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의 위기
군인 황제 시대의 개막
본래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로마 황제는 법적으로 확실한 지위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프린켑스와 임페라토르, 호민관 특권을 교묘히 뒤섞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의 계승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혈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지만 아우구스투스를 이은 티베리우스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였고 오현제 시대에도 능력이 뛰어난 인물을 양자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황제 계승이 이어진 것처럼 반드시 전임 황제의 혈통일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네로와 콤모두스, 카라칼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혈통에만 의존할 경우 폭군이 등장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네로나 콤모두스가 죽은 이후 혈통이 단절되자 그때마다 로마 원로원이 로마 황제를 지명하였지만 결국은 로마 군단장끼리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베스파시아누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자신의 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였는데 이로서 로마 군단의 지지를 받은 로마 군단장이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되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AD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암살되고 세베루스 왕조가 단절되자 이제 차기 로마 황제로 라인강에 주둔한 로마 군단병들은 신병훈련책임자였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추대되는 일이 벌어졌다. 막시미누스는 군단장도 아닌 일개 대대장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연히 속주 총독 경험도 없었고 로마 원로원 의원도 아닌 상태에서 로마 황제로 선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막시미누스 본인 스스로 로마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원로원을 위협하여 승인을 받아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로마 군단병 사이에서 신망을 얻어서 얼떨결에 로마 황제로 추대된 경우였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이로서 로마 황제를 지목하는 권한이 이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로마 군단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3세기부터 북쪽에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게르만족이, 동쪽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왔기 때문에 이를 막아낼 수 있는 군사적인 능력이 로마 황제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이 되면서 전투에서 승리한 전공만 있으면 곧바로 황제 지위를 찬탈하는 군인황제시대의 대혼란이 시작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이름에 붙은 트라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뜻으로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로마 군단의 병사로 입대하였다. 당시는 아직 카라칼라의 '안토니우스 칙령'이 공포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속주민은 로마 군단에 보조병으로 입대하여 20년간 복무하는 것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눈에 띄어 근위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절에는 라인강의 로마군단에서 신병훈련 책임을 맡은 대대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던 중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병사들 사이에서 많은 신망을 얻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살해되자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로마 원로원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했지만 탐탐치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로마군 최정예 서방 병력의 지지를 받는데다, 원로원은 세베루스 왕조 치하 아래에서 나날이 약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도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대대로 트라키아 출신인데다 이민족의 혼혈일지도 모르는 애매한 혈통, 그것도 본인 대에 와서야 보조병으로 복무해 로마시민권을 딴 로마황제였다. 쉽게 말해, 안토니누스 칙령 이전부터 로마인이었어도 변방 태생의 이민족인지 반이민족이 국적취득 후 황제가 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로마 원로원은 쿠데타로 옹립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반(半)야만인이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또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일개 대대장 출신에, 그것도 신병 훈련 교관에 불과한데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승진한 여타 다른 하급장교 출신들과 비교해도 교양이 상당히 부족했다. 그래서 모국어 라틴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막시미누스는 누구보다 교양있고 로마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즉위 후에도 수도 로마에 가기보다는 라인강에 머물며 게르만족 격퇴에만 몰두했다. 어쨌든 병사들의 신망이 좋고 용맹도 뛰어난 만큼 재위 3년 동안은 계속해서 승전보를 수도 로마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3년 동안 국경에서 성공적으로 게르만족를 격퇴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로마 원로원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이유는 막시미누스가 계속 승리한 것이 시샘난 이유가 아닌, 막시미누스 때문에 군자금으로 세금을 뜯어가고 올라오는 승전보고서도 상관이 명령하는 어조로 통보하는 일방통행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르마니아 전쟁 중 부교설치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 일부가 참여한 막시미누스 암살 시도 사건이 벌어지는데, 막시미누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 강하게 대응한다. 또 그는 외적과의 전쟁에 많은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사회복지기금으로 사용될 예산과 무상배급품까지 군자금으로 유용하도록 명한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부유한 북아프리카 지방, 아시아 속주 등 동방 일대에서는 가혹한 세금징수와 약탈에 가까운 수탈에 못 이겨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폭발직전까지 치솟는다.
그러던 중 AD 238년 3월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과 같은 이름의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가 현지 올리브, 밀, 무화과 등을 재배한 대농장 지주들에게 황제로 추대된다. 고르디아누스 가문은 오늘날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의 고르디움에서 기원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클리엔테스 후손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시대때 원로원에 편입된 매우 부유한 신흥 귀족가문이었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총독은 79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제위에 욕심이 있어 미리 황제를 상징하는 보라빛 망토와 장신구 등을 준비한 뒤 카르타고로 들어간다. 이어 그는 황제 추대 직후 그 사실을 로마 원로원에게 통보했다. 또 그는 비밀리에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 여러 인사들과 접촉 후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이를 정당화시켜달라고 로비까지 벌인다. 이 결과,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황제 승인요구서가 로마 원로원에서 낭독되었을 때 원로원 의원들은 대항마로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인정하고 황제로 그대로 승인해준다. 그들이 바로 로마 원로원이 내세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대항마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다. 아울러 원로원은 이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진중에서 전쟁 중 졸지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버림받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분노하여 즉각 군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향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 서둘러 로마로 돌아와 방어에 나서도록 하였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꼬이게 된다. 왜냐하면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인정해줬음에도, 이들 부자의 요구와 달리 자신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누미디아 속주의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면직처리하지 않고 그에게 권고만 취하며 "새 황제들이 당신을 면직처리해달라고 하니, 일단 복귀해달라"고 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원의 판단과 달리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와 카펠리아누스는 총독이 되기 전부터 사적으로 서로 앙숙지간인데다, 북아프리카로 건너온 이후 재판과 행정실무 처리과정에서 이견을 보여 무척 사이가 나빴다. 따라서 카펠리아누스는 원로원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고 반발해, 현직 총독으로서 즉각 대응한다. 이때 누미디아 속주의 로마군은 카펠리아누스의 지휘 아래 AD 238년 4월 아프리카 속주의 카르타고를 공격한다. 이에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카르타고 내 경비병력까지 긁어 모아 북아프리카 일대 로마 최정예 병력과 맞선다. 하지만 이 싸움은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가진 야전사령관 능력과 잘 훈련된 로마군을 상대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전투 중 그대로 전사했고, 카르타고 시는 누미디아 로마군에게 금세 함락된다. 그리고 이때 아들의 전사 소식과 카펠리아누스의 단호한 입장을 전달받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체포 직전 자살해버린다. 이렇게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가 어이없게 몰락하자, 로마 원로원은 상당히 당혹해한다. 다행히 카펠리아누스는 이후 막시미누스 쪽에 붙지 않고 그만 뒀기 때문에 더 큰 소란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국경 근처까지 내려온 상태였고,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승인해준 터라 화해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오래된 명문귀족들로 집정관 경력이 풍부하고, 군대 경험과 행정실무 경력을 두루 거친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한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서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자들의 폭동과 협박에 못이겨, 고르디아누스 1세의 어린 외손자를 고르디아누스 3세에게 카이사르 직위를 내린다.
로마 원로원의 이러한 선택은 고육지책이었지만 의외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로마 원로원을 응징하고자 호기롭게 이탈리아 본토로 들어왔지만 이미 그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최악이었다. 또 막시미누스는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국가의 적인터라 이탈리아 도시들은 남녀노소 힘을 모아 완강하게 저항했다. 따라서 전투가 몇 달 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 병사들도 부대 내 식량이 떨어지고 같은 동포들까지 자신들을 원수 취급하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배신한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로마 황제는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 이외에는 그만둘 방법이 없었고 결국 막시미아누스 트라쿠스는 후계자인 아들과 함께 AD 238년 5월 자신을 추대한 병사들 손에 살해돼 인근에 진을 펼친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에게 그 머리가 전달된다.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부스 아라부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살해당하면서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제는 로마의 공동 황제인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두고 로마 원로원이 두 개의 파벌로 나뉜채 정쟁에만 몰두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비누스는 자신처럼 오래된 명문가 출신임에도 훨씬 많은 공을 세운 푸피에누스 막시무스를 시기했고, 막시무스 역시 자신이 아퀼레이아에서 싸울 동안 치안 유지는커녕 혼란만 가중시킨 발비누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로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개입된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 음모 아래 프라이토리아니가 황궁으로 쳐들어가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둘다 납치하여 살해한다. AD 238년 한 해동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 이어 막시무스와 발비누스까지 살해당하는 혼란이 발생한 끝에 이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황제가 될 당시 1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가 대리 통치하였고 고르디아누스 3세 내각은 티메시테우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동방 출신들이 장악한 섭정 통치방법으로 운영된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 티메시테우스는 자신의 딸을 소년황제와 결혼시켰고, 여러 정적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키운다. 다행히 권신 티메시테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큰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이 시기부터 제국 안에서 자연재해가 터지고 고트족이 다시 침범하는 일 등이 연이어 터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AD 242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가 동방 속주를 다시 공격한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사위인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함께 동방으로 향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파한다. 이후 로마군은 그대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진격하는데, 티메시테우스가 갑자기 사망한다. 따라서 로마군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역습을 허용해야 했고 후원자를 잃어버린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생전부터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해온 또 다른 인사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내준다. 그러나 이 임명 후에도 로마군은 온전히 고르디아누스 3세를 지지하지 않았고, 황제는 AD 244년 페르시아군과 교전 중 살해(전사)된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의문스러운 과정 속에서 죽자, 동방에 있던 원정군 병사들과 프라이토리아니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이름 중 아라부스는 아랍 출신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의 베두인 부족 출신인 아랍인이었다. 필리푸스는 유럽인이 아닌 아랍인 중에도 로마 황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필리푸스도 통치자로서는 무능하지도 유능하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정치력은 나름 있어 로마 원로원과 가급적이면 충돌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고 이를 통해 황제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AD 249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이 도나우강 방어선을 넘어서 침공해오자 이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 데키우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로마 황제가 되었고 이에 절망한 필리푸스는 자살하고 말았다.
데키우스와 갈루스
데키우스는 집정관을 역임한 후 로마 원로원 의원을 지냈고 필리푸스 아라부스에 의해 도나우강의 모이시아를 방어하는 군단장으로 임명받아 고트족을 방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렇게 데키우스는 원로원 의원 출신이라는 점과 고트족을 물리친 전공을 통해서 데키우스는 로마 원로원과 군단병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AD 249년 무능한 필리푸스 황제를 대신한 로마 황제로 추대되어 베로나 근처에서 필리푸스의 군대를 물리친 후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데키우스는 황제가 된 직후인 AD 250년 1월에 내린 포고령을 통해서 모든 로마 시민들은 로마신을 경배하고 신성한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반발하자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이 다시 도나우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범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탄압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고트족을 토벌하러 나서야 했다. 데키우스는 만일 사태를 대비하여 성년이 된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그 중 둘째 아들인 호스틸리아누스를 수도 로마에 남긴 채 큰 아들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나 데키우스의 예상이 불행히도 적중하면서 AD 251년 흑해 연안의 도브루자 늪지대에서 벌어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가 큰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데키우스는 로마 역사상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한꺼번에 사망하면서 호스틸리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지만 고트족을 막아내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로마 군단은 모이시아 속주 총독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갈루스는 로마 황제가 되자 고트족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며 강화를 추진했고 자신의 후임 모이시아 속주 총독으로 아이밀리아누스를 임명한 뒤에 서둘러 수도 로마로 되돌아 가 버렸다. 더욱이 호스틸리아누스가 얼마 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에 갈루스는 아무런 전투없이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는 행운을 얻었고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트족은 갈루스와 강화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AD 253년 대규모로 도나우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처들어왔기 때문에 모이시아 속주의 로마 군단병들이 자신의 지휘관인 아이밀리아누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해 버렸다.
발레리아누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갈루스는 라인강 상류의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발레리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가 뒤늦게 도착한 뒤 아이밀리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세베루스 알렉산드르 재위 시절 집정관을 지냈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절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서 고르디아누스의 반란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또한 갈루스에 의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속주 총독이 되면서 로마 군단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에 이은 두번째로 이상적인 로마 황제 후보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63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중단된 그리스도교 박해정책을 이어받아 카르타고 주교와 로마 주교를 처형하였다.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될 무렵 로마 제국은 북쪽의 고트족이 대거 침입하여 발칸 반도를 유린하였고 동방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도 다시 로마의 동방 속주를 노리기 시작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는 넓은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들인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한 후 제국의 서부지역 통치를 위임하고 그 자신은 동부지역 통치에 전념한 채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비록 초반에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 갔지만 AD 260년 초 갑자기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샤푸르 1세의 회담 제의에 소수의 호위병력만 이끌고 갔다가 포로로 붙잡혀 버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렇게 하여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붙잡힌 로마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어 버렸다.
갈리에누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로부터 공동 황제로 임명된 후 라인강을 넘어오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라마니족을 방어하고 판노니아의 잉게누우스, 일리리쿰의 레갈리아누스가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던 중 발레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는 여전히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방어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포로로 붙잡힌 아버지를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계속된 공격에 서쪽의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연결하는 방어선과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갈리에누스 혼자서 로마 제국의 모든 국경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이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비판받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우선 갈리에누스는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토벌하지 않고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 국경을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로마 제국을 사실상 분할해 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먼저 갈리에누스는 판노니아와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게르마니아의 두 속주 총독로 임명한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라티니우스 포스투무스가 전리품 분배 문제로 갈리아 총독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코르넬리우스 사로니누스와 다투던 중 살해해 버리고 말았는데 그 와중에 갈리에누스의 아들도 죽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포스투무스는 현재의 독일 트리어에 해당하는 아우구스타 트레비로품에 수도를 정하고 갈리아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원로원, 집정관, 호민관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군단병의 지지를 받아야만 황제가 될 수 있는 등 로마 제국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작은 로마 제국에 지나지 않았다. 갈리에누스도 처음에는 갈리아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았고 어차피 포스투무스가 라인강의 방어를 계속 맡아준다면 그 지위가 속주 총독이던 황제이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갈리아 제국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 주기로 결정했다.
비슷한 시기에 동방 속주에서도 발레리아누스의 장군이었던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두 아들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황제로 옹립하자 시리아 팔미라의 귀족인 셉티미우스 오데나투스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마크리아누스를 토벌한 후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오데나투스는 여전히 갈리에누스를 로마 황제로서 대우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데나투스를 로마의 속왕으로 임명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를 제외한 나머지 동방 속주의 방어를 일임했다. 비록 오데나투스는 AD 260년부터 AD 267년까지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으나 AD 267년 승리 축하연에서 큰 아들과 함께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오데나투스의 후처였던 제노비아가 암살범을 죽인 뒤 자신의 어린 아들인 와발라트를 남편의 후계자로 앉히며 실권을 장악하였고 갈리에누스도 이를 인정해야 했지만 제노비아는 남편과 달리 로마의 속왕으로 만족하지 않고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공격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은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동쪽의 팔미라 제국이 분리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갈리에누스는 국경에 주둔한 로마 군단만으로는 기병 위주의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버거워지자 마찬가지로 기병 위주로 편성한 상설예비대를 편성하여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이 예비대는 기동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기병의 비율을 이전에 비해 3배이상 높였고 무어인 경장 기마 투창병과 달마티아 외인 기병 부대, 강력한 복합궁을 사용하는 오리엔트 궁수 부대, 페르시안 장창병대, 쐐기꼴 대형으로 전투하는 게르만계 보병, 낙타부대 등 다양한 병종이 혼합하였다. 이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에 파르티아식 중장기병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카라칼라 황제 시절에는 기병대를 이용한 기동타격대 개념이 등장한 것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아예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를 전통적인 중장보병이 아니라 게르만족이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같은 기병 위주로 변경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실리주의자인 갈리에누스는 기병대장을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던 로마 공화정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전통을 깨고 전문 군인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비록 제정 이후 로마 황제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실권을 모두 빼앗긴 로마 원로원이었으나 문민 행정과 군사를 두루 경험한 사람만이 로마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얻을 수 있어 로마 원로원은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인재양성기관을 역할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기능마저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로마 군단의 중심병과가 중장보병에서 기병으로 변경되면서 지금까지 황제의 후보자 대부분이 군단장이었던 것과 달리 갈리에누스 이후에는 황제 후보자가 기병대장으로 변경되어진다.
마지막으로 갈리에누스는 알라미니족이 라인강을 넘어오자 이를 격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라인강 주변의 국경지역을 내주는 대신에 다른 게르만족을 막아내도록 하였다. 이는 게르만족에게 게르만족의 방어를 맡긴 것으로 로마 제국 스스로 국방의 자주성을 일부 포기했다는 점에서 후대 역사가에게 큰 혹평을 받았고 당대에도 로마 군단 내부에서 갈리에누스가 게르만족 애첩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어쨌든 라인강 방어 임무에서 벗어난 갈리에누스는 도나우강 방향으로 군대를 집중하여 잉겔누우스와 레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게르만족을 도나우강 바깥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동분서주하던 갈리에누스였지만, 그의 단독통치기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빼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 빈축을 샀고, 이는 제국 여기저기에서 반란, 독립 움직임으로 확산된 원인이 됐다. 결국 제국은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이라는 3갈래로 쪼개졌다. 허나 갈리에누스는 제국 통합을 추진하면서도, 자신과 본인 가문, 극소수의 권세가 만을 위해 로마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정책을 잇달아 펼치고 편가르기를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다. 그는 총독들의 반란을 막겠다며 로마 원로원 의원을 로마 군단에서 배제했다. 이어 계속된 국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게르만족에게 국경수비의 일부를 부탁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휘하의 직업군인 출신 장군, 기병대장들까지 불만을 품었고, 이는 갈리에누스 치세 후반부터 반란과 토벌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AD 268년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하자 갈리에누스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 영지이자 이탈리아가 수입하는 밀의 3분의 1 이상을 공급하던 주요 곡창지대였다. 때문에 이를 상실한 것은 갈리에누스의 가장 큰 실책이 되었고, 그나마 그를 따르던 일리리아 출신 기병대장들까지 갈리에누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여전히 자신과 아들들의 승계 작업에 집중하고, 본인 외가와 처가 같은 극소수 가문들에게 권력을 밀어줬다. 이는 원로원 의원들과 갈리에누스에게 소외된 본인의 친척들, 그를 따르던 일리리아 장교 집단이 합심해 갈리에누스를 없애겠다고 마음먹은 원인이 됐다. 따라서 아우레올루스가 총대를 매고 밀라노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리에누스는 그 반란을 거의 진압했음에도 로마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채 살해당했다. 갈리에누스를 제거한 진압군은 그 후임 황제로 기병대장이었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추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이름에 붙은 고티쿠스는 고트족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워서 얻은 칭호였다.
갈리에누스가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로마 원로원은 명령을 내려 갈리에누스의 막내아들과 아내를 처형하고, 갈리에누스 외가와 처가 식구들도 살해했다. 이때 갈리에누스의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가 억울하게 함께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소 발레리아누스의 친모와 소 발레리아누스의 유가족들에 대한 보복을 금지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갈리에누스가 추진한 개혁 중 문제가 많은 부분을 되돌리거나 손보면서, 원로원과 협력해 무너져가는 제국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트족이 침공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포로가 된 고트족 남자 중 젊고 건장하면 로마 군단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무장 해제 후 황폐화된 모이시아 속주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전임자인 갈리에누스가 단순히 알리마니족에게 라인강의 방어를 일임한 것과 달리 어디까지나 로마의 통제를 받는 범위내에서 정착을 허락한 것으로 정착할 토지를 얻은 고트족은 더이상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땅을 지키려고 자발적으로 싸우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정책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자신은 재위 1년 반만에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아우렐리아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갑자기 병사하자 로마 원로원은 그의 동생인 퀸틸루스를 황제로 지명하였지만 로마 군단이 이를 거부하고 기병대장인 아우렐리아누스를 자신의 황제로 추대했다. 결국 퀸틸루스는 자결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로 갈리에누스의 기병예비대를 더욱 강화시켜 사산 왕조 페르시아식 중장기병과 팔미라 제국식 궁기병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국경을 넘어오자 이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약탈후 되돌아가면서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총반격을 가하는 전술로 대승을 거뒀다. 비록 초반에는 로마 제국 국경 내부에서의 약탈을 그대로 방관하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약탈한 재물과 사람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진 반달족의 약점을 노렸기 때문에 전멸에 가까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방어전술은 국경에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공격해오면 최대한 안쪽으로 끌어들인 후 해당 속주가 개별적로 방어하는 동안 로마 황제는 기병예비대를 이끌고 게르만족이 후퇴하는 길목을 차단하여 포위섬멸하는 종심방어전술로 변경되었다.
게르만족을 격퇴시킨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을 당장은 적대하지 않는 갈리아 제국을 잠시 놔둔 채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두번째 목표로 삼았다. 팔미라 제국은 사실상 통치하던 제노비아는 뛰어난 미인이자 남성을 능가하는 여걸로서 로마 제국의 내부혼란을 틈타 단기간에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AD 271년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 원정을 시작하자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비잔티움을 함락당했고 이어서 벌어진 시리아의 에메사 전투에서도 패배한 채 제노비아의 아들이자 팔미라 제국의 명목상 통치자인 바발라투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집트 속주들이 로마 제국으로 다시 전향했고 팔미라가 이중 삼중으로 포위당하자 위기에 몰린 제노비아가 낙타를 타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도망치려 했지만 로마 기병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가 로마로 후송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도 철군하기 시작하자 팔미라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되돌아와 팔미라 반란을 진압하고 철저히 약탈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AD 273년 팔미라 제국은 멸망하여 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벌일 때 끌려다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여인이었기 때문에 처형 만은 면하여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팔미라 제국이 무너지자 이제 자연스럽게 아우렐리아누스의 다음 목표는 갈리아 제국이 되었다. 당시 갈리아 제국은 건국자인 포스투무스가 AD 268년 살해된 후 히스파니아가 로마 제국으로 되돌아갔고 이후 즉위한 마리우스와 빅토리누스도 계속해서 살해당하는 혼란 끝에 당시에는 테트리쿠스가 황제가 되어 있었다.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으로 처들어갔고 샬롱전투를 벌이게 되자 갈리아 제국의 테트리쿠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협상을 벌여 갈리아 제국을 넘기는 대신에 신변을 보장받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결국 테트리쿠스가 투항하자 갈리아 제국군은 삽시간에 무너졌고 이렇게 하여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까지 통합하여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테트리쿠스는 당초 약속에 따라 루키니아 총독으로 임명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위 후 단기간에 게르만족을 누르고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서 스스로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 세계 재건자)'라고 부르게 하였다. 또한 그동안 로마는 국경에서 외적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수도 로마에는 아무런 성벽을 세우지 않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 안쪽까지 침범해오는 상황에서 수도 로마의 방어력을 강화시키고자 새로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세우게 하였다. 이 밖에 아우렐리아누스 자신이 시리아의 태양신 종교인 '미트라교'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미트라 신전을 세웠다. 이렇게 내정까지 정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에게 황제가 포로로 붙잡히는 치욕을 안겨 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였다. AD 275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으나 어이없게도 갑자기 부패했던 비서가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자신들을 처형할 것이라는 노예비서 에로스의 거짓말을 믿은 장교단이 암살했다고 한다.
프로부스
아우렐리아누스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사상 초유의 사건 이후 벌어진 혼란과 갈리에누스 암살로 벌어진 국가적 위기를 모두 극복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잔혹한 단점으로 어이없게 암살됐다. 이렇게 아우렐리아누스가 측근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되자, 로마 제국은 무려 5개월간이나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된 끝에 75세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황제로 선택되었다. 타키투스는 로마의 유명한 역사가인 푸블리우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후손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험이 풍부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당시 원로원 안에서 군부와 소통이 가능한 원로였다. 따라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아무도 황제 자리를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황제로 추대됐다. 그럼에도 타키투스의 제위는 불안해, 그는 처자식이 있음에도 전 재산을 기부했다. 타키투스는 즉위 이듬해 시리아로 향했지만 도중에 죽는다. 노환이라는 말도 있고 암살이라는 이야기가 모두 있는데, 이렇게 타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이부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로마 군단은 이를 거부하면서,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직후부터 타의에 의해 차기황제로 추앙받는 장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생전부터 당시 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와 군공과 명성에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 실력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넓은 제국 안에서 모든 적과 싸워 승리한 명장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을 멸망시킨 뒤 동방 일대 치안 안정과 행정 재건 책임을 위해 동방 속주 통치권을 받은 상태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그 재능과 업적은 비슷했음에도, 교양있고 겸손한데다 정치력과 통치력은 한 수 위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는 순수 군인 출신임에도 플로리아누스를 추대한 원로원에게도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원로원과 사이가 상당히 좋았는데 실제 통치 방식 역시 전형적인 로마 황제라서 원로원과 일반 민중들을 존중했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단독황제가 된 이후, 갈리아와 벨기카를 유린한 프랑크족을 격퇴해야만 했고, 서방 일대를 시작으로 도나우 강과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일대까지 돌아다니며 외적을 격파해야만 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민생안정과 경제재건을 위해, 퇴역병과 현역병사들을 공사현장에 투입시키고 밭을 일구게 했다. 또 그는 포로로 잡힌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등을 로마군에 징집하거나 그들을 황무지에 살도록 하면서, 로마인들의 세금부담을 줄인다. 따라서 그는 원로원, 로마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로마 제국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로부스의 이런 통치 방법은 마구잡이로 모든 공사현장에 투입된 일부병사들에게 불만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이런 황제의 결정에 불만을 표했다. 따라서 프로부스는 AD 282년 여름, 페르시아 원정길 도중 고향인 시르미움 근교의 늪지대 매립 공사 감독 도중 일부 병사들이 일으킨 폭동에 휩쓸려 어이없게 암살되고 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장
오랜만에 등장한 훌륭한 황제 프로부스가 어이없게 암살된 직후, 정신을 차린 로마 군 병사들은 크게 후회했고, 애당초 암살에 관여하지 않은 근위대장 카루스는 암살범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게 하며 혼란을 수습한다. 로마 복귀와 페르시아 원정 지속 여부가 논의되는 와중, 로마군은 시리미움에서 원로원 의원이자 근위대장인 카루스를 후임 황제로 추대한다. 이때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강행하기로 결정내렸고, 자신의 즉위 사실을 원로원에게 일방 통보한다. 이어 그는 두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누메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한 뒤 카리누스는 수도 로마로 보내 제국의 서방 방위를 맡기고 그 자신은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제국의 동방 방위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나우강을 넘어 온 게르만족을 격퇴한 뒤 AD 283년부터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유프라테스강의 셀레우키아를 함락시키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티그리스강의 크테시폰마저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카루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즉사하는 사고사를 당했다. 이제 공동 황제이자 카루스의 둘째 아들인 누메리아누스가 원정군을 수습하여 귀환하기 시작하였으나 AD 284년 갑자기 암살된 채 발견되었다. 누메리아누스의 호위 장교인 디아클레스는 유일하게 황제 알현이 허용되었던 누메리아누스의 장인인 아페르를 암살범으로 지목하여 체포하였고 이제 카루스의 장남으로 제국의 서방 방위를 맡았던 카리누스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지만 동방의 로마 군단은 카리누스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디아클레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였다.
황제로 추대된 디아클레스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식인 디아클레티아누스로 바꾸고 카리누스와 대결을 벌이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카리누스 역시 디아클레누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간의 내전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게르만족과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카리누스는 강력한 힘을 보유하여 AD 285년 베네치아의 총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비누스 율리아누스가 황제를 참칭하자 이를 즉각 토벌한 후 모아시아에서 디아클레티아누스의 로마 동방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카리누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장교가 카리누스를 암살해 버리는 바람에 내전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카리누스를 잃어버린 로마 서방군은 디아클레티아누스를 자신의 황제로 인정했다. 그리고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자 전제 군주정과 사두정치를 도입하며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가 좌지우지되었던 군인황제의 혼란을 비로소 종식시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