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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페르시아 원정, 아나톨리아 반도 점령, 이수스 전투,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Jobs9 2021. 5. 1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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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바로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서 태어났으며 공식적인 호칭은 알렉산드로스 3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3년 동안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우면서 학문적인 소양을 닦았고 전술 및 행정에 관해서는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에게 배웠다. 필리포스 2세의 맏아들로서 BC 340년 필리포스 2세가 비잔티움을 공격할 때 마케도니아의 대리통치를 맡았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직접 좌익을 지휘하며 승리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필리포스 2세의 후계자 교육을 착실하게 받았지만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사이가 좋지 않아 실제로는 아버지와는 소원한 사이였다.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에페로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혈통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필리포스 2세가 후실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인 아툴루스가 결혼 축사로 마케도니아 순수혈통의 훌륭한 후계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분이 상하여 술잔을 집어던지며 분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어머니 올림피아스와 함께 잠시 추방당했다가 겨우 아버지와 화해하고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위치가 위태로울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그 배후로 동시대는 물론 후대 역사가에게 끊임없이 의심받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권력 장악과 그리스 패권 유지

 

필리포스 2세가 후계자를 직접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기 때문에 왕위다툼의 혼란이 우려되었지만 종군 경험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의 지지를 받음으로서 손쉽게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BC 336년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우선 자신의 왕위에 위협이 되는 형제들과 귀족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리고 필리포스 2세의 위협에 헬라스 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그리스 폴리스들이 이반의 움직임을 보이자 직접 기병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하여 테살리아를 평정했다. 이 덕분에 그리스 폴리스의 동요가 진정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헬라스 동맹의 맹주 자리와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추진하였던 페르시아 원정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모두 이어받을 수 있었다.

 

즉위 1년 후인 BC 335년 봄 페르시아 원정에 앞서 트라키아로 진군하여 트라키아인을 제압하였고 북쪽의 도나우강까지 진출하여 게타이인을 격파하였다. 이때 그리스 서쪽의 일리리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갔고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서 테베가 반란을 일으키자 아테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일리리아의 반란을 토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즉각 남하하면서 테베를 포위하였고 테베가 끝까지 항거하자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려 본보기로 삼았다. 이에 놀란 아테네가 항복의 뜻을 밝히자 이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대하여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의 동요를 막았다. 

 

 

페르시아 원정

그라니코스 강 전투

 

즉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에 1만 3천의 병력을 남기고 안티파트로스에게 마케도니아 통치를 위임한 후 즉위 3년차인 BC 334년 마침내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사이에 놓은 좁은 해협인 펠레스폰트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로 향하면서 본격적인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군은 보병 약 3만명과 기병 5천 그리고 헬라스 동맹군 7천명으로 구성되었다. 특이한 것은 원정군 속에 측량사, 기술자, 건축가, 과학자, 궁정 관리, 역사가들을 대동하였다는 점인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처음부터 원정을 단기간에 끝낼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출병소식에 대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이 지역을 통치하던 헬레스폰트 프리기아의 태수(사트라프)인 아르시테스가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실리시아 태수인 아르사메스와 의 내륙까지 이어진 헬레스폰트 프리기아의 태수인 아르시테스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의 리디아와 이오니아의 태수인 스피트리다테스, 그리고 그리스 용병대장인 로도스섬의 멤논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멤논이 장거리 원정에 나선 그리스군의 약점을 노리고 이동로에 있는 모든 곡식을 불태우고 해군을 이용하여 그리스군의 보급로를 교란하는 작전을 제안했지만 페르시아 태수들은 멤논이 그리스인이라는 점에서 페르시아 태수들은 멤논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지 않았고 자신의 영토를 불태우는 것에 많은 반감을 보였다. 결국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그리스 용병에 대한 보수만 늘어날 뿐이라는 생각에 거절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그라니코스 강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중앙에 중장보병이 위치하고 좌우에 기병이 포진하는 전통적인 진형을 취했다. 이에 반해 페르시아군은 기병을 보병 앞에 배치시켰다. 페르시아군의 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직접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초기에 전사시켜 전쟁을 단기전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의 의도가 처음에는 들어맞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노장 파르메니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우익 기병을 직접 이끌고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전투는 혼전 양상을 띄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장군인 미트라다테스와 스피트리다테스의 동생인 레사세스 등 많은 페르시아 귀족들을 죽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 자신도 스피트리다테스의 도끼로 공격당해 잠시 기절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흑인 심복 클레이토스가 스피트리다테스를 죽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이 돌격을 개시하자 그리스에서부터 막강한 위력을 자랑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진형에게 훈련도가 낮았던 페르시아의 경보병들은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페르시아의 귀족 지휘관들이 많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페르시아군의 진형이 겉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페르시아의 기병이 먼저 퇴각하기 시작했고 보병대도 도망갔다. 멤논의 그리스 용병들만 전장에 남겨졌고 멤논이 항복을 거절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공격을 명령하여 그리스 용병 18,000명 중 절반을 죽이고 8,000명을 노예로 삼아 마케도니아로 보냈으나 멤논은 무사히 도망쳤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첫번째 전투였던 그라니코스 강 전투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쓴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쪽 전사자는 단 115명 뿐이었다고 한다. 

 

 

아나톨리아 반도 점령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라니코스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지역을 지키던 페르시아군이 와해되었다.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들이 자진해서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프리지아의 고르디온에 입성한 후 전설상의 프리지아 창건자인 고르디우스와 그의 아들이 신탁에 따라 우마차를 나타나 왕위에 오른 뒤에 타고온 우마차를 신관들이 신전기둥에 매달아 놓은 '고르디우스의 매듭' 풀기에 도전하였다. 신탁에 따르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된다고 하였으나 매듭이 너무 정교하고 복잡하여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풀 수 없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매듭을 풀지않고 칼로 내리쳐 잘라버리는 일화를 남기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의 왕이 되었지만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칼로 잘라서 풀었기 때문에 그의 제국이 오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그라스코스 강 전투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탈출한 멤논에게 4백척의 페르시아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를 막아내도록 하였다. 멤논은 본래 자신의 전략에 따라 바다에서 그리스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한편 그리스 폴리스 중에서 유일하게 마케도니아의 헬라스 동맹의 참여를 거절하였던 스파르타에게도 접근하여 마케도니아를 공격하도록 선동하여 후방을 교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멤논의 전략은 변변한 해군이 없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지만 멤논이 열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중단되는 행운이 이어졌다. 멤논이 죽으면서 이제 더이상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를 막아낼 세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1년동안 별다른 저항없이 진격을 거듭하여 1년간 아나톨리아 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고 BC 333년 5월 앙카라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와 시리아의 접경 지역인 타르소스에 도착하였다.

 

 

이수스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석권하고 있는 사이에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도 제국의 각지로부터 군대를 끌어모은 후 반격을 위해 소코이에 도달했다. 이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타르소스에서 열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던 상태였다. 이에 노장 파르미니온을 먼저 보내 시리아로 이어지는 군사적 요충지인 이수스를 지키게 하였다. 만일 페르시아군이 먼저 이수스 를 차지하면 해군을 이용하여 바다를 통한 보급이 가능해지는 동시에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배후를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리우스 대왕은 파르미니온군을 피하여 시리아에서 우회하여 북쪽에서 이수스 평원으로 진격했다. 파르미니온은 무모하게 페르시아 군과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병력을 유지한 채 후퇴하였고 열병에서 회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본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제 차단된 보급로 확보하고자 이수스 평원으로 향하면서 마침내 BC 333년 11월에 다리우스 대왕와 직접적인 대결인 이수스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병을 양익에 배치하고 가운데에 중장보병을 팔랑크스 대형으로 위치시키는 전형적인 진형을 취했다. 비록 기병을 좌우익에 나누었지만 주력은 어디까지나 마케도니아의 정예군인 헤티아로이 중기병이 위치한 우익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왼쪽에는 테살리아 기병이 위치하였고 중앙의 중장보병 지휘는 파르미니온이 맡았다. 이에 맞선 페르시아 군은 임모탈이라고 불린 친위대가 중앙 후위에서 다리우스 대왕를 호위하였고 전방 중앙에 그리스 용병과 페르시아 경보병을 배치하였으며 시리아, 박트리아 등지에서 징집된 기병 11,000이 우익에 위치시켰다. 다만 좌익은 산기슭 지형으로 기병 운용이 힘들것으로 판단하고 경보병 일부만을 배치하였다. 숫자 면에서는 페르시아군은 무려 10만명으로 4만명의 마케도니아 군을 압도하였지만 보병 대부분이 여전히 마케도니아와 같은 중장보병이 아니라 경장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투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강을 건너 마케도니아의 왼쪽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왼쪽 날개에 위치한 테살리아 기병들이 전투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최대한 버티면서 오른쪽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헤타이로이 기병이 페르시아를 격파할 시간을 벌어주는 데 성공하였다. 그사이 중앙의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이 팔랑크스 대형을 이룬 채 강을 건너 페르시아의 전열에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허약한 페르시아 경보병을 무너뜨리고 다리우스 대왕이 있는 페르시아의 본진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페르시아의 전열을 급속히 무너졌고 다리우스 대왕은 급히 후방으로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대왕를 뒤쫓지 않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좌익을 돕기 위해 페르시아 군을 뒤에서 공격했다. 다리우스 대왕의 후퇴로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도 분전하던 페르시아 보병도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방 공격은 버티지 못했고 결국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스군은 패주하는 페르시아 군을 해질 때까지 뒤좇아 일방적으로 학살하였는데 이때 페르시아군의 시체로 강은 붉게 물들고 둑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이수스 전투에서 대패한 페르시아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주력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병이 와해되어 버렸고 다리우스 대왕은 4천명의 병사와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간신히 병력을 수습한 후 자신의 왕궁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본진 막사에 어머니, 아내, 딸을 모두 버려두고 도망쳤기 때문에 모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포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대왕의 가족들을 정중히 대접하도록 하였다.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점령

 

다리우스 대왕이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를 막을 수 있는 병력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파르메니온을 먼저 보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도록 했고 다리우스 대왕이 평화협상을 제안해오자 자신을 아시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항복하라는 오만한 답장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남하하며 지중해 해안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해안도시를 모두 차지하게 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가장 큰 우환거리였던 페르시아 함대는 근거지를 잃고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것이었다. 지금의 레바논에 해당하는 비블로스와 시돈은 손쉽게 저항하였으나 티루스만은 7개월이나 저항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갖은 공성전에 BC 332년 7월 티루스가 무너졌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본보기로 티루스 시민 1만명을 살해하고 3만명을 노예로 삼았다. 

 

팔레스타인의 가자도 2개월간 저항하였지만 결국은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BC 332년 11월 이집트에 도착하자 페르시아의 태수인 마자케스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파라오의 전통적인 이중왕관을 쓰며 대관식을 치뤘고 이집트인을 회유하기 위해 통치를 이집트인에게 위임했지만 군대의 지휘만은 마케도니아인이 맡도록 하였다. 특히 나일 강 서쪽 지류 부근 바다와 마레오티스 호수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신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겨울동안 이집트 통치의 정비를 마친 후 BC 331년 봄 티루스로 돌아와 이제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가우가멜라 전투

 

BC 331년 여름에 시리아에서 출발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중장보병 3만1천명, 기병 7천명, 경보병 9천명, 도합 약 4만7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별다른 저항없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건너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로 진격해 들어갔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 역시 제국 각지에서 군대를 긁어모아 대략 10만명 정도의 규모가 되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농민을 강제징집한 오합지졸들이었고 정예병력은 친위대인 임모탈과 그리스 용병 뿐으로 대략 1만8천명 정도에 불과했다. 다만 동맹을 맺은 북방의 스키타이 부족으로부터 기병을 지원받았고 전차 200대와 인도 코키리 15마리도 배치시킨 상태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자신의 숫적인 우위를 잘 살리기 위해 평탄한 지형인 지금의 이라크 모술 부근의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군대를 이끌고 대기하였고 BC 331년 10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우가멜라 평원에 도착하면서 양국의 운명을 가르는 가우가멜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가우가멜라는 "낙타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리우스 대왕은 임모탈과 호위 기병대, 그리스 용병의 호위를 받으며 궁병과 함께 중앙에 위치했다. 그리고 좌우에 기병대를 포진시켰고 기병대의 선두에 전차를 배치했으며 징집한 보병들은 후위에 위치시켰다. 이에 맞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여전히 중앙에 팔랑크스 대형의 중장보병을 배치하고 기병을 양 옆에 포진시키는 전형적인 진형을 취했다. 오른쪽에는 언제나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최정예 헤타이로이 중기병과 파이오니아, 마케도니아 경기병을 지휘하고 왼쪽날개에는 파르메니온이 테살리아와 그리스 용병, 트라키아 기병대를 지휘했다. 중앙의 팔랑크스는 이중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숫적으로 우세한 적에 대항하여 좌우익의 균열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전투에서 이수스 전투에서 보여준 전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 보여주었다. 그 계획은 페르시아 기병대를 최대한 좌우 날개쪽으로 끌어들여서 적진의 틈을 만들고 그 틈을 이용해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침투해 들어가 결정적인 일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완벽한 타이밍과 기동을 요하는 전술이었고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자신이 제일 먼저,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움직여야 하는 위험천만한 작전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적의 기병을 최대한 끌어들이기 위해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배치되었고 다리우스 대왕은 이수스 전투의 패배 때문에 잠시 망설였으나 새로 배치한 전차의 위력을 믿고 결국 선제공격에 나섰다.

 

다리우스 대왕이 먼저 전차를 돌격시키자 그리스군은 맹렬하게 돌진하는 전차에 맞서 제1열이 비스듬히 물러난 사이에 제2열이 전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결국 전차는 마케도니아 창병에 의해 포위되었고 전차기수들을 손쉽게 찔러죽일 수 있었다. 특히 마케도니아의 중장보병이 보유한 엄청난 길이의 창인 사리사 앞에서 전차는 무력하기만 했다. 전차의 돌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페르시아군이 점점 더 그리스군의 우측으로 밀고 들어왔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병력을 천천히 제2선으로 물린채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이끌고 페르시아군에게 결정적인 반격을 가할 기회를 노렸다. 그사이 그리스군의 전열을 커다란 쐐기모양으로 변했고 뒷편에서 팔랑크스 대형을 이룬 중장보병이 거대한 방벽이 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병대를 이끌고 다리우스 대왕이 있는 페르시아군 본진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다리우스 대왕 역시 기병대를 이동시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진격을 막도록 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교묘하게 페르시아군의 경보병 사이로 파고 들어가 천천히 돌격하고 있었다. 마침내 페르시아군의 좌익과 본진 사이에 일순간 빈틈이 생겼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병대를 이끌고 밀고 들어갔다. 이렇게 갑자기 방어선을 돌파당하자 페르시아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병대가 다리우스 대왕를 호위하던 임모탈과 호위 기병대, 그리스 용병대를 모두 물리치며 다리우스 대왕를 향해 돌진하였고 이에 놀란 다리우스 대왕이 이수스 전투에 이어 이번에도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수스 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다리우스 대왕를 사로잡기 위해 서둘러 추격을 명령했지만 이때 파르미니온으로부터 마케도니아 좌익 기병이 페르시아 기병에게 돌파당해 팔랑크스 중장보병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대왕의 추격을 단념하고 파르미니온을 기병대의 진격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파르미니온의 다급한 전갈과 달리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곧바로 다리우스 대왕에 대한 추격을 다시 명령하였고 해질 때까지 쉬지도 않고 추격했으나 결국 붙잡는 데는 실패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다리우스 대왕은 이수스 전투에 이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대패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을 계속하였고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수도 중 하나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바빌론을 별다른 저항없이 입성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샤한샤(왕중왕)가 되었다. 항복한 바빌론의 태수 마자이오스는 그대로 태수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바빌론이 항복하자 페르시아의 다른 수도인 엘람의 수사도 항복하였고 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로잡았던 다리우스 대왕의 가족들을 수사로 이동시켜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비록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수도 중 가장 큰 도시인 페르세폴리스의 태수 아리오바르자네스는 페르시아 관문고개를 지키며 저항에 나섰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관문고개를 우회하여 페르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BC 330년 봄 페르시아의 4대 수도 중 마지막으로 남은 메디아의 엑바타나가 점령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도망쳤던 다리우스 대왕은 엑바타나로 도망쳐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미 다른 페르시아 태수들이 따르지 않는 상황이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엑바타나까지 진격해오자 박트리아로 도망갔지만 박트리아의 태수인 베수스는 오히려 다리우스 대왕를 죽이고 스스로 페르시아의 왕위에 올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라고 칭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대왕의 시체가 도착하자 자신의 최대의 적이자 페르시아의 지배자로서의 대우를 하기 위해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고 페르시아의 왕실무덤에 안장시켜 주었다. 이렇게 하여 페르시아 제국이 멸망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와 오리엔트, 이집트를 모두 지배하는 대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혼성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부왕 필리포스 2세가 키워낸 마케도니아 정예병력과 헬라스 동맹에 의한 그리스 동맹군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동방원정을 떠났다. 마케도니아 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자신이 친히 이끄는 헤타이로이 중기병과 거대한 사리사 창을 든 페제타이로이 중장보병, 그리고 필리포스 2세의 근위대였던 히파스피스타이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동맹군으로 전통적인 그리스 중장보병 호플리테스와 테실리아 지방에서 데려온 경기병이 가세하였고, 산개하여 투창 및 활로 원거리 공격을 하는 산병도 보유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병과로 구성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부왕 필리포스 2세가 개발한 "망치와 모루" 전술을 발전시켜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페르시아 군도 점령지에서 강제로 징집해 온 병사와 용병 등으로 부대를 구성하였기에 다양한 병과가 혼재되어 있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달리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따로따로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언제나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페르시아 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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