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띄어쓰기, 존 로스, 호머 헐버트
‘훈민정음’을 비롯해 허균의 ‘홍길동전’,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 디미방’ 등을 살펴보면 지금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띄어쓰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말까지 글쓰기는 오른쪽 위부터 아래로 하는 세로쓰기 방식이었다. 이때는 띄어쓰기가 없었다. 한글의 띄어쓰기를 만든 사람은 세종대왕이 아니다.
그것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선교사였다.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띄어쓰기기가 외국인에 의해 도입됐다는 사실이다.
띄어쓰기가 적용된 최초의 한글 문헌이 1877년 존로스가 펴낸 ‘조선어 첫걸음 Corean Primer)’이기 때문이다. 한글 문장을 영어식으로 띄어 쓰고, 여기에 영어 단어로 발음을 표기했다. 한글로 쓰여진 출판물 가운데 처음으로 띄어쓰기가 도입된 문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스(1841∼1915) 선교사가 쓴 한국어 교재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이다.
‘조선어 첫걸음’을 보면 한글 문장이 먼저 나오고, 그 아래에 발음과 영어 단어를 차례로 대응시켜 놓았고 가로쓰기가 보인다.
그 이후에는 1896년 서재필, 주시경,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등이 만든 ‘독립신문’이 간행물로는 최초로 한글 띄어쓰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신문’은 2012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제50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연세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독립신문’ 창간호인 4월 7일자, 1면 논설에서 한글 띄어쓰기에 대한 내용이 잘 표현돼 있다. “모두 언문으로 쓰는 것은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오, 또 구절을 띄어 쓰는 것은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3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오면서 한글 띄어쓰기가 더 보편화 되었다.
한글 연구와 보급에 헌신을 다한 외국인 선교사
‘한글운동의 선구자’이자 감리교인이었던 주시경 선생의 한글 사랑은 배재학당과 상동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밑거름이 됐다. 그의 제자이면서 한글학회 핵심 멤버였던 최현배 장로는 평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이 기독교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맞춤법과 한글을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다. 하지만 힐버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끊임없이 연구하며 노력한 결과, 놀랍게도 한국에 온지 3년 여 만에 헐버트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의 ‘사민필지’를 편찬한 것이다.
‘사민필지’는 1891년 발간되었으며 초판으로 2천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자연과 환경, 정치, 학문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는 순 한글로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민요 아리랑을 악보로 제작해 보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어려운 한자보다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그는 한글을 사랑했다.
“한글은 대중 언어 매체로서 영어보다 더 우수하다.”
누구보다 우리말을 사랑했던 헐버트. 미국 버몬트주의 명문가 자제였던 헐버트 박사는 1886년에 조선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소식을 듣고 우리 땅에 왔다.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 박사는 미국 다트머스 대학과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름만 알고 있었던 그는 1886년 7월, 인천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때 그의 나이 23살 때였다.
그는 고종황제가 조선의 청년들에게 영어 및 서양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했던 육영공원(Royal English School)에서 5년간 학생들에게 영어와 역사 등을 가르쳤다. 미국인이면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일상에서 조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힌 헐버트 박사는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최초로 제안, 도입했다.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6년’에서 “중국인들이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채택해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장을 했을 정도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
그는 한국의 분리 독립을 지지하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에 의해 강체 체결당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헤이그 특사를 적극 지원, 헤이그 특사 3인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무사히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할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벌여준 인물로써 이에 헐버트는 ‘제 4의 헤이그 특사’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는 정작 헤이그에 도착했음에도 불구, 만국평화회의장에 들어가는데 조차 실패한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가 파견되는 과정에서 헐버트가 연관되었음을 알아내고,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시킨다. 그는 외국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희생했다. 이후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고, 정부 수립이 된지 1년이 된 1949년, 86세의 노인이 된 헐버트는 42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한 달 씩이나 항해를 거쳐 와야 하는, 거친 여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땅을 밟았던 호머 헐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1949년 7월 29일, 한국 땅을 밟은 지 일주일 만인 8월 5일 날 이 땅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말대로 현재 호머 헐버트의 묘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위치해 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한가운데가 비어 있던 묘비는 50년이 지난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씨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동년 8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 넣었다.
사후 195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다시 2014년, 한글날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 받았다.
흔히 한국어 띄어쓰기는 호머 헐버트(1863 ~1949)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대중화에 노력하고 성공한 사람은 헐버트가 맞다. 독립신문(1896년 4월 7일 창간과 더불어 띄어쓰기 적용)에 띄어쓰기를 적용할 것을 적극 권장하였고,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어 띄어쓰기를 처음 대중화하여 문법적으로 적용한 것은 헐버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헐버트보다 19년 앞서 한국어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존 로스(John Ross, 중국이름 나요한, 1842 ~ 1915)이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책 <조선어 첫걸음 COREAN PRIMER, 1877>에서 띄어쓰기를 처음 시도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온 무역상들과 만나면서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1887년 <신약전서>를 완성하여 한국에 보냈다. 존 로스는 1874년 가을에 고려문(중국 소재 고려인 집단거주지)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고, 한국을 선교지로 생각하게 된다. 그의 활동으로는 성서 한글화 작업, 서간도를 비롯한 한인촌에 복음전도 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반도 이남 등에도 영향력을 끼쳤다. 존 로스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던 당시 “한자는 진서로 일컬어지며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고 한글은 언문이라 불리며 천시되었으며, 한글은 한자의 보조 표기 수단 정도로 인식”되었던 시기였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띄어쓰기를 적용하여 한국어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업적이 드러난 것은 요즘의 일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사람이 평안도 지방 출신이었던 탓으로 표준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평안도 사투리로 한국어 공부책을 발행한 것이다. 예를 들면 로버트 할리라는 연예인이 경상도 방언을 유창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그의 <조선어 첫걸음>에 나타난 문장을 몇 개 보기로 하자.
내 문에 나가갓슴메
ne moone naghaghassumme
I door want to pass(=travel).
어디 가갓슴마
udi gaghassumma
Whither journey!
등과 같다. 온통 사투리뿐이라 현대인은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조선어 첫걸음>에는 남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많다. 예를 들면 “너는 챠타구 나는 말타구 갑세.”, “사자는 챠뒤여 얼그시.”, “쇼ㅣ쇼한 물건는 챠 안에 두시.” 등이다. 현대 표준어로 한다면 “너는 차 타고 나는 말 타고 갑시다.”, “상자는 차 뒤에 둡시다.”, “작은 물건은 차 안에 두시오.”라고 써야 한다.
<조선어 첫걸음>을 손에 쥐고 참으로 가슴이 뛰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어 교본>을 얻었으니 감개무량함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책의 가치에 비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는 표준어의 개념도 없었으니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으나 항상 어느 시대나 통용되는 규칙이 있다. 신라시대는 경주방언이 표준어였고, 고려시대는 개성 방언이 표준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한양말이 표준어라고 봐야 한다. 임금이 사는 곳의 언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존 로스가 번역한 성서가 나중에는 호칭의 문제나 표기의 문제 등으로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1887년 2월 7일 서울에서 한국어 성서번역위원회 (Commi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를 조직하였다.
학문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평안도 방언을 배운 까닭에 후대에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이 자못 안타깝다. 띄어쓰기를 처음 적용한 것에 대해서는 수 만번 박수를 보내도 아깝지 않다.
‘큰집’과 ‘큰 집’이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듯 ‘띄어쓰기’는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한 어문규정이다.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단어를 붙이거나 띄어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한글의 띄어쓰기를 만든 사람이 외국인 선교사라는 점이다. 19세기 말 한국을 방문해 최초의 한글 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를 만든 존 로스(John Ross)가 그 주인공이다.
존 로스, 한글 성경을 만들기 위해 고려문을 찾다
▲ 조선어첫걸음존 로스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라요한’이다. 그는 1842년 스코틀랜드 동북지역에 위치한 이스터 마치 지역에서 태어나 연합장로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72년부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 선교에 나섰지만, 첫 선교지는 중국 만주였다. 그가 몸담고 있던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에서 파송된 곳이 중국 만주 영구였기 때문이다. 로스는 영구에서 첫 겨울을 보내며 중국어와 사서삼경 공부에 매진했고, 이듬해인 5월에는 중국어 설교에 성공했다.
하지만 결혼 후 1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게 된 로스는 1874년 ‘고려문’으로 향한다. 고려문은 당시 만주에서 국제무역이 가장 성행했던 곳인데 음력 3~6월, 8월, 9~10월, 12월에만 통행이 허락돼 개방 시기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몰리던 곳이었다. 당시 존 로스는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고려문에 모인 조선 상인들은 한문이나 만주어에 능통한 경우가 많아 종교 전파에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때 그와 연이 닿은 사람은 평안도 의주 출신의 이응찬이었다. 이응찬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다니며 한약재를 팔던 장사꾼인데, 단동으로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고려문까지 떠밀려온 상황이었다.
자모만 배우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우수한 한글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한글 교사 겸 번역가로 활동하게 됐다. 로스는 그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가 도입된 한국어교재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1877)’을 만들었다. 이는 로스가 자신과 같은 선교사나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든 책으로, 한글 아래 발음기호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기록됐다. 여기에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로스가 사용하던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에는 “한글은 소리글자로 이루어져 자모만 배우면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는 글자”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간행물로는 <독립신문>이 1896년 최초의 한글판 신문 발행과 함께 띄어쓰기를 도입했으며,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발간한 <초등소학>에는 단어와 조사들을 모두 띄어 쓰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의 어문규정이 하나씩 정립되기 시작했다. 초창기 성경 번역에는 로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참여했다. 한국인 번역자들이 한문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옮기면, 로스가 다시 한글과 헬라어를 대조해가며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이에 1878년 이들이 공역한 ‘누가복음’ 초역이 완성됐으며, 이 초역본은 다시 로스의 선배였던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다른 한인 번역자들과 함께 수정 과정을 거쳐 최종본으로 완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번역본들은 1878년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1877년 《한문문리성경》, 1879년 ‘마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등이다.
최초의 한글성경《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 예수셩교젼셔(1887)신약 성경의 한글 번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즈음 로스는 한글 성경의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 130파운드를 요청했다. 그리고 1881년 중국 심양(랴오닝성에 있는 도시로 한국 교민이 많은 곳)에 인쇄소를 설치해 우리나라 첫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인쇄했다. 당시 수천 권이 인쇄된 두 책은 부산과 국내 일부 지역, 만주 한인촌, 일본 등으로 발송됐다. 《예수셩교문답》은 현재 런던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한국 개신교사상 최초의 성경으로 알려진 51페이지짜리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3,000부 간행됐으며, 이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발행한《개역 그리스어 성서》를 기준으로 《예수셩교젼셔》를 다시 검토, 교정하며 더욱 정확한 성경을 완성해갔다.
낯선 타지에서 한국어 성경을 완성해간 존 로스. 그는 한글 최초로 띄어쓰기를 도입한 것은 물론 “한글이 한문보다 훨씬 정확한 번역본을 만들 수 있는 글자”라고 확신하며 우리 한글을 더욱 우수한 문자로 만들어준 고마운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