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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박트리아 원정, 북인도 원정, 헬레니즘 제국 탄생

Jobs9 2021. 5. 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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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트리아 원정

 

다리우스 대왕이 죽자 이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원정이 마무리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헬라스 동맹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테살리아와 그리스 동맹군을 모두 본국으로 되돌려 보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그대로 페르시아에 남긴 채 페르시아의 잔당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동방의 박트리아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다.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엘부르즈 산맥을 넘어 카스피해 근처의 히르카니아로 진출하자 그 곳의 페르시아 태수와 귀족들이 항복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들 중 일부에게 그대로 통치를 맡겼다. 그리고 엘부르즈 산맥에 거주하던 산악부족인 마르디족을 격파하였고 페르시아군에 종사하던 그리스 용병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또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사티바르자네스를 토벌하고 헤라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두번째 신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아리아나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번 박트리아 원정에 페르시아 원정에 큰 공을 세운 노장 파르메니온을 함께 하지 않고 메디아에 남아 보급수송을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원정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파르메니온을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파르메니온의 아들인 필로타스를 알렉산드로스 대왕 암살혐의 처형했다. 그리고 엑바타나에 머물던 파르메니온은 그 부하인 클레안드로스에게 서신을 보내 암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제 마케도니아군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이 주요 요직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최정예 부대인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2개로 나뉘어 한 부대는 헤파이스티온에게, 다른 한 부대는 클레이토스에게 각각 지휘를 맡겼다.

 

파르메니온 암살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은 거듭되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해당하는 파로파미사다이족의 영토로 진입해 그곳에 세번째 신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아라코시아를 건설하였다. 이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가장 큰 위협은 다리우스 대왕를 죽은 후 페르시아 왕을 참칭하고 있던 박트리아의 베수스였다. 베수스가 세력을 모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군대를 이끌고 박트리아를 공격했다. 이를 당하지 못한 베수스가 옥수스 강을 건너 도망쳤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부하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를 보내 추격하게 했다. 결국 베수스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소그디아나의 스피타메네스에게 생포되어 박트리아로 송환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대왕를 시해한 혐의로 처형하였다.

 

이후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진격을 계속되어 지금의 시르다리야 강까지 진출하여 스키타이 부족을 몰아내고 지금의 타지키스탄의 후잔트 근교에 4번째 신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했다. 그 사이 베수스를 토벌했던 소그디아나의 스피타메네스도 반란을 일으키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28년 가을에 이들을 모두 토벌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 지금의 타지키스탄의 산악지대에 살던 산악부족의 토벌에 나섰고 이들을 다스리던 옥시아르테스을 물리치면서 박트리아 원정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박트리아에 대한 유화책으로 옥시아르테스의 딸인 록사네와 결혼을 하였다.

 

 

 

북인도 원정 시작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시리아는 점령 이후 마케도니아인 태수를 임명했지만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한 이집트와 바빌론의 경우에는 다리우스 대왕이 임명했던 페르시아 태수를 그대로 유임시킨 바 있었다. 이 때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인이 페르시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인과 페르시아인이 하나로 융합하는 정책을 생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마케도니아인에게 불만을 갖게 만든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을 제우스의 아들이라며 신격화하고 있었고 이집트 정복시에도 이집트 신들의 왕인 아몬을 제우스와 동일시하며 아몬의 아들로서 파라오의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격화는 마케도니아의 왕이라기 보다는 페르시아의 제왕과 같은 태도였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인의 신임을 더욱 잃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술자리에서 2명의 헤타이로이 기병대장 중 한 명인 클레이토스와 다투게 되었고 술에 취해 살해한 후 사후적으로 클레이토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마케도니아인의 신뢰가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박트리아 원정이 끝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전쟁을 멈추지 않고 세상 끝까지 진군한다는 유아적인 발상으로 북인도 원정을 추진하였으나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많은 불만을 가졌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종군을 거절하였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페르시아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더이상의 정복전쟁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항명에 당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돌아가고 싶어하는 병사들과 장군들을 귀국시키고 대신하여 아시아인으로 자신의 군대를 충당하였으며 죽은 클레이토스를 대신하여 페르디카스를 새로운 헤타이로이 기병대장으로 임명하는 홍역을 치르고 나서야 BC 327년 여름에 북인도 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히다스페스 강 전투

 

가장 먼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지금의 파키스탄 부네르 강 북쪽과 인더스 강 서쪽으로 수㎞ 떨어져 있는 가파른 언덕에 있는 천혜요새인 아오르노스를 만났다. 사실 아오르노스는 산스크리트로 '울타리' 또는 '요새'를 뜻하는 아바라나를 '어떠한 새도 날아오르지 못할 곳'이라는 의미의 '아오르노스'로 잘 못 이해한 것이었다. 어쨌든 천혜요새답게 정면으로의 돌격이 여의치 않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반대편 언덕을 점령하고 투석기를 사용하여 아오르노스 안에 있던 인도군을 격파해 내었다. 

 

이듬해인 BC 326년 봄이 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더스 강을 건너 지금의 파키스탄의 라왈핀디 북서쪽으로 약 35㎞ 떨어진 탁실라에 진입했다. 탁실라를 통치하던 탁실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자 히다스페스(지금의 젤룸) 강과 아케시네스(지금의 케나브) 강 사이를 지배하며 탁실라를 위협하고 있는 포로스를 공격해주는 조건으로 병력과 전투코끼리를 제공했다. BC 326년 6월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포로스의 인도군과 히다스페스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보병 1만 5천명과 기병 5천을 보유하고 있었고 포루스 군은 보병 3만명과 기병 4천, 전차 300여대, 전투 코끼리 2백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포루스는 키가 240cm 이상의 거인이었다고 한다. 

  

양군이 대치한 히다스페스 강은 강폭이 800m나 되었고 때마침 강우로 범람하기 시작하여 강을 건너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약 25km 떨어진 상류 부근에서 적당한 도하지점을 발견하였고 안전한 도하를 위하여 기병으로 강 건너편에서 이리저리 이동하여 강을 건너려는 척 하면서 포루스 왕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강을 건너지 않자 짜증이 난 포루스는 병사의 이동을 금했고 때마침 닥친 폭풍우로 시야가 막힌 틈을 타 밤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본진에 병력 5천과 기병 일부만을 남긴 채 몰래 상류로 이동하여 도하에 성공하였다. 포루스는 뒤늦게 마케도니아 군의 도하를 알아챘으나 여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본군은 강건너 편에 있고 일부 병력만 도하에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아들에게 불과 기병 2천과 전차 120대만 맡긴 채 보냈다. 포루스의 아들은 분전하였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직접 이끄는 마케도니아 정예기병의 상대는 되지 못했고 포루스의 아들도 전사하고 말았다.

 

아들의 전사 소식에 격노한 포루스가 전군을 이끌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으로 진군하였다. 포루스는 3만의 보병으로 무려 3km에 달하는 횡진을 펼쳤고 기병을 좌우에 배치하였으며 전투코끼리와 전차는 각각 보병과 기병의 선두에 세웠다. 전투코끼리 때문에 정면대결에서는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휘하 장군 코에누스에게 기병대 1개 대대를 이끌고 크게 우회하여 포루스 군의 우익과 배후를 공격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본군은 중장보병이 가운데에서 8개의 팔랑크스 진형을 짰고 남은 4개의 기병대는 좌익에 포진하였다. 전투가 개시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좌측 기병과 포루스의 우익 전차가 먼저 격돌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병이 폭풍우로 인한 진흙으로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진 포루스의 전차를 측면 공격으로 순식간에 궤멸시켰다. 

 

이에 당황한 포루스는 우익의 기병대를 지원보냈으나 때마침 밀명을 받고 배후로 우회하였던 코에누스 기병대의 공격으로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병을 직접 지휘하여 포루스 보병의 좌측을 급습하였다. 포루스 군은 양면에서 공격을 받자 크게 당황하였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포루스 자신이 직접 전투코끼리를 타고 전투코끼리들을 이끌며 돌진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보병들이 퍼부은 투창과 화살에 상처를 입고 이리저리 날뛰며 코끼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부상당한 전투 코끼리의 난동 때문에 전장은 엉망이 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과 포루스 군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강 건너에 있던 크라테로스의 부대까지 나타나 포루스 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측면공격에 결국 포루스 군은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고 포루스는 도주하였으나 곧 붙잡혔다. 결국 포루스가 항복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포루스에게 여전히 편자브 지방의 통치를 맡겼다.

 

 

  

 

전투코끼리의 등장

 

전투 코끼리는 아프리카와 인도라는 서식지 제한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자주 동원되었다. 코끼리의 큰 포효와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땅의 진동은 적군의 사기를 꺾는데 효과적이었고 코끼리를 처음 본 군마들은 놀라 날뛰었기 때문에 적 기병을 제압하는 데도 쓸모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투코끼리는 거대한 몸집으로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진형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코끼리가 전투용으로 동원되었으며, 유럽세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15마리를 처음 맞닥뜨리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인도 원정 중 포루스 왕과의 대결에서 200마리의 전투코끼리를 상대했으며, 이 전투에서 상처입고 날뛰는 코끼리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이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이 인도원정을 거부하였는데, 더이상 전투코끼리를 상대하기 싫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때의 강렬한 인상 덕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별도의 코끼리부대를 창설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도 헬레니즘 세계의 군대들이 코끼리를 대량으로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코끼리는 엄청난 덩치와 위압적인 외모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을 지녀 쥐와 같은 작은 동물이 나타나도 놀래기 일수였고, 소음을 싫어하여 나팔소리 등에 도망치곤 했으며 기마와 마찬가지고 보병들의 장창 벽을 돌파하려고 하질 않았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전투코끼리는 전투 중에 오히려 아군 진형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 전투병기로서 부적합했지만 처음 본 상대에게 큰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중근동과 이집트 등 매우 광범위한 범위에서 전투병기로 사용되었다.

  

 

헬레니즘 제국의 탄생

 

히다스페스 강 전투 에서 힘겹게 승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후로도 계속 진군했다. 그러나 하루 60~80킬로미터를 걸으며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사이 지친 병사들은 귀국하기를 바랐다. 열병과 기후 악조건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세상 끝에 도착했다는 착각을 했고 그들 앞에는 지금까지 마주한 적들보다 훨씬 강한 적이 있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채 병사들이 더이상의 진군을 거부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흘을 기다리며 병사들의 맘이 바뀌기를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더이상의 진군을 포기하고 귀환을 결정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도 험난하여 장장 2년에 걸친 회군 끝에 BC 324년 초가 되어서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그리스와 오리엔트, 이집트, 박트리아, 북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지배하게 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단순한 지배자로 군림한 것이 아니라 동서문화 융합정책을 추진하였다. 제국 전역의 도시들을 건설 혹은 재건하였고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도 제국 곳곳에 추가로 건설하여 70개나 되었다. 또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결혼을 장려하여 그 자신이 먼저 페르시아 왕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하였고 자신의 부하 80여명을 페르시아 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거기에 페르시아인들을 동등한 조건으로 군대와 지방행정기관에 기용하였고 마케도니아식 군사훈련을 받은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등의 출신들을 기병대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동서문화 융합정책이 새로운 혼성문화를 창조하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한 단순한 과대 망상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이 정책으로 인해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요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융합정책은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BC 324년 퇴역군인들을 마케도니아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결정하자 마케도니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본국을 버리고 아시아를 제국의 중심으로 삼을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다. 공공연한 명령불복종이 일어났고 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군대를 해산하고 페르시아인으로 새롭게 군대를 편성하며 강경책을 나섰고 한편으로 대규모 화해잔치를 열며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하였다. BC 323년 봄 바빌론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리비아인들과 이탈리아의 브루티움인, 에트루리아인, 루카니아인이 보낸 하례사절들을 영접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남쪽의 아라비아 반도로 원정을 떠날 생각을 가졌으나 이미 오랜 군사원정을 거듭하며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잦은 연회를 벌여 더욱 기력이 떨어졌다. 결국 갑자기 병에 걸렸고 열흘 후인 BC 323년 6월 13일 불과 33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그 지역의 모기에 물려 걸린 말라리아로 추정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이는 아직 박트리아 출신의 왕비인 록사네의 뱃속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페르디카스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먼저 왕으로 선출하고 록사네가 아들을 낳는 경우 그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아리다이오스는 심신이 병약했고 왕비인 록사네는 박트리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었다. 이에 헤타이로이 기병대장 중 한 명이었던 페르디카스가 섭정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장수들이 저마다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일명 '디아도코이(Diadochi; 후계자)'를 자처하게 되는데 주요인물로는 마케도니아 총독 안티파트로스, 프리지아 총독 안티고노스, 이집트 총독 프톨레마이오스, 트라키아 총독 리시마코스, 카파도키아 총독 에우메네스, 바빌로니아 총독 셀레우코스, 메디아 총독 페이톤 등이 있다.

  

 

디아도코이 전쟁

 

디아도코이 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안티고노스였다. 안티고노스는 페르디카스에 대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등과 동맹을 맺었다. BC 321년 페르디카스가 암살되고 안티파트로스가 섭정이 되면서 안티고노스의 반란은 취소되었고 대신하여 페르디카스를 지지했던 에무메네스를 공격하기 위하여 아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뒤인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고 폴리페르콘이 새로운 섭정이 되자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와 합세하여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와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카산드로스가 폴리페르콘를 몰아내고 마케도니아를 차지하는 사이에 안티고노스는 폴리페르콘을 지지하던 에우메네스와 페이톤을 처형하고 셀레우코스를 몰아낸 후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하였다. 

 

안티아고노스가 시리아까지 점령한 후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오르자 이번에는 안티고노스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한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가 동맹을 맺고 안티아고스에게 대항하는 제1차 동맹전쟁(BC 315년 ~ BC 311년)을 일으켰다. 결국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를 제외한 모든 디아도코이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각자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하면서 안티고노스는 섭정의 지위를 포기하였고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분열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후 이집트로 도망쳤던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회복한 후 동쪽으로 계속해서 영토를 확대하였다. 다만 인도 국경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부터 전투방법을 배운 찬드라 굽타에게 저지당했는데, 참고로 찬드라 굽타가 편자브 지방에서 창건한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가 된다. 

 

카산드로스는 BC 309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망인 록사네와 유복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독살하였고 다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생아인 헤라클레스의 독살도 사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혈통이 단절되자 더욱 거칠 것이 없어진 디아도코이들은 각자 자신이 차지한 지역에서 왕과 같이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세력이 가장 큰 안티고노스가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고 나머지 디아도코이들이 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하면서 제2차 동맹전쟁(BC 310년 ~ BC 301년)이 발발하였다. 안티고노스는 자신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를 파견하여 BC 307년 아테네에서 카산드로스 세력을 축출하였고 이듬해에는 키프로스 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를 격파한 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에 디미트리오스를 공동왕이자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BC 305년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막아낸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이에 뒤질세라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도 각기 왕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몰락과 제국 분열의 고착화

 

안티고노스와 반안티고노스 세력의 대결은 BC 301년 절정에 달했다. 안티고노스가 상징성이 높은 마케도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카산드로스에게 항복을 요구하자 경각심을 느낀 다른 디아도코이들이 안티고노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셀레우코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부를,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를,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를 각각 침공하였다. 이에 안티고노스가 자신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와 함께 먼저 리시마코스를 공격했고 고립된 리시마코스가 다급하게 구원요청을 보내자 이에 응한 셀레우코스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입소스 전투가 시작되었다. 

 

입소스 전투에서 병력은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이 열세였으나 셀레우코스가 동원한 코끼리 부대의 활약 덕분에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입소스 전투에서 80세 고령의 안티고노스가 전사했고 디미트리오스 만이 간신히 도망쳐 테살리아, 그리스 일부, 키프로스 정도의 영토만 겨우 유지하는 신세가 되면서 디아도코이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안티고노스 왕국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안티고노스 왕조의 영토를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가 나뉘어 차지하면서 제국은 이제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 왕조,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4왕국으로 나뉘어졌다. 

 

 

디아도코이 제국의 몰락

 

분열된 제국 중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 왕조는 BC 298년 카산드로스가 병사하면서 그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내분이 발생하여 곧바로 무너졌고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왕조 역시 리시마코스가 BC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에게 전사하면서 붕괴되었다. 그러자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를 수복하고 안티고노스 왕조를 부흥시키면서 이제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3왕국으로 재편되었다. 이들 3왕국은 이후에도 이합집산을 반복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을 이어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3왕국 모두 결국에는 모두 신흥강국이 부상한 로마 제국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가장 먼저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는 스파르타를 멸망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차지할 정도로 번성하였으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로마 제국과 계속해서 충돌한 끝에 BC 168년 멸망당한다. 그리고 헬레니즘 국가 중 가장 큰 영토를 지녔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256년 박트리아가 분리하고 BC 250년경에는 이란고원에서 파르티아 제국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점점 영토가 축소되어 북부 시리아만 겨우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BC 64년 팔레스타인과 함께 로마 제국의 한 주로 전락하게 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마지막까지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BC 31년 아우구스투스와 내전을 벌이던 안토니오스를 지원하기 위해 일으킨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로마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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