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현(香峴)
-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山)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 안 보이어, 내 마음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직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문장 5호, 1939.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1930년대 후반 우리의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는 일제가 대륙 침략의 야욕으로 만주사변, 지나사변을 일으킨 것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탄압이 심하게 가해지던 암흑기에 해당한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파악하고, 시의 화자가 저항하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시는 당시 시대적 제약 때문에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각 시어들이 상징하는 의미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성격 : 자연 친화적, 평화 지향적
▶심상 : 역동적
▶어조 : 남성적 열정의 어조
▶특징 : 상징법 사용하여 의미를 암시적으로 드러냄. 반복과 영탄으로 힘찬 율동감을 자아냄.
▶구성 : 선경 후정(先景後情)식 구성
① 암담한 현실 인식(제1연)
② 대립과 갈등의 현상(제2,3연)
③ 현상 타개의 기원(祈願)(제4연)
④ 화합과 평화의 갈망(제5연)
▶제재 : 산. (사회현실)
▶주제 : 화합과 평화의 갈망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사회상을 구분해서 한 문장으로 쓰라.
☞ ‘현재’를 약육강식의 절망적인 사회로, ‘미래’를 약자와 강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로 파악하고 있다.
2. 일제 말기의 우리 민족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는 소재를 둘 찾아 쓰라. ☞ 사슴, 산토끼
3. 이 시가 주는 힘찬 율동감은 어떤 표현법을 사용했기 때문인가? ☞ 반복법과 영탄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4. 이 시에서 다음 시의 「해」와 같은 함축적 의미를 지닌 시어를 찾아 쓰라.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고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뙤고 고은 날을 누려 보리라. <박두진, 「해」> |
☞ 화염(火焰)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1939년 정지용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된 작품으로 해방 후 발표된 「해」의 원형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해」에 비해 갈등의 양상이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직은 현실 인식이 미숙한 탓이었을까?
첫연에서 막연하게나마 화자가 현실의 암담함을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산(山)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이 안 보인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그만큼 흐리다는 뜻이겠다.
2-3연에서는 화자가 현실을 암담하게 느끼는 근거가 나타나 있다. 산과 산, 나무와 나무, 짐승과 짐승들이 서로 얽혀서 갈등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그 갈등은 아직은 폭발 직전의 고요함과 같은 ‘침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암담한 현실을 타개할 어떤 폭발적인 기세를 기다리고 있음이 제4연의 「치밀어 오를 화염」이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다. ‘화염’은 암흑과도 같은 현실을 타개할 새로운 사상이나 원리로 파악된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 화자는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는 그가 그리는 이상 세계는 조국 해방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넘어 크리스트교적 낙원의 모습까지 환기한다.
묘지송(墓地頌)
- 박두진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문장 5호, 1939.6)
<핵심 정리>
이 시의 시적 공간이 되고 있는 ‘묘지’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다하여 시신을 묻는 소멸의 공간이다. 하지만, 묘지송에서는 인간의 죽음이 상징하는 슬픔의 이미지나 허무의 관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주로 죽음과 외로움, 그리고 서러움을 긍정적 인식의 시어들로 환치(換置)함으로써 성취된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유의하며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우리의 머리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심상이나 시어들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새롭게 인간의 망연한 죽음을 형상화하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성격 : 의지적, 찬미적, 상징적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 심상
▶운율 : 각운
▶특징 : ① 전 연에 걸쳐 죽음과 생명의 역설적 표현을 통해 삶에의 강렬한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② 전반부 2연(죽음의 세계)과 후반부 2연(삶의 세계)이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③ 음성 상징어의 사용 및 규칙적인 강약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구성 : ① 기 : 시적 공간(묘지)의 묘사(제1연)
② 승 : 영원한 생명을 얻은 주검(제2연)
③ 전 : 죽음이 삶보다 행복하다는 역설(제3연)
④ 결 : 자연과 행복하게 어우러진 주검(제4연)
▶제재 : 묘지
▶주제 : 영원한 생명에의 의지와 주검에 대한 희망적인 찬양. (죽음과 허무의 극복 의지)
<연구 문제>
1. 제4연의 의성어가 주는 정서적 효과를 100자 내외로 설명하라.
☞ 맷새의 울음 소리는 독자들에게 죽음의 인식을, 어둡고 불안한 것에서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주로 청각적 심상을 통해 성취되는데, 영원한 자연의 생명력과 신생(新生)의 이미지를 추구한다.
2. 이 작품은 첫 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점점 그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거둘 수 있는 시적 효과를 200자 내외로 설명하라.
☞ 시의 리듬이란 음악적 효과를 거두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시적 의미의 흐름을 돕고 강화시키는 데도 필요하다. 마지막 4연은 앞 연의 반복을 넘어 길어진 형태를 취하는데, 이는 자신이 믿는 시적 진실과 정서가 확신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는 형태라 볼 수 있다. 정서적인 내용을 심화하고 감정을 상승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정서를 환기시키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3. ㉠은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역설적이다. 그 까닭을 100자 내외로 설명하라.
☞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죽음이 더 편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관념으로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이 이 시에서는 완전히 전도되어 있으므로 역설적이다.
<감상의 길잡이>
일반적으로, 묘지라면 음산하고 무섭고 허망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통념을 뒤집어, 묘지를 밝고 환하게 빛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검에 대한 찬미가 이 시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검에 대한 찬미가 어디서 연유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주검에 대한 찬미라면 자칫 삶의 포기를 뜻할 수도 있어, 궁극적으로 염세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시에 있어서의 주검의 찬미는 삶의 포기나 체념에 따른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삶의 폭 넓은 긍정,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제1연은 공동 묘지의 묘사이다. 무덤을 덮은 잔디를 금잔디로 미화함으로써 묘지의 음산하고 외진 느낌을 제거하고 있다.
제2연에서는 어두운 무덤 속에서 하얀 백골이 빛나고, 향기로운 시체의 냄새도 풍기리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이 함축되어 있다. 삶이 뜻 있었으므로 ‘하이얀 촉루’가 빛나고, 삶이 값졌으므로 ‘향기로운 주검’의 내가 풍긴다는 뜻이 되겠다.
제3연에서는 이 시인의 생사관이 드러나 있다. 여기 나오는 ‘주검’의 주인공은 살아서 서럽게 살다 간 사람으로 되어 있다. 살아서 서럽게 살았으니 죽어서인들 무엇이 서럽겠느냐는 뜻이지만, ‘서럽게 사는 것이’ 반드시 값어치 없는 삶은 아니라는 데 이 구절의 맛이 있다. 여기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종교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의 두 뜻을 함께 지닌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영혼의 부활을 뜻하며,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더 나은 세상의 도래를 뜻한다.
제4연은 이 시의 주제가 되는 연이다. 금잔디 사이에 할미꽃이 피었고 맷새도 우는, 봄볕이 포근한 무덤이 더 없이 따뜻하고 정겹게 그려져 있다. 거기 누워 있는 주검들은 차라리 행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의 의성어의 효과적인 활용은 주검에 생명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청산도(靑山道)
-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시집 해, 1949)
* 너멋 골 : 저 너머의 골짜기.
* 만나도질 : 만나질지도 모르는.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행 구분은 없고 연 구분만 있는 4연 구성의 산문시이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다양한 구사와 반복적 어구를 통해 형성된 유장하면서도 운치 있는 산문 율조 속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표상하는 시어들과 비관적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부정적 어사의 시어들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두진의 초기시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좌절하지 않고 시인 특유의 미래 지향적인 낙원 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특징을 시어 사용에서부터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안 오고’․‘안 불고’․‘가버린’․‘잊어버린’․‘오지 않는’ 등의 부정적 의미의 시어들이 빈번히 나타나 있는 한편, 시간적 배경도 ‘밤’․‘어둠’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생명력이 강하게 분출됨으로써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 상황을 상대적으로 상쇄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결국 ‘청산’에서 발견한 소멸과 생성으로서의 자연의 원리를 상실과 회복으로서의 역사, 인간사의 원리로 승화시킴으로써 비관적 현실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소멸과 생성의 주기적 순환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는 ‘청산’을 통해, 현실은 비록 ‘어둠’, ‘밤’과 같이 비관적이지만, 그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머지않아 ‘밝은 하늘 빛난 아침’이 찾아올 것이라는 미래 지향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소멸과 생성으로서의 자연의 원리를 표층 구조로, 상실과 회복으로서의 역사의 원리를 심층 구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주로 ‘청산’의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우뚝 솟은 푸른 산’,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 ‘숱한 나무가 무성히 우거진 산’, ‘금빛 햇살이 내려오는 산’에서 드러나듯 ‘청산’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생명력의 표상으로 제시된다. 이렇듯 자연은 소멸과 생성의 주기적 순환의 과정을 통해 영원한 생명력을 의미하게 된다. ‘철철철’은 산의 푸르름을 드러내는 표면적 의미 외에 나무의 무성함, 금빛 햇살의 순수함까지도 함축하는 복합적 의미이며, ‘둥둥’은 구름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한편, 산과 화자를 연결시켜 정중동(靜中動)의 술렁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와 같은 구절을 통해 비관적 현실의 일단을 나타내기도 한다.
2연에서는 이러한 비관적 현실 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청산의 생명력보다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제시된다.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잊어버린 하늘’과 ‘볼이 고운 사람’으로, 비관적인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줄줄줄’은 눈물과 물소리에서 비롯된 의태어로 산의 가슴과 화자의 가슴을 동일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3연에서는 비관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미래 지향적 태도가 제시된다.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에서 알 수 있듯 현실은 비관적이지만, 화자는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이 오듯, 그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것이라 믿고 있다. 이렇게 화자는 청산에서 발견한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인간사, 역사에서의 상실과 회복의 원리로 승화시킴으로써 비관적 현실을 극복하고 있다.
4연에서는 ‘너’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명되고 있다.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서 ‘혼자서 철도 없이’ ‘너’만 그리겠다는 동경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하늘
-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시집 해, 1949)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맑고 푸른 초가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샘솟는 생의 기쁨과,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경지를 연쇄의 표현 기법과 정제된 언어로써 잘 나타낸 작품이다. 박두진이 노래하는 자연은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추구하는 목가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과 일체화된 신성(神性)의 자연이다. 전 7연의 이 작품은 내용상 2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1~4연)에서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가 그 아름다움에 도취됨으로써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어 자연의 넓은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늘과 하나가 된 희열감(喜悅感)과 함께 자연의 숭고함에 대한 시인의 경건한 자세가 나타나 있다.
둘째 단락(5~7연)에서는 시상이 점차 고조되어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는 마지막 행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따가운 볕 / 초가을 햇볕으로’ 세속에 물든 자신의 육신을 씻어낸 다음, 그 깨끗해진 가슴에 절대 순수의 ‘하늘’을 가득 채워넣었을 때, 마침내 영혼은 빨갛게 익어가는 ‘능금처럼’ 성숙, 결실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하늘’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시적 자아의 세속화된 영혼을 맑게 씻어줌으로써 그의 삶을 살찌우는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박두진에게 있어 하늘은 생명의 근원이며 삶의 주재자로서, 일종의 종교적 구원의 주체요, 경외(敬畏)의 대상인 절대적 ‘하늘’로 우리 민족의 ‘경천(敬天) 사상’과 맥락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유전도(流轉圖)
― 수석열전(水石列傳)․68
- 박두진
바람과 구름이 구름과 강물이
강물과 바다가 꼬리 물고 있다.
바다가 햇살을 달빛이 번개를 노을이 강바람을 꼬리 물고 있다.
언덕과 산악, 사막과 도시, 궁전과 움막들이
있는 것은 무너지고
무너진 것들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성과 침묵이, 영화와 몰락이
횡포한 자와 비겁한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
말하고 싶은 자와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자,
아부하는 자와 바로 말하는 자,
파계자와 성도자가
천 년씩 천 번을, 만 년씩 만 번도 더
무너지며 일어서며 영겁 속에 사그러져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흐르고 있다.
노여움도, 자랑도, 오만도, 겸손도
사랑도, 미움도
아름다움과 추,
지혜와 어리석음,
쫓던 자와 쫓기던 자,
죽이던 자와 죽던 자,
총칼도, 보습도
비밀 암호도, 경서도
짐승의 뼈도, 사람의 뼈도 한데 묻혀 있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
소용돌이 소용돌이
저절로의 흐름,
침묵에서 침묵으로의 영원한 있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거기 있고 없는
해와 달, 하늘 땅이 꼬리 이어 도는
천의, 억의 영겁 천지 바람 불고 있다.
(현대문학 225호, 1973.9)
<감상의 길잡이>
6․25를 거치면서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을 현실로 옮기게 됨에 따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정서적 감수성으로부터 시작된 혜산의 시 세계는, 투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 이후에는 현실보다도 근원적인 인생 문제에 천착하여 삶의 의미나 영혼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원숙한 생에 도달한 그의 깊은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水石)’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수집한 수석에서 얻은 시적 영감을 노래한 작품으로, ‘수석’이 표상하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두루 섭렵하는 절대적인 경지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인 ‘유전도’에서 ‘유전’이란, 번뇌 때문에 생사(生死)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미망(迷妄)’의 세계를 떠도는 일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이 시의 사상적 배경이 불교의 윤회 사상임을 알게 해 준다. 연 구분이 없는 33행의 단연시인 이 작품은 내용에 따라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끊임없이 유전하는 천지 자연을 보여 주고 있다. 바람과 구름, 구름과 강물, 강물과 바다가 서로 꼬리를 물고 변화하고, 바다가 햇살을, 달빛이 번개를, 노을이 강바람을 꼬리 물고 변화할 뿐 아니라, 언덕․산악․사막․도시․궁전․움막들도 무너지고 흘러간다는 표현을 통해 천지 자연이 상호 인과(因果)로 얼키고 설키면서 유(有)와 무(無)의 영원한 유전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단락은 7~16행으로 서로 모순되고 상충하는 것들의 영원한 유전을 노래하고 있다. 아우성과 침묵, 영화와 몰락, 횡포한 자와 비겁한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 …… 등등 모든 모순과 상충이 천 년이면 천 번을, 만 년이면 만 번을 무너지며 일어서며 영겁의 세월 속으로 사그러져 흙․물․바람 등이 되어 흐른다는 구절로써 영원한 유전을 노래하고 있다.
3단락은 17~25행으로 희로애락과 약육강식의 허무한 유전을 나타내고 있다. 노여움․자랑․오만․겸손․사랑․미움 …… 등등 모든 인간의 감정이나, 쫓던 자와 쫓기던 자 …… 등등 강자․약자의 어떠한 것도 흙 속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 그 허무한 유전을 드러내고 있다.
4단락은 26~마지막 행으로 지금까지 노래한 만물의 유전을 요약해서 다시 한 번 노래함으로써 천지 자연의 영원한 유전을 강조하는 주제연이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는 것이 바로 만물의 유전 이치임을 제시하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삼라만상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있는 유전의 바람일 뿐이라고 하여 시상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돌에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는 유전이라는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는 시인의 원숙한 혜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편, 2․3단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많은 열거는 기묘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수석에서 발견한 것으로,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의 불합리하고 부정한 각종 모순상의 구체적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이 작품에서 말하려 한 것은, 이러한 모순과 상충의 양면성을 지닌 현실 세계에서의 삶의 진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인환의 시작(詩作) 활동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목마와 숙녀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힌다. 명동 어느 술집에서 작가는 이 시를 읊었고, 친구 김진섭이 즉흥적으로 작곡하였다는 에피소드와 함께 노래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시는 전쟁을 통해서 맛본 비운과 불안함에서 비롯되는 좌절감과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다.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 보헤미안처럼 고뇌하고 방황하는 시인의 찢긴 삶의 모습이 도시적 이미지를 통해 간결하게 드러나고 있다.
▶ 성격 : 도시적, 감상적 회고적
▶ 특징 : 도시적 감상주의와 보헤미안적 기질, 허무주의
▶ 표현 : 이미지에 의존하기보다는 직설적인 내면 정서 표출
▶ 구성 : ① 상실의 슬픔(1연)
② 옛날의 추억(2연)
③ 삶의 허무함(3연)
④ 상실의 슬픔(4연)
▶ 제재 : ‘그 사람’의 상실
▶ 주제 : 사라지고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의 슬픔.
<연구 문제>
1. 화자가 처한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암시하는 두 어절의 시구를 쓰라. <모범답> 그늘의 밤
2. 이 시는 떠나버린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애상적인 노래이다. 이렇듯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 시어를 지적하라. <모범답> 나뭇잎
3. 이 시는 1956년 환도 후, 폐허가 된 명동의 어느 술집에서 시인이 시를 읊자 친구가 샹송 풍의 즉흥곡을 지었다고 한다. 시인은 무엇을 어떻게 읊고 있는지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추억을 도시적 감각과 서정으로 읊고 있다.
4.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정서를 2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상실한 것들을 가슴에 남겨 두는 그리움의 애상감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구체적인 이미지 제시를 통하여 시인의 체험의 실체를 보여 주는 대신, ‘그 사람’이 떠나버린 상실의 아픔과 슬픈 자아의 모습이 전면에 나타남으로써 애상적인 분위기가 주조를 띤다.
참담한 전쟁을 통해서 겪은 비운과 시대적 불안함에서 비롯되는 삶의 중압감은 시인으로 하여금 체념과 무력감에 젖게 하며, 그의 시는 쉽사리 감상에 빠지고 만다. ‘그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가슴에 남은 추억을 읊조리며 방황하는 화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한다. 도시적 소재와 문명어를 통해 삶의 허무를 체념적 감상주의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유리창’, ‘가로등’, ‘공원’, ‘벤치’ 등의 시어는 후반기 동인들의 시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것인데, 박인환은 도시와 문명과 현실에서 시의 테마와 언어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神)을 상실한 시대, 삶의 지향성을 잃은 상황에서 화자 ‘나’는 가슴에 남은 옛 추억과 아름다운 환상만을 떠올리며 후미진 도심(都心) 밖 언저리를 거닐면서 허무에 젖어 보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연의 ‘서늘한’은 허무 의식과 상실의 슬픔이 비장감으로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박인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시의 화자 역시 아름다웠던 시절에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통해 어두운 시대가 안겨 준 상실의 슬픔과 고뇌를 밟으면서 방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 |
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는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시작(詩作), 1955.1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작품은 1950년대 후기(後期) 모더니즘 문학의 단면을 보여 준다. 6·25 전쟁이 가져다 준 삶에 대한 절망도 도시적 센티멘털리즘을 서정성 짙게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불안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 시인의 서정이, 모든 것이 떠나버린 허무의 광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우수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 성격 : 애상적, 허무적, 체념적 , 주지적
▶ 구성 : 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화자의 슬픔(1~11행)
② 절망적 현실의 체념적 수용(12~25행)
③ 인생에 대한 감상적 통찰(26~32행0)
▶ 제재 : 목마(木馬)
▶ 주제 : 모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과 허무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1)인생에 대한 통찰이 잘 드러난 곳의 처음과 끝 어절을 쓰고, (2)그 시적 의미를 화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140-180자 정도로 상술하라.
<모범답> (1) 인생은 ~ 통속하거늘
(2) 절망감 속에서 나오는 쓰라린 독백이다. 이것은 인생이 실제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든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들이 허망하게 떠나가 버린 황량한 세계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어딘가에 호소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역설이다. 그 통찰은 반성적 의미가 아니라, 체념적 태도의 다른 표현이다.
2.
목마 |
가 표상하는 상징적 의미를 70-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 불안과 절망의 시대적 슬픔, 인간의 삶과 정신을 황폐시켜 버리는 현실에서 이미 모두 떠나가 찾을 수 없는 지난 시대를 상징한다.
3. 이 작품에는 전쟁 후의 불안한 시대를 살며 고뇌하는 젊은이의 방황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화자의 절망과 불안이 퇴폐적이지 않고 오히려 감미로운 서정적 분위기로 느껴지는데, 그것은 시인의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 때문이다. 그러한 이미지의 참신함이 돋보이는 부분을 찾아 쓰라.
<모범답>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4. ㉠은 어떠한 시대를 표현한 것인지 20자 이내로 쓰라.
<모범답> 삶의 지향성을 상실한 불안과 허무의 시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모든 떠나가는 것들에 대한 애상을 주지적으로 노래한 시이다.
비교적 단순하게 이루어진 서두(1-11행)는 ‘떠났다’, ‘떨어진다’, ‘부숴진다’, ‘죽고’, ‘버릴 때’, ‘보이지 않는다’ 등의 동사적 서술어의 반복에서, 있어야 할 것들을 상실한 화자의 허무와 절망을 읽을 수 있다. 시적 상징으로서의 ‘목마’는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와 불안한 시대의 절망과 상실의 시대적 슬픔을 표상한다.
12행부터 25행까지의 두 번째 부분은 ‘~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건들을 부여하면서 현실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것은 화자의 결단의 모습이나 극복 의지가 아닌, 절망적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에 가깝다.
26-32행은 마지막 부분으로 화자는 체념적 상황에 대한 반문을 제기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공포를 느끼거나 한탄하거나 고뇌하는가라는 감상에 머무르고 만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인생에 대한 허무의 단상(斷想)들을 제시하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의미 상관을 지니도록 연결되기보다는 하나의 서러운 분위기를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시인에게 인생이란, 분위기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닐지도 모르며, 여기에 이 시인의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 T.S.엘리어트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都市)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 아 최후로 이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엘리어트의 <4중주(四重奏)>의 첫 구를 빌어 전후(戰後)의 황폐한 현실로부터 느끼는 허무 의식과 불안의 시간을 극복, 초월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긴장감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전 4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이란 가정(假定) 아래 첫째 연에서는 회상과 체험뿐인 삶을, 둘째 연에서는 고뇌와 저항뿐인 삶을, 셋째 연에서는 회의와 불안만 있는 모멸적인 삶을 제시한 다음, 마지막 연에서는 그와 같은 삶에 대한 절망과 죽음의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들로 인한 ‘정적’과 아직 ‘초연’이 자욱한 도시의 암흑 속에서 모든 소망을 상실하고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는 다만 ‘살아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냉혹하고 절실한 / 회상과 체험’, ‘복수와 고독을 아는 / 고뇌와 저항’,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로 ‘고뇌와 저항’, ‘회의와 불안’만이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전후의 황폐한 도시는 이미 신(神)도,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 폐허이다. 그러므로 ‘……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라는 구절은 참담한 현실의 반어적 표현일 뿐이며, 그 곳에 ‘살아 있는’ ‘나와 우리들은’ 모두 ‘시체’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는 그곳이 더 이상 삶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비극적 인식으로까지 다다른다. 그와 같은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 의식은 시대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발전됨으로써 자신을 ‘철없는 시인’으로 비하(卑下)시키고 마침내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을 ‘나의 눈 감지 못한 /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표출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쟁의 잔인성을 고발한다거나 전후의 비극적 분위기를 제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현실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방법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치열한 시 정신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사(死)의 예찬(禮讚)
- 박종화(朴鍾和)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때 아니다.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번쩍거리는 진리는 이곳에 있지 아니하냐.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분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고웁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고 웃으나
바람 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 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참을 얻을 수 없나니
분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백조 3호, 1923.9)
<감상의 길잡이>
박종화의 초기시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이 작품은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퇴폐적이고 세기말적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탈리아의 작가 ‘단눈치오’의 탐미적 소설 <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다고 하며, 작품 자체의 우위성(優位性)보다는 백조류의 ‘병적 낭만주의’의 전형으로 시사적(詩史的) 위치가 중요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현실을 떠난 죽음의 세계에서 진리와 영원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 작품은 현실 도피성 문학의 대명사로 지칭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죽음에 대한 표면적 현상만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본질적 성격을 노래함으로써 생의 부정이 아닌 생의 차원 높은 긍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그가 희구하는 죽음의 세계는 ‘장엄한 칠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로 ‘영겁’ 위에 ‘생명’․‘참’․‘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곳에서 참다운 생명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고자 하나, 그 곳은 구도 정신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 높은 경지이다.
자연(自然)
- 박재삼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재삼은 <문예>지와 <현대문학>지에서 시조로 추천받다가 시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한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개인적 생활 체험의 추억을 소재로, 그것을 깊은 한(恨)과 슬픔의 눈으로 파악하여 재구성한 것이 많다.
이 시는 한국적 여인의 한 전형인 춘향을 화자로 설정하여 그녀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랑을 꽃나무에 견주어 그린 작품이다.
▶ 성격 : 전통적
▶ 특징 :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저절로 솟아오르는 사랑을 ‘꽃나무’에 비유함.
▶ 어조 : 독백조→감출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진실감을 더해 줌.
▶ 구성 : 춘향의 독백으로 되어 있는 단련시(單聯詩).---춘향이 마음 초(抄) 2라는 연작시 중의 하나임.
▶ 제재 : 춘향의 사랑
▶ 주제 : 자연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랑의 감정
<연구 문제>
1. 사랑의 마음을 다른 식물이 아닌 ㉠으로 은유한 까닭은 무엇인지 60-8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꽃나무’는 자연의 섭리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2. ㉡의 피동형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60-8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이 솟아나는 것은 자기가 의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움직임이라는 뜻이다.
3. 작품의 제목이 ‘자연’으로 된 데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
<모범답> 춘향이 사랑 때문에 느끼게 되는 기쁨과 슬픔이 모두 순수한 자연적 현상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4. 서정주의 추천사 속의 춘향과 이 시의 춘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두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공통점은 마음 속에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사랑의 욕구를 가진 젊은 여성이다.
차이점은 추천사의 춘향은 현실의 속박과 사랑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여인인데 반해, 자연의 춘향은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진솔한 여인이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춘향전에서 소재를 취하여 새로운 시적 해석을 가한 춘향이 마음 초(抄) 2에 해당한다. 이 시의 화자는 춘향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유(類)의 시에는 서정주의 추천사가 있다.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 나를 밀어 올려 다오 /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 향단아. //
이 시에서는 지상적 사라의 고뇌로부터 떠난 천상 세계를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춘향을 현대시로 재현한 시인의 수는 적지 않다. 서정주에 앞서 김영랑이 있고 뒤로는 전봉건이 있다. 춘향이 그처럼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화(詩化)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인간의 영원한 시적 주제라는 보편적인 이유 외에도 춘향의 영상이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박재삼도 춘향의 독백을 빌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사랑의 욕구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임을 말하고 있다.
‘내 마음 꽃나무’라는 말 속에는 인간과 자연이 동질적인 것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자연사를 통해 인간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마치 꽃나무가 피고 지는 것과 같다는 뜻이 이 시에 담겨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웃어진다’, ‘울어진다’라는 피동형의 동사가 쓰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웃어진다’는 말은 ‘피고’라는 동사와, ‘울어진다’라는 말은 ‘지고’라는 동사와 대응하고 있으며, 제목이 ‘자연’인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감정이 꽃나무처럼 피고 지는 이 모든 것이 자연의 이치와 같다는 뜻일 게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사상계, 1959.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재삼은 전통적 서정 시인인 소월, 영랑, 목월보다도 관념적인 요소를 더 많이 걸러 내고, 애상적 한(恨)을 밑바탕으로 한 애잔하고 잔잔한 한국적 서정성을 추구한 전통시를 주로 썼다.
이 시도 인간의 다감한 감정의 여울이 석양빛 비치는 바닷가 가을 강(江)에 임했을 때의 눈물겨운 정한(情恨)을 어린 날의 체험과 오늘의 삶에 연결시켜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유어와 사투리의 섬세한 미감을 잘 살린 시다. 시어 하나하나가 어떻게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유념하도록 하자.
▶ 성격 : 전통적
▶ 특징 : ① 판소리나 민요조의 방언 종결 어미(-고나, -것네)로 옛스런 정감을 살림.
② 시어의 반복과 어미 활용에 의한 울음의 점층 효과
▶ 구성 : ① 서러움의 정서(1연)
② 황혼녘의 풍경(2연)
③ 서러움의 심화(3연)
▶ 제재 : 저녁 노을이 타는 가을 강
▶ 주제 : 인간의 본원적 사랑과 고독과 무상성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울음’이 표면적 실체와 내면적 실체를 쓰라.
<모범답> * 표면적 실체 : 저녁 노을
* 내면적 실체 : 전근대 한국 서민의 가난과, 인간 본원의 사랑과 고독과 무상감에서 생성된 슬픔과 한(恨)의 응어리
2. 이 시에서 주조를 이루는 이미지를 둘로 분류하여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한 문장으로 지적하라.
<모범답> ‘가을 강, 눈물, 산골 물, 바다’에 이어지는 물의 이미지와 ‘가을, 햇볕, 불빛, 해질녘’에 이어지는 불의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면서 서로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있다.
3. 이 시의 분위기를 어둡고 슬프게 이끌고 있는 시어들을 지적하라. <모범답> 서러운, 눈물, 울음
4. 이 시의 (1)제목에 투영된 시인의 마음을 밝히고, (2)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만한 시행을 찾아 쓰라.
<모범답> (1) 시인의 내면에 흐르는 가늘고 애잔한 마음
(2)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제삿날을 맞아 큰집이 있는 고향을 찾아가다가 노을에 젖은 가을 강을 바라보며 슬픈 사랑의 추억을 되새기는 화자의 모습을 떠올려 준다. 잔잔한 가락을 자꾸 되씹으면 눈물도 일고, 추억이나 회고에 물러앉아 이 땅에 오래오래 굽이쳐 내린 한국적인 정서를 느끼게 하는 서정시다. 섬세한 뉘앙스를 풍기는 소박하고 평이한 국어와 소곤거림의 나직한 가락으로 되어 있다. 특히, ‘-고나’, ‘-것네’와 같은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시조(時調)로 시작해서 시(詩)로 전환한 시인답게 현대시와 옛 노래 사이의 문체상 단절을 극복하고 여성스런 가락을 이루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슬픔과 이에 연결되는 물과 불의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서러운, 눈물, 울음’ 등의 시어가 전체의 흐름을 슬픔과 한(恨)의 분위기로 이끌고 있고, ‘가을 강, 눈물, 산골 물, 바다’에 이어지는 물의 이미지와 ‘가을, 햇볕, 불빛, 해질녘’에 이어지는 불의 이미지가 서로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한편, 저녁 노을이 울음으로 환치(換置)되어 있는 데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그 울음의 실체는 이 시의 주제와 직결된다. 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저녁 노을이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아름다운 바다가 마치 눈물이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저녁’은 ‘가을’과 함께 ‘소멸 · 종말’의 의미를 지닌다. ‘가을’과 ‘놀’은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슬픔을 노래하기에 알맞은 배경이다. 이 시의 울음이 시인 자신의 가난하게 자랐던 유년기 생활 체험과 전근대의 한국의 가난과 밀접하다는 것이 평자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울음은 사실 가난한 우리 서민들의 생활로부터 쉽게 길어 올려지는 낱말이다.
그리고 ‘울음’의 실체를 그의 자전적(自傳的) 체험에서 찾는다면, 문학적 체험과 함께 생성된 그의 시 자연(自然)에서의 춘향(春香) 혹은, 그의 부인이나 그 변신일지도 모를 누님의 슬픔일 수도 있다. 즉, 가난하게 자랐던 생활 체험 속의 응어리와, 인간 본원의 사랑의 슬픔과 고독과 무상성(無常性)에 대한 한(恨)을 지닌 화자의 눈에 저녁 노을이 울음으로 보인 것이다.
<맥락 읽기>
1. 이 시의 글감은 무엇인가? ☞ (노을에 물든) 가을강
2. 작중화자는 누구입니까? ☞ 나
3. 화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친구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산등성이로 걸어 가고 있고 이 때 해질녘의 붉게 타는 강물을 보았다.
4. 화자는 어떤 심경인가? 화자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는 시어를 찾아 생각해 보자.
☞ 울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눈물나고나
☞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외로움,그리움
5. 이런 화자의 심경과 같은 빛깔의 시구를 찾아 보아라.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눈물, 울음이 타는 가을강 (이들을 통해서 동병상련을 느낌)
6. ‘눈물’, ‘울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라.
☞ 외로움,그리움,허허로움(그 결과 화자는 여리고 섬세해진 감성의 상태가 되었다)
7. 외로움,그리움,허허로움을 걷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 인정(2연 1행), 자연(울음이 타는 가을강)
8. ‘가을강’의 의미가 드러난 곳은 어디입니까?
☞ --- 3연 // --- 첫사랑의 서러움,애틋함도 사라지고 // --- 울음(섬세하고 여린 감성,슬픔,격정,아픔)도 녹아나고 // --- 미칠 일(삶의 열정,뜨거움)하나로 // --- 바다(감정의 극복,새로운 삶의 지평,완숙함)에 다와가는 강. // --- 사랑의 기쁨과 추억,완성되지 못한 사랑의 아픔,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강.
# 참고 : “개울물은 깊어가고 여물어 갔다.”-<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中에서>
가을강 - 성숙한 사랑, 열정을 잠재우며 한 단계 승화된 사랑.
9. 3연 6행으로 미루어 화자는 가을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
☞ 일상적 삶의 모습을 포횽하고, 열정을 잠재우며 한 단계 승화시켜 나가는 모습을 새롭게 인식함.
10. 주제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 내면의 성숙
밤바다에서
- 박재삼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현대문학 27호, 1957.3)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정한(情恨)의 정서를 애잔한 가락과 섬세한 언어로 노래함으로써 우리 시의 전통적 서정을 가장 가까이 계승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재삼의 대표작이다.
그의 시에는 남해안 삼천포에서 성장한 소년 시절을 소재로 한 회상조의 작품이 많은데, 이 시 역시 ‘소년 시절로의 회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 ‘누님’은 한국 여인을 표상하고 있으며, 그 누이의 말 못하는 슬픈 사연이 화자의 여린 가슴에 여인의 한(恨)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나이 어린 화자는 슬픔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고, 밤바다로 뛰어나가며 소리 죽여 흐느낀다. 그러므로 누이의 슬픔과 화자의 울음은 두 남매의 혈연적 아픔으로 동질화(同質化)되어 나타난다.
누이의 슬픔을 함께 할 수 없는 어린 화자는 고샅길을 지나 밤바다에 나가 서서 눈물 흘리며, 달빛에 반짝이는 파도를 바라보고는 누이의 아픔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이나 밤새도록 소리내 우는 파도처럼 찬란해지고 더욱 아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이의 아픔이 소진하여 그 아픔이 아픔으로 극복될 때라야 비로소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결국 두 사람은 결구에서 각각 ‘섬’과 ‘물결’로 비유됨으로써 누이가 섬이 되어 잠들 때, 화자는 섬에 와 부딪치며 우는 물결이 되는, 아름다운 인간적 합일을 이루며 시적 안정과 표현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감각적이면서 섬세한 시어로 명징(明澄)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 시는 산문체 형식이면서도 박재삼만의 독특한 가락과 효과적인 점층법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적 정한(情恨)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추억(追憶)에서
- 박재삼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적 화자의 어릴적 가난했던 생활 체험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슬프고 한스러운 모습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연 구분 없는 전 15행의 산문체 리듬의 이 시는 시적 대상의 변화에 따라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1~5행은 진주 장터 어느 ‘생어물전’에서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우던 어머니의 고생스런 모습을 표현한 부분으로, 화자는 어머니의 고달픔을 ‘은전만큼 손 안 닿는 한’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바로 이 ‘한(恨)’은 이 시의 지배적 정서로 어머니의 고달픔이 응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6~9행은 ‘울엄매’가 돌아오기를 초조히 기다리며 떨고 있는 오누이의 슬픔을 ‘머리 맞댄 골방’과 ‘손시리게’와 같은 표현으로 절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린 그들에게 ‘울엄매’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로 그들의 생존과 애정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10~15행은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가 별을 보고 느꼈을 심정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달빛에 반사되는 항아리의 반짝임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발견함으로써 고통스런 어머니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표현이다.
천상(川上)에 서서
- 朴載崙
산다는 것은 흐르는 것이다.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흐르는 것을 듣는 것이다.
흐르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흐름이 계곡을 흐르듯
목숨이 흐름되어
우리들의 살을 흐르는 것이다.
우리들의 뼈를 흐르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흐름이 계곡을 흐르듯
목숨이 흐름되어
우리들의 살을 노래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뼈를 우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것을 눈 여겨 바라보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흐르는 것이다.
---시집 「궤짝 속의 왕자」(1959)---
<핵심 정리>
1. 詩作 배경
이 시는 어떤 깊은 철리(哲理)나 인생관을 담은 것이 아니고, 인생과 도도한 물의 흐름을 동일시하여 삶의 이미지를 담담하게 관조하는 태도로 파악하고 있으며 중후한 인상과 함께 누구에게나 쉽게 공감을 주는 작품이다.
2. 시상의 전개
* 제1단락(1행-4행) : 삶은 永遠回歸의 흐름이다.
* 제2단락(5행-9행) : 슬픔과 통곡을 자각하며 흘러가는 삶
* 제3단락(10-14행) : 슬픔과 통곡을 승화시켜야 할 삶의 태도
* 제4단락(15-끝행) : 삶의 참의미는 흐르는 것에 불과하다.
3. 주제 : 삶에 대한 관조(觀照)
4. 제재 : 산다는 것
5. 표현 기교 : 반복법, 열거법
6. 시어의 상징 의미
* 살 - ‘슬픔’을 함축한 정한
* 뼈 - ‘통곡’을 함축한 정한
박목월論
평생 새로운 시를 추구한 박목월
박목월(1917-1978)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감을 주는 시인이다. 한국의 교양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쉽게 암송할 수 있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시는 극히 적은 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박목월의 「나그네」와 「윤사월」, 「산도화」 같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끼면서 암송할 수 있는 시편들이다.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주면서 두루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박목월이야말로 한국의 국민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목월의 시가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주는 것은 그의 시가 한국인에게 친밀하게 읽힐 수 있는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박목월의 시가 지니는 한국적 요소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살필 수 있는데, 하나는 그의 시가 한국인의 정서와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시가 한국어의 운용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박목월은 평생 동안 새로운 시를 추구하면서 한국시의 영역을 넓혀 온 시인이다. 박목월은 그의 초기 시편들이 실려 있는 3인 시집 「청록집」과 「산도화」에서는 개인적 자아의 문제를 주로 노래하였으며, 중기 시편들이 수록된 「난, 기타」, 「청담」 등의 시집에서는 사회적 자아의 문제를, 그리고 후기 시편들이 실려 있는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 등의 시집에서는 존재적 자아의 문제를 노래하였다.
그런데 박목월의 시세계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개인-사회-존재’의 세계로 변모하면서 관심의 영역이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관심사는 그의 육신의 나이와 당대 시대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폭넓은 공감을 유발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시는 국권상실의 아픔 토로,
후기시는 인생의 한계와 삶과 죽음 다뤄
우선, 개인적 자아를 노래한 그의 초기 시편들은 30대 시인이 겪는 국권 상실과 혼란의 암울한 시대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리고 중기 시편들은 40대 시인이 가족과 직장과 같은 사회적 자아를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50대로부터 60대에 이르는 후기 시편들은 인생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존재적 자아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박목월의 시는 이런 주제적 변천에 적합한 운율과 형태를 통해 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박목월의 시가 보여 주는 시 세계 중에서도 특히, 그의 초기 시편들은 국권 상실에서 오는 허무와 비애의 시대 상황과 긴밀히 이어져 있으면서 한국인의 리듬 의식에 적합한 언어 구사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윤사월」 전문
위의 시 「윤사월」이 노래해 보여 주는 것은 암담한 좌절의 상황이다. ‘눈먼 소녀’는 지금 ‘산지기 외딴집’에 유폐되어 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처해 있는 유폐의 상황은 그냥 좌절과 절망이 아니다. 왜냐 하면 세상은 바야흐로 봄이고 송화가루가 지천으로 날린다. 또한 윤사월의 긴긴날을 꾀꼬리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눈먼 소녀는 유폐의 방에서 밖에 온 희망의 세상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즉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시라 할 것이다.
그런데 ‘좌절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희망의 정신’을 노래하고 있는 위의 시는 3음보의 변형 율격을 통해 참신한 리듬이 된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운율은 글자 수의 반복에 의한 음수율보다는 호흡 단위의 반복에 의한 음보율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근래 학계의 정설이고, 한국시의 음보율은 2음보의 중첩형인 4음보격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목월의 초기 시는 변형 율격인 3음보가 중심이 되고 있다. 가령 위의 「윤사월」은 “송홧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길다 꾀꼬리 울면” 식으로 읽게 되어 3음보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음보 혹은 4음보가 중심이 되어 있는 시는 안정감, 장중함, 인위적 성격이 강조되어 예로부터 사대부나 양반 계층의 정서를 담아 내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3음보 율격의 시는 경쾌함, 변화성, 자연적· 서정적 느낌이 강조되어 서민적 리듬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운율이다.
또한 박목월의 시는 한국어가 지니는 음성 기능을 세밀하게 선택, 배열함으로써 탁월한 운율을 이뤄 내고 있다.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 「산도화」
위의 시 「산도화」는 봄날의 화해로운 정서를 노래해 보여 준다. 지금, ‘사슴’(이 경우 ‘사슴’은 시인의 시적 자아이다)은 겨우내 지루하게 갇혀 지내던 겨울산으로부터 벗어나 ‘발을 씻고’ 있다. 왜냐 하면 바야흐로 봄이 왔으며 그를 가두었던 ‘눈’도 녹았기 때문이다. ‘사슴’과 ‘구강산’이 화해하고 있으며 산도화꽃도 붉게 피어 보랏빛 산을 물들이고 있다. 그뿐이랴. 구강산의 보랏빛 색깔과 산도화의 붉은 빛에 ‘옥같은 물’의 옥빛 푸르름이 합쳐져 봄날의 분위기를 곱게 물들이고 있다.
「나그네」「윤사월」 등 우리 정서에 맞고 쉽게 암송할 수 있는 시 남겨
그런데 박목월의 시가 일궈 내는 이 아름다운 봄날과 봄날의 색채감은 탁월한 소리의 배열로 해서 절정감을 이뤄 낸다. “산은 / 구강산 / 보랏빛 석산”에서 보이는 ‘ㄴ’ 음의 반복, 특히 각행마다 반복되는 ‘산’의 소리가 이뤄 내는 오묘한 운율감이 ‘구강산’의 보랏빛을 더욱 아련한 것이 되게 한다. 또한 “산도화 / 두어 송이 / 송이 버는데”에서도 ‘송이’의 반복을 통해 ‘산도화’의 색채감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봄눈 녹아 흐르는 / 옥같은 물에”서도 유성 자음 ‘ㄹ’의 사용이 ‘옥같은 물’의 유동감을 살려 준다. 즉 국어의 운율적 자질이 응용된 국어의 모운(母韻)이나 자운(子韻), 두운이나 각운의 효과를 탁월하게 이뤄 냄으로써 시위 율격을 심화시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박목월은 한국인의 정서에 깊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친근한 정서를 노래해 보여 준 시인이며, 특히 시어로서의 한국어의 가능성을 탁월하게 구사해 보여 준 시인이다. 박목월의 시가 한국인에게 널리 사랑 받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 글쓴이 : 이건청 / 1942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 현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
청노루
-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름나무
속ㅅ잎 피어 가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박목월의 자연관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어떠하며 30년대 말기에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게 되는 사회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시가 한 폭의 동양화에 견주어질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를 살펴보고, 시각적 심상만 문제삼는 데 그치지 말고 청각적 심상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자.
▶ 성격 : 낭만적, 서경적, 전통적, 관조적, 향토적
▶ 심상 : 정중동(靜中動)의 심상
▶ 어조 : 담담하게 찬탄하는 어조
▶ 표현 : ① 조사를 생략하여 체언으로 마감함.
② ‘ㄴ’음(비음)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아늑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돋움.
▶ 시상 전개 : 시선의 이동(원근법)
▶ 구성 : ① 원경--공간적, 시간적 배경(제1,2연)
② 근경(제3연)
③ 내경(제4,5연)
▶ 제재 : 청노루
▶ 주제 : 봄의 정경과 정취. (자연의 서경과 관조의 세계)
<연구 문제>
1. 이 시에 두드러진 ‘색채적 이미지’를 찾아서, 이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140-18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청노루’의 푸른색, ‘자하산’의 보라색, ‘느릅나무’의 초록색, ‘구름’의 흰색 등으로 서경적 아름다움,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과 동양의 정적인 관조의 조화를 엮어내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인위적인 변질을 겪지 않은 상태의 무위 자연(無爲自然)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화로운 미적 세계임을 말하고 있다.
2. 이 시가 ‘서경적’이면서도 끝내 주정적으로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모범답> 시의 전반에 걸쳐 절제된 목소리(tone)와 조사를 생략한 표현이 주는 여운 때문에 주정적으로 읽혀진다.
3. 정중동(靜中動)의 이미지가 드러나 있는 세 연을 지적하라.
<모범답> 제2,3,5연
4. 이 시의 ‘청노루’가 주는 느낌을 세 음절의 고유어로 쓰라.
<모범답> 깨끗함
<감상의 길잡이>
<청록파>가 일제 말기에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게 된 까닭을 ‘잃어버린 하늘과 딛고설 땅을 빼앗긴 상황’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청록파>의 자연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내면 속에서 이상화된 자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청노루는 세칭 <청록파> 시인의 초기시에 나타나는 자연 지향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시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인간에 대한 우호적 측면을 강조하게 되면, 자연은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서 취급되게 마련이고, 시인은 자연 친화적 태도로 기울게 마련이다. 반면, 자연의 인간에 대한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측면에 눈이 미치면, 자연은 삶의 터전이요 생산의 현장으로서의 의미가 부각되고, 시인은 자연과의 투쟁이라는 태도로 기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 시인은 전자(前者)의 예에 속한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이 시는 봄의 청아한 풍경을 관조적 태도로 노래하고 있다. 원경 묘사로 시작하여 청노루의 맑은 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화자 자신은 물론 다른 어떤 인물들도 등장하지 않아 ‘동양화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시각적 심상뿐만 아니라 이 시가 주는 청각적 심상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유음이나 비음을 많이 사용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나그네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지훈에게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아탑 5호, 1946.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나그네’는 일제 말기 암울한 상황에 처한 우리 민족의 총체적 얼을 상징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 바 있다. 시대 상황과 연결시켜 볼 때, 비난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짧은 시행(詩行), 몇 개 안 되는 어휘로 이만한 작품을 만들어 낸 박목월의 언어 경제는 놀라운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성격 : 관조적, 서정적, 낭만적, 풍류적, 향토적
▶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심상
▶ 운율 : 3음보(민요조)
▶ 어조 : 달관의 어조
▶ 특징 : 체언 종결의 간결한 형식미
▶ 구성 : 변형된 수미 쌍관의 구성
① 향토적 배경(제1연)
② 체념과 달관의 경지(제2연)
③ 외로운 여정(旅程)(제3연)
④ 향토적, 풍류적 정서(제4연)
⑤ 체념과 달관의 경지(제5연)
▶ 제재 : 나그네
▶ 주제 : 체념과 달관의 경지
<연구 문제>
1. (1)이 시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는 두 시어를 찾아 쓰고, (2)그 말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 써 보라.
<모범답> (1) 달 : 세상을 버린 자의 애닯도록 맑은 정신
(2) 나그네 : 체념과 달관의 경지
2. (1)이 시에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표현 효과를 증대시킨 연을 찾고, (2)그 이미지의 특징을 밝혀 적어라. 또, (3)어떤 방법으로 어떤 정감을 고조하고 있는지 설명해 보라.
<모범답> (1) 제4연
(2) 복합 감각 (후각적 심상과 시각적 심상의 호응)
(3) 인사(人事)와 자연을 조화시켜(서경과 서정을 융합하여) 향토적 정감을 고조시켰다.
3. 자음운(子音韻)이 맞으면서 이미지가 연결되는 세 시어를 찾아 쓰라. <모범답> 밀→술→놀
<감상의 길잡이>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화답한 시이다. 완화삼의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가 이 시에 와서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로 변화되었다. 박목월은 <청록파> 혹은 <자연파>로 불리우는 시인으로서 그 유파의 이름에 걸맞게 나그네에도 시인 특유의 자연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우리는 1940년대의 상황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일군(一群)의 시인들이 등장하게 된 연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주권을 상실한 민중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주권을 잃고 ‘나그네’로 전락한 백성으로서 국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한 방편이었을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관심이 이해는 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의 ‘자연’은 생산 현장으로서의 우리 농촌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관념 속에서 미화(美化)된 이상적인 자연이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이 시는 간결한 언어로써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려내고 있다. 두 번이나 반복된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인간은 자연에 비유되어 행운유수(行雲流水)하는 유유자적함을 보여 준다. 주인의 자리를 빼앗기고 나그네 신세가 되어 떠돌 수밖에 없는 이의 슬픔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강나루를 건너 밀밭 사이로 난 외줄기 길을 삼백 리나 걸어가서 만난 것은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이다. 이 낭만적인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는 하다.
박목월 시인의 언어 경제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다. 잘 익은 술의 빛깔을 연상케 하는 저녁 놀, 그밖에 색채감을 느끼게 하는 어휘들, 명사로 끝냄으로써 연과 연 사이에 여백을 주는 솜씨 등이 돋보인다.
산도화(山桃花) 1
- 박목월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3인시집 청록집1946 / 시집 산도화195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이상화(理想化)된 자연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려낸 것으로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탈속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목월이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형상화한 까닭은 아마도 ‘인간 세계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연’을 그려냄으로써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위를 구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된 시적 태도라고 하겠다.
▶ 성격 : 관조적, 회화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어조 : 이상향을 그리는 평화로운 어조
▶ 특징 : 간결한 형식미
▶ 구성 : 시선의 이동에 따른 구성
① 세속과 멀리 떨어져 있는 구강산(제1연)
② 두어 송이 피어나는 산도화(제2연)
③ 봄눈 녹아 흐르는 맑은 시냇물(제3연)
④ 시냇물에 발을 씻는 암사슴(제4연)
▶ 제재 : 산도화
▶ 주제 : 이상적 세계의 평화와 아름다움
<연구 문제>
1. 이 시의 소재들이 지닌 공통점을 8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이 시의 소재는 ‘구강산, 산도화, 시냇물, 암사슴’ 등이다. 이러한 말들은 세속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아름답고 순수하며, 맑고 순박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2. 이 시에서 ㉠이 지닌 함축적인 의미를 15자 내외로 밝혀 쓰라.
<모범답> 화자의 관념 속에 있는 선경(仙境)
3. 이 시의 시상 전개 방식의 특징을 2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시선의 이동에 따른 시상의 전개. (遠景에서 近景으로 시선 이동)
4. 화자가 작품 밖에 있음으로 해서 얻는 효과를 40자 내외로 설명하라.
<모범답> 대상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주관적 감정의 노출을 배제할 수 있다.
<감상의 길잡이>
구강산은 우리 나라에 실재하는 구체적 지명(地名)이 아니다. 산도화가 동양적 이상향인 도화원(桃花園)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미루어 ‘구강산’은 가공적인 선경(仙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백(李白)이 ‘복사꽃이 물에 떠 아득히 흘러가니 / 여기가 곧 별천지요, 인간 세계는 아니로세.(桃花有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라고 한 데서도 ‘도화(桃花)’가 이상향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 청노루에서는 ‘자하산’이 등장하는데, 그 역시 꿈의 산이다. 이러한 배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순수하고 고결한 모습의 ‘사슴’이거나 ‘노루’이다. 이는 한 폭의 정갈한 신선도(神仙圖)를 보는 듯하다. 그의 자연 속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으며, 인간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조화로운 자연의 일부로서 기능할 뿐, 그 자신이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목월은 일제 말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처럼 꿈과 같은 자연을 그려냄으로써 국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단순한 현실 도피라기보다는 ‘고향의 회복’을 추구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불국사
- 박목월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구름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시집 산도화, 195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방법은 시인마다 다르다. 그리고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이 시에서 우리는 절제된, 그리고 압축된 시어의 사용이 어떠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 성격 : 전통적, 서경적, 정적(靜的), 회화적, 불교적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심상
▶ 표현 : 절제된 언어의 사용
▶ 특징 : ① 자연 친화와 향토적 정서
② 불교의 사상적 배경
▶ 구성 : 수미 쌍관의 구성
① 자하문의 달 안개, 물 소리(제1,2연)
② 대웅전의 바람 소리, 솔 소리(제3,4연)
③ 범영루를 비추는 달빛(제5,6연)
④ 자하문의 바람 소리, 물 소리(제7,8연)
▶ 제재 : 불국사의 야경(夜景)
▶ 주제 : 불국사의 고요한 정경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간결한 인상을 주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아는 대로 쓰라.
<모범답> * 절제된, 함축적인 시어의 사용.
* 서술어를 배제한 체언의 종결 형태
2. 이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교감하는 연을 찾아 쓰라.
<모범답> 달 안개 / 물 소리
3. 이 시에서 시상의 흐름을 ‘배열과 통합’의 과정이라고 볼 때, 그 통합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2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소리’라는 소재를 통해서 통합된다.
4. (1)이 시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자연 친화의 서정과 관련된 소재를 쓰고, (2)이러한 소재를 다룬 고시조 한 수를 외워 쓰라.
<모범답> (1) 달, 바람, 물, 솔
(2) 내 버디 몃치나 ᄒᆞ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ᄃᆞᆯ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ᄉᆞᆺ밧긔 ᄯᅩ 더ᄒᆞ야 무엇ᄒᆞ리. <윤선도, 「오우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묘사적 서정시, 또는 서경시(敍景詩)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로 어떤 외부의 장면이나 대상에 대한 생생한 인상을 통해서 정서적 감응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시로서 박목월의 청노루를 들 수 있는데, 문법적 구문과는 관계없이 주로 명사와 명사로 된 행과 연의 결합을 통해서 함축적인 표현을 담아 내는 것이다. 이 시 전체를 통하여 서술어가 ‘흐는히 / 젖는데’ 하나밖에 없다. 이는 목월 시의 문법적 특징을 잘 보여 줄뿐더러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화자가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는 대상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감정이 노출되는 것을 막아 준다.
그렇다고 시인이 작품 속에서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들 사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특정한 구도와 분위기를 연출하는 자체가 하나의 의도된 계획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법에서는 이미지 수법이 매우 중요하게 되는데, 이 시에서도 시각적 이미지를 중심으로 청각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천년 고찰(古刹)인 불국사의 신비로운 정적(靜寂)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달
- 박목월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或)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시집 산도화, 195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목월의 시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서정성의 실체는 우리 민족이 지닌 보편적 정서인 정한(情恨)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인지 이 시에서는 잔잔한 슬픔 같은 것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슬픔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고도의 간결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절제된 감정으로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조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성격 : 자연친화적, 서정적, 관조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운율 : 3음보(민요조)
▶ 어조 : 애잔한 슬픔의 분위기
▶ 특징 : 간결한 형식미
▶ 구성 : 수미 쌍관의 구성
① 배꽃에 비친 달빛(제1연)
② 불국사 터 언저리에 비친 달빛(제2연)
③ 배꽃에 비친 달빛(제3연)
▶ 제재 : 달
▶ 주제 : 달밤의 정경
<연구 문제>
1. 이 시에는 시인의 어떤 심정이 어떤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고 있는지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모범답> 현실의 고통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세계를 꿈꾸는 시인의 심정이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2. 이 시를 통해서 연상되는 이조년의 고시조 한 수를 외워 쓰라.
<모범답>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 「다정가」>
3. 이 시의 리듬을 살려 주고 있는 요소를 (1)형식과 (2)음운적 자질 두 가지 면에서 분석하라.
<모범답> (1) 형식 : 제1연과 제3연의 반복
(2) 음운적 자질 : ‘배꽃’, ‘반쯤’에 나타난 ‘ㅂ’음의 반복.
‘가지’, ‘가리고’, ‘가네’의 ‘가’의 반복.
‘내동면’, ‘외동면’의 ‘면’의 반복.
4. 향가 원왕생가(願往生歌)의 ‘달’과 이 시의 ‘달’이 어떻게 다른지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원왕생가의 ‘달’은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달이고, 이 시의 ‘달’은 구체적 배경으로서의 달이다.
<감상의 길잡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향토적 정서가 어우러진 박목월의 초기시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불국사 터 언저리의 배꽃에 비친 달빛을 그려낸 한 폭의 동양화적인 이 그림이 간결한 형식과 운율을 통해 슬며시 드러내는 정서는 잔잔한 슬픔 같은 것이다.
배꽃에 어린 달빛의 애잔한 느낌은 고려 말 이조년의 시조에서도 드러나는 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가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 「다정가」>
그러나 이 시는 화자가 전면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슬픔을 진술하는 대신 슬픔이 깃들인 풍경만을 제시한다. 그 서정성이 말 밖의 말(言外言)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특히, 지명이 향토적 정서를 자아내는가 하면, 불국사라는 종교적 심상이 작품에 드리우는 탈속적인 분위기로 인해 이 시는 한결 고결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관(下棺)
-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밭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 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시집 난(蘭)․기타, 1959)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문학은 인생의 재해석이다. 그래서 인간의 문제는 그대로 문학의 제재가 된다. 인생의 문제를 공통분모로 나눈다면, 삶과 죽음 그리고 희망 정도가 남지 않을까? 목월은 하관을 통해서 사랑고 죽음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것은 인생의 재해석이자 일상적 삶을 통해서 추구해 나아가야 할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응답이다. 물론, 시인은 생경한 설명이 아니라 절망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서정 미학― 아름다운 노래로 보여 준다.
▶ 성격 : 서정적, 기구적(祈求的), 잠언적(箴言的), 사색적, 상징적
▶ 어조 : 기도하듯 담담하게 속삭이는 어조
▶ 표현 : ‘무기교의 기교’의 전형을 보여 주듯, 평이한 표현 속에 중의적 시어 구사가 두드러진다.
▶ 특징 : 형용사적 수식을 최대한 억제하여 시적 긴장을 주제에 집중되게 하였다.
▶ 구성 : ① 아우의 장례 모습(제1연)
② 장례 후 꿈 속에서 아우를 만남(제2연)
③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거리에서 느끼는 간절한 그리움(제3연)
▶ 제재 : 아우의 죽음
▶ 주제 : 죽은 아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연구 문제>
1. ㉠의 ‘하직(下直)’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설명해 보라.
<모범답> ‘작별을 고했다’는 사전적 뜻과 한자어 그대로 ‘(흙을) 아래로 떨어뜨렸다’는 뜻이 한데 어울려 있다.
2. ㉡은 화자의 어떤 심경을 노래한 것인지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깊은 슬픔을 인생에 대한 달관의 태도로 억제하면서 ‘열매’로 상징되는 현세적 삶의 질서가 지니고 있는 허무감을 노래하고 있다.
3. 이 시에서 하강(下降)의 이미지로써 ‘이승’을 표현한 두 구절을 찾아 쓰라.
<모범답> ‘눈과 비가 오는 세상’,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4. 이 시와 월명사의 제망매가는 둘 다 동기간의 정을 노래했으면서도 결말 방식이 다르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하관에서는 저승과의 단절로 말미암아 거리감을 느끼는 데 반해, 제망매가에서는 숭고한 종교 의식을 통해 저승과의 거리가 극복된다.
<감상의 길잡이>
목월은 어느 대담(對談) 자리에서 하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년 동안 거의 아우의 죽음을 잊고 있다가 꿈에 아우가 자주 나타나더군요. 그 1년 동안 한 줄씩 (시가) 되어가곤 있었습니다만……. 1년쯤 흐르니까, 아우가 죽었을 때 받았던 날것 그대로의 슬픔이 가라앉고 아우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말갛게 그저 바라보일 뿐이었습니다.”
목월의 이런 발언은 시가 작위적 공작물(工作物)이 아니라, 진솔한 인격의 등가물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에서 맺은 혈연적 애정을 상실한 고통을 가라앉히는 데 1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시인은 말갛게 정제된 서정의 미학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적 변용의 세월은 시적 화자의 인격을 숙성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과정임을 알려 주고 있다. 그 결과 죽음이 ‘말갛게 그저 바라보일 뿐’이라는 깨달음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죽음이 그저 말갛게 바라보인다는 말은 아마도 이 시가 수식어를 극도호 배제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터이다.
삶의 진실에 대한 경건한 깨달음은 이 시의 어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주여. / 용납하소서. / 머리밭에 성경을 얹어주고 / 나는 옷 자락에 흙을 받아 /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인간적 슬픔을 절제하고 이만큼의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에 기울인 인격적 무게와 투명한 시심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리하여 ‘다만 여기는 / 열매가 떨어지면 /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에 이르면 아우가 없는 이 세상의 쓸쓸함과 적막감이 가슴 철렁하게 느껴져 온다.
나무
- 박목월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黙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黙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시집 청담(晴曇), 1964)
* 과객(過客) - 지나는 길손
<핵심 정리>
1. 시작(詩作) 배경
여행 중에 본 나무의 모습에서 받은 각각의 인상을 재미있는 화술로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으며,마음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내부의 사실을 미적으로 표현한 산문시.
2. 시상의 전개
* 제1부분 - 늙은 나무의 묵중함
* 제2부분 - 나무의 춥고 침울한 모습
* 제3부분 - 산마루의 외로운 나무들
* 제4부분 - 마음에 뿌리 내린 나무의 모습
3. 주제 : 묵중하고, 침울하고, 고독한 삶의 모습
4. 제재 : 나무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상아탑 6호, 1946.5)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세련된 시어를 사용하여 순수한 산수의 서경과 인간 본연의 근원적 애수를 노래한 목월의 초기시 세계를 대표하는 민요풍의 서정시이다. 7․5조를 바탕으로 기․승․전․결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이 시는 어느 산 속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보여 주면서, 그 속에서 눈 먼 처녀의 애뜻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이따금 꾀꼬리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오는 어느 한가로운 윤사월의 대낮, 노란 송화 가루가 바람에 날리는 외딴 봉우리 한구석에는 산을 지키는 산지기의 집이 한 채 외롭게 서 있다. 그 집에는 산지기의 딸인 듯한 눈 먼 처녀가 살고 있는데, 모춘(暮春)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없는 그녀는 문설주에 기대어 꾀꼬리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봄의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고 있다.
이 작품의 모티프는 ‘송화 가루’와 ‘꾀꼬리’, 그리고 ‘눈 먼 처녀’이다. 그런데 ‘송화 가루’는 시각적인 것으로 ‘눈 먼 처녀’와 직접적인 상관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되는데, 이 양자 사이에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꾀꼬리’의 울음 소리이다. 꾀꼬리의 울음에 의해서만 ‘눈 먼 처녀’는 윤사월의 무르익은 정경 속에 용해될 수 있기에 꾀꼬리의 울음은 바로 그녀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외딴 봉우리’․‘외딴 집’․‘눈 먼 처녀’라는 세 가지 비극적 소재로 배합된 이 작품에서 ‘눈 먼 처녀’는 내면적 설움과 고뇌의 소유자로서 작품의 중심을 형성하며 한국적 자연의 일부로 동화되어 있는데, 그녀의 가련함에서 더욱 깊은 고적감, 비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송화 가루’는 후각과 시각을 함께 드러내는 시어로 그것의 주된 색조는 ‘노랑’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고적한 배경과 어우러지면서 토속적, 향토적인 애수와 고독을 더해 주고 있으며, 또한 꾀꼬리의 노란색과 결합되어 식물을 매체로 한 상상력과 동물을 매체로 한 상상력이 한국적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감상의 길잡이>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상황 속에서 목월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연뿐이었다. 그 곳은 단순히 자연으로의 귀의라는 동양적 자연관으로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빼앗긴 그에게 ‘새로운 고향’의 의미를 갖는 자연이다. 그러므로 목월에 의해 형상화된 자연의 모습은 인간과 자연의 대상들이 아무런 대립이나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이다. 다시 말해, 시간 진행을 의미하는 자연의 변화가 인간의 유한성을 일깨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인간의 삶이 자연을 해치는 파괴자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그 같은 자연 속에 안겨 평범하면서도 풍요로운 삶, 즉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 시인의 순수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인간 삶의 근원적인 차원을 인식한 자연이기에 ‘산이 날 에워싸고 /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라는 구문이 정언적 명령법(定言的命令法)이 아닌 흔쾌한 권유로서 주어지는 한편, 화자에 의해 그것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 날 에워싼’ 아늑한 자연 속에서 화자는 그 자연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1연에서는 ‘씨나 뿌리며, 밭이나 갈며 살아라’라는 내용으로, 2연에서는 ‘들찔레처럼, 쑥대밭처럼 살아라’는 것으로, 마지막 3연에서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아라’라는 구절로 나타난다. 물론 그것은 자연이 직접 들려 주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그 자연에서 이루고 싶어하는 소박하고 인간다운 삶의 표현이다. 그가 이루고 싶어하는 삶이란 바로 씨 뿌리며 밭 가는, 자연에 토대를 둔 삶에서부터 들찔레와 쑥대밭 같은 자연스런 삶으로 변주될 뿐 아니라, 구름이나 바람 같은 자연과 일체화된 삶으로 확대되면서 화자가 소망하는 삶의 양상을 차례차례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화자는 자연의 아들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구김살 없이 살고 싶다는 순수한 서정을 토로하며 자연에 대한 뜨거운 향수와 열망을 보여 주고 있다.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 박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시집 난(蘭)․기타, 1959)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일상 생활의 체험 영역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목월의 초기시에서 보여 준 감각적 단순성을 벗어나는 중기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 일상의 체험을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그는 현실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을 초극하기 위한 의지를 노래하지 않는 대신, 자기 정서의 자연스러운 반응만을 드러냄으로써 목월 특유의 서정성이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삶의 애환을 포괄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내세우는 법이 없이, 목월은 그 천품(天稟)의 가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일상의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식욕을 바탕으로 한 실존적 자아의 모습을 극명히 보여 주는 이 시는 제목 ‘적막한 식욕’의 ‘적막’과 ‘식욕’으로 상징되는 삶의 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식욕이란 삶의 기본적인 속성이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가장 기초적인 욕구이다. 이러한 삶의 기본적 욕구가 앞의 ‘적막한’이라는 수식을 통해서 쓸쓸하고 조용한, 그리고 막막한이라는 정서적 속성과 결합되는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존재의 속성을 표출한 상징적 음식이 바로 ‘모밀묵’이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2행의 단연시이지만 의미에 따라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행으로 ‘모밀묵이 먹고 싶다’는 화자의 ‘적막한 식욕’을 진술하는 부분이며, 둘째 단락은 ‘모밀묵’의 속성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싱겁고 구수하고 /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모밀묵은 마치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 새 사돈을 대접하는’ 데 적격(適格)일 것 같은 수수하고 소탈한 속성의 음식임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단락은 그러한 ‘모밀묵’에 대하여 화자가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 허전한 마음이 / 마음을 달래’며 먹는 음식으로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고독하게 살아가며 ‘인생의 참뜻’을 깨달은 자가 ‘너그럽고 넉넉한 / 눈물’로 제 삶을 반추하며 먹는 음식이다.
이 시는 ‘모밀묵’이 갖는 속성이 ‘봄날 해질 무렵’이라는 시간의 이중적 속성(‘봄날’은 생명성이 발현되는 시간으로 상승적 이미지인 데 비해, ‘해질 무렵’은 낮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으로 하강적 이미지임)과 결합하여 ‘마음 = 꿈’이라는 추상적 공간으로 화자의 고독한 존재 양상을 보여 준다. 한편, 이 시는 모밀묵을 먹는 사람들의 식성과 모밀묵을 먹는 사람들의 삶의 속성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싱겁고 구수하고 /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모밀묵과 같은 모습으로 결국 자연과 동화될 뿐 아니라, 수직적․수평적 인간 관계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우리라는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는 평상인이 되며,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들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실존적 모습을 ‘모밀묵’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다.
우회로(迂廻路)
- 박목월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시집 청담(晴曇), 1964)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아내를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가, 가슴 졸이며 회복을 기다리는 남편의 애타는 심경을 함축된 시어와 심도(深度) 있는 이미지로써 표현한 작품이다. <자하산(紫霞山)>류의 전통적 시관(詩觀)에서 벗어나 언어와 의미가 형평(衡平)을 이룬 이 작품은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내가 입원하여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병원으로 향하는 남편의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을 것이고, 병원까지 가는 도중, 수술 결과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으로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인 <우회로>는 단순히 ‘멀리 돌아서 가는 병원 길’이 아니라 ‘병원을 찾아가는 남편의 불안한 마음의 길’인 것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시적 자아의 경험과 연상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질서 없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작품 속에 뒤엉켜 있는 내적 고백 형식의 이 작품은 전 19행으로 된 단연시로 내용상 2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10행의 1단락은 달빛 내려 깔린 듯한 불안감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과, 아내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 안도하는 모습을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객관적으로 번갈아 교차시켜 보여 주고 있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수술이 끝난 후, 화자인 남편은 병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달빛 깔린’ 불안감의 오랜 시간이 지나 ‘피가 응결되고’ 서서히 마취가 풀리며 아내는 깨어나게 된다.
11~19행의 2단락은 1단락의 내용이나 구성이 유사하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흔들리던’ 아내가 마침내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화자에게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마취에서 풀리듯 긴장했던 화자의 마음이 풀릴 때, 밖에서도 점차 어둠이 풀리며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러므로 ‘하얀 나선 통로’는 ‘우회로’와 동일한 이미지로 그것의 한층 고조된 표현이다.
이별가(離別歌)
- 박목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 1968)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별의 정한은 한국 시가의 정서적 광맥이다. 가시리에서 찾을 수 있는 별리의 정한은, 황진이에게 와서 서정 미학의 꽃으로 피더니, 소월에게 와서 역설의 미학으로 한 차원 높은 별리의 서정을 완성하는 듯하였다. 이제 목월은 삶과 죽음을, 이승과 저승을 뛰어넘는 어법을 터득하고 있다.
▶ 성격 : 인간적, 전통적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심상
▶ 운율 : 3음보 위주
▶ 어조 : 소박하고 친근한 어조
▶ 표현 : ① 방언 → 소박한 정감
② 반복과 점층 → 그리움과 안타까움 심화
▶ 특징 : 되풀이되는 질문(‘뭐락카노’) 속에 이별의 정한을 드러냄.
▶ 구성 : ①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별리(제1-4연)
② 끊어질 수 없는 인연(제5-7연)
③ 순응과 초극(제8,9연)
▶ 제재 : 인연과 이별
▶ 주제 : 생사를 초월한 이별의 정한
<연구 문제>
1. 이 작품을 대립적 구조로 볼 수 있다면, 대립된 두 세계는 무엇인가? <모범답> 이승과 저승 (차안과 피안)
2. ㉠을 ‘이별’과 연관지어 볼 때, ‘동아 밧줄’과 ‘삭아 내림’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지 70-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밧줄’은 결합 혹은 인연을 상징한다. 그것이 ‘삭아 내림’은 결합 혹은 인연의 소멸을 함축한다. 시간의 소멸, 만남의 소멸, 인연의 소멸을 함축하고 있다.
3. ㉡에 담긴 화자의 대답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100자 정도로 쓰라.
<모범답> 그 대답은 ‘말 없는 말’, 즉 언외언(言外言)의 세계로서 삶이 걸어가야 할 만남과 헤어짐과 다시 만남의 변증법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될 것이다.
4. 제2연의 ‘목소리’와 제9연의 ‘목소리’의 의미상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
<모범답> 제2연의 ‘목소리’는 운명적 상황의 비극적 인식에서 오는 ‘물음’이라면, 제9연의 ‘목소리는 온건한 자기 긍정과 운명적 순응에서 오는 초극의 ’대답‘이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시어는 ‘뭐락카노’이다. 경상도 지역의 방언은 한국 시사(詩史)의 전통에서 볼 때 특이한 예에 속하는데, 이 시어가 소설의 화소(話素)처럼 이야기를 끌고가는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누군가가 강의 저편에서 화자에게 말을 건네나 바람에 날려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강 이편의 화자 역시 상대에게 뭐라고 외치지만, 그 목소리 또한 확연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와 나를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은 것은 강― 강은 삶과 죽음의 간격을 의미할 터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인연인데, 그와 생전에 맺은 인연의 밧줄은 삭아 내리고 있다. 세상살이의 인연은 마치 갈밭을 건너는 바람과도 같이 덧없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되뇌인다. ‘하직을 말자’고. 나도 머지 않아 강 건너 저 세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뭐라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흰 옷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는 그가 어서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으로 여겨져 나는 ‘오냐, 오냐, 오냐’라고 알아 들었다는 듯이 대답한다. 나도 곧 갈 거라는 뜻일 게다.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단락인 제1-4연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벌리의 상황을 펼쳐 보이고 있다. 강기슭의 차안과 피안, 곧 이승과 저승으로 하직을 고해야 하는 것은 운명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냐? 라는 물음이 하나요,
제2단락인 제5-7연에서는 비록 운명적 상황으로 인한 별리일지라도 연(緣)을 끊어 놓을 수 없는 것 아니냐? 라는 물음이 둘이라면,
제3단락인 제8-9연에서는 온건한 자기 긍정으로 회귀하여 운명에 순응하면서 이별의 정한을 초극해 내고 있는 것이 셋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마침내 이별의 정한을 생사를 초극하는 경지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서정 미학의 정점에 ‘이별의 정한’이 놓이게 한 것이다.
가정(家庭)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 1968)
* 들깐 : 경상도 방언으로 부엌 가까이 설치되어 주로 주방 용품을 보관하는 곳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힘겨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돌아온 시인이 아버지로서의 고통을 토로하는 한편, 자식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 의식을 스스로 확인하는 작품으로, 현실적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생활시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화자는 실제의 시인과 거의 일치하며, 청자는 ‘강아지’라고 불린 그의 자녀들이다. 얼음판 같은 세상의 모습을 말하면서 다소 비감스러워하던 화자의 목소리는 자녀들에게 말을 건넬 때, 따뜻하게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연은 화자의 귀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화자는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문수가 각기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바라본다.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화자의 가정이 아홉 켤레의 신발 속에 함축되어 있다. 직업이 다르고 신분이 달라도, 또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그래서 그것이 현관이건 들깐이건 사람 사는 모습은 결국 똑같다. 그러므로 ‘지상’이라는 시어는 힘겨운 일상의 삶이라 할지라도 일단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면, 가정은 그 가족만의 하나의 행복한 지상 세계라는 뜻이라 할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식구들의 신발 옆에 자신의 신을 벗어 놓는다. ‘눈과 얼음의 길’은 바로 화자가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4연에서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아홉 켤레의 신발 중에서 특히 막내둥이의 것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막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강조하는 것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3연의 1~2행은 비록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온 화자이지만, 자녀 앞에서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3~5행은 고달프게 살아가는 화자의 가정을 의미한다. ‘연민한 삶의 길이여’라는 6행은 화자가 삶에 대해 느끼는 힘겨움을 직설적으로 토로한 것이며, 7행에서뿐 아니라 작품 전편에 등장하는 ‘내 신발은 십구 문 반’이라는 구절은 막내의 ‘육 문 삼’과 대비되어 화자가 자신의 신발을 거듭 의식하면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4연은 화자가 방에 들어가며 자식들에게 들려 주는 말이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는 표현은 현실 생활에 시달리는 화자의 고달픈 삶을 극명히 보여 주는 것이며, 비록 고달프게 살아가는 가정이지만,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존재한다’는 사실을 ‘십구 문 반’이라는 신발 크기로 강조하는 것은 그 큰 신발 속에 아홉 명의 자식들의 미래를 담고 있다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무를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시는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자식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모습을 화자의 가정을 통해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박노해論(본명:박기평)
― 시집 노동의 새벽을 중심으로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13일 낮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절규는 노동자계급 최초의 자기선언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수출 드라이브의 뒷전에서 나사못보다 못한 대우에 시달리던 한 노동자의 분노는 스물셋 젊은 몸뚱어리를 장작 삼아 불타올랐다. 그것은 노동해방이라는 미륵세상을 갈구하는 지성의 소신공양이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84년 가을, 노동자계급은 또 한 사람 그들의 대변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 몸을 불사르는 방식은 아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가지/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 첫 연>
전태일의 분신과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의 출간은 그 형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용에서는 동일한 것이라 할 만하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고발, 계급해방에의 간절한 열망, 동료 노동자들을 향한 각성과 단결에의 외침이 그 두개의 형식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그렇다는 것은 14년이라는 시간의 진행이 남한 노동자계급의 일과 삶에는 아무런 질적인 차이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노해(본명 박기평․39)씨가 공식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83년 황지우․김정환씨 등의 시동인 `시와 경제' 제2집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에 `시다의 꿈' `하늘' `얼마짜리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긴 공장의 밤/시린 어깨 위로/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드르륵 득득/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시다의 언 손으로/장미빛 꿈을 잘라/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끝도 없이 올린다
<`시다의 꿈'1․2연>
노동해방을 가리키는 필명을 앞세운 박노해의 등장은 남한 노동자 계급의 자기표현이 문학적 성숙을 이루었음을 뜻했다. 그의 시들은 송효순 유동우 석정남 등의 노동수기류를 계승하면서 발전적으로 넘어섰다. 수기와 생활글이라는 직접적이고 무기교적인 형식이 좀더 세련된 장르인 시로 넘어갔다는 점에 박노해 등장의 의미가 있다.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노해의 노동시편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일제시대의 뜨내기 노동자 출신 작가 최서해에 비견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슷한 무렵에 등단한 농촌 교사 시인 김용택과 함께 논의됐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 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 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 박노해의 등장이 촉발한 문학창작의 주체 논쟁은 87년 김명인씨의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민중문학의 구상'이라는 논문을 거치면서 민족․민중문학의 급격한 이념 분화로 이어진다.
박노해의 시집을 지금 읽어보면 당시 던진 충격은 많이 완화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박노해씨의 뒤를 잇는 여러 노동자 시인들의 시에 우리가 익숙해진 데다, 창작 주체에 관한 강박에서 벗어나 박노해 시의 성취와 한계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의 새벽>의 시들은 예외없이 노동자의 일과 삶을 노래한다. 거기 그려진 노동자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힘겨운 작업에 시달리며, 그 과정에서 프레스에 손목이 잘리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위험에까지 노출돼 있다. 신혼의 노동자 부부는 작업시간의 차이로 인해 얼굴을 마주보기조차 쉽지 않으며, 모처럼 찾아먹는 휴일에도 별다른 오락과 취미생활을 즐길 경제적 여유가 없다. 거의 유일하게 허용되는 소일거리란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꼼장어에 막걸리 몇 잔 걸치며 냉정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분노를 영영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줏잔을/돌리며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
<`노동의 새벽' 마지막 연>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박노해는 흔히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56년 전남 출생, 15살에 상경하여 현재 기능공'이라는, 시집 갈피의 간략한 소개말고는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은 `박노해'라는 이름이 노동시를 쓰는 창작집단이 편의상 내세운 공통의 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세상의 호기심과 상상에는 아랑곳없이 박노해는 새로 창간된 격월간 <노동해방문학>에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문 형태파괴적인 `시사시(時事詩)'들을 선보이는가 하면, 남북노동자회담 제안, 현대자동차 파업 격려, 문익환 목사 방북 환영 등의 시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노동자 시인에서 노동운동가이자 혁명가로 변신하는 듯했으며, 그의 행보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박노해 현상'이라는 조어를 낳는다.
무릇 모든 절정은 파국과 추락을 예비하고 있음인가. 그는 91년 봄 사노맹의 `수괴'로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해 <한겨레신문> 송년호에 실린 시 `그해 겨울나무'에서 그가 그해 겨울,/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고 갈파하거나, 옥중시집 <참된 시작>에 덧붙인 산문에서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둥근 소리'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데에서 이 혁명가 시인의 강파른 세계관이 변모를 겪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구로공단과 가리봉 일대에는 구둣발에 밟히는 낙엽과도 같은 쓸쓸함이 흘러다닌다. 시속에의 적응이 잰 눈에는 10여년 전과의 차이가 분명히 보인다. 치떨리는 분노와 강고한 희망이 공존했던 노동자들의 얼굴에서는 적당한 체념과 그만큼의 안락이 잡히는 것 같다. 진한 살색의 외국인노동자들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 역시두드러진 변화다. 가리봉역의 영어 안내방송은 그 한 부수효과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숫자가 줄어든 만큼 시장과 가리봉 오거리의 상점들 또한 흥청거리던 활기가 한결 덜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파업과 시위와 플래카드를 보기 어렵게 됐다. 박노해는 글렀던가? 적어도 그의 초발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등단작 가운데 하나인 `시다의 꿈'을 읽어 보자.
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허청이며 내달리는/왜소한 시다의 몸짓/파리한 이마 위로/새벽별 빛나다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재단사 보조)의 꿈, 그 꿈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전태일의 26주기를 맞아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들의 함성과 열기는 노동자 시인의 초발심이 역사의 한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시집 노동의 새벽, 1984)
<감상의 길잡이>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박노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산업 현장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일상적인 노동 체험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낸 시인이다. ‘노동 해방’의 약자인 ‘노해’를 그의 필명으로 삼은 그는 노동운동사상 ‘전태일’ 이후 노동자의 대표적 상징체이기도 하다. 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속히 독자층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1980년대 노동문학, 혹은 노동자 문학의 활성화에 불을 당긴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 후 소위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공식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1988년 제1회 노동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1989년 결성된 세칭 ‘사노맹’의 중앙 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현재 복역중에 있으며, 옥중에서 쓴 작품들을 모아 1993년 참된 시작을 출간하였다.
노동의 새벽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작품이다. ‘현장적 구체성’, ‘체험의 진실성’, ‘최고 수준의 정치적 의식과 예술적 형상화 능력’ 등의 말로 칭송받았던 이 시집의 작품들은 지식인의 관념이 아닌, 노동자의 노동 현장의 일상적 삶이 노동자의 언어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의한 부정의 대상이었다.
노동의 새벽의 표제시인 이 시는 5연 40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의미상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연으로 철야 작업을 끝내고 나서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라고 위기를 느끼는 발단 부분이다. 둘째 단락인 2,․3연은 화자의 서로 상반되는 자세가 나타나는 전개 부분이다. 즉, 2연은 ‘오래 못가도 /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나타내며, 3연은 ‘진이 빠진 / 스물 아홉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운명을 어쩔 수 없다’는 갈등이 상반된다. 셋째 단락인 4연에서는 ‘차거운 소주를 붓는’ 행동이 ‘분노와 슬픔을 붓는’ 행동으로 바뀌는 전환 부분이다. ‘슬픔’은 앞에서 나타났던 갈등의 연속이라면, ‘분노’는 체념을 넘어서는 힘이 된다. 넷째 단락인 5연은 절정과 화해를 이루는 부분으로, 4연에서의 분노의 힘이 더욱 확산되어 ‘절망의 벽을 /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 거치른 땀방울’로 퍼져나간다. 절망은 사라지고, 그 대신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희망과 단결의 의지를 다지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 ‘노동의 새벽’에서 ‘노동’은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의미하며, ‘새벽’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지펴려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고통과 초월이라는 대립 구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물론 단순한 대립 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갈등과 전환은 ‘절망의 벽’으로 제시된 노동 현실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 운명을 감싸안고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절실히 그려낸다는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새
- 박남수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태양, 1959.3)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박남수는 1939년 <문장>지에서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미지에 의한 형상화를 중시하고, 존재성(存在性)을 규명하려는 주지시 계열에 속한다.
이 시는 ‘새’라는 연작시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명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인간의 인위성과 파괴성에 대립시켜 문명 비판적 주제를 제시한 작품이다. 이 시의 (3)에서 새는 포수의 총부리에 희생되기도 하지만, 새의 순수함은 어쩌지 못한다는 말을 되새겨 보도록 하자.
▶ 성격 : 문명 비판적, 주지적
▶ 특징 : (1)에서는 이미지스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3)에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로 지적인 면을 보여 준다.
▶ 구성 : 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1)연
② 의미를 붙이거나 가식하지 않는 사랑---(2)연
③ 삶의 순수성의 파괴---(3)연
▶ 제재 : 새.(의도와 가식이 없는 순수의 표상)
▶ 주제 : 순수 가치의 옹호와 추구
<연구 문제>
1. 이 시의 주제는 어떤 이유에서 문명 비판적인가? 100자 내외로 쓰라.
<모범답> 이 시의 주제는 인간의 인위성과 가식성에 대조되는, 자연의 본능적 순수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인데, 바로 그 속에 인간 문명의 비정함과 파괴성을 꼬집는 문명 비판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2. ‘새’와 ‘포수’가 상징하는 의미를 밝혀 한 문장으로 쓰라.
<모범답> * 새 : 의도나 가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성
* 포수 : 자연스런 순수성을 파괴하는 비정하고 공격적인 인간 문명의 주체
3. ㉠이 환기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모범답> ‘한덩이 납’은 인간의 기계 문명의 상징이다. 그 무게와 촉감과 빛깔처럼 어떤 따뜻함도 여유도 없는 견고함, 냉정함, 차가움과 비생명성, 비순수성을 환기해 준다.
4. ㉡을 ‘속화된 비순수(非純粹)’로 본다면, (3)에서 표현하고자 한 내용은 무엇인가?
<모범답> 순수하지 못한 존재가 순수함을 추구하나 이루어질 수 없음을 표현하였다.
<감상의 길잡이>
주지시 계열의 시로서, 이 시는 좀처럼 시인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 이 시는 조심해서 살펴보면 (1)과 (2)가 서로 대응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1)에서 새는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울고,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그 내용이 (2)에서 아포리즘化 되어 반복된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는 그저 울고 싶어 우는 것일 뿐, 무슨 특별한 뜻을 염두에 두고 울지 않으며,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 체온을 나눌 뿐이지 억지로 사랑을 꾸미지 않는다는 것이다. (3)에 와서 시인은 그것을 ‘순수’라고 명명(命名)한다. 그러나 그 순수를 의도적으로 겨냥할 때, 그것을 잡았는가 행각하는 순간 순수는 사라져 버리고 남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 즉 순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고, 의도된 모든 것은 비순수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의 인생관과 시작(詩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아마도 일체의 의미가 배제된 순수한 언어에 의해서만 시작(詩作)이 가능하며 그것이 최선의 시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의미가 배제된 언어에 의해서 구축된 시는 시인이 의식하거나, 의도하거나, 가식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한 것이 되며,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 하는 문제는 이미 시인의 손에서 떠난 것일 수밖에 없다.
한편 (3)에서는 순수로 명명(命名)된 새의 ‘사랑’과 ‘노래’와 대조를 이루는, 인간의 잔혹함의 표상인 ‘한 덩이 납’이 등장한다. 인간의 비정(非情)함이 삶의 순수성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