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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륙 식민지 경영, 영국령 아메리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영국 성공, 스페인 실패?

Jobs9 2024. 10. 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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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의 해외식민지 쟁탈전

연도
승전국(주도국)
패전국
사건
1415
포르투갈
 
<첫 해외진출>, 아프리카 북단 항구 세우타 점령
1419
포르투갈
 
<첫대서양진출>,마데이라섬, 아조레스군도 점령
1456
포르투갈
 
대서양 카보 베르데 섬 도달
*카보베르데 섬 : 아프리카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가 있는 카보 베르데(카보=곶)에서 서쪽으로 5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음. 여기서 계속 서진하면 서인도제도의 도미니카, 남미의 베네수엘라 등에 도착함
1480
포르투갈 & 에스파냐
<해외 식민지 영역 경계선 획정>(로마교황 중재)
* 아프리카 기니 - 보자도르 곶 연결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포르투갈, 북쪽은 에스파냐가 지배권을 가짐
1482
포르투갈
 
아프리카 황금해안에 요새 건설
1482
에스파냐
 
<첫 해외영토 확보>, 카나리아 군도 점령
1488
포르투갈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도착, by B.디아스
1490
포르투 갈
 
아프리카 루안다 점령, <노예무역 본사 설치>
1492
에스파냐
 
<신대륙,아메리카 발견>, by 콜럼부스
1493
포르투갈 & 에스파냐
<해외 식민지 영역 경계선 조정>(로마교황 중재)
* 신대륙 발견에 따라 기존 경계선 수정. 카보 베르데 섬에서 서쪽으로 100 레구아(legua. 1레구아= 5.6km)떨어진 곳을 기점으로 그 서쪽은 에스파냐, 동쪽은 포르투갈이 관할
1494
포르투갈 & 에스파냐
<토르데시아스 조약, 식민지 경계선 재조정>
* 에스파냐 출신으로 에스파냐의 비호를 받는 교황이 에스파냐에 유리하게 경계선을 조정했다고 포르투갈이
불만을 제기하여, 교황을 배제하고 양국이 에스파냐의 토르데시아스에서 재협상. 그 결과, 경계선이 카보
베르데 섬의 서쪽 370 레구아(약 2,100km, 서경 40도 쯤)으로 조금 더 서쪽으로 이동됨
1498
포르투갈
 
<인도(캘리컷, 지금의 코지코드) 도착, 인도 신항로 개척>, by 바스쿠 다 가마
* 진짜 인도의 발견으로, 콜럼부스가 발견한 곳을 서인도제도, 진짜 인도를 동인도로 구분하여 부르게 됨
* 포르투갈은 이후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며 세계 강국으로 부상
* 캘리컷으로부터 커리(카레)가 유럽의 요리에 도입됨
* 바스톨로유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시에는 폭풍의 곶(cape of storms)이라고 불렸으나, 인도항로 발견 이후
희망봉(cape of good hope, 포르투갈어 cabo da boa esperana)로 바뀜
1500
포르투갈
 
<대서양 건너 인도 찾아 가다가,브라질 도착>
* 신대륙에서 다른 지역은 모두 에스파냐가 차지하고, 브라질만 유일하게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 것은
브라질의 일부 땅이 토르데시아스 조약의 경계선 안에 들어갔기 때문임. 그 조약 체결 시에는 아직 브라질까지 가지 못 했기 때문에 브라질을 차지하기 위하여 포르투갈이 경계선 이동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발견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경계선을 이동한 것처럼 되었음
1501
에스파냐
 
<아메리카 무역 독점권 선포>
* 신대륙을 에스파냐의 독점적 보호령으로 지정하고, 다른 다라의 신대륙 항해 금지.
1534년에 프랑스가 이를 무시하고 북미 퀘백에 진출하고, 1588에는 에스파냐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에 패배
하면서 에스파냐는 신대륙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유지하지 못 하게 됨
1513
에스파냐
 
태평양 발견 by 발보아(파나마 도보횡단하여발견
1513
포르투갈
 
항해에 의해, 처음으로 중국(광동) 도착
1520
에스파냐
 
<마젤란 해협 통과, 태평양 횡단> by 마젤란
*포르투갈 군인으로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 동남아까지 갔었던 마젤란이 에스파냐로 귀화하여 대서양을 가로
질러 서쪽 항해로 아시아 필리핀(1521)까지 횡단, 지구가 둥글다(지구 구형설)는 것을 완벽하게 입증함.
이로써 유럽 국가들은 작은 유럽 대륙을 떠나 선박으로 오대양을 누비며 식민지를 개척하는 대항해 시대를 엶.
* 거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고 나타난 새로운 바다는 잔잔했다고, 마젤란은 그 바다 이름을 태평양으로 부름
(percific ocean 에서 percific 는 원래 크다는 뜻보다는 널리 평안하다는 뜻임)
* 1569 펠리페2세 에스파냐 국왕은 필리핀을 정복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이름을 지음
1534
프랑스
 
캐나다 퀘백주 진출, 프랑스 제국주의 시작
1543
포르투갈
 
일본 도착(일본에 처음 온 서양인은 포르투갈인)
1557
포르투갈
 
중국 마카오 거류권 획득(중국 정부에 대금 지급)
* 아시아의 중국, 인도, 일본 등은 강력한 중앙집권 왕권 국가로서 군사력도 막강하고, 문화/제도의 수준도
유럽 이상이어서 작은 나라인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음. 그래서 그 나라 정부의 허가
를 받아, 제한된 지정 장소를 돈 내고 빌려 무역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음. 그러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신대륙은
정복의 대상이었음. 무력으로 광대한 땅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플란테이션 농업이 가능했음
* 에스파냐가 1500~1650 사이에 중남미에서 캐낸 은은 1만 6천톤이었는데, 이중 2/3이 오스만, 인도, 중국 등 아시아 국가의 물품 수입 대금으로 지출되었음. 강력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무력 사용을 못 하고, 유럽에서 인기있는 아시아 특산품을 은을 주고 사간 것임. 영국도 중국에서 차(홍차)를 구입하는데 막대한 은이 소요되니,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해서 이를 중국에 팔아 은을 받고 그 은으로 차를 구입한 것임
1566
네덜란드
에스파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선언, 독립운동 시작>
*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1521 에스파냐 왕이 전 유럽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면서, 지배권이 에스파냐로 넘어갔음. 종교개혁이후 네덜란드는 개신교로 바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왕을 겸하고 있는 에스파냐 왕은 카톨릭으로서 개신교인 네덜란드를 종교적
으로 탄압하였고, 다른 나라와도 빈번하게 전쟁을 치르면서 전비 조달을 위해 네덜란드에 세금 착취를 함.
이에 저항하여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시작하자, 에스파냐를 견제하는 프랑스, 영국, 오스만 투르크 등이
네덜란드를 지원함
1609년 12년간의 휴전 기간 동안, 네덜란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건조 능력을 기반으로 식민지 개척에
힘을 쓰고, 1618~1648, 30년 전쟁에서 에스파냐를 꺾고 1648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은 후,
에스파냐가 가지고 있던 해상 무역 지배권을 쟁취해나감
1571
에스파냐, 교황청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
<레판토 해전>
* 1453, 콘스탄티노플 점령,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이 지중해 패권 장악 위해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를
공격하자, 베네치아가 이를 카톨릭대 이쓸람 전쟁으로 비화시키면서 로마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은
다시 에스파냐에 참전 요청하여 3국 연합함대 형성, 오스만 해군 대파. 이로써 유럽은 오스만으로부터 지중해
해상권을 지켜냄. 이때 활약한 에스파냐 대형 범선 6척이 후일 무적함대의 모태가 됨
1580
에스파냐
포르투갈
<에스파냐, 포르투갈 무력 합병>
* 포르투갈 왕가의 혈통이 끊기자 에스파냐가 혈연 내세워 왕위 상속권 주장하다가 무력합병해버림(=포르투갈이 이베리아 연합에 편입됨). 에스파냐는 1521, 모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상속받은데 이어, 포르투갈 합병으로 포르투갈의 모든 해외 식민지도 흡수함. 이로써 에스파냐는 17C 중반까지 전 세계에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최초의 근대적 국가가 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성기를 누리게 됨.
*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은 1580에 에스파냐에 합병되었기 때문임
1588
영국
에스파냐
<칼레 해전,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격파>
*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도자로서, 로마교황의 장녀처럼 교황을 챙겨주는 에스파냐 국왕(펠리페2세)은 신교(성공회) 국가인 영국을 카톨릭으로 복귀시키기 위하여 영국왕(엘리자베스1세 여왕)에게 청혼했으나, 영국여왕으로부터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을 들으며 거절당함. 에스파냐왕은 영국 신교도 제거 위해 무적함대 창설.
대규모 함대 구성하여 리스본 출발, 식민지인 네덜란드에서 육군 충원하여 영국으로 진격. 그러나 작은 규모의
영국 해군에게 패배.
* 무적함대 패배로, 국력 쇠퇴하며 숙적인 프랑스로부터 계속 도전받으면서, 유럽내 영토를 프랑스에 빼앗김.
유럽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함. 한편, 해상무역권도 영국에 넘겨주기 시작함
1600
영국
 
<세계 최초의 동인도회사 설립>
* 이전의 인도 향신료 무역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독점한 상태에서 이들은 체계적인 무역을 영위하였으나 영국은 약탈(해적) 수준에 머물렀음. 그러나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영국도 인도양의 향료
무역에 정식으로 나서게 됨. 그러나 영국의 해상무역은 발전을 이루지 못 하다가 17C 중반이 되면서 도약함
1600
네덜란드
 
표류 중 일본 도착
1602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설립. 1657에 최초 주식회사로 됨
1603
프랑스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 건설, 식민지 쟁탈전 돌입
* 누벨 프랑스 1712년 전성기 영역 : 동)뉴 펀들랜드 - 서)로키산맥, 남)멕시코만 - 북)허드슨만
* 1603 북미 뉴펀들랜드 정복 후, 기아나(1624), 아이티(1665), 인도 해안 일부(17C 후반) 로 식민지 확대
1607
영국
 
북미 버지니아에 영국 최초 식민지 수립
* 이후 보스턴, 뉴욕 등으로 식민지 확대. 영국 정부의 적극적 이주 정책으로 17C 말에는 북미 이주 영국인
숫자가 30만 명에 이름
1612
네덜란드
 
최초로 북미 진출
* 인디언에게 25만 달라를 지급하고 맨해턴 섬 구입. 남쪽 끝에 뉴암스테르담 건설.
1621(or 1625
네덜란드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에 서인도회사 설립
* 인디언 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뉴욕 남쪽에 담을 쌓았는데, 이 것이 wall street 지명의 유래가 됨
1627
네덜란드
 
<벨테브레(귀화명 : 박연> 조선 도착, 귀화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일본 나가사끼로 항해 중 표류하다가 조선에 도착
1630
네덜란드
에스파냐(폴투갈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의 영토 일부 탈취
* 이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말루크, 루안다, 실론 등을 세계 각지에서 차례로 빼앗음
1640
포르투갈
에스파냐
포르투갈 독립, 왕정 복구(그러나 약소국 신세)
1641
네덜란드
 
대일무역 독점권 획득(~1855)
* 일본에 진출한 포르투갈, 에스파냐 등이 교역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에도 적극적이어서, 일본에 기독교
신자 수가 늘어나고, 1637년에는 막부의 기독교 탄압과 지방영주(=다이묘)의 폭정에 반발하여 시마바라 에서
기독교도가 주동이 된 농민반란까지 발생하자, 일본 막부는 반란 진압 후, 나가사끼 앞바다를 메워 만든 인공섬
(이름=출도(데지마), 면적 4천평)만 교역 장소로 개방하고, 쇄국을 강화함. 이에 따라 포르투갈, 에스파냐, 영국과의 통상을 단절하고 선교활동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네덜란드에만 무역권을 부여함. 네덜란드는 데지마에
동인도회사를 설치하고 일본 막부가 요구하는 임차료와 세금을 내지만, 독점무역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림.
* 네덜란드의 한자 이름이 화란임. 이 때문에 네덜란드 학문을 난학이라고 함. 일본에 서양학문을 대표하는 난학 붐이 일면서 이 것이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됨(조총과 대포는 포르투갈 상인이 전해주고, 서양 기술과 세계에 대한 지식/정보는 네덜란드가 일본에 전해줌) (*화란 : 아래 비고란 참조)
1648
네덜란드
에스파냐
<30년 전쟁> (1566 네덜란드 독립전쟁 참조)
1651
네덜란드
 
<하멜>이 표류하다 제주도에 도착
* 하멜은 1666 조선 탈출, 1668 본국 귀환,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 저술하여 빅 히트 침
1651
영국
 
크롬웰이 항해조례 발표
* 내용 : 영국으로 수입되는 물품은 원산지 국적선이나 영국 국적선에 의해서만 도입될 수 있음. 이 것은 당시
세계 해운업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에 정면 도전을 선언한 것임. 이 것이 아래 <영란전쟁>의 도화선이 됨
* 한편, 그동안 육군에만 의존하던 프랑스도 이 무렵부터 해군력 강화를 시작함
* 영토나 인구가 적은 네덜란드를 경시하며 네덜란드의 영토를 뺏어가고 있는 영국과 새로 해양으로 진출하는
프랑스의 부상으로 네덜란드의 해양 지배권이 위축되기 시작함
1652~1784
영국
네덜란드
<영국 네덜란드 전쟁(=영란전쟁)> (4차례 전쟁)
* 영국은 16C 말 칼레 해전에서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에스파냐를 제압한데 이어, 17C 에 세계 해상무역을
지배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18~19C 에 에스파냐에 이어 두 번 째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구가함
* 2차 영란 전쟁 중 영국이 뉴암스테르담을 빼앗고 이름을 New York 으로 바꿈. 당시 정복자가 북부 잉글랜드의 York 출신이어서, 자신의 고향 이름을 따서 지명을 만듦
1671
영국
 
인도 무굴제국으로부터 독점무역권 확보
* 프랑스도 17C 후반에 인도 해안 지대를 일부 점령하면서 영국과 치열하게 인도 쟁탈전을 벌였으나, 1757년
인도 무굴제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플라시 전투에서 패하면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으로 들어가고
프랑스는 인도에서 물러남
17 ~ 18 세기
영국
 
150년간 340만 명의 흑인 노예 판매
* 작은 마을이었던 리버풀은 18C 에 대규모 노예 무역항으로 발전
*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국가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나간 흑인의 수는
1천 5백만 명이었으며, 이 중 20%는 해상 운송 중 죽고 살아서 육지에 도착한 흑인이 약 1천 2백만 명이었음
영국이 다른 나라에 팔아넘긴 흑인 수가 전체의 30% 에 이름
1702~1715
영국 & 유럽각국
프랑스, 에스파냐
<에스파냐 왕위 계승전쟁>
혈통이 끊긴 에스파냐 왕가(합스부르크 가)의 후계자로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왕족이 낙점되었으나,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것을 막으려고 신성로마제국+영국+네덜란드 동맹국이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공격.
프랑스의 패배로 프랑스 왕족이 아닌 합스부르크 가의 인물이 왕위 계승자로 교체되었는데 이 인물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앞두고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음. 이 인물이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모두를 통치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네덜란드는 입장을 뒤집어 프랑스 왕족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자가 되도록 함(향후
프랑스와 합병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이 결과, 에스파냐는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도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해양 지배권도
약화되고, 네덜란드를 독립시키고 이탈리아 영토는 여러 나라에 빼앗기는 등 유럽 대륙내에서의 강국의 지위도 상실함
반면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지브롤터 섬을 빼앗아 지중해와 대서양의 길목을 지키게 되었고, 해양 지배권도
강화되었으며 유럽 대륙내에서도 프랑스를 견제하는 힘을 보이며 세계 최강국의 기반을 다짐
1754~1760
1756~1763
영국
프랑스
<프렌치-인디언 전쟁>
<7년 전쟁> - 프랑스, 모든 식민지를 뺴앗김
* 북미대륙에서 영국은 뉴잉글랜드의 남쪽을, 프랑스는 북쪽을 차지하면서 충돌이 없었으나, 양국이 식민지를
확대하면서 오대호 남쪽 오하이오주의 지배권을 놓고 맞부딪히게 됨. 양국간의 전투에 프랑스는 원주민(인디언)을 동원함(프랑스와 인디언의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군에 인디언이 편성되어 영국과 싸운 것임). 초기에는 영국이 계속 패하였으나, 이 전쟁이 향후 북미 식민지 쟁탈에 미칠 중요성을 파악한 영국이 본국에서 최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냄. 전쟁은 1760에 끝났으나, 이 기간에 동시에 벌어진 7년 전쟁이 1763년에
끝나면서,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두 전쟁의 마무리가 함께 이루어짐
한편,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들이 없자 장녀(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할 때,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는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이를 반대하였으나,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나머지 독일
제후국들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고,영국이 이를 지원하여 양 세력간에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0~1748)이 벌어진 바 있음. 여기서 오스트리아가 패하여 슐레지엔 지역을 프로이센에 빼앗겼음.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하여 프랑스+러시아+프로이센 이외의 독일 제후국들과 동맹을 맺자, 프로
이센은 다시 영국과 결탁하여 전쟁(7년 전쟁)을 벌임. 그 결과 이번에도 프로이센이 승리함.
결과적으로, 위 3 개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모두 패하고, 1763, 아래와 같이 파리조약을 체결함.
* 프랑스는 퀘백 등 캐나다 영토와 미시시피강 동쪽의 미국 영토를 영국에 넘김. 미시시피 서쪽 땅은 에스파냐에
넘김. 북아프리카의 세네갈도 영국에 넘김. 인도에서도 철수함.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든 에스파냐는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김
이로써, 영국은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 패권을 확립함. 세계를 시장으로 두게 되어 영국의 산업혁명을 촉진함.
한편, 많은 전비 지출을 메꾸기 위해 식민지 미국에 많은 세금을 부담시켜, 미국의 독립전쟁을 유발함
1770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발견, 식민지 건설>
1775~1783
미국
영국
<미국 독립전쟁>
1803~1815
1805
1815
영국 & 유럽각국
프랑스(나폴레옹
<나폴레옹 전쟁>
<트라팔가 해전>
<워털루 전투>-영국이 세계 최강국 지위 확립
* 1789 프랑스대혁명으로 왕정 붕괴, 1793 프랑스 루이16세 처형 등 프랑스 사태를 지켜보며 다른 유럽의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이 자국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하며, 프랑스를 "역도들의 나라" "국왕을 처형한 놈들의
나라"라고 비난하며 1793, 모든 나라들이 프랑스 타도위한 동맹 결성. 그러나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제패. 대륙 밖에 있는 섬나라 영국 공격 준비하던 중,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27척)가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33척)를 에스파냐 남서쪽 끝 트라팔가에서 기습공격하여 5척 침몰, 17척 포획이라는 대승을 거둠.
이로써, 영국은 세계 제해권을 확립함.
영국은 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수도 런던에 트라팔가 광장을 만들고, 여기에 넬슨 제독 기념비를 세움
* 나폴레옹은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해 대륙봉쇄령 선포(유럽 국가들의 영국과의 통상 금지, 영국 선박의 대륙 출입 금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이에 동참하지 않고, 러시아도 자국의 이익 위해 영국과 무역 재개하자 1812,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그러나 참패하고, 1814,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연합군이 파리 점령하면서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섬에 유배됨. 1815,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재집권한 후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과 프로이센 군 연합군과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에서 전투. 그러나 나폴레옹이 대패하여 영국군에 의해
대서양의 섬으로 유배됨. 이로써 프랑스 혁명 이후 23년간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국가가 치른 전쟁이 종결됨.
대륙의 모든 나라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된 상태에서 홀로 버티며 승리를 거둔 영국은 비엔나 회의(1814~1815)
를 주도하며 전후 유럽의 신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고, 18C 후반부터 식민지 경쟁을 벌이던 프랑스를 좌초시키고
세계 최강 제국을 실현함
나폴레옹을 제압한 워털루 전투를 기념하여 영국 런던에 워털루 역(2007년까지 유로스타 기차의 시발역이었음)이 있으며,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연방 국가들에도 워털루라는 이름을 붙인 지명이 많음
1830
프랑스
 
아프리카 알제리를 식민지화
* 프렌치-인디언 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의 연이은 패배로 식민지를 영국에 모두 뺐겼던 프랑스는 영국과 부딪치지 않는 곳에서 다시 식민지를 만들기 시작. 알제리(1831) 점령,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풍토병 때문에 들어가지 않는 아프리카 내륙을 공략하기 시작.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태국을 완충 지대로 하여, 그 동쪽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 차지
1898
영국
프랑스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 프랑스는 대서양 연안의 프렌치 콩고 - 수단 - 이디오피아를 통해 홍해로 연결되는 아프리카 횡단 정책 실현을
위해 수단으로 동진 중. 한편 영국은 1876 경 수립된 3C (케이프타운 - 카이로 - 캘커타) 정책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횡단 추진하면서 이집트 - 수단 철도 부설 위해 남하 중. 양국이 수단 남부 파쇼 지역에서 대치하게 됨.
프랑스는 전쟁 대신 협상을 통해 영국에 이집트를 양보하고 횡단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아프리카 서해안의 지배를 인정받음. 그리고 양국이 협력하여 독일의 아프리카 진출에 대응하기로 함.
1898 미국 에스퍄냐 미국-스페인 전쟁
* 스페인이 식민지인 쿠바에 가한 압정과 설탕 수출에 대한 착취에 저항하여 1895, 쿠바 독립전쟁 발발. 쿠바내 자국민 보호 및 설탕 플란테이션 투자 보호 명분으로 1898,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하고 쿠바 지원. 쿠바 -
푸에로토리코 점령, 이로써 콜럼부스의 바하마 상륙 후 406년 만에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축출됨. 미국은
아시아 전진 기지로 탐내고 있던 필리핀까지 진격하여 필리핀 점령 - 괌도 점령. 에스파냐의 항복으로 1899,
파리강화조약 체결. 이 결과, 에스파냐는 무력한 3류 국가로 전락. 미국은 카리브해 패권 차지하고 필리핀 확보로 서태평양과 대서양에 걸친 제국으로 발전
* 이후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의 원활한 연결 위해 파나마에 운하 건설
* 전략 요충인 필리핀 방어 위해, 일본의 조선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인정하는 카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일본이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환경 제공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뺏고 뺏기며 수탈했던 아프리카, 아사아,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이후 민족주의, 민주주의 조류에 따라 전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거나, 유럽 국가들이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패망하여 해방을 맞이하게 됨.

* 네덜란드의 별칭 홀란드(Holland, 네덜란드어 발음 홀란트. 한자 화란)의 유래

1566 에스파냐에 독립선언 후, 1568 ~ 1648, 80 년간 독립전쟁이 어어졌는데, 독립전쟁에는 네덜란드 전체 17개 주 중 북부(저지대)의 7개 주만 참가하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방의 주들은 참가하지 않았음.

북부의 7 개 주중 독립전쟁의 리더 격이 홀란드 주 였음. 홀란드에는 현대 네덜란드의 3대 도시인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 네덜란드 독립국가 탄생에 주역이었던 홀란드 주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주로 인식되어 네덜란드를 홀란드로 부르기도 한 것임. 

한편 네덜란드의 상징색이 오렌지 색인데 그 것은 홀란드 총독으로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이끌어 네덜란드의 국부로 불리는 빌렘1세(영어=빌헬름)가 오렌지공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빌렘1세를 기려 오렌지 색을 나라의 상징색으로 하게 된 것임.

참고로, 르네 공작이라는 오렌지(네덜란드어=오라녜)가문의 사촌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빌렘에게 오렌지가문의 공작 작위를 유언으로 물려주었으며, 나사우 가문이었던 빌렘은 사촌의 가문을 물려받으면서 나사우 + 오렌지 가문의 시조가 되었음. 그래서 빌렘1세는 오라녜공 빌렘1세(영어로 오렌지공 윌리엄)이라고 불림 

 

 

막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가 왼손에 깃발을 오른손에 검을 든 채 신대륙을 ‘접수’하고 있다. 스페인 왕실의 후원으로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함에 따라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된다.

 

 

 

 

신대륙 식민지 경영… 英은 성공하고 스페인은 실패했다?
역사학자 엘리엇 교수 근대 남북 아메리카 비교
미국은 성공, 남미는 실패? 이분법 프레임 벗어나
스페인령 아메리카 영국서 부러워하기도


대서양의 두 제국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와 '히스패닉 세계'의 저자인 존 H 엘리엇(87)의 또 다른 역작 '대서양의 두 제국: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1492~1830'이 번역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독립했는데 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오늘은 이토록 다른가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아온 터라 대단히 반갑다. 너무나 긴 설명을 요하는 질문인 것도 문제고, 이미 두 지역을 각각 성공과 실패의 사례로 확고하게 규정하고 던지는 질문인지라 답을 하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타자 이해 수준만 탓할 일은 아니다. 막스 베버 같은 석학도 매일반이다. 그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산업화에서 북유럽의 성공과 남유럽의 실패를 기정사실로 못박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꿰맞춘' 책일 뿐이다. 이 시각이 영국이 지배한 미국과 스페인이 지배한 라틴아메리카의 성공과 실패라는 결정론적 시각으로 변환되고 고착화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가령, 칠레 역사학자 클라우디오 벨리스의 '고딕 여우의 신세계'(1994)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의 '실패'를 서구의 착취 내지 사다리 걷어차기 탓으로 여기는 종속이론 유의 거센 반격도 있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힌 면이 없지 않았다. 

저자 엘리엇은 영 케임브리지대와 미 프린스턴대의 서양 근대사 교수를 지낸 원로 역사학자. 그에 따르면 이 이분법의 기원은 뿌리가 더 깊다. 가령, 1770년대 초에 프랑스계 미국인 크레브쾨르는 지배 국가의 차이가 영국령 아메리카와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운명을 갈랐다는 주장을 펼쳤다. 비서구 지역에 후진성, 미신, 나태의 원죄를 뒤집어씌운 계몽주의와 같은 시각이다. 나아가 16세기 북유럽 국가들이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스페인 비난용으로 정립한 소위 '흑색전설'(에스파냐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 주민의 고통과 희생)의 재생산이기도 하다. 

엘리엇은 이런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양 지역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편견 없이 점검할 것을 주장한다. 식민 본국의 제도와 문화, 식민지의 생존 조건, 식민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 식민 본국 간의 상호 학습 혹은 갈등, 시대에 따른 변화 등이 그가 고려한 요인들이다. 그 결과 독자 입장에서는 뜻밖의 역사적 사실들과 만나게 된다. 스페인보다 1세기 후에 식민 체제 정비에 나선 영국인들이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정교한 관료 체제를 부러워했다거나 비용 대비 수익 분석 결과 영국의 미국 지배는 사실상 실패라는 애덤 스미스의 고백 등이다. 엘리엇에 따르면 영국인이 본질적으로 뛰어나고 스페인인이 무능해서 오늘의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다.  

엘리엇은 두 지역의 운명을 역사의 새옹지마로 설명한다. 가령, 라틴아메리카의 막대한 은과 풍부한 선주민 노동력이 주는 매력 때문에 스페인인들은 초기부터 통치 체제 구축에 열을 올렸고, 그 덕분에 식민 본국과 식민지 모두 영국과 영국령 아메리카보다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손쉬운 이윤 창출, 헐값 노동력, 창의성의 걸림돌이 된 관료주의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반면 초기의 미국은 은과 같은 경제적 유인 요건이 별로 없어 영국은 식민지 경영에 무관심했고, 이에 따라 식민지 개척은 난개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식민 정주자들은 복속되지 않은 인디언들 때문에 지속적으로 생존 위협을 느꼈다. 엘리엇은 식민 정주자들의 이 각자도생의 상황이 장기적으로 독립성, 진취성, 자아실현 의지, 혁신이라는 미국인들의 미덕을 낳았다고 본다. 

스페인 전공자인 엘리엇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비교 연구로 영역을 넓혔다는 점 자체가 참신한 일이다. 세계화 시대의 과제인 타자의 역사적 경험을 포용하는 세계사 서술을 늦은 나이에도 회피하지 않았던 학문적 열정에도 머리가 수그러진다. 우승열패의 단순한 역사관 대신 교환, 복합 글로컬(glocal) 네트워크, 상호 문화성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하자니 그 결과물도 방대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매끄럽고 끈기 있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내게 된다. 덕분에 우리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나 진취성과 자아실현을 골자로 한 미국인들의 자화자찬인 프런티어론을 탈신화시키는 좋은 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원제 'Empires of the Atlantic World: Britain and Spain in America 1492-1830'.







식민주의


지배국
이득
17세기까지의 거점형 식민지와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제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남아메리카 진출의 가장 중요한 이점은 바로 그곳만의 특별한 자원을 지닌 해당 식민지와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근세 이후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를 건설한 것 역시 처음에는 동양과 향신료를 무역하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원주민들에 대한 약탈의 목적도 있었다. 

노예무역 역시 식민지 경영의 원인이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로 인해 유럽의 열강들은 헐값으로 대량의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당시 노예무역은 큰 이득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이 시절 아프리카에서 끌려간 노예가 최소 수천만 명에서 최대 억대일 수도 있다고 한다. 

다만 아메리카 노예들은 역병에 시달린 데다가 지구력도 아프리카 노예들에 비해 떨어져 금방 대체되었고, 아프리카 노예들은 쓸 만했으나 이들을 거래하는 형태는 식민지로 정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교역하거나 그들을 납치하는 등의 형태였다. 심지어 19세기까지도 유럽인들 외에 아랍인들도 노예무역의 주된 수요층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아프리카가 식민지 정복에 시달리는 19세기에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은 노예제를 금지했다.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주민들은 현지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대량으로 구입했으며, 기타 노예가 필요한 국가들과 교역했다. 

식민지 현지에서 유럽에서 인기 있는 작물들을 대량으로 경작하기도 했는데 커피나 설탕, 각종 향신료 등이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 품종이었으며, 이러한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이런 품목들이 해당 국가의 유명한 수출 품목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인도 제국의 사탕수수를 들 수 있는데, 당시 영국은 한해 설탕 소비량이 무려 7만톤에 달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대량의 사탕수수를 재배하였고, 대중국 무역에서 차수입으로 적자를 보자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의 밀수출과 아삼 지역의 차 재배로 이를 대체하였다. 또한 현지민들을 농노로 부려먹거나 금광을 채취하게 강요하기도 했으며, 식량 자원을 수탈하기도 하는 등 그 유형도 다양했다. 

이렇게 열강이 식민지에서 얻은 이득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실제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경우는 동양과의 향신료 무역과 아메리카에서 나는 풍부한 자원으로 순식간에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적어도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식민지에서 얻는 이득이 그렇게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19세기 중반부터 먹어치운 식민지, 특히 아프리카 식민지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국가 위신을 높이고 자국의 하층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그리고 밑의 부작용 단락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단적으로 말해 식민지의 경제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식민지보다는 다른 선진국과 교역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이익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는 4공화국 당시 식민지와의 무역 비중은 전체 교역 비중 중 5위에 불과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서방권과의 교역이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식민지의 경제 사정은 본토의 물건을 사줄 만큼 좋지 못해서 시장으로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본국 물건을 대량으로 소비할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약간 다른 예시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사유지인 콩고 자유국에서 사실상 자신의 노예나 다름없는 콩고의 원주민들에게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절단하는 형벌을 가하여 최소 1,000만에서 최대 3,000만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결과, 1893년엔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자유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엔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하여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산을 크게 불린 것은 물론, 벨기에에 크고 아름다운 수많은 공공건물들을 건설하기까지 했다. 다만 콩고 자유국은 금을 비롯한 광물자원과 고무와 열대작물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자원이 풍족한 땅이었다. 콩고 자유국은 19세기 제국주의 열풍으로 개척한 식민지라기 보다는 17세기의 경제적 이득을 노린 거점형 식민지에 가깝다. 

식민지의 경영은 경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가령 영국은 인도와 본토를 연결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인수하고, 아프리카를 종단으로 개척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조선을 대륙 침략의 기지로 활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식민지 개척을 통한 국수주의적 열망 충족은 산업혁명 시절에 만연한 각종 정경유착 및 기업비리 및 노동착취, 산업재해, 빈약한 사회복지제도와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극심한 양극화 등 각종 사회문제로부터 하층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좋은 소재였다. 또한 종교적 열망, 국가적 위신, 군인 등의 일자리 보전 등이 동인으로 꼽힌다. 

식민지 지배가 경제적으로 생각보다 이득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가 많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국가경제 전체로 볼때나 그런것이고 정치가들이나 식민지에 자본금을 투자한 식민지에 거점을 둔 관료들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구체적으로 따져 본다면 고대, 중세의 식민지 개척은 인구 분산이나 거점 확보적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 이래 19세기 초까지는 시대가 지날수록 원료 독점과 같은 경제적 목적이 상대적으로 더 강했다. 마지막 19세기 말 이후에 들어서는 애국심 고취, 사회갈등 해소, 군사적 필요 등과 같은 비경제적 목적이 강했다.

그나마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식민지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벨칼레도니는 세계 니켈 매장량의 약 20%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니켈 채굴로 인한 막대한 수입이 프랑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프랑스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약 40%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프랑스는 이 식민지 덕택에 세계 제1위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이나 영국은 프랑스처럼 떨어진 곳에 섬 영토가 있는데 영국도 프랑스와 비슷하다. 미국은 전세계에 미군을 깔아둬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태평양과 카리브 일대에 상당수의 식민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식민지들이 거점으로써의 이득을 보는 편이다. 이를테면 괌이나 북마리아나 제도, 푸에르토리코라든가, 아예 50번째 주가 된 하와이라든가. 이쪽은 아예 태평양 함대의 최중요 거점이기도 하고. 이들은 워낙에 인구 규모가 적어 통제에 필요한 국력이 크지 않으며 그런 반면 지정학적/자원상의 이득은 크기 때문에 이득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식민지가 다 군소 제도인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부작용

 

일반적인 교역이 낫다
식민지는 분명 초중반에는 식민지를 경영하는 국가들에게 물질적ㆍ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런 주장에는 반론이 있다. 사실 영국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으로 본토의 경제력이 늘어났고, 식민지 자체는 엘리자베스 1세 시절부터 아메리카 쪽에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질이 좋지는 않았다. 인도나 아시아, 아프리카 쪽은 산업혁명 이후부터 제대로 먹기 시작했고, 그나마도 막대한 인력과 시장을 제공해서 유지하던 인도를 제외하곤 돈이 별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인도의 시장이라는 것은 영국이 굳이 인도를 정복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그나마 확실히 도움됐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인도의 인력밖에 없다. 아니, 그 인도조차도 1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1차대전에 투입한 것이나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저항에서 보듯이 억지로 지배하면서 이익까지 보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 나오고 있었고, 2차대전 이후 영국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식민지들을 유지할 수가 없어 자발적으로 독립을 시킬수밖에 없게 된다.

사실 이미 세계 각국의 동인도 회사는 미국이 독립했을 때인 1776년부터 서서히 맛이 가기 시작하였고, 이익은커녕 손해가 커서 19세기엔 거의 사라지기에 이른다. 또한 스페인의 경제 성장은 네덜란드의 덕을 본 것도 있다. 네덜란드 역시 인도네시아를 먹으면서 향료 무역을 독점한데다 고무가 대량으로 나오면서 본국의 경제력에 큰 보탬이 되긴 했지만 얘네 역시 이전부터 경제력이 높긴 했다. 포르투갈 역시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대항해시대의 포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의 국력이 너무 약해 결국 스페인에 합병되었고, 독립한 뒤에도 스페인-프랑스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의 2중대가 되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 등에서 들 수 있듯이 식민국이 피식민국을 병합하기 이전에는 보통 양자간 교류가 없거나 미미한 경우가 많았다. 어쨌건 이런 접촉을 통해 식민국과 피식민국간 상품 등의 교류가 이뤄지므로, 식민지 개척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 이건 득을 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양자가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인 상태에서 무역을 하는 것과, 식민지 무역에서 발생하는 통제 비용 등을 고려하면 전자가 후자보다 낫다. 그나마 후자가 더 나은 점이라면 식민국이 피식민국의 정책을 통제할 여지나 교류의 안정성 정도를 들 수 있다.

전자의 예시로 미국을 들곤 하는데, 미국은 식민지가 손해를 가져다줄까봐 그런 건 아니고, 남북 전쟁을 수습하고 뒤늦게 식민지 쟁탈 경쟁에 뛰어들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미국의 영토 자체가 굉장히 넒으며 특히 서부를 중심으로 미개발지가 많아 이 쪽을 개발하는데 온 신경을 썼기 때문에 직접 식민지화를 하는 것을 가급적 피해서 그런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필리핀 정도를 들 수 있다. 나머지는 섬 지역이라 독립 운동을 할 역량이 거의 없기도 하고. 아무튼 이는 미국이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주의로 인해 기존의 식민제국들이 해체되고 독립한 신생 국가들에게 한동안 '미국은 사악한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과는 다른 인도적인 국가.' 라는 좋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일단 19세기 이전의 거점 식민지 형식과 달리 19세기 이후의 땅따먹기식 식민지 경영은 본국의 병력 + 관료 + 유지 관리 비용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이런 문제로 향료 무역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유지 비용이 너무 많아서 적자, 부정부패 등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해체된다.

네덜란드는 아시아 국가간의 무역이 쇠퇴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고, 여기에 분식회계 문제, 영국 및 아메리카와의 경쟁 문제 등이 겹치면서 영란전쟁 이후로는 세가 축소되었으며, 영국은 국방비를 충당하기 위해 미국에 무리하게 세금을 매기려다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미국의 독립을 허용하고 말았다. 거기에 식민지 지역 중 상당수가 본국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영 환경이 좋지 않거나 본국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서, 지배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본국민들을 투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인구 유출
그나마 19세기 유럽은 프랑스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출산율이 매우 높아서 인구 유출이 심각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20세기에 이르면서 그 출산율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식민지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인구 유출이 가속되다 보면 오히려 본국의 활력이 떨어지는 아이러니가 생기기도 한다.

과거의 헬레니즘 제국이 이런 사례이며,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인구 팽창이 정지하자 로마와 파르티아에게 다 같이 몰락하고 말았다.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이 시기의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국가 막장 테크를 밟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는데 본국의 인력, 그것도 국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엘리트 청년층이 구 식민지로 대량 유출되고 있기 때문. 거기에 식민지의 인력, 자원을 써먹기 위해 인프라부터 재투자를 하느라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상황이 생겨났고, 식민지인들의 경제력이 좋을 리도 없으니 식민지인들이 식민제국의 물건을 사서 손해를 메꿀 리도 없다. 

 

 

국내산업 경쟁력 둔화
또한 식민지 경영에 지나치게 힘을 쏟다보니 자연히 국내 산업에 대한 투자가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본국의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단점이 발생하였다. 독일이 영국, 프랑스 등 기존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2번의 세계대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식민지 경영을 하는 대신 국내 산업의 육성에 힘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몰락한 것도 지나치게 해외 식민지에만 집착하다 보니 자연히 본국의 국가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영국의 공업 중에서도 식민지 수출로 먹고 살던 방직공업은 1920년대 이후로는 몰락했다. 그리고 영국은 이 식민지 제국의 부작용인 영국병을 1990년대까지 끌고 가야 했다. 

스페인은 본디 목축 위주의 산업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양모를 팔아서 돈을 벌고 그걸로 강대한 스페인군을 유지하는 구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신대륙 개척 이후로는 신대륙산 금은으로 바뀌어 덕분에 스페인은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대륙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금, 은으로 인한 발생한 인플레로 오히려 타 산업이 붕괴되어 경제 구조를 취약화시켰단 거다. 결국 그 군대가 칼레 해전과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다 갈러나갔다. 포르투갈의 경우 분명 인도 무역 자체는 짭짤했지만, 결국에는 무역이 낫냐 식민지 정복이 낫냐의 문제. 더 심각한 것은 인도 무역은 이문도 짭잘했지만, 리스크도 그만큼 큰 산업이라 선원이나 선박 손실이 심각했단 거다. 특히 숙련된 선원은 쉽게 양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손해는 극심. 

19세기 식민제국의 대표주자인 영국과 프랑스도 지나치게 식민지 경영에만 힘을 쏟다보니 세계 대전이 발생할 즈음에 가면 결국 기술과 산업에서 미국과 독일에게 완전히 추월당하게 된다. 이후 식민지들이 독립하고 자국 경제성장에 전념하면서 오히려 독일을 따라잡았을 정도. 그나마도 1870년대 이후에 먹은 식민지들에게선 이득 본 것도 없이 순전히 자존심 싸움만 했다. 영국의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회사는 주주들에게 투자 배당금도 주지 못해서 쩔쩔 맸고 아프리카 투자 기피 현상까지 벌어졌다.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하부 구조 자체가 없으니 뭐 돈이 벌릴 구석이 있나. 오히려 네덜란드나 영국, 프랑스 등에서 드러나는 점은 식민지들을 다 독립시키니까 경제성장률이 더 크게 상승했단 거다. 특히 영국, 프랑스에서 중산층들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진 시기도 식민지를 독립시킨 뒤였다. 

 

식민지인의 저항
외국에 정복당한 피지배민들이 본국에 협력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졌다. 점령 초반에는 어떨지 몰라도 결국 열강과의 충돌로 인하여 식민지의 정치적 각성이라는 결과는 좋든 싫든, 빠르던 느리던 결국 따라왔고, 결국 식민지들은 지배국에 맞서서 들고 일어나게 되니까, 원래도 돈 안 되는 식민지는 오히려 돈을 쓰는 곳이 되었다. 

다만 모두가 협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가 된 곳 중 한국처럼 통일된 정치 체계가 성립된 곳은 흔치 않고, 서로 동족의식도 없고 오히려 적대감정이 넘치는 부족, 세력, 번국들이 넘쳐나는 곳이 대다수였다. 19~20세기 초반에 조선처럼 통일되었던 지역들은 적었고, 대부분 지역별로 별개의 국가 정도의 차이가 나는 데가 훨씬 많았다. 때문에 열강들은 이런 부족 간 갈등을 이용하는 식으로 협력자를 얻었고, 식민지배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식민지 엘리트들이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협조하게 된다. 어쨌거나 외부 세력이 와서 좌지우지하는 만큼, 이전 체제에 비해서 저항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영국은 미련없이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줬다. 그 예로, 영국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말레이시아 등의 국가가 독립할 때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냐 등 일부 국가에선 유혈사태가 일어나긴 하였다.) 사실 윈스턴 처칠을 포함한 영국도 식민지들을 독립시켜줄 생각이 없었으나, 이미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국력을 심하게 소모하여 식민지들의 독립을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국과 똑같이 전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가 없는 힘 다 쥐어짜서 식민지 이탈을 막으려 한 것에 비하면 현명한 행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옛 영령 식민지들의 독립을 순순히 용인해준 영국은 그나마 앙숙 프랑스에 비하면 평가가 좋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수십만 젊은이들의 피를 뿌리며 국력을 심각하게 소모하게 되어, 나중에는 식민지들을 잡아둘 힘이 없어져 차례로 독립하게 된다. 물론 베트남은 프랑스인들의 농장이 꽉 들어차 있었고, 알제리는 석유, 천연가스 등 자원도 풍부한데다 공식적으로는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확장 개념이라 해외영토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긴 했다. 네덜란드도 이 전철을 밟았다. 

특히 이 분야의 끝판왕은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대륙의 해외 식민지에 집착하다가 나라가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버렸다.  

 

 

독립 이후
독립이 된 이후에도 식민지는 과거 종주국에게 이득이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종주국의 언어, 종교 및 문화 영향력 확대이다. 과거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독립한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와 모잠비크, 앙골라 등을 정복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처럼 대부분 그 종주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쓰는 일이 많다. 거기다 식민지 시대에 쌓인 학맥과 인맥으로 구 식민지 국가의 지배층과 지식인은 구 식민지배국의 대학에서 학문을 수입하거나 유학하여 구 식민지배국의 문화 지배가 계속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종주국들은 인재난이 심한 분야인 건설업과 제조업 등에 언어가 통하는 과거 식민지였던 개도국의 인력들을 충당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경제난을 극복하고 또한 경제를 성장시킨 나라들이 대표적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이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브라질처럼 식민지 종주국이 개판이 되고 반대로 식민지였던 나라가 잘 나가면 본국이 오히려 구 식민지 국가들에게 인재를 제공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현재 포르투갈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이 자국 청년층 및 엘리트들이 한창 자원 개발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앙골라, 모잠비크, 브라질 등 과거의 '식민지'로 이주하고, 젊은층의 부재로 사회가 활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식민지는 어떤 지역을 차지했느냐에 따라 (경제적) 순이익 측면에서 강대국에 이득이 될 수도 있었고, 손실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의 주요 자원, 향신료, 기호품 생산지가 주요 식민 지역이 되었고, 열강은 이러한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재미를 보았다. 다만 여기에는 식민지 경영에 따른 이득 외에도 기존에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경제권의 연결에 따른 이득도 포함되어 계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식민지 획득 과정에서 경제보다는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사업, 영국의 종단 정책, 일본의 한국 병합, 스페인의 모로코 병합, 이탈리아의 리비아, 에티오피아 병합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식민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나마 일본의 한반도와 대만 병합의 경우는 중국 및 동남아시아 침략의 전진 군사 기지로 기능했고, 리비아 역시 2차 세계대전 당시 본토의 방패 노릇을 하기라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과 같은 정치사회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서도 황금시대이고 천국이자 파라다이스라며 그 시절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유럽과 일본의 경우 경제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타나며 인종차별로 이어지는 일들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억 보정일 뿐이다. 유럽, 일본의 진짜 '황금기'는 해당 국가들의 극우(대안우파 포함)들의 인식과 달리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식민지를 놔주고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져 중산층이 두터워진 1950~1980년대라 볼 수 있다. 영광의 30년, 라인강의 기적,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이런 착각을 하는 이들은 대개 사회의 하류층으로, 피지배층인 식민지 주민들을 내려다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식민지에 관련해서는 홉슨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유명하다. 홉슨은 보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레닌은 공산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했다. 홉슨의 경우 식민지는 경제적 목적이 강하기 때문에 개척된다고는 하지만 정말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는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식민지는 그 국가의 경제에 정말로 이바지한다기보다는 이익 집단들의 열망과 한 몫 잡고 싶은 열망에 따라 나온 바가 크다. 또 홉슨은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가 피할 수 있는 비극"이라고 봤다. 반면 레닌은 이를 부정했다. 

 

 

 

피지배국


노예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노예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드리운 그림자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다. 
- 소설 비명을 찾아서 중
우리는 풍요로운 예속보다 빈곤한 자유를 원한다!(Nous préférons la Pauvreté dans la Liberté à la richesse dans l'esclavage!)
- 아메드 세쿠 투레, 기니의 독립운동가, 초대 기니 대통령. 

식민 지배를 당한 나라는 독립하더라도 자주적인 국가 운영이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역자들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식민지 시절 차별받는 동포/피지배민들을 뒤로 한 채 외세 지배자들에게 빌붙으며 얻어낸 콩고물로 거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한 부역자들이 독립 후에도 꺼삐딴 리마냥 여전히 부와 권력을 쥐어잡고 있다. 이들은 식민지가 독립하고서도 부와 권력을 변함없이 쥐고 있어[ 사회 발전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필리핀.

문제는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국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은 대부분 식민제국에 협력적인 인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행정 관료나 법조인들, 군대나 경찰의 상급 지휘관을 실무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민지 국가에서 실무 경험이 있는 인재는 그 수도 적을 뿐더러, 이들조차 대다수가 식민지 시절 관료나 법조인, 경찰, 그리고 식민 제국 군대의 장교들이었을테니까 식민 제국에 크건 작건 협력할 수밖에 없던 인물이 대부분일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실적 문제 때문에 식민지 시절 부역자들이 해방 후에도 등용되며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부역자들이 식민지 시절 쌓은 국가 유지 경험과 재력을 바탕으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고 그 후손들도 가문 환경과 이를 기반으로 한 좋은 교육환경 속에서 대대로 호의호식하는 반면 독립 후 운이 좋거나 기득권층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대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며 대대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바라봐야 하는 독립국의 일반인들은 이러한 부조리한 모습에 불만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필연적으로 사회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상 부/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덤으로 한국을 제외하면 식민지, 점령지 시절 자국인 부역자들을 공론화하는 경우는 드물며, 이들의 후손들까지 공론화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한국에서는 미진한 친일파 청산을 아쉬워하며 나치 잔재를 청산하는 데 성공적이었던 프랑스를 모범적인 과거사 청산 사례로 평가하고 있는데, 사실 이 둘은 애초에 부역자 청산 당시 처한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일대일 비교는 불가능하다. 일단 프랑스는 해방 후의 이념갈등의 유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원래 전쟁 전에 제대로 된 인프라 하나 없는 최빈국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영제국 버금갈 정도의 열강이었던 만큼 공무원이나 법조인, 경찰, 군인, 언론인, 지식인 같은 인적 인프라가 풍부해 나치 부역자들을 모조리 처벌해도 인력 공백은커녕 이를 대체할 인력이 넘치고돌았던 데다가 나치 점령 기간도 민주주의 국가의 정권 교체 기간에 불과한 4년 정도에 불과했으니 부역자 식별, 색출이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했다. 비드쿤 크비슬링 내각 청산에 성공한 노르웨이 역시 과거에도 금속 제련업, 조선업 등 중공업이 발달했던 나라라 독립 직후의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건실한 나라였고, 경제적으로 건실했던 만큼 나라에 인적 인프라 역시 충분했으니 부역자를 엄격하게 처벌해도 국가 운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반면 한국은 식민 지배를 받은 기간이 한 세대에 육박하는 35년이고, 심지어 그조차 식민지 국가 중에서는 짧은 편이었으니 식민지였던 기간이 수십~수백년인 국가들이 갓 독립해서 부역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후술하듯 아예 식민지배국 출신 인사까지 등용하며 국가 운영을 해야 했다. 더구나 한국은 추축국의 식민지었기에 2차 대전 후 일본인 고위층들이 모조리 쫓겨나고 일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독립 후 오랜 기간 동안 부역자들이 여전히 기득권을 잡고 있었고, 훗날 사회도 안정되고 잘 사는 나라가 된 후에야 뒤늦게나마 식민지 시절 잔재 청산을 시작했는데도 현재까지도 식민지 시절 잔재를 온전히 청산하지 못한 마당이니, 연합국의 식민지 출신이었다가 독립 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가난하고 차라리 식민지 시절이 낫다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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