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1901~1981) |
소설가․시인이며, 호는 월탄(月灘). 1921년 시 전문지 <장미촌>에 “오뇌의 청춘”, “우유 빛 거리”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어 <백조>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등단 초기에는 자아와 개성을 강조하고, 죽음을 예찬하는 등 낭만주의적 시를 많이 썼다. 그러다가 1936년 “금삼의 피”를 발표하면서 낭만주의 경향에서 벗어나 역사 소설 창작에 주력하였다. 소설을 통해, 일제의 탄압 속에 움츠러들었던 우리의 민족 정신을 일깨우려 했다. 대표작으로 “아랑의 정조”, “대춘부”, “다정 불심”, “여인 천하” 외 여러 편이 있다.
▶ 금삼의 피
1. 줄거리
이 작품은 중전 윤비가 베를 짜는 처소에 성종이 입실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전 윤비는 궁궐의 일개 나인에 불과했으나 원자(元子)를 낳은 뒤 중전이 되었다. 윤비가 원자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 성종은 또 다른 후궁을 총애하기 시작한다. 이 후궁은 정귀인으로 중전 윤비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에 윤비와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어느 날 윤비는 자신의 친잠(親蠶) 행사에 나오지 않은 정귀인을 잡아다 엄나무 가시를 등에 얹혀 하룻밤 동안 석고대죄를 시켰다. 이에 앙심을 품은 정귀인은 점쟁이와 의논하여 바늘을 꽂은 동자상(童子像)을 동궁의 처소 부근에다 파묻어 동궁 ‘융’을 병들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윤비는 정귀인을 당장 없애려고 했으나 성종의 총애가 워낙 두터워 죽이지는 못하게 된다. 윤비는 오랜만에 침소에 든 왕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낸 것을 빌미로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는다. 사약을 받으면서 윤비는 자신의 피 묻은 비단 한삼(汗衫)의 소매 조각을 친정 어머니 신씨에게 주면서 그것을 동궁에게 전해 줄 것을 유언(遺言)한다. 윤비의 피 묻은 금삼(錦衫)은 신씨가 비밀리에 간직하였다. 그 후 동궁은 자신의 생모가 한때 왕비로 있다가 폐위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연산의 가슴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죄인의 아들, 폐비의 아들, 어머니 없는 외로운 자식이라는 생각은 그의 성격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이 왕위에 등극했다. 왕위에 오른 연산은 먼저 폐위된 생모 윤씨를 복위시켜 종묘에 안치하려 했다. 그러나 대왕대비와 조정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겨우 회모를 세우는 데 그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산은 자신의 명을 거역한 조정의 대신들에게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연산은 궁중의 뜰에서 성종이 극진히 귀여워하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인다. 이 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연산의 폭정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그는 무오사화에 이어 연산의 외조모 신씨와 임사홍이, 폐위된 윤씨 사건을 들추어내자 생모 윤씨를 윤비로 복위시킴과 동시에 신씨로부터 자기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한 전말을 듣고서 정귀인 일파와 사약 내리는 데 방조했거나 그에 연루된 신하들에 대해 참혹한 징벌을 가하는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이 양대 사화로 인해 연산의 주위에는 충신이 제거되고 간신배들의 횡포가 극심해졌다. 연산은 연일 횡음 방탕과 주색 잡기에 빠져 백성의 고혈을 짜기에 바빠 정사를 게을리 했다. 백성의 원성은 높아가고 뜻 있는 선비들의 비판 소리가 팔도에 들끓었다. 마침내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박원종 일파가 연산군 13년 9월 1일에 휘하 군대를 이끌고 연산의 궁궐에 쳐들어가 연산군을 폐위시켰다. 그리하여 새로 왕위에 오른 연산의 이복 동생 중종은 조칙을 내려 전왕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에 안치시킨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역사 소설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배경 : 조선조 성종․연산군 재위 기간 중
◎ 주제 : 왕실 내부의 정치적 음모와 애정 갈등
3. 등장 인물
◎ 성종, 대왕대비, 왕대비, 연산군, 폐비 윤씨, 정귀인 등의 역사적 인물들
4. 이해와 감상
“금삼의 피”는 월탄 박종화가 처음으로 쓴 장편 역사 소설로 1936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월탄은 이 작품을 계기로 본격적인 역사 소설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 30년대 문학의 일반적 조류는 계급성이 강한 신경향 문학이 퇴조하고 민족주의 문학이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대 문단 내부의 변화의 모습이 이 작품에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금삼의 피”도 왕실 내부의 정치적 음모와 애정 갈등 및 이와 연루된 사화(史禍) 등 궁중 생활의 숨은 이면을 역사적 소재로 담고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일제의 억압이 점차 가혹해져 가던 때였기 때문에 민중 생활은 물론 지배층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묘사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작중 인물 설정에도 역사적․사회적 의미가 배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들은 일제의 탄압 아래 신음하고 있는 민족적 현실을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사실에 치중함으로써 역사의 재현적 측면이 부각될 뿐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은 둔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30년대 중반부터 가중된 일제의 억압에 대응, 민족적 소재를 선택하여 민족의 얼과 정신 그리고 민족 언어를 유지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대춘부
1. 줄거리
조선 인조 14년, 후금(後金) 태종은 내몽고를 평정한 뒤에 ‘한(汗)’이란 칭호 대신 ‘천자’의 존호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사신 용골대를 통해 조선 조정에 통고한다. 인조(仁祖)가 이를 거부하자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범한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 봉림 대군 등을 강화로 피난시키고, 인조는 세자와 더불어 남한 산성으로 몽진(蒙塵)한다. 영의정 김유와 이조판서 최명길은 화친을 주장하고, 정숙 옹주의 부마인 신익성, 예조판서 김상헌, 삼학사 등은 강경하게 척화(斥和)를 주장한다. 한편, 임경업 장군은 의주 부윤으로 백마 산성을 지키면서 도원수 김자점과 병사 유임에게 2만 기(騎)의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청 태종은 임경업 장군을 피해 남진(南進)해 온다. 드디어 강화도가 함락되고 인조는 항복의 뜻을 적진에 보냈지만 적진에서는 여러 조건을 들어 거절한다. 삼학사는 적진에 끌려가고, 강화도에서 끌려 온 왕족과 대면한 다음 인조는 송파 삼전도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역사 소설
◎ 배경 : 시간(인조 14년(1636)~인조 15년(1637)) / 공간(조선)
◎ 경향 : 민족주의적, 정사적(正史的)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국난에 처한 인물들의 애국심과 민족 의식
◎ 구성
전편은 8장(章)으로 구성되어 있음.
발단 - 국내의 혼란과 사신 용골대의 파견
전개 - 척화파와 화친파의 대립과 남한산성 몽진(蒙塵)
위기 - 여인들의 수난과 최명길의 충정
절정 - 강화도 함락과 삼학사의 끌려감.
결말 - 삼전도에서의 항복
3. 등장 인물
◎ 김유 : 인조반정의 공신. 화친파(和親派)의 거두
◎ 김상현 : 예조판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
◎ 임경업 : 의주 부윤. 백마 산성을 굳게 지킴.
◎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윤집, 오달제. 강경하게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들. 청나라에 끌려가 심양에서 처형됨.
4. 이해와 감상
1937~38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장편 역사 소설. 병자호란을 소재로 인조․효종 때 활약한 조야(朝野)의 많은 병사들이 등장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봄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과 임경업 등의 장거(壯擧)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특히, 의병 활동을 낭만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문학성을 고려한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대춘부”는 병자호란을 제재로 한 역사소설로서 1937~38년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이다. 1930년대에 이러한 역사 소설이 출범하게 된 데에는 시대적인 이유가 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고개를 들었고, 1933년을 전후하여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등장, 중․일의 충돌(1937) 등으로 세계는 불안과 위기의 시대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는 독립 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해산, 프로 문학파의 검거 등으로 언론과 문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민족주의적 저항 문학은 복고 사상과 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추세 하에 순수 문학의 대두와 더불어 일부 민족주의 문학가들은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김동인의 “젊은 그들”(1929)과 “운현궁의 봄”(1933), 현진건의 “무영탑”(1938), 박종화의 “금삼의 피”(1936)와 “대춘부”(1938) 등이 그러한 예이다. 따라서, 1930년대의 역사 소설에는 민족 의식의 고취와 우리 역사를 알린다는 목적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대춘부”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조반정과 임진왜란을 전후한 우리나라 국내의 어수선한 사정과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금(金)나라 용골대 장군과 그 부하들의 행패, 백성들과 왕족의 피난길에 있었던 척화파와 화친파 간의 논쟁을 그리고 있다. 이어서 남한 산성의 모습과 인조의 몽진, 임경업 장군 이야기, 청 태종의 파죽지세의 침범, 조정에서의 화친의 움직임, 끝까지 반대하는 척화파의 강경한 자세를 다룬다. 오랑캐가 난무하는 한양, 호군(胡軍)에 능욕 당한 여인들, 김 승지 부인과 기생 소단계의 절개를 보여 준다. 최명길은 모욕적인 항복만은 당하지 않으려 애쓰고, 강화도가 함락되어 빈궁과 세자가 포로로 잡혀 산성으로 끌려온다. 드디어 삼학사가 적진으로 끌려가게 되고 청 태종에게 인조가 항복하는 데 이른다. “대춘부”는 일제의 압박이 가중되면서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이 노골화되자, 이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 의지로써 창작된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펼쳐지는 역사 의식을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반추해 내어야 할 것이다.
▶ 아랑의 정조
1. 줄거리
아랑은 백제 개루왕 때 목수인 도미의 아내다. 아랑은 부드러우면서도 기품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지녀 백제의 서울에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불렸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아랑에 대한 소문은 신라와 고구려 사람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게 된다. 개루왕은 나라의 정사(政事)는 잘 다스렸으나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임금이었는데, 아랑이 어여쁘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사자(使者)를 도미의 집으로 보내어 아랑을 청한다. 그러나 아랑은 남편이 있는 계집의 몸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에, 개루왕은 도미를 불러 아랑의 정조를 시험해 보자는 내기를 한다. 개루는 시종을 거느리고 도미의 집을 방문하여 아랑을 위협하여 정조를 꺾으려 한다. 그러나 아랑은 불을 끄게 한 다음 옆집 홀어미인 부전이를 단장시켜 침실로 들여보내 위기를 모면한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한 개루는 도미의 두 눈알을 뽑아 강물에 버리고 대궐에서 내쫓는다. 아랑은 피신하다 개루의 군사에게 붙잡혀 대궐로 끌려간다. 아랑은 꾀를 내어 달거리로 몸이 불결하다는 핑계로 몸을 보전하다가 이레째 되는 날 밤 개루가 잠든 틈을 타 병부를 훔쳐 대궐을 탈출한다. 그 후 도미의 소식을 탐문하여 헤매다가 장님 거지가 된 도미를 만나 고구려 땅으로 도망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역사 소설
◎ 배경 : 시간(백제 개루왕 때) / 공간(한강 유역)
◎ 경향 : 설화적, 낭만주의적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아랑의 절개
◎ 구성
발단 - 도미와 아랑의 행복한 생활
전개 - 아랑의 소문을 들은 개루가 아랑의 절개를 시험하나 아랑은 기지로써 물리침.
위기 - 도미는 장님이 되어 쫓겨나고 아랑은 대궐로 잡혀감.
절정 - 아랑은 위기를 모면하고 대궐을 탈출함.
결말 - 아랑은 눈먼 도미와 함께 고구려로 피신함.
3. 등장 인물
◎ 도미 : 백제 개루왕 때의 목수. 순박하고 선량한 인물
◎ 아랑 : 도미의 아내. 아름답고 절개가 곧은 여인으로 기지(奇智)를 발휘하여 개루왕의 위협에 대처, 절개를 지킨다.
◎ 개루 : 백제의 왕으로, 정치는 잘 하였으나 여색(女色)을 탐한다.
4. 이해와 감상
1937년 <문장>에 발표된 단편 소설. <삼국사기>의 ‘열전(列傳)’에 기록된 [도미전(都彌傳)]에서 취재한 것으로, 백제의 개루왕이 도미의 아내를 탐냈으나 그녀는 절개가 굳어 끝내 마다한다는 내용을 골격으로 하고 있다. 다만, 도미의 아내에게 ‘아랑’이라는 이름을 주고 새롭게 성격화한 작품이다. 역사상의 실제 배경과 인물 및 사건을 소재로 하여 문학적 창의성을 가미한 것을 역사 소설이라 한다. 역사 소설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는 하나, 그것이 작가의 창의력에 의해 허구화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과는 구별된다. 뒷날 역사 소설가로서 명성을 지녔던 박종화는 초기에 <백조> 동인으로서 낭만주의적 문학을 지향했다. 이광수의 문학이 민족을 계몽하고 설교하는 목적성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하여, <백조>파는 ‘문학은 오직 그것 자체로서 독자적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본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예술 지상주의적인 편향까지도 들고나섰다. 이러한 <백조>파의 문학적 성격이 박종화에게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비록 역사 소설에 중심을 둔 민족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적 생리에 있어서 그러한 낭만성은 일관되고 있다. 예를 들어, “황진이의 역천(逆天)”, “아랑의 정조”는 그의 단편 중에서 낭만적인 경향이 짙게 표현된 작품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 아랑과 도미라는 부부 사이에 절대적 권력자인 개루왕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적인 리얼리티보다는 부부의 애정을 지극히 이상적인 세계에까지 승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낭만적인 태도가 설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박태순(1942~) |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65년 “향연”이 <경향신문> 신춘 문예에, “약혼설”이 <한국일보>에 각각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되고, “연애”를 <창작과 비평>지에 발표하여 등단. <실천 문학> 편집 위원. 그는 이론적인 작품보다 자유로운 형식과 스타일을 고집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너진 극장”, “낮에 나온 반달”, “한 오백년”, “가슴속에 남아 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정든 땅 언덕 위” 등이 있다.
▶ 가슴속에 남아 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
1. 줄거리
이 작품은 넓게는 한국, 좁게는 서울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변두리의 꼭대기에 자리 잡은 ‘샘터’라는 빈민촌의 각별한 생활 현실을 그리고 있다. 옛 절터에 23세대가 북적대며 살고 있는 이 빈민촌은 취학기의 소년 태룡의 눈을 통해서 비쳐지고 있다. 태룡의 집안은 월남 가족이다. 그들은 청운동에 있는 셋집에서 괴팍스러운 과수댁에 쫓겨나다시피 하여 이 곳으로 이사해 온 것이다. 흉가라는 소문이 나 있는 납골당 자리를 방으로 쓰고 있는 태룡 네는 어머니의 와병으로 가뜩이나 구차스런 살림에 더욱 심난함을 맛본다. 작가 박태순은 마을의 분위기를 치밀하고도 환정적인 필치로 보여 준 뒤, 세 사람의 미혼 이모가 얹혀 사는 태룡 네 집안의 뒤숭숭한 양상을 실감나게 보여 준다. 새로 이사온 태룡 네를 찾아오는 주민들은 어느 모로는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구현하는 인물들이다. 내객 중에는 우선 허 노인이라는 침쟁이가 있다. 그는 보수도 바라지 않고 환자가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약도 지어 주고 침도 놓아준다. 그는 태룡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한독당 당원임을 실토하면서 백범 김구 노선이 가장 소망스러운 것이라는 소신을 밝히며 함께 찾아가 보자고 권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렇다 할 직업도 없어 보이는 그의 젊은 아들은 몽양 여운형 노선을 따르는 몽양 숭배자이다. 이 허 노인과 대결을 벌이게 되는 상대역으로 채 목사가 있다. 대개의 종교인이 그렇듯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노선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으나, 허 노인의 민족주의와는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입장이다. 한편, 반장 일을 맡고 있는 정갑두는 이승만 노선을 따르면서 대동 청년단 입단을 권유하고 다닌다. 그는 권력 있는 곳에서 항상 발견되는 그런 현실주의자이다. 그런가 하면 남로당의 삐라를 살포하는 채소 장수 용식 어머니의 여동생이 있다. 국민학교 교원인 그녀는 별 정치 의식도 없이 동료의 권유에 따라 교원 조직에 가입한 탓으로 퇴직 당하고 남로당 활동에 동조하게 된다. 뿌리 없는 월남민이면서 정치적 활동이나 견해보다도 우선 살 길이 다급한 지식인 형(型)의 태룡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러한 각양 각색의 인물들이 그 모습들을 드러냄으로써 이 작품의 정치 사회사적 맥락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들의 성격은 허 노인과 채 목사 사이의 충돌과 용식 어머니의 여동생 소행으로 드러난 총선거 반대 삐라 살포 사건이라는 두 개의 큰 사건을 매개로 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어쨌든 허 노인도 떠나고 용식 어머니조차 용의자로 불려 가고 채 목사도 떠나가 버린 ‘샘터’ 마을은 정갑두만이 남아서 통솔하게 되는데, 이는 이름을 되찾고 취학하게 되는 태룡이라는 새 세대의 출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역사 소설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배경 : 시간(해방 후(1940년대 말)) / 공간(빈민 마을인 ‘샘터’)
◎ 주제 : 복잡한 사회․정치 현실 속의 개인적 삶의 애환과 사회적 의미
3. 등장 인물
◎ 태룡 아버지 : 가난한 생활을 꾸려 나가는 가장
◎ 허 노인 : 침쟁이. 한독당 당원으로 백범의 노선을 숭상한다.
◎ 채 목사 : 목사. 허 노인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
◎ 정갑두 : ‘샘터’ 마을의 반장. 이승만 노선을 신봉하며 권력 지향적인 인물
4. 이해와 감상
이 “가슴속에……”는 한 소년의 시각과 관점 그리고 추억을 통해서 포착한 40년대 말의 습속(習俗)을 그린 장편 역사 소설로서, 문장이 섬세하고 환정적이며 누추한 현실을 리얼하게 다루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불행한 시대의 불행을 뜨겁게 포옹하여 시의 정서로 승화시킨 김소월의 시에서 따온 이 “가슴속에 남아 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이란 표제에서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범상한 세태 묘사로 그치지 않고 한 시대의 상징적 축도로서 한 세대의 삶의 회한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성공적인 모든 역사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대한 묵시적 비판이 되어 주고 있다. 주창만 씨를 따라 집을 나갔던 세 이모들이 영영 생사를 알지 못하는 터가 되었다는 끄트머리의 삽화에서도 상투적인 이산 가족의 슬픔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 시대의 상흔이 개인사 속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1. 줄거리
고왕만은 경북 금릉군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전쟁의 추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끼어 들게 된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미군 부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휴전 후에는 한국군으로 편입되지만, 넓적다리에 파편을 맞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는 병원에서 알게 된 최만택 덕분에 정양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정양원 상이 군인 폭력배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다. 그는 야당 인사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지만 실행하지 않는다. 김치삼은 황해도 벽성군에서 태어났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교원 양성소에 차출되었다가 구월산 부대원인 형을 따라 월남한다. 그는 구월산에서 고왕만을 만나 친구가 되고, 휴전 후 고향 친지의 소개로 고아원에 들어간다. 그는 고아원 원장의 형님이 경영하는 고등학교에 장지황과 함께 편입을 한다. 그는 출판업을 하는 매형을 만나 그의 일을 거든다. 장지황은 장씨 집안의 종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휴전 후 일본으로 밀항해 버렸으며, 그의 작은할아버지가 그를 키우고 있었다. 그는 일류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그 곳의 상류 사회풍이 지겨워 스스로 자퇴하다시피 하여 학교를 그만둔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권고로 다시 사립 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는 거기에서 김치삼, 고왕만을 만나게 된다. 그 후, 장지황은 시나 소설을 쓰며, 학교 대신 명동을 드나들다가 연상의 여인을 알게 되지만 그만둔다. 그는 서울내기답게 여러 문제에 대해 조숙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치삼과 마찬가지로 장지황이 체험하고 얻어 낸 것들은 진한 고뇌의 흔적이 배어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성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는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그 문화적 계승만이 그를 허무와 절망에서 구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결국 고왕만은 최만택의 밑에 들어가서 다동 일대를 누비며 주먹 세계에서 조직 관리를 맡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최만택으로부터 푸짐한 저녁 대접을 받고 그로부터 암살 지령을 받자, 그 하수인으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을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그리고 전쟁 이후 사회 현실과 인간적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생활을 꿈꾸며 주먹 세계를 버리고 사학도(史學徒)가 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1950년대 한국의 정치 현실
◎ 주제 : 부패한 사회 현실에서 개인의 삶의 대응 방식과 통찰
3. 등장 인물
◎ 고왕만 : 주인공.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정치 폭력의 하수인에서 사학도가 됨.
◎ 김치삼 : 황해도에서 월남한 고왕만의 친구. 부엌 아궁이를 고친다.
◎ 장지황 : 고왕만과 김치삼이 편입하려던 학교에서 만난 친구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주인공 고왕만을 통해 한 사회의 어두운 정치 현실에서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등장하는 세 인물은 50년대 전반부를 산 주변인의 전형으로서 저마다 행동주의, 체험주의, 그리고 문화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세 인물들은 저마다 개방성을 그 장점으로 갖고 있어, 의식이 단순하게 갇히지 않고 서로를 통해 확대된다. 이처럼 자기 확대를 가능케 한 것은 저마다 가슴에 들어 있는 유토피아에의 꿈 때문이다. 작가 박태순은 미국 단편 소설 이론가들이 만들어 놓은, 닫힌 소설의 미학에 반발하여 소설이 소설 본래의 모습, 즉 무엇이든지 받아들여 소화시키는 라블레의 소설이나 판소리 같은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해방되기를 바랐다. 좋은 소설이 되려면 새로운 문학사적 사실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낡은 틀을 과감히 부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미리 밝혀 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아니 차라리 작가는 먼저 이렇게 말해 두고 싶다. 지금부터 소설을 시작한다.” 라는 서두답지 않은 이 작품의 서두(序頭) 역시 낡은 틀의 파괴 작업처럼 보인다. 즉, 서두에서 작가는 “서두는 참으로 서두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서두답지 않은 서두도 쉽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 한 오 백년
1. 줄거리
주인공 윤지노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외촌동에 들어가게 된다. 고인이 된 정여철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도 당시 여동생이 사귀고 있던 뽀빠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건달인 뽀빠이는 윤지노의 동생을 유혹해서 동거 생활에 들어갔지만, 윤지노의 예상대로 너무도 빨리 갈라섰고, 보름 전에는 여동생 지후가 갑자기 갓난아이를 데리고 나타나 윤지노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윤지노는 이제 뽀빠이를 만나면 동생이 낳은 딸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하도록 한 후, 자신은 여동생이 최소 한도의 생존을 할 수 있도록 직장을 잡아 주면 그것으로 오빠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윤지노는 외촌동행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 소란을 피우는 뽀빠이 일행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의 무허가 판잣집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여동생 지후를 발견하고는 감추어져 있던 치부를 본 것처럼 어색해 하며 불안에 싸인다. 윤지노는 뽀빠이와의 대화 속에 증오감을 느끼지만, 곧 정여철의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어섰다. 정여철은 작년 오늘 밤, 외촌동 사람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외촌동 사람들은 다섯 번이나 지신(地神)에게 무당굿을 했다고 한다. 뽀빠이는 그 동안 있었던 굿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외촌동에 지신이 있다면 노할 만도 하겠죠. 그러나 노해 봤자 별거 있겠어요? 한 오 백년 살자는 데 웬 성화냐 이런 말이예요. 미친 사람이야 미쳤으니 죽어 버린 거고, 아직 덜 미친 사람은 덜 미쳤다는 걸 즐거워하면서 신나게 술이나 마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정여철의 집에 다다르지만 이미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맥없이 돌아선다. 윤지노는 밤새껏 영업한다는 술집에서 뽀빠이 일행과 술을 마신 후, 뽀빠이와 그 일행이 잠들자 그는 자작 자음(自酌自飮)을 하면서 밤을 새운다. 멀지 않아 날이 밝으면 첫 버스를 타고 이 외촌동을 벗어날 것을 생각하면서……. 윤지노는 뽀빠이와 여동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술집을 나오며 지노는 자기가 외촌동 사람인 것을 기억한다면 얼마든지 살아낼 수 있음을 느낀다.
2. 핵심 정리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서울 변두리의 빈민촌인 외촌동
◎ 주제 : 빈민촌의 가난한 삶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 의식의 추구
3. 등장 인물
◎ 윤지노 : 불구자. 가난을 극복하여 자수 성가한 인물
◎ 뽀빠이 : 윤지노의 여동생과 동거하다 헤어진 건달
4. 이해와 감상
박태순의 작품 밑바닥에는 짙은 실향민 의식이 앙금처럼 깔려 있는데, 이는 그의 작품들이 다분히 그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작품인 “연애”나 “정처”에서도 예외가 아니지만, 그의 작중 인물들은 거의가 간절한 귀소(歸巢) 의식을 지닌 채 삶의 정서나 생활의 본거지를 잃고 마냥 헤매는 군상들이다. 이는 아무래도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에 피난민 가족으로 월남하여 각지를 전전하며 겪었던 가난과 소외감, 실향감 내지 열등 의식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 “한 오백년”을 통해서 빈민촌 사람들의 의식을 뽀빠이라는 건달에게 나타나게 했고, 제목에서 보듯이 그런 대로 한 오 백년을 살고자 하는 소박한 빈민촌 사람들의 심정을 읽고 있다. 또한 주인공 윤지노는 가고 싶지 않았던 외촌동이었지만 끝내는 자기가 속한 곳은 외촌동임을 느끼며 삶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 된다. 이는 고향에로의 회귀이며, 인간 본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 오백년”은 빈민촌 일가의 생활을 리얼하게 그려내면서 고향으로의 회귀 의식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는데 소설적 의의를 갖는다.
박태원(1909~1987) |
소설가. 필명 몽보(夢甫)․구보(丘甫)․구보(仇甫)․구보(九甫)․박태원(泊太苑). 서울 출생. 경성제일고보, 도쿄[東京] 호세이[法政] 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시 “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 <신생(新生)>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반계급주의 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 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 씨의 1일”, “천변 풍경(川邊風景)”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 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 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 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일제 강점기 말에 발표한 “우맹(愚氓)”, “골목 안”, “성탄제” 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작가 의식의 전환을 꾀한 바 있고, 6․25 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李泰俊)․안회남(安懷南)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서술된 작품 외에 단편 소설 “사흘 굶은 보름달”, “애욕”, “5월의 훈풍”, 장편 소설 “태평성대”, “군상(群像)” 등이 있다.
▶ 소설가 구보(仇甫) 씨의 일일(一日)
1. 줄거리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스물여섯 살의 구보는 정오에 집을 나와 광교, 종로를 걸으며 귀도 잘 들리지 않고 시력에도 문제가 있다는 신체적 불안감을 느낀다. 무작정 동대문행 전차를 타고는 전차 안에서 전에 선을 본 여자를 발견한다.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다가 그녀가 전차에서 내리고 난 후 후회한다. 혼자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자기에게 여행비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독을 피하려고 경성역 삼등 대합실로 가나, 오히려 온정을 찾을 수 없는 냉정한 눈길들에 슬픔을 느끼며, 거기서 만난 중학 시절 열등생이 예쁜 여자와 동행인 것을 보고 물질에 약한 여자의 허영심을 생각한다. 다시 다방에서 만난 시인이며 사회부 기자인 친구가 돈 때문에 매일 살인․강도와 방화 범인의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애달파하고, 즐겁게 차를 마시는 연인들을 바라보면서 질투와 고독을 동시에 느낀다. 다방을 나온 구보는 동경에서 있었던 옛사랑을 추억하며 자신의 용기 없는 약한 기질로 인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또 전보 배달의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오랜 벗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고 싶다는 생각에 젖는다. 그리고 여급이 있는 종로 술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정신병자로 간주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하얀 소복을 입은 아낙이 카페 창 옆에 붙은 ‘여급 다모집’에 대하여 물어 오던 일을 생각하고 가난에서 오는 불행에 대하여 생각한다. 오전 두 시의 종로 네거리, 구보는 제 자신의 행복보다 어머니의 행복을 생각하고 이제는 어머니가 권하는 대로 결혼을 하여 생활도 갖고 창작도 하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향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중편 소설, 심리 소설
◎ 배경 : 시간(1930년대 어느 하루) / 공간(서울의 거리) / 현실적 공간(서울에서의 하루) / 의식의 공간(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소년기 - 동경 유학 시절)
◎ 성격 : 세태 소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구성 : 이 작품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일반적인 소설의 구성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다만, 외출해서 전차 안 → 다방 → 거리 → 술집 그리고 귀가까지의 작중 화자의 관찰과 심리가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 주제 : 1930년대 무기력한 문학인의 눈에 비친 일상사
◎ 출전 : <조선중앙일보>(1934)
3. 등장 인물
◎ 구보 : 외출에서 귀가까지의 관찰의 주체로서 소설가이다.
◎ 어머니 : 구보의 어머니이며 아들의 늦은 귀가와 결혼을 염려한다.
4. 이해와 감상
박태원이 자신의 창작 방법론을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ie - 현대적 일상 생활의 풍속을 면밀히 조사 탐구하는 행위)이라 했는데, 이를 적용시킨 작품이 바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다. 이 작품은 1934년에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던 중편 소설인데, 민족 항일기에 문학을 하는 지식인의 무기력한 자의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심리주의 작가로 알려진 이상(李箱)이 ‘하융’이란 필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 소설은 박태원의 생활을 반영한 그의 자전적 소설로, 발표된 직후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주인공인 ‘구보(仇甫)’가 집을 나서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집 → 천변길 → 종로 네거리 → 화신 상회 → 전차 안 → 조선 은행 앞 → 다방 → 거리 → 경성역 → 조선 은행 앞 → 다방 → 거리 → 다방 → 거리 → 식당 → 거리 → 다방 → 거리 → 술집 → 카페 → 종로 네거리 → 집) 하루 동안, 길거리에서 만나게 된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반응하고 있는 구보(仇甫)의 의식 세계가 주요 내용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정한 의식의 기분에 의해 통일된 입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도중에 우연히 부딪히게 되는 단편적인 사실들에 의해 촉발되는 두서 없는 생각들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특별한 목적 없이 외출하여 걷고 다방에 들어가고 벗을 만나고 하는 구보(仇甫)의 행동이 아니라, 일상성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주인공 구보의 의식의 추이와 그것을 서술하고 있는 서술 양식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전통적인 소설 장르에서 중시하는 사건이나 행위, 갈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구보의 지각과 의식의 유동뿐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공간은 스물여섯 살 구보의 서울에서의 하루이지만, 의식의 공간은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소년기에서 동경 유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있다. 따라서, 플롯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 구조가 약화되어 있는 반면,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의식의 추이에 대한 서술이 강화되어 있다. 이 소설은 1930년대 문학인의 일상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당시 문학인의 의식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탄제”, “비량” 등의 단편 소설들에서 인물의 심리를 면밀하게 탐구하던 것과 장편 소설 “천변 풍경(川邊風景)”에 나타나는 철저한 관찰적 방법과의 혼재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중편 소설이란 점에서, 박태원의 작품 변모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작품이다.
▶ 천변 풍경(天邊 風景)
1. 줄거리
일정한 줄거리는 없다. 1년 동안 청계천 변에 사는 약 70여 명의 인물들이 벌이는 일상사가 그 주된 내용이다. 민 주사, 한약국 집 가족, 포목전 주인을 제외한 재봉이, 창수, 금순이, 만돌이 가족, 이쁜이 가족, 점룡이 모자(母子) 등은 모두 청계천 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점룡이 어머니, 이쁜이 어머니, 귀돌 어멈을 비롯한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터에 모여 수다를 떤다. 이발소 집의 사환인 재봉이는 이런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민 주사는 이발소의 거울에 비친 쭈글쭈글 늙어 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짓지만, 그래도 돈이 최고라는 생각에 흐뭇해한다. 여급 하나꼬의 일상, 한약국 집에 사는 젊은 내외의 외출, 한약국 집 사환인 창수의 어제와 오늘, 약국 안에 행랑을 든 만돌 어멈에 대한 안방 마님의 꾸지람, 이쁜이의 결혼, 이쁜이를 짝사랑하면서도 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점룡이, 신전집의 몰락, 민 주사의 노름과 정치적 야망, 민 주사의 작은집인 안성집의 외도, 포목점 주인의 매부 출세시키기, 이쁜이의 시집살이, 민 주사의 선거 패배, 창수의 희망, 금순이의 과거와 현재, 기미꼬와 하나꼬의 여급 생활, 금순이와 동생 순동이의 만남, 하나꼬의 시집살이와 이쁜이의 속사정, 재봉이와 젊은 이발사 김 서방의 말다툼, 친정으로 돌아오는 이쁜이, 이발사 시험을 볼 재봉이 등으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세태 소설
◎ 배경 : 시간(1930년대 어느 해 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 공간(청계천 변을 중심으로 한 서울)
◎ 성격 : 모더니즘 계열
◎ 의의 : 세태 소설 혹은 경아리(서울) 문학의 대표작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특히, 카메라 아이(eye)의 기법이 돋보임.
◎ 구성 : 이 작품 역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마찬가지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전통적인 구성 방식을 따르지 않고 다만, 청계천 변을 중심으로 사는 많은 인물들이 여기저기에서 벌이는 여러 가지 유형의 일상사들이 작가에 의해 세밀하게 관찰될 뿐이다.
◎ 제재 : 청계천 변을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일상 생활
◎ 주제 : 1930년대 서울 중산층과 하층민들의 삶과 애환
◎ 출전 : <조광>(1936~1937)
3. 등장 인물
7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소설에는 특정한 주인공이 없다.
◎ 재봉이 : 열대여섯 살 가량의 이발소 사환. 이발소와 빨래터 골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상세히 목격함.
◎ 민 주사 : 재력 있는 50대의 사법서사. 안성집과 취옥의 사이를 오가며 주색 잡기(酒色雜技)에 골몰함.
◎ 하나꼬 : 스무 살의 카페 여급. 손 주사, 금은방 주인, 강 서방 등의 표적이 되어 있는 여인
◎ 이쁜이 : 천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했으나 친정으로 쫓겨남. 점룡이가 짝사랑한 인물
◎ 금순이 : 순박한 시골 색시로 가족들과 헤어져 기미꼬, 하나꼬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
◎ 만돌 어멈 : 포악한 남편과 사는 행랑어멈
◎ 창수 : 꾀 많은 한약국 집 사환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36년 8월부터 10월, 1937년 1월부터 9월까지 <조광>에 연재한 박태원의 대표적 장편 소설이다. 기교 작가나 모더니즘 작가로 평가되기도 하는 박태원은 이 소설을 통하여 단순하고 미묘한 것까지도 가장 풍부하고 흥미 있게 이야기해 줌으로써 작가적 역량을 확인시켜 준다. 청계천 변에 사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나열로 된 이 소설은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작가 박태원의 대표작이다. 당시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인 도시성(都市性)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세태 소설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이 작품은 2월 초부터 다음해 정월 말까지 1년 간 청계천 변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서민의 생활 모습을 50개의 절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7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다양한 삶의 생태와 음영을 드러내므로 특정 주인공은 없다. 이는 이 소설이 특정 화자에 의하여 서술되지 않았으며, 다양한 서술 양식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설의 구심점을 잃기 쉬운 이 소설은 삽화적 이야기를 다중화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영화에서 쓰이는 카메라 아이(eye)의 기법을 통해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줌으로써 시간성과 공간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작가는 이를 여인들의 집합소인 빨래터와 남성들의 시교장인 이발소를 중심으로 초점화 시킴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 양식과 생태를 재현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행랑살이 어멈, 신전 주인, 이발사, 포목전 주인, 한약국과 양약국 주인, 부의회 의원, 사법 서사, 금은방 주인, 카페 여급, 기생, 미장이, 첩, 여관 주인, 당구장 보이, 아이스케이크 장수, 전매청 직원, 공장 노동자 등 1930년대 서울에 거주하던 각종 직업의 인물들이 모자이크식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에는 실제의 거리와 지형, 동명, 건물들과 같은 도시의 물리적 사실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으며, 전통적인 인습과 근대적인 문물이 혼재(混在)되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세태 소설이라는 평가나 도시 소설이라는 논의는 세태나 도시의 풍속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세밀한 세태의 묘사를 통하여 당대적 진실을 추구하려 한 작가 정신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피로
1. 줄거리
‘나’는 다방 안에서 글을 쓰다가, 창틀에 매달려 안을 엿보는 소년을 발견하고 상념에 빠진다. 그러다가 앞에 앉은 사내 서너 명의 청년들이 조선 문단의 침체를 비판하는 것을 듣고는 거리로 나온다. 그들은 춘원과 이기영 그리고 백구와 노산 시조집을 들먹이며 온갖 문인들을 통매하고 있다. M 신문사 앞에 이른 ‘나’는 누구를 만나 보고 갈까 망설이다가 수부 앞에 놓인 면회인 명부에 여러 가지 기록해야 될 것을 생각하고는 돌아선다. D 신문사 앞에 이르러서는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가 시계를 보고 전화를 걸기로 한다. 그러나 내가 찾는 편집국장은 자리에 없었다. 사내에는 있지만 자리에는 없다는 편집국장의 행방 불명을 생각하며 거리로 나와 배회한다.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향하지만, 노량진에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면서 암담한 현실과 인생의 피곤함을 절감한다. 한강의 삭막한 겨울 풍경을 보며 우울해진다. 한강 다리를 놓아두고 다리 밑 얼음 위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또 다른 것을 연상한다. 다시 낙랑 다방 안으로 돌아와 엔리코 카루소의 엘레지를 들으며 미완성인 원고를 생각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세태 소설, 심리 소설
◎ 배경 : 시간(1930년대 어느 오후 반나절) / 공간(다방 안과 서울 거리)
◎ 경향 : 모더니즘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표현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원형
◎ 구성 : 추보식 구성. 전통적인 소설의 구성 단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님.
발단 - 외출하는 ‘나’
전개 - M 신문사와 D 신문사에 들름.
위기 -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감.
절정 - 한강의 삭막한 겨울 풍경
결말 - 다방으로 돌아옴. 미완성 원고를 생각
◎ 제재 : 소설가의 일상사
◎ 주제 : 일제 하의 도시 공간에서 빚어지는 잡다한 삶의 별리 현상과 현실적 피로
◎ 출전 : <여명>(1935)
3. 등장 인물
◎ 나 : 작중 화자이며 주인공인 스물 다섯 살의 소설가이다.
◎ 노마 : 열다섯 살 먹은 낙랑 다방의 종업원이다.
◎ 교환수 : D 신문사의 전화 교환수로 ‘나’의 질문에 사무적으로 대답할 뿐이다.
4. 이해와 감상
‘어느 반일(半日)의 기록(記錄)’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서술자인 소설가 ‘나’의 하루 반나절의 생활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은 ‘나’가 거리로 나와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초기작 “적멸”과 연장선상에 놓이지만, 현실을 매개로 다양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후기 소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작품은 고현학(考現學)의 창작 방법을 통하여 심리 소설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이듬해인 1934년에 발표된 박태원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원형이 된다. 전체적인 내용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마찬가지로 소설가의 일상적인 하루의 일과이다. 이 작품의 ‘나’ 역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와 마찬가지로 허구화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 박태원 자신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 역시 박태원의 자전적인 요소가 농후하다. 춘원과 이기영, 그리고 노산의 실명이 나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게다가 작품의 배경이 박태원과 이상(李箱)이 즐겨 찾았다는 다방 ‘낙랑’이고, 주인공인 ‘나’가 현대 예술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보이는 소설가로 설정된 것은 모두 자전적인 요소와 직결되는 것이다. 1930년대 당시 ‘구인회(九人會)’ 동인이면서 신문사 학예란을 담당하고 있던 기자들과 룸펜 문인들(박태원, 이상, 김유정 등)은 도심을 배회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는데, 그들이 매일 만나는 장소가 '낙랑 팔라'란 다방이었다. 이 곳은 193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층의 집합소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시 도회의 세련된 취미를 즐기던 모더니스트들이 특히 이 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작품 속의 ‘나’의 행위는 다방에서 나와 거리를 걷다가 신문사에 들르고, 버스를 타고 노량진까지 갔다가 다시 다방으로 돌아오는 것, 즉 거리에서의 배회뿐이다. 이를 ‘여로형(旅路型) 소설’이라 하는데, 이러한 배회는 철저히 무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배회를 통하여 ‘나’가 인식하는 현실은 ‘피로’일 뿐이다. 다방 안, 거리, 버스 안, 한강에서 느끼는 나의 정서는 ‘피곤함’의 연속이다. 그 피곤함의 원인이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품의 끝 부분에 이르면 ‘나’의 암울하고 피곤한 심사가 식민지 현실이라는 당시의 보편적 상황과 직결되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또한,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서사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태원의 초기 소설은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갈등과 인과적인 사건 전개가 약화되는 반면, 작중 인물의 내면 세계에 대한 섬세한 반응과 묘사가 강화되어 있다. 구체적인 사건 없이 인물의 내면 의식 탐구에 주력함으로써, 서사성이나 사건의 추이를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소설에서 벗어나 있다.
서기원(1930~) |
서울 출생. 서울대 상대 중퇴. 1956년 <현대문학>에 “안락사론”과 “암사 지도”가 추천되어 등단함. 그는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공간에서 느끼는 절망, 고통, 부조리, 죽음 등의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보다 궁극적으로 탐구하려 한, 예리한 시대적 감수성을 드러낸 작가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전쟁에서 취재한 것, 사회 현실의 경제적․정치적․소시민적인 소재와 역사적인 소재를 다룬 세 가지 면으로 볼 수 있으며 현실 의식과 그 실천적 의지를 보여 주는 리얼리즘 문학을 지향하고 있다. 단편 연작 소설인 “마록열전”은 역사적인 인물을 가탁 우의화 하여 현대의 사회적 모순을 지탄하고 있으며 “이조 백자 마리아 상”은 이조 말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당시 카톨릭의 포교 과정을 밀도 있는 리얼한 문장으로 그린 작품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전야제”, “연가”, “마록열전”, “혁명”, “아리랑”, “이조 백자 마리아 상”, “왕조의 제단” 등이 있다.
▶ 암사 지도(暗射 地圖)
1. 줄거리
상덕과 형남은 대학 재학 중에 군에 갔다가 제대한 사람들이다. 전투에서 전멸하다시피 한 소대에서 살아남은 두 젊은이는 전쟁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모두 잃어버렸다. 형남은 우연한 기회에 상덕을 만나 그의 집에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상덕의 집에는 역시 갈 곳이 없어 영화관 앞에서 방황하던 윤주가 상덕과 동거하고 있었다. 얼마 후 형남은 극장의 광고 간판 그리는 직업을 얻어서 생활비에 보태게 되었다. 그러나 상덕은 다니던 학관이 폐쇄되는 바람에 직장을 잃게 된다. 그 후 상덕은 생활을 형남에게 아예 맡기고 자신은 바둑으로 소일하며 술 주정하는 일이 잦아졌다. 윤주의 미모에 매력을 느끼던 형남은 상덕의 권유로 윤주를 공유(共有)하게 된다. 필연적인 동기나 구체적 이유, 가령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도 없이 무질서하게 살아가는 셋 사이에 윤주가 아이를 가지게 됨으로써 전환이 이루어진다. 즉,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세 사람은 심한 의견 차이를 가지고 대립이 극대화된다. 상덕은 아이에게 별 미련을 두지 않지만 형남은 아이를 빌미로 윤주와 딴 살림을 차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윤주는 아버지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아기일 뿐이라는 이유로 집을 나간다.
2. 핵심 정리
◎ 배경 : 가치 질서가 혼란한 전후(戰後) 사회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전후(戰後)의 무질서한 현실과 전도(顚倒)된 가치관에 대한 비판
3. 등장 인물
◎ 형남 : 미술대학 재학 중 군에 입대함. 전후의 혼란한 가치관을 지닌 전형적 인물
◎ 상덕 : 형남의 친구. 법대 재학 중 군에 입대함.
◎ 윤주 : 형남, 상덕과 동거한 처녀. 아비도 모르는 애를 갖게 되어 집을 나감.
4. 이해와 감상
“암사 지도”는 서기원의 전반기 소설들이 가지는 작가 의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기존 질서는 무너지고 폐허가 된 땅 위에 오직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 되는 인간 즉, 되는 대로 살아가는 절망적 인간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을 말한다. 이 “암사 지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지붕 아래에서 공동 생활을 하고 있는 상덕과 윤주 그리고 형남의 무질서한 관계를 기본 구도로 하고 있다. 이 세 사람이 동거하며 벌이는 성관계를 굳이 매음(賣淫)이라고 단정짓는 윤주의 앙칼진 말 속에는, 전쟁 속에서 무너진 질서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전쟁 세대의 의식이 들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후, 무너진 그 집을 벗어나는 윤주의 행동은 새 세대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짙은 허무주의에 물든 이들은 어떠한 가치 체계도 인정하지 않는 윤리 의식을 가지고 생활의 타성과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 서기원의 문학은 6․25라는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정신적 피해 의식을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전후 작가에게 있어서 한국 전쟁이란 국소적 의미로 끝나지 않고 인간 사회의 비극이란 개념으로 확대 발전되어 왔다. 그것은 서기원의 문학에서 다루어지는 전쟁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윤리적 파탄과 인간성 상실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정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성숙한 밤의 포옹
1. 줄거리
늙은 기관차는 유리창마다 성하지 못한 객차들을 폐물이 되어 버린 혁대처럼 주체스럽게 달고 고개를 기어 올라 가고 있다. 기관차가 굴 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석탄 냄새가 M1 소총의 화약 냄새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연인인 상희가 폐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탈영을 했다. 탈영 도중에 만난 어느 여인을 입막음하기 위해 죽이고 이 기차를 탄 것이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리자, 불현듯 산에서 내가 죽인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과 상희의 얼굴이 한데 겹쳐져 확대되어 눈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얼마 동안 기계적으로 계속 걷다가 상희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상희의 집에 들어서기가 무서워 의식적으로 그녀의 집 앞을 지나쳐서 창녀촌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구란 룸펜을 알게 되어 그의 집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선구는 남다르게 보이기 위해 빈 병에 오줌을 누는 습관을 가졌다. 어느 날, 선구의 집에 진숙이란 창녀가 다녀가면서 선구에게 동반 자살을 부탁한다. 선구는 자학적인 억지 웃음을 짜내면서, “만일 갈보년하고 함께 자살했다고 하면 남들이 비웃겠지?” 하고 물었다. 나는 나른한 졸음이 몰려와 침대 위에 누웠다. 잠 속에서 전쟁을 회상한다. 나는 아군의 참호 밖에서 얼마 안 떨어진 소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전우들의 죽은 시체들 위에 꽃송이라도 얹어 주고 싶었으나, 소대장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벽장문에 걸린 누더기 같은 군복을 입었다. 무거운 군화는 휘청거리는 무릎에 매달려 간신히 끌리었다. ‘상희야, 너한테 가서 내가 지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너의 뚫어진 허파에서 마지막 핏덩이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나는 결국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애인인 상희를 찾아 나선다.
2. 핵심 정리
◎ 배경 : 전쟁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제 : 전쟁의 부조리한 생활과 가치관의 전복(顚覆)
3. 등장 인물
◎ 나 : 전쟁 중의 탈영병. 상희를 사랑하지만 열등감으로 무기력하게 숨어 살다가 자살을 기도하나 실패하자 다시 상희를 찾아감.
◎ 선구 : ‘나’가 창녀 집에서 만난 룸펜. 선구의 집에서 ‘나’가 숨어 지냄.
4. 이해와 감상
1960년 <사상계>에 발표된 “이 성숙한 밤의 포옹”은 무기력감을 안고 숨어 지내는 탈영병, 자살하고 싶어하는 창녀 등의 낙오자들을 통해서 인간성 상실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 전후(戰後) 문학 작품이다. 이는 전쟁 상황 속의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인간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삶과 고뇌를 다룬 것이다.
서정인(1936~) |
소설가. 교수. 전남 순천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하버드대 영문학과 수학. 1962년 신인상에 “후송(後送)”이 당선되어 등단. 절제된 문장, 긴밀한 문장, 상징 또는 환상적 기법을 통하여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뇌와 인텔리의 속물화와 좌절감을 인상적으로 표현함. 대표작으로 “강”, “달궁” 등이 있다.
▶ 강(江)
1. 줄거리
김씨와 이씨는 박씨네 하숙생들이다. 셋은 버스를 타고 혼삿집으로 가고 있다. 박씨는 군대 기피자였고,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을 사직한 처지다. 그의 곁에는 살찐 젊은 여자가 앉아 있다. 늙은 대학생 김씨는 외투 속에 웅크린 채로 진눈깨비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자기만의 상념에 빠진다. 세무서원 이씨는 여 차장의 엉덩이가 크다고 생각하며 그녀와 유쾌하게 노닥거린다. 박씨는 옆의 살찐 여자와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녀는 술집 작부다. 이들 셋과 여자는 같은 곳에서 하차한다. 밤늦게 혼삿집을 다녀온 세 남자는 거나하게 취해 버린다. 박씨와 이씨는 낮에 만났던 작부의 술집으로 가고, 김씨는 혼자 여인숙에 눕는다. 침구를 가지고 방에 들어온 여인숙 집 아이는 반장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붙이고 있다. 아이는 일등을 했다고 자랑한다. 아이를 보내며 김씨는 과거를 생각한다. 동네의 천재였던 아이가 가난과의 싸움에서 피곤한 낙오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떠올린다. 밖에는 눈이 쌓이고 김씨는 잠이 든다. 술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진다. 이씨가 여자의 손목을 잡아끈다. 술집 여자는 이씨 품에 안겨 김씨가 대학생이라는 말을 유심히 듣는다. 여자는 밖으로 나와 옆집 여인숙의 사립문을 열고 불이 켜져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김씨는 새우잠을 자고 있다. 여자는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 주고 베개를 바로 해 주고는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대학생! 하고 뇌까린다. 그녀는 남폿불을 끈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60년대) / 공간(눈 내리는 겨울의 시골 ‘군하리’)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문체 : 간결체
◎ 어조 : 과거의 삶을 회상하며 꿈을 되찾고자 하는 비감(悲感)어린 분위기
◎ 구성
발단 - 버스 안. 혼삿집에 가는 세 사내와 그들과 동석한 술집 여자
전개 - 그들의 회상 속에 인간적 면모가 암시되며 각자의 기질이 드러난다.
갈등 - 늦게 혼삿집에 다녀온 그들은 술집에 모인다. 김씨는 삶의 낙오자임을 되뇐다.
절정 - 홀로 여인숙에 든 김씨. 공부 잘하는 소년을 통해 삶의 전락 과정을 회상한다.
결말 - 신부의 꿈을 꾸는 술집 여인은 대학생 김씨에게 순수한 사모의 감정을 지닌다.
◎ 주제 : 삶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소시민적 비애
◎ 출전 : <창작과 비평>(1968)
3. 등장 인물
◎ 김씨 : 늙은 대학생. 가난 때문에 좌절을 맛본 이상주의자. 지금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박씨 : 전직 초등학교 교원. 이씨의 하숙집 주인. 세상을 자기 식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나 그 행동이 페이소스(pathos)를 지닌다.
◎ 이씨 : 세무서 주사. 농담을 즐기며 멋을 잘 부임. 속물 근성이 다분하다.
◎ 여자 : 술집 작부. 버스에서 세 사내를 만난다. 신부의 꿈을 꾸는 여자다.
4. 이해와 감상
1960년대 ‘군하리’라는 시골에 눈이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간결한 문체로 잔잔하게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김씨는 늙은 대학생으로 점차 자신감을 잃어 가는 인물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꿈을 잃어버리고 소시민이 되어 가며, 그 소시민은 자신의 소시민성을 감추기 위해서 허풍, 오기 따위의 위선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여인숙에서 만난 공부 잘하는 소년 - 반장 표찰을 붙인, 조금은 뻔뻔스러운 소년을 통해서 그러한 깨달음을 확인한다. 박씨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둔 사람인데, 제 나름대로 삶을 즐기고 있다고 자부하나 서서히 자신감을 상실해 감을 감추지 못한다. 세무서 주사 이씨 역시 일상을 유쾌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가 드러내는 속물 근성은 소시민적 페이소스(pathos)를 심화시킬 뿐이다. 이 소설의 백미는 후반부에 표현된 술집 여자의 태도이다. 그녀는 버스에서 세 사내를 만난 후 혼삿집까지 따라 갔다가 박씨, 이씨와 어울려 술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대학생’이라는 말에 자극되어 옆집 여인숙에 투숙한 김씨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를 작가는 해명하지 않는다. 그저 김씨가 대학생이라는 상황 설정뿐이다. 이것은 아마 그녀의 신분적 열등감이 대학생 사모라는 보상책을 통하여 아름다운 만남을 한 순간이나마 얻으려는 꿈꾸는 자의 행위이리라. ‘대학생’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으며, ‘술집 여자’는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 보호자의 입장에서 대학생과 한 방에 드는 것이다. 방금 전 그녀가 꿈꾸었던 눈 오는 밤의 신부가 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그 신부와 같은 첫날밤을 대학생과 함께 하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특히 ‘대학생’과 ‘술집 작부’의 만남은 특히 그녀에게는 우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 놓은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란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이 그녀가 찾았던 꿈이 결코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얘기해 준다. 그리고, 세 사람이 시골 혼삿집을 찾아가는 버스 속 풍경과 잔치가 파한 후 시골 술집에서 벌이는 수작의 정경이 처음과 끝을 이루는 “강”의 세계는 절제와 압축이라는 고전적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작가는 더없이 간결한 필치로 단숨에 인물과 장면의 핵심 속으로 독자를 데려가는데, 그렇게 해서 독자의 가슴에 흐르게 하는 것은 인간이란 거창한 파국에 의해서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불행의 연속으로 해서 시들어 버린다는 비극적 인식이다. 무의미한 일상의 풍경을 제시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추측에 ‘지혜’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무료하고 안타까운 풍경 뒤로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 실존의 보편적인 비애가 압축되어 나타난다. 수재에서 열등생으로 추락하는 퇴색된 허무와 쓸쓸함, 인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작품과 박재삼의 詩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깊은 내용적 상관성을 가진다. 그 시에서 화자는 1연에서는 슬픔에 대한 여린 감성과 설렘을 보이고, 2연에서는 자신의 감상적인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다 3연에서 인생의 흐름을 발견한다. 깊은 계곡의 물에서 조금 큰 물줄기, 강물, 그리고 바다에 이른 강물에서 인생의 세월을 보게 되는 것이다. 소설 “강”에서 삶의 과정이란 아름다운 꿈들이 상실되고 초라한 현실만이 확인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깊은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달궁
1. 줄거리
이 작품은 ‘인실’이란 여인의 삶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소설의 내용 중 일부분이고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은 여러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인실’의 삶에 관련된 많은 등장 인물들의 삶을 ‘인실’의 삶에 종속시키지 않고 각각 독립시켜, 그리고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펼쳐 보인다. 따라서, 이 작품의 줄거리 요약은 불가능하다.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줄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례로, 소설의 서두에 “네거리”란 제목 아래 한 여자의 죽음이 나온다. 그러나 곧 이어 “모래밭”이란 제목으로 두 처녀를 태워 주는 운전사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등장가”에서는 어느 여자의 넋두리가 나온다. 차에 탔던 두 처녀의 이야기가 “만리포”란 제목 속에, “다시 네거리”란 제목 아래 교통 사고를 처리하는 순경과 이 길을 지나가다 호기심을 보이는 운전사의 대화가 나온다. 독자들은 한참 후에야, 운전사는 지방 검사이고, 그 검사는 두 처녀가 타기 전에 또 다른 여인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주었으며, 그 여인은 횟집 여자이며, 여인이 죽기 전날 밤에 검사가 그 횟집에 들렀고, 검사는 교통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갔는데 죽은 여자가 자신이 태워다 준 여인임을 확인한다. 그렇다고 운전사, 즉 검사를 비롯한 두 처녀가 ‘인실’의 생애에 종속적으로 얽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에피소드가 계속될수록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독립된 줄거리를 형성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연작 소설
◎ 배경 : 시간(현대) / 공간(서울과 전라북도)
◎ 경향 : 사실주의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시점의 이동이 자유로움)
◎ 문체 : 지문과 대화 무시, 간결체와 만연체, 요설적(饒舌的) 문체 등 혼합적임.
◎ 구성 : 이 작품은 전통적인 소설 구성 방식과는 다르다. 비록 ‘인실’이라는 한 여인의 삶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닿아 있기는 하지만, 86개의 에피소드들로써 30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의 독립된 삶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 제재 : 한 여인의 죽음과 여러 군상(群像)의 삶의 모습
◎ 주제 : 여러 인물들의 삶의 궤적(軌跡)을 통한 인생의 참모습
3. 등장 인물
◎ 나 : 이 작품의 서술자이자 관찰자이다.
◎ 인실 : 주인공으로서 작품 속에서 만나는 이들을 작중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비록 ‘인실’이라는 여인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녀만이 주인공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약 3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모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인물들의 삶이 독립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고 30여 명에 이르는 등장 인물들이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독자들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익명성(匿名性)이 강한, 우리 시대의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일 뿐이다.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85년 9월 <한국문학>에 그 첫 번째 묶음이 발표된 이후 <세계의 문학>, <문학사상>, <소설문학> 등 여러 문예지와 종합지를 통해 1989년 12월까지 발표되었으며, 그 첫 권 “달궁”이 1987년에, “달궁 둘”이 1987년에 민음사(民音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된 연작 소설이다. 어찌 보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연작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형식이 특이하다. 이 작품은 소제목이 붙은 수많은 부분들의 집합인데 각 부분은 200자 원고지 10매에서 15매 정도이다. 처음 간행된 단행본 “달궁”의 경우 86개의 에피소드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선적이고 인과적인 줄거리가 없다. 여러 개의 독자적인 줄거리를 조각 내고 또 몇 겹으로 겹쳐서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줄거리 자체를 약화시킨다. 즉, 그 역할을 최소화하여 독자들이 겨우 윤곽만 감지하도록 한다. 달궁(達宮)은 지리산 속의 지명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달궁에서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인실’이란 여자가 세상으로 내려와 헤매는 이야기가 많은 삽화들과 뒤얽혀 있다. 그 무식한 중년 여자의 삶은 쫓겨난 자의 삶이지만, 세상의 부조리, 우스꽝스러움, 뒤틀림과 맞서 있는 힘센 모습이다. 교육이나 제도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은 그 무식한 여자의 ‘싱싱한’ 시각을 통해서 당연한 것으로 행세하는 많은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공식적인 주인공은 ‘인실’이라는 여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인공의 역할을 하지 않고 다만 소설의 중심이 되어줄 뿐이다. 주인공을 ‘주제를 반영하는 인물’이라 정의한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등장 인물 모두이다. 그들 대부분이 익명적(匿名的) 성격을 띠며 게다가 ‘인실’의 삶과 필연적 상관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삶이 ‘인실’의 삶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독립적으로 그려진다. 이와 관련해서 돋보이는 것이 시점의 자유로운 변화와 요설적(饒舌的)인 문체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소설이 매우 자유롭게 ‘열린 형식’임을 실감케 한다.
▶ 원무(圓舞)
1. 줄거리
제1장에서는 기차를 타고 가던 변호사의 딸 임원희가 어떤 사내(탈영병 박일호)가 앞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오기를 느껴 그 사내와 함께 설악산에 가서 1주일을 보내고 돌아온다. 그러나 그 1주일의 여행 후, 다시 학교에 나가면서 원희는 ‘자기의 행동이 승리도 복수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2장에서는 탈영병 박일호가, 자신의 고종 사촌형 집에 간호원으로 있는 순이와 육체 관계를 즐긴다.
제3장에서는 순이가, 자기 동생의 담임이자 시인인 윤두석을 시(詩) 지도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찾아가서 동생을 위해서 육체적인 관계를 갖는다.
제4장에서는 윤두석이 자기 학교의 음악 선생인 정삼화와 짝을 이루게 된다.
제5장에서는 정삼화가 자신의 배우자인 석민의 뒷바라지를 해 주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제6장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뒷바라지를 해 준 정삼화와 헤어진 석민은 변호사의 딸인 임원희와 짝을 이루게 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사회 현실의 격랑 속에서 겪은 개인적 삶의 존재 의식
3. 등장 인물
◎ 임원희 : 변호사의 딸. 기차에서 만난 박일호와 관계를 맺음.
◎ 박일호 : 탈영병
4. 이해와 감상
“원무”는 1969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중편 소설이다. 서정인의 작품은 시점이 한 인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시점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달궁” 연작에서도 인물의 개성적 성격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기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원무”는 이러한 서정인의 소설적 기법을 뚜렷이 보여 주는 작품이다. 또, “원무”는 모두 여섯 명의 인물이 서로 엇물고 돌아가는, 일종의 우연의 결합(혹은 이별)을 드러내는 소설 구조를 보여 준다. 즉, “원무”에서는 인물들이 서로 고리가 되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임원희-박일호 / 박일호-순이 / 순이-윤두석 / 윤두석-정삼화 / 정삼화-석민 / 석민-임원희’ 식의 6쌍의 남녀 관계가 그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6명의 인물이 쌍을 바꾸며 ‘원무(圓舞)’를 추고 있는 형태가 된다. 3인칭 소설로 쓰여진 이 작품에서 화자(話者)는 표면에 나서지 않고 있지만, 끊임없이 작중 인물들의 심리적 추이의 일면을 쫓아감으로써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주관적인 서술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서술은 매우 단편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작중 인물이 작중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탈영병 박일호와 실패한 시인 윤두석 등 6명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적극적인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을 체념의 현실로 파악하게 하는 것은 ‘인생의 핵심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주인공, 혹은 화자의 시점을 그대로 작가의 시점으로 바꿔 놓은 데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서정인이 주인공을 이렇게 제시한다고 해서 그러한 소시민적인 안락의 긍정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의 대부분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소시민적인 인물들은 화자의 시점과 작중 인물들의 시점의 뒤섞임을 통해서 화자의 서술 대상인 동시에 서술의 주체인 화자가 되는 변모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작가가 화자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의식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화는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감정의 개입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선우 휘(1922~1986) |
소설가. 언론인. 평북 정주 출생. 경성 사범 학교 졸업.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역임. 1955년 단편 “귀신”을 <신세계>에 발표하여 등단함. 1957년 <문학 예술>에 그의 대표작 “불꽃”이 당선됨. 이 작품으로 제2회 <동인 문학상>을 수상. 그는 역사에 의한 인간의 체념과 순응을 비판하고 행동적 의지를 그린 작품을 주로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테러리스트”, “불꽃”, “유서”, “아버지”, “깃발 없는 기수”, “싸릿골 신화” 등이 있다.
▶ 불꽃
1. 줄거리
주인공 고현의 아버지는 1919년 3월 서울에서 북으로 백여 리 떨어진 P 고을에서 일어 난 독립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 경찰의 총격으로 죽는다. 현은 유복자로서 아버지가 죽고 나서 아홉 달 만에 태어난다. 목에 혹이 나서 혹부리라고 불리는 현의 할아버지(고 노인)는 P 고을에서 싸전을 경영하며 자기 개인만을 위해 살아왔다. 아들을 잃은 고 노인은 젊은 여자를 재취로 맞아들였고, 며느리인 현의 어머니에게는 현을 놓아두고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의 어머니는 시아버지 말에 따르지 않고 현을 키우며 홀몸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고 노인은 강 건너에 논 몇 마지기와 작은 초가집을 마련해 주어 현의 모자가 따로 나가 살도록 한다. 농사를 짓는 어머니 밑에서 현은 5년제 중학교를 평범하게 마친다. 고등학교나 전문대학으로 진학하는 동급생이 적지 않았으나, 현은 어머니를 도와 농사지을 생각으로 진학을 포기한다. 그러나 2년 뒤, 어머니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현이 일본에서 공부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전선 확대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 본인 학생뿐 아니라 조선인 학생마저 동원해 가기 시작한다. 현도 동원되어 중국 전선으로 나 간다. 하지만 구타와 학대로 얼룩진 군대에 혐오를 느낀 현은 보초를 서다가 어둠을 틈타 탈출한다. 중국 대륙을 헤매 다니던 현은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여학교에서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조 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서 희미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살아 돌아온 기쁨도 잠시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북한의 군대가 남침하게 되고 P고을을 정복했던 것이다. 북으로 넘어갔던 현의 어릴 적 친구 연호는 공산당 골수 분자가 되어 돌아와 현을 설득한다. 그리고는 반동분자를 즉결 처형하는 인민 재판을 벌이고, 현에게 참석토록 권유한다. 인민 재판에 참석한 현은 그 야만성과 무도함에 분노해 총을 빼앗아 처형 집행자를 사살하고 그 옛날 아버지가 죽음을 맞았던 인근 부엉산 산마루 동굴로 피신한다. 연호는 현의 할아버지 고 노인을 앞세워 부엉산을 수색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익만 을 위해 살았던 고 노인은 마지막 순간 자신은 죽더라도 자신의 손자는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동굴에 숨어 있는 현에게 도망가라고 소리를 친다. 결국 고 노인은 연호의 총에 맞아 죽게 되고, 총소리를 들은 현은 동굴에서 뛰쳐나온다. 연호와 현은 서로에게 총을 쏜다. 연호의 총알은 현의 어깨를 스쳐 가고, 현의 총알은 연호의 가슴을 뚫는다. 저 멀리 유엔군의 포성이 가까워지고 있다. ‘현'은 연호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탈출한다. 그는 ‘연호’의 총탄을 맞고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생명의 불꽃을 느끼며, 현실과 정정당당하게 대결하면서 살아 갈 것을 결심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중편 소설, 전후 소설
◎ 배경 : 시간(1919년 3․1 운동부터 6․25 전쟁까지) / 공간(P 고을)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문체 : 박진감이 넘치면서 장중한 맛을 풍기는 문체
◎ 표현 : 내적 독백, 의식의 흐름
◎ 구성 : 역전 구성
발단 - 동굴 속에 피신하고 있는 ‘현’
전개 -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현’
위기 - 공산주의자가 된 ‘연호’를 주먹으로 치고 동굴로 피신함.
절정 - 할아버지의 죽음과 ‘현’의 탈출
결말 -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갖게 되는 ‘현’
◎ 주제 : 부정한 이념에 대한 행동적 저항으로의 결의
◎ 출전 : <문학예술>(1957)
3. 등장 인물
◎ 할아버지 : 조상의 대통을 잇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인물. 숙명론자. 철저한 현실주의자. 아버지와 상반된 인물이다.
◎ 아버지 : 민족적 신념에 불탔던 현실 참여주의자로서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는 인물로 저항적인 인물이다.
◎ 고현 : 할아버지(숙명론)와 아버지(저항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다 현실 참여라는 새 차원의 삶을 시도하는 인물. 아버지 쪽으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 가는 주인공. 우리 민족의 수난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인물로서 소설 후반의 능동적 행위말고는 소극적이며, 우유부단한 면도 있다.
◎ 연호 : 현의 친구로서 혁명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는 열성 공산주의자이다.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분량상 중편 소설에 속하지만, 구성상으로는 3․1 운동부터 한국 전쟁에 이르는 30여 년 간의 세월을 배경으로 주인공 ‘현’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소설적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긴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는 인물은 주인공 ‘현’과 그의 할아버지 고 노인이다. 두 사람은 역사의 격동을 몸으로 느끼면서 실제로 그런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내는, 역사의 산 증인들이다. 그들의 삶의 내용은 결국 지난날 우리의 삶의 한 방식이었고, 그들의 고뇌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면서 동시에 민족의 비애였다. 이 소설은 현대사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의 기록이라 하겠다. 전편이 제1부와 제2부로 나뉘어 있는데, 서사적 내용으로 보면 제1부에서 거의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제2부는 ‘현’과 ‘연호’의 마지막 대결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문단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대부분의 단편 소설이 내면적 심리 묘사에 기운 데 비하여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작품 속에 과감히 수용하여 서사성을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두 가지 인간형(할아버지, 아버지)을 제시하고 그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과도기적 인간형(고현)을 그림으로써 전쟁 직후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현’의 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전근대인으로 모든 화근을 선친의 묏자리가 나쁜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아버지의 저항 정신과 할아버지의 숙명론적 태도 사이에서 방황하던 ‘현’은 일제 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좌우익의 대립과 인민 재판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발견한다. 이때부터 그는 할아버지의 생활 방식이던 수동적 자세를 버리고 아버지의 적극적 태도를 자신의 삶의 지표로 선택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공산주의자 ‘연호’에게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주저하지 않으며 ‘생명의 불꽃’을 느낀다. 따라서, 이 작품의 표제인 ‘불꽃’은 바로 이와 같은 ‘현’의 새로운 생명 의식, 즉 현실 참여로 자기 개혁을 시도하는 새로운 행동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과 고 노인의 경우에 있어서, 의식의 수준 차이는 있을망정 둘 다 새로운 삶에의 희열을 맛본다. 그것은 기존의 왜곡된 삶을 버리고 본연의 가치로 돌아가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이렇게 인물들의 행동 변화에 모아져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꾀하는 주제 의식은, 신념의 행동화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행동주의적 일면을 가지는 것으로,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부르짖는 태도이다. 작품의 힘찬 호흡과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도 이런 행동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불꽃”의 주제 구현
이 작품은 1957년 발표되자 대단한 반응이 일어났으며, 곧바로 선우휘는 동인문학상을 받아 일급 작가의 위치에 뛰어 올랐다. 1957년은 6.25전쟁이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이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의식과 좌절감은 지성인을 비롯한 뜻 있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반성이 작가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작품의 주제로 부각된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불꽃”은 불꽃처럼 강렬한 좋은 소설이다. 그러나 방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지금 시각에서 볼 때 거의 기교가 발휘되지 않았다. 시대를 배경으로 고현과 할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평범한 방법으로 펼쳐 나갔을 뿐이다. 작품에는 주제가 강한 것이 있고, 방법이 강한 것이 있다. 즉 사회 참여적인 요소(운동권 소설, 분단 문학, 사회의 도덕성이나 비리를 파헤친 소설 등)와 인생과 세계의 근원적 문제(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를 주로 다룬 것이 있고 예술적 형상화(김승옥의 소설들)를 주로 한 것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에게 권한이 있다. 선우 휘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주제를 주로 다루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손창섭(1922~) |
소설가. 평양 출생. 1953년 <문예>에 “사연기(死緣記)”, “공휴일”이 추천되어 등단함. 그는 전후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병적 불구의 인간을 그림으로써 전후의 우울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주목되었다. 물질적 결핍과 정신의 황폐함을 통해 소외와 허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작품들을 발표했다. 하나같이 절망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 정신적 이상 인격의 주인공들은,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구자들이다. 외적으로 불구가 아니면 정신적 외상을 입은 자들로 형상화되는데, 모두가 인간의 삶에 대한 모멸에 찬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 “혈서”, “잉여 인간”, “길”, “유맹(流氓)” 등이 있다.
▶ 낙서족
1. 줄거리
독립 투사를 아버지로 둔 박도현은 고향인 평양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내놓으라며 은행을 협박하는 소동을 벌이고 월만(越滿)하려 했으나 실패하는 통에 경찰의 감시가 심해진다. 게다가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의 거처를 알기 위한 일경의 추궁에 못 견디어 박도현은 일본으로 밀항한다. 일본에서 박도현은 하숙 친구인 한상혁을 통해 한상혁의 누이동생 상희를 알게 된다. 상희는 도현에게 있어 존경과 사모의 대상이 된다. 상희 또한 여러 모로 도현을 도와 주게 된다. 한편, 도현은 일본에서도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경찰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조선인 학생의 부당한 퇴학에 분개하여 조선인 학생들의 집단 등교 거부를 주도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려다가 퇴학당한다. 그 후, 경찰을 피해 이리저리 하숙을 옮겨 다니던 도현은 노리꼬를 강간하여 임신시킨다. 하숙집 주인 여자가 도현을 경찰에 고발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 여자도 겁탈로써 복수한다. 이런 일로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도현은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대한 복수라며 자신의 행동을 변명한다. 그 후, 도현은 아버지가 조선에 두 명의 독립군과 함께 잠입했다가 사살 당했다는 사실을 고향 사람 덕기로부터 듣게 된다. 이에 그는 더욱 분개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일본 천황을 죽이고 경찰서를 폭파하려 한다. 그러나 상희의 만류로 도현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하여 자신을 추종하는 병오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2. 핵심 정리
◎ 배경 : 일제 시대, 동경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암울한 시대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적극적 행동과 의지
3. 등장 인물
◎ 박도현 : 독립 운동가의 아들. 행동이 직선적이며 저돌적인 실천주의자
◎ 한상희 : 도현의 애인. 도현을 도우며 그의 단점을 깨우쳐 준다.
◎ 노리꼬 : 도현의 하숙집 딸. 도현의 아기를 갖는다.
4. 이해와 감상
1959년에 발표된 “낙서족”은 일제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독립투사의 아들이라는 부채 의식을 걸머진 한 젊은이의 방황과 시련,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戰後) 사회의 굶주리고 헐벗은 인간 소외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 준다. 이러한 소외된 인간의 삶에 대한 작가적 관심은 전후 사회의 물질적 궁핍과 황량한 사회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자아의 통일과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열등감과 부채 의식에 시달리며 자기의 열등 의식을 보상받기 위해 행동하는 주인공 박도현의 과격하고 돈키호테적인 인생 역정을 다루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기 존대와 억측, 허세를 부리는 박도현과 대조되는 인물로서 상희가 있다. 그녀는 이지적이며 객관적인 판단력의 소유자로서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뿐 아니라 과격한 테러리즘은 결국 자기 파멸의 결과만 낳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박도현이라는 저돌적이고 과격한 인물을 통하여 식민지 사회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삶의 부동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 비 오는 날
1. 줄거리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의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른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은 현재 누이동생 동옥과 1․4 후퇴 때 월남해서 살고 있다. 소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원구 역시 월남해서 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으나, 오히려 친구인 동욱과 동옥의 생활을 걱정한다. 피난지 부산에서 원구는 리어카에 잡화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옥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인물로 왼쪽 다리가 불편한 지체 부자유자이다. 그의 오빠인 동욱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착실한 교인으로 목사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6․25라는 전쟁은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월남 이후 동욱은 미군 부대를 전전하면서 초상화를 주문 받고, 동옥은 집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간신히 꾸려 나간다. 그들은 인가에서 외딴 곳, 황폐한 집에 사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목조 건물조차 그들의 비참한 생활을 나타내고 있다. 동옥이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곳에 사는 것이다. 장마가 진 어느 날 원구가 동욱의 집을 찾아갔으나 동옥의 얼굴에서는 자조적인 웃음밖에 발견할 수 없었고, 오히려 냉담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구는 돌아오다가 동욱을 만나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지붕은 비가 새어 방안에 양동이를 받쳐 놓았는데 빗물이 가득한 것을 버리려다 쏟고 말았다. 그때 물을 피하려 일어나는 동옥을 보고야 동옥이 다리 불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 후 비 오는 날이면 자주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점차 동옥이 원구를 대하는 태도가 좋아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후 동욱은 그의 유일한 생계인 초상화 작업마저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동옥이 너무 불안해하니 자주 찾아와 위로해 주라는 부탁을 동욱이 원구에게 한다. 다시 비 오는 날, 그들을 찾아가니, 동옥이 그 동안 모아 둔 돈을 빌려준 주인 노파가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동옥은 더욱 절망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욱과 동옥이 세 들어 살던 집마저 주인이 몰래 팔고 도망가 버려 결국 그 집에서 나오게 된다. 원구가 한 달 여 만에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들은 떠나고 없어 궁금해한다. 아마도 동욱은 군대에 끌려가고 - 그 당시는 검문해 증명이 없으면 군대에 끌려가게 되어 있었다. - 동옥은 주인 녀석이 사창가에 팔아먹은 것 같다는 격분과 자책을 안고 돌아온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戰後小說)
◎ 배경 : 시간(6․25 중 장마철) / 공간(피란지인 부산의 변두리)
◎ 성격 : 허무적
◎ 문체 : 간결체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어조 : 소외된 인간상을 피학적(被虐的) 어조로 묘사함.
◎ 구성 : 단순 구성, 평면적 구성
발단 - 비가 내리는 날이면 원구에게는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회상됨.
전개 - 원구는 황폐한 동욱의 집을 방문하여 동욱과 그의 누이동생 동옥을 만남.
위기 - 동옥의 자조적인 웃음. 그들의 유일한 생계인 초상화 작업을 못하게 함.
절정 - 동옥이 노파에게 돈을 떼이고, 세 들어 살던 집마저 떠나게 됨.
결말 - 원구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들은 떠나고 그는 자책감에 빠져 돌아옴.
◎ 주제 : 전쟁이 가져다 준 인간의 무기력한 삶과 허무 의식.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무기력한 삶
◎ 출전 : <문예>(1953)
3. 등장 인물
◎ 원구 : 이 작품의 서술자로 동욱의 친구. 그 역시 월남해 리어카로 잡화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동욱 남매에게 애정을 베푸는 인물
◎ 동욱 : 영문학을 전공한 목사 지망생으로 1․4 후퇴 때 동생 동옥과 함께 월남.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 주문을 받아 생계를 꾸려 가지만 상황이 어려워지자 군에 입대하는 정적인 인물
◎ 동옥 : 동욱의 여동생. 소아마비로 이상 성격이 된 동욱의 동생. 생계 유지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지만 오빠가 가출하자 그녀 역시 떠나 버리는 정적 인물
4. 이해와 감상
손창섭의 소설은 비교적 정상적인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비정상적인 삶을 통해 해방과 월남(越南), 그리고 6․25 직후 젊은이들의 뿌리뽑힌 삶과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도 예외 없이 정상적인 인간과 비정상적인 인간이 등장한다. 대학생 신분으로 행상을 해서 먹고사는 주인공 원구는 비교적 정상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절름발이면서 ‘백지에 먹으로 그린 초상화’ 같은 여자 동옥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조소하고 멸시한다고 생각하여 맑은 날에도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두더지처럼 방에만 처박혀 지낸다. 불구인 자기 누이동생을 터무니없이 구박하는 동욱은 영문과를 다닌 경력으로 미군 부대에 드나들면서 초상화 주문을 받으러 다닌다. 이 세 사람이 6․25 직후 썰렁한 부산에 내던져 있다. 동욱이가 들어 있는 집은 인가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이 서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한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통나무 기둥이 모로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 전면은 본시 전부가 유리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서 오른편 창문 안에는 가마니때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 을씨년스러운 폐가 속에서 동욱 남매는 서로에게 증오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위에 40일 간 계속되는 장마는 끊임없이 비를 뿌린다. 소설 구성의 한 요소로 일컬어지는 배경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퇴락해 가는 폐가와 음산하게 계속되는 장마비, 이것은 6․25 직후의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던 ‘물탕에 젖어 꿀쩍거리는 신발 속’ 같은 시대 상황이면서 동시에 절망과 무력감에 젖어 사로잡혀 있던 전후 청년들의 심리 상태인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부산은 한국 전쟁 중에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극적인 장소였다. 폐가(廢家)와 장마라는 배경 또한 주제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우울한 내면 심리를 다룬 전후 문학(前後文學)으로서, 사건의 직접 제시보다 어떤 사건에 의해 환기된 심경의 변화를 그리는 일이 앞서고, 객관적 인물 묘사보다 처음부터 작가에 의해 주관화된 냉소적인 관찰로 인물 묘사가 행해지는 특이한 소설 양식을 갖고 있다. 주로 간접 화법에 의해 대화가 처리되며, 부사어 및 ‘것이다’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6․25라는 전쟁이 개인을 어떻게 황폐화시킬 수 있었던가를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이범선(李範宣)의 “오발탄”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 준다. 작가 자신도 그의 소설을 ‘나와의 공존과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 기성 사회, 기성 권위에 대한 억압된 인간적 발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의 소설을 냉소와 자조(自嘲), 허위에 대한 불신, 애정의 마비, 생활의 분열로 성격 짓게 한다. 특히, 이 작품의 경우는 전쟁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삶이기에 그 분위기가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고, 이를 짙게 물들이는 것이 ‘비가 온다’는 눅눅한 배경 설정이다. 역사적 조건이 빚어 놓은 병리적 사회 현상이 개인을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고, 그 상황 속에서 개인은 무기력하게 피폐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다. 이때 ‘비 오는 날’이란 상황 설정은 피난지에서 폐가나 다름없는 동욱의 집과 함께 주제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켜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사회적 배경과 상황적 배경,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생존의 비극성을 밀도 있게 구현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육체적 불구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는 동옥. 그녀가 그린 초상화를 미군들에게 팔아 연명해야 하는 동욱 ― 이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인생들로, 그들 남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희생된 인물들이다.
▶ 인간 동물원 초
1. 줄거리
동굴처럼 무거운 정적만 흐르고 있는 감방 안에는 살인범인 방장(房長), 강도 강간범인 좌장, 강간범 핑핑이, 주 사장, 임질병, 통역관, 양담배, 운전수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들은 감방 밖의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며, 바깥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에도 강한 호기심을 갖고 떠들어댄다. 징역살이를 가장 많이 한 방장과 그 다음으로 징역을 많이 산 주 사장은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인다. 강간죄를 범한 핑핑이를 두고 이 둘은 서로 자신의 성적(性的) 대상으로 삼고자 싸운다. 결국 핑핑이는 방장의 차지가 된다. 그래서 주 사장은 핑핑이를 대신하여 양담배를 성적(性的) 대상으로 삼아 온갖 추잡한 짓을 다 한다. 방장은 핑핑이를 위하고, 주 사장은 양담배를 보호하느라 서로 싸움을 일삼던 중, 소매치기 상습범이 새로 들어오면서 둘의 싸움은 더욱 노골적이 된다.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소매치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이지만 소매치기도 결국 방장의 차지가 된다. 그러나 방장과 주 사장의 세력이 감방 안에서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도 통역관에게는 꼼짝하지 못했다. 그것은 통역관이 무언가 자신들보다 아는 것이 많은 듯한 데다 남을 깔보는 듯한 냉소적 언동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방장과 주 사장의 싸움은 결국 간수에게 들키게 된다. 그간의 추잡한 일들을 모두 알게 된 간수는 양담배, 핑핑이, 소매치기에게 앞으로는 절대로 추잡한 짓에 응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방장과 주 사장을 혼내 준다. 그러나 그 날 밤 방장은 주 사장을 죽인다. 모두가 잠든 사이에 수의(囚衣)를 엮어 만든 줄을 주 사장의 목에 걸어 잡아당긴 것이다. 그 다음날 감방에서 방장과 주 사장이 사라졌다. 감방 안의 죄수들은 과격한 노동을 하고 난 때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냉소적인 눈빛을 한 통역관만이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통역관을 제외한 다른 죄수들은 창 밖을 바라보았으나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고 무거운 안개가 자욱했다. 그래도 그들은 그 안개 너머에는 푸른 하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 핵심 정리
◎ 배경 : 감방 안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닫힌 상황 속에서의 냉소적인 인간 의식을 통한 사회 현실 비판
3. 등장 인물
◎ 방장(房長) : 살인범. 감방 최고 고참
◎ 주 사장 : 방장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
◎ 핑핑이 : 강간범. 밤마다 방장의 성희(性戱)의 대상이 된다.
◎ 양담배 : 미군 부대에서 양담배를 빼돌리려다 붙잡혀 들어온 죄수. 주 사장의 성희(性戱)의 대상이 된다.
◎ 통역관 : 다른 수감자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냉소적인 인물
4. 이해와 감상
“인간 동물원 초”는 감옥에서 죄수들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제목의 ‘인간 동물원’에서 풍기는 대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을 감방 안의 죄수들을 통해 보여 준다. 작품의 서두에 나오는 “동굴 속 같이만 느껴지는 방이다.”라는 말처럼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서 갇혀 있는 인간의 비뚤어진 성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손창섭의 작품들은 극도의 궁핍과 절망, 그리고 닫힌 상황을 다룸으로써 전후(戰後)사회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손창섭의 소설 작품 전반(全般)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인물들의 성격은 폭력과 살인, 성적(性的) 충동을 유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작가 손창섭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가 중풍을 앓던 50년대 전후(戰後) 시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물의 묘사에서도 손창섭은 색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신체에 관한 자질구레한 묘사가 없다는 점이다. 단지 인물들의 언동과 추태 등 행위에 의해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설정하는 인물 유형은 존재론적 시작에서 포착되어 있으며 동물적인 행위의 결과를 수반하고 있다. 인간의 꿈이라는 것도 한낱 덧없는 치몽(稚夢)이다. 돌이켜보면 유실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피력하고 인간 자체를 모멸 차게 냉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모멸과 냉소 속에서도 유머를 간직하고 있으며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손창섭 특유의 수법이다.
▶ 잉여 인간
1. 줄거리
주인공 서만기는 치과 의사다. 서만기의 병원에는 중학 동창인 채익준과 천봉우가 찾아와 종일토록 한담(閑談)으로만 소일한다. 이들은 소위 ‘잉여인간’들이다. 익준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기사를 보면 비분 강개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인물이고, 봉우는 실의의 인간으로 간호원 홍인숙을 짝사랑하고 있다. 봉우의 아내는 병원 건물의 주인으로서 주위의 평판이 좋지 않다. 그녀는 가난한 치과의사 만기를 돈으로 유혹하려 하지만 만기는 점잖게 거절한다. 끝내는 집세를 올려주지 않으면 나가 달라고까지 협박을 하나 만기는 이를 뿌리치고, 병원을 잃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을 한다. 어느 날, 익준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익준의 집을 찾을 수 없는 만기는 아이를 따라 익준의 집에 간다. 익준의 집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기는 봉우 처에게 장례 비용을 융통하여 장례식을 치른다. 만기는 어느 날 일주일 이내에 병원과 시설 일체를 내어 달라는 봉우 처의 편지를 받는다. 익준 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익준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 그는 상복을 입은 아들을 보고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 줄을 모른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前後小說)
◎ 배경 : 시간(6․25 전후 사회의 현실) / 공간(서만기 치과 병원과 그 주변)
◎ 경향 : 휴머니즘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구성
발단 - 치과에 놀러 온 익준과 봉우는 모두 한담으로 소일하는 잉여 인간들이다.
전개 - 봉우가 간호사를 짝사랑하고, 봉우의 처는 서만기를 건물 증축 핑계로 유혹한다.
위기 - 유혹을 뿌리친 서만기는 병원을 잃으면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고민한다.
절정 - 병원을 비워 달라는 편지가 오고, 익준 처가 죽는다.
결말 - 봉우 처의 돈을 융통하여 장례를 치르고 익준은 상복 입은 아들을 대하게 된다.
◎ 주제 : 전후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 출전 : <사상계>(1958)
3. 등장 인물
◎ 서만기 : 치과 의원 원장. 채익준과 천봉우의 중학 동창으로 ‘잉여 인간’인 이들을 포용하고 자신의 삶을 굳게 지켜 나가는 인물
◎ 채익준 : 부조리에 분노하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인물
◎ 천봉우 : 소극적이고 실의에 빠져 있는 인물
◎ 홍인숙 : 서만기 치과 의원의 간호사
◎ 봉우의 처 : 경제 능력이 비범한 여인으로 행실이 좋지 않음.
◎ 은주 : 서만기의 처제. 형부를 연모함.
◎ 채갑성 : 채익준의 아들
4. 이해와 감상
전후 소설이란 한국 전쟁 이후 약 10여 년 간 손창섭, 장용학, 서기원, 오상원, 이범선 등의 소설에 나타나는 어떤 경향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전쟁의 참혹성과 거기에서 오는 허무 의식,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생활의 의욕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황폐한 삶의 양태 등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 의식을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수용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참한 인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간의 출현은 인간 자체의 정신적 결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후 현실의 어두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특징적이다. 바로 이러한 점,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인간 밖의 역사나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과장한다는 비판을, 전후 세대를 이어 등장한 60년대 작가들로부터 듣게 된다.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이 소설 “잉여인간(剩餘人間)”은 전후(戰後)의 사회상과 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간의 몇 가지 유형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제시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한국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경험하였으며 동시에 전쟁의 후유증이 산재해 있는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에서 배태된 인물들인 것이다. 작가는 전후의 현실과 그 속에서 음지 식물처럼 서식하는 인물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이 남긴 참상을 고발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전후(戰後)의 사회상과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몇 가지 유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능력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며 침착한 기품과 교양을 잃지 않는 인물 ‘서만기’가 이야기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간형을 통해서 병든 현실과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날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은 손창섭의 작품 중에서 다소 이례적이다. “비 오는 날”, “낙서족”, “인간 동물원 초(抄)” 등 대부분의 작품이 부정적이고 불구적인 인물을 등장시킨 점에 비해 ‘서만기’라고 하는 긍정적 인물을 내세워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 인간(剩餘人間)’이란 글자 그대로 ‘남아 돌아가는 인간’이다. 천봉우와 같은 실의의 인간상은 손창섭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유형이고, 채익준 역시 그와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다. 그러나 작중 인물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작가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봉우가 간호원을 짝사랑하지만 조소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그린다거나, 익준의 비분강개(悲憤慷慨)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거품같이 흩어져도 야유하지 않고 오히려 정상적인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은 병적 회의주의(病的懷疑主義)에서 탈피하여 건전한 도덕 의식을 지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채익준과 천봉우, 이들은 모두 전쟁이 남긴 잉여 인간이다. 서만기는 이들을 포용하고 자신의 문제들과 이들이 가진 문제들을 함께 풀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게 현실을 헤쳐 나가고 있다. 여러 여성들의 끈질긴 유혹도 점잖게 물리치고 가족과 친구들을 잘 돌보는 그를 미화함으로써 전쟁이 가져다 준 불구성과 황폐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두드러진 악인은 없다. 그러나 모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살지 못하고 잘못 짜여진 시간표에 휩쓸려 잘못된 열정에 들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시사해 주듯 그 전쟁통에도 죽지 못하고 살아 남은 나머지 인생들인 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볼 때 작가 손창섭은 전후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어떤 저주를 퍼붓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그 험악한 세월을 살아남은 비애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송기숙(1935~) |
전남 장성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1964년 <현대문학>에 평론 “창작 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이 추천됨. 1965년 “이상(李箱) 서설”로 추천 완료. 1966년 단편 “대리 복무”에 이어 장편 “자랏골의 비가” 등 발표. 1978년 긴급 조치 제9호 위반, 1980년 광주 사태로 다시 구속, 이듬해 석방됨. “녹두 장군”, “개는 왜 짖는가?”, “휴전선 소식” 등 발표. 그는 현실의 부정에 과감히 대처하는 80년대 행동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암태도(暗泰島)
1. 줄거리
과거 독립 투사였던 서태석 등을 중심으로 한 소작인들은 지주 문재철에 대항하여 소작료를 내리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고 소작 쟁의를 벌인다. 그리하여 문재철의 논만 제외하고 가을걷이를 한다. 그것은 소작료 내기를 거부하려는 집단 행위였다. 그러나 계속 머리를 숙이는 벼를 본 소작인들은 가을 장마에 나락이 다 져 버릴까 걱정하다가 서태석과 박복영에게 건의하여 결국 소작 위원회를 소집하여 문재철 논의 가을걷이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번 걷이에 신석리 사람들도 도와주었다. 이렇게 지주와 소작인들, 즉 문씨 가문과 타성(他姓)바지들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첨예화되는 와중에서도 박종식의 아들 만재는 문재철의 친척인 연엽과 사랑을 한다. 한편, 소작인들의 승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노름을 자제하자고 하여, 단고리 청년들의 부정을 단속한다. 그러나 문재철의 농간에 속아 찌그리는 이사를 가게 된다. 그 후, 마름인 도리우찌와 김 서기의 계속되는 공갈과 꼬드김에 강제로 소작료를 빼앗기고 소작도 떼이게 된다. 심지어는 스스로 벼를 갖다 주고 빼앗겼다고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또, 문재철의 마름들은 강제로 머슴을 동원하여 마을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밤을 이용하는 등 눈을 피해 벼를 빼앗아 갔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자경단을 조직한 소작인들은 도리우찌 패가 마을에 들어서면 계속 감시하고 뒤를 밟는다. 그러다가 맨손의 서동오가 폭행을 당하고 이에 도리우찌를 경찰에 고소하지만 경찰은 이내 풀어 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지주 공덕비를 회수하자는 말이 나오고, 좀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면민 대회를 연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문재철 패거리들이 서태석, 박종유, 서동오를 폭행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신문 지상에 그 동안의 사건 전모를 밝힌다. 그러나 경찰은 지주(地主)만 감싸고 돌았다. 그래서 문씨 집안의 여자를 아내로 둔 만수는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고 만다. 어느 날, 수병들이 몰려와 총을 쏘고 위협을 하며 개를 무참히 죽였다. 이에 분노한 서태석과 소작인들은 지주 공덕비를 부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곡리 문씨 가문의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 사람을 때리고 닥치는 대로 세간을 부수는 등의 횡포를 자행한다. 소작인들 역시 그 보복으로 수곡리 문씨 마을에 피해를 입힌다. 이에 경찰에서 소작인 측은 13명을 구속하고 지주 측은 3명만 구속하자, 마침내 400여 소작인들은 목포 경찰서로 가서 농성을 한다. 그러나 오히려 26명이 더 구속되고 이들은 광주로 이감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지사와 만난 만수와 박복영은 소작 쟁의 타결의 실마리를 풀고 결국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리하여 만재와 연엽의 사랑 또한 이루어지게 되고, 문재철과도 화해하고, 마지막까지 출감되지 않았던 서태석 역시 석방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시간(1920~30년대) / 공간(암태도)
◎ 주제 : 민족사의 수난기에 처한 민족적 삶의 좌절과 극복
3. 등장 인물
◎ 서태석 : 소작농. 3․1운동 가담으로 징역살이함. 소작 쟁의를 일으켜 농민을 이끄는 인물
◎ 박복영 : 서태석과 함께 소작 쟁의를 주도하는 인물
◎ 문재철 : 지주. 처음엔 악덕 지주였으나 민족적 각성으로 독립 운동 자금을 대주고 육영 사업을 함.
4. 이해와 감상
“암태도”는 1979년 <창작과 비평>에 3회에 걸쳐 연재된 송기숙의 대표적인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자랏골의 비가(悲歌)”와는 달리 불가피한 곳 몇 군데에서만 사투리와 민요 등을 사용하고 모두 표준말을 썼다. 그리고 토착어가 많이 사용된 것도 특징이다. “암태도”는 반봉건적․반일적(反日的) 순수 민중 운동이었던 암태도의 소작 쟁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 1920년대나 1930년대 우리 농민들의 실상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며, 매몰되었던 삶의 일상성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또한 반일적(反日的)인 성격이 많이 들어간 것 역시 이 소설이 갖는 의의라 할 수 있다.
송병수(1932~) |
소설가. 경기도 개풍 출신. 한양대 졸업. 1957년 <문학예술>지에 “쑈리 킴”이 당선되어 등단. 전후(戰後)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많다. 그의 전쟁 소설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것과 아울러 휴머니즘의 옹호를 외치는 주제가 많다. 그리고 인간의 일상적 삶을 탐구하는 작품에서도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휴머니티를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다. 1965년 “잔해(殘骸)”로 제9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대표작으로 “그늘진 양지”, “인간신뢰”, “탈주병”, “장인”, “대한독립군” 등이 있다.
▶ 쑈리 킴
1. 줄거리
전쟁 중에 고아가 된 쑈리 킴은 못된 왕초 밑에서 견디다 못해 딱부리와 함께 도망친다. 그러나 순경에게 잡혀 고아원으로 간다. 그들은 다시 탈출하며 미군 부대 주변을 맴돈다. 그 곳에서 딱부리는 하우스 보이로 자리잡고, 쑈리는 따링이라는 양공주와 함께 산다. 쑈리는 따링 누나에게 양키나 검둥이를 소개해 주는 펨푸 노릇을 한다. 양키들은 초콜릿이나 씨레이션 등 먹을 것을 주지만, 달러 다섯 장은 내야 따링 누나와 잘 수 있다. 쑈리는 따링이 양키와 잘 때면 MP가 오는가 망을 본다. 그는 늘 파란 잔디밭에서 따링하고 ‘저 산 너머 햇님’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꾼다. 따링은 정말 누나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따링이 MP한테 끌려가고 만다. 구덩이에 숨겨 둔 팔백 달러 뭉치를 가지고 서울의 PX 앞에서 만나자는 고함 소리를 남긴 채. 누나가 잡힌 것은 딱부리의 밀고 때문이라고 쑈리는 단정한다. 그를 찾아가 격투를 벌인다. 바로 그때 찔뚝이란 놈이 따링의 달러 뭉치를 훔쳐 달아난다. 쑈리는 딱부리와 합세해서 찔뚝이를 마구 짓밟는다. 찔뚝이가 쑈리를 돌로 쳐죽이려 하자 딱부리가 칼로 그를 찌른다. 달러 뭉치는 피가 묻은 채 사방으로 흩어진다. 쑈리는 서울로 도망친다. ‘저 산 너머 햇님’을 생각하며 그러나 찔뚝이가 죽지 않고 살아나 따라올 것만 같아 쑈리는 무섭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戰後小說)
◎ 배경 : 시간(6․25 동란 때) / 공간(미군 주둔지)
◎ 경향 : 휴머니즘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구성
발단 - 쑈리 킴이 일선으로 오게 된 내력
전개 - 딱부리는 하우스 보이가 되고 쑈리 킴은 양공주(따링)의 펨푸 노릇을 하게 됨.
위기 - MP가 와서 따링을 차에 싣고 감.
절정 - 돈을 훔치는 찔뚝이를 발견, 난투를 벌이고 쑈리 킴은 서울로 도망침.
결말 - 따링 누나와 부르던 ‘저 산 너머 햇님’을 생각함.
◎ 주제 : 현실의 암울함 속에 싹트는 인간애(人間愛)
◎ 출전 : <문학예술>(1957)
3. 등장 인물
◎ 쑈리 킴 : 열 살 정도의 전쟁 고아. 매춘을 중개(펨푸)하면서도 양공주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 천진성에 상처를 입음.
◎ 딱부리 : 열네 살. 양공주인 따링 누나가 양키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보고 5달러 줄 테니 자기와 잠자리를 갖자고 요구, 일찌감치 어른의 세계에 물든 파괴된 동심의 세계를 보여 줌.
◎ 따링 누나 : 양공주.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지만 이룰 수 없음도 알고 있다.
4. 이해와 감상
미군 부대 주변에 사는 전쟁 고아들의 생활을 통하여, 환경으로 인한 심성의 파괴와 함께 한 줄기 인간애를 보여 주고 있는 전후 소설로서, 제목 ‘쑈리 킴’이란 ‘키 작은(shorty) 김(金)’의 영어 발음이다. 이 소설이 주는 재미의 하나는 그 표현에 있다. 생활어를 적절히 구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쑈리의 영악성을 부각하는 경쾌한 표현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나레이션이 제거된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획득하고 있다. 쑈리가 주어로 나와 시점이 마치 3인칭으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쑈리의 입을 통해 사건과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에 이 소설의 표현은 쑈리의 말투로 일관한다. 쑈리의 인물 성격은 앞에 나와 있듯이 영악성을 가지고 있다. 재기 발랄한 쑈리가 하는 말에 의해 영악성이 잘 형상화되고 있다. 한편, 이 소설은 이른바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부류에 해당하지만, 이 작품의 어디에서도 등장 인물이 전쟁 자체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흔적은 발견할 수 없다. 쑈리가 꿈속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는 대목이 나오지만, 그것이 쑈리에게 심각한 그림자를 드리운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저 철없는 소년이 이 모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영악스런 모습만 부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쑈리와 주변 인물이 펼치는 삶은 겉으로는 해학성마저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심층에는 심각한 비극성을 품고 있다. 이런 점은 다른 전쟁 소설에서 보기 어려운 특징인데, 이것은 작자가 노리려는 주제 의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주제 의식을 심층에 감춘 채 전쟁의 부정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것은 전쟁 소설의 새로운 성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구조가 매우 치밀한 인상을 받는다. 작가는 마치 설계 도면에 의해 건축을 하듯 소설을 제작하였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점은 복선의 정교한 배치로 드러난다. 이 소설은 사건의 흐름에 따라 허투루 읽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앞에서 제시한 사건이나 상황은 나중에 나올 사건, 상황과 완벽히 연계되어 있다. 작품의 서두에 제시된 칼 던지기와 돌 던지기 놀이는 이 소설의 절정과 결정적인 관련을 맺는다. 딱부리는 칼을 잘 던지고 쑈리는 그렇지 못해 돌로 재수보기를 한다. 나중에 찔뚝이는 쑈리의 돌을 맞게 되고, 이어 딱부리의 칼을 맞게 된다. 누나와 쑈리의 휘파람 신호도 그렇다. 휘파람을 불어 주지 않아 따링 누나는 MP에게 잡혀간다. 찔뚝이가 쑈리에게 달러를 바꾸어 달라고 하는 장면을 설정한 것도 나중에 달러를 훔치자 죽게 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이것은 이 소설가가 작품을 하나의 완벽한 구조체로 만들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역시 이 같은 치밀한 구성처럼 주제의 제시 방법도 그런 시각에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혹자(或者)들은 이 소설이 현실 의식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전면에 부각된다고 하여 리얼리즘이 구현된 것이라 보는 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쑈리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흥미 있게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그런 어긋난 삶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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