쌍관의 구성
① 화자의 결연한 의지(1연) - 조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
② 화자의 안타까운 미련(2연) - 항구에 대한 미련
③ 화자의 의지와 동요(3연) - 지향없이 떠나는 슬픔
④ 화자의 결연한 의지와 다짐(4연) - 떠나고 싶은 마음 강조
▶ 제재 : 이별. (망명으로 떠나는 배)
▶ 주제 : 고향과 정든 사람들을 떠나는 슬픔. (일제하에서 조국을 떠나는 울분과 비애)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처지를 무엇에 비유하였는가? 두 어절로 쓰라. <모범답> 떠나가는 배
2.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와 연관하여 ‘나 두 야’라고 특별히 띄어쓰기를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5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띄어쓰기를 통해 호흡을 느리게 한 것은 ‘차마 떠날 수 없어 망설이는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3.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은 누구이겠는가?
<모범답>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
4. ㉡을 ‘( ) 출발’이라고 할 때, ( ) 안에 알맞은 3음절의 단어를 쓰라.
<모범답> 절망적
<감상의 길잡이>
이 시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한마디로 ‘쫓겨가는 마음’이다. 그것은 파인(巴人) 김동환이 ‘눈이 내리느니’를 통해 보여 준 정경, 이용악의 시에 나타나는 유랑민의 비애와 같이 우리 민족이 제 땅에서 유배당했듯이 북간도나 만주 등지로 떠돌 수밖에 없던 식민지 현실의 뿌리 뽑힌 삶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시인은 젊은 나이를 눈물로만 보낼 수 없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을, 항구를 떠나는 배에 비유하여 노래한다. 인생은 끝없는 고해(苦海)와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연유하는 비유일 터이다.
‘앞 대일 언덕’ 즉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쫓겨가는 마음’이기에 그것은 우울한 항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가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을 돌아다보지만, 바람이 헤살지어 그것마저 구름에 가리운 채 어둡기만 하다. 그러므로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라는 결연한 의지도 그저 말일뿐, 식민지 현실 속에서 겪어야 할 한 젊은이의 정신적 갈등이 그슴 아프게 느껴진다.
이 시에서는 특히 ‘나 두 야’라고 띄어쓰기를 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렇게 호흡을 느리게 한 것은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라는 구절과 연관하여 볼 때, 차마 떠날 수 없어 망설이는 심정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맥락읽기>
1. 이 시의 화자는? ☞ 나
2.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떠나가는 배 위에서 항구를 바라보고 있어요
3. 항구는 화자에게 어떤 곳일까? 시 속에서 찾아 보자.
☞ 아늑한 곳,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4. 그러면 그곳은 어디라고 할 수 있을까? ☞ 고향
5. 이런 고향을 떠나는 ‘나’의 심정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자.
☞ 아쉬운 마음, 미련, 애착
5-1. 시 속에서 찾아보면?
☞ 2연, 3연 1,2행
6. 그럼 ‘나’가 고향을 떠나서 갈 곳은 정해져 있을까?
☞ 아니오.
6-1. 시 속의 어느 부분에서 알 수 있지?
☞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야
7. 정리해 보면?
☞ 이 시는 젊은 나이를 눈물로만 보낼 수 없어 고향과 정든 사람들을 두고 정처없이 떠나는 사람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생각해 볼 거리>
1. 1연과 4연에서 시인은 ‘나 두 야 간다’를 왜 의도적으로 띄어 썼을까? 그때 떠나는 화자의 정서는 어떨까?
☞ 떠나겠다는 의지와 고향에 대한 애착과 미련→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해 보자.
2. 이 시는 1930년대 일제 식민지 현실 속에서 지어졌던 시다. 그러면 이 시의 화자인 ‘나’는 고향을 왜 떠났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보자.
싸늘한 이마
- 朴龍喆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시문학 창간호, 1930.3)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적 자아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2행 1연의 전 3연의 간결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연의 첫 행은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둘째 행은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벗삼고 싶은 대상을 보여 주고 있다. ‘- 라도 있으면(있다면)’이라는 표현은 화자의 외로움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해 주는 것으로, 화자는 그 대상을 각각 ‘산꽃’, ‘귀뚜리’, ‘별’이라는 평범한 사물로 제시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이라는 직설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 싼 세계를 어둠으로 인식하는 화자는 그 속에서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2연에서는 1연과는 다른 방식인 비유적 표현으로 외로움이 나타나 있다. 눈을 감으면 마치 자신의 몸이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처럼 느껴진다는 진술에서 그가 겪고 있는 외로움이 가히 짐작된다. 섬뜩한 표현을 통해 자신의 외로움을 극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한 마리 ‘귀뚜리’만 있으면 외로움을 이겨내는 큰 기쁨이 되리라고 한다.
3연에서 외로움은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으로 나타나 있다. ‘파란 불’, 즉 예민한 신경으로 인해 잠을 재촉하면 할수록 머리 속이 초롱초롱해지며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같이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말하고 있다. 이럴 때,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 큰 즐거움이겠냐고 화자는 자문하고 있다.
화자가 고통을 겪고 있는 외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왜 어둠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이 시는 어느 것 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지만, 그런 대로 이 시가 읽히는 것은 바로 화자의 진한 호소력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저 간단히 일제 치하라는 시대 상황으로만 설명하기엔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는 20년대 초 백조파의 ‘감상의 과잉’에 박용철의 기교가 결합된 정도의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 회월 박영희(朴英熙)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微風)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 한발 걸어오르는 달님의
정맥혈(靜脈血)로 짠 면사(面絲) 속으로 나오는
병(病)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思慕)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
이 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백조 3호, 1923.9)
<감상의 길잡이>
백조의 ‘병적 낭만주의’는 3․1 운동의 실패로 인한 ‘민족적 좌절감’과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서구 낭만주의의 ‘세기말적 경향’, 그리고 그러한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된 ‘개인적 성향’이 3박자를 이루어 만들어진 것이다. <꿈의 나라로>, <유령의 나라>, <월광으로 짠 병실>로 대표되는 박영희의 시는 바로 그 ‘병적 낭만주의’의 실상을 보여 주는 작품들로, 온통 감상(感傷) 투성이의 현실 도피성 영탄일 뿐이다.
박영희는 후에 팔봉(八峰) 김기진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감상’을 탈피한 다음, 1925년 단편 <사냥개>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로 기울어져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핵심적 지도 이론가로 변모하였다가, 결국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향하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병실’은 현실적 공간으로서의 병실이 아니라, ‘달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된 시적 화자가 거처하고 있는 정신적 공간이다. 따라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화자에게 달님이 보내 준 ‘슬픔’․‘두려움’․‘안일’이라는 이름의 의인화된 정서는 그를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에 빠뜨리게 한 유치한 감상으로 시인의 현실 인식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알게 해 준다. 시인이 아호를 ‘회월(懷月)’로 삼은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이 작품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시는 결국 ‘갈 바를 모르는 헤매는 마음’으로 ‘부질없이’ 달빛만 ‘사모하’는 ‘어린애같이’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을 뿐이다.
연시(軟柿)
- 박용래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시집 강아지풀, 1975)
<감상의 길잡이>
박용래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향토적 정서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이다. 아무리 작은 자연 현상조차도 예사로이 넘기지 않는 관찰력과 언어의 군더더기를 일체 생략하고 시적 압축으로써 보여 주는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는 그를 70년대 중요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게 하고 있다.
이 시는 감이 한여름의 땡볕에 붉어지고 가을 서리에 익어서 눈 오는 겨울 어느 날 밤 제상(祭床)에 오른 것을 노래하고 있다. 단 2개의 문장을 14연으로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언어의 절제와 표현의 간결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시각적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여 한 폭의 생동하는 소묘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구성은 상당히 치밀하고 적잖은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격을 보면 1~2음보로 한 연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 11연의 경우 의미상 10연에 연속되는데 음절 수가 10연에 비해 반으로 줄어 휴지(休止)가 길게 붙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의미 단락상 1․2․3 / 4․5․6 // 7․8․9 / 10․11 / 12․13․14연으로 구분됨으로써 10연과 11연의 위치가 전체 시상 전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오게 된다. 또한, 감이 여름에 익고 가을 서리를 맞고 있다가 겨울에 제사상에 오르는 시간적 추이 과정에 입각한 시상 전개에 맞춰 공간적 배경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전반부에서는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돌담 위 연시’로 익었다고 하여, ‘꽂힌’의 하강과 ‘위’라는 상승의 대조를 드러내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도 ‘깊은 잠’의 하강과 ‘깨어나’․‘빛나다’의 상승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전반부의 주어는 ‘땡볕’이고, 후반부의 생략된 주어는 ‘감’, 서술어는 ‘빛나다’로 되어 있어 전반부의 주어인 ‘땡볕’에 연결됨으로써 내용이나 형식이 고도의 치밀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녁 눈
- 박용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월간문학>(1966), 시집 싸락눈(1969)
* 말집 :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겨울에 여행을 떠난 화자는 저녁 때가 되어 허름한 주막에 찾아 든다. 저녁을 먹고 우연히 바깥을 바라보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가하던 주막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바빠진다. 주막임을 표시하는 희미한 호롱불과 마굿간에 매어 있는 조랑말의 수선스런 움직임, 온종일 짐을 지거나 주인들을 등에 태워 고단하고 시장할 조랑말을 위해 부산하게 여물을 준비하는 주인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바쁨 속의 한가함 혹은 한가함 속의 바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적이 끊긴 허허벌판에서 휘몰아치는 눈발을 묘사한 마지막 연은 날이 새면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나그네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심상
▶ 어조 : 겨울 눈발을 응시하는 나그네의 관조적이면서 현실 비판적인 어조
▶ 표현 : ①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붐비다’를 반복함으로써 시상을 단순화함.
② 고유어만을 사용하여 향토성을 살림.
▶ 시상 전개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다가 변두리 빈터로 시선이 옮겨지는 원근법적 전개 방식.
▶ 구성 : ①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집(1행)
②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마굿간(2행)
③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여물 써는 풍경(3행)
④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변두리 빈터(4행)
▶ 제재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주막 풍경
▶ 주제 :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의 나그네의 애상적 정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적 감상)
<연구 문제>
1. 이 시의 통사 구조상의 특징을 말하라.
<모범답> 동일한 어구의 반복
2. 이 시에서 (1)반어적 의미로 쓰인 시어를 지적하고, (2)그 근거를 설명하라.
<모범답> (1) 붐비다
(2) 겉으로 드러난 표현과는 달리 시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한적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3. 이 시와 다음 <보기>시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략히 서술하라.
<보기>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치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섭섭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박용래, 「그 봄비」> |
<모범답> * 공통점 : ① 통사 구조의 반복
② 고유어 사용
③ 사라져가는 옛 풍물에 대한 애상적 정서
* 차이점 : ① 사물에 대한 감상적 정서의 직서적 표현
② 계절적 배경의 차이
③ 가난한 삶의 서러움과 비천함을 직접 제시
<감상의 길잡이>
박용래의 시는 점차 사라져가는 한국 농촌과 자연의 풍물에 강한 연민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감정이 전통적 · 애상적 정서에 힘입어 독특한 토속 미학을 형성한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겨울의 늦은 저녁이고, 공간적 배경은 주막의 마굿간과 변두리 빈터이다. 도시화에 밀려난 변두리의 빈터는 매우 을씨년스런 풍경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따뜻하다. 시인의 관념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의 풍물이 일상적 토속어를 통해 시로 형상화되면서 명징(明澄)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탁월한 능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해가 저무는 겨울, 그리고 하루의 바쁜 일상을 마감하는 저녁, 온 세상을 흰색으로 뒤덮으며 내리는 눈발은 나그네(화자)의 외로움, 회한, 애상을 자아내는 매개물이다. 그런데 화자는 붐비는 눈발 속에서 지나온 한평생을 돌아보고 감상에 젖기보다 무덤덤히 눈발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화자의 눈에 비친 주막의 풍경은 바쁜 듯하지만 전혀 바쁘지 않다. 오히려 늦은 저녁의 함박눈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붐비다’란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음에도 전혀 바쁘다는 느낌이 없이 평화롭고 적막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가함 혹은 여유는 전적으로 화자의 관조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겨울밤
-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시집 강아지풀, 1975)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겨울밤에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을 간결한 소묘법으로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이 그려 놓은 이 소묘 속에서 고향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은 여백의 공간 속으로 침윤되어 있을 뿐, 그 감정의 크기나 깊이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쓸쓸함과 애틋함 또는 삶의 무상감이 뒷그림처럼 작품에 깔려 있으나, 그것이 감상적 차원으로 확산되는 것을 4행의 절제된 시 형식과 압축된 표현으로 적절히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눈’․‘달빛’․‘물’․‘바람’ 등의 전원 상징의 시어와 ‘잠’․‘고향’․‘마늘밭’․‘추녀’․‘발목’ 등의 인간적 체취의 소재를 결합시키는 방법으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근원적 향수는 ‘눈’․‘달빛’의 시각적 이미지와 ‘물’․‘바람’의 청각적 이미지의 대응을 통해 그리움과 외로움의 정서를 유발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본질적 고독과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외로움이 전원 상징의 시어 속에서 향수와 그리움으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박용래의 시는 전원 상징의 시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친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본질이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향수와 그리움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 준다.
월훈(月暈)
-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너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문학사상, 1976.3)
* 허방다리 : 함정(陷穽).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월훈 : 달무리.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깊은 산 속 외딴집에 홀로 살고 있는 노인의 외로움과 허전함이 절실하게 묘사된, 뛰어난 서정시이다. 옛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공간적 배경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노인의 외로움의 깊이를 더해 준다. 한자어를 거의 배제한 고유어의 사용과 향토적 정서에 바탕을 둔 비유, 쉼표와 의태어의 적절한 사용으로 시의 효과를 높이고 있으며, 마지막 연에서는 감정 이입의 기교를 발휘함으로써 노인의 고독을 심화시키고 있다.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심상
▶ 어조 : 산골에 홀로 사는 노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동정하는 애상적 어조
▶ 표현 : ① 경어체의 사용과 명사 종결 어구를 삽입하여 정감의 깊이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② 향토적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토속어의 사용
▶ 시상 전개 : 원경에서 근경으로 이동
▶ 구성 : ① 첩첩 산중의 후미진 마을(제1연)
② 갱 속 같은 마을의 모과빛 창문(제2연)
③ 잠 못 이루는 노인과 처마깃의 새(제3연)
④ 겨울 귀뚜라미의 통곡(제4연)
⑤ 달무리 진 저녁의 광경(제5연)
▶ 제재 : 겨울 산촌의 외딴 집에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 그리움
▶ 주제 : 산촌의 적막함과 외로움. (노인의 고독감)
<연구 문제>
1. 다음에서 노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시어는?
<모범답> ③
①첩첩 산중 ②갱 속 같은 마을 ③모과빛 ④기인 밤 ⑤겨울 귀뚜라미
2. 노인의 고독과 그리움이 감정 이입된 대상은 무엇인가?
<모범답> 겨울 귀뚜라미
3. 노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새들의 온기
<감상의 길잡이>
박용래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정서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관념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배경도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다분히 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산골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의 세계가 시인의 애상적 정서와 결합하면서, 또 그것을 향토적 서정으로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도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기엔 있다는 서두부터 독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동화 속의 세계가 아니라,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우리의 옛 고향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어서 전혀 낯설지 않다. 허방다리르 들어내면 보이는 조그맣고 갱 속 같이 파묻힌 마을, 그 곳에서도 시인의 시선은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한 삶에 집중된다.
외딴집에 홀로 사는 노인은 깊은 밤에 잠이 깨어 고구마나 무를 깎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바람 소리에 귀를 귀울이는 데 신경을 모은다. 이러한 정서는 마치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진다’는 시조의 그것과 적절히 부합되는 것이다. 노인의 청각은 짚단과 짚오라기의 서걱거림에서 처마깃의 이름 모를 새의 자그마한 움직임에까지 이어지지만, 자기를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문득 통곡한다. 이러한 청각의 집중은 노인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더욱 증폭시켜 주는 한편, 시인의 섬세한 감각을 알려 주는 징표로 기능한다.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겨울 귀뚜라미가 벽이 무너지라고 우는 것은 노인의 통곡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벽이 무너지라 우는 귀뚜라미를 겨울 귀뚜라미라고 표현한 데서 동료들과 헤어져 외톨이가 된 귀뚜라미의 신세와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의 처지가 교묘한 일치를 이룬다. 그러니까 ‘떼를 지어 웁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실제 떼를 지어 운다는 것이 아니라, 밤의 정적을 뚫고 울리는 귀뚜라미의 소리가 그만큼 크게 들린다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참고 참았던 노인의 내면적 고독과 그리움이 단숨에 터져 나온 통곡과도 같은 것이다.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경향신문, 1947.11.9)
* 소쩍새 : 올빼미과의 새. 일명 귀촉도, 자규. 한(恨)과 원(怨)의 심상으로 고전 작품에도 자주 등장함.
* 뒤안길 : ‘뒤꼍’의 뜻을 지닌, 으슥하여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
* 무서리 : 그 해의 가을 들어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공자는 그의 한평생을 술회(述懷)하는 글에서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이라 하여 그의 나이 마흔에 사물에 구애되거나 흔들림이 없는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시에서 ‘내 누님’으로 지칭되는 한 여인이 이러한 불혹의 원숙경에 이르는 삶의 역정과 한 송이 국화꽃의 피어남이 어떤 연유로 일치하고 있으며, 또 그 바탕이 되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 성격 : 전통적, 상징적, 불교적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심상
▶ 운율 : 3음보(7·5조)
▶ 표현 : 의인, 상징, 대유
▶ 구성 : ① 기 : 소쩍새와의 인연(제1연)
② 승 : 천둥과의 인연(제2연)
③ 전 : 중년기의 원숙미(제3연)
④ 결 : 무서리 및 시인과의 인연(제4연)
▶ 제재 : 국화의 생태
▶ 주제 : 온갖 고뇌와 시련을 거쳐 도달한 생의 원숙경(圓熟境)
<연구 문제>
1. 이 시의 시상을 형상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종교적 사상은 무엇인가? <모범답> 불교 인연설(연기설)
2. 이 시에서
거울 |
의 함축적 의미를 두 어절로 답하라.
<모범답> 회상과 성찰
3. 조선조의 시조나 그림의 소재로 쓰인 ‘국화’의 이미지와 이 시의 국화 이미지가 어떻게 다른지 10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조선조 시인들은 국화를 지조 있는 선비에 비유하는 것이 거의 관습화되었으나, 서정주는 누님의 이미지를 부여하여 낡은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개인적 이미지를 창출하였다.
4.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매우 비과학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실일 수 있는 이유를 이 시인이 속한 <생명파>와 관련해서 8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하잘것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전우주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생명의 존엄성에 관한 인식에 근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를 단순히 문맥상의 의미를 좇아 읽자면, 제1 · 2 · 4연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제3연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 시는 국화꽃이 핀 어느 순간의 느낌을 집중적으로 노래하기 전에 그것이 피기까지의 과정에 세 개의 연(聯)을 배당하고 있다. 제1 · 2 · 4연이 그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무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비현실적인 발상이고 과장된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비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하잘것없는 하나의 생명체라도 그것의 탄생을 위해서는 전우주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이쯤에서 주제연인 제3연을 보자.
여기서 우리는 국화꽃이 독특하게 의인화되어 있음을 본다. 독특하다는 말은, 전통적인 시가(詩歌)가 흔히 국화꽃을 지조 있는 선비에 비유하고 있음에 비해, 이 시인의 국화꽃은 ‘누님’에 비유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애인이나 아내가 아니고 ‘누님’이라는 것은 국화꽃에 대한 ‘나’의 혈연적인 친근감을 나타내 준다. 지은이는 그의 자작시 해설에서, 「젊은 철의 흥분과 모든 감정 소비를 겪고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미(美)의 영상…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정일(靜逸)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을 이 시에 담았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제1 · 2 · 4연은 단순히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의 시적 표현임이 드러난다. 봄이 20대라면 여름은 30대, 그리고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인생의 40대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뒤안길’이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결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가 형성되기까지늬 비통과 불안과 방황과 온갖 시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방황과 방랑 끝에 비로소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한 여인이 자성(自省)의 ‘거울’에 비춰 본 자신의 과거이다.(정희성·신경림 한국 현대시의 이해 참고)
귀촉도
-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ㅅ걸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1934>, (춘추 32호, 1943.10)
* 파촉 : ①죽음의 세계 ②옛 중국 촉나라 땅
* 메투리 : 미투리. 삼이나 노 따위로 삼은 신. 망혜(芒鞋)
* 은장도 : 노리개로 차던, 은으로 장식한 작은 칼.
* 이냥 : 이 모양대로, 이대로 내처.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사별한 임을 향한 정한과 슬픔을 처절하게 노래한 시이다. 애절한 한의 객관적 상관물로 ‘귀촉도’가 나오고, 그와 걸맞게 계절감을 나타내 주는 ‘진달래’가 나온다. ‘서역’이나 ‘파촉’은 서정주의 불교적 상상력과 결부된 죽음의 세계를 나타낸다. ‘은장도’는 이 시의 화자가 여자임을 알게 해 준다. 다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보자.
▶ 성격 : 전통적, 동양적, 상징적
▶ 운율 : 3음보 율격
▶ 표현 : 설화를 현실에 접목시켜 한(恨)을 노래함.
▶ 구성 : ① 임과의 별리(제1연)
② 회한의 정과 탄식(제2연)
③ 임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제3연)
▶ 제재 : 귀촉도
▶ 주제 : 여읜 임에 대한 끝없는 사랑. (이별의 한과 사랑의 영원함.)
<연구 문제>
1. ㉠은 이 시에서 무엇을 암시하며, 어떤 상징 의미로 쓰였는지 설명해 보라.
<모범답> 화자가 여성임을 암시하며, 여성의 정절을 상징한다.
2. ㉡이라고 한 까닭을 4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임이 죽은 지금 누구에게도 더 이상 예쁘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3. 이 시의
귀촉도 |
가 지니는 의미를 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촉나라 망제 혼의 화신이라는 귀촉도의 울음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로서, 저승을 떠나간 임을 표상하는 동시에 임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사랑의 매개체 구실을 한다. 전통적으로 애절한 정한을 표상하는 새이다.
4. 이 시와 제망매가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점을 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귀촉도는 임을 여읜 한과 슬픔을 처절히 노출시킴으로써 죽음을 비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나, 제망매가는 죽음이라는 삶의 유한성과 무상감을 두터운 신앙심과 숭고한 종교 의식으로 극복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세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연에서는 임의 떠남, 제2연에서는 못다한 사랑의 회한, 제3연에서는 귀촉도의 한맺힌 울음을 제시하고 있다.
임이 가신 ‘서역 삼만 리’나 ‘파촉 삼만 리’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를 뜻한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는 먼 것이어서 ‘삼만 리’로 표현되었을 터인데, 이것은 실제의 거리라기보다는 정서적인 거리감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하겠다.
임의 죽음에 대한 여인의 회한은 제2연에서 잘 드러나 있다. 화자가 여인이라는 점은 ‘은장도’로서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은장도’는 화자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에 대한 정절의 표현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 은장도로 ‘부질없는 이 머리털’을 베어서 먼 길을 가는 임의 신이나 삼아 드릴 걸 그랬다고 후회를 한다. 머리털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말은 임이 죽은 지금 누구에게 더 이상 예쁘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치렁치렁한 머리털은 여인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다. 간음한 여자의 머리털을 잘라 버리는 풍습도 이에 근거한 것일 터이다.
마지막에서 그토록 사랑하던 임이 귀촉도의 울음으로 되살아 온다. 귀촉도는 동양의 시에서 흔히 등장하는 이미지로서, 임을 그리워하다 죽은 넋으로 이해된다.
<맥락읽기>
1. 서정적 자아를 지칭하는 시어를 찾아보자. ☞ 없는데요.
2. 그래, 서정적 자아가 시의 표면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서정적 자아의 심정이 의탁된 존재는 있겠지. 뭘까?
☞ 귀촉도요
3. 이 시에 나오는 귀촉도는 어떤 새 일까?
☞ 아주 슬픈 사연을 지닌 새입니다.
4. 그렇다면 서정적 자아의 심정, 심적 상태가 어떻다는 것인가? ☞ 엄청난 슬픔에 잠겨있어요.
5. 왜, 무엇 때문일까?
☞ 글씨요, 님이 어디론가 가버렸군요. 님과 이별했다는 애기네요.
6. 님이 간 곳을 지칭하는 시구들을 모두 찾아보자.
☞ 서역 삼만리, 파촉 삼만리, 하늘 끝
7. 님이 그곳으로 갈 때 어떻게 갔는가?
☞ 피리 불며, 흰 옷깃 여며여며, 홀로
8. 님이 간 곳은 어디일까? 님이 간 곳과 그곳으로 가는 님의 모습을 참고로 짐작해보자.
☞ 아주 먼 곳, 돌아올 수 없는 곳, 저승
9.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 한밤중요
10. 그런 시간적 배경은 이 시에 어떤 효과를 주나?
☞ 한 맺힌 슬픔을 더욱 절절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11. 3연 2행의 ‘은하’가,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에 미치는 효과는?
☞ 은하수의 눈물 젖은 사연(견우 직녀)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 밤의 찬이슬이 슬픈 사연의 눈물인 양도 하다.
12. 2연은 내용 전개에서 약간의 도치가 사용되고 있다. 의미가 부드럽게 연결되도록 재배치해 본다면?
☞ 부질없는 이 머리털을 은장도로 베어서 슬픈 사연을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를 삼아드릴 걸
13. 떠나는 님에게 신 삼아주는 걸 보니깐 뭐 생각나는거 없냐?
☞ 아! 있어요. 입관할 때 보니까 시신에도 신발을 신기더군요
14. 자! 그렇다면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지금 어떤 처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나?
☞ 님을 여윈 안타까움에 속으로 눈물 흘리며 잠 못 이루고 슬픔에 잠겨 있어요.
15. 그러면 이 시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지?
☞ ‘님을 여윈 슬픔’ 정도가 되겠네요
16. 그래,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 머리털을 잘라 신발을 삼아 준다고 한걸 보아 여자이겠네요.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현대 공론, 1954.8)
* 남루 : 헌 누더기.
* 갈매빛 : 짙은 초록빛
* 지란 : 영지와 난초.
* 눙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 쑥구렁 : 쑥이 자라는 험하고 깊은 구렁. 무덤.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생명 현상에 대한 강렬한 탐구가 주류를 이루던 초기시의 특징에서 벗어나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다가선 서정주 문학의 제2기 대표작이다.
6·25 동란으로 인한 광주에서의 피난 생활은 인정이 메말라 허기지고 고달픈 삶이었다. 시인은 무등산을 묵묵히 바라보며 자신의 생활 철학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 주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가져 보자.
▶ 성격 : 낭만적, 전통적
▶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심상
▶ 어조 : 설득적 어조, 긍정적 어조
▶ 표현 : 대유법, 의인법, 직유법
▶ 구성 : ① 자녀를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름.(제1,2연)
②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모습.(제3,4연)
③ 가난에 굴하지 않고 품위와 지조를 지킴.(제5연)
▶ 제재 : 가난.(생활의 어려움)
▶ 주제 : 본질적 가치에 대한 긍지와 신념
<연구 문제>
1. ㉠은 어떠한 때인지 2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생활 속의 피로와 허기를 느끼는 때.
2. ㉡은 어떤 상황을 비유한 것인지 두 가지 측면에서 간단히 설명하라.
<모범답> (1)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찬 삶의 조건
(2) 생의 마감, 곧 죽음.
3. 제4연에서 내외간의 행위가 함축하고 있는 정신을 두 어절로 답하라. <모범답> 부부간의 사랑.(사랑과 신뢰)
4. 시인은 무등산에서 한국인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여 시로 승화시키고 있는지 50자 정도로 말해 보라.
<모범답> 물질적 궁핍, 육체적 곤궁을 극복하는, 슬기롭고 의젓한 생활인의 모습을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6·25 동란 후 몇 년이가를 시인은 광주에서 기거하며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그 당시 대학의 교수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닐 정도였다 한다. 내 남 없이 모두 궁핍하던 때인 만큼 점심을 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가항력으로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물질적 궁핍 속에서, 크고 의젓하고 언제나 변함없는 무등산을 보며 시인은 이 시를 썼던 것이다.
산은 시인에게 의인적인 형상으로 보여진다.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산을 바라보며 시인은 헐벗은 자신의 처지를 차라리 떳떳하게 생각한다. 가난이란 한낱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이어서, 가난할수록 허릿잔등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타고난 마음씨’는 오히려 빛나는 것이 된다. 인간의 본질이 물질적인 궁핍으로 인하여 찌들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그는 푸른 산이 그 기슭(산 아래)에 향초(香草)를 기르듯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우리는 슬하(무릎 아래)의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를 수밖에 없다는, 의연한 긍정의 자세를 취한다. 참으로 인간을 찌들게 하는 것은 물질적인 궁핍이 아니라 정신적인 빈곤이라는 생각이, 배고파 허기진 오후의 한때에도 차라리 한 부부를 갸륵한 사랑 속에 있게 하며, 죽음(가시덤불 쑥구렁) 속에서도 옥돌처럼 묻혔다고 생각하게 한다.
시는 인격이라는 말이 있지만, 궁핍 속에서도 높은 정신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이 시인의 인격이 이 시에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빈곤이 참으로 자신의 현실 문제가 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시인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극단적인 정신주의가 오히려 있는 자의 사치로 보여질 우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추천사(楸韆詞)
- 춘향(春香)의 말 · 1
- 서정주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배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시집 「서정주 시선」(195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전(古典)인 「춘향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기의 딸로 태어난 춘향이 양반 관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도령과 맺어지기까지의 역경과 고난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며,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에로의 변형, 재창조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의 시적 형상화라 할 수 있으며, 춘향의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시의 화자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연작시 3편 중 첫 번째 시이다.
▶성격 : 낭만적, 이상적, 초월적, 동양적, 불교적
▶심상 : 고전적, 동적 심상
▶어조 : 여성적이며 섬세한 어조
▶구성 : ① 1연 : 현실 초극 의지
② 2연 : 아름다운 현실에의 애착과 초극 의지
③ 3연 : 동경하는 세계에 대한 갈망
④ 4연 : 인간의 운명적 한계 자각
⑤ 5연 : 현실 초극 의지
▶제재 : 그네를 뛰는 춘향
▶주제 : 초월적 세계로의 갈망(현실적 고뇌의 초극)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현실 세계를 가리키는 소재를 있는 대로 찾아 쓰고, 그 공통점을 간단히 요약하라.
▲수양버들나무,풀꽃더미,나비새끼,꾀꼬리
▲공통점 : 봄의 아름다운 자연물(수양버들나무,풀꽃더미)과 서정성과 정감의 대상물(나비새끼, 꾀꼬리)로서 봄이라는 계절의 화사함, 맑음,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지님.
2. 이 시에서 ‘그네’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말해 보라.
춘향의 현실적 괴로움과 운명을 벗어나려는 상징의 그네.
(초월적 의지와 인간의 운명적 굴레를 상징하는 그네. 현실 세계와 이상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매개체.)
3. 이 시와 「한림별곡」 8장에서, 작중 화자가 그네를 타는 행위에 담긴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쓰라.
「추천사」는 운명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으나, 「한림별곡」은 단순히 유희의 흥겨움을 즐기고 있다.
4. ㉠은 춘향이가 무엇을 깨달은 것을 표현한 것인지 30자 내외로 쓰라.
동경의 세계로 갈 수 없는 인간적 한계를 깨달음.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그 부제(副題)가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춘향이 향단과 그네를 타면서 독백 형식으로 엮은 노래이다. 춘향전에 의하면 ‘그네’는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의 계기로 기능하고 있으며 서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연인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 시에서도 역시 그네는 단순한 놀이 기구가 아닌, 춘향이 자기 자신의 괴로움과 운명을 벗어나려는 수단으로서, 즉 괴로움과 고통, 번민의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나 조화로운 이상 세계(여기서는 ‘저 하늘’ ‘서(西)’로 표현됨)에 도달하기 위한 매개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춘향의 고통과 번민의 내용은 무엇일까? 「춘향전」의 이야기 줄거리에 집착한다면 이는 기생의 딸로 태어난 신분상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그렇게 도식적으로만 이해하려 든다면 그것은 매우 피상적인 견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춘향이 벗어나고 싶어하는 세상은 환멸의 대상이 아닌, 수양버들과 풀꽃더미,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 등으로 표현된 아름다운 곳으로서 오히려 애착의 대상일 수가 있으며 더욱이 현실을 벗어나 도달하려는 이상 세계는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이며, ‘아무래도 갈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현실을 초극하려는 의지와 현실에 대한 애착 사이에 놓인 심리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네’는 바로 이들 사이를 왕복하게 한다. 천상 세계를 꿈꾸면서도 끝내 인간이 사는 지상을 떠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적 한계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춘향의 고통과 번민은 역설적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사랑의 아픔과 번민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 「춘향 유문(春香遺文)」과 마찬가지로 그 시적 모티프(motif)는 고전 소설인 「춘향전」에서 찾았으나 오히려 「춘향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여 준다. 즉, 이 시에서는 인물의 전형성을 부여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정감 속에 살아 있는 어떤 여인, 사랑의 괴로움과 갈등에 빠진 한 여인의 보편적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동천(冬天)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현대문학 137호, 1966.5)
* 즈믄 : 천(千)의 옛말.
* 시늉하며 : 흉내내며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인간은 무한(無限)을 동경하고 그리워한다. 더 영원한 것, 더 완전한 것을 갈망하고 절대적 가치 앞에 심취(心醉)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할 때, 이 모든 행위가 한낱 본질을 겉도는 시늉에 불과할 뿐, 추구하는 대상은 영원한 그리움과 외경(畏敬)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고도의 압축과 상징으로 이루어진 난해한 시로서 시인 자신의 구도적(求道的) 삶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성격 : 상징적, 종교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운율 : 3음보(7·5조)
▶ 특징 : 달을 눈썹에 비유하여 ‘겹 이미지’로 표현함.
▶ 표현 : 상징, (불교적)은유
▶ 구성 : 단련시(單聯詩)
▶ 제재 : 고운 눈썹(달), 매서운 새
▶ 주제 : 절대적 가치의 영원성에 대한 외경
<연구 문제>
1. 이 시의 분위기로 보아 ㉠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또 ㉠의 상징적 의미를 30-4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1) 달(그믐달)
(2)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품고 꿈꾸어 온 삶의 고귀한 정신적 가치
2. ㉡에는 화자의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20자 이내로 쓰라.
<모범답> 임의 아름다움에 대한 흠모의 정
3. ㉢에는 어떠한 새의 이미지가 눈앞에 떠오르는지 60자 정도로 말해 보라.
<모범답> 그믐달에 임의 눈썹이 겹쳐진 것을 선망은 하면서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비껴 가는 새의 이미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감상의 길잡이>
서정주의 시에서 화사(花蛇)에서의 대지적(大地的), 육감적(肉感的) 사랑과 동물적 상상력은 동천에 이르러 천상적(天上的) · 정신적 사랑과 우주적 상상력으로 승화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지적한다. 지상의 언어가 아닌 천상의 언어답게 이 시는 거추장스러운 단 한마디의 설명도 배제한 채,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빚어낸다.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는 ‘눈썹’과 ‘새’이다. 겨울 하늘에 차갑게 걸려 있는 눈썹 같은 그믐달과 그 곁을 비껴 가듯 날고 있는 한 마리 새의 모습을 그린 한 폭의 동양화를 생각게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화자는 그 그믐달을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이라고 말하며, 오랜 세월 동안 꿈꾸어 오던 것을 하늘에 옮겨 놓았다고도 말한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슬픈 운명을 지닌 한 여인에 대한 승화된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 시를 어떤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눈썹’은 여인의 육체적 심상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인이 마음속에 품어 온 삶의 어떤 고귀한 정신적 가치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하늘에 옮기어 심어 놓았다는 말은 절대적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의미일 것이다.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는 말에는 인간은 물론 새까지도 그 고귀한 정신적 가치를 알아차리고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외경(畏敬)의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맥락 읽기>
1. 서정적 자아(화자)를 지칭하는 시어를 찾아 보아라. ☞ 내
2. 화자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 글씨요,남자요,여자요...
3. 서정적 자아(화자)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 님의 눈썹을 씻어서 하늘에 옮겨 심었다.
4. 눈썹을 하늘에 심다니 그게 뭐꼬?
☞ 눈썹, 하늘 눈썹,하늘 눈썹,하늘 하늘,눈썹
☞ 아하! 눈썹이란 하늘의 초승달이로군요!
5. 화자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 남자요. 님의 고운 눈썹 운운 하는 걸로 봐서 님은 여자고 나는 남자가 아닐까요.
6. 그럼 화자가 뭘 보고 있는 건가? ☞ 하늘의 초승달요
7. 하루 중 어느 때인가? ☞ 초저녁
8. 계절은? ☞ 한 겨울
9. 화자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
☞ 겨울 하늘에 걸린 파리한 초승달이 님의 눈썹 같다. 님이 그립다. 보고 싶은 순이야!
10. 자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 났나 ?
☞ 지나가던 새가 초승달을 비끼어 갔네요
11. 오이 ! 뭣이야 ! 왜 그랬을꼬?
☞ 화자의 심정에 공감했군요.
12. 음 그럴 듯 하네 !
신부(新婦)
-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시집‘질마재 神話’(1975)
* 돌쩌귀 : 문짝을 여닫게 하기 위해 문설주에 달아 둔, 쇠붙이로 만든 암수 두 개로 된 한 벌의 물건.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집 <질마재 神話>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질마재 신화>는 미당(未堂)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간행된 시집으로서 초기의 퇴폐적, 상징적 ‘원죄 의식(原罪意識)’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다.
이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는 대체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도 그야말로 보편적인 한국인의 질박한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어 가장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신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성격 : 낭만적, 토속적, 신화적
▶ 심상 : 초록, 다홍의 색채 심상이 선명히 대비되어 있음.
▶ 어조 : 서사적이며 평이한 어조
▶ 운율 : 산문적 내재율
▶ 구성 :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
▶ 제재 : 신부(新婦)
▶ 주제 : 여인의 정절(貞節)
<연구 문제>
1.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일견 유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가 않다.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미적(美的) 정서를 150자 정도로 서술하라.
<모범답> 주제면에서 분며 이 시는 유교적인 정서인 ‘여인의 절개’를 겉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여인의 정절이 고귀함을 강조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인의 현실적 가치관이었던 유교의 열녀 사상을 뛰어넘은 신화적, 토속적 정서를 그 미학(美學)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이 시가 독자에게 특이한 인상을 주는 까닭을 구성상의 특징과 관련하여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특이한 인상을 준다.
3. 이 시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신부(新婦)를 표상하고 있는 시구를 찾아 쓰라.<모범답> ‘초록 재와 다홍 재’
<감상의 길잡이>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었다. 여인의 절개란 어김없이 고통과 슬픔, 한(恨)의 여운을 남기는데,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준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 -이 시간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한다 하겠다.- 이 지난 뒤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우연히 들린 신라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이로써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된 것이다.
이 시의 강렬한 인상은 이미 생명이 없는 존재이면서도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있는 ‘초록 재와 다홍 재’의 신부에 연유한다. 오히려 철부지이며 지각 없는 신랑에 비해 철저히 유교적인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매서운 신념을 지닌 신부는, 그러나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 육(肉)의 세계를 넘은 영(靈)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주 문학의 독특한 미학(美學), 즉 현실적 세계관이었던 유교의 정절이 교묘한 토속적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의 경지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가요 정읍사와 관련된 망부석 전설,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가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치술령 고개 위에 선 채로 돌이 되었다는 전설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문둥이
- 서정주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전 5행에 불과한 짧은 형식이지만, 언어의 관능적 용법과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으로 대표되는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미당의 초기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먼저, 피를 토하듯 우는 슬픈 울음을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로 표현한 데서 언어의 관능적 용법을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꽃처럼 붉은 피가 배어나는 처절한 울음에서는 단순한 감각적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인 체험 의식까지 갖게 해 준다.
그리고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은 ‘애기 하나 먹’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숨어 살며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문둥이’는 그저 ‘해와 하늘빛이’ 서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해와 하늘빛이 있는 대낮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그는 살기 위한 원초적 욕망으로 ‘애기 하나 먹’음으로써 병을 고치려 하지만, 이 같은 생에 대한 집념이 부도덕함을 깨닫고, 마침내 자신의 숙명적 운명에 대한 몸부림으로 인하여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시인의 체험이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인간성이 파멸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회복된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그의 강한 생명 의식이 이 <문둥이>를 낳게 한 것이다.
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1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미당의 초기시의 하나로서 세기말적인 보들레르의 악마성과 토속적인 원시성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미당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壁)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고, 같은 해 김동리, 함형수, 오장환, 여상현, 김달진 등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통권 2호로 종간(終刊)한 단명의 시 동인지였지만 서정주 문학의 출발적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시는 <시인부락> 2호에 발표된 것으로서 1938년 그의 첫 시집 <화사집>에 실려 있다.
▶ 성격 : 낭만적, 주정적
▶ 표현 : 감각적 표현이 전면을 지배하고, 악마주의적 기법과 반복법, 점층법 등이 구사됨.
▶ 구성 : ① 뱀의 징그러운 모습과 꽃대님 같은 아름다운 빛깔(제1,2연)
② 가뿐 숨결로 낼룽거리는 뱀의 혓바닥(제3-5연)
③ 뱀의 혓바닥 ― 클레오파트라의 붉고 아름다운 입술, 순박하고 고운 순네의 입술(제6-8연)
▶ 제재 : ‘배암’과 순네의 고운 입술
▶ 주제 :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향수
<연구 문제>
1. 이 시는 성서(聖書)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중 뱀이 이브를 꼬여 내어 선악과(善惡果)를 먹게 한다는 내용에서 모티브를 얻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 드러난 화자의 태도는 성서에서 보여 주는 태도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를 25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성서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에덴 동산에서 이브가 뱀의 꼬임을 받아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여호아가 내려 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며 뱀과 인간이 서로 원수가 된다. 즉, 영원한 증오와 미움의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서는 뱀을 단순한 증오와 미움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뱀을 그러한 증오와 미움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역설적으로 뱀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애정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교차되어 있다.
2. 이 시에서 ‘몸뚱어리’, ‘아가리’, ‘대가리’ 등의 비속어를 사용하여 얻었다고 생각되는 효과를 7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비속어를 사용함으로써 反문명적이고 원시적인 정서를 표출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강렬하고 원색적인 느낌을 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3. ㉠의 ‘뒤안길’의 (1)사전적 의미와, (2)이 시에서 갖는 의미를 8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1) ‘뒤꼍으로 난 길’의 뜻.
(2) 뱀과 인간의 숙명적 관계로 인하여 뱀이 다닐 수밖에 없는 ‘어둡고 시선이 미치지 않는 길’의 뜻.
<감상의 길잡이>
원시적 생명력의 상징인 뱀을 소재로 하여 악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이다. 매우 감각적으로 뱀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으며, ‘몸뚱어리’, ‘아가리’, ‘대가리’ 등의 비속한 용어를 씀으로써 강렬하고 원색적인 느낌을 준다. 즉, 부드러움, 우아함, 이성적임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지적, 문명적 경향에 강하게 맞서 원시적이고 퇴폐적인 생명력을 강조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전체적으로 뱀의 형상을 그림에 있어 그 몸뚱어리는 징그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 역설적으로 꽃대님같이 아름다운 빛깔로 둔갑한다. 이 아름다움과 징그러움이 이 시를 움직이게 하는 두 개의 감정의 축(軸)이다. 더구나, 그 징그럽고도 아름다운 몸뚱어리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의 붉게 타오르는 입술로, 순박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토속적 미인인 순네의 고운 입술로 스며들어 가는 모습, ―아름다움과 징그러움이 본질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데서 몸서리치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악마주의일까?
성서(聖書)에서 말하는 뱀은 인간의 원죄를 대변하는 악마의 사자이다. 악마이므로 당연히 증오의 대상이지만, 또한 강렬한 유혹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자는 돌팔매를 쏘면서도 사향 길 뒤를 ‘가쁜 숨결’로 따르는 감정의 이중성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서정주 문학의 기본이 되는 초기시의 표본으로서 인간의 원시적 생명력과 욕망에서 오는 악마적 전율과 예찬을 통해 서구적 발상과 토속적 사고의 융합을 교묘하게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화상(自畵像)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시건설, 7호, 1939.10)
* 실제로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일가의 머슴살이를 하였다.
* 한 주 : 한 그루.
* 달을 두다 : 여자가 아이를 배다.
* 갑오년 : 동학 혁명이 일어난 1894년.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미당(未堂)의 초기시에 해당하는 시로서 미당을 이해하기 위한 작가론의 앞머리에 으레 논의되는 그의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는 여러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내면적 자아의 모습을 그린 것일 터이므로 시인의 정서,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이다.
우리는 이 작품 자화상을 통하여 미당의 시를 관류(貫流)하고 있는 미학(美學)을 규명해 보기로 하자.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격정적, 관념적
▶ 심상 : 시각적 심상과 상징적 심상이 다분히 서사적인 표현 속에 반복되어 있음.
▶ 표현 : 가능한 한 간접적인 묘사 방식을 피하고 바로 대상과 관념에 직핍(直逼)하는 표현 방식을 택하고 있음.
▶ 운율 : 4음보가 기본 율조이나 산문적임.
▶ 구성 : ① 어린 시절의 기억(제1연)
② 시련기를 살아온 삶을 돌아봄(제2연)
③ 고통스럽게 살아온 삶을 회고함(제3연)
▶ 제재 : 자화상
▶ 주제 : 역사의 시련기를 겪으면서 고통스럽게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
<연구 문제>
1. 이 시의 제목은 자화상이다. 시인과 화자가 동일한 존재임을 가정할 때, 시인의 지나온 삶에 대한 태도를 120자 내외로 요약하라.
<모범답> 시인은 자신의 삶을 굴욕적이며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전편에 흐르는 강렬한 죄의식과 천시(賤視), 유랑의 의식은 개인사적이든, 민족사적이든 불행했던 과거의 싦에 대한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인식과 태도를 지녔다고 보겠다.
2. ㉠에서 ‘아침’이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쓰인 것인지를 간단히 서술하라.
<모범답> 새로운 인간 관계의 지평이 열리는 혁명과도 같은 순간
3. 다음 시와 관련하여 서정주의 자화상에도 등장하는 ‘몇 방울의 피’의 시적 의미를 80자 내외로 서술해 보라.
자유를 위하여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
<모범답> 자유와 해방은 끈질긴 투쟁과 민중의 단합된 힘을 통해 싸워 얻은 것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서도 피나는 항쟁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4. 시인의 자화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시어 하나를 찾아 쓰라.
<모범답> ‘수캐’
<감상의 길잡이>
훌륭한 예술 작품이란, 그것이 작가의 개인적 진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가 살고 있는 사회 현실의 움직임과 발전 경향을 놀라 만큼 정확히 반영한다. 우리는 이 시가 개인적인 솔직성을 뛰어 넘어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진실에 이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역사적 · 사회적으로 불가피하게 제약된 것이라면, 그것을 다루는 문학이 역사성과 사회성을 띠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시가 다루고 있는 것도 역사를 초월한 개인이 아니라 바로 역사 속에 있는 개인이다.
제1연은 화자의 사회적 존재를 알게 해 준다. 그는 종의 자식이며 갑오년인가에 집을 나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외할아버지의 피를 받았다. 갑오 동학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 ‘애비는 종이었다’는 첫 구절은 개인적인 솔직성을 넘어서서 차라리 떳떳하고 당당하며 도전적이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그가 봉건적인 사회 현실 속에 매몰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이런 유의 당당함이란 그 자신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자각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 자각된 입장이, 개처럼 헐떡거리며 살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자신을 대결시키는 저항 의지로 나타난다.
제2연은 바로 봉건적인 인간 관계가 한 개인에게 부과하는 굴욕적인 삶과 그것에 맞서는 의지의 표현이다. 불평등한 인간 관계 속에서 어떤 이는 죄인, 천치 취급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뉘우치지 않는다. ‘스믈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그가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굳건해진 사람임을 알게 된다. 굴욕적인 현실은 그를 주저앉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의지로 끌어올린다.
그런데 제3연의 1-3행에서 현실적 고통을 오히려 반짝이는 시의 이슬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침’은 새로운 인간 관계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혁명과도 같은 아침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물론 문맥적으로는 그 피가 시의 이슬에 맺혀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시’와 ‘아침’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의미한다. ‘아침’으로 표현된 인간적인 진실 속에서만 참다운 ‘시의 이슬’이 맺힐 수가 있는 것이다.
밀어(密語)
- 서정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백민, 1947.2)
* 채일 : ‘차일(遮日)’의 방언. 햇빛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그 발표된 시기를 고려할 때,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광복의 환희를 노래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화자의 감격이 돈호법에 의하여 고조되고 있으며, 어둠[暗]과 밝음[明]의 대립, 광복에의 기쁨이 각각 시각적 심상과 촉각적 심상에 의하여 잘 묘사된 작품이다. 심상에 유의하면서 화자의 감격과 환희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 심상 : 시각적, 촉각적 심상
▶ 운율 : 4음보
▶ 표현 : 직유, 은유, 상징, 돈호법
▶ 구성 : 순환 구조
① 곧 개화할 아름답고 기쁜 생명의 세계(제1-3연)
② 아름다움과 기쁨의 세계(제4,5연)
▶ 제재 : 꽃봉오리
▶ 주제 :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넘치는 생명 세계의 도래. (새 생명의 도래에서 느끼는 환희)
<연구 문제>
1. (1)㉠의 상징적 의미를 쓰고, (2)‘잿빛의 문’과 상대적 개념으로 쓰인 시구를 찾아 쓰라.
<모범답> (1) 이승과 저승 사이의 문
(2) 아늑한 하늘가
2. 화자의 감격을 한층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용한 수사법은 무엇인가? <모범답> 돈호법
3. ㉡에 내포된 의미를 25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충만한 생명의 새 세계.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세 소녀를 향한 세 개의 명령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행에 등장하는 세 소녀 중, 특히 「남이」 앞에 ‘돌아간’이라는 단어가 얹혀 있다. 그것은 두 소녀는 살아 있고 남이만 죽었다는 뜻으로 읽히게 할 지 모른다. 그런데 화자는 세 소녀를 향하여 동시에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오라고 한다. ‘돌아간’이라는 단어와 관련시켜 볼 때,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이 이승과 저승의 통로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죽은 것은 남이만이 아니다. 세 소녀는 다 이승에는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오해될 우려를 무릅쓰면서 ‘돌아간’이라는 단어를 「남이」 앞에 끌어온 이유가 무엇일까? 첫 행은 다음과 같이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간 순이야, 영이야, 그리고 남아.
이렇게 되면 문장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운율적으로 매우 어색한 느낌을 주게 된다. 이 시는 저승에 간 세 소녀를 향한 명령문이다. 이승의 화자는 저승의 죽은 넋들을 향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꽃봉오릴 보아라’고 감격 어린 투로 세 번씩이나 외친다. 그것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기이한 느낌마저 준다. 황홀한 개화의 순간은 살아 있는 이승의 화자에게는 경이로움일 수가 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저승에 있는 사람을 불러가면서 그것을 보라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꽃봉오리’와 ‘세 소녀’ 사이에 어떤 특별한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꽃봉오리’는 인생의 꽃을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죽은 소녀들을 연상케 한다.
특히, 우리는 꽃봉오리가 하늘가에 머물러 뺨을 비비며 숨을 쉬고 있다는, 의인화된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화자는 꽃봉오리를 통해 죽은 소녀들의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 ‘인제 바로 숨쉬는’ 개화의 순간은 바로 소녀들의 넋이 새로운 형상으로 부활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산문화될 수 있다.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 가에
․․․․․ ․․․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리로 피어라.
‘꽃봉오릴 보아라’는 말은 ‘꽃봉오리로 피어라’라는 주술적(呪術的) 명령을 대신한 것이다. 초혼(招魂)의 주술이 명령형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가 고대의 구지가(龜旨歌)나 그밖의 전통적인 무가(巫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서 흥미롭게 느껴진다.
상리과원(上里果園)
- 서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와도 같은 융융(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 만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 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주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 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 ― 아스라한 침잠(沈潛)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微物)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느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 귀소(完全歸巢)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리켜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鐘)소리를 들릴 일이다.
(현대공론, 1954.11)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슬픔을 넘어선 삶의 환희를 노래한 작품으로, 제목인 ‘상리과원’은 ‘상리’라는 마을의 어느 과수원이란 뜻이다. 과수원의 만개한 꽃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이 힘겨움 속에서도 즐거울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25 때 소위 자살 미수를 겪은 후 깨달은 바 있는 범신론적(汎神論的) 낙천주의와 만개한 과목(果木)에서 발견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합됨으로써 태탕(駘蕩)한 봄과 같은 생의 기쁨을 토로하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이지만, 5개의 형식 단락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므로 각 단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단락은 과수원의 만발한 꽃의 모습을 ‘조카딸년과 그 친구들의 웃음판’으로 비유하여 순진무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2단락은 만발한 꽃을 찾아드는 온갖 새들과 꿀벌들의 모습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과수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3단락은 앞의 두 단락에서 분출되던 격정적인 호흡을 멈추고, 서경적 표현을 서정적으로 전환시켜 아름다운 자연과 합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유두분면’이란 기름 바른 머리와 분을 바른 얼굴로 흔히 부녀자의 화장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4단락은,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 자연 속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화자가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세상을 소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5단락은 주제연으로, 깊은 밤이 오게 되면,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보여 주고, ‘제일 오랜 종소리’를 들려 주어야 한다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의 꿈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에서 우리는, 화자가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상징된 고통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창작 시기가 6․25 직후인 것을 고려한다면, 전후의 허무적이고 비극적인 현실 인식 태도를 불식시키고, 더 나아가 ‘상리과원’ 같은 기쁨이 충만한 미래 지향적인 삶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 시를 창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광화문(光化門)
- 서정주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 |
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파르르 죽지 치는 내 마음의 메아리….(또는,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현대문학 8호, 1955.8)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예로부터 광명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광화문의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민족 정신을 ‘광화문’이라는 전통적인 건축물에서 발견하고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화자의 주관적 상상력을 따라 이 시를 읽으면서 광화문의 상징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성격 : 전통적, 동양적, 상징적
▶ 표현 : 의인, 은유, 직유, 공감각적 표현
▶ 구성 : ① 광화문에 도착함(제1연)
② 광화문의 자태(제2,3연)
③ 광화문의 상징적 의미(제4연)
④ 성 옆의 그윽한 분위기와 감동하고 있는 나의 마음(제5,6연)
▶ 제재 : 광화문
▶ 주제 : 한국적 광명 사상의 고조
<연구 문제>
1. ㉠은 (1)무엇을 어떻게 표현한 것인지 밝히고, (2)그런 표현을 통해 시인의 어떤 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인가를 밝혀 쓰라.
<모범답> (1) 생명이 없는 북악과 삼각이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산이 그렇게 앞뒤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2) 시인의 국토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2. 이 시의 제재인
광화문 |
이 상징하는 바를 4-5어절로 답하라.
<모범답>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 (우리 민족 고유의 광명 사상)
3. 제4연에서 들려오는 화자의 메시지를 다섯 어절의 청유문 형식으로 쓰라.
<모범답> 항상 고운 마음씨로 착하게 살자.
4. 한국의 전통적인 선(線)의 미가 드러나 있는 시어 둘을 찾아 쓰라. <모범답> 버선코, 날갯죽지
<감상의 길잡이>
우리는 서구 사조와 문명에 의하여 민족 고유의 정신과 문화적 유산들이 상실되고 망각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대수롭지 않은 유품에서도 전통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더러 감동을 느낄 때도 있다.
이 시는 광화문의 배경에 놓인 너무나도 친숙한 국토와 높고 파아란 하늘, ‘광화문’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광명한 빛’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 사상이 높고 밝고 성스러움을 환기시켜 주고 있으며, 지붕의 곡선미에서는 하늘과 광명을 숭상하던 옛 조상의 슬기를 찾아냄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제1연은 북악과 삼각산을 오누이에 비유함으로써 국토에 대한 혈연적 친근감과 다정함을 표현했다.
제2연은 광화문의 숭고한 모습을 민족의 광명 사상이 깃든 종교와 같은 것으로 보고, 버선코와 지붕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곡선미와 결합시켜 그 자태가 의젓함을 감탄하였다. 지붕의 선을 금시라도 날아갈 듯한 새의 날갯죽지에 비유한 점은 조선조 송순의 면앙정가에 나오는 ‘너ᄅᆞ바회 우ᄒᆡ 松竹을 헤혀고 亭子ᄅᆞᆯ 언쳐시니 구름 ᄐᆞᆫ 靑鶴이 천리를 가리라 두 ᄂᆞ래 버렷ᄂᆞᆫ ᄃᆞᆺ’이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제3연은 부연 단락으로, 지붕의 곡선미는 푸른 하늘과 조화를 이루어, 우리 민족이 순결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제4연은 광명과 평화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광화문을 보며 항상 착하고 고운 마음씨로 살아가자는 염원을 말한다.
제5,6연은 시정(市井)의 노랫소리조차 정겨운 우리네의 옛 가락으로 느끼며 파란 하늘에서 우리 민족의 광명 사상을 다시 한번 감명 깊게 되새긴다.
다시 밝은 날에
― 춘향(春香)의 말․2
- 서정주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가시고
그 훠 ― 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춘향이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뒤에 재회의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자신의 사랑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의 전통적 구성 방식에 향토적 색채의 시어와 높임법의 문장를 구사함으로써 더욱 절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연은 춘향이가 ‘그’를 만나기 이전의 심리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였으며,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 초록의 강 물결 /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다고 함으로써 사랑의 격정에 휩싸이기 이전의 평화롭던 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연은 ‘그’를 만난 이후, ‘미친 회오리바람’과 ‘벼랑의 폭포’와 ‘소나기비’와 같은 열정에 빠진 자신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3연은 이별의 아픔을 겪은 후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 훠 ― ㄴ한 내 마음에’는 아직 ‘마지막 타는 노을’같이 뜨거운 사랑이 타오르고 있지만, 재회를 기다리는 그 하루하루는 마치 ‘기인 밤’과 같다는 화자의 애절한 고백을 통해 이별을 겪은 후의 아픔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떠나간 것은 단순히 ‘그’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신령님께서 데리고 간 것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해 준다. 4연은, 화자가 ‘도라지꽃 같은 사랑’을 지키며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로 표상된 재회의 날을 기다리겠다는 화자의 굳은 결의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결의는 ‘정절(貞節)’이나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와 같은 봉건적 윤리관의 반영이 아닌,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춘향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춘향 유문(春香遺文)
― 춘향(春香)의 말․3
- 서정주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 도솔천(兜率天) : 욕계 육천(欲界六天) 가운데 넷째 하늘.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유교의 전통적인 덕목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로서 ‘유서(遺書)’라기보다는 이 도령과 마주 보고 하는 대화의 형태로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월매, 향단과 함께 감옥을 찾아간 이 도령이 춘향을 상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인은 이 내용들을 모티브로 삼았음직하다. 그러나 이 는 역시 지나치게 춘향전에 얽매이는 것이고, 수없이 많은 열녀설화를 남긴 우리의 고전적 여인네의 단호하고도 매서운, 그러면서도 불같이 뜨거운 애정과 정절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된 고전미 넘치는 시로서 감상되어야 할 것이다.
▶ 성격 : 낭만적, 이상적, 동양적, 불교적
▶ 심상 : 한국적, 고전적, 시각적, 동적 심상
▶ 표현 : 부드러운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움 속에 강렬한 영상을 담고 있음.
▶ 운율 : 4음보를 바탕으로 한 내재율.
▶ 어조 : 여성적이며 섬세한 어조
▶ 구성 : ① 도련님과의 작별(제1,2연)
② 죽어서도 도련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제3-5연)
▶ 제재 : 옥중의 유언
▶ 주제 :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 (여인의 변함없는 사랑과 정절)
<연구 문제>
1. 제3연의 저승과 춘향의 사랑의 비교는 어법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이른바 ‘시적 허용’이라 볼 수 있겠는데, 시인이 이런 표현을 구사한 이유를 15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결론부터 말하면 춘향의 사랑이 깊고 커서 죽음조차 춘향의 사랑을 가로막는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시인의 표현 욕구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어법에 맞게 표현한다면 ‘춘향의 사랑은 저승까지의 거리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고 또 크고 깊습니다.’로 우둔하고 산문적인 표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시에 나타난 배경 사상 두 가지를, 근거를 들어 5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한국적인 여인의 정절이라는 유교 사상을 표면에, 불교적인 윤회 사상을 심층에 깔고 있다.
3. 춘향이 도련님을 보고 하필 ‘나무’ 같이 늘 안녕히 계시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5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춘향이 불교적 전생(轉生) 끝에 ‘소나기’가 되어 이승으로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4. 이 시에서 춘향이 죽어서의 변신을 나타낸 말들을 모두 찾아 쓰라. <모범답> 검은 물, 구름, 소나기
<감상의 길잡이>
춘향이 그처럼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화(詩化)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인간의 영원한 시적 주제라는 보편적인 이유 외에도 춘향의 영상이 한국인에게는 친숙한 것이라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있어서 춘향은 시대적 제약 속에 있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서보다는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화신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감상할 춘향 유문도 시대적인 특수성이 희석된 사랑의 노래다. 유언(遺言) 형식으로 쓰여진 이 시는, 현실 속에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은 한 여인의 독백을 통해 ‘저승’을 비춰 준다.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은 제3연의 ‘저승’이라는 시어와 만나서, 그것이 예사로운 인사말이 아님을 알게 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오히려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저승이 자신의 사랑보다 먼 ‘딴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죽음의 세계조차도 그의 사랑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춘향의 이 도령에 대한 사랑이 생사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극대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시적 전개를 가능케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있는 이 시의 상상력은 윤회 사상(輪廻思想)에 의존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물→구름→소나기’로 연결되는 자연스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죽어서 지옥(천 길 땅 밑)에 떨어져 썩은 ‘물’로 흐르거나, 수증기로 증발하여 극락(도솔천의 하늘)에 올라가 ‘구름’으로 날더라도, 언젠가는 ‘소나기’가 되어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다. 시인의 이러한 윤회관이 전혀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고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자연 현상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 국화 옆에서가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일견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자연이나 우주의 현상 ―소쩍새 울음, 천둥, 무서리― 이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듯이, 춘향 유문의 자연 현상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춘향은 도련님에게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 늘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한다. 왜 하필이면 ‘나무’같이 있으라고 했을까? 그것은 춘향이 불교적 전생(轉生) 끝에 ‘소나기’가 되어 이승으로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소나기’가 ‘나무’를 적셔 늘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이 시에는 그들의 사랑이 늘 풍성하고 싱싱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娑蘇) 단장(斷章)
- 서정주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사조(思潮) 창간호, 1958.6)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사소 설화’를 변용하여 구도자(求道者)의 신앙적 염원인 영원한 절대 세계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사소’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神仙修行)을 떠난 일이 있는데, 이 시는 집을 떠나기 전, 집 꽃밭에서의 독백을 시화한 것으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깊이 인식한 ‘사소’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부활을 갈망하는 구도적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전 14행의 단연시로 내용상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래가 좋기는 가장 좋아도 그 소리는 구름까지 갔다가는 돌아올 수밖에 없고, 힘차게 달리는 말도 바다에 이르면 멎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 화자, 즉 ‘사소’가 산돼지나 산새들에게 입맛을 잃어버렸다는 독백을 통하여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다. 2단락은 7~11행으로 자연과 동화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적 이미지인 ‘개벽하는 꽃’은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이 반복됨으로써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꽃’으로 상징된 자연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에 합일되려 하지만, 결국은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인 자신의 한계만을 자각할 뿐이다. 다시 말해, 신선이 되고 싶어하는 ‘사소’는 열심히 선(仙)의 세계를 꿈꾸고 있으나, 그 때마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3단락은 12~14행으로 영원의 세계를 갈망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벼락’과 ‘해일’은 영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화자가 극복해야 할 온갖 고통이나 형벌을 의미하며,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주술적 성격의 반복되어 나타나는 절규 속에는 영원의 세계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대지적 존재를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상승하고자 하는 화자의 희원(希願)이자, 결국은 이 시의 작자, 미당의 희원이기도 하다.
[서정주의 시집 소개]
소년같은 열정의 83세 `떠돌이시인'
미당 서정주(83) 시인이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시와 시학사)를 펴냈다.
미당은 시집 제목에 대해 "내 나이가 올해 여든 셋인데다, 아직도 철이 덜든 소년 그대로고, 또 도도 모자라는 떠돌이 상태임을 두루 요량해서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미당은 이번 시집을 통해 유년으로 회상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여전히 소년같은 열정을 잃지 않은 노년의 근황을 구수하게 풀어놓는다.
'그 큰 황소가/언제부터 우리집에 와서 살고있었는지/그것까지는 모르지만,/ 내 어린눈에 처음 뜨인 이 나그네는'('우리집의 큰 황소' 부분)같은 시행들은 분명히 소년 시절의 회상이지만 그 시행들 사이 에는 가늘게 눈뜬 노시인의 무언의 바람이 스며있다.
시인이 황소를 '나그네'라고 부르는 까닭은 세속적 생명 전체를 윤회 전생의 무한 궤도에 던져진 '떠돌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끝에서 노시인은 그 황소가 이승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끝내 제 육신을 식용으로 바쳤으니, 지금쯤 저승에서 당연히 신선이 됐으리라고 믿는다. 노시인의 그같은 기원은 생명 현상을 죽음 너머 의 공간까지 확대하려는 해탈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 거대한 상상력은 현세적 삶에 대한 달관과 여유를 토대로 삼는 데, 한적한 노년의 하루를 그린 시에서 그런 풍경이 맑게 빛난다.
'아내 손톱/말쑥히 깎아주고,/ 난초/ 물 주고 나서,//무심코/ 눈 주 어 보는/초가을날의/감 익는 햇살이여.// 도로아미타불의/도로아미타 불의/그득히 빛나는/내 햇살이여'('도로아미타불의 내 햇살' 전문).
노시인의 근황 시편이라고 해서 한가로운 일상에 매몰된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가장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로 생태계 파괴로 인해 우 리가 잃어가고 있는 생명계의 아름다움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가을 논에서/노랗게 여문 볏모개들이/좀 무겁다고 머리숙이면/좋지 뭘 그 러냐!고/ 메뚜기들은 톡톡 튀기며 날고/그 메뚜기들의/튀어나는 힘의 등쌀에/ 논고랑의 새끼 붕어들은/후다닥/헤엄쳐 다니고/그게 좋아서/ 논바닥의 참게들이…'('논 가의 가을'부분).
평이한 이야기체 문장들이 자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향연 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미당은 우리의 일상적 시점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 생명의 미시적 세계를 일상어로 그려내는 대가의 솜씨 를 보여준다.
시인-평론가 오세영씨는 해설을 통해 "이 시집은 '질마새 신화' 이후 미당이 일관되게 보여준 이야기체와 산문체의 적극적 도입, 그 리고 성스런 세계로부터 속된 세계(일상현실)로의 하강을 보여준다" 고 지적했다. 평론가 김재홍씨도 "이번 시집을 통해 미당은 순간에서 영원으로, 영원에서 순간으로 영겁회귀 또는 원성의 시학을 완성해내고 있는 것" 이라고 말했다. <이준호기자>
해바라기 3
- 설정식
해바라기는 차라리 견디기 위하야
해바라기는 차라리 믿음을 위하야
너희들의 미래(未來)를 건지기 위하야
무심(無心)한 태양(太陽)이
사슴의 목을 말리고
수풀에 불을 질르고
바다 천심(千尋)을 짜게 하여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너의들의 타락(墮落)을 거부(拒否)하였다
모든 꽃이 아름다운 십자가(十字架)에 죽은 날
모든 열매가 여지(餘地)없이 유린을 당한 날
그들이 모다 원죄(原罪)로 돌아간 날
무도(無道)한 태양(太陽)이
인간(人間) 우에 군림(君臨)하고
인간(人間)은 또 인간(人間) 우에 개가(凱歌)를 부르고
이기랴든 멍에냐 어깨마저 꺼저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태양(太陽)에 필적(匹敵)하였다
(시집 종, 1947.4)
<감상의 길잡이>
해방 직후 소설가, 시인, 번역가로 활동한 설정식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이채롭고 문제적인 존재이다. 일찍이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한 후, 중국 체험을 하고, 다시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미국문학 전공자로서 수석을 다투던 설정식은 매우 드물게 직접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세대 지식인에 해당한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으로 활동하게 된 사실을 두고, 스스로 “나는 미국인이 나를 쌍수로 들어 받아들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자부심이 가득하였던 설정식은, 그러나 문학인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는 의문의 존재이기도 하다.
미군정청에 근무를 하고 있으면서도 남로당 지하 조직에 관여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적극 가담하여 외국문학부 위원장의 지위에 오른 그는, 해방 이후에만 3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하고, 6편의 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친다.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격심해지자 그는 창작을 중단, 세익스피어 연구에 몰두하고, 한때 사상 전환 기관인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6․25 전쟁 중 자진하여 인민군에 입대하여, 소좌의 계급으로 판문점 회담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1953년 남로당 일파 숙청시에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한다. 이러한 설정식의 매우 이채로운 삶은 해방공간에 처한 지식인의 문제를 가장 여실히 보여 주는 전형적인 경우라 할 만하다. 즉, 스스로 선택한 미국 유학의 길과 그로 인한 미군정청 근무, 그리고는 다시 “(미국이) 자기네 군사 기지를 가진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군사 기지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고 하여 스스로 사직, 반미․친공의 길을 선택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해방공간의 지식인의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해방 이후 1946년까지 창작한 그의 시는 제1시집 종 속에 전부 수록되어 있고, 1947년에 쓴 것은 포도에, 그리고 1948년 초기 발표분은 제신의 분노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시작(詩作)은 대략 세 단계로 설명된다. 그 첫째는 시집 종과 포도에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태양’의 이미지와 관련된 <해바라기> 연작이고, 둘째는 <해바라기> 연작에서 보이는 새 역사 창조의 이념이 한 단계 높은 상징성을 획득하고 있는 <종>의 세계, 세 번째는 시인의 목소리를 작중 화자의 목소리로 일치시켜 민족사적 과제를 직접 제시하는 예언자적 목소리의 <제신의 분노>의 세계이다.
<해바라기 3>은, 그의 <해바라기> 연작 중에서도 새 역사의 이념으로서의 ‘해바라기’와 천도(天道)의 표상으로서의 ‘태양’과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즉, <해바라기 1>과 <해바라기 2>에서는 해바라기가 곧 태양의 표상으로서 새 역사의 초석을 세울 수 있는 일차적인 힘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해바라기 3>에서는 ‘호올로 / 태양에 필적’하여 역사적 전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 주체로 자리잡는다고 볼 수 있다.
‘태양’은 ‘사슴의 목을 말리고 / 수풀에 불을 지르고/ 바다 천심을 짜게’ 만드는 ‘무도한’ 존재로서 ‘인간 우에 군림’한다. 이러한 태양 아래에서 ‘인간은 또 인간 우에 개가를 부르’는 타락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모든 꽃이 아름다운 십자가에 속은 날 / 모든 열매가 여지없이 유린을 당한 날 / 그들이 보다 원죄로 돌아간 날’로 규정한다. 이러한 현실 아래에서, 종래 태양을 따라 돌면서 태양을 향하는 바로 그 속성으로 인하여 태양의 표상으로 상징되던 ‘해바라기’는, ‘차라리 견디기 위하야’, ‘차라리 믿음을 위하야’,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건지기 위하야’ ‘호올로 / 태양에 필적’하는 존재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바라기’의 이미지의 전환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이다. 즉, ‘태양에 호올로 / 필적하는’ ‘해바라기’를 통해서 시인은, 새 역사 창조, 새 나라 창조에 대한 의지와 사랑을 강조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그 비유와 언어감각은 낯설고 거칠다. 그만큼 그의 시작(詩作) 행위는 극히 단순한 이념의 열정적 표출로 귀결된다.
심훈(沈薰)論 1
사실 이광수나 현상윤 등의 단편소설에서 시작된 한국의 근대소설은 망국의 한이 서린 식민지 상황에서 시작된다. 국토와 주권을 상실한 현실에 대한 순응과 변혁의 갈등 속에서, 한민족은 탄압과 수탈 속에서 굶주리고, 고향을 버리고 북간도로 떠나는 민족적 비극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식민지 상황에서 많은 작가들은 민족의 광복과 현실 극복을 위하여, 사회적 자아의 인지와 성취를 위하여, 현실을 조명하고 그 아픔을 극복하려는 헌신적 삶을 창조하는 경향을 띠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된다.
심훈도 역시 19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고, <탈춤>이나 <상록수>와 같은 작품으로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저항의식을 형상화하고, <영원의 미소>와 <직녀성>과 같은 작품으로 지난날의 생활윤리와 이제의 그것의 갈등 속에서 인간성을 발양(發揚)하려는 변혁적 의식을 보여준다.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노래한 <그날이 오면>에 집약되어 있는 절규는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오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메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기어
커다란 북(鼓)을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시원치 않아 가죽이라도 벗겨 북을 만들어 마구 행렬 앞에 치고 싶은 그날 ―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절규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나타난 이 시를 보아도 심훈의 지향의식이 무엇인가를 짐작케 한다. 심훈은 이런 의지로 제일고보 재학 시절 19세의 나이로 만세를 부르고 옥고를 치를 때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몰래 내보낸 사연은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려는 집요한 의지가 피맺혀 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요.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한 몇만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사나이외다.
이 얼마나 처절한 부르짓음이며, 자유를 위한 절규인가.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서울 노량진 현 수도국 자리에서 조상 숭배의 관념이 철저한 부 심상정과 파평 윤씨 사이에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조선조 말 중류 가정의 출생으로 온후한 성품을 지녔고 뛰어난 재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심훈은 본명은 대섭이고 소년 시절에는 금강생, 중국 유학 때는 백랑(白浪), 1920년 이후에 훈(薰) 이라고 썼다. 1915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후의 경기중)에 입학하여, 작곡가 윤극영과 은행가 윤기동과 함께 미남 행렬 속에서 명석함을 자랑했다. 1917년 3월 외족이며, 명문인 후작 이해승의 누이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심훈이 해영(海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3․1운동 때(제일고보 4학년, 19세 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3월 5일 피검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변장을 하고(안경을 쓰기 시작) 상해를 거쳐 항주에 이르러 지강(之江)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이동녕과 이시영 등과 알게 되고 귀국한 후 안석주 등과 교우하여 극우회를 만들기도 했다.
심훈은 손이 없어 이해영과 헤어지고 1924년 이후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나라 없는 울분을 술로 달랬으나, 아무리 기생이 구애를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아 호탕하고 멋진 미남의 무관심에 기생들은 가슴만 불태웠다.
1930년 12월 24일, 심훈은 19세의 무희인 안정옥과 혼인하여, <독백> <그날이 오면> 등을 발표하다가 장남 재건과 같이 충남 당진에 내려가 창작에 전념하게 된다. 1933년 장편 <영원의 미소>를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를 발표한다. 이해영에 대한 회고 작품이라고 하는 <직녀성>을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쓴 <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백원을 받아 그 중에서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1936년 9월 6일 대학병원에서 급서(急逝)하여 심훈의 문학은 더 펼치지 못하고 만다. 시집 <그날이 오면>이 일제의 검열로 출간되지 못하고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동방의 애인> <불사조>가 걸열로 중단되고 말아 미완성으로 끝난다.
<상록수>(1935), <황공의 최후>(1933), <탈춤>(1926) 등은 심훈의 소설세계를 조명할 수 있고, 장편과 단편, 영화소설이란 심훈의 소설의 양식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상록수>는 경성농업을 졸업하고 진학하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일으킨 장질 심재영을 모델로 하여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최용신과의 허구적 로맨스를 만들어 씌어진 소설이다. <상록수>에는 심재영이 박동혁으로 최용신이 채영신으로 주인공이 되어 있고, 심재영이 한 ‘공동경작회’는 ‘농우회’로 샘골이 청석골로 바뀌어져 있으며, 심재영은 작품과의 인연으로 최용신의 무덤을 찾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상록수>는 당시 브나로드 운동의 선봉에 서서 농촌활동을 하는 박동혁과 채영신의 헌신적인 봉사와 둘 사이에 얽혀지는 사랑을 내용으로 한 소설이다. 청석골을 다듬어지고 가꾸어진 성취된 사회로 만들려는 지향적 욕구와 식민지 치하라는 존재적 현실 사이의 갈등과 그 비극적인 현실을 그린 농민소설이다.
또한, <황공의 최후>는 직업을 잃고 시골 삼촌집에 온 ‘나’라는 청년이 애지중지하면서 기른,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한 황공이 닭과 같은 짐승을 잡아 먹는 것으로 하여 미움을 사던 중 마을사람들에 의해 보신탕용으로 죽는 처참한 최후를 본다는 내용으로 무엇인가 상징적인 내용이 담긴 단편이다.
<탈춤>은 최초의 영화소설로서, 헤경이란 한 여성을 둘러싸고 서로 사랑하는 일영, 처자가 있으면서 여러 여성을 섭렵하고 혜경이를 탐내는 지주의 아들 준상, 헤경이와 일영의 사랑을 성취시키려는 흥열의 인물이 진실한 사랑과 탐욕적인 사랑의 상극 속에서 준상의 위선적인 결혼식에서의 희극적인 결말과 혜경의 죽음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보여주는 애정 삼각의 멜로드라마적인 면에서도 인물의 갈등이 심화된 작품이다. 또한 혜경의 아버지가 준상이네 집의 소작인이라는 것과 지주의 아들인 준상이 소작인인 헤경의 아버지를 협박하여 헤경이를 준상의 집에 머물게 하여 야욕을 채우려는 장치나, 준상의 처남 아이를 낳는 난심이, 준상의 아들을 데리고 온 일영, 그리고 이런 사실을 매도하는 흥열, 이 혼인식장에서 고하는 희극적이기도 한 종말은 이 영화소설의 절정을 이루어 현실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삽화로 당시의 배우 나운규, 김정숙, 주삼손 등이 매장면에서 실연(實演)하는 사진을 넣은 것도 특이하다. 이 <탈춤>은 심훈이 영화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훈의 소설은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첫째는 존재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행동성이 강력하게 나타나 있다. 식민지 치하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는 현실, 낡은 관념과 관습이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동력을 저해하는 현실을 초극하여 새로운 내일을 지향하려는 정신이 투철하게 나타나 있다. <상록수>에서 여러 촌로(村老)의 거부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청석골을 낙후되고 고질화된 농촌에서 보다 활기차고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로서의 한 이상향으로 변혁시키기 위하여 채영신과 박동혁이 각기 청석골과 한곡리에서 농우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운영하여 ‘갱생의 광명은 농촌으로부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마라 !’ 등의 기치 밑에서 낡은 관습에 젖어 잠자고 있는 농촌을 일깨워 새로운, 갱생되고 다 같이 웃고 살 수 있는 한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다. 안에서의 관습에 의한 방해와 밖에서의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면서 그날을 성취하려는 집요한 의지와 행동이 보인다. 또한 <탈춤>에서 소작인의 딸을 애욕의 대상으로 구사하려는 낡은 의식과 사랑을 기저로 한 내일에의 지향을 위한 갈등이 행동화하여 나타나 있는 것은 그런 경향을 말한다. <영원의 미소>에서 서로 사랑하는 수영과 계숙은 현실적인 절망의 극한 상황속에서도 지주의 유혹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결별하여 빈손으로 갯벌을 일군 보리밭에서 힘찬 내일을 그리면서 미소를 짓는 것도 바로 현실 극복의 자세이다. <그날이 오면>의 시에 나타나 있는 조국의 광복과 청석골을 위시한 농촌의 변혁을 실현하려는 심훈의 소설에선 역사적 현실을 인식한 세계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행동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변혁적 의지의 발로 이며, 낙원 추구 사상의 발로이기도 하다.
둘째는 사랑을 기저로 한 인간 애정이 발현되어 있다. 역사적 현실의 인지에서 인간의 본질을 외면한 표면적인 현실의 인식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심훈은 사랑을 비롯한 인간의 본질의 인지와 그 역동에 의한 현실극복의 지표를 추구한다. <상록수>에서 채영신과 박동혁의 사랑과 신앙에 의한 성취적 활력소나 청석골의 젊은이들의 인간에 대한 생활의 성숙을 비롯하여, <영원의 미소>의 수영과 계숙의 사랑을 근저로 한 현실 극복의 집요한 자세, 그리고 <탈춤>의 일영과 헤경의 현실의 굴곡 속에서 성숙하려는 사랑을 모태로 한 준상의 봉건적 잔재의식의 극복과 흥열의 의사적(義士的)인 구제, <황공의 최후>에서 황공에 대한 애정 등이 다 사랑을 기저로 한 인간애의 발현이다.
셋째는 장르의 확대에 의한 표현영역의 확대와 일탈이다. 심훈은 주로 소설을 쓰면서 저항정신이 나타나 있는 시집 <그날이 오면>의 시, <탈춤>의 영화소설 등 장르의 확대에 의해 그의 문학적 영역의 다양성과 확대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은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어 그의 기법과 문체는 변혁보다는 영역의 확대라는 데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이 심훈은 식민지 치하란 역사적 현실에서 존재현실을 극복하려는 행동성을, 사랑을 기저로 한 인간애의 정신을 박동혁으로 하여 장르의 확대에 의해 <상록수> <황공의 최후> <탈춤> 등에 강력히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심훈을 1930년대 소설에서 사회의식에 의한 현실과 지향적 성취의 갈등을 부각하고 삶의 지표를 제시하려는 경향의 기수라고 할 만하다.
그 날이 오면
- 심 훈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 |
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사, 오호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기어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 인경(人磬) : 통행 금지를 알리기 위해 설치해서 치던 큰 종. 인정(人定).
* 육조(六曹) : 옛날 조정의 여섯 관아(官衙)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시적 균형성을 잃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민족 해방을 향한 강렬한 애국적 열정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어느 시인보다도 뜨겁게 느껴진다.
이 시는 대응하는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연이 ‘그 날이 오면’이라는 가정적 미래로 시작하는 대신 제2연은 ‘그 날이 와서’의 가정적 현재로 되어 있음에 유의하자. 한편 제1연의 ‘삼각산’이 제2연에서 ‘육조’로 변화되고, 제1연의 ‘인경’이 제2연에서 ‘북’으로 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제1연에서 제2연으로 넘어가면서 시상이 크게 진전되지는 않는다.
▶성격 : 저항적, 희생적, 의지적, 역동적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심상
▶특징 : ① 미래 지향적, 극한적인 시어의 사용
② 경어의 종결 어법
▶어조 : 남성적 어조, 의기가 넘치는 강건한 어조, 호소력 있는 어조
▶구성 : 병렬식 구성
① 그 날이 오면 죽어도 한이 없음.(제1연)
② 그 날이 와서 기쁨의 우렁찬 소리를 듣기만 하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음.(제2연)
▶제재 : 조국 광복
▶주제 : 조국 광복에의 간절한 염원
<연구 문제>
1. ㉠은 (1)화자의 어떤 내면 상태의 표현인지를 70자 내외로 설명하고, (2)그 표현법은 무엇인지 밝혀라.
☞ (1)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이 힘차고 생동감 있게 드러나 있으며, 조국 산천도 해방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살아 움직일 듯 민족 모두와 어울릴 것이다.
(2) 대유법, 활유법
2. 이 시에서
까마귀 |
는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인지 25자 정도로 답하
☞ 조국 광복을 위한 자기 희생의 감정 이입물이다.
3. ㉡, ㉣의 소리의 상징적 의미를 간단한 어구로 답하라.
☞ 역사와 민족이 부활하는 소리.(조국 광복을 맞는 기쁨의 소리, 조국 해방을 환호하는 소리, 광복을 알리는 소리)
4. 이 시에서 ‘울리오리다’, ‘남으로리까’, ‘감겠소이다’와 같은 경어체의 종결 어법이 갖는 효과를 화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한 문장으로 답하라.
☞ 화자는 이 시의 제재인 조국 광복을 절대적이고 숭고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화자의 의지를 절대적이고 신성하게 하여 준다.(화자의 조국 광복을 위한 아낌 없는 희생과 정성을 호소력 있게 드러내 준다.)
4. ㉢에서 연상되는 4자의 한자 성어(漢字成語)를 쓰라.
☞ 殺身成仁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장편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쓴 희귀한 저항시다. C. M. 바우라는 시와 정치(Poetry and Politics)에서이 시를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라고 평가하였다.
전체의 시상은 ‘그 날’을 염원하는 격정(激情)과 환희(歡喜)의 정서를 형상화해 보이고 있다. 이 시는 서로 대응하는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날이 오면’이 ‘그 날이 와서’와 대응하고, ‘삼각산’이 ‘육조’와 대응하며, ‘인경’이 ‘북’과 대응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나치게 대응 관계를 염두에 둔 탓인지 제1연에서 제2연으로 넘어가면서 시상의 진전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제1연은 ‘그 날이 오면’이라는 가정적 미래로 시작하고 있다. 곧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기꺼이 ‘나’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두운 식민지 치하에서 자유를 속박 당하는 삶이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절실한 부르짖음이 극한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제2연은 ‘그 날이 와서’라는 가정적 현재로 시상의 변화를 주면서 제1연에서보다 더욱 처절하고 전율감마저 느끼게 하는 부르짖음이 노래되고 있다. 그만큼 마음에 맺힌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은 절실한 것이다.
만가(輓歌)
- 심 훈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수의(壽衣)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 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 이하 6행 삭제 )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감상의 길잡이>
총독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이는 6행을 끝내 복원시키지 못하고 심훈은 1936년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어서야 감옥을 나온 어느 애국 투사의 장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시에서 동지들이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屍身)을 덮어 주는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저승길까지 따라붙는 일본 경찰 때문에 죽은 이를 애도하는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고 장지(葬地)로 향하는 ‘동지’들을 ‘산 송장’이라 지칭하는 시적 화자의 어조에는 일제에 대한 분노와 함께 깊은 회한(悔恨)이 담겨 있다. 살아 남아 죽은 이의 장례를 치루어 주는 동지들까지 산 송장이라 생각하는 그의 의식 속에는 삶과 죽음이 그만큼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고, 일제 치하에서 누리는 식민지 삶이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송장과 같다는 투철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궂은 비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 가등(街燈)’을 따라 차가운 시신을 메고, 아무 ‘말 없이 무학재를 넘어 철벅철벅 걷던’ 심훈은,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입술을 깨물고 조국 해방의 그 날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박꽃
-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 박꽃 : 7~8월에 피는 꽃. 낮에는 시들었다가 밤에 핀다.
* 담비 : 야행성 동물(활동시간 10~12시)
<맥락 읽기>
1. 하루 중 어느 때를 노래한 시일까요. ☞ 한밤중요
2. 한밤중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 잠들고, 담비들은 제집으로 돌아와 있다.
3. 이 시에 묘사된 밤의 풍경을 머리 속에 그려 봅시다.
☞ 달빛 고요한 밤,박꽃이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음,일체의 잡소리 없이 물소리만 들린다.
3-1. 여기서 박꽃이 주는 이미지는?
☞ 깨끗해요. 순수해요.
4. 그렇다면 박꽃이 피지 않은 낮의 모습은 어떨까?
☞ 사람이 벌떼 같이 왱왱거리며, 침을 드러내고, 뜬소믄을 수근대는 모습
4-1. 여기서 낮이 주는 이미지는?
☞ 소란스럽고 시끄러워요, 순수하지 않아요.
4-2. 이렇게 본다면 박꽃이 피는 밤의 정경과 낮의 세계가 서로 대조되어 있다는 걸 알겠네.
5.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는 무슨 뜻일까?
☞ 삼경의 깊은 밤이요, 박꽃이 피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요.
6. 그런데 시인은 왜 이 구절에서 ‘세 걸음’이란 표현을 썼을까?
☞ ① ‘세’는 삼경, 즉 깊은 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② 박꽃과 박꽃 주위의 정경을 캄캄한 밤과 대비시켜 박꽃의 하얌을 강조
③ 박꽃은 한밤중에 피므로 박꽃이 피는 동안은 캄캄한 밤이 계속된다는 뜻인데요.
7.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 순수한 자연의 본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 낮동안의 인간들의 소란스러움, 미움과 증오, 뜬소문 모두가 자연의 신비한 힘에 동화되어서
8. 한밤중에 옥상에 올라가 달빛 아래 잠든 도시를 바라보자.
9. 등산이나 야외캠프에서 본 밤에 묻힌 자연을 떠 올려 보자.
목숨
- 申瞳集
목숨은 때 묻었나.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주검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절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 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할 수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시집「抒情의 流刑」(195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한국 전쟁의 비극적 경험을 우주관을 배경으로 하여 드러낸 작품으로 인간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한 시이다.
3행을 단위로 한, 7연의 길이 속에 면면한 사고와 긴박한 서정을 전개시키고 있다. 전쟁을 겪고 나면 죽은 사람이 항상 떠오르기 마련이고, 또한 목숨의 존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시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은 사람의 시점에서 일회적 삶의 애상과 귀중함을 노래하였다.
▶ 시작(詩作) 배경
6.25로 인하여 소중한 생명이 하잘것 없이 죽어가는 현실을 바탕으로 삶의 의욕과 보람 및 그 조건을 성찰하고, 생명의 영원한 재생을 읊음.
▶ 성격 : 명상적, 서정적, 열정적
▶ 특징 : ① 모더니즘적 수법 사용
② 화자의 호소력과 강렬한 서정적 문체가 돋보임,
▶ 구성 : ① 절망과 죽음의 상황(제1연) ―본연의 모습을 잃은 목숨
② 삶을 확대하려는 소망(제2,3연) ―삶의 의욕
③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제4,5연) ―삶의 조건 성찰
④ 목숨의 영원한 재생(제6,7연) ―목숨의 영원성
▶ 제재 : 목숨.(전란의 비극적 상황)
▶ 주제 : 삶의 의욕과 목숨의 영원성.(삶의 의욕과 목숨의 영원성 추구)
▶ 시어의 상징 의미
* 현암 - 아득하고 깊숙한 어둠.
* 목숨 - 본연의 모습
* 별빛 - 삶의 소망
* 체온에 절어 든 - 온정에 스미고 절어든
* 백조 - 순수한 본연의 내 영혼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때묻은 목숨에 대조되는, 생명 본래의 순수성에 대한 동경의 이미지를 지닌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나의 백조
2. ㉠에 대한 화자의 감정은 어떠한지 본문의 구절을 이용하여 100자 내외로 설명하라.
<모범답> ㉠은 ‘따뜻이 체온에 절어 든 이름들’이다. 화자가 ‘산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고 한 표현 속에서 연민의 감정을, ‘죽은 자는 산 자를 고발하라’는 표현 속에서 죄의식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3. 화자가 ㉡의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170-18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화자는 많은 생명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상황을 통해 죽은 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가진다. 화자는 생명 본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통해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는 깨달음에 도달하는데, 이 표현 속에는 전쟁을 통한 목숨의 비극적 소멸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생존한 사람으로서의 죄의식이 함께 투영되어 있다.
<감상의 길잡이>
신동집 시인은 방대한 작품의 양과 끈질긴 시심의 전개가 돋보이는 시인이다. 그의 시의 모색과 전개는 우리시가 표현성을 증대해 온 과정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는 문체와 소재면의 끈질긴 실험을 통해 많은 작품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 시는 그의 시 세계가 잘 드러난 초기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삶과 죽음의 절대적 차이를 실감시킨 시대고(時代苦), 특히 한국 전쟁에 대한 애상을 노래한 작품이다.
제1연에서는 목숨의 황폐함을 노래했다.
제2연에서는 삶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었다.
제3연에서는 우주론적 명상을 통해 생명의 귀중함을 노래했다. ‘한 개의 별빛’이라는 표현 속에는 광막한 우주 속에 실존하는 개인적 생명의 귀중함이 암시되어 있다.
제4연에서는 ‘없어진 이름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드러낸다.
제5연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대조를 통해 목숨의 비극적 조건에 대한 감회를 드러낸다. 목숨의 비극적 소멸에 대한 연민과 분노의 감정, 살아남은 이의 죄의식이 나타나 있다. 생명 본연의 가치를 긍정하는 시인은 비극적 시대 상황을 통해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제6,7연에서는 앞에서 노래한 삶의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삶의 본연의 가치를 옹호하려는 굳센 결의를 드러낸다. 시간의 흐름 속에 설정한 행로의 이미지를 통해 한번뿐인 삶에 대한 각오와 순수한 삶에의 애착을 감동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오렌지
-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거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시집 누가 묻거든, 1989)
*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오렌지라는 한 사물을 소재로 하여,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매우 지적인 시.
2. 시상의 전개
* 제1연 : 미지(未知)의 오렌지
* 제2연 : 본질을 외면하는 현실
* 제3연 : 본질 인식에 대한 그릇된 생각
* 제4연 : 본질 인식의 어려움
* 제5연 :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
* 제6연 : 본질 인식의 희망
3. 주제 : 삶의 본질적 의미의 추구
어떤 사람
- 申瞳集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메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메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시집「빈 콜라병」(1969)---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이 시는 전인류를 하나로 느끼는 세계주의적 친교의 인정을 담은 작품이며, 인간은 만남과 헤어짐, 헤어짐과 만남의 연속 속에서 서로간에 공감과 조화를 이루어 삶의 참의미를 깨달을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2. 시상(詩想)의 전개
* 제1연 -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구 저쪽의 사람
* 제2연 - 언제나 만났다 헤어지는 그의 모습
3. 주제 : 인간에게서 느끼는 친화(親和)의 감정
4. 소재 : 어떤 사람
5. 성격 : 문명 비판적, 주지적.
송신(送信)
- 申瞳集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시집 송신, 1973)
* 바이없는 : 어쩔 수 없는.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의 제1연에서는 귀뚜라미가 중심인 송신(送信)의 상태를, 제2연에서는 가을의 사람이 중심인 수신(受信) 상태를 각각 노래하고 있다.
‘한로(寒露)’라는 절기는 찬 이슬이 내리는 무렵인 음력 10월 8일 경이며, 따라서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은 깊은 가을이다.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인 ‘가을’은 「쇠잔, 죽음」의 심상을 지닌다.
▶ 성격 : 관념적, 묘사적
▶ 심상 : 청각적 심상(→바람, 귀뚜라미)
▶ 표현 : 은유의 표현 기교 사용
▶ 특징 : 명상적 태도로 존재의 의미 추구
▶ 구성 : ① 귀뚜리의 송신(제1연)
② 가을 사람의 수신(제2연)
▶ 제재 : 가을.(귀뚜리, 사람)
▶ 주제 : 시간의 순환과 죽음.(유한한 생명의 비애)
<연구 문제>
1. ‘가을’의 이미지가 이 시와 가장 가까운 것은?
<모범답> ③
①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②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녑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③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온저.
④ 가을 바람이 해조같이 불어와서 / 울 안에 코스모스가 구름처럼 쌓였어도 / 호접(蝴蝶)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다.
2. ㉠이 시 전체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100자 정도로 설명하라.
<모범답> ㉠은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이 ‘깊은 가을’임을 드러낸다. 이는 죽음, 조락의 이미지를 갖는데, 이 시의 주제인 ‘유한한 생명의 비애’를 형상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3. ㉡은 어떤 사람을 뜻하는지 본문의 구절을 이용하여 근거를 밝히고 120자 내외로 설명하라.
<모범답> 귀뚜리의 송신(죽음의 신호)을 듣고는 ‘일손을 놓고 / 한동안 멍하니 잠기고 있다.’는 것은 삶의 종말, 죽음을 예감하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은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노인’ 정도라 할 수 있다.
4. ㉢에 나타난 의미와 느낌을 3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유현(幽玄)함과 깊음, 그러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동반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전달의 양자 관계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시이다.
제1연에서 발신자(송신자)는 바로 가을이 깊었음을 알려주는 귀뚜리이다. 한로(깊은 가을)임을 알려주는 바람, 계절을 알려주는 귀뚜리. 그 귀뚜리는 사람의 인기척만 들어도 소리를 그치게 마련인데, 그런 귀뚜리가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한로’에 의해 드러나는 시간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깊은 가을은 마지막, 죽음, 조락(凋落)의 이미지를 갖는다. 이 시는 생명의 시효가 끝나는, 죽음이 임박해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귀뚜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슨 신호’란 곧 종말이나 죽음의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제2연에서 이런 귀뚜리의 신호를 받고 있는 사람 역시 ‘가을의 사람’이다. 특히, 인생의 황혼의 단계에 있는 노인인 것이다. 이런 노경(老境)에 이른 그는 귀뚜리의 죽음의 신호를 들으면서 일손을 놓고 망연해 한다. 귀뚜리의 송신을 매개로 멀잖은 삶의 종말을 예감했기 때문에 일손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이윽고 귀뚜리의 울음이 끝나면(생명이 끝나면) 세상에는 청자(靑瓷)의 심연 같은 적막만이 남게 된다.
이 시는 정경 묘사와 암시적 이미지를 통해 유한한 생명의 비애를 노래한 작품이다.
제1연 |
송신(送信)의 상태 |
귀뚜리(자연) |
두려워하지 않는다. |
가을 |
제2연 |
수신(受信)의 상태 |
가을의 사람(인간) |
멍하니 잠기고 있다. |
겨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