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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태저넷 왕조, 헨리 2세, 리처드 1세, 에드워드 1세

Jobs9 2022. 9. 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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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태저넷 왕가 <House of Plantagenet> (1154~1399) : 프랑스 앙주의 백작 출신 왕

영국 왕은 영국,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소유했지만 법적으로 프랑스의 신하였다

♣ 플랜테지넷 왕조(1154 ∼ 1399)
(1) 헨리 2세(1154 ∼ 1189)
(2) 리처드 1세(1189 ∼ 1199)
(3) 존(無領王 1199 ∼ 1216)
(4) 헨리 3세(1216 ∼ 1272)-막내아들인 '곱사등이' 에드먼드가 1267년 랭커스터 공
다섯 번째 아들인 요크 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요크 공)
(5) 에드워드 1세(1272 ∼ 1307)
(6) 에드워드 2세(1307 ∼ 1327) 
(7)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에드워드 흑태자 1376 死/존(랭커스터 공)=리처드 2세의 삼촌 
(8) 리처드 2세(1377 ∼ 1399)=> 존(랭커스터 공)의 아들 헨리 4세(랭커스터 가) 왕위 계승
=> 이후 장미전쟁을 거쳐
=> 요크 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의 후손.. 요크 공작 3세의 아들이 요크가 왕위 계승 에드워드 4세

=> 이후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인 "보퍼트 가문"의 후손 헨리 7세로 이어져 튜더 왕조(웨일스 출신)


1) Henry 2세 (1154-1189)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리노아(29세) 와 재혼
플랜테저넷왕가의 시초이다.
19세 때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리노아(29세)와 사랑하게 되어 루이와 이혼하고 둘이 결혼하면서 엘리노아가 지참금으로 프랑스 남쪽의 큰 영토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헨리 2세는 영국,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 가스코뉴, 오르베뉴, 툴루즈를 다스리게 되어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영국 역사에 처음으로 통일된 영국을 이룩하였고, 국내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법과 재판제도도 마련하여 현군으로 존경받았다. 

2) Richard 1세(1189-1199)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

헨리 2세의 셋째 아들이다. 아버지가 동생(존 왕자)을 사랑하여 가장 좋은 프랑스 남부를 주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냈다. 
십자군 3차 원정 시에 사자왕으로 이름을 날리고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다. 예루살렘 근교에서 살라딘과 싸워 물리쳤고 그의 용맹성은 ‘사자왕 리처드’라는 별명을 갖게 하였다. 그는 온갖 파란만장한 모험 끝에 프랑스에서 필립스 2세와 싸우다가 1199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10년 재위 중에 1/2년만 영국에 있었고,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살았다. 정치에는 무능하였으나 전형적인 기사로서 존경을 받은 왕이었다.  
노르망디 공작과 앙주 백작(1189~99)이기도 했다.
제3차 십자군 원정(1189~92)에서 기사다운 풍모와 무용(武勇)을 과시해 당대의 인기를 얻었고, 무수한 낭만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근세로 올수록 역사가와 학자들에게서는 옛날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초기 생애
리처드는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 난 셋째 아들로서 11살 때 어머니의 상속재산인 아키텐 공작령을 받았고 1172년 푸아티에 공작이 되었다.


리처드는 일찍이 정치적·군사적 능력을 보여 기사다운 무용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푸아투와 가스코뉴의 사나운 귀족들을 다루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헨리 2세의 적자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는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나 심려 및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형제들과 합세해 아버지에게 대반란(1173~74)을 일으켰으며, 아버지는 아키텐을 2차례나 침공해 리처드를 굴복시키고 용서를 빌게 만들었다.
그 후 리처드는 자신의 영지 내에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가혹한 통치에 분격한 가스코뉴 사람들은 1183년 반란을 일으키고 리처드의 형 헨리(Young King Henry)와 그 동생인 브르타뉴의 제프리(조프루아)에게 도움을 청해 리처드를 공작령에서 아주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자기 제국이 해체 위험에 처한 것에 경각심을 느낀 헨리 2세는 유럽 대륙에 있던 자기 영지의 봉건영주들을 동원해 리처드를 돕도록 했으며, 1183년 6월 11일 리처드의 형 헨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반란군은 무너졌다(→ 색인 : 앙주 제국). 
형이 죽었으므로 리처드는 이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및 앙주(노르망디와 앙주는 뗄 수 없는 하나로 간주되었음)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막내 동생 존에게 아키텐을 양도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부 토박이였던 리처드는 자기가 자란 곳인 공작령을 양도하지 않으려 했으며, 심지어는 프랑스의 젊은 존엄 왕 필리프 2세에게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항할 것을 청원했다.

1188년 11월 리처드는 프랑스 땅에 있는 잉글랜드의 보유지 전체를 걸고 필리프에게 충성을 서약했으며, 1189년에는 필리프와 합세해 헨리 2세에게 공공연하게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은 르망에서 소뮈르까지 헨리를 추격해 리처드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핍박하여 끝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1189. 7. 6).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7월 20일 노르망디를 얻고 9월 30일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와 달리 리처드에게는 오직 한 가지 야망만 있었는데, 그것은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야기된 십자군 원정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장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무기를 사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았다. 하지만 그는 돈을 위해 앙주 제국을 해체하는 데는 앞장서지 않았다.


그는 필리프와 결별했으며 유럽 대륙에서 앙주 방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단지 필리프도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자기 아버지의 보물들을 많이 처분하고 몇몇 직책들을 팔아넘겼다. 이렇게 해서 그는 강력한 병력을 마련해 1190년 시칠리아를 경유하는 성지(聖地) 항해를 출발했다. 

시칠리아
시칠리아 인들이 잉글랜드를 적대적으로 대하자 리처드는 10월 4일 메시나를 기습 점령했다. 시칠리아 인들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의 통치를 막기 위해 이미 시칠리아 출신인 레체의 탕크레드를 왕으로 뽑아 놓았고, 탕크레드는 리처드의 누이이자 전왕(前王)의 부인인 잉글랜드의 조운을 감금했으며 그녀 몫의 유산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메시나 조약을 맺어 리처드는 조운에게 그녀 몫의 유산과 자유를 찾아주고,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승인했으며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서(아르튀르)를 후계자로 선언하여 탕크레드의 딸과 아서를 결혼시키도록 했다. 

이 조약은 제3차 십자군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인들을 화나게 했고 또한 이에 자극받은 리처드의 동생 존에게는 배신과 반역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리처드는 키프로스를 정복하여 키프로스의 리마솔에 머무는 동안 나바르의 베렝가리아와 1191년 5월 12일 혼례를 올리고, 6월 8일 아크레에서 다른 십자군들과 합류했다. 

성지
십자군은 1191년 7월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9월 7일에는 아르수프에서 리처드가 큰 승리를 거둔 데 힘입어 요파를 점령했다. 리처드는 2차례에 걸쳐 예루살렘 수㎞ 이내까지 진격했으나 제3차 십자군의 주목표였던 예루살렘 탈환 공적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또한 프랑스·독일·잉글랜드 군대들은 서로 격렬한 분쟁을 벌였다.  

리처드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그에게 모욕을 가했으며, 존엄 왕 필리프와 분쟁을 일으켜 필리프는 결국 아크레 함락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리처드는 또 자기 봉신인 기 드 뤼지냥을 예루살렘 왕의 후보자로 내세워 독일 측 후보자인 몬페라토의 코라도와 경쟁하게 했다. 리처드가 코라도의 살해를 공모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1년간 성과 없는 접전을 계속 벌인 끝에 1192년 9월 리처드는 살라딘과 3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었다. 협정 내용은 십자군이 아크레와 좁은 해안 지역을 계속 보유하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성지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감금
리처드는 프랑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통해 잉글랜드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레오폴트 공작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자기 신분을 위장했으나, 1192년 12월 빈에서 발각되어 도나우 강변 뒤른슈타인에 있는 공작의 성에 갇혔다.  
이후 그는 하인리히 6세에게 넘겨져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성을 전전하며 갇히는 몸이 되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유명한 블롱델의 모험담은 잉글랜드에 전혀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채 성곽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리처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리프 2세에게 넘기겠다는 협박에 못 이긴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가 제기하는 가혹한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여 15만 마르크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함과 아울러 왕국을 일단 신성 로마 제국에 양도했다가 봉토(封土)로 되돌려 받기로 했다. 이 몸값 조달은 12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재정지출에 속하며 당시 잉글랜드의 번영을 입증해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몸값의 대부분이 지불되어 1194년 2월 리처드는 석방되었다.  

잉글랜드 귀환
리처드는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왕권의 독립성이 손상된 것을 우려한 나머지 4월 17일 다시 한번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채 1개월도 되기 전에 그는 노르망디로 갔으며 남은 5년 동안 다시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여생을 필리프 2세와 싸우는 데 소비했으며 중간중간에 잠깐씩 휴전을 맺었고, 잉글랜드 통치는 유능한 최고 사법관이며 캔터베리 대주교인 휴버트 월터에게 맡겼다.  

리처드는 자신의 조급성 때문에 42세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한 농부가 리모주 자작의 영지에서 묻혀 있던 황금을 발견했는데, 자작은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샬뤼에 있는 자작의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운 나쁘게 부상을 입었고 1199년에 죽었다. 그는 부모인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왕비가 묻혀 있는 퐁트브르 대수도원에 매장되었고, 그의 조상(彫像)은 아직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  

평가
리처드는 전형적인 앙주 가문 사람으로 무책임하고 성질이 급하며, 엄청난 정력가인 데다가 매우 잔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앙주 가문의 대부분 사람들에 비해 완벽성을 갖춘 인물로서, 탁월한 군인이자 능숙한 정치가였으며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상당한 표현력을 지닌 서정시인이기도 했는데, 음유시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아버지나 존 왕과는 달리 그는 동성연애자였던 것이 분명한데, 베렝가리아 왕비와는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한 듯하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의 쿠르드 족 영웅 살라딘과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중세 기사도의 전설을 창조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리처드가 말을 잃고 싸우는 것을 본 살라딘은 왕의 품위를 지켜 준다는 뜻으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리처드가 고열로 고생할 때에는 과일과 얼음을 가져다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멧돼지 같은 리처드도 살라딘에게 존경의 념을 품게 된다.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맺는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되 기독교 순례자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살라딘은 “두 백성의 기쁨은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이 협상을 기뻐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 “런던도 팔아치울 기세”로 전비를 마련했던 그는 별반 전리품도 없이 귀향선을 타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자왕 아닌가.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전한다. “3년이다. 3년의 휴전 후에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되찾고 말 것이다.” 그러자 살라딘은 답을 보낸다. “내가 예루살렘을 잃는다면 당신에게 잃을 것이다.”
폼나긴 하지만 얻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원정을 끝내고 오는 리처드의 길은 험난했다. 일찍이 자신이 “어딜 공작의 깃발이 국왕의 깃발과 나란히 하는고?”라고 부르짖으면서 그 깃발을 진흙탕에 처박은 바 있던 바로 그 백작, 레오폴드에게 사로잡혀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처박혔다.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난 그는 반역을 꾀한 동생 존을 무릎 꿇렸고 이어서 또 프랑스 왕과 전투를 치르다가 허무하게 가슴에 화살이 꿰뚫려 죽고 만다. 1199년 4월 6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는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던 영국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땅에서 평생을 보냈고, “춥고 비 오는” 영국 땅에는 딱 반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멋진 기사도를 발휘하기 위해 나간 전쟁의 모든 전비는 대개 영국인들의 몫이었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불했던 몸값도 결국은 백성들의 피땀을 짜낸 돈이었다. 평생을 싸움박질만 했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젬병이었던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였다. 그런데도 십자군 참전의 휘광, 그리고 살라딘과의 영웅담, 중세 기사도의 전설 등등으로 인해 리처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사랑받는 왕으로 남아 있다. 
영화 <로빈 훗>에서 막판에 카리스마 한칼로 등장하며,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며, 영국인들은 무슬림들도 “사상 최고의 용사”라며 두려워했던 리처드 1세에 대해 애정을 쏟았다. 
전혀 백성에게 이롭지 않았고 되레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리처드 1세는 영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용맹 무쌍한 중세 기사의 대표로, 결국은 돌아와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는 왕으로 남아 있다.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서 쌓아 올려진 이미지 덕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멍청했고 결국 영국 왕실이 그 이름을 쓰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 실지 왕(失地王) 동생 존과 상대적으로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루 같은 이미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낫다는 비교우위 속에서 영어는 거의 쓰지도 않았을 영국 왕이자 프랑스의 귀족 리처드는 그 실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위대한 신화로 남아 있다.

 
3) John 왕(1199-1216) 
리처드 1세의 아들 아서가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그를 살해하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형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강한 형님 편을 들어 아버지를 배반한 불효자이며 비겁자로 낙인찍힌 그는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왕답지 못한 왕으로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귀족들은 1215년에 49개 조로 된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에 서명하게 하였다. 존 왕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여 대헌장의 서명을 할 수 없어 대신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마그나 카르타"의 목적은 봉건 제후들의 권력 확인이 목적이지만, 런던과 자유도시의 시민의 특권을 인정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기고 있다.

 

4) Henry 3세 (1216-1272)
존 왕의 맏아들이다. 1207년에 Winchester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때에는 선대 왕 존의 패배로 인해 영국의 남서쪽 지역이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던 시기이다.
그는 때때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경제를 부흥시키려고 노력도 했지만 후에 처남의 반역으로 인해 사로잡혔다가 아들 에드워드 I세가 반역자들을 패배시키는 바람에 왕권을 에드워드 I세에게 넘겨주게 된다.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소리치는 시대였었고 약하고 까다롭고 낭비하는 왕으로 이름나 있었지만 건축과 예술에 학식이 깊은 것으로 봐서는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리 모자란 왕은 아니었다고 한다.


5) Edward I세 (1272-1307) 
군인이라고 이름난 에드워드 I 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1239년 7월 17일에 Henry 3세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Eleanor Castile이라는 여자와 1254년에 결혼하여 왕위를 지켰는데 왕의 권위를 없애려고 한 남작들의 반란을 없애고 왕의 권위를 되찾았으며 법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웨일스를 정복하였고 스코틀랜드를 합치기 위해 스코틀랜드 공주와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켰지만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노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실패하고 만다.
또한 성지를 되찾기 위하여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하였지만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다음의 인생은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유대인을 영국에서 추방하였고 그의 신하들과 많이 충돌하였지만 그래도 영국에서는 왕권을 되차지한 사람으로서 영국 역사에 한 부분을 차지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6) Edward 2세 (1307-1302) : 마누라(왕비인 이자벨라)에게 쫓겨난 왕
별칭은 카나번의 에드워드(Edward of Caernarvon). 1284. 4. 25 웨일스 카나번셔 카나번~ 1327. 9
글로스터셔 버클리.

강력한 권한을 가진 귀족들에 대항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능력이 부족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의 넷째 아들인 그는 부왕이 죽자(1307. 7. 7) 왕위에 오른 뒤 곧바로 에드워드 1세를 반대하던 이들을 최고의 관직에 앉혔다. 자신이 총애하는(아마도 그의 동성연애 상대였던 듯함) 천박한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콘월 백작 작위를 내려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

1311년 21명의 귀족위원회는 문서를 제출해(후에 '칙령'으로 알려짐) 개버스턴을 몰아내고 재정과 인사 문제에 관한 왕권 축소를 요구했다. 에드워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개버스턴을 추방했다가 곧 돌아오도록 허용했다. 그 보복으로 귀족들은 개버스턴을 잡아다가 처형해버렸다(1312. 6). 그는 그 칙령을 무효로 하고 개버스턴의 원수를 갚기 위해 11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 브루스는 잉글랜드의 속박에서 벗어나겠다고 계속 위협했다. 에드워드는 1314년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으나 6월 24일 배넉번에서 브루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스코틀랜드는 단번에 사실상의 독립을 이룩했으며 에드워드는 그의 사촌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이끄는 귀족들의 처분을 바라는 신세가 되었다. 토머스는 1315년경 자신이야말로 잉글랜드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주장했으나 그의 위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임이 드러났다. 
1318년경 펨브로크 백작인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중도파 귀족들이 토머스와 에드워드 사이에 중재 역할을 맡고 나섰는데 이때 에드워드는 더스펜서 부자(父子)를 새로이 총애하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웨일스를 차지하려는 아들 더스펜서의 야심을 지지하자 토머스는 더스펜서 부자를 추방해버렸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그들 부자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자체 내분으로 결속이 약화된 반대세력을 패배시키고 1322년 3월 요크셔의 버러브리지에서 토머스를 사로잡은 뒤 곧 처형했다. 
마침내 귀족들의 간섭에서 벗어난 그는 칙령을 파기했다. 그러나 그가 더스펜서 부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왕비인 이자벨라는 불쾌하게 여겼다.
이자벨라는 1325년 외교사절로 파리에 갔다가 에드워드를 반대하고 망명한 귀족 로저 모티머와 사랑하게 되었다. 1326년 9월 이자벨라는 로저와 함께 잉글랜드로 쳐들어와 더스펜서 부자를 처형하고 에드워드를 폐위한 뒤 아들을 에드워드 3세로 왕위에 오르게 했다(1327. 1).
에드워드 2세는 투옥되었다가 1327년 9월에 죽었는데 폭행으로 숨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일대기는 힐다 존스턴의 〈카나번의 에드워드 Edward of Caernarvon〉(1946)에 자세히 나와 있다.

 

7) Edward 3세 (1327-1377) 
1312 년에 윈저(Windsor)에서 에드워드 2세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스인인 어머니 이사벨라 (Isabella)의 음모로 아버지를 제치고 1327년에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권력은 어머니 이사벨라가 가지고 있어 어머니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다음 스코틀랜드를 점령시키고 프랑스와 100 년의 전쟁(1337~1453)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당시 프랑스의 왕 필립 VI세 (Phillip VI)를 물리치고 또한 John II세를 사로잡는 등 몇 번에 걸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기지만 마지막 전쟁에서는 실패하고 결국 노년에는 첩 Alice Perrers라는 여인에게 지배당하다가 Alice는 추방당하고 에드워드는 1377년에 세상을 뜨고 만다.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주도했다. 그에게서 난 일곱 아들과 다섯 딸의 후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왕위 분쟁을 벌였으며, 장미전쟁(1455~85)이 그 절정이었다.

초기 생애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라 사이의 큰아들인 그는 체스트 백작의 직함으로 의회에 등원했으며 아키텐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나(1325) 관례와는 반대로 웨일스 공의 칭호는 받지 못했다. 그는 부왕이 왕권을 제한하려는 귀족들과 분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귀족들에 대한 남편의 처우에 반발하는 한편 남편의 지지자들이 잉글랜드에 있는 그녀의 영지를 몰수한 데 불만을 품고 그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25년에 그녀는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서 남편의 프랑스 영지인 기옌·가스코뉴·퐁티 외의 문제에 대해 친정 동생인 프랑스의 샤를 4세와 남편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개입하여 이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잉글랜드 왕이 샤를에게 충성의 예를 바치는 조건으로 그 영지는 잉글랜드 영토로 확보되었다. 아직 어렸던 그가 아버지를 대신해 이 협상을 수행했다. 잉글랜드 왕의 법정상속인인 그는 확실하게 그의 어머니 편이었다.

1323년 프랑스로 피신한 이자벨라는 연인이 된 로저 모티머와 함께 남편을 폐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 계획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에드워드 3세를 에노 및 홀란트의 백작 빌렘의 딸 필리파와 약혼시켰다.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잉글랜드를 침공한 지 5개월 만에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국왕의 세력을 제압했다.

에드워드 2세는 무능력과 대관식 서약을 어긴 잘못에 대해 탄핵받고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1327년 1월 29일 15살의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명목상으로 그의 후견인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지만 뒤이은 4년 동안 이자벨라와 모티머가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1327년 여름 그는 실패로 끝난 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 참가했다. 이 전쟁의 결과 노샘프턴 조약이 체결되고(1328) 스코틀랜드는 독립왕국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그 협상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나 이자벨라와 모티머의 설득을 듣고서야 그 조약에 서명했다. 

그는 1328년 1월 24일 요크에서 필리파와 결혼했으며 그 직후부터 자기 어머니와 모티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종속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해 성공을 거두었다. 노팅엄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그는 밤을 틈타 지하통로로 성에 잠입해 모티머를 체포·감금한 뒤 처형했다(1330. 11). 에드워드는 사려 깊은 태도로 자기 어머니와 모티머의 연애관계를 모른 체하고 모든 면에서 어머니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으나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끝이 났다.

이제 에드워드 3세는 군림할 뿐 아니라 통치하기 시작했다. 젊고 열정적이며 활발한 성품이었던 그는 잉글랜드를 에드워드 1세 때 같은 강대국으로 재건하려고 했다. 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을 허용한 데 대해 여전히 한을 품고 있던 그는 1329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죽자 자기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스코틀랜드의 새 왕인 그의 매제 데이비드 2세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는데 에드워드는 그 약점을 이용해 로버트 1세에게 쫓겨났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자신들의 우두머리 에드워드 베일리얼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앉히도록 도왔다.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났으나 베일리얼이 잉글랜드 왕의 꼭두각시로 경멸받게 되자 1341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백년전쟁
1330년대에 잉글랜드는 점차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빠져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통치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또 다른 부수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새 왕 필리프 6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고 에드워드는 당시 프랑스의 군주와 사이가 나빴던 플랑드르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은 데다 또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1337년에 재개한 데 있었다(처음에 주장한 것은 1328년이었음).

에드워드는 1339, 1340년 2차례에 걸쳐 북쪽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파산상태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1340년 1월 그는 프랑스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에 그것은 플랑드르 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플랑드르 인들은 에드워드가 정당한 프랑스 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프랑스 왕과 싸우는 데 주저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왕위에 대한 권리 주장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끈질기게 그런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100년이 넘도록 평화정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백년전쟁이었다. 1801년까지 모든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왕의 칭호를 겸해서 사용했다.

에드워드는 1340년 6월 플랑드르의 슬뤼스 시 근해에서 벌어진 대해전에 몸소 참전해 프랑스 해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색인 : 슬뤼스 전쟁).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상전에서 자금이 고갈되어 휴전협정을 맺은(2년 뒤에 깨졌음)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1342년 이후의 시기에 그는 윈저 성을 재건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가터 훈장을 제정해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가, 이후 흑세자로 알려진 큰아들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1330 태어남)를 대동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 그는 전략적인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대규모 약탈전을 전개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그해 8월 26일 퐁티외의 크레시에서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는 필리프 6세가 북동부로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 배치했던 군대를 격파하면서 기념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에드워드는 1346년 9월 프랑스의 칼레 항을 포위해 1347년 8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서 승리를 거두고 더럼 근처 네빌스크로스에서 데이비드 2세를 제압해 생포함으로써(1346. 10) 에드워드는 한층 더 힘을 과시했으나 지속적인 정복지로 남은 것은 단지 칼레뿐이었다(→ 색인 : 네빌스크로스 전투). 그는 칼레의 프랑스 주민들을 대부분 추방하고 잉글랜드인들을 정착시켜 프랑스 침공의 전진기지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승전의 기세를 올리던 중에 자금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1347년 9월 또다시 휴전협정을 맺어야 했다.
에드워드는 1347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일련의 호화로운 마상시합을 열어 승리를 기념했다.
1348년에는 신성 로마 제위를 거절했다. 같은 해에 흑사병이라고 알려진 선(腺)페스트가 잉글랜드에 처음 발병해 1349년 말까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흑사병의 공포에도 아랑곳없이 에드워드의 궁정에서는 요란한 주연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이나 휴전협정에 상관없이, 부분적이고 소규모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뒤이은 수 년 간 에드워드는 책임 있는 장수라기보다는 호방한 기사로서 군사적 공적을 올렸다. 잉글랜드 하원(House of Commons)도 이제는 전쟁에 싫증을 냈지만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은 아무 결실도 없었고 1355년 또다시 대규모 군사행동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에서 에드워드는 칼레 외곽지역을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불에 탄 성촉절(聖燭節)'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원정을 벌여(1356. 1~2) 스코틀랜드 남동부에 있는 로디언 지방을 약탈했으며 같은 해에 베일리얼에게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정식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들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의 공적이 그를 훨씬 능가했다. 그의 아들은 푸아티에에서 승전을 거두어(1356. 9. 19) 프랑스 왕 장 2세(1350년에 필리프 6세를 계승)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로 하여금 새로운 휴전협정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포로가 된 프랑스 왕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나 런던 조약(1359)에서 너무나 많은 영토를 양도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프랑스는 이 협정을 거부했다.

프랑스로 하여금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칼레에 상륙해(1359. 10. 28) 랭스를 포위했으며 그곳에서 프랑스 왕위에 오르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그는 부르고뉴로 진격했다가 결국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러한 한 차례의 원정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브르타뉴에서 예비적인 평화조약을 맺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1360. 5. 8). 런던 조약보다는 프랑스에 덜 불리한 내용을 담은 이 조약은 칼레 조약으로 최종 타결되어 양국 왕의 비준을 받았다(1360. 10).
그 결과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 주장을 철회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남서부의 비옥한 땅 아키텐을 전부 차지했다.

몰락기(1360~77년)
칼레 조약은 잉글랜드·프랑스 모두에 안정이나 번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361, 1369년 잉글랜드에 또다시 흑사병이 발생해 사회적·경제적 혼란이 심해졌으며 물가와 임금을 발병 이전 수준으로 묶어두기 위해 절박하게 노동자 법령(1351)을 시행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1350년대에 제정된 그 밖의 유명한 법령으로는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대중적 적대감을 반영한 1351년의 후임성직자규제법(Statute of Provisors)과 1353년의 교황존중처벌법(Statute of Praemunire) 등이 있었다. 이들 법령은 빈번하게 다시 제정되었으며 에드워드는 1366년에 잉글랜드에 대해 교황청이 주장하는 봉건적 우월권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장 2세의 아들인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칼레 조약을 파기하자 에드워드는 다시 프랑스 왕의 칭호를 썼으나 이 문제에 대해 전과 같은 열성을 보이지는 않았고 대부분의 전투와 외국영지의 관리를 자신의 아들인 흑세자 에드워드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맡겼다.

프랑스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그들이 싸움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 에드워드는 자금이 부족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부와 특권을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한편 아키텐은 점차 프랑스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에드워드 왕자는 건강이 나빠져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1371)
곤트의 존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칼레에서 보르도까지 행군했으나(1373)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친히 마지막으로 해외 출정을 시도했으나(1372) 역풍이 불어 그의 군대는 프랑스에 상륙조차 하지 못했다. 1375년에 그는 기꺼이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이 협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효했다. 그 협정에 따라 잉글랜드의 수중에 남은 중요한 영지는 칼레·보르도·바욘·브레스트로 줄어들었다.

에드워드는 1369년 필리파 왕비가 죽은 뒤 탐욕스러운 정부 앨리스 페러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와 곤트의 존은 각기 자기 세력을 이끌고 왕실과 추밀원에서 날카롭게 대립했다.

곤트의 존은 1374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앨리스 페러스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의 통치는 명예롭지도 못했고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1376년의 유명한 이른바 선린의회(Good Parliament)에서 지배세력인 곤트의 존 일파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마침내 전면에 터져 나왔다. 앨리스 페러스는 축출되었고 곤트의 추종자 일부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의회가 일을 다 마무리 짓기 전에 에드워드 왕자(Edward, Black Prince 흑태자)가 죽음으로써(1376. 6. 8) 하원은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다.

곤트의 존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에드워드 3세가 죽자 선린의회가 제정한 조례는 번복되었다.

에드워드의 성품
에드워드 3세는 남다른 활력과 열정적 기질을 지닌 인물로서 탁월한 전술가였고 완벽한 기사였다. 그의 궁정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으며 그 자신도 프랑스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용맹한 기사단의 우두머리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의 야망은 주로 군사적 영예를 얻는 데 치우쳤지만 잉글랜드에서 그는 나쁜 군주가 아니었고 관용적이고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가까이하기 쉬웠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보급물자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백성들의 청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의회의 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약점은 부당한 배신행위, 낭비벽, 경솔함, 방종한 생활 등이었다. 그의 야망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그가 죽기 전에 백성들까지도 그의 실패를 느낄 정도였다.


7) Richard 2세 (1377-1399)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 => 랭커스터 왕가 헨리 4세 패배
1367년에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나지만 아버지 에드워드(Edward, Black Prince 흑태자)가 죽으므로 삼촌 John of Gaunt 밑에서 자란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역병과 세금으로 시달리는 시대에 왕위에 올라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국회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는다.
Anne of Bohemia라는 로마 황제의 딸과 결혼하지만 1394년에 부인이 죽으므로 1396년에 프랑스의 공주 Isabella와 결혼하기로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삼촌 John of Gaunt의 아들 Henry Bolingbroke을 망명 보내지만 그가 돌아와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을 사로잡는 바람에 결국 왕위를 내려놓고 폰태프락트 성 (Pontefract Castle)에 유폐되었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존(John of Gaunt)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헨리는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왕가(1399-1461년)를 이루다가  요크 왕조(1461년-1485년)에 이어지고 그 뒤 랭커스터의 혈통은 존의 서자가 창시한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7세로 이어져 튜더 왕조(1485 ∼ 1603)를 이룬다

강력한 반대파 귀족계급과 싸워 패배·사망했으며, 이 때문에 이후 85년간 잉글랜드의 왕권은 약해지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흑세자(黑世子)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손자로 1377년 6월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숙부였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비롯해 에드워드 3세 재위 말년에 권력을 잡은 귀족들이 계속 나라를 다스렸다.
곤트의 실정(失政)은 흑사병과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일어난 경제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리처드는 최초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는 고문관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는 한 듯하지만 대단히 침착하게 거짓 약속을 제시하여 반란세력을 무마시켰다(1381. 6. 14~15).
1382년 보헤미아의 앤 공주(1394 죽음)와 결혼했으며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1385년에 이르러 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같은 대수롭지 않은 정신(廷臣)들로 개인적 추종세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철런,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비첨 등이 이끄는 반대세력들도 등장했다.
곤트는 줄곧 파벌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다가 1386년 7월 카스티야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리처드를 적들의 수중에 내버려 두었다.
리처드의 적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리처드의 비서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을 탄핵하고(1386) 11인 위원회를 만들어 1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리처드가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왕권을 침해하는 반역적인 위법행위라고 선언하자 그의 적들은 이에 맞서 1388년 의회를 열어 리처드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범법자로 몰았고, 일부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린 국왕은 청원파(appellants)라고 불리는 5명의 반대파 주요 지도자들에게 굴복했지만 1389년 5월에 이르러 성년이 된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1389년 말 곤트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상황을 진정시킴에 따라 리처드는 이후 8년간 곤트 및 청원파들과 외견상 화목한 관계로 지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국왕은 줄곧 이전의 적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다시 더욱 강력한 국왕 지지파를 결속해나갔으며 1397년 무렵에는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애런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시켰으며 워릭을 추방하고 글로스터를 투옥·살해했다.
청원파였던 곤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과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398년 9월 분쟁을 일으키자 국왕은 이 기회를 틈타 두 사람을 모두 추방했다. 뒤이어 1399년 2월 곤트가 죽자 리처드는 볼링브룩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해 5월 그는 아일랜드로 떠났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그가 없는 동안 헨리 볼링브룩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귀족들을 규합했고, 리처드는 8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헨리 볼링브룩에게 항복했다.
그는 9월 30일 폐위되고 볼링브룩이 국왕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는 10월에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4개월 뒤 그곳에서 죽었는데 아마도 스스로 굶어 죽은 듯하다.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2세 Richard Ⅱ〉에서 그가 살해당했다고 이야기한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리처드는 예민한 문학적 감식안을 지녀 제프리 초서, 존 가워, 장 프루아사르 같은 문인들을 후원했다. A. B. 스틸이 쓴 전기 〈리처드 2세 Richard Ⅱ〉가 1941년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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