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커스터 왕가 The House of Lancaster : 빨간 장미
♣ 랭커스터
◈ 랭커스터가(Lancaster 家)
(1) 헨리 4세(1399 ∼ 1413)
(2) 헨리 5세(1413 ∼ 1422)
(3) 헨리 6세(1422 ∼ 1461)
플랜태저넷 왕가의 한 분가이다. 15세기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헨리 5세, 헨리 6세를 배출했으나 요크 왕가에 패배한 뒤 왕위를 튜더 왕조에 넘겼다.
랭커스터라는 성은 헨리 3세의 막내아들인 '곱사등이' 에드먼드가 1267년 랭커스터 백작위를 받았을 때 생겨났고,그의 2 번째 부인인 아르투아의 블랑슈가 낳은 두 아들 토머스와 헨리는 작위를 이어 받았다. 헨리 백작의 아들 헨리는 랭커스터 공작위를 얻었는데 그는 2명의 딸밖에 없었다. 큰 딸 모드는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과 결혼했지만 헨리가 죽은 이듬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둘째 딸 블랜치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이며 그녀의 남편인 곤트의 존이 가문을 이었다. 존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헨리는 리처드 2세를 폐위 시키고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부터 랭커스터 공작령은 왕령에 포함되었고 랭커스터 가문 출신 왕인 헨리 4세, 5세, 6세가 60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였다.
그 가운데 헨리 5세만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그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헨리 6세)은 왕위계승에 있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 4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조상이 헨리 3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헨리 4세라고 칭했는데, 그 이유는 존의 형으로서 왕위 계승 서열이 더 높은 클래런스 공작 라이어넬의 후손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존의 동생이자 요크의 공작인 에드먼드의 후손과 클래런스 공작의 후손들이 헨리 6세를 몰아냈고 에드먼드의 후손인 요크 공작이 에드워드 4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가 창시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7세로 이어졌다.
헨리 7세에 의해 튜더 왕조가 시작되면서부터 랭커스터의 모든 영지는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1) Henry 4세 (1399-1413)
랭커스터왕가의 시조. 랭커스터공 존 오브 곤트의 맏아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청년시절에 사촌형인 당시의 국왕 리처드 2세에 반항하는 귀족일당에 가담하였으나 뒤에 왕과 화해하고, 1397년 헤리퍼드 공작에 봉작되었다. 그 동안 대륙의 독일기사단의 군대에 참가하여 기사도적 행위에 열중하였으며, 1398년 대역을 저지른 혐의로 프랑스에 추방되었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공령(公領)을 몰수하였기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거병하여 왕군을 무찌르고 리처드 2세를 체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대내적으로는 웨일스의 반란, 이단(異端) 롤라드파의 봉기 등의 진압에 분망하였고, 많은 어려움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의회를 존중하여 어려움을 잘 극복함으로써 의회 발달사상 주목할 만한 획기적인 시기를 구축하였다.
2) Henry 5세 (재위기간: 1413-1422)
1387 년에 Monmouth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웨일즈의 반란을 막으려고 힘쓴 왕이다.
왕자였을 때도 많은 권력을 차지한 왕으로서 영국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여 성공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버건디 사람들과 오를레앙 사람들과의 내란 때문에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 화해를 하고 공주 Catherine of Valois를 내주어 영국의 왕비로 삼았고 Henery 5세는 큰 권력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