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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팍스 로마나

Jobs 9 2025. 4. 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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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이야기 6권

 

팍스 로마나 - 아우구스투스 통치 초기

 

 

로마인 이야기 제6권 『팍스 로마나』는 천재(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천재가 아닌 인물(아우구스투스)이 천재가 이르지 못한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고 싶은 현실만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자신만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직시하도록 명심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가 평생 치른 ‘전쟁’이었다.

 

 

제1장 통치 초기

기원전 29년~기원전 19년(34세~44세)

 

젊은 최고권력자

 

개선식도 끝난 9월,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이기도 한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포로 로마노 중심부에 짓겠다고 공표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전에 기획한 원로원 의사당(쿠리아)을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포로 로마노의 연장 부분으로 세워진 ‘카이사르의 포룸’에 잇대어 짓겠다고 공표했다

 

또한 전쟁과 복수의 신 마르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한창 건설되고 있었다. 이 신전 건립의 목적은 기원전 42년에 브루투스와 대결한 필리피 회전을 앞두고 마르스 신에게 서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원전 29년 당시의 옥타비아누스는 단순한 개선장군이 아니었다. 기원전 82년의 술라, 기원전 46년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파 잔당들의 편지를 비롯한 증거서류를 손에 넣었듯이,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파 가담자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손에 넣었다.

 

카이사르는 증거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태워버렸다. 그러고는 폼페이우스파였다는 게 분명한 비밀 동조자들도 모두 용서했다. 카이사르의 ‘관용’(클레멘티아)은 공직 복귀까지도 허용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이 같은 조치를 그의 후계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옥타비아누스도 답습했다.

 

안토니우스를 끝까지 추종한 자들까지도 다시 원로원 의석에 앉게 되었다. 증거서류도 카이사르처럼 불태웠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그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4세의 절대 권력자는 안토니우스파였던 자들의 은밀한 두려움을 그대로 방치하는 쪽을 선택했다.

 

군비 삭감

 

로마 전체가 ‘화합’(콩코르디아)의 회복을 기뻐하는 가운데, 젊은 최고 권력자는 그 기쁨을 갑절로 늘리는 정책을 발표했다. ‘군비(軍備) 삭감’이 그것이다. 이 조치는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아그리파의 동의와 협력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군 병사인 만큼 빈손으로 제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남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보물’을 팔아서 그 돈을 모두 투입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개인 재산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거나 속주에 건설될 식민도시에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위해 정착지를 선정해주고 땅을 사주는 것은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

 

기원전 29년 당시, 유일한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50만 명이 넘는 막강한 군사력이 남아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28개 군단 16만 8천 명까지 군사력을 줄였다. 로마 국가는 이제 영토 확장의 시대에서 영토 유지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국세조사

 

이듬해인 기원전 28년, 그해의 담당 집정관(콘술)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국세조사를 실시했다. 지난번 국세조사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던 기원전 70년에 이루어졌으니까, 42년 만의 ‘켄수스’(census)다.

 

종래의 국세조사에서는 본국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대상자를 한정하여 재산과 17세 이상 성년 남자의 수만 조사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살아 있는 동안만 해도 세 차례─기원전 28년, 기원전 8년, 서기 14년─에 걸쳐 실시된 국세조사에서는 여자와 어린애, 노예까지도 조사 대상이 된 모양이다.

 

17세 이상 성년 남자로서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에 관해,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기원전 28년 - 406만 3천 명

• 기원전 8년 - 423만 3천 명

• 서기 14년 - 493만 7천 명

 

42년 전의 조사에서는 유권자 수가 90만 명에 불과했다. 그 수가 이처럼 크게 늘어난 이유는 우선 카이사르가 주민 전체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북이탈리아 속주가 이번 조사부터 본국 이탈리아에 추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속주까지도 조사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묘 건설

 

훗날 ‘황제묘’(皇帝廟, 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라고 불리게 된 그 영묘는 포로 로마노에서 북쪽으로 곧장 뻗어 있는 플라미니아 가도와 그 언저리에서 물줄기가 크게 휘돌아 남쪽으로 흐르는 테베레강 사이에 세워졌다. ‘마르스 광장’(캄푸스 마르티우스)이라고 불리는 지대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3단으로 우뚝 솟은 지름 90미터의 원형 영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벽에는 온통 하얀 대리석을 발랐고, 단마다 심어진 노송나무들이 1년 내내 무덤을 푸른 빛으로 장식한다. 원형 영묘의 바깥쪽도 대리석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맨 윗단의 노송나무보다 더 높이 이 영묘 주인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팔라티노 언덕 위의 저택이 그토록 소박한데, 무덤만은 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을까. 하지만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35세의 건축주는 이런 행위에 가장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쉬운 원로원을 회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로원 정보공개와 ‘재편성’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는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토론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벽면에 게시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정보 공개법’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법을 고치는 조치를 취한다. 원로원 의사록이 포로 로마노에 그 이튿날 나붙는 일은 없어졌다. 원로원 의원들이 기뻐한 것도 당연했다.

 

대신 ‘악타 세나투스’는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 보관소’(타불라리움)에 보관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악타 디우르나’는 수도 로마에서 결정된 모든 공적 사항을 기록하여 본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식민도시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알리는 ‘관보’로 변경하였다. 

 

또한 당시 원로원의 의원수는 1천 명이 넘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600명까지 줄일 생각이었다. 먼저 일부 의원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설득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의원 140명에 대해서는 원로원 의석을 강제로 박탈하였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자신과 아그리파가 우선 30명을 고르고 이 30명이 다른 30명을 고르고 그 30명이 또 30명을 고르는 방식으로 원로원 의원수를 600명까지 줄였다.

 

공화정 복귀 선언

 

기원전 27년 1월 13일, 원로원을 가득 메운 의원들 앞에서 35세의 절대 권력자는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신격(神格)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이라고 불리는 『업적록』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일곱 번째 집정관이 된 해(기원전 27년)에, 그때까지 시민 모두의 동의에 의해 절대권력을 부여받아 내전을 종식시켰으므로, 나는 그동안 행사했던 권력들을 포기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주었다.”

 

의사당은 순간 얼어붙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의사당은 환호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평소에는 그저 엄숙하고 무게있게 행동하는 것밖에는 염두에 없는 원로원 의원들도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35세의 최고 권력자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원로원의 일개 의원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집정관직을 사임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가 포기하지 않은 두 번째 권리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세 번째 권리는 ‘프린켑스’(제일인자)라는 칭호였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돌아온 34세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를 주었다. 이 칭호는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도 부여된 선례가 있었다.

 

‘임페라토르’는 공화주의자들에게 도발적으로 들렸지만, ‘프린켑스’는 그렇게 들릴 염려가 전혀 없어 옥타비아누스는 이 방패막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의 『업적록』에서 자신을 언급할 때 세 번이나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 때문인지, 현대 연구자들 중에도 앞으로 전개될 시대를 ‘제정’이라고 부르지 않고 ‘원수정’(元首政)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문제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35세의 권력자가 그 대신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공화정 복귀가 선언된 날부터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1월 16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자고 제안한 것은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도 동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폴리오’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업적록』에서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공적에 대해, 원로원은 앞으로 나를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르기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명예도 주기로 결정했다.

우리 집 현관 양쪽에 서 있는 기둥은 월계수로 장식하고, 현관문 위에는 ‘시민관’(市民冠)을 놓는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보여준 결단과 관용, 공정함과 자애에 감사하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그 사실을 새긴 황금 방패를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한다. 그 후 나는 권위(아우크토리타스)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포테스타스)에서는 내 동료 집정관들을 능가하지 못했다.”

 

승리자를 의미하는 ‘월계관’은 월계수로 짜지만, 로마에서 ‘시민관’이라고 불린 것은 같은 상록수인 떡갈나무 잎으로 짠다. 이것은 로마 군단에서 아군 전우를 구조한 공로에 대해 수여되는 ‘훈장’이었다. 흥미롭게도 로마 군단에서는 적지에 가장 먼저 들어가 받는 훈장보다 이 ‘훈장’이 더 높은 포상으로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바란 것도 월계관보다는 내전을 수습하여 로마 국가를 자멸에서 구한 공로를 나타내는 ‘시민관’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신성하고 경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말에 불과했고, 무력이나 권력을 연상시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신성하다는 뜻이긴 하지만, 다신교 세계인 로마에서는 유일무이한 절대적 권위는 아니다.

 

하지만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은 실제로는 그들이 생각한 것만큼 권력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됨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얻은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그것은 단순한 위신이 아니라 14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최고 권력자의 위신이다.

 

기원전 27년은 당시의 많은 로마인이 공화정 복귀를 경축한 해였다. 하지만 후세인들에게 기원전 27년은 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가 된다. 그해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정식 명칭은 다음과 같이 변하게 된다.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Julius Caesar Augustus)

 

'내각' 창설

 

600명으로 정원을 줄여 원로원 재편성을 결행한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36세가 되자마자 ‘콘실리움 프린케피움’(제일인자 보좌위원회)을 창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요즘말로 하면 내각이다. ‘council’의 어원이기도 한 이 ‘콘실리움’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원로원 권고’와 똑같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그 구성은 프린켑스(제일인자)인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집정관 두 명, 오늘날의 각부 장관에 해당하는 법무관(프라이토르),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 재무관(켄소르), 안찰관(아이딜리스), 여기에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15명이 추가된다.

 

원로원에서 선발된 인원이 15명이라서 숫자만 보면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아우구스투스의 생각과 다른 정책을 제출하려 해도, 집정관인 아우구스투스가 거부권을 발동하면 눌러버릴 수 있다. 따라서 ‘콘실리움’의 결의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였다.

 

속주통치의 기본방침

 

기원전 27년에 이루어진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 복귀 선언에는 당연히 속주 총독 임명권을 원로원에 반환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젊은 권력자의 공화정 복귀 선언에 감격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속주의 군사도 추가로 맡아달라고 의뢰하기까지 했다.

 

당시 로마 국가의 영토는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첫째, 알프스에서 메시나해협에 이르는 본국 이탈리아.

둘째, 원로원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는 속주(프로빈키아). 역사에서는 ‘원로원 속주(Senatorial provinces)’라고 부른다.

셋째,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 역사에서는 ‘황제 속주(Imperial provinces)’라고 부른다.

넷째, 특수한 정세 때문에 정복자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영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집트.

여기에 동맹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 즉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외교와 군사에서 로마를 추종하는 나라들이 추가되어,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권이 구성된다.

 

 

속주로 편입된 지 오래여서 로마화(로마인 자신은 문명화라고 불렀다)의 역사도 길거나, 로마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전선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은 지역을 ‘원로원 속주’로 분류하였다. 여기는 원로원이 임명한 전직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1년 임기의 총독을 맡아서 ‘무보수’ 명예직으로 통치한다. 그들은 말썽거리가 적은 속주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환영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담당하는 ‘황제 속주’는 이베리아반도 대부분,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 일리리쿰, 달마티아 지방, 소아시아 남동부의 킬리키아 속주와 시리아 속주 등인데, 이 ‘황제 속주’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하는 장군들이 통치한다.

 

이로써 원로원은 군통수권까지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겨준 셈이다. 책무를 싫어하면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군통수권을 장악하고 싶어서 속주를 이런 식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안전보장'

 

공화정 시대야말로 팽창의 시대였고, 제정은 반대로 방위의 시대였다. 더 이상 통치 지역을 확대하는 것은 로마에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점에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일치하였고, 안전보장의 필요성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하게 된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최소한의 방위력인 4개 군단 규모를 넘는 상비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에 쫓길 때마다 징집한 병사들로 군단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적의 선제공격에 뒤늦게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상비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오로지 방위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설 군사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이 군제개혁이 군비축소와 병행하여 이루어진 점도 흥미롭다. 상비군이 되면,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 정도가 기원전 27년 가을까지 35세의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정책들이다. 그에게는 카이사르가 남긴 청사진을 현실화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청사진에 따라 당장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독재라는 의혹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먼저 토대를 쌓는 일에만 충실하자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주춧돌 위에 돌을 쌓기 전에 잠시 시간을 두기로 했다. 사람들의 눈에 명쾌해 보이고 평판도 높이는 일, 즉 『업적록』에 명기할 수 있는 사업을 먼저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명분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완전 제패’였다.

 

서방 재편성

 

기원전 27년 가을, 36세를 맞이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떠났다. 아우렐리아 가도를 지나 남프랑스로 들어간 그와 동행한 사람은 ‘오른팔’ 아그리파였다. 그밖에 두 소년의 얼굴도 보였다. 16세의 마르켈루스와 15세의 티베리우스다.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전쟁터를 처음으로 체험시킬 작정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이 결혼에서도 그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현재의 에스파냐 북부에 사는 산악민족을 제압하는 일은 군사행동이기 때문에 아그리파에게 맡겼다. 아그리파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의 공격에 전념하는 동안, 총사령관은 계속 타라고나에 머물러 있었다. 두 차례의 전투로 에스파냐 북부의 산악민족을 제압하는 데에는 2년도 걸리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로 개선한 것은 기원전 23년이었다. 이 3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무엇을 했을까.

 

갈리아 재편

 

우선 기원전 27년 겨울에 그는 갈리아 문제를 처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로마가 내전에 시달리던 14년 동안은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이 로마의 패권을 뒤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계속 로마의 속주로 남아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갈리아 전체가 1년에 통틀어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로마에 바치도록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로마가 안정을 되찾은 기원전 30년부터는 갈리아에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해방노예가 그 원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었던 그 해방노예는 융통성없이 갈리아에도 다른 속주들과 똑같이 ‘10분의 1세’를 부과하려고 했다. 갈리아 부족장들이 여기에 반발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원전 28년에 실시된 국세조사 결과를 보았다면, 갈리아 부족장들도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속주세는 너무 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결국 갈리아도 다른 속주들과 같이 ‘10분의 1세’를 내기로 속주세 제도가 개정되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 대신에 갈리아에서 2.5퍼센트였던 관세율을 1.5퍼센트로 인하했다.

 

세제 개정에 이어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전역을 재편성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북쪽은 도버해협과 북해, 서쪽은 대서양, 남쪽은 피레네산맥과 지중해, 동쪽은 라인강과 알프스산맥으로 둘러싸인 갈리아 전역은 크게 다섯 지방으로 나뉘었다.

 

1.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리는 남프랑스 속주 - 로마의 속주로서 역사가 이미 200년이나 된 이 지방은 로마화가 많이 진행되어, 갈리아에서도 이곳 남프랑스만은 ‘원로원 속주’가 되어 있었다. 속주세는 수입의 10퍼센트, 관세율도 본국과 같은 5퍼센트였다.

 

2. 아퀴타니아 속주 - 이 지역에서는 작은 봉기가 일어나 아그리파가 진압하였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 가론강 이북의 강력한 부족인 오베르뉴족이나 비투리지족과 혼합하는 방책을 채택하였다. 이 속주의 수도로 결정된 것은 부르디갈라(오늘날의 보르도)였다.

 

3.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 갈리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 속주에는 루아르강에서 센강 유역까지, 남쪽으로는 손 강과 론강의 합류점에 자리잡은 리옹까지 포함된다. 수도는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는 ‘리옹 속주’라는 뜻이기도 하다.

 

4. 벨기카 속주 - 이곳은 센강과 마른강에서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지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방과 링고네스족, 세콰니족, 트레베리족이 사는 지방을 합하여 ‘벨기카 속주’라는 이름으로 재편성했다. 이 지방의 유력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한 뒤로는 일관되게 친로마파였던 레미족이다.

 

5. 게르마니아 속주 - 라인강 서쪽 연안 일대를 가리킨다. 라인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족한테서 갈리아를 지키는 최전방인 만큼, 이 속주의 수도도 라인강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오늘날의 쾰른)였다. 라인강 방어선은 카이사르가 선을 긋고 아우구스투스가 토대를 쌓기 시작한 뒤, 100여 년에 걸쳐 역대 황제들이 차츰 완성해갔는데, 군단기지를 건설할 때에도 지정학적 측면을 배려했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군사적 속주인 게르마니아 속주를 제외한 3개 속주를 그 지방 유력 부족의 관할 아래에 두는 방식을 채택했을 것이다. 아퀴타니아 속주는 오베르뉴족,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는 하이두이족, 벨기카 속주는 레미족이 관할하는 식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오직 지형만을 선택 기준으로 삼아 수도를 정했다. 보르도, 리옹, 트리어는 모두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아니, 교통망을 정비하는 것은 로마인이니까, 교통의 요지가 될 수 있는 지형이라고 바꿔 말해야 할 것이다. 유력 부족인 레미족의 근거지인 랭스, 하이두이족의 근거지인 오툉은 로마의 갈리아 지배 기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통망즉 로마인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은 이들 도시도 배제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법의 절반도 중앙집권화한다. 속주에 살아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항소권이 인정되어 있었고, 속주민에게도 총독을 고소할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최종 재가를 내리는 것은 로마의 ‘제일인자’ 아우구스투스의 임무가 되었다. 속주 총독은 지방법원의 재판장, 아우구스투스는 대법원의 재판장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국세청' 창설

 

'프로쿠라토르 임페리알레’라고 불리게 된 이 관직을 신설한 것이야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속주 통치체제의 요체라 해도 좋은 개혁이었다. 이 ‘황제 재무관’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다. 급료는 지불되지만, 징세액의 10퍼센트였던 수수료는 절약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제국을 통치하는 데 유효했다.

 

‘황제 재무관’ 체제를 도입한 목적은 세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 속주에서 징세의 공정성 확보, 둘째, 제국 통치라는 웅대한 청사진에 따라 세금을 배분할 수 있다는 이점, 셋째, 통치의 연속성 확립이다. 황제 재무관의 임기도 아우구스투스가 결정하기 때문에, 10년 이상 근무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속주의 가도 건설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속주의 가도 건설이 비약적으로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업은 아그리파가 주도하여, 리옹 같은 곳은 4개 가도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하나는 서쪽의 아퀴타니아로 이어지는 가도. 또 하나는 북서쪽의 대서양으로 향하는 가도. 세 번째는 북동쪽의 라인강으로 달리는 가도. 네 번째는 론강을 따라 남쪽의 마르세유에 이르는 가도. 도로망 건설붐이 일어난 것은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군용도로로 건설된 가도망은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민간 경제 진흥과도 연결된다.  물자 교류가 왕성해지면 사람의 교류도 왕성해진다. 사람의 교류가 왕성해지면, 사람의 두뇌에 들어 있는 지식과 가슴에 들어 있는 생각도 교류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로마 문명을 기둥으로 하는 일대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냐 속주 재편성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에서도 카이사르가 편성한 속주를 재편성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베리아반도를 남부의 ‘베티카’ 속주, 서부의 ‘루시타니아’ 속주, 동부와 제패를 끝낸 북서부까지 포함하여 이베리아반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타라코넨시스’ 속주로 삼분했다.

 

베티카 속주는 ‘원로원 속주’다. 로마화의 역사가 길어서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타라코넨시스 속주는 루시타니아 속주와 함께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가 되었다. 실제로 에스파냐에 주둔시키기로 결정된 4개 군단은 얼마 전에야 제패한 북서부를 에워싸듯이 ‘황제 속주’인 타라코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배치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특히 사라고사와 메리다에 많은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콜로니아)를 건설했다. 갈리아 원주민과는 달리 에스파냐 원주민에게는 지도자가 될 만한 유력한 부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주한 로마 시민들은 원주민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로마군에서 병역을 치르고 있는 현역 병사들은 독신 의무를 지켜야 한다. 만기 제대할 때에는 마흔 살 안팎이 된다. 이 나이의 독신 남자가 이주하여 현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로마의 식민 방식이다.

 

'행운의 아라비아'

 

기원전 26년부터 기원전 24년까지, 아우구스투스는 딱 한 번 전쟁을 한다. 국토 방위의 필요성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싸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원정이었고, 그것도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반도에서 이루어졌다. 그 전초전은 에티오피아 원정이었는데, 이 원정에는 속주로 편입된 이집트의 남쪽 방위선을 확립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무렵 ‘아라비아 펠릭스’(행운의 아라비아)라고 불린 현재의 예멘까지 진격하려고 시도했다. 시도했다고 말한 것은 그 원정에 파견된 병력이 2개 군단도 채 안 되는 소규모였기 때문이지만, 이 원정은 방위선 확립을 외치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은 그의 관점에서는 보기 드문 예외가 되었다.

 

‘행운의 아라비아’는 거기에 사는 아랍인이 그렇게 자칭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 사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붙인 이름인 것 같다. 향료와 몰약, 진주, 보석, 그리고 인도를 거쳐 오는 중국산 비단 같은 고급품을 거래하여 돈을 버는 행운을 타고난 아라비아라는 뜻이다. 홍해 입구를 장악하면 동방에서 들어오는 물자 교역에 따른 이익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로마는 홍해의 북부 3분의 1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라비아 쪽의 레우케코메와 이집트 쪽의 베레니스, 그리고 나일강 연안의 콥트에 세관을 설치했다. 로마의 관세는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5퍼센트, 저개발 지역인 갈리아에서는 1.5퍼센트였지만, 동방에서 들어온 고급품에 대해서는 무려 25퍼센트나 되는 관세가 부과되었다.

 

 

 

북서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왕국의 왕조가 단절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탑수스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자결한 누미디아 왕의 아들을 마우리타니아 왕위에 앉혔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상류층 자제와 똑같은 교육을 받은 이 왕자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이집트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북서 아프리카도 아우구스투스가 생각하는 ‘팍스 로마나’의 일익을 평화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기원전 24년 말, 로마 세계의 서반부 재편성을 끝낸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선식은 거행하지 않고 ‘선물’만 나누어주었다. 호주 1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가 선물로 주어졌다. 대장부답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카이사르가 나누어준 ‘선물’과 같은 액수였다. 그리하여 통이 크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확립되었다.

 

'호민관 특권'

 

기원전 23년, 40세의 아우구스투스는 또다시 사람들이 예상치도 않았던 선언을 하고, 당장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때까지 연속해서 취임해왔던 집정관직을 동료 아그리파와 함께 사임하고, 앞으로 집정관은 공화정 시대처럼 해마다 민회에서 투표로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감격한 의원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겸손’한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1년 기한으로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호민관 특권이란 호민관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1. 신변 불가침권

2. 평민 대표로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지위

3. 평민집회 소집권

4. 정책 입안권

5. 거부권(베토)

 

‘호민관 특권’을 원한 그의 참뜻은 신변 안전보다는 평민집회 소집권과 정책 입안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부권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평민집회를 소집하여 그가 입안한 정책을 가결시키면, 원로원이 반대하더라도 평민 입법의 형태로 정책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평민집회의 결의는 집정관이 소집권을 갖는 민회에서의 결의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게다가 거부권은 원로원 결의나 집정관이 입안한 정책도 백지로 돌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다.

 

이러한 ‘호민관 특권’을 획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지도자로서, 아니 황제로서 공적 지위를 확립했다. 그 증거로, 그 후 황제들의 공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의 명칭을 계승하게 된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Imperator Caesar Augustus Tribunicia Potestas) 여기까지는 모든 황제가 똑같고, 그다음에 비로소 각자의 이름이 나온다.

 

화폐개혁

 

로마에는 오랫동안 화폐라고는 은화와 동전밖에 없었다. 금화는 개선식이나 그밖의 기회에 기념으로 만들어져 배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통화는 아니었다. 물론 금화는 금의 함유량이 100퍼센트인 순금이니까, 갖고 있어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이른바 ‘통화’는 아니었다.

 

이 금화를 통화에 편입시킨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는 금과 은의 상대적 가치를 1 대 12로 정하고, 동전 주조는 원로원의 권한으로 남겨두었지만, 금화와 은화 주조권은 종신 독재관인 자신의 권한으로 만든 단계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화폐제도를 확립하려던 그의 시도도 암살로 중단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시도를 되살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추진할 권한과 개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그의 개혁이 철저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덕분에 제국의 경제력 변화에 따라 금속 함유량은 달라져도, 제도 자체는 서기 4세기까지 300년 동안이나 계속 유지되었다. 제정 초기에 화폐제도 개혁을 단행한 아우구스투스의 목적은 단 하나,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축통화 확립과 그에 따른 제국 전체의 경제 활성화였다.

 

 

카이사르 포룸과 아우구스투스 포룸

 

무덤에는 무관심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스 광장 북쪽 끝에 지금까지 아무도 세운 적이 없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영묘’(마우솔레움)를 지은 것은 귀족 출신이 아닌 자신과 가족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포로 로마노 확장 계획의 첫 번째 사업인 ‘카이사르의 포룸’과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무찌른 기념비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의 건설 계획에 나타난 차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포룸’에 서 있는 조각상 가운데 중요한 것은 두 개뿐이다. 하나는 신전 안에 놓여 있는 비너스 여신상, 즉 카이사르 가문이 속한 율리우스 씨족의 수호신인 ‘위대한 어머니 베누스’(베누스 게니트릭스)의 대리석상이고, 또 하나는 신전 앞에 펼쳐진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카이사르의 청동 기마상이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그 전체를 장식하는 조각상 중에서 주요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난 수에 이른다. 우선 광장 한복판에는 말 네 필이 끄는 전차에 올라탄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이 서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전쟁과 복수의 신 마르스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것은 납득이 간다. 또한 신전 안에는 마르스 신상, 그 왼쪽에는 베누스 여신상, 오른쪽에는 신격 카이사르 석상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도 이 ‘포룸’을 바친 이유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주요한 조각상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자 율리우스 씨족의 시조로 되어 있는 아이네이아스, 그 손자인 실비우스, 그 친척들, 율리우스 씨족이 처음에 살았던 알바롱가의 왕들, 로마가 공화정이 된 이후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위인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듯한 느낌이다.

[카이사르 포룸과 아우구스투스 포룸 출처 본문]

[카이사르 포룸과 아우구스투스 포룸 출처 본문]

또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기 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였던 시절에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과 악티움에서 대결하기 전날 밤 아폴로 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다. 그래서 개선하자마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아폴로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그때까지 아폴로는 로마 사회에서 중시한 신들 중에는 끼어 있지 않았다.

 

그전까지 신들이 사는 성역으로 되어 있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신전을 가진 것은 유피테르(그리스에서는 제우스), 그의 아내인 유노(헤라),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아테나)였다. 로마 최고 권력자의 수호신이 된 덕분에 로마의 신들 사이에서 아폴로의 지위가 높아졌지만, 카이사르처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수호신을 갖지 못한 아우구스투스의 고심 어린 선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선거제도 개혁

 

집정관 선거가 재개되어 시민(유권자)의 정치의식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기원전 23년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선거제도를 개혁할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카이사르가 건설하기 시작한 ‘사이프타 율리아’(의역하면 율리우스 투표소)는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했다. 판테온 동쪽에 인접해 있던 이 투표소는 세로 120미터, 가로 300미터의 넓은 회랑으로, 주위에는 원기둥이 늘어서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선거제도 개혁이 ‘개혁’이었던 이유는 로마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 이외의 지역에서 투표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도시국가의 역사 때문에 선거는 수도에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은 부재자 투표를 인정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선거는 활기찬 행사인 만큼, 그대로 방치해두면 선거법 위반 행위도 활기를 띠기 쉽다. 아우구스투스는 선거법 위반에 대한 벌칙도 법제화했다. 후보자는 의무적으로 일정액의 공탁금을 내야 했다. 선거법을 위반하면 공탁금은 몰수되어 국고로 들어간다. 다만 후보자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은 인정되었다.

 

공화정 시대에도 일정한 공직을 거치면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무관이 대상자를 검토하여 원로원 의석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했다.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 역임자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재무관이 가부를 결정하는 제도를 폐지한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한다. 다만 그 추진 방법은 달랐다. 카이사르는 임기가 끝났을 때 최소한 31세가 되어 있는 원로원 의원 후보자에게 그 시점에서 합격이나 불합격을 통고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4년의 유예 기간이 있다.

 

로마 시대의 '노멘클라투라'

 

로마의 유력자들은 옛날부터 외출할 때는 ‘노멘클라토르’라고 부르는 노예를 동반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력자니까 포로 로마노를 걷고 있으면 다가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이면, ‘노멘’(이름)을 ‘클라토르’(일러주는 자)의 역할을 맡은 노예가 얼른 주인에게 상대의 이름을 속삭인다.

 

선거운동 중에는 ‘노멘클라토르’가 기억해야 할 자료는 이름만이 아니었다. ‘노멘클라토르’는 로마의 지도층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였는데, 정보통인 만큼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받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서 식사하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연회가 열릴 때는 손님들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로마의 선거에서는 후보자들의 선거운동만이 아니라, ‘추천’이라는 형식으로 최고 권력자의 선거운동도 이루어졌다. 이것을 적극 활용한 사람이 비민주적으로 여겨지는 정치체제인 제정을 추진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카이사르는 추천서를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추천서를 보내지 않았다. 선거 때가 되면 넓은 ‘사이프타 율리아’에 장막 따위를 쳐서 선거구별로 구획을 만들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자파 후보자를 거느리고 그 모든 구획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자기가 추천한 후보자에게 표를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제정으로 가는 길은 아우구스투스의 이 같은 탁월한 수완으로 차츰 다져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이 잠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이 실시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 덕분에 원로원 의사당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의원들의 거리낌없는 언동을 꾹 참아야 할 때가 많았다.

 

핏줄에 대한 집착

 

이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 말에 처음으로 집안의 비극을 겪는다.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가 느닷없이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40세의 아우구스투스가 외동딸 율리아를 시집보내고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젊은이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례식에서 조사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읽었다. 이 마르켈루스가 영묘에 매장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10년 뒤에 완공된 극장 이름을 ‘마르켈루스 극장’(테아트룸 마르켈리)이라고 짓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와 달랐던 점은 핏줄을 이어가는 데 끝까지 집착했다는 것이다. 16세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는 남편의 상을 벗자마자 재혼했다. 새 남편은 17세 때 카이사르의 배려로 아우구스투스와 짝을 이룬 뒤 줄곧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이미 옥타비아의 딸인 마르켈라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에 따라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핏줄을 잇는다는 면에서도 성공이었다. 2년 뒤에 맏아들이 태어났고, 다시 3년 뒤에는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마흔세 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기원전 22년, 41세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국정개혁은 여기서 4년쯤 중단된다. 아우구스투스가 더 이상의 개혁을 추진하기 전에 다른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동반부 재편성과 그동안 미루어둔 파르티아 문제 해결이었다.

 

동방 재편성

 

오늘날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중앙부는 고대에는 갈라티아 지방이라고 불렸다. 로마가 공화정이었던 시대에는 동맹국, 로마인의 표현으로는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였다. 그런데 기원전 24년에 갈라티아 왕가의 혈통을 잇는 마지막 왕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듣자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재빨리 동방으로 보냈다. 그것도 실제로는 황제인 자신의 대리인이라는 지위를 주어서 파견했다. 말하자면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갖춘 특명 전권대사다. 아우구스투스의 참뜻은 이번 기회에 갈라티아를 로마의 직할 속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만, 군사력은 사용하지 않고.

 

동방에 파견된 아그리파는 군단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또한 갈라티아에는 직접 들어가지 않고, 소아시아 서해안 근처에 있는 레스보스섬에 머물면서 갈라티아를 평화적으로 속주화하려는 교섭을 시작했다.

 

 

시칠리아

 

기원전 22년에 동방을 재편성하기 위해 수도를 떠난 아우구스투스는 길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여행은 느긋하게 시작되었다. 최초의 행선지는 시칠리아섬이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700년이나 된 그리스 이민의 정착지 시칠리아에는 이미 시라쿠사·카타니아·메시나·팔레르모·트라파니·마르살라·아그리젠토 등 7개 주요 도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이 모두 항구도시인 까닭은 해운과 통상의 민족인 그리스인이나 카르타고인이 건설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우선 이 7개 도시를 충실하게 하려고 애쓴다. 7개 도시를 잇는 도로망은 섬을 일주하는 해안도로와 내륙을 횡단하고 종단하는 도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륙 도로를 건설한 것은 그리스인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은 내륙지방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속주로 남은 시칠리아 주민들은 수입의 10분의 1인 속주세를 내야 했다. 하지만 수입이 많아지면 세금을 내고도 남는 액수가 많아진다. 이 시칠리아 속주만이 아니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도 군대는 1개 군단도 주둔하지 않았다. 주둔시킬 필요도 없을 만큼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이듬해인 기원전 21년, 아우구스투스의 순행지는 그리스로 옮겨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 재건 구상은 자치도시와 식민도시, 그리고 그 도시들을 잇는 도로망 건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치도시란 도시국가로서 완전한 자치를 인정받고, 독자적인 화폐 주조권도 가지며, 당연한 일이지만 속주세도 면제되는 도시를 가리킨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니코폴리스를 포함하여 열 개가 채 안 되는 자치도시가 특별지구로 존재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이런 특전이 인정된 것은 이 두 도시국가의 역사를 로마의 역대 통치자들이 존중했기 때문이다.

 

식민도시란 로마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퇴역병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주민은 로마 시민이니까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고속도로로 생각할 수 있는 로마식 가도는 그때까지는 이그나티아 가도 하나뿐이었지만, 이것이 자치도시와 식민도시를 잇는 도로망으로 차츰 발전해간다.

 

아우구스투스가 경제 부흥이야말로 그리스 재건의 열쇠라고 믿었다는 증거는 아테네 북부에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시장을 지어서 아테네 시민에게 기증한 것에도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아테네시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 세우고,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조각상을 만들어 그 신전 안에 세우는 것으로 보답했다.

 

 

소아시아와 갈라티아 속주

 

공화정 시대 로마의 소아시아 정책은 동맹관계를 축으로 삼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페르가몬 왕이 죽으면서 나라를 로마에 맡기자 그것을 속주화했을 뿐, 소아시아의 각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으로 일관했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군사력이 우세하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소아시아 전역을 속주화하는 것을 되도록 피해왔다.

 

로마의 동맹국인 각 왕국은 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다. 군주정이 오리엔트인의 기질과 결부되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래서는 로마의 패권 밑에서 소아시아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표였던 로마의 소아시아 정책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갈라티아를 직할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이웃 나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군단을 이용하지 않고 그 일을 끝내고 싶었다. 특명 전권대사에다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 자격까지 얻어 실제 교섭에 나선 아그리파는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약속하여 갈라티아 유력자들과의 교섭을 성사시켰다.

(1) 부채 상환 기간의 연기.

(2) 속주세의 공정 과세.

(3) 속주 총독의 통치 지역을 명확하게 한다.

(4) 군단을 상주시키지 않는 대신,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시리아 속주

 

오늘날로 치면 터키 남동부의 일부에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합해야만 겨우 로마 시대의 시리아 속주가 된다. 이렇게 땅이 넓은 만큼 민족 구성도 복잡해서, 그리스계와 페니키아계와 셈족으로 나뉘어 있다.

 

이 속주는 대국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따라서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성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를 ‘황제 속주’로 삼고, 평시에도 4개 군단을 주둔시키기로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헬리오폴리스(오늘날 레바논의 발베크)에 군단기지를 건설하고, 병사들이 변경에서도 쾌적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공공시설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대상로를 고려하여 그 연변에 있는 도시들을 진흥시키는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먼저 다마스쿠스와 팔미라에 진흥책이 집중되었다. 안티오키아와 팔미라 사이, 팔미라와 다마스쿠스 사이, 다마스쿠스와 베리투스(오늘날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사이, 베이루트와 안티오키아 사이, 발베크와 다마스쿠스 사이를 잇는 도로망이 정비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돈과 티로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페니키아 시대부터 존재한 고대 도시 시돈과 티로가 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의 혼란기에 이 두 도시에는 로마에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나, 거기에 머물고 있던 로마 상인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도시에서 ‘자유도시’의 자격을 박탈하고, 시리아 속주에 속하는 일개 도시로 격을 낮추었다.

 

유대 문제

 

아우구스투스는 '헤롯 왕(라틴어식 이름은 헤로데스)'을 유대 쪽에 가질 수 있었다. 헤롯 왕은 기원전 73년에 태어났으니까, 아우구스투스보다 열 살 위다. 기원전 40년, 유대를 침공한 파르티아군은 당시의 왕을 생포하고 친파르티아파인 왕의 동생을 왕위에 앉힌다. 퇴위당한 왕의 고관이었던 헤롯은 로마로 망명했다.

 

33세의 헤롯은 명석한 두뇌와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강한 의지로 로마 지도층의 호의와 신뢰를 얻고 있었다. 헤롯은 곧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한테서 받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간다. 반격은 성공하여, 그는 유대 왕위에 올랐다.

 

 

유대 왕국은 로마의 ‘클리엔테스’로 존속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물론 유대인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롯 왕의 친로마 정책도 철저했다. 유대 국내에도 그리스·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이 세워졌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 표시로 사마리아를 세바스티아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파르티아 문제

 

로마가 파르티아 왕국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로마의 동쪽 방어선이 확립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파르티아를 로마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도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리엔트의 평화를 유지하는 열쇠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총사령관의 품격은 있지만 전투를 지휘하는 재능은 없었다. 아그리파는 용장이지만 천재적인 사령관은 아니었다. 그에게 맡겨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한 기원전 30년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의 속주를 위협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급하지 않게 치밀한 준비를 해 나갔다.

 

기원전 21년, 아테네에서 사모스섬으로 이동한 아우구스투스는 동행한 티베리우스에게 시리아 속주에 주둔하고 있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얕보고 있던 로마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깜짝 놀란 아르메니아 궁정은 아르탁세스 왕을 죽이고, 사절을 급파하여 로마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친히 동방에 진입했을 때부터 파르티아에는 경계경보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방 아르메니아가 로마 쪽으로 돌아섰다. 파르티아 왕 프라테스 5세는 로마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그동안 방치해둔 강화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33년 전의 크라수스 군대와 15년 전의 안토니우스 군대가 빼앗긴 은독수리 깃발은 모두 반환되었다. 하지만 33년 전에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파르티아군이 전사자한테서 빼앗아 전리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로마 장병들의 갑옷과 무기는 반환되었다.

 

보스포루스 왕국

 

흑해의 북쪽 끝, 돈강이 흘러드는 아조프해를 끼고 있는 보스포루스 왕국과 동맹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계 주민이 지도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광대한 흑해를 사이에 두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주보고 있는 이 작은 왕국도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였다.

 

하지만,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분쟁 조정에 나선 아그리파 덕분에 여왕을 정점으로 하는 안정된 정권이 성립되었다. 로마는 보스포루스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흑해 쪽에서도 아르메니아 왕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

 

로마에 정복된 피점령국이면서도 통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나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한 뒤의 이집트였다. 이 나라만은 아우구스투스 개인 영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형식에 불과했고,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물론 당시의 로마인들도 이집트를 국가 로마의 소유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로마는 그리스계 주민을 피정복민으로 억압하지 않고, 그들이 로마인과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에 착안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즉 이집트 경제를 활성화한 것이다. 이집트 경제의 토대는 나일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농업’에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나일강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로망 정비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농업 활성화는 ‘사회간접자본’ 정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에 토지 사유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는 신전 소유지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의 경작지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소유지를 불하하여 자작농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연상시키는 정책이다. 이러한 관개 공사와 가도망 정비, 그리고 농경지 사유제의 도입은 이집트의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 도입한 마지막 개념은 정교분리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앞다투어 땅을 기증했기 때문에, 각 신전의 영지는 광대해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영지들을 몰수했다. 그 덕분에 한동안은 소작인들이 나라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임차 형식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정교분리 정책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을 뿐, 종교를 배제한 것은 아니다. 배제하기는 커녕 이집트 신전 수리와 신축 공사는 차츰 로마황제들의 일거리가 되었다.

 

수도 로마로 돌아오다

 

그리스를 거쳐 귀국길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잠시 들른 아테네에서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그보다 일곱 살 위인 이 시인은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자 오늘날 ‘메세나 운동’의 시조인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고 있는 문인이었다. 황제는 병에 걸린 시인을 데리고 그리스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기원전 19년 9월 21일, 로마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는 브린디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사시 『아이네이아스(AENEIS)』는 아직 퇴고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시인은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원고를 태워버리라는 유언을 하고 죽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3년 만의 귀환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기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원로원의 결의로, 집정관 퀸투스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과 법무관, 호민관을 포함한 일행이 캄파냐(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까지 마중 나와 나를 영접했다. 이런 명예는 나 말고는 이제껏 아무도 받은 적이 없다.”

 

정작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 아우구스투스도 이런 일은 『업적록』에 자세히 남기는 것이 미소를 자아낸다. 전투도 하지 않고 정복한 땅도 넓히지 않은 채 돌아온 황제를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로마인이 많았던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행운이기도 했다.










로마인 이야기 6권

 

팍스 로마나 - 아우구스투스 통치 중기

 

byAndy강성Nov 08. 2024아래로

제2장 통치 중기

기원전 18년~기원전 6년(45세~57세)



역사가 타키투스가 평했듯이 반대파를 자극하지 않도록 야금야금 권력을 손에 넣은 아우구스투스는, 서방에 이어 동방에 대한 재편성을 끝낸 이제, ‘머리’를 강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일은 한마디로 말하면 ‘로마 시민권 소유자 전체의 강화’였다.




그는 카이사르가 속주의 유력자에게 원로원 의석을 준 것이 기존 원로원 계급의 반발을 샀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로마 시민권 소유자 계층을 강화하는 것이 선결 문제라고 생각했다. 로마 시민이 제국의 핵심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질과 양을 확보하는 것이 제국 통치에 효과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풍조에 대한 대책




기원전 1세기 말에 본국 이탈리아반도의 주민 구성을 분석해보면, 인종이나 민족의 상대적 비율이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본국 주민의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주민 구성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자식을 적게 낳는 풍조가 뚜렷해졌다.




기원전 2세기까지만 해도 로마의 지도층 집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처럼 자녀를 10명이나 낳아서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카이사르 시대에는 자녀를 두세 명 낳는 게 보통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아예 결혼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났다.




기원전 1세기 말의 로마에서는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 외에도 쾌적한 인생을 보내는 방법이 늘어났기 때문인다. 독신으로 지낸다 해도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집안일은 노예들이 맡아서 해주고, 게다가 ‘아트리엔시스’(집사로 번역할 수 있는 수석 노예)가 잠시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모든 일을 꼼꼼히 챙겨준다.




아우구스투스의 윤리 대책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는 ‘윤리 대책’(쿠라 모룸)의 일환으로 두 가지 법안을 제출한다. 원로원에서는 상당한 반대를 받았지만, 45세의 최고 권력자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누구보다 강력한 권위를 내세워 그 법안을 정책화하는 데 성공했다.




•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법’('간통 처벌법')

 

•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법’('정식 혼인법')




‘간통 처벌법’의 성립으로 간통은 공적인 범죄가 되었다. 남편이나 아버지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간통한 여자를 고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률은 간통한 남녀 외에도, 간통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거나 사실을 안 뒤에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남편이나 친정아버지를 ‘간통 방조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식 혼인법




‘정식 혼인법’은 로마 사회의 상류층과 중류층에 해당하는 원로원 계급과 기사 계급, 즉 정치·경제·행정을 담당하는 계층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두 계급에 속하는 시민들에게 채찍과 당근을 함께 사용하여 정식 결혼 생활을 장려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법률의 성립으로 국가 로마의 ‘두뇌’와 ‘심장’과 ‘신경’이 되어야 할 25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와 20세부터 50세까지의 여자는 결혼하지 않으면 독신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과부인 경우에도 자녀가 없으면 1년 안에 재혼해야 하고, 재혼하지 않으면 독신과 똑같이 취급된다.




자식이 없는 독신 여성은 50세가 넘으면 어떤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독신 여성이 5만 세스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 50세가 넘자마자 이것을 유지할 권리마저 잃게 된다. 몰수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야 한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남자라도 자녀가 없으면, 첫아이가 태어나야만 비로소 법정 상속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유산을 상속할 권리를 가질 수 있고, 법정 상속인이 아니라도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친구나 친지에게도 유산을 상속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로마에서는 이 법률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혼 자체는 금지하지 않고 이혼하기가 어렵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이제는 공표 의무가 부과되었고, 이전에는 두 당사자와 아내쪽 아버지의 의향만으로 이혼이 성립되었지만, 이제는 원로원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에서 이혼을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려야만 비로소 이혼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는 낳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27년 뒤인 서기 9년에 이 두 가지 법률의 수정안이 성립되었는데(‘파피우스 포페우스법’), 주로 자녀가 없는 부부의 상속권이 인정되고 독신 여성의 불이익이 재혼을 하면 완화되었다.




신앙심




기원전 17년 당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최고 제사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종교계를 재편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우선 그 자신이 제사장(폰티펙스)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리 개혁’의 책임자였다.




로마에서는 예부터 ‘세기제’(世紀祭, 루디 사이쿨라레스, ludi saeculares)가 열리고 있었다. 이는 비정기적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축제를 정기적인 행사로 바꾸고, 의미도 부여했다. 5월 31일부터 사흘 밤 사흘 낮이 ‘세기제’를 여는 시기로 결정되었다.

 

 

 

첫날 무대는 마르스 광장에서도 테베레강변 쪽의 ‘타렌툼’이라는 곳이다. 주최자인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양과 산양을 각각 아홉 마리씩 운명의 여신에게 산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기도 내용은 로마인이 건강과 지혜를 얻고, 로마의 승리와 독립과 평화가 유지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튿날인 6월 1일 오전에는 무대가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옮겨진다. 이날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산 황소를 제물로 바친다. 날이 저물면, 무대는 다시 마르스 광장으로 돌아간다. 이날 밤에 기원할 상대는 다산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공물로는 밀과 보리와 누에콩 가루로 만든 세 종류의 빵이 27개 마련된다.




6월 2일 아침, 무대는 다시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돌아간다.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제각기 암소를 한 마리씩 끌고 최고신 유피테르의 아내인 유노에게 기원한다. 날이 저문 뒤에는 타렌툼으로 무대가 다시 옮겨진다. 기원할 상대는 임신을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이고, 산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도 암퇘지로 바뀐다

 

 

 

이튿날인 6월 3일 아침,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가 제사를 드리는 무대는 팔라티노 언덕의 아폴로 신전으로 옮겨진다. 세 종류의 빵 27개를 아폴로 신과 디아나 여신에게 바친다. 다음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무대를 옮겨 ‘세기제’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세기제’와 같은 국가의 제사와는 별도로 민간 신앙에서는 도시 도로의 네거리마다 그 규모에 걸맞은 크기의 사당이나 제단이 만들어졌다. ‘그 일대의 수호신’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영혼’을 모시는 장소다. 아우구스투스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신격화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이 ‘아우구스투스의 영혼’ 신앙이야말로 훗날의 황제 숭배로 이어지게 된다.




알프스




이탈리아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가는 데에는 주요 루트만 해도 네 개가 있었다. 이 중 세 번째 루트는 토리노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수사 골짜기를 오르는 방법으로 알프스를 넘는 길이다. 로마인들은 이 루트를 거기에 사는 부족의 이름을 따서 ‘알페스 코티아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6년 당시, 로마는 이 네 루트를 모두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굳이 아우구스투스가 몸소 나설 필요도 없었다. 다만 세 번째 루트인 ‘알페스 코티아이’만은 독립 부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민족인 이 산악부족의 부족장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자신의 성(姓)인 율리우스까지 주어 동맹관계를 맺었다.




알프스를 넘는 루트는 이리하여 모두 로마의 것이 되었다. 로마의 것이 되자마자 아우구스투스가 한 일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루트를 로마 가도화하는 것, 즉 고속도로화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루트를 이용한다면, 토리노에서 발랑스까지의 거리는 365킬로미터, 도보로는 열흘이 걸렸다.




‘서쪽’을 정비한다면 ‘동쪽’을 정비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기회는 언제나 그렇지만 적이 가져다주었다. 이 무렵 일리리쿰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이 동맹자였던 북방 부족의 습격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이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아그리파를 북쪽으로 파견했다.




도나우강




카이사르에게 로마 시민권을 받아서 본국과 동등해진 루비콘 이북의 북이탈리아를 방어하는 것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빙 둘러 있는 알프스산맥이다. 하지만 그의 갈리아 정복은 국가 로마의 방어선을 알프스산맥에서 라인강으로 옮기는 방위전략의 일환이었다. 산이 아니라 강을 방어선으로 삼는다는 생각이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전략이 된다. 강이라면 건너편을 바라볼 수 있어서, 적을 관찰하기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라인강 방어선은 카이사르가 확립해주었다. 유프라테스강은 아우구스투스가 외교 교섭으로 해결했다. 흑해도 남쪽은 속주, 동쪽은 동맹국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쪽의 보스포루스 왕국과도 동맹을 맺어 ‘팍스 로마나’는 절반쯤 완성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도나우강이다. 도나우강의 남쪽 연안 일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나 옛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니까,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것을 끝내야만 비로소 흑해 서안까지 포함하는 로마 제국의 북동부 방어선이 확립된다.

 

 

 

기원전 16년, 북진해 올라가는 대규모 군사행동은 아그리파의 총지휘로 시작되었다. 26세의 티베리우스와 그의 동생인 22세의 드루수스가 진두지휘를 맡았다.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와 결혼했을 당시 티베리우스는 겨우 세 살이었고 드루수스는 아직 배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둘 다 늠름한 젊은 장수로 성장해 있었다.




산악부족과의 전투는 둘 다 에스파냐에서 이미 경험했다. 당면한 적은 오늘날의 티롤 주변에 살고 있던 라이티아족이었다. 아그리파가 짠 작전은 베로나에서 북상한 드루수스 군대와 갈리아에서 라인강을 건너 남동쪽으로 진격한 티베리우스 군대가 현재의 보덴호반에 있는 콘스탄츠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쳐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마치 큰 그물로 고기떼를 가두듯 오늘날의 스위스 전역에서 남쪽의 오스트리아 알프스까지를 제패할 수 있다. 두 군대의 합류 후 남쪽으로 향하는 로마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부족은 하나도 없었다. 기원전 16년과 기원전 15년의 2년 사이에 이탈리아 본국의 북쪽은 안전이 보장되었다.




평화의 제단




로마인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곳이야말로 성소를 짓기에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13년, 귀국한 아우구스투스를 맞이하여 원로원이 건설하기로 결의한 제단도 로마에서 북쪽으로 가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테베레강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구간에 세워졌다.




정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알타스 파키스 아우구스타에), 통칭 ‘평화의 제단’인데,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으로 평화가 도래한 것을 경축하고, 그 평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로마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평화의 제단’은 그 위치가 원래의 장소와 다르다. 1936년 독재자인 무솔리니의 생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묘’ 주변을 재개발할 때, 발굴한 ‘평화의 제단’을 ‘황제묘’와 테베레강 사이에 복원했다. 이 광장은 그 후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광장’(피아차 아우구스토 임페라토레)이라고 불린다.

 

 

 

‘평화의 제단’은 중앙 입구와 그 반대편 출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모두 돋을새김으로 메워져 있다. 그것도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는 새와 곤충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칸서스 잎사귀 모양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했다. 하단에 묘사되어 있는 아이네이아스와 로물루스를 비롯한 여러 신과 인간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뒤쪽으로 돌아가서 왼쪽에는 두 갓난아기를 두 팔에 안은 대지의 여신 텔루스가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양옆에는 바람과 불의 여신이 앉아 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 두 아이를 품에 안은 여신은 다산을 상징하고, 세 여신의 발치에 그려진 보리밭과 소와 양은 대지가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을 나타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우구스투스도 『업적록』에서 말했듯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을 건립하기로 결의했을 뿐 아니라 "이 제단에서 해마다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결정"도 내렸다. 해마다 의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해마다 신들에게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의 로마식 표현이다. '평화의 제단'은 '팍스 로마나'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세워졌고, 실제로도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군대 재편성




카이사르와 같은 지도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우구스투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로마군은 누가 지휘를 맡아도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이었어야 했다. 로마의 군사제도를 재편성할 때 아우구스투스가 기본방침으로 생각한 사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목적은 정복이 아니라 방위에 있다.

2. 통일국가 파르티아를 제외한 나머지 적들은 모두 개발되지 않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야만족이다.

3. 방위가 목적인 만큼 상비군이 필요하다.

4. 방위 담당자, 즉 병사의 노동조건 향상과 확립.

5. 안전보장(세쿠리타스)에 필요한 종합 전략 확립.

6. 안전보장체제 유지에 필요한 재원 확보.



아우구스투스는 병역 기간을 개혁 초기에는 16년으로 정했다. 병역 자격 연령은 17세니까, 만기까지 근무했다 해도 33세다. 치세 말기에는 16년이었던 병역 기간이 20년으로 연장된다. 그는 동시에 고대에는 획기적인 퇴직금제도까지 확립했다. 또한 병사들이 토지와 현금 가운데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만기 제대자에게 주는 퇴직금 액수는 서기 6년에는 3천 데나리우스로 정착되었다. 13년치 본봉에 해당하는 액수다. 만기 제대자는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았지만, 제대하면 다른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었고, 퇴직금은 그것을 전제로 한 경제적 보증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전역의 방위력으로 처음에는 28개 군단을 두었지만, 서기 9년 이후에는 25개 군단으로 정착되었다. 25개 군단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만으로 편성된 군단만 헤아린 것이다. 1개 군단의 정원은 6천 명, 25개 군단이면 15만 명이다. ‘군단병’(레기오나리스)이라고 불린 이 15만 명이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국방의 주력이 되었다.

 

[로마 군단 레기오나리스 출처 본문]

[로마 군단 레기오나리스 출처 본문]

하지만 15만 병력만으로는 그 기다란 방어선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갈리아인이나 게르만족으로 편성된 기병대 등의 비정규병을 ‘보조병’(아욱실리아리스)으로 부르면서도 로마군의 정규병으로 편입시켰다. 그들의 근무 기간은 25년이고 급료와 퇴직금도 지급되었으며, 만기 제대하면 로마 시민권도 주어졌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보조병’ 정원은 ‘군단병’과 같은 15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계산해도 25년마다 15만 명의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새로 생겨나게 된다. 이 개혁으로 인해 먼저 방위비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고, 속주민에게도 자기 나라는 스스로 지킨다는 의식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속주의 실업자 구제, 속주의 로마화 등의 여러 가지 이점을 얻게 되었다.

 

[로마 보조부대 출처 본문]

[로마 보조부대 출처 본문]

종합 전략




방어가 주목적이 된 로마군의 전략은 보조병이 버티고 있는 동안 군단병이 도착하여 결판을 내는 요격 체제였다. 모두 연결하면 지구를 두 바퀴 돌 수 있다고 할 만큼 거미줄처럼 쳐놓은 로마 가도는 이처럼 군용으로 건설된 것이었다. 30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어떻게 하면 그 넓은 영토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리에서 시작된 전략이었다.




제국 방위에서 주력을 맡은 로마 군단은, 그 규모가 28개 군단을 유지하고 있던 서기 9년까지는 다음과 같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것이 로마 시민으로 병역을 지원한 사람들의 근무지다. 그리고 추가로 군단병과 같거나 그보다 적은 수의 보조병을 현지에서 고용한다. ‘현지 고용’이기 때문에 보조병의 민족도 다양하다. 시리아 군사기지의 보조병 중에는 셈족 출신이 많았고, 라인강 연안 기지에 배치된 보조병 중에는 갈리아인과 게르만족이 많았다.

 

• 남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 전체에 4개 군단

• 라인강 하류 연안에 5개 군단

• 라인강 상류 연안에 2개 군단

• 고대의 일리리쿰과 달마티아(오늘날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방에 5개 군단

• 도나우강 남쪽, 고대의 모이시아(오늘날의 세르비아) 일대에 3개 군단

• 고대의 시리아(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4개 군단

• 북아프리카 전역에 5개 군단

 

 

 

로마의 해군




군사대국 로마의 해군은 육군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지중해 일대를 패권 아래 넣은 뒤로는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배들은 전투보다는 수송에 쓰이는 경우가 많았고, 그밖에는 로마의 감시망에 뚫린 구멍을 찔러 이따금 출몰하는 소규모 해적선단을 단속하는 해상 경찰의 임무만 맡게 되었다.




로마의 해군기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두 군데였다.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한 라벤나(오늘날의 이름도 라벤나)와 나폴리만에 있는 미세눔(오늘날의 미세노)이다. 이 두 개의 주요 기지 외에 동지중해에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해군기지가 설치되었고, 서지중해에서는 카이사르가 해군기지로 만든 남프랑스의 포룸율리(오늘날의 프레쥐스)가 로마 군선의 정박지가 되었다.

 

 

 

악티움 해전을 끝으로 전투보다는 수송을 주로 담당하게 된 로마 해군은 구성원의 질을 유지하는 데에도 육군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휘관만 로마 시민이고, 선원이나 노잡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복무 기간은 28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근위대 창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해놓고, 제정으로 나아가는 포석을 조용히 두어가고 있었다. 그가 단행한 군제개혁 중에서 이런 색채가 가장 짙은 것은 ‘근위대’(프라이토리아) 창설일 것이다. 군단을 두지 않는 본국을 방위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고, 실제로는 본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근위대 창설자의 본심이었을 게 분명하다. 말하자면 황제 반대파에 대한 억지력이다.




근위대는 9개 ‘대대’(코호르스)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대대는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1천 명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근위병은 모두 9천 명이 된다. 연봉은 675데나리우스로 군단병의 세 배다. 복무 기간도 근위병은 16년으로 우대했다. 퇴직금도 5천 데나리우스다. 군복도 화려했다. 말하자면 로마군의 ‘꽃’이었다.




근위대의 총지휘권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있고, 실제로 지휘를 맡는 근위대장은 두 명이다. 9개 대대 가운데 수도에 주둔시킨 것은 3개 대대뿐이었다. 나머지 6개 대대는 이탈리아의 각지에 분산시켰다.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3개 대대의 근위병을 위한 상설 막사도 짓지 않았다.




세제 개혁




어떤 사업이든 재원을 확보하지 않고는 지속되기를 바랄 수 없다. 방위가 주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상비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투스는 방위비도 ‘상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목적세 신설이고, 이것을 포함한 조세제도 전체의 재편성으로 연결된다. 아우구스투스가 개혁하여 3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로마의 세제를 도표로 설명해놓았다.

 

 

 

속주민에게 부과되는 토지세는, 재산이 곧 토지였던 시대에는 재산세나 마찬가지였다. ‘노예해방세’가 로마 시민에게만 부과된 것은 이 세금이 속주를 갖지 않았던 시대부터 로마에 존재한 세금이었기 때문이다. 몸값의 20분의 1을 낼 수 있을 만한 생활력이 있다고 판정된 노예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관세’와 마찬가지로 로마인과 속주민이 똑같이 내는 간접세로는 ‘매상세’가 있다. 상품에 대해 부과되는 것으로, 일종의 ‘소비세’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군단에서 만기까지 복무한 병사들에게 퇴직금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고대인의 개념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상속세’를 생각해냈다. 공제 범위는 6촌 이내의 혈연자로 한다. 로마인에게는 절친한 친구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유산을 남기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점을 노린 것이다.




군단이 있는 ‘황제 속주’의 국고는 늘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우구스투스는 제 주머니를 털었다. 하지만 그 바로 다음에는 이런 기술이 이어진다. “서기 6년, 내 제안으로 군자금 제도가 신설되었고, 그 후로는 만기 제대한 병사들에게 주는 퇴직금은 이 자금에서 지급하게 되었다. 이 자금에는 나도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했다.”




흥미로운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방식이다. 모자라면 우선 제 주머니를 턴다. 그리고 상속세를 신설해 재원을 확보했을 때, 그는 1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거금을 기부했다. 이래서는 반대하고 싶어도 반대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퇴직금 지급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데 무려 24년이나 되는 세월을 소비했다. 그동안 자주 제 주머니를 털었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렸으니, 문자 그대로 심모원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그리파




기원전 12년, 지난해에 착공한 ‘평화의 제단’을 장식하는 군상 돋을새김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최고의 작품이 될 ‘팍스 로마나’가 이제 막 최종 단계에 들어가려 할 무렵, 51세의 아우구스투스는 평생의 친구이자 최고의 협력자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를 잃었다.




기원전 63년에 태어나 기원전 12년에 사망. 로마 제국의 확립을 지향하는 아우구스투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믿을 만한 협력자였다. 17세 때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어,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점찍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아우구스투스)와 협력했다. 특히 군사면에서의 협력이 두드러졌다.

 

 

 

이탈리아 시골의 이름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군단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그리파는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열등감을 품지 않는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로서, 그 건전한 정신은 실로 로마인답게 실용적인 재능으로 발휘되었다.




전선의 보조부대 기지와 주력인 군단기지와 가도로 이루어지는 로마의 방어망은 아그리파의 전략적 안목과 그가 지휘하는 군단병이 없었다면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독일의 대도시인 쾰른의 옛 이름은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인데, 로마의 군단기지로 출발한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이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데 바쳐졌다. 군사만이 아니라 건설에서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완벽하게 기능을 발휘했다. 로마의 도심 중의 도심인 포로 로마노 일대는 아우구스투스가 기획자인 카이사르의 생각을 이어받아 정비한 반면, 아그리파가 맡은 곳은 그 북쪽에 펼쳐져 있는 ‘마르스 광장’이었다.




아그리파가 맡은 것은 중앙 부분이었다. 아그리파는 우선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중단된 ‘사이프타 율리아’를 완성한다. 완성된 뒤에는 기획자인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공직자 선거 때는 투표소로, 평상시에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아그리파는 그 서쪽에 신전을 세운다. 모든 신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판테온’(만신전)이라고 불렀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개축하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로마 시대 건축물이다.




아그리파는 판테온 남쪽에 로마 최초의 공중목욕탕인 ‘아그리파 목욕탕’(테르마이 아그리파이)도 건설했다. 목욕탕 내부는 그리스인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했다. 이 목욕탕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일부러 ‘비르고 수도’를 놓았다.




‘목욕탕’ 서쪽에는 ‘아그리파 호수’(스타그눔 아그리파이)까지 만들었다. 호수 주위에는 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석조 건물이 많은 이 일대를 푸른빛으로 부드럽게 감싸주었을 것이다. 판테온 북동부에는 ‘빕사니우스 회랑’도 세웠다. 이 회랑의 벽화에는 그가 만든 ‘세계 지도’가 아로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아그리파는 스토아 철학이 이야기하는 공공봉사 정신을 평생 동안 몸소 구현했다. 개인 재산도 공공을 위해 계속 써주기를 바란 것처럼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두 남기고 죽었다. 아그리파는 사적인 면에서도 아우구스투스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핏줄에 집착하는 아우구스투스는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켈루스가 자식도 남기지 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이 된 외동딸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아그리파를 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우정과 충성심은 물론, 그의 건강도 의심하지 않았다.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의 죽음은 갑자기 찾아왔다(*판노니아에서의 야전 생활 속에서 건강을 심하게 해쳐 그 여파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는 그때 아그리파가 머물고 있던 나폴리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이미 고인이 된 아그리파를 대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이케나스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라면, 마이케나스는 ‘왼팔’이었다. 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에 해당하는 고대 에트루리아 지방의 유서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회적으로는 ‘원로원 계급’에 다음가는 지위인 ‘기사 계급’에 속해 있었다. 나이는 아우구스투스보다 한두 살 위였던 것 같다.




다만 아그리파와 다른 점은 아우구스투스와의 만남에 카이사르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필리피 회전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 무렵 아직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린 아우구스투스는 21세가 될까 말까 한 나이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는 전쟁터를 맡기고, 마이케나스에게는 외교를 맡겼다.




기원전 42년에 브루투스를 쳐부순 뒤, 기원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쳐부술 때까지 10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한 팔로 일관한 마이케나스의 활약상은 눈부실 정도였다. 우선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애쓰는 한편, 그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아들과 타협을 연출한다.




권력자의 뜻을 받들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려면, 공직을 갖고 있는 게 오히려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마이케나스는 공직 경력을 모두 희생했다.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가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도 마이케나스는 여전히 공식 직함도 실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면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는 마이케나스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비밀 교섭 역할을 폐업한 마이케나스에게 문화와 홍보를 맡겼다. 이것 또한 마이케나스에게는 딱 알맞는 역할이었다. 후세에 문화 예술을 옹호하는 것을 ‘마이케나스’, 프랑스어로 ‘메세나’라는 말로 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래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다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으로 이집트에 토지를 사서 큰 부자가 된 마이케나스는 그 재산을 문화 육성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시인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라틴 시문학의 거장으로 불리게 된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잘 알려져 있다.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를 비롯하여 마이케나스의 살롱에 드나드는 문인들이 아우구스투스가 수행하고 있는 ‘팍스 로마나’의 ‘홍보’를 맡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가고 있는 신생 로마를 기쁨과 긍지를 담아서 노래했다.




마이케나스가 죽자, 호라티우스는 자기가 죽으면 마이케나스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고, 이 유언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또한 전 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남긴 마이케나스를 본받아, 마이케나스한테 받은 산장도 황제에게 유증했다.




게르만




이 무렵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처음으로 카이사르가 남긴 표지를 어기는 정책에 착수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북쪽 방어선을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 사이에 낀 광대한 게르마니아 지방(오늘날 독일의 대부분 지역)과 거기에 사는 게르만족을 제압하여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엘베 강과 도나우강을 잇는 방어선을 확립하는 데 성공하면,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잇는 방어선에 비해 500킬로미터나 방어선을 단축할 수 있다. 로마군의 게르마니아 원정은 기원전 12년에 시작되었다. 도중에 자주 중단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기 9년, 최종적으로는 서기 16년까지 계속되었다. 서기 9년까지라 해도 무려 20년 동안 게르만족과 대결하는 상태에 있었던 셈이다.

 

 

 

게르마니아 원정이 시작된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을 맡게 된 것은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였다. 의붓아버지와 의붓아들들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하지만 핏줄에 집착하는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의 자식이라 해도, 의붓아들들을 ‘양자’로 삼지는 않았다.




맏아들 티베리우스는 키케로의 친구이자 편지를 주고받은 상대로도 유명한 아티쿠스의 손녀 빕사니아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기원전 12년에는 한 살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티쿠스의 딸은 아그리파의 첫 아내였으니까,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과 결혼한 셈이다.

 

 

 

둘째 아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안토니아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결혼에서는 2남 1녀가 태어났다. 안토니아는 옥타비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도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혈통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견해이기도 했다.




이런 견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다시 과부가 된 외동딸 율리아의 세 번째 배필로 드루수스가 아니라 티베리우스를 골랐다. 드루수스는 질녀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아무리 아그리파의 딸이라 해도 자기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소원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사내아이를 되도록 많이 얻는 것이었다. 최고 권력자 아우구스투스의 강요와 어머니 리비아의 권유에 티베리우스는 저항하지 못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다.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형은 도나우강 방어선을 확립하는 일을 맡았고, 동생은 라인강에서 엘베 강으로 방어선을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양쪽 다 미개한 민족을 제패하는 어려운 원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시작하기 전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수수하지만 착실하게 도나우강 이남을 제압해가는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전선은 작전부터 화려했다. 북해에서 남쪽으로 쳐들어가는 전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트라이에크툼(오늘날의 위트레흐트) 근처에 운하를 파서 라인강과 에이셀만을 연결하고, 선단에 병사들을 태워 우선 바다로 빠진 다음 라인강보다 더 동쪽에서 북해로 흘러드는 엠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게르마니아의 심장부에 상륙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래도 기원전 12년의 이 진격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엠스강 중류에 상륙한 드루수스 군대는 엠스강 동쪽을 흐르는 베저강에 도달했다. 게르만 부족들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베저강까지 진격한 것이다. 게르만족도 남방 민족인 로마인이 이런 전술로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게 분명하다.




이듬해인 기원전 11년, 젊은 장군 드루수스는 진격로를 바꾸었다. 라인강 연안의 기지 장텐에서 라인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에도 로마군은 게르마니아의 심장부에 도달했다. 베저강 중류에서 겨울철 숙영지인 라인강 서쪽 기지로 돌아올 때는 다시 루트를 바꾸어,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0년, 드루수스는 드디어 최종 목표인 엘베 강까지 2년 만에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겨울에도 라인강까지 돌아오지 않고, 게르마니아의 심장부에서 겨울을 나는 작전이었다. 기원전 10년, 드루수스는 28세의 나이로 처음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만큼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인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행정개혁




한편 수도 로마에서는 53세의 아우구스투스가 32세의 티베리우스와 28세인 드루수스 형제의 진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본국 이탈리아의 행정조직 개편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재편성을 단행할 때, 아우구스투스의 기본방침은 전체를 동시에 향상시키려 하기보다는 몇 개의 ‘핵’을 확립하여 그 ‘핵’만 중앙 정부가 통제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요즘말로 하면 ‘민간 활동’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북쪽의 알프스에서 남쪽의 메시나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반도, 즉 로마 제국의 본국을 11개 ‘주’(州)로 분할했다. 자를 대고 줄을 긋는 식의 분할이 아니라, 부족과 전통 및 풍습의 차이도 배려하여 이루어진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는 분할이었다. 오늘날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다. 단지 인구가 늘어 18개주가 되었을 뿐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주’ 분할은 중앙집권의 효율적 기능을 지향하는 동시에 지방분권을 확립하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 균형을 중시하는 로마인의 방식을 보여주는 예이고,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공존시킨 것은 효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를 14개의 ‘구’(區)로 분할했다. 공화정 시대에는 4개 선거구밖에 없었던 수도 로마의 선거구가 14개로 늘어난 것은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민의 거주지역이 도심부에서 주변 지역으로 넓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 구의 면적이 다르게 획정된 것도 거기에 사는 유권자 수를 고려하여 구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수도’(카푸트 문디)가 된 로마는 이제 인구 100만 명의 도시다. 치안 문제를 방치해두면, 각자가 자위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많은 임시직을 상설화한 아우구스투스는 경찰도 상설기관으로 만들었다. ‘경찰청장’(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집정관 경험자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관직으로 여겨졌다는 증거다.




아우구스투스는 ‘소방청’(프라이펙투라 비길룸)을 설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방관은 7개 대대로 조직되었고, 1개 대대의 구성인원은 1천 명이었다. 수도 로마의 14개 구를 7개 대대가 맡았으니까, 1개 대대가 2개 구의 소방을 맡은 셈이다. 소방관으로는 해방노예가 많이 채용되었고, 소방대장에는 로마 군단에서 백인대장을 지낸 사람이 만기 제대한 뒤에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방청장에는 원로원 의원이 취임하는 예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드루수스의 죽음




기원전 9년으로 해가 바뀌자마자, 4년 전에 착공한 ‘평화의 제단’이 완성되었다. ‘평화의 제단’ 남쪽 벽면은 황제와 그 가족을 묘사한 돋을새김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거기에 새겨진 황제 가족 가운데, 그날의 제전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둘이었다. 한 사람은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그리파다. 그에게 ‘평화의 제단’은 묘비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머나먼 게르마니아 땅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드루수스였다.

 

 

 

게르마니아 전선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여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염원이었던 ‘로마군이 엘베 강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전선을 이끄는 드루수스는 이제 겨우 29세에 불과했다. 게르만족 정복은 전투에 서툴기로 유명한 아우구스투스가 전투의 달인인 카이사르의 결정에 거역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다른 어떤 전선보다도 게르마니아의 상황이 걱정이었다.

 

 

젊은 장군 드루수스의 군사적 재능은 역시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선 4년 동안 세 차례의 진격을 한 번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지 않았다. 또한 출발 지점도 세 번 다 달랐다. 마지막 원정의 출발점은 라인강 연안의 모곤티아쿰(오늘날 독일의 마인츠)이었다. 이것은 출발 지점에 대한 게르만족의 공격을 피하고, 도중에서 기다렸다가 로마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게르만족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불의의 사고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한창 행군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개선 군단을 이끌고 있던 드루수스가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단순한 낙마가 아니었다. 군의관이 드루수스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대담한 처치를 취했다면, 적어도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낙마 사고로 부러진 다리는 금세 악화되었다. 결국 적에게 등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젊은 장군은 네 살 위인 형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드루수스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부하 장병들은 게르마니아 땅에 총사령관도 함께 묻기를 원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도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는 데 동의했다. 장병들이 교대로 짊어지고 나아가는 관 옆을 티베리우스는 말도 타지 않고 걸어서 따라갔다. 파비아부터는 관을 마차에 싣고, 아우구스투스가 탄 마차가 그 뒤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

 

 

 

티베리우스는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파비아에서 동생과 영결했다. 티베리우스는 곧장 라인강 방어선으로 돌아갔다. 드루수스의 죽음은 게르만족도 알았을 게 분명하다. 겨울에는 그들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지만, 봄이 되면 공세로 나오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일단 정지 상태에 있는 도나우강 전선은 잠시 놓아두고,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는 임무가 티베리우스에게 맡겨졌다. 이리하여 ‘평화의 제단’은 완성되자마자 두 공헌자의 묘비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은퇴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자식 중에서도 형 티베리우스보다 동생 드루수스를 더 사랑했다고 한다. 폐쇄적인 성격의 아우구스투스가 개방적인 드루수스를 더 좋아했다 해도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갖는 자연스러운 경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유능하다는 점에서는 티베리우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드루수스는 핏줄을 잇는 데 집착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좋은 협력자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을 잇는다는 점에서 티베리우스는 전혀 좋은 협력자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당하고 황제의 외동딸과 재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결정적인 면에서 부부는 서로 맞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도 훗날 그의 언행이 보여주듯이 로마 제일의 명문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는 겨울철 휴전기를 이용하여 수도로 돌아온 티베리우스를 기원전 7년의 집정관에 추천했고, 티베리우스는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봄이 되자마자 다시 게르마니아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동방의 아르메니아 왕국이 다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동방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이 좋은 동생을 잃고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던 티베리우스는 이 명령을 받고, 난생처음 중대한 결심을 했다. 36세의 티베리우스가 57세인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거부하는 동시에, 한 개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격분했고 공직을 버리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선고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굴하지 않았다. 어머니 리비아가 아무리 설득해도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도망치듯 수도를 떠난 티베리우스는 그 길로 로도스섬으로 건너갔다. 자발적인 은퇴였다. 혼자 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내 율리아와는 사실상의 이혼이었다. 57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광대한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로마인 이야기 6권

팍스 로마나 - 아우구스투스 통치 후기

 

 

제3장 통치 후기

기원전 5년~기원전 19년(58세~44세)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5년, 58세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아무래도 초조했는지 모른다. 그해에 첫 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성년식을 올릴 나이인 15세가 되었다. ‘징검다리’가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갓 성년식을 올린 가이우스가 5년 뒤에는 집정관에 취임할 수 있도록, 그를 예정 집정관으로 승인해줄 것을 원로원에 요청했다. 이는 누가 보아도 세습제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행보였다.




둘째 손자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도 15세가 되자마자 ‘예정 집정관’에 앉히고, 원로원에 의석을 마련해주고, 제사장으로 임명했지만, 이 두 소년의 존재를 일반 시민들에게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총재’로 하는 소년단(유벤투스) 창설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도화한 ‘유벤투스’는, 신체단련과 협동정신 습득을 목표로 내건, 9~17세 소년들로 구성된 단체 이름이었다.




2년이 지났다. 황제인 할아버지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전국적인 민간 조직인 ‘소년단(유벤투스)’ 전체의 총재와 부총재 자리에 앉혀 대중에 대한 지명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사이, 그들도 어느덧 17세와 14세가 되었다. ‘소년단’ 제도는 아우구스투스의 뛰어난 조직력을 보여주듯 계속 활발하게 보급되었다. 그런데 60대에 접어든 아우구스투스를 괴롭힌 문제는 그와 가장 가까운 혈육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것도 아우구스투스의 ‘자업자득’이었다.

 

 

딸 율리아의 추문




율리아는 기원전 39년에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와 스크리보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크리보니아는 폼페이우스가 남긴 아들의 장인의 누이였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은 한창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던 그 당시 폼페이우스파와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한테 이혼당한 어머니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가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리비아한테 아들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아가 14세가 되자마자 누나 옥타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마르켈루스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18세 소년과 14세 소녀의 결혼생활은 소꿉장난 같은 것이었는지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고, 마르켈루스는 2년 뒤에 죽어버렸다.




16세에 과부가 된 율리아는, 2년 뒤 아그리파가 오리엔트에서 귀국하자, 아버지의 ‘오른팔’인 그와 재혼했다. 42세와 18세에 시작된 결혼생활이었다. 9년에 걸친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은 3남 2녀를 낳아 아우구스투스를 기쁘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결혼도 아그리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나버렸다.




율리아의 세 번째 남편은 계모 리비아가 데리고 온 아들 티베리우스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친딸 율리아의 남편으로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 중에는 리비아가 강력하게 요구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친아들을 재혼한 남편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1세의 남편과 28세의 아내는 나이에서는 잘 어울렸지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가 강요로 이혼한 전처 빕사니아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귀족적인 티베리우스는 품성에 결함이 있는 율리아의 행동거지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불만을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보였다면 그래도 낫지만, 티베리우스는 냉정하게 뿌리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율리아에게 유일한 말벗이 될 수 있었을 고모 옥타비아는 율리아가 두 번째 남편 아그리파를 잃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혼도 하지 않은 채 남편에게 버림받은 율리아는, 리비아가 관장하는 집안에서도, 세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쏠리는 집 밖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도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율리아에게는 그런 자제력이 부족했다.




황제의 외동딸 율리아의 행실이 언제부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율리아가 37세였던 기원전 2년에는 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이 문제를 확실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딸을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 떨어진 외딴섬 판다탈리아(오늘날의 벤토테네)에 종신 유배하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도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판다탈리아섬은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외딴섬으로 남아 있다. 면적이 1.3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섬은 전체가 황무지여서 경작지로 가꿀 수도 없었던 탓인지, 시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몇 년 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율리아의 유배지는 판다탈리아섬에서 레조로 옮겨졌다. 레조는 장화 모양을 한 이탈리아반도의 발부리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다.




어디까지나 국법에 충실한 아우구스투스는 레조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장에서 사실상의 연금생활을 하는 것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서기 14년, 아버지보다 몇 달 뒤에 율리아도 죽었다. 판다탈리아섬과 레조를 합하여 16년에 걸친 유배생활 끝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국가의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한동안 원로원에도 출석하지 않고 대중 앞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친딸의 행실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남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백성은 황제가 건강하지도 않은 몸으로 의지할 사람도 없이 국사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사람이 딸의 행실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남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있다. 전국에서 황제에 대한 동정심이 높아졌다.




시민운동에 떠밀린 것처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원로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간청했다. 거기에 응하여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낸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우스 메살라가 원로원과 로마 시민 전체를 대표하여 말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여, 우리는 당신과 당신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국가와 수도 로마의 평화를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원로원은 국민의 합의를 얻어, 여기서 당신에게 ‘국가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칭호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립한 원로원 의원들이 일제히 “국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하고 합창했다. 61세의 황제는 감격의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얻은 영예 가운데 아우구스투스가 아직 얻지 못한 것은 ‘국부’의 영예뿐이었다.




외손주들의 죽음




하지만 모든 로마 시민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는 가정의 불행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서기2년에 18세의 손자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식이 마르세유에서 날아 들었다. 17세를 맞이한 지난해 군무 경험을 쌓기 위해 에스파냐로 파견되었지만, 에스파냐로 가는 길에 마르세유에서 장기간 머물다가 병에 걸려 18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64세를 맞은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심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방을 외교적으로 평정하라고 보낸 큰 손자 가이우스 카르사르 역시 아르메니아 폭동 진압에 실패하여 아르메니아에서 도망친 뒤에 소아시아 각지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서기 4년 2월 20일에 소아시아 남서부의 리치아에서 죽었다. 칼에 찔린 상처가 악화하여 병사했다고 한다. 23세도 채 되기 전의 죽음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66세에 자기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 후보를 모두 잃어버렸다.




티베리우스의 복귀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장례를 끝내자마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가 양자로 승격한 것을 안 세상 사람들은 자기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를 모두 잃은 아우구스투스가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 피가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선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66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아마 안심하고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안을 느꼈다면, 티베리우스에게 양자 자리와 ‘호민관 특권’과 ‘내각’의 상임위원 자리를 거의 동시에 안겨줄 리가 없다. 한 가지를 주고 나서 상황을 보고, 잠시 후에 또 한 가지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마치 결정은 끝났다는 듯이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것은 누구의 억측도 허용치 않는 과감한 조치였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는 동시에, 동생 드루수스가 남긴 아들을 양자로 맞아들였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의 조카인 당시 18세의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하여 낳은 딸 안토니아의 아들이므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조카딸의 아들로 손자뻘이 된다.

 

 

 

45세가 되어 전선에 복귀한 티베리우스의 원숙함은 게르마니아 전쟁을 추진하는 방식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티베리우스 진영에는 18세의 게르마니쿠스도 참가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의 다음 후계자로 결정한 청년이다. 이 젊은이의 본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지만, ‘게르마니쿠스’라는 통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애초에 게르마니아 원정을 맡은 드루수스가 요절한 뒤에 이 별명으로 불리게 된 것을 그 아들이 물려받았다.




게르마니아 전선은 사실상 1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곳을 제압하려면 라인강이라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원정의 최종 목표는 아우구스투스가 바란 대로 라인강에서 엘베 강까지의 게르마니아 전역을 제압하고, 로마 제국의 방어선을 라인강에서 엘베 강으로 옮기는 데 있었다.




원정 첫해




게르마니아에는 큰 강이 네 개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열거하면 라인강, 엠스강, 베저강, 엘베강이다. 네 강이 모두 북해로 흘러든다. 다시 시작된 게르마니아 원정 첫해인 서기 4년, 티베리우스는 전군을 둘로 나누었다.




60세가 넘었지만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부장 사투르니누스에게는 라인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동쪽으로 쳐들어가는 길을 맡긴다. 네 강의 상류를 모두 제압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제1군은 하류에서 라인강을 건넌 다음, 전투를 계속하면서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동쪽으로 진격하는 길을 택했다.




서기 4년의 전쟁은 12월까지 걸리긴 했지만,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다. 엘베 강을 빼고는 게르마니아 땅을 흐르는 중요한 하천이 모두 로마군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티베리우스는 이 승전보를 가지고 수도로 돌아왔다.

 

 

 

원정 2년째




원정 2년째인 서기 5년의 전쟁은 지난해보다 훨씬 화려한 전과로 끝났다. 로마군은 다시 14년 만에 엘베 강에 도달했다. 엘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해군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하는 육군의 공동투쟁 전선이 티베리우스가 바란 대로의 성과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종군한 파테르쿨루스의 붓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로마군이 발자국을 찍지 않은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로마 진영에 투항한 부족들 중에는 지금까지 로마군과 싸워본 적도 없는 엘베 강 동쪽의 랑고바르드족까지 끼어 있었다. 로마 군단과 은독수리 깃발은 라인강에서 동쪽으로 400마일(로마마일, 약 600킬로미터)이나 떨어진 엘베 강까지 포함한 게르마니아 전역을 제패했다.”




마르코마니족




하지만 게르만족이 모두 투항한 것은 아니다. 한 번 싸워서 패배한 뒤 다른 방법으로 살아남을 길을 찾은 부족도 있었다. 바로 마르코마니(Marcomanni)족이었다. 이 부족의 지도자인 마로보두스는 소년 시절에 로마의 인질이 되어 아우구스투스의 친척집에서 지낸 경험이 있었다. 게르만족 중에서는 드물게 로마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질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로마와 싸우기보다는 다른 땅으로 이주하여 자기 부족을 존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땅에서 남쪽에 도나우강이 흐르는 보헤미아 땅으로 이주했다. 부족 전체를 이끌고 이주한 시기는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가 엘베 강에 도달한 기원전 9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후 14년 동안 달성한 마로보두스의 업적은 눈부실 정도였다. 보병 7만 명과 기병 4천 명은 모두 로마 군단식으로 조직되어, 로마식 전법을 습득했다. 마로보두스는 왕을 자칭하며, 로마의 중앙 정부와 외교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로마와 정면 충돌은 피한다는 방침을 고수한 모양이다.

 

 

하지만 로마가 이 게르만족의 한 부족을 방치해두는 위험을 깨닫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였다. 또한 그들 세력권의 남쪽 경계와 이탈리아의 거리는 35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서기 6년, 게르마니아 제패는 끝났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투스는 이 마르코마니 부족을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서기 6년 봄을 기다려 북쪽으로 진격하려 할 때, 그 배후인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반란




이곳은 티베리우스가 로도스섬으로 은퇴하기 전에 제패한 뒤, 로마화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던 지방이다. 로마식 가도망을 건설하고, 요지에 개발의 ‘핵’이 될 식민도시를 세워 퇴역병들을 이주시켰다. 로마는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반도와 마주 보고 있는 이 지방의 로마화에 대단한 열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지형으로 유명한 이 지방은 그때까지 한 번도 문명을 누린 적이 없었고, 말을 타고 산야를 달리거나 말에 짐을 싣고 운반하는 수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루아침에 고속도로망의 효율성을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군제개혁에 따라, 명칭은 ‘보조병’이지만 ‘군단병’과 거의 같은 수의 현지인 병사도 상비군으로 편성되어 로마 시민병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제까지의 적에게 무기를 들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위험은 항상 내재했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의 수는 8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보병이 20만 명, 기병이 9천 명이다. 대부분 로마군 '보조부대' 출신이다. 반란을 일으킨 이 두 지방의 지도자들은 보헤미아의 마르코마니족과 공동투쟁전선을 펼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란군은 우선 그 땅에 사는 로마인을 피의 제물로 바치고, 이어서 로마군 주둔지를 습격했다. 로마식 전략까지 익힌 지휘관은 반란군을 삼분하여, 1군은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땅을 확보하고, 2군은 남쪽의 마케도니아를 침공하고, 3군은 이탈리아 북동부로 침입하여 전선을 확산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으로 달려가, 적이 수도에서 열흘 거리에 있다고 말하면서 긴급대책을 호소했다. 원로원도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병사의 긴급 모집과 그를 위한 자금 염출을 결의한 원로원은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는 로마군 최고 책임자로 티베리우스를 임명하라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요구했다.




48세가 된 티베리우스는 손에 쥔 ‘절대지휘권’을 활용한다. 공격 대상이었던 마르코마니족의 왕 마로보두스에게 밀사를 급파하여 우호조약을 맺어버렸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의 반란군이 기대하고 있던 마르코마니족과의 공동투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어버렸다.




북쪽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티베리우스는 휘하의 5개 군단을 모두 반란군 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티베리우스에게 강력한 원군이 나타났다. 도나우강 하류 일대를 영토로 삼고 있는 트라키아 왕이 몸소 기병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다. 트라키아 기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부터 유명하다.




로마인은 싸움을 걸어오는 것 자체는 죄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로마의 패권을 일단 받아들여놓고, 그 협약을 깨고 반기를 든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반란군도 이것은 잘 알고 있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필사적인 반란군의 분투로 말미암아 점점 더 처참하고 잔혹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싸우기 어려운 지형에서 필사적으로 맞서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부하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전사자는 한 사람도 방치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로마식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에 반해 티베리우스 자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줄곧 말을 타고 다녔다. 휴식도 희생한 셈이다.




반란 첫해인 서기 7년과 서기 8년은 전역으로 확산된 수많은 전선에서 20만 명의 반란군과 6만 명의 로마군이 격투를 벌이는 가운데 숨가쁘게 지나갔다. 그렇긴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참(영어 Logistic, 라틴어 Logista) 면에서의 우열이 효과를 나타내는 것도 분명했다. 그 무렵 또다시 집안에서 일어난 불상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족의 불상사




70세를 맞이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외동딸 율리아가 낳은 직계 손자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바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다.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이 외손자도 양자로 삼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양자로 삼았다는 것은 후계자 대열에 포함시켰다는 뜻이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삼은 서기 4년,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서열과 그들의 나이는 다음과 같다.

“1순위:티베리우스(45세), 2순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15세), 3순위: 게르마니쿠스(18세)”



게르마니쿠스가 나이는 두 번째지만 후계자 서열에서는 세 번째로 되어 있는 것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고,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의 양자였기 때문이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율리아의 유배




당연한 일이지만, 반란 진압 첫해인 서기 7년에 18세가 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도 옛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손자를 전선에 보내지 않았다. 아니, 보낼 수가 없었다.




황손의 난폭한 행동을 아무도 감당할 수 없게 된 서기 7년, 외할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가 이 손자를 유배 보낸 곳은 판노니아 전선이 아니라 훗날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해진 엘바섬에서 남쪽으로 14킬로미터 떨어진 프라네시아(오늘날의 피아노사)섬이었다.

 

 

이듬해인 서기 8년에는 외손녀 율리아도 섬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유배당한 이유는 어머니 율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남자관계였다. 혈육의 법률 위반을 방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강한 책임감 때문에 육친의 불상사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섬으로 유배되었을 당시 서른 살도 안 되었던 외손녀 율리아는 로마의 명문 귀족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무리 행실이 나쁘다 해도, 그 자식들한테서 떼어내어 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니, 70세가 넘은 황제의 분노와 수치심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는 체념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직계 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자란 아그리피나를 게르마니쿠스에게 시집보냈다. 두 사람은 육촌 남매 사이다. 이 결혼에서는 3남 3녀가 태어나게 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이고, 칼리굴라의 누이동생은 제5대 황제인 네로를 낳는다.

 

 

 

시인 오비디우스




서기 8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율리아가 받은 유배형은 시인 오비디우스의 유배형이라는 부산물을 낳음으로써 라틴 문학사상 큰 사건이 되었다. 쉰 살이 넘은 시인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떨어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도나우강이 흑해로 흘러드는 부근에 있는 토미(오늘날 루마니아의 콘스탄차)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제시된 죄목은 『사랑의 기술』(아르스 아마토리아)이라는 시집을 펴낸 것이었다. 언론 통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로마에서 문인이 추방된 것은 오비디우스가 처음이었다. 진상은 두 당사자가 말이나 글로 밝히지 않았고, 고대의 어느 누구도 확실한 사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기술』 제1권과 제2권은 어떻게 행동하면 여자를 정복할 수 있는가를 남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제3권은 어떻게 하면 남자를 정복할 수 있는가를 여자들에게 가르쳐준 작품이다. 세 권 모두 실례를 들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쓰여 있다. 하지만 절대로 포르노그라피는 아니다.




판노니아-달마티아 평정




한편 판노니아-달마티아 전선에서는, 서기 9년 여름에는 이미 판노니아 전역이 로마군에 굴복했다. 배가 고파서 쓰러질 것 같고 군복도 누더기로 변한 반란군은 주모자 두 사람을 앞세워 항복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달마티아 지방도 강화를 요구해왔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완전히 평정했다는 소식은 당장 수도의 아우구스투스에게 전해졌다. 로마는 평화가 돌아온 것을 환영했고, 71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지난 1~2년 동안 일어난 집안의 불상사도 잊어버릴 만큼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며칠 지나지 않아 게르마니아 땅에서 참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숲은 게르만의 어머니'




티베리우스가 엘베 강에 도착하여 게르마니아 정복을 끝낸 서기 6년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군사력으로 제패하는 시기는 끝났고 정치력으로 로마화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속주 통치 경험이 풍부한 퀸틸리우스 바루스에게 그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문제는 바루스가, 로마의 직접 통치를 시행하기 전에 얼마 동안 중간 단계를 두는 카이사르 방식이 아니라 군사력으로 제패한 바로 이듬해부터 아우구스투스 방식의 직접 통치를 실시한 것이었다. 군인이라서 정치적 감각은 별로 없었던 파테르쿨루스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루스는 미개지에 파견된 군단 사령관이라기보다 문명도가 높은 도시를 다스리도록 파견된 관선 지사처럼 행동했다.”

 

 

 

이런 인물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 게르만 부족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군사력 앞에 굴복한 굴욕감에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통치 방식에 따라 그때까지 누려온 권력마저 빼앗긴 불만이 겹친 상황이었는데, 마침 그 무렵 게르만족 지도자들의 이런 감정에 불을 붙이려고 생각한 인물이 게르마니아에 출현했다.




아르미니우스는 기원전 16년에 게르만의 한 부족인 케루스키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났다니까, 서기 9년에는 25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서기 4년부터 시작된 티베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침공기에 케루스키족도 로마에 굴복했고, 스무 살의 아르미니우스도 로마 치하에 들어간 다른 부족의 지도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군의 ‘보조부대’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당장 두각을 나타낸 듯, '보조부대'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위에까지 출세한다. ‘보조부대’라도 지휘관에게는 복무하는 동안 시민권을 주었다. 아르미니우스도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에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되었다. 이 게르만 젊은이는 곧 ‘기사 계급’으로 승격했다.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가 뒤에서 공작을 꾸미고 있다는 다른 부족장들의 충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만큼, 이 게르만 젊은이를 신뢰했다. 서기 9년 겨울이 가까워질 무렵 카티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바루스는 안전한 길을 버리고 삼림지대로 들어가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숲은 게르만의 어머니’라고 게르만족은 호언한다. 2천 년 전의 게르마니아 땅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갈리아의 삼림과는 달리 낮에도 어두운 깊은 숲이다. 그 속으로, 게다가 아르미니우스가 지휘하는 게르만 병사들이 매복해서 기다리고 있는 숲속으로 3만 5천 명이 들어가버렸고, 정예부대인 3개 군단, 기병 3개 중대, 보조병 6개 대대로 이루어진 퀸틸리우스 바루스 휘하의 군대가 전멸한 것이다.




참극이 벌어진 곳은 오스나브뤼크 북쪽에 펼쳐진 토이토부르크숲이었다고 한다. 숲을 빠져나가 라인강 연안의 기지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바루스를 비롯한 지휘관 대다수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여 자결을 택했다. 아르미니우스는 포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로마의 우려와는 달리 게르마니아 전체가 떨쳐일어나 로마에 맞서서 공동전선을 결성하자는 아르미니우스의 호소는 실패로 끝났다. 마르코마니족 족장인 마로보두스 역시 호응하지 않았다. 아르미니우스는 용감하고 대담하고 교활한 자이긴 했다. 그러나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라인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카이사르의 생각에 거역하면서까지 게르마니아 땅에 군대를 진주시킨 71세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통렬한 타격이었다.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는 것은 이제 2개 군단밖에 없다. 판노니아-달마티아 전쟁을 방금 끝낸 티베리우스는 한겨울의 알프스를 넘어 라인강으로 달려갔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노고에는 감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게르마니아 문제에 대한 최종 결단은 내리지 않았다. 로마군 최고 통수권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망설이고 있으면, 전선에 있는 티베리우스도 서기 12년까지 10년 동안 결정적인 행동은 취할 수 없다.




서기 13년부터 게르마니아 전선은 로마로 돌아온 티베리우스 대신 27세의 게르마니쿠스가 맡게 되었다. 게르마니쿠스는 4년 동안 그 임무를 수행했다. 서기 16년, 2년 전에 죽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마침내 게르마니아 땅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방어선은 공식적으로도 엘베 강과 도나우강에서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라인강 동쪽과 도나우강 북쪽에 사는 게르만족은 영국인 학자들이 이따금 심술궂게 말하는 ‘제국 밖의 야만인’으로 남게 되었다.




서기 17년, 아르미니우스에게 패한 마로보두스는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무렵에는 이미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을 완전 철수시킨 뒤였다. 그래서 군사 원조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의 협약을 끝까지 지킨 게르만 부족장의 신의에 보답했다. 라벤나의 저택을 제공하고, 생활비를 보장한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이나 같은 게르만족의 다른 부족을 상대로 싸우면서 파란만장한 8년을 보낸 뒤, 어느 부족과 싸우다 입은 상처가 악화하여 서기 21년에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37세였다. 19세기 이후, 독일인들은 아르미니우스가 게르만족의 자유와 독립을 지킨 사람이라 하여 영웅시하고 있다. 게르만어로는 헤르만(Herman)이고, 헤르만은 전사(戰士)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서기 14년 여름,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를 떠나 가마에 흔들리면서 아피아 가도를 천천히 남하하고 있었다. 나폴리에서 열리는 체전에 참석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 전후를 바닷가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77세를 눈앞에 둔 늙은 황제의 여름 휴가에는 71세의 아내 리비아도 동행했다.




그후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재편성하기 위해 아피아 가도를 지나 브린디시로 배를 타러 가는 티베리우스를 중간쯤에 있는 베네벤토에서 배웅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나폴리로 향했다. 그해 여름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남하하던 티베리우스가 급히 불려왔다.

 

 

 

티베리우스와 단둘이서 병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평생 동안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평온하고 조용한 죽음이었다. 서기 14년 8월 19일, 77세 생일을 한 달 앞둔 날이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연설을 한 사람은 당시 26세인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였다. 게르마니쿠스가 있었다면 그가 했겠지만, 28세의 게르마니쿠스는 아직 게르마니아 땅에서 싸우고 있었다.




며칠 뒤, 여제사장에게 맡겨져 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이 원로원에서 개봉되었다. 상속인 가운데 맨 위에 적혀 있는 사람은 티베리우스였다. 그에게는 유산의 3분의 2를 주고, 아내 리비아에게는 나머지 3분의 1을 주었다. 상속서열 제2위는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와 게르마니쿠스,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원로원과 민회는 반세기 전에 카이사르를 신격화했듯이 아우구스투스도 신격화하기로 결의했다.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한, 로마인이 그를 부를 때의 명칭은 ‘신격(神格)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로마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프랭크 애드콕(F. E. Adcock) 교수는  『케임브리지판(版) 고대사』에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한 사람이 통치하는 국가 형태는 그 시기의 로마에는 정치적 필요가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 같은 압도적 두뇌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세계는 바로 그와 같은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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