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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국 영화를 바꾼 영화, 박하사탕, 쉬리

Jobs 9 2022. 9. 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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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1년 앞둔 1999년 한국 영화

 

박하사탕

 

시놉시스

 

다시 시작하고 싶다!
당신도 스무살이었었다.
우리시대 최고의 영화... 자신있습니다.

20년만의 야유회가 열리던 날. 느닷없이 영호(설경구)가 나타난다. 그는 이미 실성한 모습이다. 의아한 눈길로 영호를 바라보는 친구들. 영호의 광기는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철교 위에 올라 울부짖는다. 거꾸로 가는 기차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가면 영호의 과거가 펼쳐진다. 

자살할 수 밖에 없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에서 점점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간 영호는 박하사탕 싸는 일을 하는 순임을 처음 만나 그녀가 건넨 박하사탕을 먹는다. 둘은 첫사랑을 느낀다. 박하사탕의 색깔과 맛 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간인 것이다. 

 

《박하사탕》(영어: A Peppermint Candy)은 이창동 감독의 2번째 영화이다. 1999년 10월 14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고, 2000년 1월 1일 정식으로 개봉하였다. 한 남자의 인생과 사랑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투영하고 있다. 또한 2000년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기도 했다.

 

 

<쉬리>(1999)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
감독/각본: 강제규 (<태극기 휘날리며>(2004), <마이웨이>(2011), <장수상회>(2015))
출연: 한석규, 최민식, 김윤진, 송강호, 박용우
제작비: 30억 

 

지금 보면 애매한 완성도의 총격전이지만 당시엔 엄청난 완성도의 새로운 영화였던 <쉬리>

 

 

전세계적으로 봐도 자국 영화가 강한 영화시장은 손에 꼽힌다. 일본은 한참 전에 무너졌고, 유럽 쪽도 매년 흥행 상위권은 할리우드 영화가 지배한다. 자국 영화가 강한 영화시장은 할리우드 규모를 능가한 중국과 세계 최대 영화 제작 편수를 자랑하는 인도(발리우드) 거기에 한국 시장 정도이다. 세계적인 영화제를 휩쓸고 할리우드, 영국 등에 진출한 감독이 수두룩(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김지운 등등)하고 매년 자국 영화가 흥행 1위를 하는 시장은 굉장히 희귀한 시장이다. 거기에 개성이 넘치는 영화들이 한 가득(요즘엔 그닥이지만)한 매력적인 한국 영화 시장. 

하지만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닌데, 이른바 방화의 시절이 있었다. 외국영화 1편을 수입하려면 일정량 이상의 한국영화를 제작해야만 했고, 편수만 채우면 수입 자격이 생기기에 저질인 작품이 무진장 쏟아 내리던 시절. 이 시절이 지난 이후에도 오로지 스크린 쿼터(1년간 1 상영관의 상영 영화 중에 일정량 이상은 무조건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하는 법률)를 채우기 위해 제작되기만 했다. 다른 한쪽은 예술 영화들. <씨받이>(1986), <서편제>(1993) 등의 예술적인 수요를 채우기 위한 영화들. 투자는 부족했고, 규모는 미천했고, 150만 명이 보면 대박이라 여겨졌다. (참고로 현재 최다 관객동원기록은 <명량>(2014)의 1,700만 명;;;;;) 이러한 것들이 변한 것은 바로, 1999년에 3편의 영화가 개봉되면서부터다. 

 

 

1) <쉬리> 이전엔?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표현은 <쉬리>(1999)에 처음 붙은 표현이 아니었다. 해당 표현을 처음으로 쓴 영화는 바로 <퇴마록>(1998). 고정팬층이 많은 원작, 올스타 캐스팅, 대형 제작비, 제작사가 기획한 기획영화 등등 나름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호칭에 걸맞은 영화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바로 영화의 완성도. 재미가 떨어지는 데다가 쓸데없이 넣은 로맨스와 미스 캐스팅으로 원작 팬들도 등을 돌렸다. 이렇게 새로운 시도는 시작하자마자 망하나 싶었는데…

당시는 강제규 감독이 촉망받는 각본가로 시작해서 좋은 감독으로 자리매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로써는 파격적인 시도였던 판타지 멜로물 <은행나무 침대>(1996)가 대성공을 거뒀다. 욕심을 부릴만한 시기였다. 강제규는 첩보 액션물을 기획하게 되는데, 이것이 <쉬리>의 시작이었다. 90년대 흥행 영화 대부분에 출연한 한석규를 주인공으로, 연기파 배우 최민식을 악역으로,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로맨스를 위한 여주인공으로 나름 신인이었던 김윤진을 캐스팅했다. (그 외 동료 요원 역에 송강호, 박용우를 캐스팅) 훌륭한 캐스팅으로 투자도 순조로웠고 영화는 완성됐다. 기대치는 대충 당대에 나름 높은 수준이었던 150만 명 수준을 기대했다. 그리고 영화는 개봉했는데…

 

2) <쉬리>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시작하다

<쉬리>는 기본적으로 첩보 액션+멜로물이다. 남북한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한 첩보 액션에 비극적인 멜로를 뒤섞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후에 지겹도록 나온 블록버스터의 조건인 거대한 상황(전쟁, 첩보, 조직간의 싸움 등등)에 개인의 감정(로맨스, 비극, 가족애 등등)이라는 작은 요소를 엮는 식의 대형 영화들은 모두 <쉬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

무엇보다 기술적인 성취가 대단한 작품이었다. 알차게 된 고증 하에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총격전이 오락적인 재미를 보장했다. 지금 봐서는 티가 너무 많이 나지만 미니어처를 통해서 보여준 대규모 건물 폭파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을 한국영화에서 보는 신선함을 자랑했다. 장르물로써 완성도도 나쁘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지겹도록 쓰였지만) 일종의 둠즈데이 플랜(터지면 나라가 망하는 수준의 재앙)을 세팅해놓고 이를 피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논리적으로 잘 짜인 시나리오. (이는 강제규가 뛰어난 각본가이기에 가능했다)

완성도+관객의 기대+새로운 영화의 출연 등의 효과로 흥행 대폭발이 일어났고, 영화는 무려 600만 명 수준의 관객을 동원했다.

 

3) <쉬리> 이후엔?

<쉬리>의 성공은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일단, 한국영화도 잘만 만들면 얼마든지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본격적으로 충무로 외부 자본들이 한국 영화에 쏟아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2의 <쉬리>를 꿈꾸는 시도도 시작됐다. <비천무>(2000), <은행나무 침대2 – 단적비연수>(2000), <천사몽>(2001), <무사>(2001),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2), <예스터데이>(2002) 등등.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비평/흥행 모든 부분에서 실패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시도도 있었으니 이 웰메이드 블록버스터의 계보는 박찬욱 감독의 3번째 작품인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다른 의미로 이어가기 시작했다.

캐스팅들에서도 풍부한 성공을 남겼다. 최민식은 이후에 카리스마 있는 역에 언제나 제격으로 꼽혔고 <파이란>(2001), <취화선>(2002), <올드보이>(2003)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한국 영화계의 믿고 보는 배우의 지위를 획득했다. 김윤진은 <쉬리>의 발견. 이후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드라마<Lost>(2004~2010)를 찍었고 <세븐 데이즈>(2007)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 영화 출연 자체는 흑역사이지만(무려 송강호가 발연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송강호는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명배우로 성장했다.

마지막으로 강제규 감독은 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이 후엔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통해 역대 2번째 1,000만 관객 동원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이웨이>(2011)는 밋밋한 각본과 전개로 인해 대실패를 맛봤지만, 극강의 가성비를 뽐내는 전쟁장면을 인상 깊게 잘 만들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만든 작은 영화인 <장수상회>(2015)는 나름대로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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