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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 정책, 3B 정책, 영국, 독일, 식민지, 제1차 세계 대전, 원인, 배경, 카이로(Cairo), 케이프타운(Cape Town), 콜카타(Calcutta), 베를린(Berlin), 비잔티움(Byzantium), 바그다드(Baghdad), 수에즈 운하, 인도

Jobs9 2024. 10. 6.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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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 정책, 3B 정책, 영국, 독일, 식민지, 제1차 세계 대전, 원인, 배경, 카이로(Cairo), 케이프타운(Cape Town), 콜카타(Calcutta), 베를린(Berlin), 비잔티움(Byzantium), 바그다드(Baghdad), 수에즈 운하, 인도

 


3C 정책
카이로(Cairo) - 케이프타운(Cape Town) - 콜카타(Calcutta)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추구한 정책. 카이로(Cairo) - 케이프타운(Cape Town) - 콜카타(Calcutta)를 잇는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C 정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국력이 최절정에 달했던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에 벤자민 디즈레일리, 세실 로즈, 조지프 체임벌린 등이 주창한 제국주의 팽창 노선이다. 영국은 프랑스 등과 함께 선발 제국주의 국가로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이 식민지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구상을 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을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취하고 또 카이로에서 인도의 콜카타를 연결하기 위해 중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했다. 이렇게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콜카타 3개 지역을 잇는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국의 팽창주의 노선은 곳곳에서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였다. 먼저 아프리카에선 숙명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마다가스카르를 잇는 이른바 횡단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국은 남쪽으로 프랑스는 동쪽으로 진출하다보니 결국엔 오늘날 남수단 일대에서 충돌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다. 

또 카이로와 콜카타를 연결하는 정책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하였다. 크림 전쟁,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거문도 사건 등 영국과 러시아의 잇달은 충돌은 모두 3C 정책과 남하정책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의 손으로 러시아를 죽이는 차도살인을 단행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좌절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후엔 또 다른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 제국과 충돌하게 된다. 식민지 확장에 비판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문했다. 그 결과 나온 정책 중 하나가 베를린 - 비잔티움 -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이른바 3B 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독일이 충돌하게 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보물단지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건드리게 될 것을 심히 우려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이같은 두 나라 간 충돌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3B 정책
베를린(Berlin) - 비잔티움(Byzantium) - 바그다드(Baghdad)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20세기 초 독일 제국이 추구한 정책. 베를린(Berlin) - 비잔티움(당시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Byzantium) - 바그다드(Baghdad)를 잇는 철도[1]를 부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B 정책이라고 부른다. 

세계 정책을 내세워 독일의 패권을 전세계로 확장하고자 했던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은 서아시아 일대에도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추진 중이었던 바그다드 철도는 독일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업이었다. 만약 이 철도를 독일이 부설할 권리를 손에 넣게 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독일의 경제권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해 관계 하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도이체방크는 1893년 바그다드 철도(BagdadBahn) 부설권을 수주하는데 성공한다. 독일이 철도를 부설하는 대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114년간 운영권을 임차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 열강들은 독일이 서아시아 일대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우선 영국의 경우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핵심 이익지대인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침범할 것을 심히 우려했다. 이 시기 영국은 앞서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케이프타운 - 카이로 - 캘커타를 잇는 소위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남하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고, 페르시아 일대에서 영국과 경쟁하고 있던 러시아 역시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에 독일의 3B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프랑스 역시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히려 했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 부설을 방해했다.   

오랜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독일은 마침내 1911년에 러시아, 1914년에 영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숙원사업이었던 3B 정책에도 순풍이 불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했고, 두 국가도 독일의 적성국으로 돌아서면서 사업은 취소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카리브해, 중국 대륙, 태평양
원인
사라예보 사건과 그 사건으로 폭발한, 오랜 시간 축적되던 열강들 간의 갈등과 민족주의의 충돌 등의 복합적 원인

 

 

1차대전 개전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정치관계.

 삼국 동맹 /  삼국 협상 /  오스만 제국 /  발칸 당사국
 지원 관계 /  동맹 관계 /  조약 관계




결과
협상국의 승리
영향
동맹국 국가 해체
중동과 유럽 국가 독립,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독립선언
전제군주제 몰락 및 유럽 내 황제국 전멸 및 이로 인한 공화제의 대두
국제연맹 창설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피해규모
사망(군 병력) 5,525,000명
부상(군 병력) 12,831,500명
실종 4,121,000명
총 사상자 22,477,500명
사망(군 병력) 4,386,000명
부상(군 병력) 8,388,000명
실종 3,629,000명
총 사상자 16,403,000명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2014년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 전개

독일 제국의 신민들에게 고한다! 제국의 형성 이후 43년 동안 짐과 짐의 조상들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의 평화롭고 강력한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9일 후인 1914년 8월 6일, 빌헬름 2세 카이저의 연설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100년 간의 평화 시대 속에서 지속적인 팽창을 이룬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독일 제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제국들의 불만, 유럽 내 민족주의적 갈등 등 다수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 협상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을 중심으로한 삼국 동맹이 형성되었고 이들 두 동맹체 간의 대립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혁명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 동맹 소속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분노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때 세르비아를 같은 슬라브족 국가로써 보호하던 삼국 협상 소속의 러시아 제국이 반발하며 총동원령을 내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인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 반도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제국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영국이 독립을 보장하던 벨기에를 침공하자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참전을 선언한다. 일본 제국 또한 영일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캅카스와 중동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 참전했고, 미국은 이어서 1917년에 참전했다. 단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당대의 주요 열강들이 협상국과 동맹국이라는 2개의 동맹체 아래 모두 말려드는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만다.  

시간이 지나 전쟁이 길어지며 모든 주요국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와 장기화되는 전시 경제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전쟁은 끝을 보이게 된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자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확보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한 러시아 제국과의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마지막 발악으로 루덴도르프 공세를 실시했으나, 협상군은 독일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협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 이후 세계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아래 난도질을 당했다.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이고 말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국가가 완전히 해체될 위기였으나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튀르키예의 형태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써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를 흡수해 전세계에 새로운 국경선을 그렸다. 이와 같은 대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탄생했으나, 패전국에 대한 징벌의식은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의 파시즘 부흥을 낳았고, 전후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결말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 크게 봤을 때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과 그들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것이 지목된다.  

제국주의와 열강들간의 긴장 고조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 안정된 정세가 조성된 덕분에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열강들이 자국의 산업을 팽창시키며 세워진 수많은 공장들을 운영하기 위해 원자재가, 그를 가공한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강대국들의 산업이 점차 성장하며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진 레드오션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독일 통일을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 땅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다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 범게르만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은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특히 빌헬름 2세는 식민지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해양 패권에 민감하던 영국의 신경을 크게 건드렸다. 윈스턴 처칠은 영독 관계에서 함대란, 독프 관계에서의 알자스-로렌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파울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Paul Graf Wolff Metternich zur Gracht)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 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를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독일을 적대관계로 만들었으며 세계 대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미 제1차 대전 이전에도 독일 제국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 전쟁 당시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위기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민족주의의 발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다민족 국가 또한 역시 내부적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요민족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들은 인구 구성의 반도 안 되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너무 많은 이권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에 맞서 발칸 반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였는데, 그 뒤로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나라는 세르비아 왕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 왕국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인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왕국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반오스트리아 활동 해체, 사라예보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세르비아 내 재판 개입 등을 요구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이를 거부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의 지원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 긴박한 1달의 일련의 사태를 아래에서도 설명하듯 7월 위기라고 한다.

 

 



전통적인 유럽 내 외교 균형의 붕괴

본래 19세기 오토 폰 비스마르크 시대의 독일은 독일 통일 이후 더 이상 중부 유럽에서 팽창을 시도하면 열강들과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판단하여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에 신경을 많이 썼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이 되는 것을 자처하면서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3제 동맹을 맺고 전통적인 서유럽의 강대국이던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그는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헝제국을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1894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하며,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영국 역시 독일의 성장을 상당히 경계했고 오랜 경쟁 관계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삼국 협상을 체결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최근에는 만약 비스마르크의 실각이나 빌헬름 2세의 팽창 정책이 없었다고 해도 독일이 유럽의 가장 강대한 국가가 되어가는 이상 어차피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 협상을 막을 수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1850년까지만 해도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의 경제력 비율은 70:12:7:4로 독일의 경제력이 당시 압도적이였던 영국에 비할 바가 못되었지만, 1900년에는 독일이 영국을 거의 따라잡아서 37:11:34:10이 되었고, 1910년에는 30:12:39:10으로 독일의 경제력이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인구 측면에서도 6,70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독일이 영국의 4,600만 명이나 프랑스의 4000만 명을 가볍게 앞서고 있었고,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를 격파했던 독일의 강력한 육군까지 고려한다면 독일이 조만간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불보듯이 뻔한 상황이었다. 이렇다보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독일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과 러시아까지 독일의 적국으로 돌아서는 것은 독일의 정책 방향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과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싸우면서 국력을 소진하는 동안 이득을 챙기려는 외교 정책을 펼치고 있었으나, 독일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지자 이제 독일을 러시아의 안보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동유럽과 발칸 반도의 패권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두 국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독일도 휘말려 들어가서 외교 관계가 엉망이 되곤 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의 말년부터 이미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기 전인 1887년에 마지막으로 러시아와의 동맹을 갱신했을 시절에는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만약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러시아가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을 공격하러 올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져 가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조금이라도 연장해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으나, 만약 비스마르크가 총리를 더 오래 했다고 해도 언젠가는 결국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가 깨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도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몰두하던 시절에는 식민지 쟁탈전의 경쟁 상대인 프랑스를 견제해주던 독일에 우호적이었지만, 1890년대부터 독일과의 관계가 서서히 냉랭해지기 시작했고, 1904년 영불협상을 타결하여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분쟁을 종결시키면서 대결 상대를 독일로 옮길 환경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세와 사회 개혁 문제가 쟁점이 된 1906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보수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면서 독일을 주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당시 자유당 세력은 지나친 식민지 팽창 정책을 혐오했으며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전의 보수당보다 훨씬 더 독일에 적대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진하고도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와 이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배했던 프랑스의 상황도 영국이 더 이상 타국에게 독일을 견제하는 임무를 떠넘길 수 없게 하는데 일조 했다. 

안일한 대처
존 키건의 저서 1차세계대전에 의하면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영국대사 조지 윌리엄 뷰캐넌(George William Buchanan,1854 ~ 1924)과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최초로 세계 대전의 불씨를 인식했다고 추측된다. 이들은 당사국들에게 회의를 제안하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당시 들어오는 정보와 각종 제안들만으로 이미 각국 외교부 실무진들은 그로기 상태였다. 전화같은 현대 통신의 이기가 없던 시절의 한계. 가장 큰 문제는 독일 제국 수뇌부들은 카이저부터가 일단 요트타고 놀고 있었던 걸 시작으로 거진 휴가 중이란 것이다. 

당시 세계 대전은 그저 '가능성'이었고, 경제적으로만 보면 또 별개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거치며 산업혁명과 철도는 인구, 기술, 생산, 운수에 혁명적인 진보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국제적인 규제는 없다시피했고 국제 자본은 전세계를 오갔다. 1900~1910년 사이에는 평균적으로 연간 3억 5천만 파운드의 금액이 유럽에서 아메리카, 아시아로 오갔으며, 독일 철강 기업에 투자금의 상당수가 적국 프랑스의 자본이거나 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국제 전신 연합, 만국 우편 연합과 같은 온갖 국제협력을 위한 협의회들이 설치되어 가며 상호의존을 가속화시켰고, 이러한 거미줄과 같은 상호 교류는 세계 대전과 같은 악몽은 그저 악몽일 뿐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은 단순한 기대만으로 피할 수 없었다.  

 


발발 과정 - 7월 위기


전쟁 열병/자원병 열풍
1차 세계 대전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크고 끔찍한 전쟁에 자원입대를 하면서 군대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넘쳤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언론에서는 청년들에게 군대로 입대할 것을 권했고 "Your country needs you", "I want you" 등 유명한 문구의 모병 포스터들이 거리에 붙여졌다. 물론 전쟁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겁쟁이나 매국노 등으로 몰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프랑스의 장 조레스처럼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변 또래들은 자원해서 군대로 입대하는데 건강한 청년이 입대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기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당시에는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벨 에포크 시대였다. 시나 소설에서도 나폴레옹과 같은 전쟁 영웅들의 멋진 서사시를 노래할 뿐 전쟁의 참혹함이나 그 속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 아닌, 단순히 영웅놀음이나 성인식, 모험 등으로 각인되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지나친 낙관도 있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벨 에포크 시대의 길어진 평화로 인해 전쟁에 대해서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나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여 년간 전 유럽대륙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전면전도 없었던 데다 전쟁을 치르더라도 대부분 단기간 내에 좀 치고 받으면서 끝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시대는 산업혁명과 병기의 발달로 인해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전쟁관은 여전히 중세적, 전근대적이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군대라고 하면 금 장식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포화와 총격에도 꿋꿋히 전진하는 라인배틀로 상징되는 명예와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의 전쟁의 양상과도 1차대전은 너무나도 달랐다. 과거 유럽 왕족은 친인척으로 얽힌 경우가 많았고, 전쟁을 스포츠처럼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의 중원 통일처럼 나라 대 나라가 존폐 여부를 걸고 싸우는 경향이 아닌 몇번의 큰 전투 이후 판도를 본뒤 조약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평민들에게도 전쟁은 기사들이 출진하고, 영주가 바뀌더라도 거기서 그칠 뿐, 체감하는 개인적인 일은 없어 크게 상관있지 않은 이야기들이였다. 

그러나 20세기가 들어서면서 더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애국심과 민족주의 열풍이 강하게 불던 시기로, 또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징집된 병력을 철도로 얼마나 빨리 집결시키는지가 승리의 큰 요소가 됨이 증명되었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모병과 애국심 고취에도 많은 힘을 쏟았다.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아갔다. 냉병기 시대와 달리 총이 개발되면서 더 이상 숙련된 병사가 필수적이지 않았다. 1명의 숙련된 기관총 사수보다 5명의 초보 기관총 사수가 더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이 가능했긴 때문에 물자 또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영주 대 영주의 돈(전쟁수행유지용) 대결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국가 총동원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총력전은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참전국 전원을 존폐의 위기에 몰아넣는 다같이 망하는 수준의 피해를 불러왔다.

사실상 오랫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탓에 유럽인들에게 전쟁이란 기껏해야 머나먼 식민지에서 낙후된 토착민들을 우월한 기술력이 적용된 무기로 학살하는 경험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조국의 군대가 타 국가를 손쉽게 혼내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급속도로 발달하던 기계화된 무기들이 자신들을 향해 대량으로 사용되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1910년대 초기에 벌어진 몇 차례의 국가들 간의 형식적인 대치만 하는 모습은 이러한 착각을 더욱 부추겼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가 식민지 대결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청년들은 "그까짓 전쟁... 이번에도 적당히 대치만 하고 총 몇번 쏘다보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는 영웅이 되겠지?" 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결국 전쟁 발발 초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모병소에 국가에 대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전쟁영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한 지원병 청년들이 미어터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갈지 제대로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쟁이 아무리 길어봐야 3개월 정도면 끝나고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에 차 있었다. 즉, 낭만주의와 애국심에 빠저든 젊은이들이 "강한 우리나라의 군대가 적군을 물리치고, 나는 그곳에서 영웅처럼 싸워서 승리하고 명예롭게 훈장과 포상을 받고 제대한다!!!" 라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서 저승사자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전쟁터로 자원입대를 한 것이다.

물론, 자원입대를 하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귀향한 이들은 전쟁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무려 4년도 넘게 버텨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으며, 가족들과 고향 친구들은 대부분 끔찍한 전쟁을 겪고 세상을 떠났다. 결국 이들은 전쟁의 끔찍한 후유증 속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억을 잊지 못했다. 

실제로 서부전선의 경우는 병사들의 평균 생존시간은 겨우 5일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영국군의 경우는 같은 지역 출신자들은 되도록 같은 부대에 몰아넣었는데, 대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들에서 특정 지역의 청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빈번했다.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주변에 죽은 전우들은 고향 친구들일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굶주림이나 추위는 물론이고 물이 고인 진흙탕 참호에서 참호족에 걸리기 일쑤였으며, 대량의 포화 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셸 쇼크 증상을 보이는 병사들도 많이 발생했다. 

또한,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자신들에게 돌아오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생존자들 중 일부는 그대로 군대에 말뚝을 박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또 다시 세계 대전에 나가야 했다. 말뚝 외에도 국민돌격대, 임관, 정계, 재입대, 추축국의 침공에 대항한 저항운동 등으로 2차대전에도 참전한 1차대전 참전 출신자들도 많았다. 

한편, 전쟁이 길어지고 불구가 된 전상자들과 비어있는 관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후방에서도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전쟁을 결정한 정부는 선거 등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그럼에도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학업, 질병 등의 이유로 정당하게 면제받을 수 있음에도 자원입대 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당시는 민족주의/애국심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사지멀쩡한 건장한 청년이 군복을 입지 않고 거리를 쉽게 돌아다닐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뒤에서 겁쟁이라고 험담을 당하고, 종종 어째서 군대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다. 굳이 뭐라 안하는 분위기라 해도 오히려 낭만주의가 지배적일 때는 전쟁분위기를 혐오했지만 정작 전쟁터에 가서 죽어가는 또래 연령대의 청년들을 보면서부터는, 오히려 "전우들은 죽어가는데 나만 후방에서 편하게 지낸다" 라는 죄책감에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도 자진입대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많은 청년들이 자원해서 사지로 들어갔는데, 특히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린 청년들은 적국을 증오하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특히 그 낭만주의에 가장 강하게 경도되어있던 청년 귀족층들은 나중에 전선의 상황이 알려진 후에도 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명예욕과 의무심에 계속해서 장교로 입대했는데 초급 장교들은 보병전에서 항상 최선봉에 서야 했으므로 일반 보병들보다도 훨씬 죽을 확률이 높았으며 실제로 엄청난 숫자가 사망했다. 전후 유럽 귀족층에서 아들들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어버려서 가계가 흔들린 곳이 많을 지경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1.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

 

삼국 동맹
  • 비스마르크: 유럽 세력 균형의 현상 유지, 프랑스 고립
  • 빌헬름 2세: 범게르만주의, 팽창주의(3B 정책)
  • 독일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간 결성(1882)

삼국 협상
  • 프랑스: 독일의 팽창 정책 견제를 위해 러시아∙영국과 협상 체결
  • 영국: 3C 정책 → 서아시아에서 독일과 충돌

 

 

 

2. 발칸 전쟁

 

▶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강제 병합 → 범슬라브주의(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동맹 결성, 러시아 지원) → 제1차 발칸 전쟁(1912, 오스만 제국 축출) → 동맹국 간 영토 분쟁(1913, 제2차 발칸 전쟁) → 오스트리아의 방해로 세르비아의 영토 확장 실패

 

 

 

3. 제1차 세계 대전

 

▶ 배경

  • 사라예보 사건(1914) →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

 

▶ 전개

  • 독일의 벨기에 침공 → 마른 전투와 솜 전투에서 프랑스 승리(영국의 지원) → 장기전(참호전) 돌입 →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러시아 혁명 → 브레스트 - 리토프스크 조약(1918)

 

▶ 결과

  • 동맹국 항복, 독일 킬 군항 수병들의 반란 → 빌헬름 2세 퇴위, 공화국 수립 → 협상국과 휴전 조약 체결(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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