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더 왕조 The House of Tudor (1485-1603) :웨일즈 출신의 잉글랜드 왕가
♣ 튜더 왕조(1485 ∼ 1603)
리처드 3세(요크가) = 마거릿(랭카스터가)
(1) 헨리 7세(1485 ∼ 1509) =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2) 헨리 8세(1509 ∼ 1547)
(3) 에드워드 6세(1547 ∼ 1553)(시모어의 아들)
(4) 메리 여왕(1553 ∼ 1558)(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캐서린의 딸)
(5) 엘리자베스 여왕(1558 ∼ 1603)(앤불린의 딸)
랭커스터 가문 존의 서자가 창시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 웨일즈 출신의 잉글랜드 왕가이다.
튜더가에 속하는 잉글랜드 왕으로는 헨리 7세와 그의 아들인 헨리 8세, 그리고 그의 자식들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가 있다.
튜더 가문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왕가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장미 전쟁 당시 헨리 5세 및 헨리 6세와 함께 랭커스터 가문 편에서 싸웠던 웨일즈 사람 오언 튜더에 의해서였다.
그는 헨리 5세의 미망인으로 랭커스터 가문 편이었던 발루아의 캐서린과 결혼했으나,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요크가가 승리한 뒤 참수당했다.
그의 맏아들인 에드먼드는 헨리 6세에게서 리치먼드 백작위를 받고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했으며 마거릿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서 아득한 서열이지만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에드먼드가 죽은 뒤에 태어난 외아들 헨리 튜더는 1485년 요크 가문 출신 왕 리처드 3세를 보즈워스에서 공격해 무찔렀다.그는 Henry 7세로서 왕위를 요구했는데, 이는 정당한 권리에 의한 것이며 전투에서 승리를 내려준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이며 요크가의 계승자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확고히 했다.
튜더가의 장미 문장은 랭커스터가의 빨간 장미를 요크가의 흰 장미 위에 포개어놓은 것으로 양가의 결속을 상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튜더 왕조는 헨리 7세가 장미전쟁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시작되게 된다.
1) Henry 7세(1485-1509)
헨리 7세는 지루하던 3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485년 튜더 왕조를 열게 된다.
장미전쟁은 의원이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했고, 헨리 7세 또한 귀족들의 반란을 막고자 하였다.따라서 이때부터 의회는 이름뿐이었고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왕에게만 돌아가게 된다. 즉 튜더왕조는 영국 역사에 다시금 절대군주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 귀족의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계급 젠트리와 요먼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실력과 재산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귀족은 아니었지만 존경받는 계급이었다.
이러한 젠틀맨과 요먼의 등장은 영국이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을 자연스럽게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튜더가의 첫 번째 왕인 헨리 7세는 절대왕조를 엶과 동시에 영국에 민주주의가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기도 했다.
2) Henry 8세(1509-1547)
영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왕이 있다면 바로 헨리 8세일 것이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영국에 성공회를 만들고 자신이 수장이 되었으며, 6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2명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는 죽은 그의 형의 아내, 에스파냐 왕의 딸인 ‘캐서린’공주였다. 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훗날 피의 메리라 불리우는 메리1세를 두게 된다. 그러나 사랑없이 결혼한 헨리 8세는 시녀였던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은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캐서린과의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
이혼을 금하는 카톨릭 교로서, 그리고 유럽 제 1의 강대국인 에스파냐의 압력도 있고 하여 교황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분한 헨리 8세는 스스로 이혼을 선언하고 앤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국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헨리 8세는 로마의 카톨릭과 인연을 끊고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은 종교로 인한 숱한 피비린내나는 투쟁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렇듯 힘겹게 결혼한 2왕후 앤 볼레인. 그러나 그녀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헨리 8세는 같은 이유로 캐서린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녀를 봐줄수가 없었다.결국 왕으로서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그는 앤을 사형에 처하게 된다.그러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1세는 후에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업적을 기록하게 된다.
3왕후는 제인시머로 에드워드 6세를 낳은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또 홀아비 신세가 된 헨리 8세에게 루터파 신하들은 도이칠란트 루터파 왕족인 앤 공주를 왕비로 추천하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무뚝뚝한 그녀에게 곧 싫증을 느끼게 되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는다. 하지만 그녀는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그는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렇듯 헨리 8세는 로마 교황과 손을 끊고 영국에 성공회를 세운 다음(1534) 성공회로 믿음을 바꾸지 않는 카톨릭 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154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 동안 카톨릭 교도를 처형하는 화형장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였다고 할 수 있다.
3) 에드워드 6세(1547-1553)
1537년에 태어나, 12일만에 어머니를 잃고,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으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그러나 몸이 약해 불과 6년만에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는다.
4) 제인 그레이(1553.7.10~1553.7.19)
그는 '9일간의 여왕' 또는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애절한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제인은 헨리 7세의 증손녀로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여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하여 학자 아스캄도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의 비극은 파렴치한 시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에드워드 6세가 결핵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워릭백작은 그녀를 며느리로 맞이하여 왕위를 이어가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에드워드 6세가 16살의 나이로 숨지자, 왕위계승권자 장녀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배제하고 제인을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였다.
이에 귀족(추밀원)과 국민은 반대했고, 반대자의 지지를 받은 메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였다.그리고 워릭백작과 그의 아들 그리고 며느리 제인을 런던 탑에 가두었다.
1954년 2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당한 제인 그레이는 이렇게 생을 마친다.
5) Mary 1세(1553-1558): 피의 메리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메리는, 1553년에 제인을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를 항상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의 억울한 운명이었다. 공주이긴 하나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으로 에스파냐 사람 유모의 손에 자라난 메리는 에스파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에스파냐의 피를 이어받은 몸이었으며 에스파냐의 믿음인 카톨릭에 완전히 젖어 자라난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결국 메리 여왕의 영향으로 영국은 갑자기 성공회가 금지되고 카톨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개혁자들의 책이나 카톨릭에 어긋난 책을 가지고 들어오는 자는 지위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엄벌에 처하였다. 이단 처벌법을 부활시켜 300명을 화형에 처하고, 3년 동안 쉴새없이 수만 명이 교수형과 처벌을 당하였다. 그 뒤로 메리 1세는 Bloody Mary라 불리었다.
6) Elizabeth 1세(1558-1603)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인 앤 볼레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바다와 강력한 함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계의 바다를 지배할 강력한 함대의 건설을 이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 함대를 뒷받침으로 뒷날 온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제 1의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새로 발견된 대륙에서 각종 보물을 확보하고 있었고, 영국은 이를 빼앗아 도망치는 해적질을 강행하게 된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리란걸 깨달은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격려하였고, 따라서 대담무쌍한 해적질을 감행한 Francis Drake에게 귀족 작위를 내리게까지 된다.
에스파냐가 이를 묵인할리 없었고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그동안 종교적인 영향이 큰 것으로 엘리자베스가 영국의 국교를 다시 성공회로 정함으로써 이미 두 나라 사이는 종교적으로도 크게 갈라져 있었다.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식민지의 보물과 황금을 차지하려고 하는 에스파냐와, 새로 해외로 손을 뻗으려는 영국 사이의 힘의 충돌은 결국 전쟁을 초래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 해군 사령관에 임명한 해적 Drake에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을 당부했다.
결국 뛰어난 전술을 이용해 영국은 에스파냐를 꺾고 아메리카와 그 밖의 동양과 아프리카 등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독점하여 무역하던 지역에 손을 뻗게 된다.
그리고 1600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군대를 등에 업은 무역, 즉 무력을 이용한 무역을 함으로써 식민지를 철저히 착취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국민들에게 큰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무역에서 생긴 이익금으로 훌륭히 나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왕의 위선과 권위는 더욱 당당해졌다.
나라 안과 밖으로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나라 살림이 윤택해지면서 영국의 문화는 크게 꽃을 피워 ‘William Shakespear'같은 위대한 작가가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