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조선지광 65호, 1927.3)
* 해설피 : 느리고 어설프게. 시원치 않게
* 함추름 : ‘함초롬’의 사투리.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 성근 별 : 드문드문 돋아난 별.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1923년 3월을 창작 시기로 추정하는데, 당시 22세에 상경한 시골 젊은이의 객수와 일제하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민족의 ‘잃어버린 공간’ 회복의 의지를 세련된 감각으로 처리한 모더니즘 계열의 초기시에 해당한다.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고향 옥천에 대한 향토색 짙은 기억을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해 입체화했다.
▶ 성격 : 감각적, 묘사적, 향토적
▶ 특징 : ① 감각적 이미지가 두드러짐.
② 후렴구의 반복→이미지의 통일성 확보
▶ 어조 : 애틋한 어조
▶ 구성 : ① 평화롭고 한가로운 고향의 정경(제1연)
② 겨울밤 풍경과 아버지의 회상(제2연)
③ 유년기의 회상(제3연)
④ 누이와 아내에 대한 회상(제4연)
⑤ 귀가와 휴식(제5연)
▶ 제재 : 고향의 정경
▶ 주제 :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연구 문제>
1. 각 연과 연 사이에 동일한 시행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얻는 효과를 5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 이미지의 통일성(형태상의 균형)을 가져 오고, 음악성(리듬의 규칙성)을 살리며, 그리움의 정서를 강조한다.
2. 이 시의 각 연들은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장면 전환을 시나리오의 장면 전환 기법에 견주어 보면 무엇과 유사한가? ☞ O.L(Over Lap) 수법
3. 이 시가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를 80자 정도로 쓰라.
☞ 평이하고 감각적인 시어를 사용, 그리운 고향의 정경을 선명한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향수’라는 인간의 근원적 정서를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4. 이 시에서 (1)공감각적 이미지가 제시된 시행을 찾아 쓰고, (2)어떻게 감각이 전이되고 있는지 밝히라.
☞ (1) 해설피 금빛 게으름 울음을 우는 곳
(2) 청각을 시각화함.
<감상의 길잡이>
이 시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넓은 벌’, ‘실개천’, ‘얼룩빼기 황소’, ‘질화로’, ‘짚베게’, ‘화살’, ‘어린 누이’, ‘발 벗은 아내’, ‘성근 별’, ‘서리 까마귀’ 등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심상에 의해 고향의 정경이 재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병렬적으로 구성된 이 시의 다섯 개의 연들은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행을 매개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집중되는데, 제1,2,5연이 현재 시제임에 대해 제3,4연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형이 지금도 지속되는 고향의 모습이라면, 과거형은 이미 추억으로나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일 것이다.
한편, 이 시는 공감각(共感覺) 내지 감각의 전이(轉移)를 통해 참신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빚어낸다.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 ‘금빛 게으른 울음’,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와 같은 표현은 청각적 이미지를 색채화 하고 조형화 한 고도의 기교를 엿보게 하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 시는 시인이 태어난 충북 옥천(沃川) 읍내의 한가로운 농가를 생생히 재현한 하나의 풍경화이다.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면서 시인은 실향민(失鄕民)으로서의 비애를 내면화한 것으로 보이며, 매 연 마지막 행에서 반복되는 영탄의 목소리는 귀향 의지를 표현한 것인 동시에 과거로의 귀환, 즉 유년기의 ‘꿈’에 대한 강한 애착을 의미한다. 이 시가 모두에게 생생한 감동을 주는 것은 ‘고향’이라는 보편적 회상의 대상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며, 그 형상화의 방법에 있어서 독특한 감각과 향토적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유리창 1
- 정지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조선지광 89호, 1930.1)
*열없이 : 맥없이. 속절없이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정지용의 시풍은 참신한 이미지의 추구와 절제된 시어의 선택에 있다. 이 시에서는 죽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극도의 절제된 감정과 비정하리 만큼 차가운 객관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혈육과의 이별은 커다란 슬픔일 것이다.
이 시는 어린 자식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슬픔을 노래한 작품인데 시적 화자가 바로 슬픔의 주체인데도 맑고 차가운 감각적 이미지에 의해 그러한 주관적 감정이 과잉 노출되지 않고 절제되어 나타난 작품이다. 정지용의 초기시의 특징이 가장 성공적으로 표현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의
▶ 성격 : 애상적, 감각적, 회화적
▶ 특징 : 선명한 이미지, 감각적 시어의 선택과 감정의 대위법(對位法)을 통한 감정의 절제가 돋보임.
▶ 어조 :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애상적 어조
▶ 구성 : ① 기 : 유리창에 어린 영상(1-3행)
② 승 : 창 밖의 밤의 영상(4-6행)
③ 전 : 외롭고 황홀한 심사(7-8행)
④ 결 : 죽은 아이에 대한 영상(9-10행)
▶ 제재 : 유리창에 어린 입김
▶ 주제 : 죽은 아이(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 시어의 풀이
* 유리창 : 서정적 자아를 그리워하는 대상과 단절시키면서, 동시에 별(죽은 아이의 영혼)과 영상으로 대면하게 한다.
* 언 날개 : 입김 자국을 가냘픈 새에 비유
* 별과 새 : 죽은 아이의 영혼
* 외로운 황홀한 심사 : 슬프고 외로운 감정과 차갑고 황홀한 감정이 대비되는 ‘감정 대위법’.
<연구 문제>
1. ㉠,㉡,㉢이 나타내는 이미지의 공통점을 쓰라.
☞ 소중하고 고귀함을 드러내는 공통점을 지닌다.
2. 이 시에서 ‘물먹은 별’의 의미를 50자 정도로 쓰라.
☞ 별을 보며 저 먼 세상에 가 있을 아들을 생각하고 화자의 눈에 눈물이 어려 있음을 표현했다.
3. 이 시와 김현승의 눈물은 창작 동기가 비슷하고, 시의 바탕에 흐르는 정서도 일치한다. 각각의 화자는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그 차이점을 60자 정도로 쓰라.
☞ 유리창은 화자의 슬픈 감정을 엄격히 절제하고 있은며, 눈물은 슬픈 감정을 신에 대한 신앙으로 극복하고 있다.
4.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모순 형용의 시구를 화자가 처한 정황에 비추어 설명해 보라.
☞ ‘외로운 심사’는 자식이 죽은 정황에 비추어 당연하거니와, ‘황홀한 심사’는 유리창을 보석처럼 닦으며 죽은 아이의 영상과 만날 수 있다는 데 연유한다.
5. 이 시의 제목 ‘유리창’이 암시하는 의미를 50자 정도로 쓰라.
☞ 이승과 저승의 운명적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두 세계를 잇는 교감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의 제재인 ‘유리창’은 이승과 저승의 운명적 단절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교감의 매개체이기도 하여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유리창에 가까이 서서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화자는 창 밖 어둠의 세계로 날아가 버린 어린 생명의 모습을 한 마리의 가련한 ‘새’로 형상화하여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고 말하고 있다.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는 어둠’은 화자의 어둡고 허망한 마음과 조응(照應)이 되고, ‘물먹은 별’이라는 표현은 별을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 눈물이 어려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이 시에서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같은 관형어의 모순 어법은 독특한 표현이다. ‘외로운’ 심사는 자식이 죽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하거니와 ‘황홀한’ 심사는 유리창을 닦으며 보석처럼 빛나는 별에서 죽은 아이의 영상을 볼 수 있다는 데 기인한 것이다.
이 시는 겉으로 서늘하고 안으로 뜨거운 정지용 시의 특징과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절제된 정서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맥락 읽기>
1.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나
2.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유리창을 보고 서 있다.
☞ 홀로 유리를 딱고 있다.
☞ 혼자에요,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고 있어요.
3. 나가 그러고 있는 시간은? 계절은?
☞ 입김이 나는 걸 보니 추운 겨울 같은데요, 새까만 밤이에요.
4. 왜 나는 새까만 밤에 잠은 안 자고 유리창을 보고 있을까?
☞ 근심 걱정이 있나봐요. 슬픈 일이 있나봐요(1행). 그리워하고 있어요(4행). 누군가 산새처럼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날아가 버렸대요. 외로와요(8행).누군가가 떠나 갔어요(9,10행)
5. 나의 심정은 어떤 것 같니?
☞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대요, 물먹은 별이래요, 누군가 산새처럼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떠났대요.→슬퍼하고 있어요.
5-1. 그 누군가는 어떻게 됐길래?
☞ 고운 폐혈관이 찢어졌으면 죽은거죠.
☞ 산새처럼 날아갔어요. 어디로 갔는 지는 모른다.
6. 슬프면 술을 마셔도 될텐데, 왜 하필 유리창을 보고 있나?
☞ 방안은 답답하니깐요.
7. 유리창을 보면 답답한게 사라지니?
☞ 밖이 내다보이니깐요.
8. 그래도 방안에 있는 건 마찬가진걸?
☞ 방 안에 있어도 밖이 보이기만 하면 덜 답답해요.
9. 그럼 나는 유리창을 보면서 슬픔을 잊고 있겠네?
☞ 아니에요,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고 그래요, 슬픈 것이 자꾸 어른거려요.
10. 그럼 유리창은 나의 슬픈 마음을 지속시키네요?
☞ 예, 보기만 하게 만드니깐요, 볼 수만 있게 하니깐요. 슬픈 내 모습을 비춰주니깐요.
11. 그러면, 유리창과 슬픔이 연관이 있는건가요?
☞ 유리창은 밖을 보여주기만 하고 못 나가게 가로 막고 있어요. 죽음(이별)은 보고 싶게 만들기만 하고 만날 수는 없게 해요.
11-1. 유리창은 어떤 느낌을 주나?
☞ 밖을 볼 수있게 해 줘요.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글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編) 중에서 (발표지-문장 3호, 1939.4)
* 서늘옵고 : 서느렇고.
* 이마받이 : 이마를 부딪치는 짓.
* 웅숭그리고 : 궁상스럽게 몸을 옹그리고.
* 아니긔던 : 아니하던.
* 핫옷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정지용의 후기시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초기의 모더니즘 계열에서 벗어나서, 가톨릭에 몸담은 종교시의 통과 의례를 거친 뒤, 동양적 세계에서 노니는 관조적 서정을 절제된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정지용다운 시어의 세련된 구사가 두드러지는데, 첫 연에서부터 ‘먼 산이 이마에 차라’와 같은 감각적 표현은 그의 장기(長技)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는 부분이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와 같은 부분들도 그 세련된 언어의 맛을 잘 살리고 있는 표현이다.
밤새 춘설이 내려 서정적 자아는 문을 연다. 선뜻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절기는 이미 우수를 지났건만 추위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봄기운이 자연 속에 피어나서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이러한 봄향기가 옷 속에까지 스며온다. 겨우내 웅크렸던 생명들이 ‘옹송그리고 살어난 양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러한 봄기운을 느끼기 위해서는 비록 추위가 남아 있더라도 핫옷을 벗어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시인은 역설적으로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직설법이 아닌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맛보게 된다.
신비로움과 설렘의 감정이 교차된 시선에서 일상적 삶에서조차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는 시인의 따스함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중견 시인의 작품이라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풋풋함과 신선함이 배어 있지만, 작품의 의미가 자연에 대한 경탄에서 그치고 만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카페․프란스
- 정지용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롵[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학조 창간호, 1926.6)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튤립(tulip).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지상(紙上)에 발표된 정지용 최초의 작품으로 <향수>에 나타난 향토적 서정과 상반되는 모더니즘 색채를 띠고 있다. 이 시에서는 생경한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모더니즘의 특징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젊은 시절 영문학도였던 시인 자신의 이국 취미(異國趣味)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냄새가 막무가내로 풍겨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바로 식민지 치하에 놓인 지식인의 힘없는 고뇌가 행간에 속속 배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밤비는 뱀눈처럼 가늘’고, 나는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픈’ 것이다. 이와 같은 차갑고 싸늘한 이미지는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로 이어지게 됨으로써 시적 화자가 안고 있는 망국민의 설움은 결국 이국종 강아지에게 자신의 발을 빨게 하는 자학적인 심상으로까지 확대되고 만다.
또한 이 시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도 한국적인 것이 아니다. ‘프란스’라는 카페의 이름부터가, 아니 ‘카페’라는 공간 자체가 1920년대의 한국인에게는 너무도 낯선 분위기인 것이다. 이러한 낯선 곳에서 슬픔에 겨워 자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바로 무기력했던 당시 지식인의 실제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전 10연의 이 시는, 형태적으로 안정된 1~4연의 앞 단락과 불안정한 5~10연의 뒷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앞 단락에서는 1연과 3연이, 2연과 4연이 서로 비슷한 형태로 짝을 이루면서 대응되고 있다. 1․3연은 시적 화자가 동료들과 함께 ‘프란스’란 상호(商號)의 카페로 갈 때까지의 거리 모습이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비뚜로 선 장명등’,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등으로 제시된 시적 화자의 현실 공간은 ‘옮겨다 심은’․‘비뚜로 선’․‘뱀눈처럼 가는데’․‘흐느끼는’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식된 공간, 또는 화자가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곳임을 알게 한다. 2․4연에서 ‘루바쉬카’는 ‘비뚜른 능금’과, ‘보헤미안 넥타이’는 ‘벌레 먹은 장미’와, ‘비쩍 마른 놈’은 ‘제비처럼 젖은 놈’과의 결합을 통해 이질적인 서구 문화의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뒷 단락은 ‘카페․프란스’ 내부의 정경이다. 처음 5․6연은 앵무새와의 대화 부분으로 앵무새가 나타내는 말의 이질성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8․9연은 시적 화자가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님’, ‘나라도 집도 없음’ 등으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고 있다. ‘카페․프란스’는 거리 모습과 동일한 이국적 공간으로 화자에겐 다만 ‘옮겨다 심은’ 폐쇄적 장소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앵무새’와 ‘졸고 있는 아가씨’와 ‘이국종 강아지’뿐으로 화자와의 대화가 전혀 불가능한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카페․프란스’는 시적 화자의 폐쇄된 현실 공간을 상징하는 곳으로 ‘흰 손’을 가진 지식인 화자의 무기력한 독백만이 가능할 뿐이다.
말
- 정지용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조선지광 69호, 1927.7)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어린 화자의 따스한 마음을 통해 가축이 겪고 있는 이산(離散)의 아픔을 지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박한 동시(童詩)적 감각의 시로, 속삭이는 듯한 어투와 밀도 있는 압축과 여운 있는 생략, 특히 색채감과 질량감을 함께 보여 주는 ‘검정콩 푸렁콩’이라는 시어는 이 시의 작품성을 더욱 튼튼하게 하고 있다.
첫 행에서 화자는 말을 ‘다락’과 같다고 한다. 이것은 어두컴컴하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다락과 말이 사는 마구간이 비슷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발상으로, 이것을 통해서 화자가 어린 아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두컴컴할 뿐만 아니라 곰팡이 냄새까지 배어 있어, 흡사 마구간을 연상하게 하는 ‘다락’은 우리의 전통 가옥 구조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부엌과 천장 사이의 공간에 이층처럼 만들어 물건을 넣어 두게 된 곳을 말한다. 유년의 화자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그 곳에 몰래 기어들어가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그 속에서 군것질도 하고, 책도 읽고, 동무들과 장난도 하며 무지개 꿈을 키웠을 것이다. 말을 다만 동물로만 여기지 않고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가축으로 생각하는 화자는 ‘말아, 사람 편인 말아’라고 다정히 부르며 ‘검정콩 푸렁콩’을 주겠다고 말한다. ‘콩’은 말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로, 화자가 콩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곧 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함축한다. 그러나 키가 크고 날렵하게 생긴 말에게서 화자는 점잖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에게서 진한 슬픔을 느낀다. 화자가 말에서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2연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자’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해 말이 밤마다 달을 쳐다보며 헤어진 부모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온갖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 가축을 길러 내지만, 가축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가족과의 이산의 아픔을 겪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해 주는 이 작품은 가축을 기르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반성하게 하는 한편, 나아가 동물에게도 육친에 대해 갖는 그리움이 인간과 동일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시키고 있다.
그의 반(半)
- 정지용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시문학 3호, 1931.1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정지용의 종교시(신앙시) 11편 중, 첫 작품으로 <시문학> 3호에 무제(無題)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가 시집에 그의 반이라는 제목으로 재수록된 작품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정지용은 이 시에서 신(神)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이나 인간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존재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절대적 존재인 ‘그’, 즉 신앙의 대상인 신(神)에 대한 자신의 경배(敬拜)와 묵도(黙禱)의 의지를 표백하고 있다.
▶ 성격 : 관념적, 독백적
▶ 심상 : 시각적, 관념적 심상
▶ 어조 : 무조건적이고 순응적 어조,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 어조
▶ 표현 : 은유, 열거, 도치법
▶ 특징 : 절대적 존재인 신을 고귀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로 형상화함.
▶ 구성 : ① 기 : 그의 존재(1행)
② 승 : 순수하고 고귀하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2-6행)
③ 전 : 그에 대한 경배의 자세(7-11행)
④ 결 : 그와 나의 관계(12-14행)
▶ 제재 : 절대적 존재
▶ 주제 : 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배와 묵도
<연구 문제>
1. 이 시의 내용을 바탕으로 ㉠과 ㉡의 관계를 150자 내외로 설명해 보라.
☞ ‘그’는 고귀하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절대적 존재이고 ‘나’는 한계성을 지닌 미미한 존재로서 항상 ‘그’를 경배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만 한다. 따라서, 그는 절대적 존재이고 ‘나’는 항상 그를 따르고 그에게 의지하는 인간 ―절대자와 인간과의 관계 즉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관계이다.
2. 이 시에서 ㉠은 여러 가지 이미지로 형상화 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이 지닌 공통점을 모두 쓰라.(’94.서울대)
☞ ‘그’는 ‘영혼 안의 고운 불’,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금성(金星)’, ‘고산 식물(高山植物)’ 등으로 형상화 되고 있는데, 이 말들은 순결하고 높으며 가까이 하기 힘든 고귀한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3. 이 시에서 ㉢이 뜻하는 바를 쓰라.(’94.서울대)
☞ ‘그’는 순결하고 높으며, 가까이하기 힘든 고귀한 존재이므로 감히 대등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서 겸허하게 순종하고 경배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4. 이 시에서 화자와 대상간에 거리를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내기 위해 쓰인 시어를 찾아 쓰라. ☞ 바다
<감상의 길잡이>
정지용은 그의 신앙시(종교시)에서 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그의 그러한 시적 태도는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1행에서 화자는 목적어를 도치시킨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하여 ‘그’가 범접(犯接)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고, 자신은 미미한 존재임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수사적 의문은 이후의 ‘그’에 대한 비유적 형상화에 진지함을 부여하고, 다음 행(行)과의 자연스런 휴지(休止)를 마련하여 프롤로그의 역할을 한다.
제2-6행까지는 ‘그’를 불, 달, 금성, 고산 식물 등으로 은유하여 ‘그’가 고귀하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나타낸다.
제7-11행까지는 ‘그’에 대한 경배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화자의 신앙적 자세는 무조건적이고 순응적임이 잘 드러난다.
제12-14행까지는 ‘그’와 ‘나’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나’의 보잘 것 없음과 바다의 이편과 저편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나’와 ‘그’의 거리감, 그리고 ‘나’의 ‘그’에 대한 의타심이 드러나 있다. 내가 그의 반(半)이라는 말은 그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는 한계성을 지닌 ‘나’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절대적인 ‘그’를 통해 구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난초(蘭草)
- 정지용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춥다.
(신생 37호, 1932.12)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초기의 모더니즘 계열에서 동양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경향으로 옮아가는 단계의 작품으로, 난초라는 동양적인 소재를 취하여 여백(餘白)과 여음(餘音)의 수묵화적 분위기로 그려낸 시인의 솜씨는 가히 시대의 절창(絶唱)이라 할 만하다.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난초는 사군자로서보다는 오히려 여성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난초잎에는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으며 팔굽이를 드러낸 난초는 ‘적은 바람’에도 추위를 느낀다. 이렇듯 난초잎에 스치는 작은 움직임마저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포착하여, 절제된 시어로 표현해 내는 솜씨와 2행 1연의 간결한 시 형식은 그 뒤의 ‘청록파’ 시인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한국 현대시의 한 계보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다 2
- 정지용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시원 5호, 1935.12)
<감상의 길잡이>
<바다> 연작시 10여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정지용의 초기시 특징의 하나인 선명한 이미지 제시를 위한 시작 방법을 엿볼 수 있다. 지용은 여러 감각적 이미지 중 시각적 이미지를 가장 많이 사용했으며, 또한 그 이미지를 직조해 내기 위해 직유법을 즐겼다. 그리고 직유에 사용된 보조 관념(vehicle)은 동물계의 자연물이 많이 등장한다. 이렇게 그가 직유를 즐기고 동물계 보조 관념을 많이 사용한 까닭은 움직이는 상태, 즉 동적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정지해 있지 않고 부단히 움직이는 세계는 외부로 열려진 세계이고 밖으로 확산되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다>라는 연작시에 집착했던 이유는 보다 분명해진다. 결국 ‘바다’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개화기부터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서구에 대한 동경과 새로운 것의 갈망이라는 지식인들의 정신 편향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물로 지용에게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파도가 밀려오는 푸른 바다의 모습을 놀랄 만큼 신선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는 이 시는 1~4연의 앞 단락에서는 바다의 역동적 모습을, 5~8연의 뒷 단락에서는 해안선까지 확대된 시인의 시선을 통해 바다를 총체적으로 관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먼저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의 모습을 ‘뿔뿔이 / 달아나려고’로, 파도가 뭍에 부딪쳐 흩어지는 모습을 ‘푸른 도마뱀 떼’로, ‘꼬리가 이루 /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른 파도의 움직임을 ‘재재발렀다’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泡沫)을 ‘흰 발톱’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바다를 투시하던 시인의 혜안(慧眼)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달려왔다가 해변에 이르러 하얗게 부서져 쓰러지는 파도의 기진한 모습에서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바다가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는 것으로 생각하는 시인은 마침내 자신의 상상으로 조형한 해도(海圖)를 총체적으로 그려 보여 준다. ‘찰찰’과 ‘돌돌’이라는 첩어를 통해 충만하고 경쾌한 바다를 제시하는 한편,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를 바다가 지구를 떠받들고 있는 것으로,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가 마치 연잎처럼 오므라들기도 펴지기도 하는 것으로 해도를 그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하여 바다에 대한 단순한 인식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은 바다와 하나가 된 무아경(無我境)의 세계에서 바다를 응시함으로써 바다에서 ‘도마뱀’을 찾아내고 ‘꼬리’와 ‘흰 발톱’, 나아가 육지를 떠받들고 있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구성동(九城洞)
- 정지용
골작*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뤼*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청색지 2호, 1938.8)
* 골작 : 골짜기
* 누뤼 : 우박. ‘누리’가 본디말.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작품은 시인 자신이 밝힌 바에 의하면 어느 해 여름 금강산에 간 체험을 바탕으로 비로봉(毘盧峯), 옥류동(玉流洞)과 함께 창작, <조선일보>(1937.6.9)에 소개된 이후 <청색지(靑色紙)> 2호에 재발표되었다.
고고하고 관조적인 정지용의 정신적 경지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산(山)을 제재로 한 그의 시들은 대개 자연을 동양적, 고전적 정신에 담아내고 있는데, 이 시에도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 성격 : 관조적, 회화적
▶ 심상 : 시각적 심상
▶ 운율 : 각운
▶ 특징 : ① 화자와 청자가 철저히 배제된 사물시(事物詩).― 감정의 표출 억제
② 제3연을 중심으로 한 대립과 대칭의 구조
▶ 구성 : ① 유성이 떨어지는 골짜기(제1연)
② 우박이 떨어질 때의 소란함(제2연)
③ 꽃이 호젓이 핀 모습(제3연)
④ 바람도 불지 않는 고요함과 쓸쓸함(제4연)
⑤ 산마루를 넘어가는 사슴(제5연)
▶ 제재 : 구성동(九城洞)
▶ 주제 : 고요하고 적막한 자연의 세계
<연구 문제>
1. 이 시는 어떤 감각적 심상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지 두 어절로 쓰라. ☞ 시각적 심상
2. (1)이 시가 지니는 구조상의 특징을 쓰고, (2)그 이유를 설명하라.
☞ (1) 대립과 대칭의 융합 구조
(2) 이 시는 제3연을 중심으로 제1연과 제5연, 제2연과 제4연의 각운에 대한 형태적 대칭과 제1연과 제5연이 의미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시 전체의 변화를 유도하는 제2연과 제4연의 모순적 대립으로 그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3. ㉠과 ㉡이 형상화하는 이미지의 공통점을 쓰라.
☞ ‘유성’과 ‘사슴’은 모두 소멸(소진)하는 이미지라는 공통점이 있다.
4. 이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화자의 정서를 한 단어로 쓰라.
☞ 쓸쓸함.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대립과 대칭의 전체적 구조 속에서 그 의미 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
대칭의 구조는 제1연과 제5연, 제2연과 제4연에서 나타나는 형태적 대칭(각운)과 제1연과 제5연의 등가적인 의미상 대칭을 뜻한다. 형태적 대칭은 각각 다른 각운에 의해 시 전체의 완결성과 통일성을 이루는 역할을 하고 제1연과 제5연에서 나타나는 의미상 대칭은 소진하는 ‘유성’과 가뭇없이 사라지는 ‘사슴’같은 물상(物象)을 통해 자연이 인간에게 텅 빈 소멸의 공간으로 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형태적인 면에서나 의미적인 면에서나 모두 등가성을 띠는 제1연과 제5연의 대칭 구조와는 달리 제2연과 제4연은 의미상의 대립을 이룬다. 제2연의 소란함과 제4연의 쓸쓸함은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소란함도 이내 쓸슬함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러한 대립과 대칭의 중심에 ‘귀양’ 사는 ‘꽃’의 모습이 그려진다. 꽃이 호젓이 핀 모습은 다른 것들로부터 소외된 채 귀향살이를 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고적함이 바로 산골짜기 폐사지(廢寺址)에 서 있는 화자의 정서이다. 이는 자연이 그 객관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 화자의 정서에 의해 착색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비
- 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 22호, 1941.1)
* 원문에는 ‘새삼 돋는 비ㅅ낯’으로 되어 있으나 해석 불능.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정지용의 시적 언어와 인식 방법,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 가장 정제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자연 현상을 섬세한 묘사로 표현한 이 작품은 정교한 언어로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 성격 : 감각적, 묘사적, 관조적
▶ 특징 : 짧은 행과 규칙적인 연 구분으로 자연스런 휴지(休止)와 여백의 미(美) 조성.
▶ 구성 : ① 기 : 비 내리기 직전 돌에 그늘이 차고 바람이 부는 모습(제1-2연)
② 승 : 빗방울이 여기저기 다투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장면(제3-4연)③ 전 : 빗물이 모여서 여울이 되어 흘러가는 장면(제5-6연)
④ 결 :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정경(제7-8연)
▶ 제재 : 비
▶ 주제 : 비가 내리는 정경
<연구 문제>
1. 이 시의 시상 전개 방식을 두 어절로 쓰라.
☞ 시간의 흐름.(시간의 진행, 추보식 전개)
2. ㉠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을 20자 내외로 쓰라.
☞ 여기저기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3. 이 시에서 ㉡이 뜻하는 바를 25자 내외로 쓰라.
☞ 빗방울이 붉은 나뭇잎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정서의 주체인 화자가 작품의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연 현상의 섬세한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다.
여덟 개의 연은 각각 두 개의 연씩 하나의 단락을 이루어 모두 4개의 장면을 제시하고 있어서 마치 한 편의 율시(律詩)를 보는 듯하다.
제1연과 제2연은 비기 내리기 직전 돌에 그늘이 차고 바람이 부는 모습을, 제3연과 제4연은 빗방울이 여기저기 다투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장면을 ‘산새 걸음걸이’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제5연과 제6연은 빗물이 모여서 여울이 되어 흘러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는 계곡의 여울물이 일으키는 여러 갈래의 흐름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수척한 물살과 손가락은 폭류나 격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장면은 앞 장면보다 상당한 시간의 흐름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시간의 흐름은 짧은 시행과 규칙적인 연 구분에 의해 자연스럽게 유도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시가 지니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제7연과 제8연에서는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정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행의 분절과 연의 구분을 없애면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날(이) 붉은 잎(을)소란히 밟고 간다’가 된다. 나뭇잎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대로 느껴져 오는 표현이다.
이 시는 섬세한 묘사를 뒷받침하는 정교한 언어들의 유기적 결합으로 비가 내리는 상황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주요한의 빗소리나 변영로의 봄비에서도 비의 이미지가 ‘새’와 관련되어 있음을 음미해 볼 만하다.
인동차(忍冬茶)
- 정지용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문장 22호, 1941.1)
* 잠착(潛着)하다 :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골똘하게 쓰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정지용의 동양 고전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인동다’를 마시며 살아가는 ‘노주인’인 작중 인물은 바로 시인 자신이며, 그가 마시는 ‘인동다’는 겨울로 표상된 일제 치하를 견디게 하는 인내와 기다림의 힘이 되어 준다.
특히, 2연과 3연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성을 상징한다. 즉,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꺼진 줄 알았는데, ‘도로 피어 붉고’, 그늘져 있는 마당 한구석에 묻어 둔 ‘무가 순 돋아 파릇한’ 모습은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생활하면, 현실 상황인 ‘겨울’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리라는 시인의 의지와 소망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은 비록 ‘삼동이 하이얀’ 시절로 세월 가는 것마저도 다 잊어버리고 싶은 험난한 세상이지만, ‘흙냄새가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 소리에 잠착하’듯이, 굳은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이 겨울 같은 모진 현실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대들 돌아오시니
―재외 혁명동지에게
- 정지용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밭 이랑 문희우고*
곡식 앗어가고
이바지 하올 가음*마저 없어
금의(錦衣)는커니와
전진(戰塵) 떨리지 않은
융의(戎衣)* 그대로 뵈일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 말굽에
일가 친척 흩어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낯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구르는 백골!
상기 불현듯 기다리는 마을마다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 외오 : ‘잘못’의 옛말.
* 자휘(字彙) : 글자의 수효, 여기서는 이름을 의미함.
* 문희우고 : 무너뜨리고.
* 가음 : 감. 재료나 바탕.
* 융의 : 옛날 군복의 한 가지.
<감상의 길잡이>
1948년 4월 문학의 지면을 빌어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을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정치적인 시대에 시를 쓰지 못하는 심경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 정지용은,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해방 전의 시작(詩作)과는 전혀 다른 문단 활동을 보여 준다.
이 시는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당대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해방을 맞아 처음으로 간행된 앤솔로지(anthology : 시모음집)인 해방기념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익문학 단체인 ‘중앙문화협회’의 주관으로 1945년 12월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은 좌․우익의 구별 없이 전 문단권을 망라하여 24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찬가(讚歌)나 헌사(獻詞)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지만, 위의 정지용의 시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은 해방을 맞는 감격의 직접성과 내면화된 서정성이 잘 조화되어 있는 뛰어난 수준을 보여 준다.
이 시는 그 부제에서 보듯 해방을 맞아 귀환하는 재외 혁명동지에게 바치는 헌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귀환의 감격을 2․4․6․9연에 동일한 어구로 직설적으로 반복함으로써 표제시(標題詩)의 의미를 직접 드러내 준다. 재외 혁명동지의 ‘피 흘리신 보람’은 상대적으로 ‘죽음보다 어두운 삼십육년’의 고초가 클수록 그 빛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2․4․6․9연의 ‘그대들 돌아오시니 /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의 어구는 1․3․5․7연으로 표현된 삼십육 년 간의 지난 현실과 적절한 대응을 이룸으로써 그 귀환의 감격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8․9연에서 보듯 7연의 고난의 현실 묘사에 이어 해방의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구조의 단조로움을 피하는 한편, 재외 혁명동지들의 귀환이 그저 금의환향이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그것은 그러한 과거의 ‘죽음보다 어두운 삼십육년’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꽃을 밟을 수가 없고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면서 귀환해야만 하는 조국의 현실로 상징된다.
이렇듯 귀환의 감격이 클수록 지난 과거의 고초에서 오는 회한과 비극의 강도가 거세지지만, 정지용은 그러한 아픈 상처를 적절히 위무(慰撫)할 줄 안다. 그것은 ‘외오’․‘새론’․‘사오나온’ 등의 조어법과 ‘―라’로 끝나는 아어형(雅語形) 어미의 적절한 배합에서 기인한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직접적 감동과 서정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시인 정지용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간이역
- 정공채
피어나는 꽃은 아무래도 간이역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道程)에 꽃이 피어 있었던가
잠깐 멈추어서
그때 펼 것을, 설계(設計)
찬란한 그 햇빛을......
오랜 동안 걸어온 뒤에
돌아다 보면
비뚤어진 포도(鋪道)에
아득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 꽃은 지고
지금 그 꽃에 미련은 오래 머물지만
져버린 꽃은 다시 피지 않는 걸.
여숙(旅宿)에서
서로 즐긴 사랑의 수표처럼
기억의 언덕 위에 잠간 섰다가
흘러가 버린 바람이었는걸......
지나치고 나면 아아, 그 도정에 작은
간이역 하나가 있었던가
간이역 하나가
꽃과 같이 있었던가.
<맥락 읽기>
1. 화자는 무얼하고 있는가? ☞ 생각에 잠겨 있다.
2. 무엇에 대한 생각일까?
☞ 자신의 과거에 대한 생각, 지나온 길에 대한 생각
3. 자신의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화자의 관심을 끌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들은 무엇인가? ☞ 꽃, 간이역
4. 꽃, 간이역은 어떤 의미를 가진 사물들인가?
☞ 간이역 : 인생의 도정에서 머물 수도 있었지만 지나쳐 버린 삶의 길목
☞ 꽃 : 인생의 도정에 있었던 아름다웠던 그 무엇.
5. 꽃, 간이역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을 또 찾아 본다면?
☞ 찬란한 그 햇빛, 설계
6. 꽃과 간이역의 관계는?
☞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삶의 도정에서 지나쳐 버린 그 무엇이란 의미에서 비슷하고 화자는 거의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7. 화자는 어떤 기분에 젖어 있나? ☞ 아쉬움, 후회, 미련 ......
8. 왜 그런 심정일까?
☞ 아까운 기회를 지나쳐 버렸고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9. 그는 왜 지나쳐 버렸을까?
☞ 그 때는 몰랐지. 그게 꽃인걸. 지나치고 보니 그게 꽃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10. 화자가 그때는 왜 몰랐을까?
☞ 그저 앞만 보고 급하게(급행열차로) 달려왔으니까 그렇겠지요.
하루만의 위안
-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조병화의 초기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보여 주고 있는 나그네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바로 ‘나도 또 하나 작은 /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라는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반복구처럼 되풀이되고 있는 ‘잊어버려야 한다’는 진술은 화자의 나그네 의식을 방해하는 집착과 잡념을 벗어 버리기 위한 스스로의 다짐으로 볼 수 있다. 화자가 잊고자 하는 대상은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다. 그가 구체적으로 화자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를 잊기 위해 노력하는 화자의 집요한 태도를 감안한다면, 그는 화자가 쉽게 잊을 수 없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잊어버려야만 한다’는 구절은 잊을 수 없는 사람까지도 모두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다분히 역설적인 내포를 갖는 진술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화자의 노력은 아무런 집착 없이 구름처럼 떠돌며 이승의 삶을 살아가는 불교의 선승(禪僧)과 같은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시의 주제는 나그네같이 흘러가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하루만의 위안’으로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인생에 대한 반성적 회상이라 할 수 있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낙엽 |
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조병화는 약 40여 년간의 시작 생활을 통해 36권의 시집을 낸, 유례가 드문 다작의 시인이다. 그의 일관된 시의 주제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다.
이 시도 고독한 나그네의 노래인 것이다. ‘낙엽’은 구름처럼 떠돌며 물처럼 흘러서 정처없이 떠나야 할 자신의 분신이라 할 것이다.
▶ 성격 : 낭만적, 관조적, 애상적
▶ 표현 : ① 평이한 시어 사용
② 동어 반복적 표현
▶ 구성 : ① 낙엽 속의 고독한 나(1-7행)
② 고독과 슬픔 속의 방황(8-14행)
③ 낙엽과 함께하는 고독한 나(15-17행)
▶ 제재 : 낙엽과 고독과 슬픔
▶ 주제 : 고독한 삶.(인간의 근원적 고독)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낙엽 |
이 환기하고 있는 정서를 한 단어로 찾아 쓰라. ☞ 슬픔
2. ㉠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수식어+피수식어’의 구조로 쓰라.
☞ 가녀린 감수성.(가냘프고 순수한 마음씨, 현실에 강하지 못한 약하고 순수한 마음, 섬세하고 나약한 마음씨)
3. ㉡에 대조되는 시구를 찾아 쓰라. ☞ 햇볕이 쏟아지는 곳
4. 이 시에서 낙엽 지는 소리를 나타내는 시구를 2개 찾아 쓰라.
☞ 가는 목소리, 나의 소리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연의 구분이 없지만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7행에서 ‘나’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 낙엽이 지고 있는 숲 속을 거닐고 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엽 속에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낙엽 위에 누워도 본다. 가을의 쓸쓸함과 고독 속에서 나의 머리 속에는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며, 그것을 잊으려고 머리를 흔들면 어디선가 또 낙엽니는 소리가 귀를 쫑긋하게 한다. 올려다 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내다보이고 나는 따스한 가을 햇살 속에서 문득 초조함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보이지 않는 곳―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있기에 고독과 슬픔 속에서도 살고 있는 것이다.
제8-14행은 낙엽 속을 거닐며 느끼는 쓸쓸함과 고적함과 슬픔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내가 걸어가는 곳마다 낙엽은 떨어지고, 나는 낙엽 속에 묻혀 버리고, 말할 수 없는 고독과 슬픔을 안고 어두운 밤길을 헤매며 방황한다. 집에 돌아와 방안에 앉아서도 어두운 밤에 낙엽이 지는 그 밤길을 생각하며 마음의 방황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제15-17행은 처음에 나온 말을 반복하며 결말을 짓는 부분이다. 핵심이 되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의 일관된 주제인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 이 시에서도 드러난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정처없는 나의 운명, 그것은 곧 낙엽의 운명이며, 그러기에 나는 낙엽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의자․7
-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시집 시간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 1964)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연작시『의자』는 시간 또는 역사의 흐름 위에 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자리)을 교차시키면서, 시간 속에서의 공간 인식 또는 공간을 둘러싼 시긴 인식을 개진한 것이다. 그러나 1에서 10까지의 각 시편들은 이 큰 주제의 범위 안에서 그 소주제가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다.
주제가 분명하고 쉬운 시어에다 같은 말의 반복적 구성을 한, 조병화의 특징을 잘 보이는 시이다. ‘아침’과 ‘어린 분’과 ‘의자’의 상징적 의미에 유의하자.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주지적
▶ 표현 : ① 평이한 시어 사용
② 반복법, 점층법
▶ 구성 : 수미쌍관의 구성
① 기 : 역사 인식과 세대 교체(제1연)
② 승 : 역사 인식과 세대 교체(제2연)
③ 전 : 인계의 역사적 당위성(제3연)
④ 결 : 역사 인식과 세대 교체(제4연)
▶ 제재 : 의자
▶ 주제 : 역사적 인계 의식.(역사 인식과 세대 교체)
<연구 문제>
1. 이 시의 ㉠과 ㉡의 상징적 의미를 각각 쓰라.
☞ ㉠ 어린 분 : 새 역사 창조의 능력을 가진 신세대.(새로운 사상이나 의지, 정열을 지닌 젊은 세대,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가진 존재)
㉡ 의자 : 시대와 사회의 주역이 되는 자리.(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
2. 이 시는 시간성과 공간성의 입체적 조화를 보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표상하는 상징물을 각각 찾아 쓰라.
☞ 시간 : 아침 공간 : 의자
3. 다음 세대에의 문화 전승의 동기(動機)와 역사 흐름의 섭리에 순응하려는 화자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연은? ☞ 제3연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세대 교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같은 내용의 연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병화의 많은 시들이 대체로 ‘동어 반복적(同語反復的)인 단순 구문에 의한 단조로운 형식에 의존한다.’라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 시도 그 전형적인 한 예가 된다. 제1연, 제2연, 제4연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으며, 한 두 글자를 덧붙이거나 변화시키면서 정서적인 농도를 심화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지금 어드메쯤 /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에서 ‘아침’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고, ‘어린 분’은 새로운 세대를 지칭한다. ‘그 분을 위하여 /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에서 ‘의자’는 사회적 지위, 직책, 위치 등을 표상하는 상징물이다. ‘그 분’, ‘어린 분’이라고 어린 세대에게 존칭을 쓴 것에서 우리는 화자의 자기 겸허와 함께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으며, ‘비워 드리지요.’, ‘비워 드리겠얻요.’, ‘비워 드리겠습니다.’라고 점층적으로 변형 발전시킨 표현에서 우리는 세대 교체 또는 문화 전승의 신념과 결의를 엿볼 수 있다.
제3연의 ‘먼 옛날 어느 분’은 조상을 나타낸다. 이 연은 화자가 세대 교체와 문화 전승에 대한 사명감을 느끼는 동기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분 |
➡
나 |
➡
어린 분 |
전세대 현세대 신세대
공존(共存)의 이유
-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시집『공존의 이유』(1963. 6)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헤어짐, 이별, 죽음을 예감한 고독한 인간들의 공존에 필요한 것은 가벼운 사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표피적으로 나타난, 가벼운 사랑이나 적당한 관계를 권유하는 말 그 안쪽에 깔린 역설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바른 감상이 될 것이다. 쉬운 시어와 동어 반복적인 표현 특징을 보이고 있다.
▶ 성격 : 낭만적, 사색적, 철학적
▶ 표현 : ① 평이한 시어 사용
② 동어 반복적 표현
▶ 구성 : ① 이별을 예감한 우리의 관계(제1-2연)
② 부담 없는 인간 관계(제3-7연)
③ 후회하지 않고 헤어질 수 있는 인간 관계(제8-11연)
④ 이별을 준비하는 가벼운 인간 관계(제12-14연)
▶ 제재 : 가벼운 사랑의 인간 관계
▶ 주제 : 인간 관계에 대한 경계
<연구 문제>
1. 화자의 심적 상황과 가장 가까운 것은?
☞ ⑤
① 사랑에 빠져 있다.
② 실연의 슬픔에 잠겨 있다.
③ 이별의 상처를 달래고 있다.
④ 곧 닥쳐올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다.
⑤ 고독한 가운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2. 제1,2연과 같이 말한 이유를 100-140자 정도로 쓰라.
☞ 사람은 서로 만나 사귀다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일은 인생살이에서 너무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서로 헤어질 그때에 마음 아프지 않고 부담 없이 헤어질 수 있도록 가볍게 사귀자고 한 것이다.
3. ㉠, ㉡은 어떠한 말인지 각각을 15자 이내로 쓰라.
☞ ㉠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말
㉡ 인간 관계에 벽을 쌓는 말
4. ㉢에서 떠오르는 4자의 한자 성어를 한자로 쓰라. ☞ 會者定離
<감상의 길잡이>
조병화의 일관된 주제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화자는 항상 고독한 나그네의 모습이다. 그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돈다. 이웃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며, 언젠가는 마침내 이 세상도 떠날 것을 예감한다. 그는 이 세상 일에 집착을 버리면서 항상 떠날 것에 대비한다. 그것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사리를 깊이 통찰한 결과이다.
시인은 시『헤어지는 연습을 하며』에서 보여 주듯이, 이 시에서도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슬픈 것이다. 이별할 때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깊은 정을 끊어야 하며, 미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제1-7연에서는 ‘헤어짐’에 대비해서 부담스러운 사랑, 깊은 관계를 갖지 말고 가벼운 교재를 하며 지내자고 한다. 여기서 ‘헤어짐’은 남과의 헤어짐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헤어짐, 곧 죽음을 뜻하기도 하는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제8-11행에서는 내가 상대방을 깊이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아무리 얘기하고 싶어도, 아무리 내 속을 보여 주고 싶어도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의 시『남남 30』에서 보이듯이 ‘너와 나의 깊은 외로움은 너와 나를 모르게 할 뿐’인 관계, 즉 남남 관계인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제12-14연은 운명적인 그 날, 공존이 끝나는 날, 이별의 슬픈 날의 모습이다.
서로 냉정한 표정으로 삭막하게 지내는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 고독한 인간은 고독을 덜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공존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깊은 사랑을 하지 말자는 말은 오히려 사랑에의 갈망을 역설적으로 절규하는 것이 아닐까?
조지훈論
민족의 신화를 시로 표현한 조지훈
조지훈(1920-1968)은 이미 생전에 우리 시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신화처럼 자리잡고 있는 시인이다. 새삼스럽게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해 보는 일이 참으로 가당치 않은 느낌마저 든다.
지훈이 약관 19세의 몸으로 시단에 등단한 것은 1939년 「문장」을 통해서였는데 이때의 추천 위원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지훈의 데뷔 작품인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은 한결같이 뛰어난 천분(天分)과 기교가 조화된 작품으로, 한 시인의 초기 작품의 차원을 벗어나서 이름 그대로 그의 출세작이 되고 또 대표작이 되었다. 일제에 의한 조선어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풍전등화 같던 모국어의 운명을 지훈 혼자서 담당하게 되는 역사적인 운명이 데뷔 당시에 이미 부여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승무」 전문
지훈이 젊은 나이에 도달한 모국어의 시적 성취는 그 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여전히 압권이다.
지훈의 시적 생애는 원숙한 경지에서 실험적 경지로 또 현실적 경지로 옮겨갔다. 다른 시인들에 비하면 역코스를 진행해 갔으므로 개인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불행한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의 시문학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매우 희귀하고 값진 바 또한 적지 않다.
「고풍의상」「승무」「봉황수」 등 고전적 아름다움과 품격담긴 시 발표
식민 치하의 시공(時空)을 살면서 그가 무엇보다도 절실히 느낀 것은 아마도 모국어의 따뜻한 숨결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시에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품격을 부여한 시인이다. 해방된 조국의 국민에게 사랑 받는 시인이 될 것을 미리 예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벌래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든 거미줄 친 옥좌(玉座) 우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십품(從十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 「봉황수」 전문
유장하게 흐르는 「봉황수」의 율조 속에 담겨 있는 비극적인 결연한 어조는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도 미래를 꿈꾸는 봉황의 큰 뜻을 은연중에 담고 있다. 시인은 머지않아 이민족의 손아귀를 벗어날 ‘푸르른 하늘’을 노래하였다.
지훈의 이와 같은 비장미(悲壯美) 넘치는 어조는 바로 우리 겨레의 은근한 기다림과 인내의 결실과도 맞닿아 있어서, 개인의 천분 만을 노래했던 많은 시인들과 구별된다. 민족의 역사적 인식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뛰어난 높이에 도달하고 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열 아홉 스무 살의 나이에 그러한 천부적 역사 인식이 가능했을까. 한국의 현대시라는 장르가 소월과 지용을 거치면서 이제 막 자리잡아 가고 있던 형성기에, 어떻게 지훈은 가장 오래 남아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수 있는 ‘시(詩)’로 발견해 낼 수 있었을까.
물론 이것은 그의 천부적인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겨레의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시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들이 그들의 특수한 개인적 체험을 형상화한 데 비하여 지훈은 만해와 더불어 우리 겨레의 신화적 진실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형상화하였다. 시인 조지훈이 이 땅에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 겨레의 행운으로 껴안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해방 후에 곧바로 시단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지도자적인 시인으로 자리잡게 되고 때로는 좌파와 대결하고 때로는 독재 정치와 대결하면서 마침내 지사(志士) 또는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도 받았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영원한 호칭은 ‘시인’이었다고 해야 옳다.
지훈의 시를 가리켜 자연과 인공의 극치라고 말한 사람은 정지용이다. 자연이라고 한 말은 지훈 시에 등장하는 복고적이며 조선적인 풍물을 두고 한 말이었지만 지훈 시의 ‘자연’은 우리 민족어의 근원이요 민족 신화의 모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된다.
인공이라고 한 말은 율조의 유려함과 형태미의 완벽성을 지칭한 말이었지만, 이것은 곧 지훈 시가 본래부터 지녔던 고전미, 즉 광범위하게 읽혀지고 애송되어 민족시 또는 국민시로 자리잡게 되는 지훈 시의 운명적 진로를 의미한 말로 이해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시의 운명과 시인의 운명은 동일한 것일까. 지훈 시의 화려한 성취는 곧 시인 조지훈의 성공적 생애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염두에 둘 때 나는 곤혹감을 느낀다. 데뷔작이 시인의 대표작이 되는 일은 흔히 있으며 또 이런 경우에는 그 시인의 시세계의 협소함을 뜻하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으나 유독 지훈의 경우에는 유별난 의미가 부여된다.
해방 후 좌파, 독재 정치와 대결하여 ‘마지막 선비’라는 호칭 얻어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고 국민시가 되는 이 화려한 가치 부여의 한켠에는 조지훈이 길지 않은 생애가 민족 분단과 전화(戰禍)와 독재 정치라는 예술과 현실의 대립적 구도 속에서 훼손되고 노래되어 온 안타까움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이미 생전에 문학사적 위치를 확고히 차지하고 또 이승을 떠나서는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추앙되는 조지훈은 우리 겨레가 애송하는 주옥같은 작품에 의하여 마침내 ‘국민 시인’이라는 빛나는 월계관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 생전에 쌓아올린 지사적 풍모나 학자적 양심을 예술 그 자체에 용해시켜 좀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정말로 크다.
지훈을 두고 박목월은 ‘크고도 섬세한 손’이라고 했다. 역사 인식을 뚜렷이 하는 거대한 안목과 섬세한 서정의 실마리를 다듬은 서정 시인으로서의 면목을 가리킨 말이다.
지나가는 자여, 발길을 멈추게나. 지훈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섬세한 이슬방울처럼 크고 높은 솟대처럼 우리 민족의 꿈길에 불멸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으므로….
* 글쓴이 : 오탁번 / 1943년생, 고려대 영문과와 국문과졸, 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
①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②㉠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올렸다. ③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④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⑤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⑥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
<‘문장’13호(1940.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복고주의나 회고주의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대하면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서정성과 낭만성이 깃들인 시이며 상징성도 간과할 수 없다. 몰락한 고궁을 소재로 우국 충정과 깊은 수심을 표현한 시이다.
소재의 특수함에 걸맞게 언어가 우아한 고전적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 성격 : 회고적, 민족적, 의고적
▶ 어조 : 망국을 슬퍼하는 이의 침통한 어조
▶ 특징 : 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고전적 소재를 통해 나타냄.
▶ 구성 : 단련(單聯)으로 된 산문시
① 퇴락한 고궁의 정경 ―선경(先景)(첫째 문장~둘째 문장)
② 화자의 심회 ―후정(後情)(셋째 문장~여섯째 문장)
▶ 제재 : 퇴락한 고궁
▶ 주제 : 망국(亡國)의 비애
<연구 문제>
1. ㉠은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인지 20자 내외의 구절로 답하라.☞ 사대주의 때문에 패망한 조선 왕조의 모습
2. 이 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내면 세계로 전환되는 문장의 첫 어절을 쓰라. ☞ 어느 ~
3. 이 시에서 지나간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문장의 처음과 끝 어절을 쓰라. ☞ 큰 ~ 올렸다.
4. 외세의 침탈이 노골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구를 찾아 쓰라. ☞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감상의 길잡이>
한시적(漢詩的) 품격에 친숙한 조지훈의 이 시도 전후(前後) 두 단락으로 구분되어 선경 후정(先景後情)의 구성을 보여 준다. 앞의 두 문장이 배경이라면, 그 이하에는 그러한 배경 속에서의 화자의 심회가 드러나 있다.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거미줄 친 옥좌’의 구절들이 보여 주듯이 망해 버린 왕조의 궁궐에서 화자가 느끼는 심회는 역사에 대한 허망함일 터이다. 한번도 활개쳐 날아오르지도 마음놓고 울어 보지도 못한 ‘봉황’의 모습은 우리 역사가 또한 그러했음을 나타내 준다. 화자는 나라 패망의 원인을 사대 사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라는 간명한 표현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권력의 상징으로서 ‘쌍룡’ 대신에 ‘봉황’을 틀어 올렸다는 것도 같은 뜻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망국의 현실 속에서 화자는 ‘몸둘 곳이 바이 없다,’고 한다. 나라의 패먕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질없기에 참을 수밖에 없지만, 차라리 눈물이 속된 줄 몰랐더라면 구천에 사무치도록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맥락 읽기>
1. 화자는? ☞ 나
2. 화자는 어디서, 무얼 바라보고 있지요?
☞ 궁궐 마당에서 궁궐을 바라보고 있어요.
3. 궁궐의 모습이 어때요? 그럼, 하나씩 해 볼까요.
☞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4. 궁궐에 있는 옥좌의 모습은 어떤가?
☞ 거미줄이 쳐져 있고 쌍룡 대신 봉황새가 새겨져 있다.
5. 그렇다면 궁궐의 모습은 어떻다고 볼 수 있는가?
☞ 낡고 황폐하고 퇴락한 멸망해버린 조선 왕궁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6. ‘②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새를 틀어올렸다.’에서 알 수 있는 시인의 비판적 역사 의식은?
☞ 사대 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7. ‘③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르랴만’은 무슨 뜻일까? ‘봉황’이 울었다는 말일까, 울지 못했다는 말일까?
☞ 울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7-1. 그건 무슨 뜻일까?
☞ 중국을 섬기면서 큰 소리 한 번 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닐까요. 나라의 기운을 제대로 떨쳐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7-2.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화자는 심정은 어떨까요?
☞ 슬프다. 비참하다. 원통하다. 허망하다.
8. ‘④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는 무슨 이야기 일꼬?
☞ 신하가 없다. 조선 왕조가 망했다.
9. ‘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일꼬?
☞ 자기가 설자리를 잃어 버렸다. 섬길 나라가 없어져 버렸다.
9-1.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비참한 모습
10. ‘⑥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泉)에 호곡(呼哭)하리라.’는 화자의 어떤 심정을 나타낸 것일까?
☞ 봉황새야 눈물이 속된 줄을 알기 때문에 구천을 향해 울지 않껬다. 즉 나라의 패망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질없기에 참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차라리 눈물이 속된 줄을 몰랐더라면 구천에 사무치도록 울고 싶은 심정을 뜻하는 게 아닐까요.
11. 시상 전개는? ☞ 先景後情
∴ 앞부분은? ☞ 퇴락한 궁궐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 뒷부분은? ☞ 화자의 감회가 어려 있네요.
12. 이 시와 분위기와 유사한 시조는?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
☞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계워 하노라. <원천석>
13. 이 시를 읽고 떠오르는 고사 성어는?
☞ 麥秀之歎
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문장 11호, 1939.12)
* 승무 : 인간의 고뇌를 상징하는 춤.
*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승무』의 공간적 무대는 조지훈을 비롯한 한국인 모두에게 자기 정체(自己正體, self identity) 회복의 공간이다.
『승무』는 선적(禪的)인 정취와 분위기에 차 있는 시라고 하겠다. 선(禪)의 세계는 경험적이건 선험적(先驗的) 간에 일어나는 표상, 개념, 판단 등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일체의 상념을 제거한 뒤에 나타나는 정적(靜寂)의 세계이다.
▶ 성격 : 전통적, 주정적, 선적(禪的), 불교적, 율동적, 고전적
▶ 구성 : ① 도입 :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제1-3연)
② 전개 : 무대와 배경(제4연)
춤의 동작(제5-8연)
③ 결미 : 춤의 종료(제9연)
▶ 제재 : 승무(僧舞)
▶ 주제 : 인간 번뇌의 종교적 승화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염원의 대상이 되는 시어를 찾아 쓰라. ☞ 별빛
2. 이 시에서 <보기>의 밑줄 그은 ‘해저’와 같은 이미지에 해당되는 시어를 찾아 쓰라. ☞ 번뇌(煩惱)
흔들리는 종 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정한모『가을에』 |
3. 이 시에서 동적(動的) 이미지가 잘 드러난 세 연을 찾아 각각 춤의 동작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설명하라.
☞ 제5연은 급박한 가락에 따른 춤의 동작, 제6연은 명상을 하며 정지된 모습, 제8연은 유장한 가락에 따른 춤의 동작이 표현되었다.
4. 이 시에서 지상적 세계와 천상적 세계로 대비되는 이미지의 짝을 이룬 시어들을 찾아 쓰라.
☞ ‘밤’, ‘소매’, ‘두 방울’이 지상적 세계, ‘황촉 불’, ‘하늘’, ‘별빛’이 천상적 세계의 이미지이다.
<감상의 길잡이>
오동잎이 달빛을 받으며 떨어져 내리는 밤. 아무도 없는 빈 무대에 황촉 불을 켜 놓고 춤을 춘다. 그러므로 이 춤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니라, 자신의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몸짓이며, 가없는 영혼의 세계를 향한 간절한 발돋움일 터이다.
‘복사꽃 고운 뺨’, ‘까만 눈동자’ 같은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나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는 표현을 보면,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하여 세속적인 영화(榮華)를 멀리하고 승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연유를 밝히지는 않는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이 세속은 어차피 번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춤 동작은 그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몸짓에 걸맞게 완급을 드러내 준다. 멎는 듯 움직이고 움직이는 듯 멎는 그 동작을 통해 우리는 고뇌를 이겨내려는 한 여승의 자기 정화의 몸부림을 보는 듯하다.
발은 이 번뇌의 땅을 디디고 있지만, 눈은 ‘먼 하늘 한 개 별빛’을 향해 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는 표현이 드러내 주고 있는 바, 지상적․세속적인 번뇌를 통해 여승은 종교적․초월적으로 승화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들레꽃
- 조지훈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시집 풀잎 단장, 195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의인화한 민들레꽃 한 송이를 통해 애틋한 그리움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죽도록 사랑하는 임의 현신(現身)일 수 있는 민들레꽃을 바라보며,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외로운 화자의 그리움을 여성적인 어조로 나지막히 고백하고 있다.
▶ 성격 : 연가적(戀歌的), 여성적, 고백적
▶ 특징 : ‘기․승․전․결’의 한시적(漢詩的) 구조
▶ 구성 : ① 외롭고 그리운 마음(제1연)
② 임이 되어 다가오는 민들레꽃(제2연)
③ 임에 대한 사랑의 다짐(제3연)
④ 임으로 현신(現身)한 민들레꽃(제4연)
▶ 제재 : 민들레꽃
▶ 주제 : 임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연구 문제>
1. 김소월의『초혼』의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와 이 시의 제3연을 비교하여 140자 정도로 쓰라.
☞ 소월의『초혼』은 임이 떠나기 전에 나의 마음 속의 말, 즉 사랑의 고백을 전하지 못하였기에 슬픔이 더 크다는 뜻으로, 죽은 임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는 죽은 임이 아니라도, 내가 죽고나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남는다는 것이다.
2. ㉠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을 한 화자의 궁극적인 의도를 한 문장으로 쓰라.
☞ 화자가 민들레꽃을 통해 임과의 만남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이 뜻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쓰라.
☞ 화자는 임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시하지는 않아도 사랑의 영원함을 다짐한다.
4. 이 시에서 의인화의 수법이 가장 두드러진 시행을 찾아 쓰라.
☞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감상의 길잡이>
사람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다. 더욱이 외로울 때는 사랑하는 임에 대한 그리움이 그 무엇보다도 절절하다. 이 시의 화자는 외롭고 그리운 마음을 민들레꽃에 투영하여 사랑의 다짐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제1-2연에서 까닭 없는 외로움으로 민들레꽃 한 송이조차 그리워지는 화자의 마음은 아득히 먼 거리에서 민들레꽃이 되어 찾아 온 임의 모습에 위로를 받는다.
제3연에서 화자는 이 임에게 자신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다짐한다.
제4연에서 화자는 마침내 민들레꽃으로 현현(顯現)된 임과의 만남을 이룬다.
이 작품의 시상 전개에서 특이한 것은 화자가 위로의 대상으로 그저 ‘바라본 민들레꽃’이 오히려 화자를 ‘바라보는 민들레꽃’으로 전화(轉化)되어 만남을 이루는 상황이다. 이것은 물론 시인의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낙화(落花)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 귀촉도 : 소쩍새
* 성긴 : 드문드문한.
* 우련 :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 저허하노니 : 두려워하노니. 마음에 꺼려 하노니.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지는 꽃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서글픔을 차분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화자의 쓸쓸한 삶의 우수가 적막한 분위기, 전통적 율조를 바탕으로 절제된 언어 속에 압축되어 있다. 또한, 시의 진술이 비유 없이 묘사적 심상에 의지하고 있어 읽기에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다.
▶ 성격 : 애상적, 감각적, 묘사적
▶ 어조 : 담담하고 나지막한 어조
▶ 특징 : 정형적 형태, 비유가 없는 묘사적 심상
▶ 시상 전개 : 시간의 흐름
▶ 구성 : ① 적막한 분위기―배경(제1-3연)
② 낙화의 아름다움(제4-6연)
③ 허망한 삶의 비애(제7-9연)
▶ 제재 : 낙화
▶ 주제 : 사라지는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삶의 비애
<연구 문제>
1. 제1연에는 화자의 심적 상태가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화자의 마음에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 둘을 찾아 쓰라.
☞ 성근 별, 귀촉도 울음
2. 화자의 심적 상태가 밤과 아침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문장으로 쓰라.
☞ 화자가 밤에는 서글픔 속에서도 낙화의 아름다움의 극치에 탐닉하지만, 아침이 되면서 아름다움의 덧없음에 참을 수 없는 삶의 비애를 느낀다.
3. 다음은 조지훈의 또 다른 작품『산방(山房』의 일부분이다. ㉠의 의미와 통할 수 있는 시구 둘을 찾아 쓰라.
☞ 닫힌 사립, 구름에 싸인 집
닫힌 사립에 단비 맞고 난초 잎은 꽃잎이 떨리노니 새삼 치운데
구름에 싸인 집이 볕 바른 미닫이를 물 소리도 스미노라. 꿀벌이 스쳐 간다. |
4. “자연의 섭리는 소멸과 생성이다.”라고 할 때, (1)이러한 의미가 역설적으로 표현된 시구를 찾아 쓰고, (2)설명해 보라.
☞ (1) 꽃이 지는 아침
(2) ‘아침’은 출발과 생성의 의미임에 반해, ‘꽃이 지는’은 소멸의 의미이다.
<감상의 길잡이>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에는 아쉽고, 쓸쓸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람의 일상적 감정이 시인에게는 늘 주요한 시적 주제가 되어 평범한 소재도 다채로운 목소리로 노래하게 된다.
김영랑의『모란이 핏기까지는』이 꽃의 떨어짐을 보면서 격정적인 슬픔을 노래한다면, 이 시는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새벽이 가까운 밤의 적막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나지막히 들려 온다.
제1-3연에서는 감정을 다스리면서 고요한 밤 분위기에 맞도록 꽃이 지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제4-6연은 촛불을 끄고 밤을 새워 꽃이 지는 아름다움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있다.
제7-9연은 묻혀 사는 이의 때묻지 않은 고운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으며, 오로지 아름다움과 늘 같이 하고픈 화자는 아침에 되면서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 삶의 덧없음에 깊은 비애를 느낀다.
이 시는 절제된 언어, 정형시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된 시행이 전체적인 시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세 마디와 네 마디 가락을 섞어 쓰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연시조 형태에 가깝게 느껴진다.
고풍의상(古風衣裳)
- 조지훈
A.하늘을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B.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C.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D.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E.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 저고리*
F.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G.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도라 곡선을 이루는 곳.
H.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I.치마 끝에 곱게 감추운 운혜(雲鞋)* 당혜(唐鞋)*
J.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K.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L.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춰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M.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
눈 감고 거문고를 골라 보리니
N.가는 버들이냥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지어다.
(문장 3호, 1939.4)
▶ 부연(附椽) : 들연 끝에 덧얹는 짧고 네모진 서까래. 며느리서까래.
cf) ☞ 들연 : 오량(五樑)에서 도리로 걸친 서까래. 야연, 장연, 평연, 하연
☞ 오량 : 우리 나라의 전통 가옥 건축에서, 보를 다섯 줄로 얹어 넓이가 두 칸 넓이가 되게 집을 짓는 방식
☞ 도리 : 목조 건물의 골격이 되는 부재(部材)의 한 가지. 들보와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을 건너서 위에 얹는 나무.(서까래를 받치는 구실을 함.)
☞ 들보, 보 : 건물의,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
▶ 호장 저고리 : 회장 저고리
▶ 운혜(雲鞋) : 지난 날, 여자가 신던 마른 신의 한 가지. 신발 앞코에 구름 무뉘를 수 놓았음.
▶ 당혜(唐鞋) : 우리 깊고 코가 작은 가죽신의 한가지. 앞뒤에 당초문(唐草紋-덩굴무뉘) 따위를 새김.
▶ 호접(胡蝶) : 나비 胡蝶之夢, 壯周之夢
▶ 아미(蛾眉) : (누에나방의 눈썹처럼) ‘미인의 아름다운 눈썹’을 이르는 말.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옛 여인의 옷과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예스런 말투와 가락으로 조화 있게 보여 준다. 그러나 단순히 고전적인 미(美)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우리 것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그리움, 서글픔 등을 작품의 내면에 담고 있다.
▶ 성격 : 고전적, 전통적, 감각적
▶ 심상 : 시각적, 정적 심상
▶ 운율 : 4음보의 산문율
▶ 특징 : 의고적(擬古的) 어투, 현재형 진술
▶ 시상 전개 : 시선의 이동.(수직적 순서)
▶ 구성 : ① 배경(1-3행)
② 저고리의 우아한 아름다움(4-7행)
③ 치마의 선의 미(8-10행)
④ 옷맵시와 춤사위의 은은한 아름다움(11-14행)
⑤ 화자의 도취감(감흥)(15-18행)
▶ 제재 : 고풍 의상
▶ 주제 : 우아한 고전적 아름다움의 추구.(전통 의상의 예스러운 아름다움)
<연구 문제>
1. 이 시를 전개상 세 단락으로 나눌 때, 둘째 단락의 처음과 끝 어절을 쓰라. ☞ 곱아라 ~ 숙이고
<해설> 제1-3행은 시의 배경이고, 제4-14행까지는 고풍 의상의 멋과 춤사위의 아름다움이 묘사된 부분이며, 제15-19행은 아름다움에 도취한 화자의 모습이다.
2. (1)이 시에 드러나 있는 미(美)를 한 단어로 쓰고, (2)그러한 미를 형상화하는 시어들을 모두 찾아 쓰라.
☞ (1) 곡선미(曲線美)
(2) 부연, 저고리, 치마, 운혜, 당혜
3. 화자가 시적 대상의 아름다움을 무엇에 비유하여 극찬하고 있는가? ☞ 호접(胡蹀)
4.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
가 뜻하는 바를 25자 내외로 쓰라.
☞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화자가 고전미에 도취하여.
<감상의 길잡이>
우리의 전통적 아름다움은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으나, 이 작품의 작가는 선(線), 특히 곡선의 아름다움이 한국적 미(美)의 본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시는 이러한 우리의 전통적 고전미를 옛 여인의 옷맵시와 춤사위에서 포착하고 있다. 조지훈의 대표작처럼 되어 있는『승무(僧舞)』가 종교적 경지에까지 승화된 춤의 아름다움을 그렸다면, 이 시는 우아한 고풍 의상에서 우리의 고전적 멋을 찾고 있다.
이 시의 구조는 단련(單聯)의 산문적 형태를 띠고 있는데, 제1-3행은 고요한 분위기를 보이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고, 제4-7행은 저고리의 아름다운 인상이, 제8-10행은 치마의 고운 선의 아름다움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제11-14행은 옷맵시와 춤사위의 은은한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고, 제15-18행에서는 고풍 의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화자의 도취감이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로 표현되고 있다.
고풍 의상에 대한 시인의 정서는 단지 아름다움의 예찬에 그치지 않고 ‘이 밤에 옛날에 살아’에서 보듯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과거로 돌아가 잃어가는 고전미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마지막 행인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는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풍경이 운다’, ‘두견이 소리’ 등의 애잔한 분위기와 어울려 옛 것의 아름다움이 상실돼 가는 현실을 슬픔의 멋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맥락 읽기>
1. 시를 읽은 느낌은? ☞ 고요하고 한국적인 분위기인데요.
2. 화자는 누구지?
☞ 나 (M.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를 골라 보리니)
3. 나는 어디에 있는가?
☞ 한옥집 (부연, 풍경, 처마, 주렴)
3-1. 무엇을 보고 있는가?
☞ 춤추는 여인
3-2. 언제요?
☞ 밤에(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반월)
3-3. 무엇을 하지?
☞ 거문고를 골라 보고 있는데요.
4. D,E,F는 무슨 이야기지요?
☞ 호장 저고리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5. G,H,는 무슨 이야기지요?
☞ 치마의 아름다운 모습요
6. I.J,K,L에서는 무엇을 보여주지요?
☞ 나비처럼 춤추는 여인의 모습.
7. M,N에서는?
☞ 춤추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화자의 감회가 어려있네요.
8. 이 시에서 하는 이야기는?
☞ 전통적인 소재인 한옥,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완화삼(玩花衫)
― 목월(木月)에게
- 조지훈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상아탑 5호, 1946.4)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목월의 <나그네>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으로, 암담한 현실 속에서 달랠 길 없는 민족의 정한을 스스로 나그네화하여 아름다운 시어, 시각적 이미지, 고전적 가락을 통해 탄식과 체념이 담긴 낭만적 시정(詩情)으로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시제 ‘완화삼’은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를 의미한다.
일제 치하라는 비극적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차운산 바위’에 존재하는 화자는 ‘하늘’과 같은 이상을 꿈꾸어 보지만, ‘산새’로 표상된 화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구슬피 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상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정처없는 나그네가 된 그는 ‘칠백 리 물길’을 따라 긴 유랑길을 떠나게 된다. 그 유랑길의 한 여정인 어느 강마을에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이르렀을 때, 마침 술 익는 냄새와 함께 서산에선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라는 시행은 나그네와 꽃, 곧 시인과 자연이 합일된 경지이자, 이 시의 제목을 ‘완화삼’이라 한 이유를 알게 해 준다. ‘완화삼’이란 본디 ‘꽃무늬 적삼을 즐긴다.’는 뜻으로, 이 시행의 ‘소매 꽃잎에 젖어’ 있는 것 같은 무념 무상의 경지를 표상한다. 그런 다음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자연에 동화되어 하염없는 나그네 길을 다시 떠나는 그는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 꽃은 지리라.’며,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와 같은 애상감에 젖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 말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다정가(多情歌)>의 ‘다정도 병인 양하여’와 상통하는 정서이다.
이처럼 이 시는, 세속적인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나 구름처럼 흘러가는 나그네의 고독과 무상감이 7․5조, 3음보격의 전통적 가락과 낭만적 분위기, 감각적 이미지의 시어와 함께 간결한 시행 구조에 완전히 용해됨으로써 전통적 서정시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고사(古寺) 1
- 조지훈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 목어(木魚) : 나무로 잉어 모양처럼 만든 기구로서 매달아 놓고 두드림.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오래된 절의 풍경이 은은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져 있어 심오한 선(禪)의 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감동을 주고 있다.
시인의 주관적 정서의 표출이 배제된 채 서술과 묘사 위주로 이미지와 분위기를 형상화하고 있어서, 시어나 시구 의미에 대한 이해보다 전체적인 인상과 느낌으로 감상해야 한다.
▶ 성격 : 관조적, 회화적, 선적(禪的)
▶ 운율 : 3음보
▶ 표현 : 비유가 없는 서술과 묘사
▶ 미감 : 정밀미(靜謐美)
▶ 구성 : ① 기 : 상좌 아이도 잠들음(제1-2연)
② 승 : 선적(禪的) 깨달음(제3연)
③ 전 : 극락 정토의 세계(제4연)
④ 결 : 석양 속에 모란이 짐(제5연)
▶ 제재 : 은은한 고사의 풍경
▶ 주제 : 정적 속에서 피어나는 법열과 숙명적인 한(恨)
<연구 문제>
1. 이 시는 대상과 화자와의 정서적 거리감이 멀게 느껴진다.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쓰라.
☞ 시인의 주관적 정서가 배제된 채 대상의 이미지만 묘사와 서술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2. 이 시에서 (1)시인의 시적 상상력을 통해 ‘고사(古寺)’의 정경으로부터 비약된 시행을 찾아 쓰고, (2)그러한 비약적 상상을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되는 시어를 찾아 쓰라.
☞ (1) 서역 만리 길
(2) 부처님
<해설> 제4연은 시 전체에 있어서 파격으로 부처님의 모습에서 서역 만리 길로 공간적 상상의 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제3연에서 연상할 수 있는, 부처와 관련된 4자의 한자 성어로 쓰라.
☞ 염화미소(拈華微笑). (그 외에 以心傳心, 心心相印, 不立文字, 敎外別傳 등도 해당됨)
4. 이 시에서 ‘서역 만리 길’을 극락 정토의 세계로, ‘모란’을 범(凡)생명의 일체 중생으로 이해한다면, ㉠‘눈부신 노을’은 불교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지 25자 내외로 쓰라.
☞ 세속적 번뇌를 초탈하고 불전에 귀의하는 희열감.
<감상의 길잡이>
시에 대한 이해는 때로 시어나 시구의 의미보다 전체적인 분위기, 인상, 느낌으로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절의 해질 무렵 풍경을 절제된 언어, 민요적 리듬으로 여백이 많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이 그려져 있다. 시인은 ‘고사(古寺)’의 은은한 정경을 관조하면서, ‘상좌 아이’, ‘부처님’, ‘눈부신 노을’, ‘지는 모란’ 등의 대상을 아무런 주관적 정서의 개입 없이 그저 그림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시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를 이해한다면, 그 대상들이 심오한 선(禪)의 세계에 젖어 드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운 상좌 아이’도 ‘부처님’도, 일체 중생의 상징일 수 있는 ‘모란’도 모두 ‘눈부신 노을’과 같은 환희, 희열감에 젖어 정토의 세계인 ‘서역 만리 길’로 귀의하고 있다.
고색 창연(古色蒼然)한 절의 은은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고민과 갈등에 싸인 현실로부터 벗어나 아늑하고 평안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시에 대한 감상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산상(山上)의 노래
- 조지훈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감상의 길잡이>
조지훈은 1947년 3월 백민(白民)에 발표한 「순수시의 지향―민족시를 위하여」에서 이른바 ‘순수시론’을 주장하면서, 좌익문학측의 ‘진보적 민족문학론’에 맞설 뿐 아니라, 김기림, 정지용 등의 시와 정치의 결합론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면서 일약 김동리(金東里)와 더불어 우익문학론의 신진 기수로 부각된다. 김광균(金光均)이나 신석정(辛夕汀)이 과거 그들의 이론적 후원자였던 김기림의 입장에 비교적 찬동하는 색채의 시를 창작하였다면, 이른바 청록파 시인들은 자신들의 스승격이었던 정지용의 입장에 정반대의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특히, 조지훈은 “순수한 시정신을 지키는 이만이 시로서 설 것이요, 진실한 민족정신을 지키는 이만이 민족시를 이룰 것”이라고 하고, 여기에서 순수한 시정신이란 “시류의 격동 속에 흔들리지 않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감성에 귀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해방공간에서의 문학의 정치주의적 편향에 대해 분명하게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 시는 이러한 조지훈의 순수 지향적 태도 속에서도 해방을 맞는 그의 감격이 적절히 형상화되어 있는 해방공간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염원하는 그의 간절한 기구(祈求)는 ‘내 홀로 긴 밤을 /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로 1연에서 직설적으로 토로된다. 그러한 그의 ‘간구’는 온몸을 쇠약하게 하여 핏줄마저 시들어 버리고 가슴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지만, 해방의 아침을 드디어 맞는다. 이 감격을 그는 2~3연의 ‘아아 이 아침 /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로 노래한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 꽃다운 하늘’임을 기뻐하고 ‘떠오르는 햇살은 / 시월 상달의 꿈’같이 싱그러움을 깨닫는다.
해방 이전의 길고 긴 침묵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조지훈은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게 된 감격을 맞게 된 것이리라.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6연에서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 오래 잊었던 피리의 / 가락을 더듬노니’라는 어구로써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제 더 이상 산상(山上)의 ‘높으디 높은 산마루’는 인고(忍苦)의 극한적인 공간이 아니라,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 사슴과 토끼는 /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서로) 사양’하는 평화와 환희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은 1연의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와 마지막 연의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로 대비된다.
그러나 시인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민주 국가를 건설해야만 하는 민족사의 과제가 새로이 대두되고 있음을, 순수시론자 조지훈도 끝내 외면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는 다시 간구하는 자세로 외친다. ‘내 홀로 서서 /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라며.
* 시적 자아(The Poetic I)
시 속에서 시인의 서정을 드러내는 인물로서시인과 세계를 매개하는 주인공이 된다.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며, 시인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가공의 존재로서 시적 화자라고도 한다.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시집 풀잎 단장, 1952)
<감상의 길잡이>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다부원(多富院)에서>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석문(石門)
-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 |
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시집 풀잎 단장, 1952)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때로는 시가 원한에 사무친 영혼의 하소연을 담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다.
경북 영양 일월산에 있는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한 시이다.
우연한 오해로 인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버림받은 한 여인네가 끝까지 남편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이야기는 서정주의 시『신부』에서도 볼 수 있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 보도록 하자.
▶ 성격 : 고백적, 상징적, 낭만적, 무속적
▶ 어조 : 버림받은 신부(新婦)의 천년 한(恨)을 지닌 하소연의 어조
▶ 구성 : ① 기다리는 돌문(제1연)
② 슬픈 영혼의 모습(제2연)
③ 눈물과 한숨(제3연)
④ 티끌로 사라짐(제4연)
⑤ 원한이 사무친 돌문(제5연)
▶ 제재 : 버림받은 신부(新婦)의 하소연(경북 영양 지방의 전설)
▶ 주제 : 풀리지 않는 원한(怨恨)
<연구 문제>
1. 다음은 이 시의 특징을 말한 것이다.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라.
☞ 담화(談話)
이 작품은 ( )의 기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말(노래)하는 사람, 말(노래) 듣는 사람 그리고 말(노래)하는 행위가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
2. 이 시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돌문’이라는 말을 넣어 50자 이내로 쓰라.
☞ 첫날밤 모습 그대로 열리지 않는 돌문 안에 앉아 눈물과 한숨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이 시에서 절개를 지키겠다는 매서운 의지를 나타내는 문장을 찾아 쓰라.
☞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4.
돌문 |
의 상징적 의미를 쓰라.
☞ 지극한 기다림.(기다리는 자아의 마음의 상태)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산문시이다. 산문시라고 해서 아무런 운율이 없는 것이 아니며, 일상 언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살리면서 독특한 효과를 살리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버림받은 신부가 지닌 한을 짤막한 특의 정형적 리듬이나 자유시의 리듬에 담게 되면, 그 절절한 사연을 포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이 작품은 조지훈의 후기시에 속하는 것으로 그의 고향인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했다.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하나에게 시집을 갔다. 신혼 초야(初夜), 잠들기 전 신랑이 뒷간에 다녀오다 신방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났다. 그 칼 그림자는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는데 연적(戀敵)의 칼로 오인했던 것이다. 신부는 족두리와 원삼도 벗지 않은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밤 그대로 있었다. 그 후에야 이 사실을 안 신랑은 뉘우치게 되고,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까지 지어 바쳤다.”
제1연에서부터 제3연까지 격앙되어 오던 정서는 제4연에서 갑자기 톤(tone)을 달리한다. 제4연부터는 미래에 있을는지도 모를 해후(邂逅)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1연과 제5연을 따로 떼어 읽을 때 시상이 상반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어조의 변화에서 온다. 제3연에서 ‘어찌합니까?’는 푸념처럼 들리는 한편 제4연에서 ‘사라지겠습니다.’는 절개를 지키겠노라는 매운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원한’이란 주제의 일관성을 가지면서도 첫째 ‘자신의 힘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하소연, 둘째 ‘당신이 오면 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상반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제5연에서는 현재까지도 ‘열리지 않는 돌문’을 보여 줌으로써 그 원한이 신화적 시간대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패강 무정(浿江無情)
- 조지훈
평양(平壤)을 찾아 와도 평양성엔 사람이 없다.
대동강 언덕길에는 왕닷새 베치마 적삼에 소식(蘇式)* 장총을 메고 잡혀 오는 여자 빨치산이 하나.
스탈린 거리 잎 지는 가로수 밑에 앉아 외로운 나그네처럼 갈 곳이 없다.
십년 전 옛날 평원선(平元線) 철로 닦을 무렵, 내 원산(元山)에서 길 떠나 양덕(陽德) 순천(順川)을 거쳐 걸어서 평양에 왔더니라.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단돈 십이 전(十二錢), 냉면 쟁반 한 그릇 못 먹고 쓸쓸히 웃으며 떠났더니라.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던 그 평양을 오늘에 또 내가 왔다
평양을, 내 왜 왔노.
대동문(大同門) 다락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본다. 패강 무정(浿江無情) 십 년 뒤 오늘! 아, 가는 자 이 같고나, 서울 최후의 날이 이 같았음이여!
(시집 역사 앞에서, 1959)
* 소식(蘇式) : 소련식.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6․25 당시 국군에 의해 탈환된 평양에 입성해서 폐허화된 도시의 모습을 보고 전쟁의 참혹상과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전쟁의 의미 추구나 이데올로기의 우열(優劣)을 주장하는 격한 감정의 전쟁시가 아니기에 시인은 의도적으로 행 구분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연을 긴 행 하나로 처리함으로써 전쟁을 바라보는 화자의 허망한 마음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3연의 첫째 단락은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인해 온통 폐허화되어 을씨년스러워진 평양 거리의 풍경을 ‘사람이 없다’ 는 구절로 요약,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때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잡혀 오는 한 여자 빨치산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듯 황량한 폐허 속에서 화자는, 북한이 소위 ‘스탈린 거리’로 명명한 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시나브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외로운 나그네와 같은 수심에 빠져들고 있다.
4~5연의 둘째 단락에서는 화자가 십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원산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왔던 기억과, 돈이 없어 그 유명한 평양 냉면 한 그릇 사먹지 못하고, 쓸쓸히 웃으며 평양을 떠났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은 이 곳 평양에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는 다짐을 하며 떠났던 그 옛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화자는 6~7연의 셋째 단락에서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이 곳을 왜 찾아왔던가 하고 뉘우친다. 차라리 이 곳을 찾아 오지 않았더라면, 비록 십년 전의 그 즐겁지 않은 추억이나마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아름답고 정겨웠을 것일텐데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대동문 다락에 오른 화자는 마침내 그 곳에서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발견하고 패강(浿江), 즉 대동강의 무정(無情)함을 탄식한다. ‘아, 가는 자 이 같고나’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사물의 그침 없는 변화를 일러 한 말*로서 이 작품에서는 전쟁의 비극과 덧없음을 자연의 의구함에 대비시켜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께서 강변에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가는 자는 이와 같을까? 주야로 흘러 쉬임이 없구나!’
(論語, 「子罕篇」)
꿈 이야기
- 조지훈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사상계, 1961.8)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꿈의 문을 열고 들어간 시인이 그 곳에서 만나게 된 ‘마을’과 ‘바다’라는 두 개의 시적 공간을 통해 죽음에 대한 초월 의지를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체 형식을 빌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을은 맷방석만한 꽃숭어리의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꽃밭으로, 그 곳에선 수천 마리의 낮닭이 갑자기 깃을 치며 울고 있다. 이에 반해 바다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는 공간이며, 그 배에는 오색 비단 돛폭과 큰 북이 달려 있는 한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부는 수염 흰 노인도 있다.
마을은 커다란 꽃송이의 해바라기와 깃을 치며 우는 낮닭의 밝은 이미지로 나타나는 삶의 현실적 세계를 표상하지만, 바다는 꽃상여를 싣고 떠났다는 진술을 통해 그 곳이 죽음의 초월적 세계를 표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반된 두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파아란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제시된 ‘산 모롱잇길’에 의해 상호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세계는 서로 교통(交通)하는 것으로,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통하는 것이다. 시상의 개폐 기능을 하는 1연과 8연을 ‘문을 열고 / 들어가서 보면 /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와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라는 구절로 배치시킨 시인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에서의 ‘문’은 시인을 아름다운 꿈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환상의 문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는 실존의 문이다. 이렇게 시인은 소멸과 허무의 일반적인 죽음 의식을 버리고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 또는 삶과 환치할 수 있는 죽음을 보여 줌으로써 생과 사를 초월하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병(病)에게
-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사상계, 1968.)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의인화된 병(病)을 대화의 상대자로 해서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구어체 문장으로, 얘기하듯 담담하게 진술해 가는 화자의 목소리에서 삶에 대한 신념을 느낄 수 있다.
▶ 성격 : 주지적, 담화적
▶ 구성 : ① 기 : 병이 생기는 때(제1-2연)
② 승 : 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제3-4연)
③ 전 : 인생에 대한 태도(제5-6연)
④ 결 : 병을 대하는 태도(제7연)
▶ 제재 : 병(病)
▶ 주제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자세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죽음에 이를지도 모를 병(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화자의 자세가 진술된 시행을 찾아 쓰라.
☞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2. 이 시의 화자와 병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 언제나 병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 성실하였다.
3. 이 시에서 화자인 ‘나’와 병(病)이 의인화된 ‘자네’의 인생관의 차이를 60자 내외로 쓰라.
☞ 병은 삶의 외경,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지만, 나는 삶을 아름답게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4. ㉠이 뜻하는 바를 화자가 처한 실제적 상황에 비추어 간략하게 풀이하라. ☞ 끊임없이 병마에 시달리다가도
5. 이 시에서 화자가 어떤 태도로써 병을 떠나가게 하는지 25자 내외로 쓰라. ☞ 병고와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
<감상의 길잡이>
불교에서 말하듯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지니고 산다. 그 중에서 ‘병’은 항상 인간의 마음을 나약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려 삶의 자세를 흐트러지게 하곤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병을 소재로 하여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1-4연은 화자인 ‘나’를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병은 늘 나에게 휴식과 성실함, 그리고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록 권한다.
제5-6연에서 ‘나’는 삶에 집착하지도 미련을 갖지도 않지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여기며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제7연은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병을 언제든지 친한 벗으로 대하려는 화자의 태도에서 병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초탈한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형식이 친구로 의인화된 병과 화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자칫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 의식을 차분하고도 친근감 있게 해 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 시는 조지훈(趙芝薰)이『지조론(志操論』이란 글을 쓴 바 있듯이 지사적(志士的)인 삶을 지향해 온 그가 말년에 병고(病苦)에 시달리면서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의 의지적 인생관을 고백적으로 그린 작품이라 하겠다.
산정 묘지(山頂墓地)․1
- 조정권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 묘지, 1991)
<감상의 길잡이>
한없이 투명하고 한없이 견고한 정신의 드높은 경지. 그 곳은 조정권의 시가 도달하려는 세계이며, 그 성과로 나타난 것이 곧 <산정 묘지> 시편이다.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룬 세계, 맑고 투명하면서도 유동하지 않고 집중된 응결의 힘을 보여 주는 세계, 그는 바로 이런 공간을 꿈꾸어 왔고, 마침내 그는 그 정점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양적인 정신주의를 바탕으로 한 치열한 사유의 깊이와 그것을 담아낸 언어 선택의 정점 때문에 그의 시는 명상시(瞑想詩)라고 불리는 한편, 일제 치하 육사의 <절정>을 방불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즉, ‘하늘도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와 같은 극한적 현실 상황 속에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자기 극복과 초월의 모습을 이루어낸 육사의 자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시의 ‘산정 묘지’는 <절정>의 ‘절정’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산정 묘지>는 30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로 허무와의 싸움을 통해 정신적인 극복을 성취해 가는 초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초인(超人)이란 니체에 의하면 ‘대지에 뿌리박고 살면서 자력에 의해 자기 극복을 성취함으로써 정신의 상승을 획득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어떤 초자연적, 초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의 대결을 통해 자기 극복과 구원을 이루어가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조정권은 그것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시에 ‘결빙’․‘광석․ ‘얼음’․‘씨앗’․‘뼈’ 등과 같은 견고성 이미지들을 빈번히 사용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는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나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이라는 구절에서 그 같은 초인적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그의 현실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이다. 그의 시에는 ‘밤’․‘어둠’․‘겨울’․‘결빙’과 같은 하강적 이미지 시어들과 함께 ‘없다’․‘않다’․‘못한다’ 등의 부정 종지법, 그리고 ‘가장’․‘못내’․‘끝내’․‘마침내’ 등의 단정 부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비관적인 세계 인식의 태도는 무(無)와의 대결로 응집된다. 그러므로 ‘산정 묘지’라는 제목의 ‘산정’과 ‘묘지’가 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무와의 대결 또는 무의 초극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정’은 지상의 맨끝으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공간이며, ‘묘지’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의 세계, 곧 무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시인은 이 무와의 첨예한 대결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의 극점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초극 의지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이 시는 허무한 지상적 삶을 초월하고, ‘가장 높은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산정 묘지’에 다다르려 하는 시인의 현실 초극 의지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국토서시(國土序詩)
-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시집 국토, 1975)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조태일은 현실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 시인이다. 그에게 ‘현실’이란, 주로 밝고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 어둡고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이 시도 그렇다. 시인이 바라본 현실은 우리가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암담할 뿐이다.
이러한 조국 강산에 우리는 숨결과 피, 그리고 살결과 뼈를 보태야 한다. 그래야만 새 역사가 전개될 수 있다고 시인은 역설하고 있다.
▶ 성격 : 격정적, 참여적
▶ 어조 : 새 역사의 전개를 염원하는 어조
▶ 표현 : 반복법, 점층법
▶ 구성 : ①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삶은 포기할 수 없음(제1-3연)
②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결하며 살아야 함.(제4-5연)
▶ 제재 : 국토
▶ 주제 : 새 역사 전개에 대한 갈망
<연구 문제>
1. ㉠, ㉡ 각각에 담긴 의미를 쓰라.
☞ ㉠ 숨결 : 생명
㉡ 새 숨결 : 새 역사
2. 이 시의 주제를 당위적 진술의 완결된 문장으로 쓰라.
☞ 우리는 새 역사의 전개를 위해서 국토(조국)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새 역사 전개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3. 이 시에서 화자의 현실 대결 의식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
☞ 피동적(소극적), 능동적(적극적)
( ) 자세 → ( ) 자세 |
4.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역사관은 어떠한가?
☞ ③
① 퇴영적(退嬰的) ② 답보적(踏步的) ③ 진보적(進步的)
④ 방관적(傍觀的) ⑤ 고답적(高踏的)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제3연까지를 전반부로, 그 이하의 두 연을 후반부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전반부는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숙명적인 현실을 감지하게 되며, ‘~일이다.’라는 구절에서는 그런 숙명적인 현실에 처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환기시켜 준다.
70년대의 폭압적인 정치 현실에 맞서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의 땅’을 밟고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이며 ‘우리의 가락’으로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풀잎’과 ‘돌맹이’ 혹은 이름없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간 숱한 민중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것들이 지닌 ‘혼(魂)’에까지 우리의 숨결이 미치도록 우리의 삶을 불지펴 온몸으로 노래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시인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 조영출
눈 쌓인 허허 벌판
피ㅅ방울 흘리며 걸어간 발자욱
세찬 바람에 쏠리는 눈보라야
너는 이 발자욱 앞에 네 광란을 멈춘 일이 있었드냐.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
피 눈물 방울 흘리며 떠나간 발자욱
서슬이 푸른 아수라*의 별들아
너는 이 발자욱 뒤에 네 체포를 멈춘 일이 있었드냐.
오오 슬픈 압제의 밤은
가슴을 찔러 흐른 피에
사상(思想)이 꽃처럼 피다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
마음의 광채
금ㅅ줄을 띠운 토방(土房)의 등불마다
강보의 어린 울음이 터져 올랐다.
님은 가고
여기 어린 생명은 살고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
이 어린 목숨이 살어
지금 오오 지금
이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보라 저 푸른 하늘
저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흰 비둘기
붉은 태양
오호 붉은 태양아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
(예술운동, 1945.12)
* 아수라(阿修羅) : 불교에서 이르는,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
<감상의 길잡이>
해방 이전 대중극(大衆劇)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대중가요의 가사를 창작하기도 한 대중예술인 조영출은, 해방 직후에는 연간조선시집, 횃불 등의 시집에 다수의 시를 발표하다가 월북하여, 우리의 문학사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로 남아 있다.
이 시는 해방의 아침을 맞는 감격을 새 생명의 탄생과 대응시켜 영탄조의 호흡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과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슬픈 압제의 밤’으로 규정하고, ‘오오 지금’의 ‘흰 비둘기’ 날고 ‘붉은 태양’ 빛나는 해방의 아침과 대비시킨다. 과거 ‘눈 쌓인 허허 벌판’과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을 ‘피ㅅ방울 흘리며’ ‘피 눈물 방울 흘리며’ 헤매면서도, 시적 화자로 대유된 많은 투사들의 항쟁에 의해 ‘슬픈 압제의 밤’에서도 ‘사상이 꽃처럼 피’어 나고, 비록 그들이 죽더라도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와 ‘마음의 광채’는 ‘강보의 어린 울음’으로 살아난다. 그리하여 비록 ‘님’은 가도 ‘어린 생명은’ 감시의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서도 ‘목숨이 살어’ 지금 해방의 새 아침을 맞는다.
‘푸른 하늘’에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 흰 비둘기’가 날고 ‘붉은 태양’이 빛나는 환희의 새 아침이지만, 그럴수록 지난날에 대한 회한은 가슴에 사무친다. 오늘의 청(靑), 홍(紅), 백(白)의 색채 이미지가 선명하게 제시될수록 눈[雪]과 피로 제시되는 과거의 시각적 대비도 한층 뚜렷해진다. 그리하여 결코 시적 화자는 그러한 우리의 역사를 잊을 수 없어, 과연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고 자문(自問)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영탄적 어조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그 감격이 단순한 환희의 찬사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는 ‘슬픈 역사’의 반추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자기 비판적 성찰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행의 의문에 대한 긍정적 해답이 여전히 불투명한 해방공간의 현실에서 시인은 결국 월북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이 또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동백(冬柏)
- 정 훈
백설(白雪)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자유문학’(1953.3)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정훈은 전래적 정서를 재구성하는 독특한 시풍을 보이며, 전통적인 소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동백 역시 이러한 특서을 잘 보여 주는 시이다.
이 시는 평시조의 3장을 4개 연으로 풀어 쓴 시조의 파격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중 제1,2연은 서경(敍景), 제3,4연은 서정(抒情)의 세계를 노래한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 성격 : 전통적, 주정적, 심미적, 관조적
▶ 운율 : 시조의 외형률이 가미된 운율
▶ 표현 : ① 의인법, 대조법, 은유법, 역설법, 설의법
② 감각적인 표현, 상징적 수법
▶ 구성 :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성
① 기 : 눈부신 백설의 공간(제1연)
② 승 : 다홍으로 타는 동백(제2연)
③ 전 : 사모치는 정화(제3연)
④ 결 : 애타는 사모의 꽃(제4연)
▶ 제재 : 동백꽃
▶ 주제 : 사모의 정염(情炎)
<연구 문제>
1. 이 시의 제재와 시각적, 촉각적으로 대조되는 시어를 찾아 쓰라. ☞ 백설
2. 이 시에서 주제를 형상화하는 핵심적인 시어를 찾아 쓰라.
☞ 정화(情火)
3. 이 시에 대해 말한 것 중, 잘못된 것은? ☞ ②
① 대립적 이미지가 주제의 부각에 기여한다.
② 현대인의 소외 의식을 표현하였다.
③ 영탄적 설의법, 감정이입의 수법을 사용하였다.
④ 선경후정(先景後情)이 사용되었는데 서정(抒情)에 해당되는 연은 3,4연이다.
⑤ ‘차가울사록’과 ‘사모치는’은 서로 모순되는 말로서 역설적 표현에 해당된다.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동백꽃의 정열을 시간적․공간적 배경과 시각적 이미지의 대비로 잘 드러낸 작품이다. 각 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연에서, ‘백설(白雪)’이라는 말은 시간적 배경이 겨울임을, ‘하늘 한 모서리’란 말은 공간적 배경이 황량한 산의 한 구석임을 나타내고 있다.
제2연에서, 제1연의 배경이 주는 흰색과 파란색 사이에 빨간색의 동백꽃이 선명하게 피어 오른다. 특히, 백설의 시각적 이미지인 흰색, 촉각적 이미지인 차가움은 동백꽃의 시각적 이미지인 빨간색과 그 빨간색이 주는 ‘정화(情火)’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겨울의 모진 추위 속에 피어나는 동백꽃의 강인한 의지와 정열이 부각된다.
제3연은 시상이 가장 고조된 부분으로 ‘정화(情火)’는 작품 전체의 주제어가 된다. 역설법을 구사하여 동백꽃의 정열을 잘 나타냈다. 백설이 주는 촉각적 이미지에 상응(相應)하는 ‘차가울사록’이라는 직서적 표현이 눈에 띈다. 이 ‘차가울사록’은 제4연의 ‘사모치는’이라는 구절과 대응한다.
제4연은 감정 이입된 동백을 통해 임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정열을 영탄적 설의(設疑)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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