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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Jobs 9 2025. 4. 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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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계도

 

로마 제정사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처럼 로마를 한 세기동안 지배한 세습왕조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굵직한 이름의 현군, 암군, 폭군이 두루 있는 만큼이나 그 영향력도 존속기간 내내 상당했다.

 

300년 뒤 등장할 콘스탄티누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 등장 전까지 창건자 부부 주도 아래 가장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세습왕조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아헤노바르부스)로 이어졌다.

 

로마인 사가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해, 서양 고대 로마사 기본서 중 하나를 저술한 프리츠 하이켈하임 등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사를 설명할 때, 다음 4대를 각각 26년 6개월의 시기 및 그 공통점을 묶어 아우구스투스 시대/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시대/클라우디우스 및 네로 시대로 기술하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문서에서는 이 서술 방식에 따라 기술한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시대는 이전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의 소위 은(sliver) 시대로 불리는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와 달리 특유의 경직되고 차가운 두 세대로 보통 설명된다. 이는 학자들의 일관된 설명처럼 두 황제의 냉혹한 성격,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나타나기 시작한 제정 초기의 정치적 특성과 그 그림자, 두 황제 아래 진행된 점증된 프린켑스 지위와 권력의 확립 등이 거론되며, 실제 문학적 빈곤과 스토아주의자와 황제 간의 대립 등이 나타났다. 반면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대는 이전 시대와 다르게 문화적 활기가 나타나고 제정 안정화로 인해 속주 내 도시화가 진행되고 본국과 속주 간의 문화, 경제적 격차 완화 등이 나타나는 등의 이유로 종종 은 시대로 불리기도 한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기본적으로 포에니 전쟁 이후로 계속된 로마의 급격한 팽창이 이제 한계가 왔음을 인정하고 내실을 기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국경선의 안정을 위해 라인강, 도나우강, 시리아 같은 주요 국경에 요새를 짓고 로마 군단을 주둔시켰다. 다만 내전과정에서 40개까지 늘어난 군단을 예산문제로 28개로 감축하는 대신에 28개 군단을 상비군화하였고 부족한 병력은 로마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병으로 메웠다. 로마 군단은 로마시민권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20년 동안 복무했고 보조병은 로마시민권이 없는 속주민으로 구성되어 요새수비, 국경 경비, 투사무기 발사병 엄호 등의 임무를 25년 동안 수행하는 대신에 제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수도인 로마 내부에는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와 경찰 및 소방관 역할을 하는 '비길레스(vigiles)'를 창설하였고 유사시 예비군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는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렇다고 영토 확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히스파니아(이베리바 반도)의 북부지역,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과 노리쿰, 도나우 강 남부의 일리리쿰과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BC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아나톨리아 반도 중부)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하였고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도 병합하여 2개의 속주로 나누었다. 다만 라인 강, 도나우 강 근교의 게르만 족은 AD 9년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는 고전 끝에 결국 굴복시키는 데 실패했다. 또한 동방의 강대한 영토를 보유한 파르티아 제국과는 직접적인 충돌을 자제하고 주로 외교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BC 20년에 협정을 체결하고 양 국의 완충지대로서 아르메니아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카르하이 전투에서 빼앗은 크라수스의 군기도 되돌려 받았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계는 겉모습은 공화정을 유지한 채 교묘하게 여러 가지 권한을 뒤섞은 것이었고, 그의 통치술은 본국과 속주, 도시와 시골, 육지와 섬에 따라 그 방식이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교묘한 형태의 1인 독재체제였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의 신체제는 공화정 복구 선언 이후에도 기원전 29년도의 '로마 여신과 디비 율리우스(신격 카이사르) 봉헌' 명령 서한을 비롯한 황제 개인우상숭배와 아우구스투스 부부 및 두 양자, 조카 권한 강화 조치 등으로 인하여, 당대부터 원로원 중심의 과두정 형태(공화정 체제) 복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상당히 강했다. 따라서 그의 정적 외의 추종자들까지 '밀실정치', '족벌주의 연합의 전통 공화정을 가장한 실질적인 왕정' 등을 끊임없이 주장하거나 의심했다.

 

더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와 각종 명예들이 옛 공화정 체제의 전통 아래 이뤄진 합법적 틀 속에서 진행됐다는 것에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지위는 명확한 법적인 지위보다는, '로마 공화국 수호자',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과 같은 개인의 명성과 영예 그리고 내전 과정에서 얻게 된 군사적 기반과 병사들의 충성심에 사실상 기반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계승시키는 명확한 원칙도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그 명분 역시 상당히 애매했다. 더 큰 문제는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는 후계자로 삼을 친아들이 없음에도, 그가 꾸준히 자신의 지위를 '아우구스투스의 피가 흐르는 친혈육'에게 물려주고자 한 개인적 열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개의 로마귀족들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 즉 조카나 외손자 등을 양자 또는 사위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후계구도를 짠다. 그 첫 번째 후보가 바로 친누나 소(小) 옥타비아의 아들로 자신의 유일한 남자조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라는 소년이었다. 마르켈루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신분은 플레브스(평민)이지만 씨족 전체에서도 공화정 후기를 주름잡은 씨족 내 지파 마르켈루스 가문 태생으로,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친아들(티베리우스, 드루수스)과는 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면서 먼 친척이고 어린 나이부터 동고동락한 친구 사이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의 지지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조카 마르켈루스를 자신의 딸 율리아와 결혼시켜 마르켈루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BC 23년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충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장군에게 율리아를 시집보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지위를 물려주려고 계획을 바꾼다. 이때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자신을 지지해준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리고 옛 안토니우스파까지 배려하고자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딸 소 안토니아의 남편이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두 양자 중 친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던 대 드루수스를 그 후계자로 생각해, 아그리파가 호민관 특권을 선사받기 전부터 꾸준히 이를 동료 원로원 의원들과 측근들에게 언질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아그리파는 외손자들이 아주 어린 나이에 급사했고 정식양자로 입적시킬 계획을 착실히 세워둔 누나의 사위, 자신의 양자 대 드루수스까지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사고로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고령인데다 평소 골골대는 약골이라서 크게 절망한다. 더 큰 문제는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 태어난 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는 각각 AD 4년과 AD 2년에 차례로 요절한데다,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부부 사이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까지 지위를 물려받기에 너무 어렸다는 현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일단 게르마니아 전쟁을 이끌고 있던 아내의 큰 아들 티베리우스를 로마로 소환해, 그를 외동딸 율리아의 새남편으로 결혼시켰다. 하지만 율리아의 끝없는 방종과 고부갈등,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티베릴루스가 요절한 일련의 사건이 터지면서, 견디다 못한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특권 등 자신이 가진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로도스 섬으로 떠난다. 이 기간은 무려 7년이었는데, 그 사이 두 외손자가 연이어 요절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다행히 티베리우스가 아들의 성년식을 핑계로 로마로 복귀하게 되면서, 후계 문제는 일단락되게 되는데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남자혈족 중 가장 후순위로 결정한, 아내의 큰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후계자로 삼았다는 것이 일관된 평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한 리비아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아들 중 한명으로, 불과 12살의 나이부터 동갑내기 친척 마르켈루스와 그 후계수업을 받아온 준비된 후계자였다. 또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는 의붓남매이면서도 부부였으며, 요절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실질적 후원자이자 계부이며 외삼촌이었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남에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 아니었고, 성격 역시 폐쇄적인데다 인기가 진짜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고령이었고,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남편이자 누나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는 이제야 성년식을 마친 갓 18살의 소년이었다.

 

AD 4년 아우구스투스는 가족 회의를 열고 오랜 이야기 끝에 티베리우스를 정식 입양하고 그에게 자신의 지위와 가문 전체를 물려주기로 한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아들 소 드루수스와 나란히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하면서, 카이사르의 성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남자혈육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차차기 후계자로 못박으며 두 친혈육까지 자신의 가문에 공식 입양시키며 실질적인 후계자는 자신의 남자혈육 게르마니쿠스임을 분명히 한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며, 로도스 은퇴 전의 모든 지위에서 복귀했다. 이후 AD 13년,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절대지휘권과 종신 호민관 특권 등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특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이 시기 두 사람은 인구조사 등을 부자의 이름으로 진행해, 제국 전역에 세습을 사실상 공포한다.

 

이렇게 후계문제를 해결한, 아우구스투스는 AD 14년 8월 19일 이탈리아 남부의 놀라에서 평온하게 숨을 거둔다. 로마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신격화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

 

티베리우스는 동명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카이사르파의 일원으로 이두스 마르티이(3월의 이두스) 사건 이후 안토니우스 형제측을 지지한 ‘옛 카이사르파 내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파’에 속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법무관 임기 종료 직전부터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카푸아 반란에 동참한 이유로, 그의 가족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 삼두파의 결성, 옛 카이사르파 내 화합으로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겨우 로마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어머니 리비아에게 반하였기 때문에 이혼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리비아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 후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나중에 태어난 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같이 아버지에게 남겨졌으나 티베리우스의 나이가 9살일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황궁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친우이자 충직한 부하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도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 티베리우스는 22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군단 사령관이 되어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서 상실했던 로마의 기지 일부를 되찾아 오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또한 아드리아 해안의 일리리쿰 속주에서 판노니아 족을 격파하고 판노니아 속주를 점령해내었고 파르티아 제국과 외교교섭도 맡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으며 완충지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군이 게르만족 일파인 케루스키 족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여러 차례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전적과 달리 티베리우스에게 개인적인 불행이 잇달아 찾아왔다. 우선 게르만족 공략을 맡았던 동생 드루수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낙점하고 그들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선택하여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시켰으나 아그리파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티베리우스를 율리아와 결혼시키고자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아그리파의 딸과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하여 그녀의 아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후견인 노릇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모두가 요절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친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다음 후계자로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의 게르마니쿠스를 삼도록 한 것이었다.

 

비록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에 마지막까지도 망설였으나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제를 유지하며 국경지대를 정비하는 한편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고 긴축재정을 펼쳐 재정을 풍부하게 했다. 하지만 황제가 주최하는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켰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인기는 잃었다. 더욱이 AD 26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에게 통치를 일임하고 카프리 섬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폐쇄적이지만 유능한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에서의 염증으로 은둔중에도 전반적인 통치는 원거리 파발로 잘 처리하였다.(후세에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각종 시설물과 도로등에 새겨진 글로 근대에 오면서 점점 고평가되고 있다) 다만, 로마 원로원과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통치자가 자신들의 곁에 없는 것을 매우 매우 싫어하였다. 비록 수도에서 세야누스의 전횡이 심해지자 AD 31년 세베루스를 처형하여 혼란을 정리하였지만 여전히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통치를 하였고 더욱이 말년엔 의심병 때문에 고발에 의한 고문과 처형이 연이어 벌어지는 공포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폭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단, 주타겟은 원로원 의원들로 그들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다 후반부에는 최악이었다)

 

AD 37년 티베리우스가 병사하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의 아들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가이우스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지어준 '칼리굴라'('꼬마장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였는데 70대의 노쇠한 티베리우스 말년의 공포정치에 지친 로마시민들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칼리굴라에게 열광하였다. (본인은 칼리굴라라는 애칭을 싫어하였다) 하지만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술에 의하면, 이런 공포분위기는 계속 되었고 불행하게도 가이우스는 목숨을 건진 대신 오랜 시간동안 티베리우스에게 제왕교육을 받은 탓에 그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가이우스는 단독세습 직후 티베리우스가 중지시킨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 집행과 각종 행정결정을 재개시켰다. 이때 그는 본인과 황실의 이름으로 전차경기와 검투사 시합을 매일 같이 열고 축제를 베풀며 ‘빵과 서커스’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8개여월 만에 심한 고열로 쓰려졌고,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중병 회복 후 정신병 증세를 보인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황색언론인 탓에 무조건 신뢰하긴 어렵고,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때부터 가이우스의 노골적인 황제 권력강화와 그 전제화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38년부터 41년까지의 기간동안 가이우스는 개인우상화, 임페라토르와 프린켑스의 권력을 통한 숙청 등을 통해 원로원과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황제는 조폐발행권 장악, 곡물수송에 대한 새로운 권력 획득, 사법과 재판 권한 신설 등을 이 시기에 장악하는데 이 조치들은 41년 이후에도 황제들이 계속 장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이우스의 행동은 원로원, 로마 내 최상위 기사계급과 부자들에게 정신질환 내지 변덕스러운 독재로 해석됐고, 황제의 생활 역시 화려하고 방종한 면이 있어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다를게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이우스를 노린 암살 시도는 39년 후반부터 현직 집정관 두명 등이 가담하는 등의 사건을 시작으로 수차례 벌어졌고, 서기 41년 1월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가 부하 20여명과 함께 황제를 암살하면서 가이우스의 변덕스럽고 노골적인 전제권력화 시도는 4년만에 끝난다.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은 시대)

 

가이우스 칼리굴라 암살은 요세푸스의 증언과 디오의 간접적 증언처럼 암살범들의 개인비리를 감추기 위해 벌인 일이자, 원로원 내 공화주의자와 암살범들의 공모로 발생한 급박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암살자들은 미리 강금한 황숙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혈육까지 죽이려고 했는데, 이는 암살자 중 일부가 마음을 바꿔 그를 살려준 뒤 근위대 병영으로 데리고 가면서 그들의 계획은 꼬이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처럼 현직 집정관은 황제 개인금고와 황실재산을 원로원 국고로 모조리 빼돌린 뒤, 원로원을 카파톨리오 신전에서 개회해 카이사르 가문 멸문과 후속조치를 주제로 연다. 이렇게 가이우스가 암살되고 원로원이 그 즉시 공화정으로의 회귀를 노린 상황에서, 신전 안에서는 기원전 29년 다시 공화정체가 회복되었는데 왜 다시 하냐는 반론이 쏟아지고 현직 법무관 베스파시아누스를 위시한 황제파 젊은 원로원 의원들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현직 프린켑스의 죽음에 당장 복수를 결의해라", "명백한 번역이자 공화정체에 대한 도전이다. 암살범들을 처벌하고 가이우스의 원수를 갚자"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때 가이우스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한 암살범 20명 외의 근위대 지휘관들은 카이레아, 루푸스 등을 병영 도착 즉시 체포한다. 그리고 클레멘스 등은 9개 대대 병력과 함께 그 즉시 황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면서, 가이우스의 암살범들을 반역법과 가족법으로 기소해 유죄선고 후 처형시커나 자결케했다. 이어 황제파 원로원 인사들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고문단 등이 병영에 집결해 "암살자들 뒤에 있는 것이 확실한 원로원을 다 쓸어버리자"고 건의한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런 상황에서 갑론을박을 펼치며 내분만 벌어지고 있었고, 근위대에 사람을 보내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즉위 직후 병사 1인당 충성보너스 지급을 약속하고 즉시 하사한 상황에서 씨알도 먹힐 명령이 아니었고, 이 사건 후 수도경비대, 소방대까지 죄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어 같은 날 클라우디우스는 무장근위대를 대동해 원로원을 찾아가, 조카가 억울하게 죽은 상황에서 더 이상 그의 명예를 더렵히지 말 것을 예의있게 경고한 뒤 그들을 존중하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린다. 이 사건들은 가이우스 칼리굴라 피살 후 24시간도 안 되어 벌어진 타임라인이었다. 따라서 41년 유피테르 신전에서 기획된 공화정 재건 선언은 일찌감치 무산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남자혈육 중 유일하게 남은 남자황족으로,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신체적 장애 문제로 친형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훌륭한 인품과 비상한 머리를 알아보고 역사학과 문학, 지리, 행정, 의학, 과학 등 각분야의 인재들을 스승으로 삼게 해 군경력이 불가능한 현실에서도 로마황족으로 살아남도록 훈련시켰다. 따라서 조카 가이우스 칼리굴라 시대에야 정치경력을 시작하게 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의 예상과 달리, 즉위 과정부터 놀라움을 안겼다. 실제 클라우디우스의 정치적 능력과 행정적 판단력은 놀라울 정도 뛰어났고, 이는 황제 암살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 속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서기41년 1월 암살 정국과 정세는 금세 안정을 찾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호국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고 갈리아 북부와 벨기카 일대를 위협한 드루이드교 문제를 계기로 남부 브리타니아가 정복된다. 내부적으로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로마 제국의 관료조직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특히 전임자 가이우스 시대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이탈리아 경제 발전과 사회안정책은 꼼꼼하고 착실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궤도에 오른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 내 기사계급과 갈리아, 히스파니아 속주 출신들에게 원로원 의석을 내려 2세기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구축할 토대를 만든다. 타키투스가 수록한 연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정복당한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정책 때문에 라케다이몬(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결국 쇠퇴한 것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그와 달리 우리 창건자 로물루스는 창칼을 맞대었던 민족을 바로 그 날 당일에 로마인으로 귀화시켰을 정도로 현명했다'면서 원로원 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갈리아인의 원로원 입성을 추진했다고 한다.

 

AD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저녁식사 후 급사하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사위, 양자, 외종손 네로(아헤노바르부스)가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주도의 궁중쿠데타로 즉위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양자이자 소 아그리피나(아내)의 친아들을 즉위시키기위한 암살로 추정된다) 네로는 즉위 초기 선정을 펼쳤고 속주들이 원만하게 통치되고 있었으며 파르티아 제국과도 50년간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등 로마 제국 자체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네로 내각은 소년황제를 주무른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의 권력남용과 친모자지간인 황제와 모후의 대립으로 궁중음모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위 초에는 소 아그리파나와 그 측근 팔라스의 음모 아래, 네로의 친고모 대 도미티아 레피다와 친척 유니우스 실라누스 부자가 반역과 근친상간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됐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춘기의 네로는 여자문제로 어머니와 대립하더니, 친모자지간 간에 권력투쟁으로 확전된다. 그리고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네로를 궁중쿠데타로 옹립한 세네카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끼어 든다. 이때 세네카와 부루스는 네로에게 자신의 취미에 매몰되고 그 직위의 정당성이 당연하다고 조언을 들었는데 이는 미숙한 청소년 네로가 일찍부터 괴상한 악행과 상상을 넘어선 사치를 벌이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그래서 그 평이 갈리기 시작한다.

 

따라서 네로를 둘러싼 궁중암투 속에서 피바람이 분다. 네로의 손에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로 네로의 처남이자 양형제지간인 브리타니쿠스(AD 55년), 친어머니 소 아그리피나(AD 56년), 네로의 아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AD 62년)가 모두 살해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친족들은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외에는 모두 네로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고종사촌형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까지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운 뒤 그를 갈리아로 추방시켰다가 암살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전 로마인에게 비난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로는 쾌활하고 빵과 서커스를 적당한 시기에 제공할 줄 알았던 황제인데다, 크게 실정을 하지 않아 보인 탓에 부도덕함과 잔인함 외에는 비난거리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D 64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게 된다. 그는 적절하게 대화재 진압과 로마 화재복구에 힘을 쏟았지만, 실언을 하는 등 행동을 하면서 이전의 부도덕한 행동과 얽혀 방화범으로 의심받게 된다. 그런데 네로는 이때 로마 대화재 원인을 그리스도교인들의 방화로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고, 황금 궁전을 짓겠다고 발표하는 등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일을 계속 진행시켰다. 이어서 그는 피소 사건 등을 일으키는가하면 근친상간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처형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등까지 피소사건 연장선에 묶어 극소수 남은 황실일가를 반역죄로 처형시키면서 제 손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핏줄을 끊어버린다. 따라서 그는 로마인들에게 “그 미덕까지 짓밞은 부도덕한 인간”으로 지탄받게 된다.

 

하지만 네로는 피소 사건 이후, 흉흉한 민심 속에서 도리어 그리스 순회공연을 떠났고, 그리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즉흥적으로 속주행정을 바꾸는 실정을 터트린다. 또 지나친 사치로 병사들의 월급까지 지급을 제때 못하고 속주세를 올리는 등 민심을 악화시키는 일을 계속 터뜨린다. 이 와중 그는 소아시아로 여행을 계획하고 출발하는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네로는 도리어 제대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망높은 명장 코르불로를 의심해 그를 자살권유로 자살케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네로에게 지쳐있던 군대마저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결국 네로는 AD 68년 코르불로 숙청 사건을 계기로 터진 근위대가 반란과 갈리아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 주도의 네로 탄핵 연설 등으로 몰락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이때 빈덱스, 오토 등이 히스파니아 타라콘네시스 속주 총독 갈바를 비롯한 각지의 총독들을 포섭해 들고 일어났고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농간을 벌여 티겔리누스를 실각시키고 네로를 배신한다. 이어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데, 로마 사회 전체에서 완전히 고립된 네로는 자신의 실정으로 벌어진 내전의 와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으로 이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단절되고 만다.

 

 

네 황제의 해의 혼란과 플라비우스 왕조의 등장

 

네 황제의 해의 혼란

 

네로가 죽은 이후 반란을 일으켰던 갈바가 AD 68년 6월 8일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애당초 갈바는 모두의 기대와 달리 젊은 시절의 총명함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경직되고, 비타협적이었으며 잇딴 실책을 벌였고 아우구스투스 가문이라는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곧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라인강에 주둔 중이던 게르마니아 군단은 AD 69년 1월 2일 자신의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일찌감치 갈바와 대립하였다. 이는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바는 원로원에게 네로에게 받은 선물 금액을 임의로 책정해 이를 모조리 뱉어내라고 명하고, 측근들과 애인들을 요직에 앉혀 부정부패까지 기승을 부렸다. 또 피소 사건의 피해자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삼는 등 계속 정치적으로 무덤을 팠다. 이런 탓에 그는 신망을 완전히 잃었고 같은 해 1월 15일 쿠데타가 발생하여 오토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하여 갈바는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AD 69년의 혼란 속에 사망한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이후 오토가 황제가 되었으나 비텔리우스 때문에 그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였다. 하지만 그는 네로 시대의 관료들을 복귀시켜 행정공백을 최소화시키고, 비텔리우스 측에 사절을 보내 내전을 최대한 막아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토와 비텔리우스 측은 결국 맞붙었고, 오토 역시 3개월 뒤 비텔리우스군에 패했다. 이때 그는 패전의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자살했다. 그렇게 오토는 AD 69년에 죽은 두번째 황제가 되었다.

 

오토를 운좋게 이긴 비텔리우스는 단독황제가 되었으나, 애당초 그는 레누스(라인강) 일대 사령관에 있던 사정 탓에 운좋게 제위에 오른 지극히 무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들의 전황을 방치했고, 7개여월동안 연이은 환락생활로 9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액을 날릴 정도로 부패했다. 또 그는 국가의 적으로 공인된 네로를 존경한다며, 그의 명예회복까지 시도한 탓에 로마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AD 69년 한 해 동안 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4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과 유대전쟁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 징수원이었던 에퀴테스 계급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사비니 리에티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문 출신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했고, 가이우스(칼리굴라) 아래에서 추천을 받아 AD 39년 30세의 나이에 40년도 법무관을 지냈다. 하지만 법무관 임기가 끝난 직후, 그를 추천한 칼리굴라가 암살됐고 클라우디우스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 암살정국에서 그는 공화정 복구를 놓고 토론 중인 원로원에게 암살된 칼리굴라의 정식장례와 암살범 처벌을 주장했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장악 후 공화정 복귀를 무산시켰고, 이 사건 이후 황실 내 해방노예 나르키수스, 카이니스의 추천을 받아 친황제파로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래서 그는 법무관 임기 종료 후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 사령관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시절인 AD 43년 브리타니아에서 20개가 넘는 도시를 점령하는 뛰어난 전공을 세우면서 개선식을 치르고 그 공으로 BC 51년에는 집정관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급사했고 소 아그리피나, 세네카, 부루스는 그 틈을 노려 유언장을 무시하고 네로를 단독즉위로 옹립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한동안 아무런 직책을 얻지 못했지만 AD 63년 경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AD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토벌해야 하는 시리아의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갑자기 병사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반란의 임무를 맡아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상태였다.

 

 

유대 전쟁의 발발

 

팔레스타인에 위치한 유대인의 나라인 유다 왕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도중에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처음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나 BC 168년부터 BC 164년까지 이어진 마카베오 가문의 저항운동이 성공하면서 독립에 성공했다. 마카베오 가문은 마타티아스와 그의 셋째 아들인 유다가 차례로 죽자 마타티아스의 막내 아들인 시몬이 유대인 저항운동을 이어받았고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내부 권력다툼의 혼란을 이용하여 유대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대제사장이자 왕이 되어 하스모니안 왕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쇠는 얼마가지 못했고 BC 63년 경 동방원정 중인 로마의 그라니우스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이후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시작되자 카이사르를 지원한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왕위에 복권되어 비록 로마의 속국 지위로 유다 왕국을 재건하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이후 로마의 유력가가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BC 42년 이두매(에돔) 출신의 헤로데 1세를 유다 왕국의 속왕으로 임명하면서 헤로데 왕조가 시작되게 되었다. 다시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벌어졌으나 헤로데 1세는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에도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그 지위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다만 헤로데 1세가 죽고 나자 유다 왕국을 삼분하여 차지한 세 아들인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빌립보 1세는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AD 6년 가장 많은 영토를 물려받은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가 폐위되자 유다 왕국이 로마 속주로 잠시 편입되었고 AD 41년 헤로데 1세의 손자인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 뒤 나머지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데 빌립보 1세의 영토를 모두 넘겨받으며 유다 왕국을 잠시 재건하였지만 AD 44년 헤로데 아그리파 1세가 사망하자 왕위가 그 아들에게 이어지지 못하고 유다 왕국은 로마의 시리아 속주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되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이 로마 속주로 편입된 뒤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로마 속주 총독에 의해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고 이교도인 로마인이 유다 왕국의 대제사장을 지명하는 것에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네로 황제 시절인 AD 66년 카이사레아 지역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분쟁이 발생하였으나 로마 주둔군이 제대로 중재해내지 못했고 오히려 유대의 로마 속주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유대 신전의 금고를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결국 분노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의 로마 주둔군과 플로루스가 임명한 대제사장까지 모두 학살당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시리아의 속주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안티오키아에 주둔 중이던 로마 제12군단과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로 작은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던 아그리파 2세의 군대를 이끌고 갔으나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하였다. 더욱이 갈루스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되돌아 온 후 갑자기 병사하면서 예루살렘 반란의 진압이 어려워지자 네로 황제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3개 군단을 이끌고 유대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거병

 

베스파시아누스는 동명의 아들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유대반란 진압에 나섰다. 장남 티투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자랐는데, 네로에게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될때 함께 정신을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그렇지만 티투스는 네로에게 찍히지 않아, 성인이 된 이후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복무하면서 많은 군무 경험을 쌓았다.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AD 67년 봄에 불과 몇 주 만에 갈릴리를 장악하고 AD 68년이 되자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 왕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AD 68년 6월 네로가 죽자 전투를 중단하고 로마의 정황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황제 갈바를 인정하고 티투스를 축하사절로 보냈지만 티투스는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인 AD 69년 1월 갈바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로마에서 오토와 비텔리우스 사이의 내전이 벌어지자 베스타시아누스 자신도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조용히 지지세력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AD 69년 4월 오토가 패배하여 죽고 비텔리우스가 즉위하였으나 거듭된 실정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AD 69년 7월 베스타시아누스가 마침내 거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거병에 대해 함께 유대 전쟁을 치르던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의 로마 군단은 물론 시리아와 이집트에 주둔 중이던 로마 군단도 지지를 선언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군사적 전공을 위해 유대 전쟁을 재개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후 아들인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의 지휘권을 일임하고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은 로마의 주요 곡물 수입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여 로마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자신을 따르기로 한 시리아의 속주 총독인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발칸반도의 디라키움(지금의 알바니아 두러스)에 파견하여 그곳의 함대를 손에 넣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AD 69년 8월에 도나우 강에 주둔 중인 5개 군단까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지지를 선언하고 도나우 강 군단장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비텔리우스의 라인강 군단을 물리치고 12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비텔리우스는 퇴위를 간청했으나 결국 살해당하며 AD 69년에 죽은 마지막 황제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베스파시아스가 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AD 69년 한 해동안 황제가 4명이나 교체되는 진통 끝에 겨우 혼란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 왕조

 

69년 네로 몰락을 시작으로 벌어진 네황제의 해를 정리한 것은, 당시 유대전쟁을 이끌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부자였다. 창건자 베스파시아누스, 장남 티투스와 차남 도미티아누스까지 고작 플라비우스 왕조의 치세는 30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 원수정은 69년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플라비우스 왕조 치세 아래에서 애매모호한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의 지위를 직위계승법을 통해 명확히 하고, 시민권과 속주민들의 참정권 보장 등 제국 정치와 행정체계를 상당한 수준의 세계국가로 바꿨다. 이런 이유로 이 세습왕조는 위기의 원수정 체제를 재창조하고 팍스 로마나를 사실상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AD 69년 12월 21일 로마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으나 신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그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문 채 디라키움의 무키아누스를 로마로 파견하였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대 반란을 빠르게 진압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을 신속히 함락하도록 하였고 티투스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하여 5달의 포위전 끝에 AD 70년 9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유대 반란은 최후의 항전을 벌인 마사다 요새가 함락되는 AD 73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지만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함락된 예루살렘은 신전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 전쟁 동안 사망한 유대인이 무려 1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유대 전쟁이 마무리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비로소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AD 70년 10월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 황제로서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AD 69년 12월 21일 원로원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황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같은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권에 관한 법률'을 원로원에게 제정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식적인 호칭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로 사용하였고 그 아들인 티투스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아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 플라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 황제답게 로마 원로원의 의석을 로마의 귀족 뿐만 아니라 갈리아, 북아프리카,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에게도 개방하였고 각종 세금을 신설하여 네로가 탕진한 국고를 보충하도록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명한 콜로세움 경기장을 로마에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티투스의 짧은 치세와 도미티아누스 시대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하자 예정대로 그의 아들인 티투스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 티투스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유대 전쟁을 마무리했을 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했고, 아버지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근위대의 지휘를 맡아 아버지의 권력강화에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그는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이미지가 냉혹하고 비열하다고 알려졌다. 그러다가 AD 79년 황제로 즉위했다. 티투스는 태생부터 유쾌하고,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인데다 워낙 유능하고 공정했다. 따라서 황제가 된 뒤, 이런 그의 본 모습을 알게 된 원로원과 민중들은 티투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티투스의 치세는 문자 그대로 그와 로마 모두에게 끔찍했다. AD 79년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부유한 캄파니아 일대가 큰 피해를 입어, 폼페이 시가 땅 속으로 매몰되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으며 AD 81년에는 로마에 페스트까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모두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다, 황제가 선정을 베푸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하게 터진 일이라 고생이 컸다. 더구나 티투스는 평소의 불규칙한 생활로, 밤낮 바뀐 사생활로 유명했기에 2년 내내 터진 자연재해와 전염병 퇴치로 인한 과로는 건강한 티투스의 명을 단축시켰다. 따라서 그는 AD 81년 불과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티투스 사후, 그 뒤는 동생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가 물려받았다.

 

티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제9대 황제로 즉위한 도미티아누스는 허영심이 많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시절 형인 티투스와 똑같은 호민관 특권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나 형이 재위 2년만에 사망하는 행운 속에 로마 황제가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통치 면에 있어서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보여줬는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대신 로마 원로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마 속주 총독을 원로원 의원이 아닌 에퀴테스에게 맡도록 변경하였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까지 군대를 진군시켰고 AD 85년 도나우강 건너편의 다키아족이 국경을 침입하자 이를 직접 격퇴하였다. 그러나 AD 88년 다키아족이 2번째로 침공해오자 로마 1개군단이 괴멸되고 군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은 끝에 AD 89년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다키아족 왕 데케발루스와 겨우 강화를 맺으면서 그 위상이 많이 실추되고 말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상당히 엄격했고, 법집행의 공평함을 공공영역에서의 최대 가치로 여겼다. 따라서 로마 공화정기부터 쉽게 해소되지 않던 불법, 편법들과 부정부패가 과거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시대가 연상되듯 상당수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평민과 군인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스스로를 절대시하고, 대놓고 원로원을 무시해 이는 황제와 원로원 간의 대립각을 심화시켰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도미누스(주인님) 등으로 부르게 하고 예법을 만들어 형식상 공화국인 로마 제국의 주권자인 원로원을 계속 자극한다고 비난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험악해지는 가운데, 도미티아누스는 고발자 제도를 활용해 공포정치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AD 89년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이었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은 하(下)게르마니아 속주의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처형하였고 원로원 의원들도 종종 반역죄로 고발해 사람들을 고문하고 잔혹한 심문기법까지 만들어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설상가상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인 가정사도 복잡하여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겐 청렴을 강요하고 엄격함만 요구했다. 결국 AD 96년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에서 암살됐다. 야사에 따르면, 황후 도미티아에게 포섭된 노예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고 전해지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공포정치에 신음하던 로마 원로원은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을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이어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서둘러, 오래된 귀족 출신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을 확고히하고 팍스로미나의 문을 연 플라비우스 왕조는 3대 만에 단절되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5현제의 번영, 팍스로마나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이후 백여년 동안 로마를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로마 제정 최전성기로 불린, 오현제 또는 팍스로마나 기간동안 존속했다. 총 일곱황제로 구성된 이 왕조는 양자입양을 통한 방법으로 다섯 황제가 연이어 통치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오현제 시대가 로마 최전성기를 이룬 예로 흔히 거론된다. 그러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실질적 창건자 트라야누스와 그 누이의 혈연들이 양자입양과 상호 근친혼을 통해 제위를 이었던 부분에서, 이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과거부터 늘 찬양을 받았지만, 현대 이후 연구들에서 드러나듯 여러 문제들이 생긴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 왕조의 치세기를 종종 도금에 가까운 번영기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이는 콤모두스만의 잘못이 아닌 부분으로 지적받고 있다.

 

 

네르바 시대

 

네르바는 공화정 이래 유명한 원로원 명문귀족 집안 출신으로, 그 집안은 아우구스투스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번영을 누렸다. 그의 조부는 티베리우스의 친구이자 최측근이었고, 아버지는 가이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을 받았다. 또 여동생은 오토의 형수이기도 했다. 그는 네로 몰락 이후 네 황제의 해 당시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해 플라비우스 왕조 창건에 큰 공을 세웠고 티투스, 도미티아누스를 도왔던 고령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이후,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가 됐다. 하지만 즉위 당시 66세의 고령인데다 병중이었기 때문에 통치기간이 2년에 불과하여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원로원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도미티아누스의 공포정치의 잔재를 일소하면서 로마 제국을 쇄신했고, 옛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스타일의 원수정 통치 방법을 부활시켜 이를 확립했다.

 

즉위 후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투옥되었던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은 사면하여 귀국을 요청하였으며 몰수된 재산도 반환하였다. 그러나 네르바는 군부의 지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군부의 지지를 받을 만한 인물을 물색하여 게르만 속주의 한 지방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네르바의 통치기간이 2년으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네르바의 가장 큰 업적을 자신의 후계자로 트라야누스를 지명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트라야누스 시대

 

트라야누스는 히스파니아의 로마 속주 바이티카에서 태어났다.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 전쟁을 벌이던 시절 그의 군단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인연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고 이후 시리아와 아시아 속주의 총독까지 지냈다.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던 당시에 상(上)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을 맡고 있었고 군부 내에서 명망이 높았다. 이 덕분에 트라야누스는 AD 96년 네르바의 양자가 되어 차기 황제로 지명받았고 AD 98년 1월 1일부터는 네르바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AD 98년 1월 27일 네르바가 사망하면서 로마 속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후 트라야누스는 전임 네르바와 마찬가지로 원로원과의 협조관계를 유지하면서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및 농촌 회복정책을 추진하면서 내정을 정비하였다.

 

트라야누스의 제일 가는 업적은 로마 제정 성립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팽창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한으로 넓혔다는 것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첫번째 정복사업은 다키아 전쟁이었다. 다키아는 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티소 강과 헝가리, 도나우 강,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다키아는 일찍부터 다키아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다키아 군에게 패배하여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트라야누스는 AD 101년 3월에 로마 군단을 이끌고 제1차 다키아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해까지 전투를 벌여 다키아 군을 격파하고 다키아의 왕인 데케발루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AD 105년 데케발루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AD 106년 제2차 다키아 원정을 떠나 다키아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데케발루스는 도망쳤으나 결국 자살하고 말았고 다키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점령하던 AD 107년 나바타이 왕국(지금이 요르단 서부)의 국왕이 죽자 로마 제국으로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삼았다. 그리고 AD 114년에는 오랫동안 동방에서 로마 제국에 맞서고 있던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여 17개 군단, 약 8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 사이를 오가며 양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공하였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가 세운 아르메니아 왕을 내쫓고 AD 114년 말까지 아르메니아 전역을 장악하여 아르메니아 속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파르티아 제국의 북부로 진입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들을 함락하였고 AD 116년에는 세 방면으로 부대를 나눠 진군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일시적으로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이은 파르티아의 반격과 이집트 및 유대인의 반란 때문에 퇴각해야만 했고 로마 귀환 도중에 트라야누스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진중에서 병사하였고 자신의 후계자로, 오촌조카이며 사실상 양자였던 시리아 속주 총독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를 지명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하드리아누스는 비록 이탈리아 혈통이고 현직 원로원 의원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문은 포에니 전쟁 후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 속주에 정착한 속주 가문출신이다. 트라야누스의 오촌 조카이기도 했던 하드리아누스는 공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경험하였고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시절에는 시리아 속주의 총독으로서 후방 병참을 담당하고 있었다. AD 117년 8월 9일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였고 이틀 뒤 트라야누스는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우선 트라야누스에 의해 정복된 2개의 지역에 대한 정비에 나서 여전히 파르티아 제국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로마로 귀국하는 길에 다키아 속주에 들러 통치체제를 재편성한 후 이듬해 7월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재임시절 속주인 유대교 반란, 브리타니아 반란, 북아프리카 반란 등을 겪었지만 이를 모두 진압하고 속주 통치를 안정화시켰다. 또한 더이상의 팽창정책을 포기하고 대신에 국경선 안정화에 매진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들을 순행하며 정비에 나섰다. 브리타니아에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구축하여 지금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선을 만들었고 게르마니아의 방벽도 강화하여 라인강과 도나우강 국경을 정비했다. 파르티아 제국과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아르마니아를 보호국으로 만들어 완충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제국의 통치기반을 정비한 하드리아누스는 AD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양자로 삼아 뒤를 맡기고 사망하였다.

 

따라서 말년까지 두번에 걸쳐 속주 순행에 나서며 속주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속주 통치제도 정비에도 힘썼고, 내정개혁에 치중한 점은 고대부터 높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현재는 일부 결정들이 로마 제국 내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들이 동방속주들에 비해 경제, 사회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게 한 문제, 원로원의 무력화, 군사방어체제의 한계 노출 같은 걸로 비판 받기도 한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 안좋은 점이 부각되며 조금씩 비판 받는다고는 하지만, 현재도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좋은편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안토니누스는 친가가 갈리아 혈통이나 외가는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사람이다.

 

부계 가문은 본래 갈리아에서 유래한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집정관을 지낸 신흥 가문이다. 반면 외가는 그 시작이 공화정 말로 거슬러 가야 될 정도로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로 외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낸 유력 이탈리아 세습 귀족이었고 당대 사람 모두에게 성실하고 청렴한 도덕인으로 불린 대정치가 중 한명이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안토니누스는 아주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사별 직후 재혼해, 친가를 떠나 유아기부터 외조부 밑에서 친아들로 자랐다. 따라서 성인이 된 직후, 대를 이어야 할 외가를 정식으로 이어받았고, 성향과 본인 스스로도 친가보다는 외가 사람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유년기에 이탈리아 노빌레스 가 중 부와 권력을 모두 쥔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은 후계자가 됐다. 외조부는 외손자의 아버지이자 멘토였는데, 훌륭한 인격자였고 매우 부유한 사람이고 타고난 귀족임에도 솔직함, 검소함, 언행일치된 삶을 중요시하고 이를 죽을 때까지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조부의 유언과 친가의 재산까지 이어받아 약관의 나이에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이 됐을 때, 안토니누스는 매우 검소하고 고결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이런 성장 배경은 안토니누스는 부계 뿌리만 갈리아 혈통인 전형적인 2세기 이탈리아 세습 귀족 중 한명이 되고, 일찍부터 여러 명망가에서 그를 사위 후보로 점찍은 이유가 됐다.

 

장모는 트라야누스 누나의 외손녀로 하드리아누스 아내 비비아 사비나의 여동생이고, 아내는 비비아 사비나 황후의 조카 대 파우스티나였다. 이런 인척 배경에 더해 장인은 당시 하드리아누스와 동서지간이며 복심인 대정치가 안니우스 베루스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입양되기 전부터, 친척이 거의 없는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에겐 사실상 가까운 남자인척 중 한명이었다.

 

안토니누스는 청년 시절부터 관대하고 온건하며 인자한 성품과 매우 도덕적이고 성실한 인품으로 가족, 동료, 상관과 부관, 집안 클리엔테스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까칠하고 엄격한 하드리아누스 역시 안토니누스를 좋아해,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아시아 속주 총독, 집정관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잠시 은퇴를 고려했다가 황제의 이탈리아 행정장관 임명으로 계속 공직생활을 했는데,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서 후계자인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가 요절하자, 하드리아누스와 긴급 면담을 거쳐 황제의 양자가 되고 그 후계자로 선포됐다. AD 138년 7월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고 안토니누스가 황제로 즉위했고 원로원은 경건한 자라는 뜻의 '피우스(Pius)'라는 존칭을 부여하였다.

 

안토니누스는 평생 속주 순행으로 보낸 전임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거의 대부분 로마를 떠나지 않고 통치했다. 그가 평온하게 통치한 이유는 재위기간 내내 침공이 없고, 그가 개인적 야망과 군공에 대한 열망으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도 있으나, 이런 이유보다 이 황제의 통치가 이렇게 흘러간 이유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때 벌어진 방만한 흑자경영에 따른 국고 정상화와 이탈리아, 서방경제 침체 완화 노력을 이유로 한 내정 안정화 조치에 황제가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누스의 성실하고 건실한 내치로, 로마 제국은 번영을 이어갔다. 안토니누스는 속주의 부담을 줄이며 재정을 건전하게 하였고 사회정책도 추진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금지시켰으며 대지진으로 파괴된 그리스와 소아시아, 로도스의 도시들을 재건시켰다. 또한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방벽을 구축하여 국경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현실안주적인 통치방법은 종종 3세기의 위기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판받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로 벌어진 문무행정 이분화, 군경력자가 아닌 인사들의 행정 기용, 치안판사 제도 개혁에 따른 지나친 효율성 강화 조치 등을 손보는 등의 노력을 했다. 하여 그가 방만하게 현실 안주만 했다면 팍스 로마나는 그 후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즉위 직후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안토니누스는 본래 하드리아누스에게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 처조카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훗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인 아일리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일찌감치 양자로 입양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를 하드리아누스의 양손자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시키기로 하고, 처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이 케이오니아와 약혼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즉위 후 그는 후계구도는 바꾸지 않고 배필만 바꿔, 연령대가 비슷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고 처조카, 양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죽기 전 자연스레 권력을 이양하고 잠자듯 서거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염두에 두었던 또다른 후계자 후보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안토니누스의 양자로 들어갔고, AD 161년 3월 안토니누스가 죽기 전 단독황제로 제위를 잇게 됐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도 함께 제위를 이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그는 동생 베루스와 함께 로마 제정 최초의 공동황제가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 시절에는 평화로웠던 이전 황제들의 시대와 달리 변방에 외적 침입이 잦아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AD 161년 파르티아 제국이 침공하여 로마의 1개 군단을 궤멸시키고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점령하였다. AD 163년 마르쿠스의 동생, 공동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동방의 남은 군단을 이끌고 출정하여 파르티아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탈환하였고 AD 165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 국경선 안쪽까지 진격하여 파르티아 제국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개선식 후 파르티아 일대에서 유행한 역병이 번졌고, 이는 안토니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며 3세기까지 로마를 괴롭혔다.

 

동방에서 벌어진 혼란을 수습한 이후에도 수해 등으로 로마는 재해에 시달렸고, 전염병까지 돌던 상황에서 다뉴브 강 유역의 게르만족들이 본국이탈리아까지 쳐들어온 뒤 북부 최대 항구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이 사건은 마리우스 시대 이후 벌어진 로마 건국 후 최대 위기였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원로원을 소집해 자신과 동생을 아퀼레이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로마 내 노예들에게 자유를 준 뒤 이들을 검투사들과 로마군으로 합류시켜 아퀼레이아로 진군했다. 다행히 두 황제는 게르만족들을 격퇴시켰지만, 아쿠릴레이아에는 다시 역병이 창궐했고, 설상가상 회군 중 공동황제 루키우스베루스가 AD 169년 과로로 쓰러져 젊은 나이에 급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169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단독황제가 됐는데, 동생 사후 온전히 모든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던 중, 다시 게르만족들이 국경을 넘어 로마 국경 일대 속주들을 유린했다. 그래서 황제는 AD 170년 다키아 속주로부터 대규모 군단을 북상시켜 게르만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총사령관이 전사하고 로마군 2만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게르만족에 의해 국경 방어선이 위협받자 4개 군단을 더 창설시켰고 AD 172년부터 제1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벌였으나 도나우강 건너에서 근위대가 대패하고 근위대장이 전사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AD 173년부터는 각개격파로 작전을 바꿨고 결국 AD 174년 강화를 맺었다. AD 178년부터 다시 제2차 게르마니아 전쟁을 시작하여 게르만의 여러 부족을 몰아붙이기도 하였으나 도나우 강 진중에서 병을 얻어 AD 180년 사망하였다.

 

 

콤모두스와 팍스 로마나의 종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콤모두스가 단독황제가 되었다. 그는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중도에 그만두고 로마로 귀환했다. 하지만 AD 182년 그의 큰누이 루킬라가 지극히 질투와 권력욕 탓에 원로원 의원들과 공모하여 벌인 암살미수사건이 발각되면서 스물을 갓 넘긴 황제는 이 일로 충격을 받고 의심, 과대망상, 불안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루킬라의 콜로세움 암살미수사건 이후, 상당수 원로원 의원을 처형됐고 콤모두스는 근위대장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현실도피를 하며 유흥에 빠져 지낸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매관매직, 부정부패가 일상화되고 나라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브리타니아에서는 이런 행태에 못 견딘 병사들이 대표단을 꾸려 이에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또 콤모두스는 두 번의 암살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후 검투사 경기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이는 중독증세로 발전하더니, 이 증세는 또 다른 두 차례의 암살 미수 사건과 클레안데르 몰락 사건이 벌어지면서 극도의 정신분열 증세로 심화되기에 이른다.

 

AD 190년 로마의 반을 태워버린 대화재가 일어나자, 콤모두스는 재건된 로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오랜 암살 위험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불사신 헤라클레스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로마의 헤라클레스'를 자처했다. 그래서 콤모두스는 직접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처럼 싸우기도 하였다. 콤모두스의 기행은 급기야 AD 193년 1월 1일 검투사 복장으로 집정관직에 취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극에 달했고, 이 시기에 이르러 황제를 보필하던 매형 폼페이아누스는 반포기 상태로 일시적으로 은퇴하게 된다. 결국 집정관에 취임하기 직전인 AD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었고 로마 원로원은 즉각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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