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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패권,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르키다모스 전쟁, 데켈레아 전쟁, 코린토스 전쟁, 안탈키다스 화약

Jobs 9 2021. 5. 1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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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패권

펠로폰네소스 전쟁

스파르타는 모든 농업 활동을 노예인 헬로트에게 맡기고 스파르타인들은 모두 군사훈련에만 매진하는 독특한 제도 덕분에 그리스 폴리스 중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한 군사강국이 되었고 이러한 점은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여실히 들어났다. 그러던 중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힘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면서 융성하여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까지 진출하면서 스파르타가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왕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엘레우시스 평원까지 진출했지만 왕의 자문을 맡은 클레안드리다스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에게 매수당하면서 플레이스토아낙스는 BC 445년 아테네와 30년 화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물리고 말았다. 뇌물을 수수하여 국익을 저해하는 일을 한 것은 스파르타법에 의하면 반역에 해당되므로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당하고 플레이스토아낙스는 BC 428년까지 추방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체결된 30년화약이 스파르타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 10년 동안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평화조약에 따라 서로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의 분쟁을 조정해나갔다. 그러나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본질적으로 팽창정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그러던 중에 BC 433년 '에피담노스(Epidamnos)'의 두 파벌인 민주당과 귀족당이 대립하였고 각각 코린토스와 '코르키라(Korkyra)'에게 지원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에피담누스 분쟁이 코린토스와 코르키라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각각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격론이 벌어진 끝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인 코린토스를 견제하기 위해 코르키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자 이제는 코린토스가 자신의 동맹의 맹주인 스파르타에게 원조를 청했다. 

 

코린토스와 코르키라 간의 분쟁 이외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충돌한 또 하나의 문제는 아테네가 메가라를 상대로 취한 경제봉쇄였다. 메가라는 코린토스 지협에서 코린토스와 인접하여 중요한 지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전쟁 막바지에 아테네를 배신하였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군이 코린토스 지협을 통과하여 아네테가 큰 곤경에 처할 뻔 하였다. 아테네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늘날 경제봉쇄 조치를 위한 '메가라 법령(Megarian Decree)'을 통과시키면서 메가라의 상인들은 아테네는 물론 아테네의 영향권에 있는 어떤 도시에서도 상업행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메가라 경제가 크게 위축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맹의 맹주인 스파르타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렇게 아테네가 스파르타가 중심이 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코린토스와 메가라를 위협하자 스파르타의 왕인 아르키다모스 2세(Archidamos II)는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일련의 아테네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고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이번에 아테네가 한번 양보하면 다음에 스파르타는 더 많은 요구를 할 것이며 "아테네의 군사력이 충분히 강하므로 스파르타의 요구에 결코 양보하지 말라고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마침내 BC 432년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하면서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Second Peloponnesian War)'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제1기, 아르키다모스 전쟁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이어 제3의 세력이 된 테베가 이제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오랫동안 노리던 플라타이아를 공격하면서 BC 431년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와 달리 이번에는 스파르타 역시 전쟁 준비를 마쳤고 코린토스 지협도 열린 상태였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아르키다모스 2세가 즉각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가 있는 아티가 반도로 향하면서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를 아르키다모스 2세가 주도했다고 하여 '아르키다모스 전쟁(Archidamian War)'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응하여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스파르타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아테네에서 농성전을 벌이면서 자신있는 해군력으로 스파르타에게 타격을 줘서 승리를 거두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전쟁 초기에는 페리클레스의 전술이 상당한 효과를 보이면서 아테네가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스파르타군이 아테네의 주변 농가를 파괴하려 하였지만 아티카 반도는 대부분 올리브 나무나 포도 나무를 재배하여 논밭처럼 쉽게 파괴되지 않았고 기껏 스파르타군이 파괴하고 물러나면 저절로 다시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서 아테네가 바다를 이용하여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해안가 일대를 공격해오자 해군력이 허약한 스파르타로서는 바다를 이용한 아테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무 좁은 아테네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면서 아테네 내부에서 '페스트(독일어 Pest)'가 유행하여 아테네 전체 시민 중 대략 3분의 1에 해당되는 7~8만명의 시민들과 함께 페리클레스도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페리클레스에 이어 정권을 잡은 클레온(Cleon)은 호전파로서 스파르타의 강화 제의를 거절하고 페리클레스의 전략을 약간 수정하였는데 해군력을 이용하여 스파르타 후방을 괴롭히는 것은 계속 진행시키지만 육지에서도 지금까지의 농성전은 포기하고 스파르타군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었다.

 

비록 페스트의 후유증으로 아테네의 해군력이 예전만 못했지만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가 지휘하는 소규모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을 돌아다니며 스파르타의 동맹국에게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필로스(Pylos)'를 점령하여 해군의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BC 425년 스파르타가 소규모 부대가 필로스 남쪽에 있는 '스팍테리아(Sfaktiria)' 섬에 상륙시킨 뒤 아테네에게 평화 협상을 요구하였으나 클레온이 아테네 시민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의 제안을 거절하게 만들었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가 스파르타에게 승리를 거두고 포로 120명을 붙잡는 성과를 거뒀다. 

 

스파르타는 BC 427년 아르키다모스 2세가 사망한 데 이어 BC 425년 '필로스 전투(Battle of Pylos)'와 '스팍테리아 전투(Battle of Sphacteria)'에서 패배한 이후로 수세에 몰렸으나 이듬해인 BC 424년 겨울에 벌어진 '델리움 전투(Battle of Delium)'를 기점으로 전황이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보이오티아 동부의 '델리움(Delium)'을 점령하기 위해 데모스테네스의 해군과 히포크라테스(Hippokrátēs)의 육군을 파견하였으나 양 군 사이의 집결일자에 오차가 발생하여 데모스테네스의 해군이 먼저 도착하였다. 이 때문에 아테네의 공격의도를 알아챈 테베가 파곤다스(Pagondas)를 총지휘관으로 하는 보이오티아 동맹군을 불러모아 델리움 방어에 나섰고 브라시다스(Brasidas)가 이끄는 스파르타군도 합류하였다.

 

비록 델리움 전투에서 초전에는 아테네군이 우세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보이오티아 동맹군이 승리를 거뒀고 아테네는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1,00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아테네의 속국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아테네 패권이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BC 424년 데모스테네스가 '메가라(Megara)'를 공격하면서 보이오티아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브라시다스의 스파르타군 때문에 실패하였다. BC 424년 트라케에서 이반된 도시를 재점령하기 위하여 아테네군이 파견되었으나 또다시 브라시다스의 스파르타군에게 '암피폴리스 전투(Battle of Amphipolis)'에서 패배하였다.

 

비록 암피폴리스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아테네군을 이끌던 투키디데스(Thoukūdídēs)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추방당해야 했으나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이 함께 전사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와 아테네에서 각각 주전론을 주장하던 핵심인물들이 사라졌다. 이제 화평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고 클레온의 경쟁자였던 니키아스(Nicias)가 주도하여 BC 421년 쌍방의 점령지를 서로 반환하는 조건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일시적인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를 니키아스의 이름을 따 '니키아스 화약(Peace of Nicias)'이라고 하고 이후 6년간 일시적인 평화가 지속되었다.

 

 

 

휴전기, 불안한 니키아스 평화

 

아르고스의 반스파르타 봉기 실패

 

비록 니키아스 화약 덕분에 평화가 도래했고 공식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동맹을 재결성했지만 이는 겉모습 뿐이었고 실제로는 여전히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 그러던 중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의 후계자로 각광받는 알키비아데스(Alkibiádēs,)가 등장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한 강경책이 부활하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던 아버지 클레이니아스(Cleinias)가 BC 447년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전사한 뒤 페리클레스에 의해 양육되었고 당대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Socrates)의 가르침도 잠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때마침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와 '아르고스(Argos)' 사이의 30년 화약이 종료되면서 아르고스가 '만티네아(Mantinea)' 및 '엘리스(Elis)'와 함께 스파르타에 대항하고자 나서자 알키비아데스의 주도로 아테네가 아르고스를 간접적으로 지원해 줬다. 하지만 아르고스군이 스파르타군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이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불안한 동맹이 머지않아 깨질 것이 분명해졌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실패

 

BC 415년 아테네가 시칠리아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시칠리아는 동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고 그 중에서 동쪽의 '시라쿠사(이탈리아어 Siracusa)'가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반(反)시라쿠사 세력이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비록 아테네는 아르키다모스 전쟁 당시에도 공격에 나선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번에야 말로 시라쿠사를 점령할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중장보병 5,000명 이상을 실은 군함 134척을 파견시켰다. 그러나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은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다. 

 

아테네는 원정군의 지휘를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 라마코스(Lámachos)에게 맡겼는데 강경파인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 원정을 적극 주장한 반면에 온건파인 니키아스는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로 원활하게 협력할 지 미지수였다. 더구나 원정군 출항 직전에 일어난 '헤르메스(Hermes)'의 동상을 파괴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알키비아데스가 지목되면서 신성모독혐의로 아테네로 소환당하자 알키비아데스가 그대로 스파르타로 망명해버리면서 아테네군의 허실이 그대로 스파르타에게 노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라마코스가 도중에 전사하면서 아테네군은 애초부터 시칠리아 원정을 반대했던 니키아스가 총지휘를 맡게 되었지만 니키아스가 도중에 병을 얻으면서 아테네군은 제대로 싸울 수 있을 지도 의문시되는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테네는 원정군에 기병을 거의 포함시키지 않는 실수를 범하여 시라쿠스의 기병대에 고전하게 되었고 그러자 니키아스는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하며 겨울을 맞이하였다.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이 지닌 또 하나의 문제는 너무 대규모 병력이 파견되었다는 점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병력이 도착하자 아테네의 도움을 요청했던 시칠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도리어 아테네의 의도를 의심하고는 지원을 거절하였다. 결국 아테네는 고립무원이 된 채 동계 야영지로 철수하였고 시라쿠사에 대한 포위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시간여유를 얻은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시라쿠사가 스파르타의 주요 식량국이었기 때문에 스파르타 역시 자신의 주요 식량수입국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길립푸스의 스파르타군을 파견하였다. 비록 길립포스(Gylippos)의 스타르타군은 소규모였지만 아테네의 해상봉쇄를 뚫고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하였고 이후 주변 도시에서 용병을 모집한 후 시라쿠스군과 연합하여 아테네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발칸반도가 아닌 멀리 시칠리아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은 시라쿠사군에게 아테네군이 고전하기 시작하면서 아테네의 시라쿠사 포위벽 건설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니키아스가 철군을 요청하였으나 아테네 시민들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데모스테네스가 지휘하는 2차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시칠리아에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시칠리아 원정이 어려워진 원인이 니키아스의 소극적인 지휘에 있다고 생각하고는 적극 공세에 나섰지만 야간 전투에서 아군끼리 서로 오인하여 싸우며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데모스테네스도 시칠리아 원정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군하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많은 병력을 지원받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물러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한 니키아스가 반대하였다. 니키아스는 때마침 일어난 월식이 불길한 징조라는 이유로 철군을 차일피일 미뤘고 그 사이 시라쿠사 해군이 항구를 봉쇄해 버렸다. 

 

뒤늦게 아테네 해군이 항구돌파를 시도하였으나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하여 시라쿠스 해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스 최강의 해군을 자랑하던 아테네가 처음으로 해전에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아네테군은 어쩔 수 없이 시칠리아 내륙으로 도망쳤으나 다른 도시들이 도움을 거절했기 때문에 시라쿠스의 기병대에게 고립된 아테네군이 완전히 괴멸되었고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시칠리아 원정의 대실패로 아테네는 170척의 함선과 10,000명의 중장보병을 잃었고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던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가 전사하였으며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을 떠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이 대실패로 끝났고 이제 동맹이 깨졌다고 선언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전쟁의 제2기, 데켈레아 전쟁

 

스파르타는 망명 온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 북부의 '데켈레아(Decelea)'를 점령한 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의 의도는 농지가 부족한 아테네가 '에우보에아(Euboea)'로부터 식량을 수입하는 육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제 아테네는 더 많은 비용이 드는 해상으로만 식량 수송이 가능해졌으나 설상가상으로 스파르타가 데켈레아 인근에 있던 은광산의 노예를 해방시키는 바람에 은생산이 중단되어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의 대실패로 인하여 무려 170척의 함선과 10,000명의 중장보병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보루로서 100척의 함선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여전히 스파르타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바다의 승리없이는 아테네를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자금 원조까지 받아 함대를 대폭 증강시켰지만 단시일 내에 충분한 해군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BC 411년 아테네 내에서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과두제 혁명이 발생하여 민주정을 무너뜨리면서 400인 위원회가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스파르타로 망명하였던 알키비아데스의 귀국이 허용되었으나 '사모스(Samos)' 섬에 있던 아테네 함대는 400인 위원회의 통치를 거부하였고 알키비아데스를 자신의 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다만 여전히 아테네의 이름으로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BC 410년 '헬레스폰투스 해협(Hellespont Strait; 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편 아나톨리아 반도의 앞바다에서 벌어진 '시지코스 해전(Battle of Cyzicus)'에서 스파르타 해군을 물리치면서 바다에서는 여전히 아테네가 우위임을 증명하였다. 이 덕분에 아테네는 흔들리던 동맹 폴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고 동맹 폴리스들로부터 공물을 징수하여 재정 부족도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해군력을 이용하여 아테네에 압력을 행사해 과두정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민주정을 수복시켰고 BC 406년까지 4년간 연전연승하며 잃어버린 영토 다수를 회복하였다.

 

이렇게 알키비아데스 휘하의 아테네 해군이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스파르타에 리산드로스(Lýsandros)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된다. 리산드로스의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귀족 출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리산드로스는 BC 407년 스파르타 해군의 사령관으로 선출된 후 이듬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부 해안도시인 '노티움(Notium)' 근처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인 '노티움 해전(Battle of Notium)'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다. 이 패전을 계기로 알키비아데스는 인기가 떨어졌고 해군 사령관으로 재선출되지 못했기 때문에 트라케로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법률이 공직의 재선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장인 리산드로스 역시 해군 사령관에서 물러났다.

 

BC 406년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와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가 모두 물러난 뒤에 에게해의 '레스보스(Lesbos)' 섬 근처에서 벌어진 '아르기누사이 해전(Battle of Arginusae)'에서 아테네 해군이 다시 승리를 거뒀다. 총 8명의 장군들이 지휘한 아테네 함대는 25척의 군함을 잃는 대신에 스파르타군함 70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스파르타 해군 전력의 80%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과였다. 이로서 제해권을 아테네 함대가 되찾아 오는 듯 했지만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아테네 장군들에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 장군들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절반은 도주하는 스파르타 함대를 추격하고 나머지 절반은 침몰한 아테네 군함의 생존자와 전사자 시체를 수습하기로 하였지만 곧바로 폭풍이 들이닥쳤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귀환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테네는 전사자를 반드시 유가족에게 전달하여 정중히 장례를 치르도록 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는 전사자 시체를 수습하지 못하고 그대로 되돌아 온 아테네 함대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군사 재판이 열려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함대의 장군 중 6명이 처형당하고 말았다.

 

한편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강화를 제안했지만 아테네가 이를 거절하였다. 이제 스파르타는 아테네와의 전투를 계속하는 것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이에 아르기누사이 해전의 참패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리산드로스가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스파르타 법률상 리산드로스가 다시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다른 인물이 사령관으로 선출되고 리산드로스는 부사령관이 되는 방식을 통해 실질적인 지휘권을 리산드로스에게 부여하였다.

 

그 후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의 식량 수입 요충지였던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봉쇄하기 위해 출항하였고 이에 아테네 역시 코논(Conon)을 비롯한 세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함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미 아르기누사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들을 대부분 자신들의 손으로 처형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아테네에는 더이상 유능한 장군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트라케에 망명하고 있던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 함대에 접근하여 조언자의 역할을 자청하였지만 지휘권을 빼앗기는 것을 우려하여 코논 등이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BC 405년 벌어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Battle of Aegospotami)'에서 리산드로스의 교묘한 전술에 휘말린 아테네 함대가 괴멸당하고 말았다. 아테네 함대는 168척이 침몰하고 3,000명 이상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불과 20여척만이 아테네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패배한 아테네에게는 더이상 함대를 재건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테네의 항구는 봉쇄당했고 식량 보급이 끊긴 아테네는 BC 404년 4월 항복을 선언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남은 함대를 모두 스파르타에게 인도하였고 아테네에 입성한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의 성벽을 헐어 버린 후 델로스 동맹을 해산한 후 민주정 대신에 '30인 참주(Thirty Tyrants)'라는 과두제 정부를 만들었다. 또한 아테네의 동맹 폴리스들은 '10인 위원회(Decarchy)'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다.

 

 

 

코린토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아테네를 굴복시키면서 그리스 패권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동맹 폴리스들을 아우르는 정치력이 부족하여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을 강압적으로만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아테네에서는 리산드로스의 후원을 받은 30인 참주 중 온건파인 테라메네스(Theramenes)가 물러나고 강경파인 크리티아스(Critias)가 권력을 잡자 민주파 1,500명을 살해하고 다수를 추방하여 재산을 몰수하는 공포정치를 자행하다가 BC 403년 민주파의 트라시불로스(Thrasyboulos)가 이끄는 반대파에게 축출당하고 말았다. 이에 리산드로스가 아테네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으나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민주정을 인정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리산드로스는 과두파와 민주파를 화해시키는 선에서 물러나고 아테네의 민주정을 부활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게 되었다.

 

스파르타의 패권이 흔들리는 것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대등한 동맹이었다가 나중에 변질된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과 달리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처음부터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폴리스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조약을 체결한 강압적인 체제였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폴리스들은 국력에 상관없이 동맹회의에서 1표씩 행사할 수 있었지만 동맹회의에 대한 소집권이 스파르타에게만 있었고 동맹회의의 결정을 스파르타에게는 강제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스파르타는 BC 7세기 경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서 세력 확대를 시작하여 동맹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BC 500년이 되면 아르고스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전체 폴리스들과 동맹을 맺게 되는데 스파르타가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마저 제압한 후 자신을 지원해 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폴리스에 게 그 공을 인정해주는 커녕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더욱 강압적이 되어 갔다.

 

그러던 중 BC 40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스파르타가 동맹 폴리스인 엘리스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처사에 불만은 품은 코린토스와 테베가 스파르타의 엘리스 공격을 위한 지원요청을 거절하면서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테베 사이의 긴장감이 커져갔다. 더욱이 BC 398년 스파르타의 두 왕 중 에우리폰 가문의 아게실라오스 2세(Agesilaus II)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자신들을 지원하였던 페르시아와 결별을 선언하고 이오니아로 원정을 떠났으나 코린토스와 테베는 물론 아테네까지 참여를 거절하면서 스파르타의 심기를 다시한번 거슬렸다. 

 

그런데 스파르타가 단독으로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페르시아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페르시아의 '프리기아(Phrygia)를 통치하던 총독(Satrap; 사트라프)인 파르나바주스(Pharnabazus)는 후퇴를 거듭하던 중에 스파르타군을 아나톨리아 반도 서남부의 '이오니아(Ionia)'에서 철수시키기 위해 스파르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는 물론 전통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에서 유일하게 스파르타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아르고스에게도 접근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BC 395년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 아르고스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스파르타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면서 스파르타의 패권을 위협하는 '코린토스 전쟁(Corinthian War)'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전개

 

코린토스 전쟁이 촉발된 직접적인 계기는 테베가 동맹 폴리스인 '로크리스(Locris)'가 인접한 '포키스(Phocis)'와 벌인 분쟁에 개입한 것이었다. 테베에게 공격당한 포키스는 즉각 스파르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스파르타는 테베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스파르타는 두 왕 중 스파르타에 남아있던 아기스 가문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육군을 이끌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영웅인 리산드로스가 해군을 지휘하며 각각 그리스 중부의 '할리알토스(Haliartos)'로 향하도록 했으나 먼저 도착한 리산드로스가 파우사니아스를 기다리지 않고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파우사니아스가 테베와 휴전을 맺고 전사자 시체를 수습한 뒤 스파르타로 되돌아 왔지만 패배하고 돌아온 파우사니아스가 전장에 늦게 도착한 책임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면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이렇게 스파르타가 테베에게 패배하자 많은 그리스 폴리스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BC 395년말 코린토스와 아테네가 테베 중심의 보이오티아 동맹에 정식으로 가담하면서 '보이오티아 연합(Boeotian confederacy)'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육지에서 스파르타군은 여전히 막강하였다. BC 394년 테베가 포키스와 휴전을 맺은 후 보이오티아 동맹군 2만4천명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입하여 아르고스군과 합류하였으나 스파르타군 18,000명에게 '네메아 전투(Battle of Nemea)'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테네가 가담하였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만큼 바다에서는 보이오티아 연합이 우세하여 아나톨리아 반도 남서쪽의 '크니두스 해전(Battle of Cnidus)'에서 아테네의 코논이 지휘하는 아테네-페르시아 연합함대이 승리를 거뒀다. 이로서 스파르타는 제해권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아나톨리아 반도 원정을 계속하던 아게실라오스 2세의 퇴로가 막혔다. 이에 아게실라오스 2세는 육로를 통하여 스파르타로 되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그리스 북부의 트라케를 지나 그리스 중부의 테살리아를 통해 남하하였다. 비록 이를 저지하기 위해 테베를 중심으로 아테네, 아르고스, 코린토스, 에우보이아가 연합한 보이오티아 연합군이 나섰지만 '코로네아 전투(Battle of Coronea)'에서 패배하면서 아게실라오스 2세는 무사히 스파르타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BC 394년 이제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바다에서는 아테네의 우위가 유지되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이는 이듬해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테베는 스파르타의 세력을 펠로폰네소스 반도 안으로 국한시키며 그리스 중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시켰고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재건한 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키티라(Kythira)' 섬을 점령하고 에게해의 '스키로스(Skíros)' 섬, '임브로스(Imbros)' 섬, '림노스(Limnos)' 섬 등 여러 섬을 지배하게 되었다. 다만 코린토스의 경우에는 민주파와 과두파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 아르고스의 지원을 받은 민주파가 승리하자 과두파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요청하며 시키온으로 물러났고 이에 스파르타가 야습을 통해 코린토스만의 '레카이온(Rechaion)' 항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BC 392년 스파르타는 장군인 안탈키다스(Antalcidas)를 페르시아의 '사르디스(Sardis)' 총독인 티리바조스(Tiribazos)에게 파견하여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자금으로 그리스의 패권을 되찾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지원 중단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티리바조스의 중재를 이용하여 아테네, 아르고스, 코린토스, 테베를 협상장으로 불러모아 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모든 폴리스의 독립에 기초한 동맹을 주장했지만 아테네는 에게해의 제해권을 유지하기를 원하고 테베는 보이오티아 동맹의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아르고스는 코린토스의 병합을 노렸기 때문에 협상이 최종 결렬되었다. 스파르타는 같은 해 다시 강화 회의를 추진했으나 이번에도 실패하였다. 더욱이 그리스 폴리스 간의 전쟁이 장기화 양상을 보이자 페르시아의 티리바조스가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II)에게 보고하기 위해 떠났고 그 후임으로 친아테네적인 스투르타스가 부임하면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반(反) 스파르타 동맹지원을 중단시키지도 못하였다.

 

 

안탈키다스 화약 체결

 

이후에도 수년간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스파르타에게 여전히 불리하였다. 그 사이 아테네는 로도스 섬에서 과두파와 정쟁을 벌이던 민주파를 지원하여 로도스섬을 장악하고 지나가는 선박에게 통행세를 부과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 상태로 재정상태를 호전시켰다. 스파르타도 해군을 재건하였으나 아테네 함대에게 또 다시 패배하였고 코린토스의 내분에 개입하여 세력확대를 노렸지만 BC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 해군을 지휘하던 이피크라테스의 경장보병을 이용한 치고 빠지기 식의 전술에 스파르타 중장보병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이 스파르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BC 387년 스파르타는 장군 안탈키다스를 페르시아로 파견하였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를 설득하여 BC 386년 강화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페르시아로서도 아테네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들은 당시 국경선을 기준으로 자치와 독립을 인정받았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의 평화조약은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칙령으로 선포되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뤄야 할 것임이 명시되면서 나머지 그리스 폴리스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평화조약을 협상을 주도한 안탈키다스의 이름을 따서 '안탈키다스의 화약(Peace of Antalcidas)' 또는 페르시아왕이 요구하는 조건으로 화약이 맺어졌다고 하여 '대왕의 화약(King's Peace)'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겨우 코린토스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으나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자치권을 포기하면서 동족을 팔아넘겼다는 오명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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