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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게르만주의, 대독일주의

Jobs9 2024. 10. 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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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게르만주의
독일어: Großdeutschland / Pangermanismus[


독일이 방어와 공격의 정신으로 형제처럼 서로 함께 단결하면 / 마스[2]에서 메멜[3]까지, 에치[4]에서 벨트[5]까지!
Wenn es stets zu Schutz und Trutze brüderlich zusammenhält / von der Maas bis an die Memel, von der Etsch bis an den Belt! 
독일의 노래 中


19세기 무렵에 태동해 20세기 초 전간기에 독일어권 지역에서 성행했던 범국민주의 사상으로, 대독일주의(大獨逸主義)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범게르만주의가 주장하는 바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이 독일이라는 한 나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일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을 범게르만주의로 정당화했고, 유사 개념으로 러시아 제국이 주도한 범슬라브주의도 있다. 흔히 제1차 세계 대전을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이후 범게르만주의는 인종주의와 겹쳐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표출되고 말았는데, 그 이후로는 사실상 매장된 사상이다. 독일의 노래 1절이 공식적인 국가에서 배제된 것에서 보이듯이 오늘날에 이런 생각을 입에 올렸다간 거의 네오나치 취급을 받는다. 

범'게르만'주의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독일어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게르만 지역(네덜란드, 잉글랜드, 북유럽)은 포함하지 않는다.[7]

19세기(1815–1866)  독일 연방  소속 독일어권 국가들

 


18세기까지 프랑스 왕국에서 독일을 가리키는 단수(Singular) 명칭이 없이 독일들, 혹은 독일어권이라고 지칭한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독일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대제국으로 묶여 있기는 했지만, 프랑스와는 달리 중앙집권화에 실패해서 제후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형태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제후들이 주권을 가지면서 완벽하게 허울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몰다비아 공국의 서북부를 할양받고 폴란드 분할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세우는 등 영토를 꾸준히 확장해나갔고 프랑스와 여러 전쟁을 벌일정도의 국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 보유 영토를 확장한 것일 뿐 신성 로마 제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마지막으로 제국 문제는 거의 손에 놓다시피 했다. 허울뿐인 껍데기만 남은 신성 로마 제국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출현으로 1806년 8월 6일 반강제로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기 위해 소집된 빈 회의는 신성 로마 제국을 복원하지 않고 300개가 넘던 영방국가를 38개로 정리해 독일 연방을 출범시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독일 연방의 의장을 겸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독일에서도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졌고 1848년 혁명을 거치면서 독일어권 사용 지역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독일의 노래 1절이다. 

 

 

소독일주의의 승리

하지만 통일된 독일을 형성하고자 했던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보수세력의 반동으로 붕괴되었다. 독일 연방을 양분한 세력은 전통적으로 독일어권의 터줏대감을 자처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18세기를 기점으로 새로이 강국으로 급부상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두 강대국의 갈등은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승리한 측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포함되지 않은 독일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전쟁을 마무리지었지만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같은 독일 연방 미포함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 국가 문제가 남아있었다. 결국 독일 연방 역외 영토를 포기하지 못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축출되었고 독일 민족만으로 이루어진[10] 소독일주의 통일 국가가 형성되니 이것이 바로 독일 제국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독일계가 주축이 된 국가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두 곳이 생겨났으니 독일어권은 통일된 게 아니라 양분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여담으로 명목상 소독일주의 강역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일부였으며, 독일 연방의 회원국이었기 때문이다. 

 

나치즘과의 결합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독일 내 범게르만주의의 광풍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와 훨씬 가까웠던 독일의 (주로 남부) 가톨릭 신자들과 사민주의자들 중에서도 '오스트리아를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왔고,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급부상한 이민족 헝가리인에 의해 입지가 크게 줄어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오스트리아인은 기득권 수복을 위해 가까운 독일 제국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이렇게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독일제국으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러한 범게르만주의는 옆동네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와 필연적으로 충돌을 빚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만약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으면 범게르만주의가 정말로 실현될 수도 있었겠지만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폴란드의 독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안슐루스 금지[11] 등 범게르만주의자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결과가 왔다. 

1차 대전 패전 이후에도 민족주의와 통일관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나치당을 위시한 범게르만주의자들이 기존의 사상을 비뚤어진 인종주의와 결합하면서 나치즘이 대두하였다. 이른바 레벤스라움이라고 불리는 동유럽으로의 영토 확장은 처음부터 범게르만주의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지만 우생학을 신봉했던 나치들은 '저 동네 슬라브인들을 싸그리 멸족시키고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자'는 정신 나간 주장을 펼쳤다. 여기에 '고대 게르만족의 후예이면 모두 하나다!'라는 개념까지 더해져서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하나의 독일 안에 아우르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러한 움직임의 정점이 1938년 실시된 안슐루스와 그 이후의 뮌헨 협정. 여기서 멈췄으면 괜찮았겠지만[12] 나치는 정신 못 차리고 2차 대전으로 판을 전세계구급으로 벌려버렸다. 이후 독일에 수립된 서독과 동독에서 범게르만주의는 사회적인 금기가 되었고 몇몇 네오나치들을 제외하면 사장된 사상이 되었다. 

 

 


1990년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독일이 통일되면 다시 범게르만주의를 제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잠깐 커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유럽 연합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독일이 탄탄한 경제력과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유럽 연합의 실질적인 수장국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유럽과 남유럽으로부터 제4제국이나 다름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지만, 일단 현재의 독일의 패권은 민족성이 아닌 경제력에 기반하기 때문에 독일 제국~나치 독일 시대의 범게르만주의와는 차이가 명확하다. 제4제국이라는 오해와 달리 만장일치제를 채택한 EU 체제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맹주국임에도 정책을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스에 늘 쩔쩔매며 설득하기 바쁘다. 

 

 

 

 

[1] 본래 독일어권에서 시도하려 했던 좁은 의미의 범게르만주의는 전자, 2차대전 당시 나치당이 좀 더 넓게 정의한 범게르만주의는 후자에 해당한다.
[2] 벨기에에 자리잡은 뫼즈 강의 독일어식 표현이다.
[3] 현재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4]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는 아디제 강의 독일어 명칭.
[5] 발트해가 아니라 'Belt'라고 불리는 덴마크 유틀란트에서 셸란 사이의 릴레벨트 해협과 스토레벨트 해협을 말한다. 애초에 발트해는 독일어로 'Ostsee', 즉 동해다.
[6] 노래 길이가 매우 긴데 알자스-로렌은 기본이고 오스트리아, 티롤, 스위스, 그리고 도나우 강변까지 전부 독일로 취급하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문화권, 언어권을 기준으로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당시 '독일'은 관념상의 권역이지 정치적 실체가 아니었다.
[7] 다만, 북유럽 지역에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따로 있었다.
[10] 물론 독일 제국도 다민족국가였으며, 독일 제국 수립을 주도한 프로이센만 하더라도 동부의 포젠, 서프로이센 일대에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과 알자스로렌의 프랑스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덴마크계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계가 고작 25%밖에 안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해서는 확실히 독일인의 비중이 훨씬 컸다.
[11] 다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합은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으로 20년간만 금지했으며 결국 시효가 만료되자마자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 오스트리아를 기어코 독일의 강역에 편입했다.
[12]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수데텐란트 할양의 경우 베르사유조약의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진행되었기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가 우방국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면서까지 평화를 원했기에, 정말 이 시점에 히틀러의 야욕이 멈추었다면 2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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