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영화 산업. 영국 식민지 시절인 20세기 초부터 태동하여, 19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장르는 무협, 쿵후, 도박물, 홍콩 느와르 등의 액션·스릴러, 로맨스, 강시 시리즈부터 살인마가 등장하는 공포물 등 폭이 넓은 장르를 다루었다.
전근대에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근대 이후 무역 거점으로 떠오르고 국제적인 금융 도시가 된 홍콩답게 중화권을 베이스로 광동 지역 문화와 영국 문화, 미국 할리우드까지 뒤섞인 국제 도시에서 만들어진 홍콩 영화는 다양한 문화적 색깔이 뒤섞여 있었다. 과거에는 중화권(중국 본토 제외)을 넘어 서구권의 영화인 중에도 홍콩 영화에 푹 빠진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홍콩 영화가 인기 있던 시절에 감명깊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영화계에 입문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에는 홍콩 영화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홍콩 영화 장르
1. 신이 내린 무술 실력, 액션 영화
호금전 감독, 장철 감독 등의 전통 무협 영화와 이소룡, 이연걸, 견자단 등을 주연으로 한 쿵후 영화. 이 장르는 다른 나라에서는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장르다. 무술가 겸 배우인 스티븐 시걸이나 척 노리스를 앞세운 할리우드식 무술영화가 있긴 하지만, 홍콩 영화의 포스를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이동준은 클레멘타인으로 신기원을 썼다.
2. 멜로와 로맨스 드라마
《첨밀밀》, 《중경삼림》, 《유리의 성》 등. 홍콩 멜로 영화의 대표적인 스타로는 임청하, 장만옥, 종초홍 등이 있다. 90년대 말부터는 곽부성과 진혜림, 금성무가 두각을 나타냈다.
3. 서민적인 일상과 막가파 개그. 코미디 영화
70년대 허관문, 허관영, 허관걸로 이루어진 허씨 3형제가 주축이 되어 촬영한 여러 개그영화를 시작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최가박당 시리즈' 등이 유행하다가 90년대 들어서 주성치 주연의 영화로 부활한 장르이다. 이 장르는 현재 대륙영화에 그대로 계승되어 흥행하고 있다.
4.미스터리한 중국 전설의 공포. 강시 공포물 및 환타지
《귀타귀》, 《강시선생》 등 강시가 등장하는 코믹 공포물. 당시 아이들 사이에선 부적과 강시놀이가 유행하기도 했다. 서유기나 그밖의 중국식 고전 환타지도 비슷한 종류. 대륙에서 몽키킹 시리즈로 이어가고 있다.
5. 모든 액션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코믹 쿵후
이소룡 사후 침체되어 있던 홍콩 액션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홍콩 느와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홍콩 영화하면 가장 떠오르는 장르였다. 이 분야의 대가로는 홍금보, 성룡, 원표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취권》, 《오복성》, 《프로젝트 A》, 《용형호제》 등이 있다. 이 분야도 성룡과 홍금보가 나이를 먹은 이후 더 이상 나오기가 힘들어졌다.
6. 액션은 성인 남자만 하는 건 아니다.
《예스 마담》 등의 여성 액션물. '호소자' 등의 어린이 액션물. 이 분야에서 유명한 배우들로는 말레이시아 출신 양자경과 대만배우 양려청(양리칭), '나부락'으로 음차된 신시아 로스록, 엽천문, 그리고 유가령, 호혜중이 있다.
7. 바바리에 성냥, 그리고 쌍권총. 홍콩 느와르
대표작으로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이 있다. 사실상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콩 영화 붐이 일게 된 계기를 연 장르로 주윤발,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 등 많은 홍콩 스타를 배출해냈다. 사실 도검이 총으로 바뀌었을 뿐 화려한 액션, 권선징악, 의리 등 구조가 무협 영화와 흡사하다. 일종의 현대판 무협 장르. 2000년대부터는 무간도 트릴로지와 《콜드 워》, 《흑사회》 등등 '네오 홍콩 느와르'가 인기를 끌고 있다.
8. 인생은 도박이다, 도박물
이 장르의 영화는 1974년에 허씨 형제가 출연한 《[귀마쌍성》을 효시로 볼 수 있겠다. 그 이후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1990년대 초반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기 직전까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국으로 귀속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표적인 영화로 《정전자》, 《도성》, 《도협》, 《지존무상》, 《지존계상》, 《지존무상 2 - 영패천하》 등이 있다. 이러한 장르의 영화에서는 유덕화와 주윤발이 자주 나왔다.
9.고전 무협 시대극과 sf, 코믹, 판타지, 멜로가 절묘하게 결합한 홍콩 영화의 마지막 불꽃, 퓨전 영화
《천녀유혼》, 《공작왕》, 《동방불패》, 《동사서독》, 《서유기》 등. 주로 남자 스타들이 많이 부각되던 홍콩 영화에서 왕조현, 이가흔 등의 여자 스타들을 배출한 장르이다.
10. 범죄와 공포, 에로가 혼합된 퓨전 공포 영화
1992년 구예도 감독의 《팔선반점의 인육만두》가 대박을 친 이후, 비슷한 유형의 공포 영화들이 홍콩에서 유행했다. 범죄물과 공포물, 에로물을 조금씩 섞어 놓은 듯한 내용이 특징. 주로 살인마나 살인마가 될(?) 선량한 사람, 경찰 또는 형사가 주인공이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며, 폭력적인 살인 장면을 등장시켜 긴장감과 공포감을 유발한다. 뭔가 개연성 없이 등장하는 수위 높은 에로 장면은 덤. 실제 살인사건을 재구성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고, 이따금씩 사회 비판적이거나 블랙 코미디, 풍자적인 내용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는 황추생이 주연으로 많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영화로 《어둠의 딸》(滅門慘案之孼殺)', 《고양의생》(羔羊醫生) 《팽부》(烹夫) 등이 있다.
11. 1990년대 홍콩 반환 이후 새로 등장한 장르인 홍콩식 호러와 재난물
1995년 반환 2년 전 만든 《십만화급》(十萬火急)의 경우 홍콩식 재난물의 시초로 홍콩 판 분노의 역류이다. 구룡반도 신구룡에 소재한 소방서 대원들의 고군분투를 그렸으며, 영국 식민지 시절이라서 현재의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있는 자리에 유니언 잭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반환 후인 2002년 《디 아이》(The eyes)라는 태국과의 합작 공포영화가 만들어졌으며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와 홍콩, 대만 제작진들이 공동으로 제작된 '더블비전(雙瞳)'은 양가휘가 주연을 맡았고 종교(도교)를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이며, 홍콩보다는 대만에서 크게 흥행에 성공했다. 장국영의 유작 《이도공간》도 2002년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2013년에는 홍콩에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 블랙아웃이 닥친다는 재난 영화인 《구화영웅》(救火英雄)이 만들어졌다.
12. 에로 영화
한국에서는 엄격한 검열 때문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로 영화도 대표적인 홍콩 영화 장르의 하나였다. 홍콩 현지에서는 삼급편(三級片)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홍콩 검열 등급에서 제3등급은 미성년자(18세 미만) 관람불가이기 때문. 1990년대 씨네21에서 홍콩 박스 오피스를 소개할 때, 이런 종류의 작품은 포르노에 대한 정보제공으로 악용될까봐 제목을 그대로 소개하지 않고 그냥 포르노 영화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 5위권의 3개 영화가 그냥 포르노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 공포물과 결합해서 퓨전 에로물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심지어 촉수물 요소가 들어간 작품도 있었으며 일본의 AV 배우를 초빙하여(?) 찍은 얀데레 백합물도 있었다(...). 한국에서 알려진 대표적인 홍콩 에로 영화로는 《옥보단》과 《금병매》, 《밀도성숙시》 등이 있다. 이 장르로 유명한 사람은 이려진, 에이미 입(Amy Yip)으로 알려진 엽자미, 대만 배우 서기, 엽옥경 등이 있다.
13. SF물
홍콩영화의 대부 서극이 SF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세계에서는 일본의 특촬물과 함께 SF영화가 나오는 몇안되는 산지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로보캅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고, 엽천문이 주연으로 나오는 《철갑무적》(1987), 《환영특공》(1998),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주성치의 《장강7호》가 있다. 한국 관객들은 할리우드의 입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홍콩 SF물은 거의 개봉되고 있지 않지만, 홍콩에서는 나름 계속 나오고 있다. 이 밖에도 유덕화가 나오는 《미래경찰 X》(2010), 양자경이 나오는 《실버호크》(2004)도 있다.
홍콩 영화 침체의 원인
홍콩 영화는 1980년대 후반에 연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어갈 정도로 정점을 찍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기나긴 침체기에 들어섰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관객수는 6,000만 명을 훌쩍 넘었지만 1990년대에 급속히 하락세를 겪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는 연간 관객수는 2000만명대 아래로 추락했으며 홍콩 자체영화의 점유율도 1992년 홍콩 영화의 매출은 15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듬해에는 11억 달러로 폭락했다.
일부 유튜버들이나 논평가들은 홍콩 반환을 원인으로 들고 있지만, 이미 중국 반환 몇 년 전인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 영화는 아류작이나 도박물이 계속 나오면서 망해가고 있었다. 물론 중국 반환이 홍콩 영화의 관뚜껑에 못을 쾅쾅 박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전에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 영화는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는 것이다.
홍콩 영화는 아래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리즈시절을 길게 가져가지 못하고 못하고 망해버린 것이다. 큰 예시로 해외 영화제 수상 경력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홍콩 영화는 왕가위가 1997년 《해피 투게더》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 등판했지만 중국 영화는 이미 이보다 10년이나 앞선 1988년부터 장예모를 시작으로 천카이거등의 감독들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즉, 홍콩 반환의 문제뿐만 아니라 홍콩 영화의 질적인 저하가 심해 발전이 없었기에 자멸한 측면도 있다. 1980년대부터 홍콩 영화를 봐왔던 팬이라면 이미 이미 중국에 홍콩이 반환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부터는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즉 1991년에 나와 서울 관객 43만을 끌어들인 황비홍과 1992년 개봉하여 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신용문객잔'이 한국에서는 거의 마지막으로 흥행한 홍콩 영화다. 한국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중경삼림》(1995)조차 서울 15만 명으로 제대로 흥행하지 못했다. 황비홍조차도 아래 홍콩 영화의 쇠퇴 원인인 "1편을 우려먹기 위한 속편"이 계속 나오면서 후속작들은 망했어요. 게다가 홍콩 느와르의 부활이라는 찬사를 한국에서도 받았던 무간도시리즈도 막상 서울 관객수 10만도 채우지 못했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색,계가 한국에서 18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나 한국에서 홍콩영화의 영광을 잇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한국에서는 자국 영화가 천만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성을 보장한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던지라 과거처럼 홍콩 영화에 미련을 둘 필요조차 없어버렸기 때문. 이제 한국 시장에서 홍콩영화가 돈이 안되기에 홍콩 현지에서 개봉해도 한국에서는 제대로 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단관 상영관에서 상영 할 까 말까 할 정도.. 이 외에는 중국 관련 케이블 채널이나 '아시아 TV'같은 영화 전문 채널 혹은 넷플릭스. 왓챠같은 OTT나 VOD 에서밖에 볼까 말까 할 상황이다. 과거 국내 TV나 영화 잡지에서 손 쉽게 접할수 있었던 홍콩 스타들 관련 소식은 트위터나 웨이보에서 밖에 알 길이 없다.
그와 반대로 한국 영화는 홍콩 영화가 리즈시절을 달리던 1980년대~1990년대에는 계속 침체기였고 1990년대 중후반에도 점유율이 20%대에 머물 정도였지만, 1999년 《쉬리》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크게 상승하면서 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또한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 영화인들의 세대 교체와 더불어 영화 산업이 선진화 과정을 밟으면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해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그동안 변방의 나라로만 취급받아오던 한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하부에 기재한 것과 같이 외국에서도 인정 받을 정도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내면서 아시아 영화 중심지를 홍콩에서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지 못한 홍콩은 중국반환과 맞물려 고인물만 양산하다 보니 자연스레 침체와 몰락의 과정을 겪게 된 셈이다.
침체기에서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 한국 영화계에서 격언처럼 나돌았던 말이 "내부적인 문제로 망해버린 홍콩 영화계와 일본 영화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말이었다. 그만큼 홍콩 영화계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의 적절한 예가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판에는 이런 저런 자본이 흘러들어 1980-90년대 긴 침체를 딛고 중흥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성공하자, 여러 양산형 조폭미화물들이 유행하면서 괜찮을까라는 우려가 상당히 많았다. 다행히 이러한 우려는 2003년에 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 등의 "웰메이드" 작품이 나오면서 나오면서 불식된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조폭 미화물은 숫자가 확 줄어들면서 몰락해버린다.
홍콩 영화 침체의 대략적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꼽을 수 있다.
배우들의 지나친 겹치기 출연 - 홍콩 영화가 전성기였을 1980년대 후반 당시에도, 당시 주연급인 주윤발, 장국영, 장만옥 등등은 일년에 4-5편, 많게는 10여편 가까이 다작을 하고 있었다. 가령 주윤발이 전성기였던 1987년과 1988년에 출연한 영화는 각각 8편이다. 당시에 암흑기였던 한국 영화판에서조차 주연급이 1년에 한두 편 출연하는 정도였으니, 홍콩 배우들의 이미지 소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다 홍콩 배우들은 만능 엔터테이너 노릇을 해야 했다. 물론 연예계에서 이렇게 활동 영역이 겹치는 경우야 흔하지만, 홍콩 연예계는 이 정도가 상당히 심해서 배우들이 원래 가수 출신도 많았지만 가수나 예능 진행자, CF 모델로 계속 나왔다. 가창력이 의문인 주윤발조차도 음반을 냈을 정도였다. 그래도 성룡은 짬밥이 많은 경극 배우 출신이었던지라 가창력이 아주 꽝은 아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A, 폴리스 스토리 등의 초기 성룡 작품은 대부분 주제가를 성룡이 직접 불렀다. 이렇게 TV를 틀면 365일 24시간 계속 나오는 홍콩 배우들은 결과적으로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 소모를 가속화했고, 점점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킨 셈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작품성은 고사하고 연기조차 성의 없는 졸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런 졸작들이 다른 나라에 배포되면서 한때 홍콩 영화에 열광했던 외국인 관객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홍콩은 시장이 좁기 때문에 외국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무덤을 판 것이다. 이 사실은 1992년~1993년 당시 홍콩 톱 배우들의 영화 출연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한해 영화 출연편수가 10편이 넘어가는 배우도 속출했다. 과거 6,70년대에 활동한 우리나라 배우들 중에서도 한해 출연작이 10편 넘어가는 배우가 많았던 것과 똑같다.
아류작의 난립 - 《영웅본색》이 히트하자 비슷한 홍콩 느와르물이 쏟아져 나왔고, 《천녀유혼》이 성공하자 역시 이와 흡사한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박 영화가 히트하자 도박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강시 영화가 히트하니 이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이런 아류작에도 주윤발, 왕조현 등 원조격 영화에 출연한 스타들이 나오면서 단기적으로 볼거리가 풍성해진 면이 있으나, 장기적으로 배우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켜 버렸다. 황혼기에는 아예 도박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고, 《팔선반점의 인육만두》가 성공한 이후에는 인물과 스토리만 바꾼 비슷비슷한 폭력적인 공포물 아류작들이 무더기로 만들어졌으며, 적나고양 시리즈 같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강간물들이 시리즈로 계속 나왔다. 이런 아류작 난립의 원인 중 하나로, 위 투자 감소와도 연관이 있는데 투자가 감소하기 시작하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거나 제작비를 많이 투입하여 볼거리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저 과거에 히트했던 작품의 후광에 기대어 아류작이나 찍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아류작이 범람하다보니 홍콩 영화계는 잘 나갈 때에도 나오는 영화 장르들의 대부분이 맨날 범죄 영화나 무협 영화들밖에 없었고 관객들로선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합회 및 조직폭력배의 영화산업 개입 - 임화수를 비롯한 여러 조직폭력배들이 입김을 행사하던 한국 영화계의 상황과 유사하게 홍콩 영화계도 삼합회를 비롯한 여러 범죄조직들이 영화산업은 기본이고 연예계 전반의 패권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주성치, 홍금보, 왕우 등등의 홍콩 중견 배우들은 삼합회 간부설 혹은 영화계와 삼합회를 잇는 중간다리 역할이라는 설이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배우들에게 폭력으로 영화 출연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여배우들에게는 성상납을 요구하거나 혹은 노출 때문에 출연을 꺼리는 에로 영화 같은 영화에 출연을 강요했다는 설도 많았다. 이런 설들은 다 카더라고 속성상 진위를 밝히기가 쉽지 않지만, 실제로 불거진 사건도 있다. 양가휘는 영화 '연인'촬영 초반 당시 화소도라는 영화에 강제로 출연했어야 했는데, 화소도 출연을 거절하고 '연인' 촬영에만 전념하려고 했으나 본인은 필리핀에 납치되어 감금되고 가족들도 삼합회에 감금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그의 아내가 담판을 지어 '연인'촬영이 끝나면 출연하겠다고 하여 해결이 되었으나, 양가휘는 조폭들과 베트남 현지 군인들에 의해 대만까지 끌려가 영화 촬영을 강행해야 했다. 또한 양조위의 연인인 유가령이 삼합회에 납치되었다가 영화 출연을 강요하기 위해 협박성 누드사진을 찍힌 이후 풀려난 사건으로, 2014년 이 사진은 삼류 찌라시에 공개되었고 그사이 양조위와 결혼한 유가령은 진상을 밝히는 고통스러운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유명 연예인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폭력조직과의 연줄이 있어야만 했다. 한국에는 잘 안 알려진 사건이지만, 1992년 매염방은 한 폭력조직으로부터 출연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인해 구타를 당했는데, 매염방의 뒤에 있던 다른 조직이 보복으로 폭행 조직원을 살해한 바 있다. 이렇게 1960-70년대의 한국 연예계와 마찬가지로, 홍콩 영화의 정점기에서도 홍콩 배우들의 매니지먼트는 대부분 조폭이 담당하고 있었고, 홍콩 영화 자본은 대부분 조폭에서 흘러나오는 지저분한 검은 돈이었다. 위에서 나온 잦은 겹치기 출연이나 아류작 남발도 사실 조폭 탓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폭들은 연예 매니지먼트에 합리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이미지 소모나 피로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계에 투자한 금액을 빨리 회수하기 위해 아류작을 계속 만들고 여기에 연예인들을 계속 이미지 소모를 가속화하는 작품들만 출연시킨 것이다. 문제는 2020년대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
중국 개방의 본격화로 투자 감소 - 1980년대 홍콩 영화에 투자금이 몰리게 된 원인은, 아직 사회주의 통제 경제 체제였던 중국으로 가는 투자금이 홍콩을 경유했기 때문에 홍콩에 자금이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중국이 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개방되고 자본주의화가 됨에 따라 해외자본은 중국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었고, 홍콩을 경유하는 자금은 줄어들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홍콩 금융 시장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영화판으로 흘러들어가는 자금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투자 감소 때문에 또 삼합회가 제작에 간섭하는 원인을 제공해 돈벌이를 위한 아류작들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홍콩 자체에서 투자받기가 힘들어진 상태인지라, 중국 투자자를 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홍콩배우들 대부분이 친중 성향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중국 귀속에 대한 불안감 - 여러 홍콩 영화 배우나 제작 인력들이 중국 귀속을 전후한 시기에 홍콩을 떠났는데,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고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영국을 포함한 영미권 국가에 영주권을 얻은 홍콩배우들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는 중국 치하에서 창작의 자유가 보장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외국으로의 진출은 홍콩 영화가 위의 이유로 몰락한 이후인 1990년대 이후 발생한 일이다. 투자가 저조하고 작품 활동이 원할치 못하니 다른 나라로 간 것이다. 하지만 해외로 진출한 이들 중 제대로 성공한 이는 원래부터 영어연기가 되는 여배우인 양자경 정도였고, 나머지는 언어 장벽이나 인종차별에 부딪쳐 대부분 2000년대 중반에 중국영화판으로 전직한다. 주윤발은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나 《커럽터》에서 동양계 미국인 캐릭터를 맡았지만 거의 비슷한 스타일로 일관했고, 결국 희대의 망작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을 끝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손절하고 중국에서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성룡도 무술실력을 갖춘 동양계 코미디언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돌다가 중국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감독(서극, 오우삼 등)들은 인종이나 언어 등 겉으로 보이는 면에 있어서 배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덜 받는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런 감독들조차 할리우드에서 몇몇 작품으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할리우드에 자리잡는데 실패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게 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미 홍콩 영화계는 막대한 자본과 시장으로 이루어진 중국 본토 영화계에 흡수되어 있었고, 홍콩으로 복귀한 이들은 주윤발이나 성룡처럼 홍콩영화 대신 중국영화를 제작하면서 커리어를 이어간다.
규모의 경제의 단점을 보완하지 못한 시장의 협소함 - 홍콩의 인구는 약 700만이다. 2000년대 이전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영화는 1인당 GDP도 높고, 영국 문화가 공존하는 특수성 때문에 시장 규모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중화권(중국 본토 제외)에서 세련됐다는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홍콩은 독자 문화를 배양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좁아서 자생력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특히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대중문화 성장으로 인해 시장 진입이 예전보다 훨씬 힘들어졌다. 또한 홍콩 문화의 기반인 광동어는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에서도 규제를 받기 때문에 더 클 수가 없었다. 홍콩인의 국외 이주 붐은 처음에는 중국 지배의 공포 때문에, 나중에는 더욱 큰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 때문으로, 이는 근본적으로는 홍콩 시장의 한계 때문이다.
선매방식 도입 - 홍콩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되면서 홍콩영화 자체 시장만으로 제작비를 건지기 힘들게 되자, 중화권(중국 본토 제외)의 극장 업자들로부터 사전에 제작비용을 충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위에서 언급한 아류작들이 극심하게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홍콩보다는 돈을 미리 주는 중화권 시장(중국 본토 제외)을 우선적으로 겨냥하면서 홍콩 관객들이 홍콩 영화로부터 멀어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영화계의 세대 교체에 따른 개혁과 발전 - 중국에서 홍콩을 포함한 서방 영화가 수입금지되던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홍콩 영화의 최대 시장이었다. 이소룡이나 성룡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에서 홍콩 영화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일본은 찬바라 영화라고 불리던 고유의 사무라이 칼싸움 영화가 있기 때문에 중국식 무협 영화는 발을 붙일 수 없었고, 일본 영화 자체도 1960년대-1980년대에는 황금기였기 때문에, 홍콩 영화가 힘을 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시장은 1980년대 홍콩의 제1 외국 시장이었고, 당연히 홍콩 영화계는 한국을 굉장히 의식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한국 시장에서 홍콩 영화의 위상이 퇴색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개발도상국 취급을 받고 할리우드 영화를 저렴한 가격으로 싸게 수입해 왔으나, 미국 영화계가 한국 영화 시장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면서 영화 가격을 크게 올렸고 이후 직배급까지 시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한국의 영화 수입 배급사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홍콩 영화를 다량 수입해서 극장에 내걸게 되었고, 이는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홍콩 영화 붐에 일조했다. 또한 직배영화에 대한 반발로 인한 영화계의 갈등으로 할리우드 영화 수입 및 상영에 일종의 공백이 생겼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유명 영화의 수입이 늦어지고, 수입된 이후에도 직배사와 기존 수입사와의 갈등으로 상영 시기가 늦어지고, 영화관에서도 국내 영화계나 반미 시위대 눈치를 보는 바람에 상영을 꺼렸는데, 한국 영화인 측에서 직배영화 상영관에 뱀을 풀어놓고 스크린에 테러를 가하기도 했었다. 이 공백을 홍콩 영화가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 이후로 한국이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며 1990대에 들어서면서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상품성이 좋은 할리우드 영화를 제때 사올 수 있게 되었고, 한국 영화계 자체적으로도 개혁 분위기가 태동했으며, 영화계 세대 교체에 따른 재능있는 영화인들이 데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를 기점으로 70~8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과거 영화인 세대가 본격적으로 퇴장하기 시작했고, 80년대 가정용 비디오 붐을 타고 국내외의 다양한 영화 작품을 공부하고 경험한 신세대들이 87년 민주화 및 대중문화 해금 분위기에 힘입어 문화계의 신진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과거 영화인들이 '주먹구구식 + 도제식'으로 영화를 배우고 제작했던 데 비해, 새로 등장한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여러 대학의 연극영화학과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영화 교육을 받은 참신한 인재들이었다. 이들이 1980년대 후반부터 연극 및 영화계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의 질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또한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및 1996년 헌법재판소의 영화 사전 검열 위헌 결정에 따른 창작 자율성 보장 이후부터는 영화 제작에 대한 운신의 폭이 그야말로 급속도로 넓어졌고, 1997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부터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 정책에 관한 모토가 자리잡게 되어, 2000년대의 이른바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영화 산업의 체계화에 따라 충분한 제작비를 투입하면서 양적,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게 되어 한국 영화의 작품성과 상업성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한국 영화 관객들의 눈이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류작이 난립하며 영화의 전반적인 품질이 나빠진 홍콩 영화에 대한 유행이 한국 시장에서 급속도로 식어버렸다. 홍콩 영화계 입장에서는 거대한 시장을 하나 잃어버린 것이다.
대만 내에서의 점유율 급감 - 대만은 한국과 더불어 홍콩 영화계의 최대 시장이었다. 대만에서는 한창 스크린 쿼터제가 적용되었을때도 홍콩 영화는 자국 영화로 인정받아서 스크린쿼터제에서 면제대상이었다. 거기에다가 대만 영화계와의 합작도 매우 활발했지만, 1992년에 홍콩 영화의 표값을 50%씩이나 인상하면서 관객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홍콩 영화의 상영횟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대만 시장내에서의 점유율이 급감하고 말았다. 뒤늦게 홍콩 영화의 수입가를 내렸지만 이때는 홍콩 영화 자체의 질적 저하로 대만 관객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대만에서의 홍콩 영화 입지가 크게 흔들린 일은 인재 유출 및 아류작 난립과 더불어 홍콩 영화 쇠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중국 본토 영화 성장 - 2010년대 두드러진 경향은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 대륙 영화계로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국 본토 영화는 여러가지 소재 제약도 있고 검열도 심하여 홍콩만큼 자유로운 창작이 불가능한 단점이 있다. 하지만 무협이나 사극 및 로맨틱 코미디물은 검열 당국의 가위질을 피해갈 수 있는 데다가 대륙 영화에 들어가는 자본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홍콩 영화계의 인재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스탭들은 물론이고, 광동어로 연기를 하던 주윤발이나 유덕화 같은 여러 홍콩 배우들도 현재는 보통화로 연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 대륙 시장을 의식해야 하는 신세가 된 홍콩 영화계에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중국/문화 검열 때문에 영화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검열이 극심할 때인 1990년대 천카이거나 장이머우 같은 거장들이 각각 《패왕별희》나 《인생》 같은 걸작을 내놓았던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자본시장이 커지면서 현재 사극 같은 경우는 거의 할리우드급으로 돈을 투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중국 영화시장의 규모는 2015년 세계 2위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성장하는 중이다. 이렇게 대자본이 굴러가기 시작하자 상업적으로 대흥행하면서 괜찮은 작품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중국 영화시장의 규모 때문에 이제는 홍콩뿐만 아니라 할리우드까지 간혹 중국 눈치를 보는 형편이다. 중국에서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예를 들어 《월드워Z》에서 처음에는 전염병 발병지를 중국으로 설정했다가 중국에서 수출금지 처분을 받게 될까봐 급하게 북한으로 변경했고 《그래비티》에서는 중국의 위성파괴 때문에 재난이 벌어진다는 설정을 러시아 때문이라는 것으로 바꾸었다. 러시아도 동성애 등 일부 소재를 검열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중국보다는 훨씬 관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 시장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홍콩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때문에 성장이 거의 어려워진 유럽 영화처럼 퇴보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영화인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지나갈 조짐이 보이자 홍콩 영화계 자체의 큰 돈줄이 마르게 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대만을 비롯한 중화권 국가(중국 본토 제외)로부터 주로 소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홍콩 영화인들에 대한 처우가 급속도로 열악해지기 시작한다. 영화가 저예산이나 소자본으로 제작되다 보니 영화의 소재 또한 돈이 될 만한 안전한 것 위주로 확고히 재편됐으며, 결정적으로 영화 제작 스태프들의 급료가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반토박 수준이 났다.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 영화 쪽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아예 영화계를 떠나버리는 일이 벌어졌고, 90년대에 다작출연에 지쳐버린데다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불안감에 휩싸인 상당수 홍콩 배우들은 영주권을 얻어 홍콩을 떠나거나 이중국적을 취하게 되면서 영화판이 텅 비어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하는 영화판의 행태로 새롭고 재능있는 인재의 수급 또한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한 배우 연령층(특히 남자 주연급 배우)이 갈수록 고령화가 되어가고 세대교체가 잘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후 2002년 《무간도》를 시작으로 8~90년대의 홍콩영화스러운 느와르가 부활하긴 했지만, 몇몇 시리즈에 국한된 상황이라 홍콩 영화계의 판도를 바꿀만한 폭발적인 현상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도 홍콩 영화에 대해 유달리 열광했으나 이후 한국 관객에게도 외면을 받고 있다. 심지어 2013년도 영화 《일대종사》의 경우에는 감독이 왕가위이며 주연배우들이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라는 스타급들이건만, CJ 무비꼴라쥬 배급을 통해 다양성 영화 취급(...)을 받으며 개봉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근데 이건 왕가위가 퇴물이 된 점도 있다 참고로 다양성 영화란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저예산 비주류 영화를 말한다.
그래도 무간도나 흑사회나 콜드 워나 뉴 폴리스 스토리 같은 범죄물이나 구화영웅(救火英雄) 같은 재난물로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이 중 무간도는 2016년 봄 재상영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장르인 홍콩식 호러에도 도전하여 '디 아이즈(The eyes)'나 '이도공간', 헐리우드 메이져 영화사와 대만과의 합작으로 제작된 '더블 비전(雙瞳)' 등의 작품이 나왔다. 이도공간은 장국영의 유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