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1902~1927) |
서울 출생. 본명은 경손(慶孫). 도향(稻香) 이외에 ‘빈(彬)’이라는 필명도 사용함. 배재 학당을 거쳐 경성의전(京城醫專)에서 수학함. 문예 동인지 <백조(白潮)> 동인으로 참여하여 1922년 현진건 등과 함께 <백조>를 창간함.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초기의 작품 경향은 감정의 발산이 지나친 낭만주의 성향의 것이었으나, 그 후 곧 사실주의 경향의 소설을 창작하여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에는 “여 이발사”(1925), “뽕”(1925), “벙어리 삼룡이”(1925) 등이 있다.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 물레방아
1. 줄거리
달이 유난히 밝은 가을밤, 물레방앗간 옆에 어떤 남녀가 서서 수작을 한다. 늙은 남자(신치규)는 달래는 듯한 말로 젊은 여자(방원의 아내)를 꾀고 있다. 대를 이을 자식을 하나 낳아주면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된다는 신치규의 말에 방원의 아내는 새침한 웃음만 짓는다. 둘은 방원을 쫓아낼 약속을 하고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간다. 사흘이 지난 뒤 방원은 신치규로부터 돌연 자기 집에서 나가달란 말을 듣는다. 애걸해봐도 소용이 없자 방원은 아내에게 안주인 마님께 사정 얘기를 해보라고 하지만, 아내는 오히려 앞으로 자기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이냐며 앙탈이다. 방원은 홧김에 주먹과 발길로 아내를 치고 아내는 소리 높여 꺼이꺼이 운다. 그 날 밤, 술이 얼큰하여 돌아온 방원은 아내에게 사과할 생각으로 문고리를 잡아 흔든다. 아내는 없고, 그는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아내가 단장을 하고 물레방아께로 가더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방앗간으로 돌아들자 막 신치규와 아내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사지가 떨리고 이가 맞부딪친다. 처음에는 놀라던 계집과 신치규가 이젠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방원에게 호통이다. 어제까지의 상전이란 생각에 한동안 주저하던 방원은 끝내 신치규의 멱살을 잡고 넘어뜨린 후, 목을 누른다. 이제 그는 상전도 아니고 똑같은 사람, 아니 원수일 뿐이다. ‘사람 살류!’하는 계집의 목소리에 사람들 소리와 칼 소리가 난다. 방원은 순경의 구두 소리를 듣자 비로소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미친 듯이 일어나 옆에 있는 계집에게 어서 도망치자고 끈다. 그러나, 방원은 순경의 포승에 묶인 채 끌려가고 신치규는 머슴들이 업어 들인다. 석 달이 지나고 상해죄로 감옥에서 복역한 방원은 출옥했으나, 신치규는 아무 일 없이 방원의 계집을 데려다 산다. 방원은 더욱 냉정해진 세상을 원망하며 칼을 품고 신치규의 집으로 달려든다. 그러나 차마 계집을 죽일 용기가 나지 않은 그는 마지막 작심으로 자기와 같이 멀리 가자고 계집을 위협하지만, 거절당하자 결국 계집을 찌르고 자신도 거꾸러져 가슴을 찔린 채 죽는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일제 강점기) / 공간(농촌)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경향 : 낭만주의적 사실주의
◎ 배경 : 1920년대 한국 농촌의 물레방앗간
◎ 사건 : 방원의 아내와 신치규의 불륜 → 방원의 회유(懷柔), 설득 → 아내의 거절 → 방원의 아내 살해와 자살
◎ 구성
발단 - 신치규는 자기 집 막실에 사는 이방원의 아내를 탐낸다.
전개 - 신치규는 이방원의 아내를 유혹한다.
위기 - 이방원은 신치규와 자기 아내가 물레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절정 - 이방원은 신치규를 구타한 일로, 상해죄로 구속되어 석 달간 복역하게 된다.
결말 - 출감한 이방원은 아내에게 본심을 묻고, 청을 하지만 안 듣자 죽이고 자살한다.
◎ 주제 : 상전의 탐욕과 위선에 대한 하인의 반항과 응징
◎ 출전 : <조선문단>(1925)
3. 등장 인물
◎ 이방원 : 우직하고 순박한 농사꾼. 입체적․동적 인물
◎ 신치규 : 50이 넘은 탐욕스런 늙은이로 이방원의 상전. 평면적․정적 인물
◎ 이방원의 아내 : 이지적이면서도 창부형의 여자
4. 이해와 감상
아내를 주인에게 빼앗긴 종의 비애를 그린 단편 소설이다. 애정과 죽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갈등을 내용으로 하여 농촌의 떠돌이 머슴의 삶을, 당대의 한 풍속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동시에 그의 애정의 꿈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운명 문제(신분), 본능 문제(성 충동), 현실 문제(가난) 등이 상징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나도향 후기 작품의 특징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성 충동의 문제를 삶의 중요한 국면으로 이해한 것은 나도향 문학이 성숙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심층적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물레방아’라는 상징성을 활용한 것은 탁월한 성과로 판단된다. 물레방아가 인생의 덧없음을 표상하는 동시에 성 충동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마치 “벙어리 삼룡이”에서 ‘불’을 분노와 사랑의 정염의 상징으로 활용했던 것과 유사하게 “물레방아”에서도 ‘물레방아’가 인생과 성 본능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적 향기가 단연 돋보이는 것이다. 계급 의식과 본능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추악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학적 상징을 활용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경제적인 빈궁의 문제에 따르는 계급적인 갈등과 함께 인간의 본능에 관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인간의 야수성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작품과 비교한다면, 이방원의 아내는 김동인의 “감자”의 주인공 ‘복녀’가 보여 준 윤리적인 타락과 일맥 상통하는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남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복녀와 전혀 상반된다. 즉, 지주(地主)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면서도 남편에게는 잔혹할 만큼 냉담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가난’이란 것이 윤리적인 면에서 한 여인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그녀의 죽음은 지나친 욕망과 그에 따른 윤리적인 타락에서 연유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이방원의 살인은 당대 신경향파 소설에서 보여 주는 살인과는 색다른 형태의 것이다. 즉, 지주인 신치규와의 계급에 따른 적대 관계나 경제적 궁핍에 대한 복수가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둘러싼 애정 문제에서 오는 치정 관계의 극단적 돌파구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인 나도향은 가진 자(신치규)와 못 가진 자(이방원)의 대립과 갈등을 그리되, 본능적인 육욕(신치규)과 물질에 대한 탐욕(이방원의 아내)이 빚어내는 인간성의 타락을 주제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탐욕의 파탄을 주조로 한 이 “물레방아”는 식민지 시대 우리나라 농촌의 구조적 가난과 전통적인 성(性) 윤리 의식의 변질이 맞물려 빚는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이 고조되어 죽음으로 종결되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돈과 인간 본능의 함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관찰이 돋보이며, 당시 농촌의 경제와 에로티시즘의 상징물인 동시에 자연의 일부로서의 ‘물레방앗간’이란 배경 설정이 이 작품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나도향의 작품에는 낭만주의적 태도가 견지되고 있다. 고통의 원인을 역사적 현실에서 추구하기보다 무엇인가 초역사적이고 근원적인 지점(인간의 원초적인 애욕)에 두고 있다는 점, 인물들이 자신의 비극을 자각한 후 살인, 방화, 자살 등 충동적인 행위에 빠지는데 이것은 곧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지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결여된 자기 파괴라는 점 등에서 낭만주의적이다. 그러나 낭만적 태도는 역설적으로 그 시대를 또 다른 측면에서 엿보게 하는 사실성을 발휘한다. 혼돈의 사회에서는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법이고 나도향은 이러한 끈적끈적한 인간의 심리와 자기 파괴적 행동을 토속적인 배경을 무대로 그려냈던 것이다.
▶ 벙어리 삼룡이
1. 줄거리
14~5년 전, ‘내’가 열 살 안팎인 때의 일이다. 청엽정(靑葉町 : 동리 이름에 ‘정’이 붙는 것은 일제 시대이기 때문이다)을 연화봉(蓮花峰)이라고 부를 무렵, 그 동네에는 인심이 후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세력도 있는 오 생원(吳 生員)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오 생원의 집에는 삼룡이라는 벙어리 하인이 있었는데, 볼품 없는 외모에 흉한 걸음을 걷는 그는 마음이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해서 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편, 버릇이 없고 성격이 고약한 주인 아들은 삼룡이를 괴롭히나 삼룡이는 언제나 참는다. 주인 아들은 현숙한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매사에 훌륭한 신부와 비교되자 열등감에 사로잡힌 주인 아들은 자기 아내를 미워한다. 삼룡이는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삼룡이에게 새아씨가 부시 쌈지를 하나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말썽이 되어 삼룡이는 주인 아들에게 죽도록 맞은 뒤 내쫓긴다. 어느 날, 삼룡이는 주인 아씨가 중병(重病)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걱정 끝에 그 방에 들어갔다가 들켜서 오해를 받고는 매를 맞고 쫓겨난다. 그 날 밤, 그 집에 불이 난다. 불길 속으로 뛰어든 삼룡이는 주인을 구출해 낸 다음 다시 불길로 들어가, 타 죽을 작정으로 불 속에 누워 있는 새아씨를 찾아내어 안고 지붕으로 올라간다. 삼룡이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일제 강점기) / 공간(남대문 밖 연화봉 마을)
◎ 경향 :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서두에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뀜)
◎ 특징 :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인간 감정에 대한 사실적 해부, 리얼리즘의 요소와 감상성 등 복합적 요소가 혼합된 작품
◎ 구성
발단 - 오 생원은 인심이 후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전개 - 오 생원의 아들은 삼룡이를 괴롭히지만 삼룡이는 참는다.
위기 - 새아씨가 삼룡이에게 쌈지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이 말썽이 되어 삼룡이는 내쫓긴다.
절정 - 오 생원 집에 불이 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삼룡이는 주인을 구출해 낸다.
결말 - 새아씨를 안은 삼룡이는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 주제 : 천한 신분의 육체적 불구자의 분노, 저항과 사랑의 정열
◎ 출전 : <여명>(1925)
3. 등장 인물
◎ 삼룡이 : 추한 외모에 벙어리인 보잘 것 없는 하인. 하지만 천진성, 충직성의 대표로 묘사된다. 소설 말미에 아씨를 구해 내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승화시키는 인물
◎ 오 생원 :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나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아픔을 지니고 있는 인물
◎ 작은 주인 : 오 생원의 아들. 철이 없고 사람들에게 잔인 포악한 짓을 많이 한다. 삼룡이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의 색시도 미워하고 학대한다.
4. 이해와 감상
“벙어리 삼룡이”는 나도향의 초기 경향인 낭만적․감상적 정신과 “여 이발사” 등에서의 자연주의적․객관적 관찰의 정신이 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서 세계 인식은 현실적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불구자로서의 운명과 하인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가지고 있고, 아가씨는 아름다운 외모의 정상인으로써 주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 그 단절은 확고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 소설의 낭만적 요소는 삼룡이라는 인물의 설정이다. 즉 삼룡이는 비록 불구이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나 그의 혼만은 순결하다. 이는 문학사에 있어 불구자 혹은 백치의 천진성, 충직성과도 연관된다 하겠다. 앞서 말한 신분적 제약과 신체적 불구의 벽은 소설의 결미에 가서 삼룡의 순결한 사랑에 의해서 그 벽을 없애 버린다. 즉 그의 죽음은 현실적인 醜과 고난의 마침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라는 점이다. 그 찰나에서 작품이 멈춤으로 인해 낭만성은 더욱 고조되는 것이다. ‘나’라는 1인칭 서술자가 등장해서 15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자의 존재는 비일상적인 삼룡의 행위와 그가 관련된 소설의 스토리에 신비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이를 변형된 액자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 부분을 제외한 소설의 본문은 전지적 작가 시점과 관찰자적 시점이 교차하는 양상을 보인다. 시점 통일의 결여성이지만 이는 작가가 인물의 내면적인 갈등과 사건의 극적인 전개를 효과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이러한 시점의 혼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룡은 입체적 성격의 인물이다. 즉 삼룡에게 있어 주인 아씨는 애정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주인의 부당함과 자신의 처지를 일깨우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이처럼 작품의 진행에 따라 점차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각성해 가는 인물이 바로 삼룡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성은 방화로 이어진다. 즉 부당한 억압에 대한 복수와 반항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자신의 애정을 승화시키는 이중의 의미를 담은 방화이다. 불을 통해 자신을 억압해 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근원적인 결말 처리 방식은 1920년대 중반 신경향파 문학의 한 조류와도 연관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지주․소작의 관계라는 대립적 구성을 기본으로 살인과 방화로 끝을 맺는 이른바 ‘살인, 방화 소설’이 유행한 바 있는데 이 작품도 결말은 그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나도향의 소설은 초기의 감상적 낭만주의의 경향에서 후기에 이르면 대상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사실주의적 경향으로 변모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를 기조로 하면서도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정신이 공존하는 나도향의 후기 소설이 지닌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벙어리의 운명과 맹목적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입체적인 성격 창조와 설득력 있는 사건의 전개를 통한 작품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정신과 사실주의적 기법이 종합된 이러한 성취는 ‘불’이라는 적절한 상징적 장치의 사용과 더불어 이 작품을 나도향의 대표작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성격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주인공 삼룡이는 소극적인 인물에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방화(防火)를 저지르는 적극적인 인물로 변화한다. 즉, 삼룡이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하인으로 전형적 인물이었지만, 자신을 발견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입체적 인물로 발전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불 속에 뛰어들어 고결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죽음에 의해 일체의 고뇌가 사라지고 예속적인 관계가 청산되는 극한적 결말 처리 방법이다. ‘불’과 ‘죽음’에 의한 종결은 당대 신경향파 소설의 결말 처리 방식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여 주지만, 이를 계급 의식의 고취라는 도식적(圖式的)인 주제로 확대시키지 않고 있다. 방화와 죽음이라는 결말 처리 방식이 신경향파의 소설과 유사한 것일 뿐이지, 결코 그들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삼룡이가 주인 아씨를 안은 채 웃으면서 죽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한 순간이나마 이루는 결말 처리는 이 작품을 낭만적인 소설로 읽히게 하는 것이다. 나도향에게 이 작품은 초기의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돈과 신분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지닌 벙어리 삼룡이란 인물이 상전의 아씨에게 품은 연모의 정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반항으로 전환되는 갈등을 겪으면서 이 작품은 파국을 맞는다. 바보스러운 외면 속에 숨겨진 진실성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일종의 ‘바보 문학’인 셈인데, 바보스러움은 어두운 시대적 상황을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을 때 취해지는 일종의 이면적(裏面的) 공략일 수도 있다. 이 작품 속의 삼룡은 벙어리라는 생리적 결함 외에 옴두꺼비 같은 모습의 소유자며, 물건으로 존재하는 하인의 신분이다. 이런 삼룡이가 새색시를 연모함은 일견 환상적․낭만적 행위일지 모르나 새색시에 대한 연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오 생원 아들의 새색시에 대한 억압과 학대는 삼룡에게 동정을 넘어서서 연모의 정을 품게 했기 때문이다.
▶ 뽕
1. 줄거리
안협집은 노름꾼 김삼보의 아내다. 그가 노름으로 딴 여자였다. 그녀는 무지한 데다 돈만 알 뿐더러 정조 관념이 없다. 열대 여섯 적에 참외 한 개에 몸을 판 적도 있다. 더욱이 가끔 들르는 건달 남편만 믿고 지낼 수 없어 돈깨나 있는 놈팡이라면 아무 하고나 어울려 몸을 판다. 뒷집 머슴 삼돌이란 놈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지만 만만치가 않다. 어느 날 밤 그는 안협집하고 남의 뽕을 훔치러 간다. 그러나 뽕밭지기에게 들켜 그는 도망치고 안협집은 잡힌다. 그러자 그녀는 또 몸을 판다. 며칠 후 안협집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녀에게 쫓겨난 삼돌이는 앙갚음으로 그 뽕밭 사건을 김삼보에게 고해 바친다. 화가 난 삼보는 그녀를 죽도록 패지만, 그녀는 태연하다. 이튿날 삼보는 떠나버리고, 안협집은 여전히 동네 공청집 사랑에서 잠을 잔다. 주인집과 함께 치던 누에를 따서 삼십 원씩 나눠 먹는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일제 강점기) / 공간(강원도 철원)
◎ 경향 : 사실주의적 경향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식민지 현실의 추악한 모습을 표현함. 경제와 물질이 윤리에 우선하는 삶이 설정됨.
◎ 구성
발단 - 김삼보와 안협집의 인물 소개
전개 - 안협집은 삯일을 하다 어느 집 서방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쌀과 피륙을 받는다.
위기 - 난봉꾼인 뒷집 머슴 삼돌이는 안협집을 범하려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절정 - 삼돌이가 안협집의 행각을 알리고, 분한 삼보는 아내를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결말 - 삼보는 집을 떠나고, 안협집은 여전히 공천 사랑에서 잠을 잔다.
◎ 주제 : 성(性)을 둘러싼 남녀간의 풍속도. 탐욕이 빚어낸 윤리 의식의 타락과 비정상적인 부부 관계
◎ 출전 : <개벽>(1925)
3. 등장 인물
◎ 안협집 : 인물이 고운 대신 정조 관념이 희박한 여인
◎ 김삼보 : 안협집의 남편. 아편쟁이이며 노름꾼으로, 돈만 생기면 아내의 부정까지 눈감아 주는 타락한 인간
◎ 삼돌이 : 뒷집 머슴으로 힘이 세서 ‘호랑이 삼돌이’ 라고 불리는 난봉꾼. 안협집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려는 인물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도 “물레방아”와 같이 사실주의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 가난과 신고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윤리 의식의 와해, 가정 내의 성 윤리 파괴 등이 작품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안협집을 위시하여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정상적인 부부 관계와 매춘 행위, 그리고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위에 전혀 도덕적인 갈등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다. 특히, 주인공 안협집은 돈을 제일로 아는 인물이다. 그녀는 십오륙 세에 이미 원두막 속에서 총각 녀석에게 참외 한 개를 얻고 정조를 판 것에서부터 벼 몇 섬, 돈 몇 원, 저고리 한 벌 등 타락의 대가가 높아지면서 더욱더 뻔뻔스러워지는 여인이다. 이 같은 그녀의 황금 만능주의는 김동인의 “감자”의 주인공 ‘복녀’ 와 다를 바 없다. 김삼보 역시 돈만 생기면 아내의 부정까지 눈감아 주는 인물이고, 삼돌이도 안협집을 노리는 탐욕스런 인물이다. 이처럼, 본능과 물질적 욕구에 의해 행동하는 인물들이 작품 전편을 채우고 있다. 이는 작가가 이같이 추악한 모습을 현실의 모습으로 파악한 결과라 할 수 있고, 서사 구조가 비극적 결말이 아님이 이를 다시 뒷받침한다. 주인공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당면한 가난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손쉬운 교환 가치로서의 성, 본능 충족 수단으로서의 성에 탐닉한다. 윤리 의식이 없이 본능 추구를 계속하는 등장 인물들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따라가는 이 작품은 나도향이 도달한 사실주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참고> 열등한 남성, 우월한 여성 - 성의 콤플렉스
김유정이 그의 소설에 유독 성 문제를 제재로 삼았듯이 나도향 또한 그의 소설에 핵심이 되는 것은 성의 문제이다. 그 성은 윤리적인 것과 무관한, 자연스런 인간의 성정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풍속의 정확한 반영은 그 자체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무지한 자들이 많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성의 무분별한 개방은 그 사회의 한 단면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지 않고 그려지는 성의 풍속도는 건강성과 통한다. 여기에는 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다. 나도향의 여자들이 하나같이 남성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있는 것은, 성과 관련하여 그런 위상을 지닌다. “물레방아”에서 방원의 처는 창부형의 아내로 그려져 있고, 그런 것에 윤리적 판단을 내림으로써 방원이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성의 박탈에 대한 인간적 울분과 성을 되찾으려는 몸짓을 보일 뿐이다. “벙어리 삼룡이”에서 삼룡이가 꿈꾸는 여자는 비록 창부형과는 거리가 먼, 아름답고 고상한 여인이지만, 삼룡이에게 성적 매력을 한껏 풍기는 대상으로 그려진 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남자보다는 우월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등한 남성이 우월한 여성을 향한 갈망이 소설의 축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여성의 윤리적 측면과는 무관하게 모두 성적 매력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성적 매력을 풍기는 여성을 향한 집념이 작품의 동력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작품에서 삼돌이는 방원이나 삼룡이보다는 비교적 교활하게 그려져 있어도 결국 여자에게 실패를 경험하는 남성임에 틀림없다. 언제나 열등한 남성과 우월한 여성으로 구도화 되어 있는 것에서 성적 콤플렉스의 문학화라는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성적인 콤플렉스는 육체적 열등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온다.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강건함으로 드러나는데, 그 바탕은 열등 의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한 원형과 같은 이 심리는 나도향의 남성상에서 그대로 구현된다. 나도향의 남성들이 사내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 않고 모두가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들로 드러난다는 데서 그 점은 확인된다. 성적 열등감은 언제나 성적 우월감으로 표상된다. 사회적 의미에서 약자이지만 성적 관계에서는 다른 남성을 압도하는 것으로 표상된 것이 그것이다. 방원도 육체적 강건성을 지니고 있고, 삼룡이는 병신이지만 욕정은 휴화산처럼 쉬고 있을 뿐이며, 삼돌이는 많은 여자를 후린 탕아이다. 나도향의 소설은 결국 성의 풍속을 생활적 건강과 아름다움의 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정현(1933~) |
충남 서산 출생. 단편 “경고 구역(警告區域)”(1958), “굴뚝 밑의 우산”(1959)이 <자유 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 1965년 “분지(奮地)” 발표 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됨. 이때 안수길, 이항녕, 이어령 등의 문학인들과 변호사들의 변론은 유명했으며, 많은 사회적 관심을 일으킴. 그는 전후(戰後) 한국 문학의 저항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파헤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너는 뭐냐”, “굴뚝 밑의 우산”, “방기 소리”, “코리어 기행”, “허허 선생” 등이 있다.
▶ 코리어 기행(紀行)
1. 줄거리
수십 년 전만 해도 민주 시민의 기본권인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자유를 달라고 아비규환이던 코리어, 사대주의와 민족 허무주의와 배금 사상만이 창궐하고 세계에서 여인의 몸값이 싸기로 소문났던 코리어, 그 코리어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최대의 산유국(産油國)으로 돌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궁핍과 치욕으로 점철된 역사의 구정물은 말끔히 사라지고 사람들은 사랑과 믿음 속에서 권력의 지배가 없는 절대 자유를 누리며, 대통령에서부터 말단 사무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직이 지원제로 된 유토피아를 즐긴다.
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71년 <주간 한국>에 발표된 단편으로 직설적인 풍자 소설이다.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엽에 걸쳐 발표된 “부주 전 상서(父主前上書)”, “방기 소리”, “허허 선생” 등은 삶의 주변 상황을 다룬 다른 리얼리즘 소설들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상황을 근본 문제로 제기하고 그러한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한 작품들이다. 이 “코리어 기행”은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의 중심에 대해 거칠게 돌진하는 직설적 풍자들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이야기는 소설적 사건이라 치더라도 너무 황당 무계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의 가치 전도에 대한 반어(反語)라는 점에서 소설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남정현 특유의 반어적 표현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정현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개가 얼간이 같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너는 뭐냐”의 관수, “경고 구역”의 종수, “부주 전 상서”의 용달,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덕수, “사회봉(司會棒)”의 원규, “옛날 이야기”의 ‘나’ 등이 모두 그렇다. 이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까닭을 우리 사회의 생태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옛날부터 우리 사회는 풍자의 대상물을 매도(罵倒)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우자(愚者)의 넋두리를 이용해 왔다. 그래서 작가는 일부러 얼간이 짓을 하는 인물을 골라 소설에 등장시켜 온 것이다.
▶ 허허 선생(許虛 先生)
1. 줄거리
‘나’는 정말 뜻하지 않게 부친인 허허 선생의 부름을 받는다. 부친인 허허 선생과 나는 부자 지간의 인연은 고사하고, 같은 인간이란 동류 의식조차도 못 느낀다. 재계와 정계의 실력자이자, 우리 집안의 수반인 허허 선생은 내가 그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내가 보기엔, 아버지는 어느 모로 보나 그의 넋이나 피, 알맹이가 한국 사람인 것 같지 않다. 그는 일제가 아니면 미제 인물이다. 어쩌면 일본과 서양을 요리조리 뜯어 맞춘 전혀 소속 불명의 허허(虛虛)한 인종인지도 모른다. 일제 때는 충실한 황국 신민이었고, 지금은 양식(洋式)에 홀딱 물들어 말끝마다 ‘한국 놈’을 연발했다. 1년 전, 허허 선생이 정계(政界)에 데뷔하던 날, 소외된 나에게 가족 사진을 찍자고 해서 기자 회견장으로 갔는데, 나는 허허 선생의 말씀에 신경질이 나서 어떤 기자에게 일제 시대 때 부친이 남루한 농민들을 발길로 걷어찬 것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채 다하기도 전에 허허 선생은 나를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1년 간 나와 일체의 혈연적․인간적 인연을 끊고 지내왔다. 그런데 오늘 부친이 갑자기 ‘나’를 부른 것이다. 이유인즉, 일제 때 부친의 상관인 미야모도 서장의 안내역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재벌이 된 미야모도가 왕년에 자신이 지배했던 땅을 둘러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안내를 해 주는 조건으로 1억 원을 요구했다. 나는 그 돈이 이 세상에 다시는 부친 같은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각 국의 석학들을 데려다가 허허 선생 연구소를 차릴 비용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때 부친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민첩한 동작으로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나는 2층에서 굴러 떨어졌다. 나는 부친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발길질’의 비법부터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내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외국 자본주가 범람하는, 부조리한 70년대 산업화 사회. 서울의 상류층 사회
◎ 주제 :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 현실과 인간상의 폭로
3. 등장 인물
◎ 나(허만) : 허허 선생의 장남. 솔직하고 진실된 인물
◎ 허허 선생 : 재계와 정계의 거물. 비인간적인 인물
4. 이해와 감상
“허허 선생 Ⅰ”은 1973년 <문학 사상>에 발표된 단편 소설로서, “허허 선생 Ⅱ”(1975년 <문학 사상>)와 “허허 선생 Ⅲ”(1980년 <문예 중앙>)와 함께 연작으로 된 작품이다. 1970년대 서울의 상류층 사회를 배경으로 한 “허허 선생 Ⅰ”은 허구와 모순의 전형적 인물인 출세주의자 허허 선생과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그의 아들과의 갈등 묘사를 통해서 그릇된 의식 구조를 가진 허허 선생과 그러한 인간에게 부귀와 영화를 제공하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즉, “허허 선생 Ⅰ”과 “허허 선생 Ⅱ”에서는 부자간의 윤리 관계를 통하여 허영․물욕․권세만을 앞세워 우쭐대는 속물적 인간과 비정상적인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허허 선생 Ⅲ”도 하나의 아이러니로 되어 있다. 나레이터로 설정된 아들(‘나’)을 통하여 이 사회의 은폐된 진실과 부조리를 보여 주고 있다. ‘허허(許虛)’라는 명명(命名)이 암시하고 있듯이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현실 풍자 의식이 작품 전편에 넘치고 있다. 권력과 금력을 쥐고 있는 허허 선생 앞에서 진실된 그의 아들은 정신병자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는, 전도(顚倒)된 상황 설정을 통해서 인간의 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허허 선생 같은 인물이 아직도 주위에 활보하는 현실을 볼 때, 남정현의 소설은 이 사회에 대한 하나의 각성제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은폐된 진실은 그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진실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허 선생” 연작들은 이 시대의 구조적 허위 의식을 파헤친 작품들이다. 작가 남정현은 도저히 현실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주체로 환산하는 사고의 전도법과 물신적 현실주의의 허상을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문순태(1939~) |
전남 담양 출생. 전남대 철학과 입학, 숭실대 편입, 조선대 국문과 졸업. 1973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백제의 미소”가 당선되어 등단. 순천대 교수 역임. 현 전남일보 편집국장. 그는 토속적인 향수와 한을 주된 정조(情調)로 하여 우직하고 진실한 인간상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징소리”, “흑산도 갈매기”, “걸어서 하늘까지”, “타오르는 강” 등이 있다.
▶ 문신(文身)의 땅
1. 줄거리
서울 외곽의 신개발지, 고층 아파트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동네에 초로의 여인과 흑인 청년이 외부와 차단된 채 지내고 있다. 산동네에 무료 진료 봉사를 나가게 된 ‘나’는 무료 진료 봉사 송별 파티가 열리던 날 ‘나’를 찾아온 노 마리아의 요청에 의해 그녀가 흑인 아들과 살고 있는 산동네 집으로 간다. 온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문신을 지우고 싶다는 그녀의 간청에 못 이겨 ‘알아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불결하고 역겹다는 생각에 다시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그 후 그 일을 잊고 지낸다. 그러던 중 미군 부대 통역관으로 있던 아버지가 동네 친구의 어머니를 미군들의 윤락녀로 소개해 주는 것을 보게 된 후, 아버지 덕으로 초콜릿이며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내 가족들의 생활이 정당한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성형외과를 개업한 선배를 찾아갔으나 무료 수술을 거절당한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비용을 충당하여 수술을 해 주겠다고 결심하고는 산동네 노 마리아를 찾아간다. 그러나 노 마리아는 흑인 아들을 버려 둔 채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노 마리아의 가출 후, 흑인 아들 노 베드로는 일주일 동안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노 마리아의 고향으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어머니의 고향에 가기 전에 노 베드로는 자신을 ‘오형(兄)’이라고 부르라는 한 대학생을 만났는데, 그는 대학에서 반미 운동을 하다가 퇴학을 당하고 사회에서도 소외를 당해 방황을 하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는 베드로에게 호의를 보이고 함께 노 마리아의 고향으로 가 주었다. 노 마리아의 고향에는 그녀가 기지촌으로 오기 전, 결혼해서 낳은 베드로의 이복 형 ‘만기’가 살고 있었다. 고향에 간 노 베드로는 그곳에 형 ‘만기’가 살고 있음을 알고 기뻐하지만, 만기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난다. 그래도 어머니가 그 곳에 오지 않았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노 마리아는 자신을 기지촌에 소개해 주었고 함께 기지촌 생활을 하던 언니 ‘최 마리아’를 찾아간다. 비록 구차스럽긴 할지라도 남은 인생의 회한을 줄여가며 속죄하듯 살아가려고 ‘최 마리아’를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욱 비참한 현실에 묶인 채 살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도망치듯 그 곳을 빠져 나온다.
2. 핵심 정리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배경 : 비극적인 역사의 한 단면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겪는 삶의 과정
◎ 주제 : 전후 현실 속에서의 역사적 삶의 상처와 인간성 회복
3. 등장 인물
◎ 노 마리아 : 6․25 때 전 가족을 잃고 아들 만기를 키우기 위해 기지촌에서 몸을 파는 여인. 기지촌에서 흑인 아들과 문신을 얻음. 몸에 새겨진 문신 제거가 소원임.
◎ 노 베드로 : 흑인 청년. 노 마리아의 아들. 밤업소에 나가면서 퇴역한 어머니를 돌봄.
◎ 나(순도) : 의대 졸업반 학생. 산동네 무료 진료 봉사 활동에서 노 마리아를 알게 됨. 처음엔 그녀를 경멸했으나 시대의 희생물인 것을 깨닫고 문신 제거를 도우려 함.
4. 이해와 감상
문순태는 시인으로 문단에 첫발을 들여놓았다가 근 10년 간의 침묵 기간을 거친 후 소설가로 변신한 작가이다. 그는 언론적인 요소와 시인으로서의 감성, 그리고 산문적인 요소를 적당히 배합할 줄 아는, 다작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역사 소설에서부터 향토성이 짙은 고향 회귀의 예술 세계, 현대인의 소외와 자학적인 고독 의식 및 인간 존재의 나약한 방황을 다룬 작품들, 그리고 사회 체제의 모순과 그 고발적 요소가 강한 소설과 분단 극복 의지를 담아 내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깊이와 넓이가 깊고 다채롭다. 그는 유신 독재 체제 하에서 사회 고발적 요소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이어 고향의 한을 추적하는 “징소리”와 “인간의 벽”을 냈다. 이 무렵 그의 중요 관심은 분단 문제에 쏠린다. 즉, 귀향 의지로써 민중적 한의 세계를 파고들었던 그는 결국 우리 시대 민중들의 한은 분단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인하고, 80년대 전후의 분단 문학사를 한풀이 방향으로 바꾸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 징소리
1. 줄거리
칠복은 장성댐이 건설되면서 농토를 잃어버리고 아내마저 달아나자 어린 딸을 업고 무일푼으로 호수 가로 돌아온 이래, 징을 울려 낚시꾼들을 방해하다가 매를 맞곤 하는 위인이다. 마을 사람들은 호수에 잠겨버린 방울재를 떠나 낚시꾼과 관광객 상대로 매운탕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 가는 처지인데, 칠복이가 장사를 방해하니 그를 동정하면서도 쫓아낼 궁리만 한다. 원래 칠복이는 조실부모하고 외가에서 눈칫밥 얻어먹으며 머슴처럼 장성했는데, 색시로 맞았다는 것이 도시물 먹은 순덕이었다. 순덕이는 결혼한 지 한 달도 못되어 도시로 나가 살자고 성화였다. 칠복이 내외는 광주시 산꼭대기 사글세방으로 밀려가 도시 생활을 한다. 순덕이는 며칠만에 식당 주방에 취업하고, 농사일 외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칠복은 면목 없이 아내의 수입으로 먹고 살다가 광주시 인근 장성읍에 나가 농사 품을 팔며 20만 원을 벌어 집으로 돌아온다. 일부러 아내를 놀라게 해 주려고 소리 안 나게 집으로 들어가 불을 켜는 순간, 순덕이가 웬 놈과 벌거벗고 누워 있는 현장을 발견한다. 칠복이 식칼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엔 두 년 놈은 벌써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거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칠복은 징을 애지중지하며 잘 때도 꼭 베고 잔다. 마을 사람들은 징을 빼앗아 보기도 했으나, 칠복이는 살기(殺氣)를 보이며 제 징을 지킨다. 주민들은 칠복을 내쫓기로 하고 억지로 칠복이 부녀를 읍으로 들어가는 버스에 태운다. 칠복의 친구인 봉구는 칠복에게 이천 원을 찔러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한다. 빗방울이 굵어지는데, 봉구의 귀엔 바람 소리인지 징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온다. 마을 사람들도 그 귀기(鬼氣) 서린 징 소리에 몸을 떨며 잠을 뒤척인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연작 소설
◎ 배경 : 시간(1970년대) / 공간(전남 장성호 수몰 마을)
◎ 경향 : 사회 고발적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표현 : 주로 서술에 의지함. 인물 묘사는 간접적인 방법이 위주
◎ 의의 :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농촌의 붕괴와 도시 빈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 소설로서, 우리의 전통적 정서인 한(恨)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용되어 나타나는가를 진지하게 모색한 작품
◎ 주제 :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촌과 농촌 출신 도시 빈민들의 고달픈 삶
◎ 구성
발단 - 장성호 주변의 수몰 마을. 칠복이 징을 두들겨대다가 낚시꾼들에게 구타당한다.
전개 - 어렵게 자라 순덕과 결혼하나 정당한 보상도 못 받고 광주시 판자촌으로 밀려난 칠복의 과거 회상
위기 - 순덕의 불륜과 가출. 칠복 부녀(父女)의 귀향
절정 - 마을 사람들이 공모하여 칠복을 내쫓아 버린다.
결말 - 그 날 밤 마을 사람들은 비 소리에 뒤섞인 징 소리를 들으며 칠복이의 한(恨)에 몸을 떤다.
3. 등장 인물
◎ 칠복 : 외가에서 머슴처럼 살다가, 순덕이와 결혼. 자갈논을 부치며 살아가다 장성댐이 건설되어 마을이 수몰되자 보상도 못 받고 광주로 밀려 들어와 낯선 도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아내에게마저 버림받는다.
◎ 순덕이 : 칠복의 아내.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남편과 어린 두 딸을 두고 달아난다.
◎ 봉구 : 칠복의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 칠복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편이나, 끝내 칠복을 내쫓는 데 합류한다.
4. 이해와 감상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단편 소설. 후(後)에 연작(連作)의 형태를 거쳐 장편으로 완성. 장성(長城) 방울재라는 수몰(水沒) 지구를 배경으로, 거대한 댐 건설로 인해 실향민들이 겪는 고향 상실의 아픔과 다시 고향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그 ‘아픔’과 ‘몸부림’의 절규가 곧 ‘징 소리’의 격렬한 음향으로 표상된다. “징소리”는 <창작과 비평> 1978년 겨울호에 게재된 단편 소설인데, 작가 문순태는 이후 “저녁 징 소리”, “말하는 징 소리” 등 5편의 연작(連作)을 내놓아 장편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런 형식의 소설들은 1970년대에 특히 유행했는데, 농촌의 붕괴 문제를 다룬 이문구의 “우리 동네”, 도시 빈민 문제를 다룬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한국 사회의 산업화에 따른 빈부 격차와 계층 간의 갈등 문제를 다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나타났다. 연작 소설은 부분적으로 독립된 단편이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적 구조를 갖는 장편의 형태를 지닌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다양화되고 사회 계층의 반목이 뚜렷해지면서 하나의 시점으로 작가의 시각을 고정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당대의 문제들에 대해 조명하고자 하는 작가 의식의 소산으로 이해되나, 문제를 천착하지 못하고 단순한 문체상의 기교로 흘러버린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1970년대의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 눈부신 경제 성장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의 그늘 아래 속절없이 경쟁력을 잃어가는 부문이 두드러지는, 사회의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에 자리잡는다. 따라서, 경제 성장에 방해되는 일체의 요소 - 농촌 진흥과 노동자 복지, 환경 보존 등은 아예 제기조차 될 수 없도록 경제의 불균형 상태가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분배의 불공정성과 부정 부패, 인권 유린, 황금 만능주의와 극단적인 이기주의 현상이 불거졌다. 한마디로 말해 1970년대는 전통 사회의 붕괴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 시기라 하겠다. 작가 문순태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주로 자신의 성장지인 전남 일대의 농촌에 주목하고,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으며 선량하나 무지한 민중들이 어떻게 희생되는가 하는 점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칠복’으로 대표되는 농촌 빈민(또, 그대로 도시의 빈민이기도 하다)의 삶을 통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우리 농민의 전통적 정서인 한(恨)을 구체화하고 있다.
▶ 철쭉제
1. 줄거리
‘나’는 6․25 때 아버지를 학살한 원수를 갚기 위해 굶주림 속에서 신문팔이를 하는 등 모진 고생과 싸워 끝내 검사가 된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박판돌’은 사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앞세우고 지리산 철쭉제가 열리는 세석평전으로 간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내자 박판돌은 사라진다. 나중에서야 ‘나’(박 검사) 앞에 나타난 박판돌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의 어머니 넙순이가 노비로 있을 때, ‘나’의 조부 박 참봉에게 몸을 빼앗겼다. 박판돌의 부친 박쇠의 아내가 된 후에도 박 참종은 수시로 몸을 빼앗았다. 그러다가 사실이 탄로 나자 박쇠를 무마하여 대신 자기네 족보에 올려 준다고 약속하고서 박 참봉의 아들인 ‘나’의 아버지가 박쇠를 지리산 속으로 끌고 가 엽총으로 살해해 버렸다는 것이다. 박판돌로부터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나’(박 검사)는 내년 철쭉제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악수를 청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시간(6․25 때) / 공간(철쭉이 만발한 지리산)
◎ 주제 : 역사적인 비극적 삶의 극복
3. 등장 인물
◎ 나 : 검사. 학살된 아버지로 인해 복수심에 불탐.
◎ 박판돌 : ‘나’의 집의 머슴. 6․25 때 득세하여 사료 공장 사장이 됨. ‘나’의 아버지를 죽임.
4. 이해와 감상
“철쭉제”는 1982년 “물레방아 소리”와 함께 발표된, 그의 대표적 중편 소설이다. 문순태가 문단의 주목을 받은 까닭은 작품의 주제가 우리 민족이 갖는 비극적인 역사의 상황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같은 상황을 삶의 근원으로부터 찾고 있다. 즉, 호남 지방의 특수 지역을 배경으로 향토 문학을 정립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철쭉제”도 철쭉이 만발한 지리산을 배경으로 산의 온통 붉은 경관과 지역적인 특수성을 고려하여 기행 문학적인 면으로 서술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실향 의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고향에서의 삶에 깃들인 근원적인 한의 역사를 지극히 비극적으로 묘사하여 작품의 토대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비극성이란, 6․25가 갖는 시대적인 상황을 현재까지 연결함으로써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문학적 해결 방안으로 사상성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인의 한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철쭉제”에서 그가 찾은 것은 한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비극의 극복이다. 이것은 이질적인 것에서부터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전후 문학의 새로운 자각으로 해석되어진다.
▶ 타오르는 강(江)
1. 줄거리
나주의 양 진사네에서 대대로 종살이를 해 온 웅보와 대불이 형제는 1886년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자 종 문서를 받아들고 영산강을 건너 영산포 새끼내에 터를 잡는다. 웅보가 노비의 신세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했던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할아버지는 양 진사 집에서 도망치려다가 붙잡혀 이마에 불도장까지 찍힌 사람이었으나, 오히려 그 불도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웅보와 대불이 형제는 노비에서 풀려나자 새끼내에 터전을 잡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 마을을 형성해 나간다. 그들은 해마다 홍수 때문에 농토를 일구지 못하고 버려진 영산강 변에 땅을 마련하기 위해 물둑을 쌓고 두레살이를 한다. 그들은 땅을 마련하기 위해 함께 일하면서 같이 나눠 먹는다. 형 웅보는 같은 양 진사 댁의 종이었던 쌀분이와 혼인을 한다. 그리고 노비 신분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 가는 데 모든 삶을 바치려고 하지만, 동생 대불이는 그들의 상전이었던 양 진사를 도와 영산포의 선창에서 세곡을 운반하고 감독하는 욕대잡이 노릇을 한다. 이때 양 진사는 낮에 세곡을 배에 실은 후, 밤에 다시 그것을 빼돌려 빈배에 불을 지르고 농민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결국 양 진사의 계략에 속아 죄를 뒤집어쓴 대불이는 비로소 양 진사의 비리를 알게 되고, 새끼내 주막의 주모와 함께 도망쳐 장성 입암산으로 들어가 동학 교도가 된다. 웅보는 새끼내 마을 사람들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고향을 만들어 간다. 한편, 웅보는 그가 양 진사 집 종으로 있을 때, 양 진사가 아들을 얻기 위해 데려다 놓은 씨받이 여자 막음례와 관계를 가졌던 일이 있었는데 뜻밖에 그녀가 웅보의 아들을 낳는다. 또한 웅보는 노비에서 풀려난 직후, 굶주림 때문에 양 진사 댁에 식량을 얻으러 갔다가 양 진사의 부인 유씨의 홀림에 빠져 동침한 적이 있었는데 유씨도 웅보의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양 진사는 이 아이를 자신의 핏줄로만 알고 있었다. 주모 말바우 어미와 함께 도망쳤던 대불이는 동학군이 되어 돌아오자, 새끼내 사람들은 박 초시네 집을 습격하여 한을 풀고 다른 동학군들과 함께 나주 관아를 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동학군과 합세하여 분풀이를 했던 새끼내 사람들은 관군의 보복이 두려워 결국은 애써 가꾼 그들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 무렵 새끼내에서 가까운 곳에 목포가 개항(開港)이 되었다. 동생 대불이는 동학 패잔군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고, 형 웅보는 새끼내 마을 사람들과 영산강을 따라 개항장 목포로 떠난다. 웅보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이마에 불도장이 찍혔던 할아버지와 영산강에서 죽은 수많은 종들의 혼령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빌며 떠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배경 : 19세기 말 사회 변혁기. 전라남도 나주 관삼면(官三面)
◎ 주제 : 역사적 질곡 속에서 민중들의 ‘한’의 세계 추구
3. 등장 인물
◎ 웅보 : 나주 양 진사의 노비였으나 노비 세습제 폐지로 자유의 몸이 됨.
◎ 대불 : 웅보의 동생. 노비에서 자유의 몸이 된 후, 농토를 일구며 새 마을을 형성해 감. 동학 교도가 됨.
◎ 양 진사 : 간악한 계략으로 농민들을 괴롭히는 양반 계급
4. 이해와 감상
“타오르는 강”은 1975년 <전남매일신문>에 “전라도 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가 1년 만에 중단하고 다시 개작(改作)하여 1980년 4월부터 <월간중앙>에 5개월 간 싣다가 또 중단한 후, 1987년 당시 <창작사>에 의해 일곱 권으로 완간(完刊)됨으로써, 10여 년이나 걸려 완성을 본 문순태의 장편 역사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머리말 [횃불로 변한 한의 민중사]에서 밝힌 바처럼 민중의 한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른바 전남 나주의 관삼면(官三面)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산강은 고난과 설움의 강이지만 단념할 수 없는 생존의 강이다. 그 강은 고향 아닌 곳을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뿌리를 내려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의 벌판을 가로질러 흐른다. 어떤 장편 소설이든 다 그러하겠지만 “타오르는 강”은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까다롭게 보인다. 더구나 민중의 삶의 현장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다양한 변화를 보여 준다.
박경리(1926~) |
소설가. 경남 충무 출생. 1945년 진주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했으나, 한국 전쟁 중 부군이 납북된 후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음. 1955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과 “흑흑 백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한 이래 “불신 시대”, “암흑 시대”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7년 부정과 악의 강렬한 고발 의식을 보여 준 “불신 시대”를 발표하여 제3회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여류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로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거나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전쟁 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전쟁 미망인들의 삶, 또는 그들의 눈을 통해 사회 현실의 훼손된 국면들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1959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고독한 여인의 심적 방황을 그린 장편 소설 “표류도”를 발표하여 제3회 내성 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장편 소설의 집필에 주력하였다. 이후 “내 마음은 호수”, “은하”, “푸른 은하” 등의 신문 연재 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1962년에는 전작 장편 “김 약국의 딸들”을 발표하였다. “김 약국의 딸들”은 이전의 전쟁 미망인을 즐겨 등장시킨 자전적 사건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였고, 공간적 배경도 전쟁터가 아닌 통영으로 바뀌었으며, 제재와 기법 면에서 다양한 변모를 보인 전환기적 작품이다. 1964년에는 한국 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생활인으로서의 시각과 전쟁을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의 시각을 통해 예리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담은 전작 장편 “시장과 전장”을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에 제2회 한국 여류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가을에 온 여인”, “늑지대”, “타인들”, “환상의 시기” 등을 연재하였다. 1969년 이후부터는 대하 소설 “토지”에 몰두하였다. 하동의 대지주 최 참판 네 일가를 중심으로 한말에서부터 식민지 시대를 거쳐 조국 광복에 이르는 민족사의 변천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광대한 스케일과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관한 작가의 독특한 시각은 우리 소설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72년에는 “토지” 제1부로 제7회 월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김 약국의 딸들
1. 줄거리
선비의 성품을 지닌 김봉제는 김 약국의 주인으로 부유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 그의 동생 봉룡은 충동적이고 격정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봉룡은 아내 숙정이 출가 전 그녀를 사모했던 송욱이 찾아오자 극단적으로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만다. 숙정은 간부(姦夫)를 두었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사태로 봉룡은 처가(숙정의 집안) 식구들의 보복을 피해 탈가(脫家)하여 자취를 감춘다. 봉제에게 맡겨진 봉룡의 유일한 혈육인 성수는 봉제의 아내인 송씨의 손에 의해 자라나게 되지만, 죽은 동서에게 항상 열등감을 지녔던 송씨는 그 화살을 성수에게 돌려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사냥터에서 독사에 물려 사망한 봉제 영감의 뒤를 이어 성수는 김 약국의 주인이 된다. 성수는 딸 다섯을 두지만 전혀 지식이 없는 어장 사업에 손을 댐으로써 가산이 조금씩 기울게 된다. 장녀 용숙은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아들 동훈을 치료하던 의사와 불륜을 맺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둘째 용빈은 똑똑하여 교육을 받아 교원이 되나 애인 홍섭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된다. 셋째 딸 용란은 관능적 미모를 갖추었으나 지적인 헤아림이 부족해 머슴과 놀아나는 바람에 지탄을 받고, 넷째 딸 용옥은 애정이 없는 남편 기두와 별거하다가 뱃길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용란은 또다시 머슴의 아들 한돌과 함께 있다가 남편인 연학에게 들켜 한돌과 어머니 한실댁이 연학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 결과를 맞는다. 그 충격으로 용란은 정신착란자가 된다. 계속되는 집안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김 약국(성수)도 위암으로 죽는다. 결국, 용빈과 용혜가 통영을 떠나면서 작품은 끝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 배경 : 시간(1894년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시기) / 공간(경남 통영)
◎ 경향 : 사실주의 소설로 가족사 소설의 성격을 띤다.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한 집안의 욕망의 얽힘과 운명에 의한 비극적 몰락
◎ 구성
발단 - 어머니 숙정의 자살
전개 - 김성수의 성장 과정
위기 - 봉제의 죽음. 김 약국이 되는 성수
절정 - 다섯 딸들의 순탄치 못한 삶
결말 - 용빈이 막내 용혜와 통영을 떠나면서 저주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함.
3. 등장 인물
◎ 김 약국(김성수) : 어머니(숙정)의 자살과 큰어머니 송씨의 학대가 가져온 정신적 충격으로 현실에 대한 집착도 저항도 하지 않는 정적(靜的)인 인물
◎ 한실댁 : 김 약국의 처
◎ 봉제 : 김성수의 큰아버지
◎ 봉룡 : 김성수의 아버지
◎ 숙정 : 김성수의 어머니
◎ 용숙 : 첫째 딸. 일찍 과부가 되나 개성이 강하다.
◎ 용빈 : 둘째 딸. 의지가 굳고 사려가 깊은 지적인 여성
◎ 용란 : 셋째 딸. 관능적인 여인
◎ 용옥 : 넷째 딸. 남편과 별거
◎ 용혜 : 막내 딸. 용빈과 함께 통영을 떠남.
4. 이해와 감상
1962년 <을유 문화사>에서 간행된 박경리의 전작(全作) 장편 소설이다. 경상도 통영을 배경으로 넉넉한 살림의 한 가정이 욕망의 얽힘과 운명에 의하여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 숙정의 자살이 몰고 온 비극의 사슬로 인하여 김 약국(김성수)과 그의 다섯 딸들의 삶이 철저히 비극으로 끝난다. 경남 통영의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집안의 몰락이 지닌 비극성을 사실적으로 조명한 역작(力作)이다. 김 약국의 어머니가 비상을 먹고 자살하는 대목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씨앗은, 결국 김 약국의 딸들이 하나하나 몰락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작품 전체가 논리적 인과율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운명의 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는 하나 이 작품은 그것에 의해 오히려 살아나고 있다. 첫머리에 제시되고 있는 통영에 대한 소개와 인물들의 사투리는 이 작품의 토속적 정감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을 하나의 풍속도로서 완성시키고 있는 것은 샤머니즘과 신비(神秘) 사상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김 약국과 그의 딸들인데, 현실에 대해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김 약국의 성격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다섯 딸들의 성격 분석은 작품 이해에 필수적이다(그러나 용혜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미미하다). 김 약국의 흥망은 바다와 직결되어 있다. 김 약국이 능력 밖의 일인 어장 사업에 손을 댐으로써 몰락이 가속화되는 것과 용숙이 바다에서 죽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서,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사건의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1993년 재간행되어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 불신 시대
1. 줄거리
한국 동란 와중에 남편과 사별한 진영은 한 점 혈육인 아들 문수마저 엑스레이도 찍지 않고 약도 준비하지 않은 의사의 무관심 때문에 잃어버리고 만다. 아들 문수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은 그녀로 하여금 사회를 불신하게 만든다. 진영의 눈에 비친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폐결핵인 진영이 찾아간 병원은 한결같이 엉터리였다. Y병원은 주사약의 분량을 속였고, S병원은 건달꾼이 의사 노릇을 하였고, H병원은 빈 외제 약병을 내다 팔았다. 거리에는 가짜 주사약이 난무하고 있었다. 집에 찾아온 여승은 시주로 받은 쌀을 팔려고 했고, 문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찾은 절은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대접을 달리하는 타락한 곳이었다. 신앙이 깊어 의지하려 했던 갈월동 아주머니에게 돈을 떼이게 되는 사건, 그러한 아주머니를 상대로 종교를 빌미 삼아 사기 행각을 벌인 대학생 ‘상배’, 신발을 들고 들어가야만 하는 교회 등, 불신 시대의 문제들은 진영을 지치게 만든다. 결국, 진영은 자신의 삶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되는데, 아들 문수의 영혼을 위해 절에 맡겨 두었던 아들의 위패를 찾아 태우게 된다. 왜냐하면, 불심(佛心)의 깊이를 금전으로 측량하는 절에서는 문수의 영혼이 편안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들의 위패를 태움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는 불신 시대의 모든 조건들을 불살라 버리자는 심산인 것이다. 진영은 마음 속으로 이 시대를 불신 시대라 규정짓고, 이 사회에 항거하자는 다짐을 하며 산을 내려온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9․28 수복 직후의 혼란기) / 공간(1950년대 서울)
◎ 성격 : 혼란기 사회의 부정에 대한 고발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혼란기의 부정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
◎ 구성
발단 - 한국 동란 중 남편과 사별한 진영은 유일한 희망인 아들 문수마저 의사의 무성의한 치료로 잃게 된다.
전개 - 사회에 대한 진영의 불신은 더욱 증폭된다.
절정․결말 - 아들의 명복을 위해 절에 맡겼던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되찾아 태움으로써 그녀의 사회에 대한 증오는 절정에 달한다.
3. 등장 인물
◎ 진영(眞英) : 한국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거리에서 넘어져 의사의 무성의로 죽게 되는 비극의 여인이다.
◎ 여승, 갈월동 아주머니, 상배, 의사 : 진영이 사회를 불신하게끔 만드는 부정적 인물들
4. 이해와 감상
1975년 <현대 문학>에 발표된 단편 소설. 9․28 수복 전야에 유엔군인 남편을 잃은 진영이라는 여성의 힘겨운 삶이 중심 내용이다. 의사의 무관심 때문에 외아들 문수가 죽고, 중들은 돈을 좇아 종교를 팔고, 병원에서는 치료약의 함량을 속이며, 곳곳에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에서 진영은 외로움과 무기력함을 느끼며 이 시대를 불신한다. 그러나 아들의 위패를 불태우는 행위로써 현실의 폭력성에 대결코자 한다. “불신 시대”라는 제목이 밝혀 주듯이, 주인공 진영을 둘러싼 사회 현실은 모두 그녀를 기만하고 배신한다. 특히, 그 지독한 배금주의는 그녀로 하여금 생존 자체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아들의 위패를 태우게 되는데, 아마 그녀는 아들의 영혼이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기를 바랬기에 그런 매몰찬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때 이렇게 중얼거린다. -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다.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 그녀에게 이 위패를 태우는 범상치 않은 행위는 쓰라린 과거를 의식 속에서 지우는,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적 면모로 세상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비록 실천적 행위를 통하여 시대 상황을 부정하고 거부하며 해결책을 찾으려는 모습은 보여 주지 못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 내에서 내면적으로 대결 의지를 가진다는 점에서 한 여인의 한계와 상황 극복의 결의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 다만,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 전개가 주인공 진영 개인의 체험과 의식으로만 제시된다는 점이다. 환경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피해 의식과 감상주의에 치우쳐 있어서 소설의 마지막 독백, ‘그렇지, 내게는 아직….’이라는 대목은 개인적 차원의 자기 설득이요 다짐일 뿐 공감대의 형성에는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토지
1. 줄거리
“토지”는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문을 연다. 최씨 집안의 안주인인 윤씨 부인(최치수의 모친)은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후에 동학 접주가 되어 처형당하는 김개주에게 겁탈 당해 김환(일명 구천이)을 잉태한다. 그 후 김환은 최씨 가문으로 잠입하여 하인이 되지만, 최치수의 아내인 별당 아씨와 사랑에 빠져 둘은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 귀녀와 몰락 양반 김평산의 음모로 최치수는 교살 당하고 음모를 꾸민 두 사람은 윤씨 부인에게 발각되어 사형 당한다. 최씨 집안의 외가 쪽 먼 친척인 조준구는 윤씨 부인이 마을을 휩쓴 호열자(콜레라)로 죽자 최씨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최씨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최치수의 딸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면서 일본인들의 힘을 빌려 모든 재산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여기에 더해 서희와 자신의 아들 병수를 결혼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자 서희는 충직한 하인 김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탈출한다. 서희는 용정에서 윤씨 부인이 남긴 금․은괴를 자본으로 장사에 성공하여 거부가 되고 하인이었던 길상과 혼인한다. 여기까지가 “토지” 1, 2부의 개괄적인 내용인데, 국권 상실, 봉건 가부장 체제와 신분 질서의 붕괴, 농업 경제로부터 화폐 경제로의 변환 등 1900년대와 191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가 소설의 밑그림으로 담겨 있다. 3, 4부는 1, 2부와 연속선상에 놓이면서도 시대, 배경, 인물의 변화와 변천에 따라 이야기의 축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3, 4부의 시간적 배경은 2, 30년대인데, 이 시기 한국 사회의 격변이 소설의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음이 확인되고 일제의 총독 정치가 가혹해지기 시작한 1920년대 식민지 상황의 암울한 분위기가 무겁게 소설을 누르고 있다.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들은 굳건히 발붙이고 살 정착지가 없기 때문에 자연히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은 소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소설의 무대가 다변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1부에서는 평사리, 2부에서는 용정으로 거의 국한되어 있다시피 한 소설의 무대가 3, 4부에 와서는 서울, 부산, 진주, 평사리, 그리고 국외로는 간도 일대와 일본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민족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 운동의 여러 노선이 제시되며, 지식인들의 사상적 경향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시도된다. 이런 가운데 1, 2부의 주역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용이와 그의 아내 임이네는 병으로 죽고, 기생으로 전락한 끝에 이상현의 씨를 낳고 아편 중독자가 되고 만 기화(봉순)는 끝내 서희의 비호와 정석의 애끓는 연정을 뿌리치고 투신 자살한다. 동학 잔당의 세력을 규합하여 독립 운동을 벌이려던 김환은 고문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용정 공노인의 부인과 조준구의 악착같은 부인 홍씨도 세상을 뜬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토지”에서는 이들의 후손들이 점차 주역의 자리를 차지한다. 서희의 두 아들 윤국과 환국, 용이의 아들 홍이, 조준구의 아들 꼽추 조병수 등이 소설의 전면으로 나온다. 이와 함께 3, 4부에 오면 새로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인텔리 계층으로 작가는 이들을 통해 희망 없는 식민지 상황의 암울함을 드러낸다. 임역관의 딸 명빈과 명희를 비롯해 귀족층의 조용하,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가 서의돈, 극작가 권오송, 성악가 홍성숙, 조선에 대해 동정적인 일본인 오가다 지로, 유인실, 강선혜, 황태수 등과 진주 쪽의 박효영, 허정윤 등이 그러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극단적 양상으로 치닫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해방의 감격까지를 다루고 있는 5부는 “토지” 대단원의 장이다. 송관수의 죽음, 길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 단체의 해체, 길상의 관음탱화 완성, 오가다와 유인실의 해후, 태평양전쟁의 발발, 예비 검속에 의한 길상의 구속, 양현․영광․윤국의 어긋난 사랑 등이 이어지면서 대하 소설 “토지”는 거대한 마침표를 향하여 달려간다.
<토지>와 한국 근대사
1부의 시간적 배경은 1897년 8월 한가위에서부터 1908년 5월까지이다. 이 시기에 러․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격랑을 밑그림으로 “토지”는 최 참판 가의 몰락과 조준구의 재산 탈취 과정을 다룬다. 2부는 1911년 5월 간도 용정촌의 대화재로 시작되어 1917년 여름까지이다. 여기서는 지리산 동학 잔당의 모임을 제외하고는, 국내 정세나 사건보다 간도를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정세가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중국에 미칠 영향이라든지, 1917년 러시아 혁명 전 케레스키 내각에 대한 독립 운동가들의 견해 등이 자주 소설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야기는 서희의 복수, 곧 최씨 가의 귀환을 향해 집중되어 있다. 3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에서부터 1929년의 원산 총파업, 광주 학생 사건 무렵까지가 시간적 배경이고, 소설 안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독서 단체인 계명회 사건이 1929년에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복수 후 허무에 부딪친 최서희가 지어미의 삶을 살게 되고, 김환이 죽음에 이르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송관수 등의 민중적 삶과 서울의 임명희를 둘러싼 지식인과 신여성들의 삶으로 이동한다. 4부는 1930년부터 1937년 중․일 전쟁과 1938년 남경 학살에 이르는 시기가 그 배경이다. 무대는 서울, 동경, 만주에서 하동, 진주, 지리산까지 더욱 확대되고 이야기의 중심은 더욱 다원화된다. 길상의 출옥과 군자금 강탈 사건, 유인실과 오가다의 사랑이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부는 1940년 8월부터 1945년 8월 15일의 해방까지가 그 배경이다. 역시 확대된 공간과 더욱 복잡해진 인물 속에서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민족의 삶들이 펼쳐진다. 양현과 영광의 사랑이 중요한 갈등을 이루면서 소설의 대단원을 향해 달려간다.
<토지> 제1부 가계의 주요 인물 계보
■ 보기 × 부부 관계, ∞ 형제 또는 남매 관계, : 정인(情人) 불륜 관계 ■
(1) 최 참판 댁 일가
조준구
조현갑 → × → 조병수
↓ 홍씨
최 참판 → 최모 → 최모 → 최모 → 최치수
× × × × × → 최서희
모씨 모씨 모씨 윤씨 부인 별당 아씨
: ↘ :
김개주 김환(구천)
∞
우관 스님 → 김길상
(2) 최 참판 댁 노비
바우 할아범 박수동
×
간난 할매 삼월이
봉순네 → 봉순 삼수
김 서방 ┏ 남이 순이
× → ┃ ∞ 연이네
김 서방 댁 ┗ 개똥이 돌이
귀녀 복이 등
: → 강두메(두매)
강 포수
(3) 평사리 작인
월선네
× → 공월선 김영팔
공모 : ················ 정한조
∞ : : 강봉기
공 노인 이용 : 서금돌
× : → 이흥 막딸네
강청댁 : 야무네
: 윤보(목수)
칠성 ...............: 영산댁(주모)
×
임이네
김이평 ┏ 선이
× → ┣ 두만
두만네 ┗ 영만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대하 소설, 가족사 소설(전 5부 16권)
◎ 배경 : 시간(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 / 공간(중국과 한국)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격동기 민족의 한과 강인한 생명력. 한국 근대사의 인물들이 겪는 식민지적 고통과 운명을 통한, 민족의 한과 의지
◎ ‘토지'의 상징성 : 삶의 터전으로서의 토지는 농경 사회에서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토지에 대한 믿음과 이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는 외부 세계의 대립 속에서 각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3. 등장 인물
◎ 최서희 : 최씨 가문을 이어가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 최치수와 별당 아씨의 외동딸. 최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 조준구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용정으로 가서 부(富)를 이룩함. 공노인과 임역관의 중개로 빼앗긴 토지의 대부분을 회수, 길상과 헤어져 귀국을 감행, 진주에 자리잡음. 몰락한 조준구로부터 집문서를 넘겨받아 가문의 재건과 복수를 마감한다. 양현이를 윤국과 짝을 맺어 며느리로 맞이하고자 하는 집착이 양현의 거부로 좌절되고 길상의 재수감, 윤국의 학병 지원으로 또 다른 한의 그림자가 생긴다. 이런 고통은 그 동안 방어적이고 폐쇄적이던 서희의 가슴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어 자기 주장이 강하고 기상이 센 성격의 여인상에서 정감 있는 어머니 상으로 변한다.
◎ 김길상 : 신분이 다른 서희와 결혼한 독립 운동가. 고아 출신으로 연곡사 우관 스님의 보호로 자라다가 최씨 집안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된다. 침모의 딸 봉순의 은근한 사모를 받지만 서희에 대한 동정과 연모의 정을 가진다. 서희의 몰락 과정에서 그녀를 끝까지 보호한다. 용정으로 함께 이주하여 서희가 부를 축적하는 데 크게 기여, 드디어 둘은 결혼한다. 서희의 귀국에 동행하지 않고 간도에 잔류, 독립 운동에 투신한다. 2년의 감옥 신세를 지고 진주에 은둔. 동학당 조직을 재건하려 하나 좌절, 원력(願力)을 모아 관음탱화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 구천 : 최 참판 댁의 머슴. 출생의 비밀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인물
◎ 최치수 : 최 참판 댁의 당주. 병약하고 냉소적이며 신경질적인 인물
◎ 조준구 : 최치수의 이종형으로 최 참판 댁의 재물을 탐내는 욕심 많은 인물
◎ 상현 : 이동진의 아들로서 서희를 사랑하나 실패하여 방황하는 지식인
4. 이해와 감상
박경리의 “토지”는 모두 5부 16권으로 되어 있는 대하 소설이다. 동학 농민 전쟁과 갑오 개혁, 을미 의병 등이 차례로 역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에서부터 해방의 감격을 맞는 1945년 8․15 광복까지 격동의 한국 근대사가 “토지”의 시간적 배경을 이룬다. 여기에 경남 하동의 평사리를 비롯하여 지리산, 서울, 진주, 간도, 러시아, 일본에 걸치는 방대한 공간 위로 무수한 인간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완간까지 26년 간의 집필 기간과 원고지 30,000매가 넘는 분량도 기록적이지만 “토지”는 진정 그 문학적 성과에서 한국 현대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동학 농민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선의 식민지화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을 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각기 아관 파천과 명성 황후 살해를 통해 조선의 식민 지배를 꾀했다. 일본 낭인들의 국모 시해라는 전대 미문의 치욕을 맛본 유생들은 단발령을 계기로 수하들과 농민군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의병 투쟁을 전개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농민군의 분발에 당황하고 일본의 이른바 내정 개혁 강요에 몰린 정부는 갑오 개혁을 단행한다. 왕권 제한,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문벌 타파, 과거제 폐지, 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갑오 개혁은 농민 전쟁에서 집약적으로 분출된 봉건 체제의 내부 모순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것이 일본의 조선 내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박경리(70)씨의 대하 소설 “토지”는 농민 전쟁과 갑오 개혁, 을미 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 지배와 민중의 끈질긴 독립 투쟁, 그리고 2차 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어 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그렇기로서니 수상한 세월 힘없는 나라에서 맞이하는 박복한 백성들의 명절이 어찌 평화와 풍요의 겉보기에만 그칠 것인가. 과연 작가는 곧 이어서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라며 시의 경지를 방불케 하는 문장을 내밀고 있다. 더구나 그 비애의 속내인즉, 산문적 사실성과 치열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고많은 이별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흉년에 초근 목피를 감당 못하고 죽어간 늙은 부모를, 돌림병에 약 한 첩을 써보지 못하고 죽인 자식을 거적에 말아서 묻은 동산을, 민란 때 관가에 끌려가서 원통하게 맞아죽은 남편을, 지금은 흙 속에서 잠이 들어버린 그 숱한 이웃들을,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 준다.” “토지”는 만석꾼 대지주 최 참판 댁의 마지막 당주인 최치수와 그의 고명딸 서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둘러싼 대하 드라마를 전개한다. 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이 동학 접주 김개주에게 겁탈 당해 낳은 자식 김환이 의붓 형수인 별당 아씨와 밤 도망을 치는 사건은 장강처럼 흘러갈 소설의 초입에 물살 급한 여울목을 마련해 놓는다. 상피 붙은 남녀를 쫓는 긴박한 추격전이 벌어지는 한편에서는 치수의 고임을 받아 그의 만석지기 농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하녀 귀녀의 음모, 치수가 비명 횡사한 뒤 최 참판 댁 재산과 토지를 노리는 그의 재종형 조준구의 행보, 마을 남정네 용이와 무당 딸 월선이의 비련 등 인간사의 오욕칠정이 쉬임 없이 피었다 진다. 거기에 동학군 출신인 대목수 윤보, 의병에 가담하는 김훈장,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길상과 그 아들, 조준구가 대표하는 상업 영농과 서희의 곡물 무역의 자리바꿈에서 볼 수 있는 경제의 단계적 발전 등 사회․역사적 변모가 포개진다.
<참고> “토지”의 두 인물
“토지”의 인물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품은 지향과 목표에 입각해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쓰라린 좌절을 통해, 그리고 애정과 믿음, 혹은 탐욕과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일궈나가면서 이를 통해 일제 하 현실의 전체상을 그려낸다. 이들이 각기 몸담고 있는 현실의 여러 층위의 얽힘에 의해 “토지”는 이념에서 풍속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체를 망라해낸다. 그 무수한 인물들의 다양한 운명을 통해 개화기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비추는 거대한 파노라마가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파노라마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인물, 최서희와 김길상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본다.
◎ 최서희 : 최치수와 별당 아씨의 소생이자 최씨 집안의 마지막 핏줄. 어린 나이에 육친을 잃고 고아가 된 후, 조준구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이주한다. 윤씨 부인이 비밀리에 남긴 금괴를 처분한 돈을 밑천으로 하여, 용정 대 화재와 전쟁을 계기로 막대한 부를 이룩한다. 대 상인으로 용정에 자리를 잡아가면서도 몰락한 가문의 부흥과 귀향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는다. 조준구에게 복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진의 독립 운동 자금 요청을 거절하고, 일본인이 지은 절에 시주하기도 하는 등 일본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상현과의 은밀한 사랑을 냉정히 정리하고 하인 출신의 길상과 결혼하여 환국, 윤국 두 아들을 낳는다. 공노인과 임역관의 중개로 빼앗긴 토지의 대부분을 회수한 뒤, 길상과 헤어져 귀국을 감행하고 진주에 자리잡는다. 몰락한 조준구에게서 집문서를 넘겨받음으로써 가문의 재건과 복수를 마무리한다. 양현이를 윤국과 짝을 맺어 며느리로 맞이하고자 하는 집착이 양현의 거부로 좌절되고 길상의 재수감과 윤국의 학병 지원으로 서희의 한(恨)에는 또 다른 그늘이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좌절은 그 동안 방어적이고 폐쇄적이던 서희의 가슴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어 강한 성격의 여인상에서 부드럽고 정감 있는 어머니 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 김길상 : 고아 출신으로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라다가 최씨 집안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된다. 침모의 딸 봉순의 은근한 사모를 받지만 서희에 대한 동정과 연모의 정으로, 최씨 집안의 몰락 과정 속에서 끝까지 서희를 지키고 보호한다. 서희와 함께 용정으로 이주해서 역할을 수행하며 서희와 결혼한다. 서희의 귀국에 동행하지 않고 간도에 남아 독립 운동에 투신하며, 이를 통해 신분적인 질곡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을 견뎌내고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계명회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 서울에서 옥살이를 한다. 2년의 옥살이 끝에 석방된 뒤 진주에 은둔한다. 그러면서 친일 자산가의 집을 습격하는 독립 운동 자금 강탈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며 동학당 조직의 재건을 꾀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이후의 조직 활동에 족쇄로 작용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활동의 침체와 점점 더 각박해지는 정세 속에서 동학당 모임을 해체하기에 이른 길상은 원력(願力)을 모아 관음탱화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은 예비 검속이라는 형식으로 길상을 다시 구금(拘禁), 길상은 기약 없는 영어(囹圄)의 삶과 마주한다.
박노갑(1905~?) |
충남 논산 출생. 호는 도촌(島村). 일본 법정 대학 문과 졸업. 1933년 <조선 중앙일보>에 “안해”를 발표하면서 등단. <조선 중앙일보> 기자 역임. 6․25 이후 행적 미상
▶ 춘보의 득실(得失)
1. 줄거리
춘보는 같은 동네의 열 두 살 먹은 덕봉을 데리고 새 장터로 가다가 덕봉이 발견한 지갑을 가로챈다. 그 지갑 안에는 거금 백 원이 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춘보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돈으로 빚을 갚고 또 밭이나 논을 살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남들의 의심이 두려워 포기한다. 그러다가 이번엔 식구를 데리고 먼 외지로 갈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러던 중 덕봉의 발설로 돈 임자가 춘보를 찾아와서는 “그만한 돈 때문에 큰 낭패를 볼 만큼 가난하지는 않지만 내야 할 날짜가 촉급한 조합 돈인 데다 급히 목돈을 마련할 수 없다.”면서 춘보의 선처를 구한다. 이 때문에 춘보는 돈을 내 줄 것인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잡아뗄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지만, 아직은 순박함을 지닌 춘보는 돈을 조합에 내고 돌아와 꼭 그 은혜를 갚겠다는 돈 임자의 약속을 믿고서 돈을 내어 준다. 그러나 돈을 받아 간 돈 임자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자, “없는 친구가 있는 친구에게 돈 백 원 더 보태 준 셈치자.”며 자위(自慰)하는 춘보의 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배경 :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사건
◎ 주제 : 가난한 서민들의 삶의 애환
3. 등장 인물
◎ 춘보 : 가난한 생활에 찌들린 농민
4. 이해와 감상
도촌 박노갑은 1905년 충남 논산의 평범한 양반 농가에서 태어났다. 별로 부유하지 못한 집안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울로,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높은 교육열 때문으로 짐작된다. 일본 유학 중 문학 수업을 하게 된 그는 희곡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후에 그의 소설이 대화체 위주로 된 것은 이 때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문장>이 창간된 1939년을 전후해서 그는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 주었는데, 그의 작품 세계는 시대적․개인적 고뇌를 문학 창작 욕구를 통해 승화시켜 나가는 데 있었다. 그의 작품은 소재에 따라 유형화할 수 있는데, 농촌적 소재는 주로 그의 전기 작품에서 다루고 도시적인 소재는 후기에 속하는 시기에 다루고 있다. 1930년대 말 박노갑은 허준, 김소엽, 계용묵, 정비석, 현덕 등과 함께 기성 작가들의 창작 태도와 작품을 통렬히 비판하는 등 문단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그는 비평에 있어서 혁신적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1933년 처녀작 “안해”에서부터 1948년 최후작인 “40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60여 편의 소설을 쓴 다작(多作) 작가이면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은 그의 작품 성격이 뚜렷이 경향 문학도 아니고 순수 문학도 아닌 독자적 세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새롭게 조명해 봐야 할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기대되고 있다.
박영준(1911~1976) |
소설가. 호 만산(晩山). 평남 강서(江西) 출생. 1934년 연희 전문 졸업, 그 해 <조선일보(朝鮮日報)> 신춘 문예(新春文藝)에 단편 소설 “모범 경작생(模範耕作生)”이 당선됨으로써 등단. 1946년 경향 신문사 문화부장에 취임하고, 1947년 고려 문화사 편집장을 거쳐 1951년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을 역임하면서 종군 작가단(從軍作家團)의 일원으로 활약. 1954년 연세대학 강사에 취임하고 1958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됨. 1965년 연세대학 교수가 되고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활약하였으며, 잡지윤리위원회 위원을 역임. 1974년 연세대 문리과대학장에 취임. 예술원상․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단편집으로 “목화씨 뿌릴 때”(1945), “풍설(風雪)”(1951), “방관자(傍觀者)”(1960) 등이 있고, 장편 소설로 “열풍(熱風)”(1959), “고속도로”(1969) 등이 있다.
▶ 모범 경작생
1. 줄거리
주인공 길서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로, 성두의 여동생인 의숙과 사귀고 있다. 그는 군(郡)의 농사 강습회 요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떠났고,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길서를 부러워한다. 김매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숙은 얌전이에게 길서와의 관계를 놀림 받고 얼굴이 붉어진다. 길서가 돌아온다. 그 날 밤 길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호경기가 곧 온다고 하니 부지런히 일하자고 말하며 시국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덧붙인다. 다음날 저녁 그는 서울에서 산 비누를 의숙에게 쥐어 준다. 한편, 의숙의 오라비 성두와 어머니는 빚 걱정이 태산이다. 길서는 면사무소에 들른다. 뚱뚱보 면서기는 일본 시찰단에 뽑히도록 힘써 줄 테니 한턱내라고 하며, 길서는 그러겠노라 대답한다. 면장은 호세(戶稅)를 좀더 내야겠다고 길서에게 말하며, 길서는 애매한 대답을 한다. 병충해로 수확이 반감될 것을 예상한 마을 사람들은 수심에 가득 차서, 길서에게 지주를 찾아가 감세(減稅)를 교섭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못들은 척한다. 마을 사람들은 길서의 논 앞에서 ‘모범 경작생’이라고 쓴 팻말을 원망스럽게 쳐다본다. 길서는 시찰단으로 뽑혀 일본으로 떠나고, 동네 사람들은 지주를 찾아가 감세를 사정하나 거절당한다. 뽕나무 묘목 값은 엄청나게 비싸지고 호세도 크게 오른다. 모두가 길서의 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를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길서는 자기 논의 ‘모범 경작생’ 팻말이 쪼개져 길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길서는 의숙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그를 못 본 체한다. 충혈된 얼굴로 뛰어든 성두를 피하여 길서는 뒷문으로 도망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농민 소설
◎ 배경 : 시간(1930년대) / 공간(궁핍한 어느 농촌)
◎ 경향 : 사실주의적, 고발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의의 : 30년대 일제 농업 진흥책이 갖는 허구적 성격과 농민들의 현실 자각 과정을 현실감 있게 포착한 작품
◎ 구성
발단 - 농촌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며 성두네 논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모내기에 바쁨.
전개 - 길서는 농사 강습회 참가. 길서는 영리 추구 위해 친일 관료를 도움.
위기 - 수심에 가득 찬 농민들은 길서가 지주와 친일 관료들의 협력자임을 알게 됨.
절정 - 농민들은 길서의 논에 일제가 박은 ‘모범 경작생’이란 팻말을 쪼갬.
결말 - 길서는 성두에게 쫓겨 도망침.
◎ 제재 : 지주와 관료의 수탈로 인해 궁핍한 농민의 삶
◎ 주제 : 개인적 이익 때문에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이용당하는 한 젊은이의 태도 비판.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의 부조리와 가난한 농민들의 삶의 애환
◎ 출전 : <조선일보>(1934)
3. 등장 인물
◎ 길서 :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보통 학교까지 나온 청년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입신(立身)과 이익만을 위해서 관리들의 비위를 맞추는 기회주의자
◎ 의숙 : 성두의 여동생. 길서의 애인. 길서 때문에 고민하면서도 울음으로 일관하는 소극적 성격
◎ 성두 : 자기 땅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 장가 밑천으로 키우던 돼지를 팔고 북간도 이주를 해야 할 형편임.
◎ 마을 사람들 : 처음엔 소극적이나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들
4. 이해와 감상
1934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된 농촌을 제재로 한 소설로, 그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작가 자신은 이 소설에 대하여 “모범 경작생을 능가하는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범 경작생은 60장이라는 극히 제한된 지면에 스토리를 압축할 대로 압축해서 쓴 작품이었다.”고 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서 현실적 실리를 좇는 농촌 청년의 이중적 인간성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을 시작으로 박영준은 초기에 농촌에 사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취재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고, 이에 ‘농촌 작가’라는 지칭을 받았다. 그 때의 작품은 문장부터가 농촌 소설에 부합하는 소박하고 건실한 것이었다.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이 작품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농촌 소설을 한 편도 쓰지 않고 주로 소시민 생활의 윤리적인 면을 취재했으며 문장도 도시풍으로 세련되어 갔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배신 행위가 기본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면장, 면서기 등은 모두가 일제의 하수인들로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을 순화시키고 수탈하는 일에 협력한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 학교를 졸업한 길서인지라 농민들은 그를 지주에게 보내어 감세 부탁을 하고자 하나 길서는 거절한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 감세를 요청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김길서’라는 팻말과 ‘모범 경작생’이라는 말뚝을 뽑아서 쪼개어 버린다. 도에서 세 사람 뽑는 일본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길에 이러한 사실을 보고 길서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밤이 이슥하여 길서는 일본에서 사온 바나나를 가지고 연인인 의숙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한다. 그러자 길서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지고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아랫문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들고 왔던 바나나를 들고 뒷문으로 도망친다. 길서와 반대쪽에 있는 인물이 성두이다. 그는 길서처럼 자기 땅을 갖고 있지도 못하고, 오죽하면 장가 밑천으로 키우던 돼지를 팔고 북간도 이주를 고려해야 할 형편이다. 이때 그의 분노는 일제의 착취 제도와 수탈 계급을 향하지 못하고 길서를 향해 폭발한다. 이 소설에서 성두의 분노로 표상되는 농민들의 현실 인식 수준이 그렇게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일제의 농업 진흥책이 갖는 허구적 성격과 농민들의 현실 자각 과정을 현실감 있게 포착해 내었다는 점에서 그 문학적 성취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참고> 농민 문학의 등장 배경
농민 문학이란 농촌의 문제와 농민의 삶을 그린 문학을 말한다. 한국 문학사에서 농민 문학은 1930년대와 1970년대에 특히 활발하게 나타났다. 1930년대에 농민 문학이 활성화되었던 배경에는 더욱 가혹해진 일본의 경제 수탈 정책이 놓여 있다.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중 80%가 농민이었으므로 일제의 경제 수탈은 농촌과 농민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토지는 소수의 일본인 지주와 친일 지주의 손에 집중되었고, 대부분의 농민은 소작농의 처지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궁핍에 시달렸고, 만주나 간도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수탈에 맞서 농민들은 농민 조합을 결성하고 소작 쟁의를 벌였다. 그리고 학생과 지식인들은 1920년대 천도교 중심의 조선 농민사의 활동을 시작으로 YMCA나 YWCA의 계몽 운동, 1929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농민 계몽 운동을 벌이며 적극적으로 농촌 문제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작가들이 계몽 운동과 농촌의 실상을 작품화함으로써 1930년대에 ‘농민 문학’이라는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참고> 1930년대 농민 문학의 유형
1930년대 농민 문학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카프 문학 쪽. 1920년대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문학을 논하던 카프 문학 진영은 1930년을 기점으로 농민 계급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평론가 안함광과 백철의 이른바 ‘농민문학 논쟁’을 거치면서 이론적인 토대로 형성해 간 카프 진영은 그 성과물의 하나로 <농민 소설집>을 묶어 낸다. 특히 카프 작가 이기영은 “서화(鼠火)”(1933), “고향”(1934) 등을 통해 농민의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함으로써 1930년대 농민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명성을 떨친다. 이기영 외에 조명희의 “낙동강”, 권한의 “목화와 콩”과 같은 작품을 선보이며 사실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경향을 고수한 카프 진영의 농민 문학은 1930년대의 가장 진보적이고 현실적인 농민 문학 유형으로 평가받는다.
둘째는 민족주의 문학 쪽. 합법적인 농민 계몽 운동과 관련된 작품이 대부분인데, 이를테면 수양 동우회의 이념에 따라 펼쳐진 농민 교육 운동의 산물인 이광수의 “흙”(1933)이나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를 중심으로 펼쳐진 브나로드 운동의 산물인 심훈의 “상록수” 등이 그것이다. 일반 대중의 호응은 컸으나 지식인 중심의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계몽 사상 고취라는 한계를 가져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농민 자각형의 유형. 박영준의 “모범 경작생”이나 이무영의 “제1과 제1장” 등이 대표작이다. 이것은 농민 계몽 운동과 맥을 함께 하는 측면도 있지만 비판적인 농민 의식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앞의 것과 차이가 있다.
그 외에 김유정의 “봄․봄”(1935), 이태준의 “농군”(1939), 박화성의 “고향 없는 사람들”(1936) 등도 농민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들이다.
▶ 목화씨 뿌릴 때
1. 줄거리
박장의는 40대 전후의 자작(自作) 겸 소지주로서 그 마을의 어떤 낡은 집을 채마밭으로 편입하기 위해 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찬수가 살고 있었다. 찬수는 집 값은 치르지 못했지만 집문서는 갖고 있었다. 찬수가 버티자 박장의는 찬수를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술장사를 하는 정섭에게 헐값으로 매매한다. 정섭은 집 값이 너무 헐값이라 자기 집을 팔아 이 집을 산다. 그러나 정작 이사를 하려고 하자, 찬수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찬수에게 얻어맞는다. 정섭은 그 분풀이로 박장의를 찾아가 실컷 때려 주고는 배상을 요구하여 현금으로 받아 간다. 한편 지금까지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어른으로 대해 주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살아온 박장의는 정섭에게 얻어터지고 현금까지 떼여 분하게 생각하고는 모욕과 설움을 받았다면서 원통하게 울고불고 하며 마을을 떠나겠다고 한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동안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면서 얼굴 마주치기조차 두려워하던 박장의에게 저항하여 그를 망신시킨 정섭을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찬수는 논밭 하나 없으면서도 일을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그저 빈둥거리며 놀러 다니기나 하거나 네 줄밖에 없는 바이올린을 켜기도 한다. 그러니 그의 늙은 어머니가 행상을 하고 아내가 나무를 해서 겨우 끼니를 어어 가고 있는 형편인 데도 그는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젠가 때가 와서 무엇을 하게 되면 남부럽지 않게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또 그 기회란 것이 언젠가 꼭 오고야 말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한편, 찬수로 인해 큰 모욕을 당한 박장의는 찬수를 주재소에 고발하고 찬수는 마을을 떠난다. 박장의는 찬수 네가 살던 그 집을 허물고 거기에 목화씨를 뿌린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박장의 네 일을 해 주러 오지 않자 박장의는 가족들과 손수 일을 하게 된다. 박장의는 목화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어디 가서 굶어 죽었을 것 같은 찬수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애꿎은 아내와 딸을 괴롭힌다. 그는 동네를 떠나고 싶기도 했지만 목화밭을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떠나지 못하고 품을 내지 못한 가족들은 일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욕한다. 찬수가 종적을 감춘 뒤 동네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박장의 역시 그를 내쫓은 뒤 불안한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 사이에 씨뿌린 목화밭에 목화가 기장만큼씩 자라나고 집이 헐리기 전날 어디로 떠났는지 찬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는 박장의가 저녁때만 되면 무서운 일이 있는지 대문, 후문 할 것 없이 창문 안 고리까지 잠그고 지낸다는 것이 얘깃거리로 떠돌았다.
2. 핵심 정리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1930년대 일제 치하의 농촌
◎ 주제 : 가지지 못한 자의 저항과 가진 자의 횡포와 불안
3. 등장 인물
◎ 박장의 : 40대의 남자. 자작농 겸 소지주
◎ 정섭 : 술장사를 하는 가난한 사람. 박장의를 구타하는 저항 의식을 보여줌.
◎ 찬수 : 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떼를 쓰는 사람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무능하고 게으른 찬수가 정섭의 힘을 빌어 마을 사람들이 미워하는 박장의를 망신시키고 박장의에게 저항했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식의 유형이 드러난다. 즉, 마을 사람들의 의식, 찬수의 의식, 박장의의 의식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평균적 삶의 의식과 없는 자의 의식과 가진 자의 의식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의식이 아무런 관련성 없이 끝나 버린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박장의와 찬수의 대립이 있었는데, 그 대립이 의미를 띠지 못한 채 찬수가 마을에서 사라졌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1936년에 쓰여진 이 작품은 의식적 측면에서 보면 20년대 신경향파의 가장 초보적인 작품인 박영희의 “사냥개” 단계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농촌 소설이기 위해서는 농민의 계층 의식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하며 역사의 진보로써 방향성을 겨냥해야 하며 농민의 의식 또는 집단 의식을 형성시키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박영준의 “목화씨 뿌릴 때”는 농민의 계층 의식에 대한 작가 인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작품성 여부에 관계없이 문학 사상의 중요한 위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영희(1901~?) |
시인. 소설가. 평론가. 호 회월(懷月)․송은(松隱). 서울 출생. 배재고보를 거쳐서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 황석우(黃錫禹)와 함께 시동인지 <장미촌>을 발간하고(1921), 이듬해 <백조> 동인이 되어 “미소의 허영시”, “환영(幻影)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하여 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곧 그러한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1925년에 <개벽(開闢)>지에 단편 소설 “사냥개”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속하게 되어 이 해에 김기진(金基鎭)과 함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를 조직,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가담하여 그 지도적인 인물로서 극좌적 평론을 썼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카프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기 시작, 카프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대한 이론이 대립되자 1933년에 카프를 탈퇴하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다시 예술주의로 복귀했다. 1939년에는 조선 문인 협희 간사가 된 후 일본 북지 파견군(北支派遣軍)에 종군(從軍)하고 요시무라[芳村香道]라고 창씨 개명을 하였으며, 1943년 조선 문인 보국회 총무국장으로 친일 문학 운동에 협력했다. 1950년에 납북된 이후 소식 불명이다. 저서로는 “회월 시초(懷月詩抄)”(1937), “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가 있고, 단편으로 “전투”, “피의 무대”, “사건” 등이 있다.
▶ 사냥개
1. 줄거리
인색한 지주 정호는 어느 겨울, 밤잠을 못 이루고 전전긍긍한다. 그가 60원을 주고 사온 사냥개가 웬일인지 계속 짖어 대기 때문이다. 정호는 두려움과 초조함에 시달리다 무서운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개의 짖는 소리가 도둑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그러나 사냥개가 짖기를 멈추자, 정호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석 달 전, 어느 키 크고 남루한 사내가 시퍼런 칼을 들고 침입해 들어와 목숨의 대가로 돈 3천 원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정호는 문득 벽장 속에 감추어둔 3만 원이 무사한 지 확인한다. 그 돈은 논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찾아 둔 것인데, 이 돈 중 3천 5십 원이 내일이면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자 정호의 심정은 바삭바삭 타들어 간다. 그는 다섯 번째 첩을 데려 오는 대가로 논 3백 석과 3천 원을 주기로 했는데, 아직 지불하지 않았던 탓이다. 첩은 반발하며 달아났었는데, 정호는 아무래도 내일 중에는 우선 돈만이라도 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니, 금방 돈이 아까워진다. 남편을 저주하는 첩, 기근 구제금과 사립 학교 기부금을 요구하며 총을 들고 위협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번갈아 아른거린다. 시달리다 못한 정호는 그래도 믿을 만한 첫째 부인에게 가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방문을 나선 정호를 보고 사냥개는 더욱 짖어 댄다. 그는 금고를 들고 있다. 잘 자라고 흔드는 손에 달려들던 개는 주인이 역정을 내며 차 버리자, 드디어 주인의 목을 물어뜯는다. 피가 흘러나와 땅 속으로 스며든다. 인색한 주인 때문에 여러 날을 굶은 개는 피를 핥다가 미쳐서 종적을 감춘다. 정호의 시체는 이튿날 아침에 발견되는데, 마당 한편에는 피로 물든 붉은 얼음 위에 3만 원이 든 금고가 뒹굴고 있었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한밤중에서 이튿날 아침까지) / 공간(어느 시골의 타락한 지주의 집)
◎ 경향 : 계급주의 문학, 신경향파 문학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구성
발단 - 깊어 가는 밤, 큰 소리로 짖어 대는 사냥개 소리에 지주 정호는 놀라 일어난다.
전개 - 괴한이 침입하는 환상에 시달리던 정호는 금고 속의 삼만 원을 확인하여 본다.
위기 - 돈 때문에 사람들이 총을 들고 위협하는 환상에 시달린다.
절정 - 큰마누라에게 맡기려고 금고를 싸들고 나선 정호를 개가 물어뜯어 죽인다.
결말 - 이튿날 아침 정호의 시체와 금고가 발견되지만 개는 자취가 없다.
◎ 주제 : 지주 계급의 부도덕성 비판
◎ 출전 : <개벽>(1925)
3. 등장 인물
◎ 정호 : 모든 가치를 돈에 둔 지주로, 재산을 지키는 일에 온 신경을 쓰는 인물. 사람을 불신하며 불안에 시달린다. 재산을 지키려고 돈을 주고 사온 사냥개에게 죽음을 당한다.
4.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박영희가 1925년 4월 <개벽>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이기영의 “쥐 이야기”, 김기진의 “붉은 쥐” 등 초기의 계급주의 소설들처럼 이 작품에서도 동물을 등장시켜 당대의 구조적 모순과 그에 대한 저항 정신을 제시하려 한다. 이런 우화적 수법은 당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등장하는 동물의 생태에 대한 농밀한 관찰이 필요하고 그 관찰이 문학적 형상화로 이어져야 하는 것인데, 작가적 역량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대부분의 프로 문학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살인에 의해 끝마무리됨으로써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이 그저 막연한 파괴의 수준에 머물고 만다. 부유하나 타락한 지주에 대해 가난하고 선량한 무산 농민이 거세게 일어나 그를 타도함으로써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식의 도식적인 결론은 이념이 예술적으로 승화, 발전되지 못할 때 어설픈 정치적 구호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전형적 사례이다. 이념 문제를 떠나서 이 작품이 소설적 구성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건 전개의 개연성이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금고를 들고 나간 주인을 도둑으로 알고 덤비는 사냥개는 사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렇다고 해도, 주인을 물어 죽인다는 설정은, 비싼 돈으로 산 사냥개인 만큼 반드시 훈련을 받았을 터인즉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이 작품 말미에서 주인을 물어 죽인 개가 자유를 만끽하며 주린 배를 마음껏 채웠다는 논평자적 개입만큼이나 어색하다. 개에 대한 주인의 상습적 학대와 그로 인한 갈등의 축적 과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5년 8월에 결성된 카프(KAPF)는 그 치열했던 의욕을 문학적으로 성숙시키지 못하고 내부 분열과 일제의 탄압으로 시달리다가 1935년에 해산되고 만다. 카프의 등장과 좌절은 당시 우리 문학의 돌파구와 한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성취된 진지한 사회주의적 전망과 김팔봉(본명 김기진), 임화(본명 임인식)의 평론에서 추구된 과학성의 성과 등 부분적인 성과를 남기면서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경향파’라는 말을 창안한 박영희 자신은 정작 카프의 문예 이념에도 충실하지 못한 채,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전향서를 쓰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다. 일제 말기에 그가 보여준 친일 행각은 민족적 신념조차 부족한 기회주의적 지식인이 걸어가는 안타까운 훼절(毁節)이 아닐 수 없다.
박완서(1931~) |
소설가. 경기도 개풍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중퇴. 1970년 <여성동아>에 “나목(裸木)”을 발표하여 등단. 처녀 시절에 체험한 전쟁과 1960~70년대라는 급격한 근대화 시기를 보내면서 여성으로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섬세하게 포착하였다. 주로 격변기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소시민의 삶과 성장기의 체험을 적극 활용하는 경향을 보여 준다. 작품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꽃을 찾아서”,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 등이 있다.
▶ 그 여자네 집
1. 줄거리
일제 시대 행촌리 마을에서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등에 업은 채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각별한 사이로 발전한다. 그 즈음 일제의 강제 징병과 정신대 징발 정책이 집행되고 만득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곱단이와 혼인하기를 거부한 채 징집되어 곱단이와 이별한다. 곱단이는 정신대 징발을 피하기 위해 낯선 중년 남자와 결혼하여 신의주로 간다. 해방 이후 돌아온 만득이는 이북에 있는 곱단이를 만나지 못하고 순애와 결혼한다. 6․25 동란 이후 행촌리마저 북한 땅에 속하게 되고, 만득이와 순애는 서울로 와서 세간을 낸다. 서울에서 열린 고향 군민회 자리에서 다시 만난 순애는 ‘나’에게 아직도 곱단이를 잊지 못하는 만득이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만득이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다. 그 후 순애는 고혈압으로 죽고, 만득이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는 ‘나’에게 만득은 자신의 삶이 일제의 수탈 정책, 국토의 분단이라는 민족적 수난으로 인한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되었음을 강조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액자 소설
◎ 배경 : 과거(일제 말, 행촌리) / 현재(1998년 경, 서울)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부분적으로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회고적, 서정적, 고발적, 사실적, 체험적
◎ 문체 : 간결체, 화려체, 담화체
◎ 표현 : 간접 화법을 사용하여 직접적 제시 위주로 서술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하지 않고 회상담 형식을 갖추고 있다.
◎ 구성 :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단 구성, ‘현재-과거-현재’의 역순행적 구성
◎ 특징
1) 내부 이야기에서는 만득과 곱단의 사랑과 헤어짐을 다루고, 외부 이야기에서는 ‘나’의 눈을 통해 본 만득의 이야기를 다룬 액자 소설적 구성을 취함.
2) 수필적 담화식 서술을 통해 민족의 비극과 그로 인한 개인의 비극적 삶을 반전(反轉)의 수법으로 형상화함.
◎ 주제 : 일제의 폭력주의와 분단의 시대 상황에 의해 파괴된 개인의 삶에 대한 고발과 그에 대한 한(恨)과 분노
◎ 출전 :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3. 등장 인물
◎ 나 : 작중 화자(서술자), 여성 작가로서 주인공의 삶의 역정을 지켜보고 그 삶에 대하여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음.
◎ 만득 : 내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곱단이를 지극히 사랑하며 분단의 비극과 일제의 만행에 대한 한(恨)과 분노를 드러내 주제를 구현하는 인물
◎ 곱단 : 내부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 만득을 사랑하지만 딴 데로 시집가야 했던 역사적․사회적 상황의 희생자
◎ 순애 : 남편이 곱단이를 못 잊어 한다는 생각으로 한평생 고통받는 만득의 아내
4.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만득이와 곱단이를 통해 시대적 아픔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형상화함과 동시에 ‘일제의 수탈 정책’과 ‘국토의 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인식하자는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의 주제 의식은 결말 부분에서 만득이의 말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강제 징용과 정신대 징발을 비롯한 일제의 수탈 정책으로 인한 비극, 국토 분단으로 인한 비극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다른 소설과는 달리 색다른 특징이 있다. 마치 작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직접 서술한 수필처럼 여겨진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이 작품의 도입부에 1인칭 서술자인 ‘나’를 작가로 설정하고 있고, 실제로 일제 말 우리의 시골 마을에 있을 수 있는 일 - 여기서는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랑과 헤어짐 - 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이 글은 작품의 주된 이야기인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랑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갈 때에도 서술자인 ‘나’는 때로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만득이는 어쩌면 그리움에 겨워 곱단이 네 울타리 밑으로 개구멍을 내려다 말고 발갛게 초롱불을 켜든 꼬마 파수꾼 때문에 이성을 찾은 거나 아닐까.’ 같은 부분이 바로 이러한 서술 태도가 보이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만득이와 곱단이의 사랑은 일제의 징병과 정신대로 인하여 쓰라린 헤어짐을 겪고 말았다. 두 사람은 시대와 역사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비극은 이에 그친 것이 아니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져 곱단이는 이북 사람이 되었고, 6․25를 치른 후에는 휴전선이 그어져 만득이는 곱단이는 물론 고향까지 상실한 실향민이 되었다. 이로 보아 만득이의 슬픈 사랑은 역사와 시대가 만들어 낸 비극임을 알 수 있다. ‘나’가 김용택의 시 “그 여자 네 집”을 읽고 만득이의 아프고 쓰라린 그리움을 연상한 것도, 이 시를 북한 동포 돕기 시 낭송회에서 낭송하기로 결심한 것도 모두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일제의 징병과 정신대, 해방으로 인한 38선, 6․25로 인한 분단의 비극’ 등의 시대 배경은 이 소설의 가장 으뜸 되는 사회적 배경인 동시에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두자. 한 개인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역사적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더구나 시대와 사회의 힘에 의해 비극적 피해를 입게 된 개인의 삶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그러한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만득이와 곱단이는 일제 시대에는 징병과 정신대라는 제국주의의 폭력에 의해 희생이 된 사람들이며, 해방 후에는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또 한 번 비극의 재물이 된 사람들이다. 이러한 비극은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비극으로 확대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이산 가족 문제와 정신대 피해 보상에 관한 문제들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인용시 “그 여자네 집”에 대하여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 듯 언 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 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 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낭만시
◎ 성격 : 회상적, 낭만적
◎ 어조 : 그리움에 젖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
◎ 정서 : 그리움
◎ 구성
1연 -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생각하면 그립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2연 - 물동이 속 살구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그 여자네 집
3연 - 지붕이 노란 그 여자네 집
4연 - 무슨 일이든 같이 하고 싶은 그 여자네 집
5연 - 하얀 눈이 내리고, 눈 오는 밤이면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그 여자네 집
6연 - 나를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않던 그 여자
7연 - 눈만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그 여자네 집
◎ 특징
1) 묘사적, 서술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였다.
2) 정감을 드러낼 때는 비유적 이미지도 사용하였다.
3) 반복법을 사용하여 각운의 효과를 드러냄과 동시에 주제를 강조하였다.
◎ 제재 : 고향 마을의 정경. 보고 싶은 그 여자. 그 여자네 집
◎ 주제 : 지난 날 고향 마을의 사랑했던 여인을 그리워함.
<작품 해설>
시에서의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로만 존재한다기보다 항상 시적 화자의 정서, 또는 주제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살구꽃 피는 그 여자네 집’, ‘하얀 눈 내리는 그 여자네 집’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아름답고 그리운 그 여자네 집이라는 이미지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살구꽃’, ‘눈’의 이미지와 함께 그리운 그녀의 이미지, 나아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의 정서, 이미지, 어조와 같은 시의 모든 요소들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요소들은 결국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란 주제로 통합되어 있다. 이 시의 모든 시어들은 ‘나’의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하기 위해 설정되어 있다. 즉, 이미지화 되어 있는 것이다. ‘살구꽃 핀 그 여자네 집’, ‘눈 내리는 그 여자네 집’과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시적 화자의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하기 위한 말들이다. 끝으로, 이 시를 소설 “그 여자네 집” 속의 화자 ‘나’가 굳이 낭송했던 까닭은 그즈음 이 시에 흠뻑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가 자신이 살던 옛 고향의 추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인 것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그 추억은 어떤 남자와 여자에 관한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일 것임에 틀림없다.
▶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1. 줄거리
1951년 1․4 후퇴 후 피난길에서 일곱 살의 수지는 여동생 오목(수인)을 고의로 놓친다.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어머니 또한 비행기의 기총소사로 죽게 된다. 아버지가 남긴 부동산 덕분에 수철은 어엿한 중산층의 가장이 된다. 수지는 대학원 졸업식 날 중매로 만난 좋은 조건의 청년과 결혼하게 된다. 수지는 오목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동생을 비밀리에 수소문하고, 어느 고아원에 같은 이름의 소녀가 있음을 알고는 가끔 찾아간다. 하지만 그 애가 오목이로 밝혀지면 지난날 자신의 마녀 같은 행위가 들통날 것이고, 자신의 삶의 축(軸)은 꺾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오빠 수철도 오목의 가족 찾기 신문 광고를 통해 그 고아원을 알게 된 후, 오목을 도와 주며 일자리를 소개시켜 주는 익명의 독지가로만 남는다. 수지는 가난한 옛 애인인 인재와 오목이 만나는 광경을 목격한 날, 오목의 목에 걸린 은 표주박 노리개를 보게 된다. 수지는 질투심으로 둘 사이를 잔인하게 갈라놓고, 오목은 결국 고아원 친구인 보일러공 일환과 살게 된다. 지하방을 얻어 신방을 차린 오목은 인재의 아이인 일남을 낳게 된다. 남편에 대한 오목의 죄책감과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짐작하는 일환의 사이에는 결국 술과 폭력과 고통의 나날만 이어지게 된다.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수지는 고아원 자선 활동 등을 하는 위선적이고 정치적인 귀부인이 된다. 집 보일러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2남 3녀의 부모가 된 일환과 오목을 만나게 된다. 오목은 수지에게 일환이 중동 건설 현장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고 수지는 일말의 죄책감을 씻는다는 생각으로 오빠 수철을 통해서 일자리를 얻어낸다. 일환이 중동으로 떠나는 날 오목은 결핵으로 쓰러진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수지에게 감사의 표시로 은 표주박을 건넨다. 수지는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지만 오목이는 이미 죽어 있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 배경 : 시간(1951년 겨울~1980년대) / 공간(서울)
◎ 성격 : 현실 고발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간결체
◎ 구성
발단 - 1․4 후퇴 때, 피난길에서 수지는 다섯 살 된 동생 오목(수인)을 일부러 잃어버림.
전개 - 전쟁이 끝나고, 중산층으로 살던 수지는 고아원에서 찾은 자신의 동생을 모른 척하면서 자기 위안을 위한 자선을 베풂.
절정 - 동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마저 짓밟아 버리면서도 자선 생활을 하는 수지
결말 - 가난과 남편의 학대로 결핵이라는 병을 얻은 오목(수인)은 결국 수지 곁에서 죽음을 맞이함.
◎ 제재 : 이산 가족의 가족사
◎ 주제 : 전쟁의 비극과 이산 가족의 아픔. 중산층의 허위 의식에 대한 비판
◎ 출전 : <한국일보>(1982)
3. 등장 인물
◎ 수지 : 1․4 후퇴 때 여동생을 내버린 후 자신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가장과 허위 의식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 오목이 : 본명은 수인으로 수지의 여동생이다. 고아원을 거쳐 양녀로 입적되지만 자신이 이용되는 것이 싫어 뛰쳐나온다. 이후 수지의 가난한 옛 애인인 인재로부터도 버림을 받고 같은 고아원 출신이자 보일러공인 남편 일환을 만나 2남 3녀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모진 고생을 하다 결핵으로 죽는다.
◎ 수철 : 수지의 오빠로 가장의 역할을 하여 수지를 시집까지 보낸다. 익명으로 오목이를 후원하지만 자기 가정의 평온을 위해 그녀의 삶을 끝까지 외면하는 위선적인 인물이다.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6․25 전쟁으로 인한 이산 가족의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는 장편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산 가족의 아픔 이외에도 피난길에서 동생과 일부러 헤어지는 언니 모습의 형상화를 통해 중산층의 가장된 허위 의식을 함께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이산 가족간의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고 하겠다. 6․25 전쟁의 어지러운 피난길에서 수지는 귀찮은 존재인 동생을 일부러 잃어버렸다. 그 순간부터 수지와 오빠인 수철은 그 죄악을 외면하기 위해 더욱 더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가면을 쓴 채 중산층으로 살아간다. 한편, 버림받은 동생 오목은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홀로 헤쳐 나가야만 한다. 이 작품은 두 삶의 양상을 교체하면서 서술한다. 그리고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삶이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불행임을 보여 주려고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참회와 용서로 이 둘은 본래의 ‘우애 있는 동기’로 상징되는 인간적인 모습을 되찾고 있으나, 지은이는 이를 통해 과연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를 되묻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나목
1. 줄거리
한국 전쟁 중 서울 명동의 미군 PX 초상부에 근무하는 주인공 이경은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들 속에서 옥희도를 만난다. 자기 때문에 두 오빠가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경은 ‘황량한 풍경’이 담긴 눈을 가진 옥희도에게 끌린다. 두 사람은 명동성당과 장난감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는 완구점 사이를 거닐며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이경은 어느 날 PX에 나오지 않는 옥희도를 찾아 그 집에 갔다가 캔버스에 고목(枯木)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경은 역시 미군 PX에서 일하는 황태수라는 청년과 결혼한다. 세월이 흐른 뒤 이경은 옥희도의 유작전(遺作展)에 가서 지난날 옥희도가 그리고 있었던 그림이 고목(枯木)이 아니라 나목(裸木)이었음을 알게 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전후 소설, 세태 소설
◎ 배경 : 한국 전쟁 중 서울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성격 : 체험적, 시대 증언적
◎ 문체 : 논리적인 서술형의 호흡이 긴 문체
◎ 구성 : 순행적 구성
◎ 주제 : 청춘의 성숙 과정과 진정한 삶에 대한 깨달음
◎ 출전 : <여성 동아>(1970)
3. 등장 인물
◎ 어머니 : 전쟁 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그 후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과거의 시간, 즉 6․25라는 전쟁의 시․공간에 그녀의 삶은 정지되어 있다.
◎ 이경 : 위와 같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고독한 인물로 미군 PX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거기에서 옥희도를 만난다.
◎ 옥희도 : 미군 애인의 초상화를 그려 먹고사는 옥희도 역시 고독한 인물로서 나중에 나목을 그림으로써 진정한 화가가 된다.
◎ 태수 : 이경의 남편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6․25 전쟁 중으로 인해 황폐해진 정신을 갖게 된 사람들이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치밀한 묘사로 그려 낸 장편 소설로서, 암담했던 시절을 살아 내면서 인간다움 내지는 가치를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폭격으로 인한 두 오빠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 느끼며 살아가는 이경과 전쟁의 와중에 생활난 때문에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옥희도는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 낸 황량한 정신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태엽을 감아야 온갖 재롱을 피우는 완구점의 침팬지처럼 어떤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의식 없는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사람이다. 이러한 황량함을 평범한 여인의 일상 생활로 되돌아가 극복하는 경아, 그리고 화가의 길에 들어서 작품을 남기고 떠난 옥희도는 꽃과 무성한 잎을 다시는 피우지 못하는 고목(枯木)이 아니라 잠시 성장을 멈추고 어려운 한 시기를 극복하는 나목(裸木)을 그렸던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경과 옥희도는 각자 경험에 의해 고독감을 안고 있는 인물들로, 이들이 겪는 고독감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옥희도가 그린 고목(이경에 의해 인식된)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구체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옥희도는 이러한 나목을 그림으로써 진정한 화가가 되고, 이경은 그의 유작전에서 그것이 나목이었음을 확인하고 과거의 제 모습과 자신에 대한 옥희도의 의미를 뚜렷이 자각하게 되면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 소설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심상이 있다. 그것은 ‘부우연’ 휘장과 ‘부우연’ 캔버스와 같은 ‘부우옇다’는 심상이다. 이것은 이경이 옥희도의 눈에서 본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과 같은 심상이다. 외부 세계가 부우옇게 보이는 것은 세계를 모래 바람 같은 것이 뒤덮었거나 눈에 무엇이 덮여졌을 때이다. 옥희도와 이경은 후자의 경우이다. 옥희도가 그린 그림이 부우연 캔버스에 고목이었던 것은 옥희도가 그 황량한 풍경의 일각을 그림에 투사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경은 제 눈의 그것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나목이 고목으로 보였고 평범하고 안정된 생활의 끝에 그것이 없어지고 나자 고목이 나목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6․25 전쟁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옥희도라는 화가가 여성 화자의 관점에서 잘 그려져 있는데, 전쟁의 삭막함 속에서 고목으로 보였으나 안정된 상황에서는 나목으로 보이는 평범한 일상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통찰한 예술가의 혜안(慧眼)이 역설적으로 잘 드러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T. S. 엘리엇이 실생활에 있어서 정서와, 문학 작품에 구현된 정서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이용한 문구로서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을 말한다. 개인의 감정과는 상식적으로 직접적 관계가 없는 어떤 심상, 상징, 사건에 의하여 구현된다는 사상, 즉 개인 감정의 예술적 객관화의 사상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한 객관화를 위해 이용된 심상, 사건, 상징 등이 바로 객관적 상관물이며,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나목’이 그 한 예이다.
<참고> 세태 소설(世態小說)
소설의 구조 원리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으로 시정 소설(市井小說) 또는 풍속 소설(風俗小說)이라고도 한다. 모든 시대에 타당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시기의 풍속이나 세태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로 작중 인물의 내면 세계를 심리주의적으로 파헤치는 작법과는 달리, 소설의 사건과 전개를 순전히 풍속 세태적인 사실에서 구하는 소설 양식이다. 따라서, 세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든 시대에 타당한 인간적 진실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기의 특정 사회적 양상에 타당한 진실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태 소설에서는 작가가 지니고 있는 주장이나 이념이 등장하지 않고, 다만 작가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관찰된 당대 사회의 풍속이 제시될 뿐이다. 1930년대에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운 카프 문학이 점차 퇴조하면서, 이념의 공백(空白)을 채운 것이 곧 세태 소설이다. 박완서의 “나목”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의 황량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태 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 도시의 흉년
1. 줄거리
주인공 지수연은 쌍둥이 자매로 태어난다. 그러나 수연의 쌍둥이 남매는 상피 붙는다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이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 후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할머니의 싸늘한 눈총을 받으며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지만 차별 대우 속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낸다. 1․4 후퇴 때 빈집을 털고, 양공주의 포주 노릇으로 돈을 모아 동대문 시장의 거부로 떠오른 수연의 엄마는, 국민학생인 수빈과 수연의 뒷바라지에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 후, 수연은 여자 대학에 입학하고, 수빈은 1년을 재수하여 서울 대학에 입학한다. 수빈은 대학 재학 중, 돈이면 만사가 다 해결된다는 어머니와 집안의 가치관에 환멸을 느껴, 도피처로 군에 입대한다. 군 입대 전, 사랑을 느꼈던 가난한 판잣집의 여대생 순정과의 중간 연락을 수연에게 부탁한다. 군에 간 수빈과 가난한 여대생의 연락원 노릇을 하던 수연은 집에서 금덩이를 훔쳐다가 첩 살림을 하는 아버지를 판자촌 동네에서 발견하곤 당황한다. 결국 수연은 군에 간 오빠의 뒷바라지를 빌미로 횡령한 돈을 아버지의 첩 살림에 보태주게 된다. 대신 아버지가 훔친 금덩이를 아버지(지대풍)가 직접 집에 가져다 놓게 함으로써 가정의 평온을 꾀한다. 그런데 아들을 낳은 지대풍의 첩은 절름발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교묘하게 수연과 그의 집에 접근해 온다. 그러나 수연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첩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 무렵 수연의 언니 수희는 법관인 서재호와 약혼을 한다. 그러나 일류병에 걸려 허세와 사치만을 좇는 어머니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수희를 시기한 수연은 형부가 될 그 남자를 일부러 유혹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다. 언니의 행복에 불행한 복선을 긋기 위해서다. 그 후 언니는 결혼을 하나 보이지 않는 불행을 잉태하고 결국에 가서는 이혼을 하고 만다. 또한 그 무렵 휴가 나온 수빈은 순정과 장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물질 만능주의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에 부딪쳐 귀대를 하루 앞둔 날 저녁, 심한 좌절감에 빠져 만취가 된 채 괴로워한다. 그 날 밤 잠을 자던 수연은, 수빈의 괴로움을 쌍둥이 특유의 예지력으로 예감하고 정신 없이 속옷 바람으로 차고 속에서 괴로워하는 수빈을 도와 주려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상피 붙는다는 오해를 받고 심한 구타를 당한다. 그리고 며칠 전 집에 와 있던 대고모 할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상피 붙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다음날 아침, 수연은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하러 어머니에게 갔다가 최 기사와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고 아버지의 첩 이야기를 한다. 결국 가정에 파탄이 오고, 할머니는 절에 있는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고, 수연이 어머니는 반신불수가 된다. 그리고 수빈은 순정과 결혼하여 그들이 바라던 가정을 꾸려 평온을 찾는다. 수연은 집을 나와 구주현이라는 애인을 면회 갔을 때 만난 성미영의 집에 기거하면서 구주현이 경영하던 야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구주현의 석방을 기다린다. 그 후 석방된 구주현이 얼마 전 별세한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수연도 그를 따라가 그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제 : 현대 사회의 타락한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그 극복
3. 등장 인물
◎ 수연 : 쌍둥이 남매로 태어난 여대생. 부모의 전근대적 사고로 갈등하면서 스스로 사랑의 방법을 체득해 나감.
◎ 수빈 : 수연과 쌍둥이로 태어난 대학생. 어머니의 가치관에 환멸을 느끼고 재학 중 군에 입대함.
4. 이해와 감상
“도시의 흉년”은 1979년 <문학사상>에 연재된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박완서는 개인의 삶이 얼마나 사회와 밀착되어 있으며, 개인 개인이 겪는 슬픔과 기쁨, 아픔과 환희, 그리고 성공과 실패가 사회 현실의 전체적인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 준다. 그리고 구체적인 생활 체험에 뿌리를 내린 날카로운 직관력과 만만치 않은 언어 감각은 박완서의 작가적 재능을 엿보게 한다. 그의 소설들은 개인과 사회라는 추상적인 실체들의 관념적인 상호 작용의 해부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적 충동과 두려움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과 개인의 의식이 어떻게 만나며, 어떤 매듭을 이루며, 그 매듭 안에서 어떻게 개인과 사회가 동시에 도덕적․정신적으로 마비되고 붕괴되는가 하는 통찰을 보여 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도시의 흉년”은 예리한 비판 의식, 섬세한 심리 묘사, 밀도 있는 드라마로써 도시 속의 인간 세태를 극점까지 추적하여 부(富)를 우상화하던 70~80년대 한국인들의 삶의 현실과 내면을 파헤친 작품이라 하겠다. 박완서는 이 작품으로 인해서 대중성을 획득했다.
▶ 엄마의 말뚝
1. 줄거리
5남매의 어머니인 ‘나’는 “나만 없어 봐라. 집안 꼴이 뭐가 되나?” 하는 식의 안주인이다. 이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상사들이 하나같이 ‘나’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다 자라고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집안에서 일어날 사고의 인자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한 타성화된 섬뜩함에서 차츰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농장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나’가 여지껏 경험한 섬뜩함 중에서도 최악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친정 어머니가 폭설로 미끄러운 빙판 길에서 넘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병원에 입원한 친정 어머니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수술을 거부했다. 장시간의 수술 끝에 병실로 돌아온 어머니는 비정상적인 강단과 근력을 보이다가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킨다. 어머니는 그 착란 증세 속에서,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 실어증에 걸린 데다 유혈이 낭자한 채 비극적으로 죽어간, 한 맺힌 일들을 다시금 되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곱게 늙으신 외모와는 달리 가슴 속 깊이 원한과 저주를 묻고 살아온 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빠의 비극적 생애 때문이었다. 6․25 전 오빠는 한때 좌익 운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오빠는 적 치하의 서울에서 불안하게 살고 있었다. 오빠는 전향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도덕적 열패감에 괴로워했다. 또한 그는 수도를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가 버린 정부에 대한 불신과 원망, 고독 등으로 몸부림쳤다. 오빠는 이웃의 고발로 끌려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인민 궐기 대회에서 제일 먼저 의용군에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어머니와 나는 혜택을 누렸었다. 그러나 석 달만에 세상이 바뀌자, 우리 집은 빨갱이 집으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이웃의 극심한 박해가 뒤따랐다. 1․4 후퇴로 인해 오빠는 다시 돌아왔다. 피난이 어렵게 되자, 어머니는 서울에 와서 처음 말뚝 박은 산비탈 달동네로 피난했다. 그러나 은신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오빠는 인민군의 출현으로 실어증까지 보였다. 인민군은 오빠의 신분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어머니는 오빠의 행동을 선천적인 정신 불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민군에게 말했다. 그러나 오빠는 정말로 정신적 불구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오빠는 다시 후퇴하는 인민군 보위 군관에게 총상을 당한 뒤, 실어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유혈을 낭자하게 흘리며 죽었다. 어머니는 오빠의 시신을 화장하여 이북 고향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바람에 날려보냈다. 그것은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6․25의 비극과 분단에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아직도 투병 중인 어머니는 오빠의 화장과 똑같은 방법의 사후 처리를 ‘나’에게 부탁했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6․25 전쟁. 서울
◎ 주제 : 6․25의 비극과 분단 고통의 극복 의지
3. 등장 인물
◎ 나 : 주인공. 5남매의 어머니. 평범한 가정 주부.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분단의 아픔에 사로잡혀 있음.
◎ 친정 어머니 : ‘나’의 어머니.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한을 지닌 인물
4. 이해와 감상
“엄마의 말뚝”은 중편 소설로 1980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일종의 연작(連作) 소설이다. 6․25로 인해 이산된 한 가족이 겪은 전쟁 당시의 상황과 현대의 서울을 병치시켜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 속에는 박완서의 작가 의식이 큰 줄기를 차지하는 분단의 극복 의지가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서 분출되고 있다. 분단의 비극이 아직도 우리의 삶 속에서 꺼지지 않은 불씨로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을 작가는 한 어머니의 정신 착란의 외피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몸소 분단의 희생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절실하게 와 닿게 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과 민족의 관계가 오직 가족사 속에서 깊이 파악됨으로써 추상적이기 쉬운데, 이 작품에서는 분단 문제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이 남다른 경지임을 보여 준 것이다.
▶ 우황청심환
1. 줄거리
남궁씨는 갑자기 친구가 죽는 바람에 그가 운영하던 조그만 회사를 맡았다. 남궁씨는 그 회사의 고용 사장으로, 오 년 여 만에 안정적인 회사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회사가 안정되자, 그 친구의 아들이 회사를 경영하겠다면서, 퇴직을 강요한다. 남궁씨는 퇴직을 위로하기 위해 두 달 여 동안 외국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때 집에는 예전에 독립 운동을 하러 만주로 간 증조부의 자손인, 연변에 사는 육촌 동생과 그의 가족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한약재를 팔려고 하였다. 아내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남궁씨는 이들이 가져온 약재를 친구의 아들에게 부탁한다. 그 친구의 아들은 남궁씨를 회사에서 몰아내는 것이 미안하고 해서 그 약재들을 사 준다. 동생 네 식구들이 떠난 뒤 아내가 운동권인 둘째 아들 현이 이야기를 하면서 운다. 남궁씨는 이러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가 연변에서 온 동생 네 식구들을 못마땅해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적(1980년대)
◎ 성격 : 사실주의적
◎ 주제 : 우리 역사 속에서의 민족적, 사회적 갈등의 문제와 그 화합
◎ 출전 : <창작과 비평>(1991)
3.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민족적 문제와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의 집에 찾아온 연변의 육촌 동생들로 인해 갈등하게 되는 남편과 아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작품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아내가 연변에서 온 동생 네 식구들을 못마땅해한 것이 운동권인 둘째 아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의 작가는 이러한 상황 설정을 통해 분단과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민족적 갈등의 문제와 남한 내부적인 갈등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민족적, 사회적 화합의 장을 모색하고자 한다.
▶ 황혼
1. 줄거리
아파트에서 늙은 여자(시어머니)와 젊은 여자(며느리), 젊은 여자의 남편과 아이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어머니란 칭호를 쓰지 않고 노인이니 할머니라는 말을 쓰고 있다. 시어머니는 가슴앓이 병이 있다고 하면서 며느리와 아들에게 명치 부분을 문질러 달라고 청하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이를 거절한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도 뚜렷한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날, 며느리 친구한테 전화가 걸려 왔는데, 친구는 홀 시어머니가 지금 성적(性的)인 욕구 불만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이 전화 내용을 우연히 엿듣게 된 시어머니는 심한 모욕감을 느껴 분개한다. 시어머니는 기쁨과 슬픔을 나눌 대상이 그리워 명치 부분을 문질러 달라고 한 것인데, 이를 오해하는 며느리와 아들이 미웠다. 늙은 여자는, 자기가 비록 혼자 살지는 않지만 자기 뜻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현대) / 공간(서울의 강변 아파트)
◎ 경향 : 심리주의적 사실주의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고부간의 심리적 갈등에서 오는 시어머니의 허탈감과 소외감
◎ 구성
발단 - 고부간의 소원(疏遠)한 관계
전개 - 명치 부분을 문질러 달라는 시어머니와 거절하는 며느리
절정 - 며느리와 친구의 전화를 엿들은 후 시어머니는 모욕감에 분개함.
결말 - 시어머니의 소외감
3. 등장 인물
◎ 젊은 여자(며느리) : 주관이 뚜렷하고 완벽하며 냉정하다.
◎ 늙은 여자(시어머니) : 감정적인 인물. 과부
◎ 젊은 여자의 남편 : 수동적인 인물
◎ 의사 : 이지적이고 사무적임.
4. 이해와 감상
1979년 <뿌리깊은 나무>社에 발표된 단편 소설. 중산층의 허위에 찬 생활 윤리를 풍자한 작품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감정 대립을 통해 강남 아파트 단지로 상징되는 대도시 중산층의 물질적 풍요의 공허함과 윤리 의식의 붕괴 상태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완서의 소설은 개인이 겪는 슬픔과 기쁨, 성공과 실패가 사회 현실의 전체적인 문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 준다. 구체적인 생활 체험에 뿌리를 둔 직관력과 섬세한 언어 감각을 통해서, 개인과 사회라는 추상 형태를 생생한 리얼리티로 빚어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전반적인 주제 의식은, 어떻게 해서 개인과 사회가 도덕적으로 마비되고 정신적으로 붕괴되는가의 원인을 파헤치는 데 놓여 있으며, “황혼”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고부간의 심리적 갈등과 함께 젊은 세대의 윤리적 마비와 늙은 세대의 소외감을 포착하고 있다. 또한, 성적(性的)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는 타락한 상상력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늙은 여자’가 명치 부분을 문질러 달라는 것은 오랫동안 과부로 살아 왔기에 정이 그립고, 쓸쓸함을 위로 받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였다. 그런데 이것이 ‘성적 욕구와 불만에서 오는 증세’라고 오해받을 때 ‘늙은 여자’는 분노와 함께 소외감을 느낀다. 현대 사회는 핵가족화로 세대간의 단절이 심화되고 있다. 사고 방식과 감정의 교류 방식이 다르다. 이러한 단절감이 전통적으로 정(情)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던 가족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더 심화되고 있다는 데 치유의 어려움이 있다. 자식까지 내 품안을 벗어나고 며느리에게까지 오해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노인 세대의 심리적 부담감, 그리하여 이제 내 인생의 정처(定處)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족 구성원의 짐에 불과하다는 소외감, 곧 ‘황혼(黃昏) 의식’을 작가는 매섭고 앙칼진 목소리가 아니라 비애에 찬 노인의 내면 풍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그러움과 사랑’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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