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베루스 왕조 치하의 짧은 안정
현대 이전까지는 고대 기록을 기준으로 한 18세기 에드워드 기번으로 대표되는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창건자 외에는 주목받지 못한 세습왕조였다. 전통적인 입장에서 세베루스 왕조는 단순한 군사전제정 내지 선군정치를 통한 잔혹하고 전제적인 통치 아래의 질서 등으로 표현되거나, 3세기 군인황제 시대 이전의 일시적 평화기 정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르러 3세기 군인황제시대가 연구되고, 렙티스 마그나를 비롯해 그리스, 터키 일대에서의 유적, 비문, 유물 연구 등을 통해 세베루스 왕조는 재평가되고, 이 시대의 연구를 통해 과거 무결점 수준으로 찬양받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모순 등이 밝혀지게 됐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치하 아래에서 로마 내부 문제 해결이 제시된 부분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훌륭한 행정가, 법률가, 군사령관답게 콤모두스 치하 아래에서 방치된 로마 제국의 문제를 해결했고, 로마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 안정을 누린다. 그러나 왕조의 치세는 짧았고, 창건자 이후 연이어 어린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로마를 안정기로 이끈 세베루스 왕조는 어이없게 무너지게 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콤모두스가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 등에게 갑자기 암살되면서 다시 위기가 시작된다. 라이투스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는 전직집정관으로 군부의 신임을 받던 장군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를 지지하며 그를 황제로 내정했고, 로마 원로원은 이를 통과시킨다. 하지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내의 황족들이 건재하고, 일방적으로 황제 암살자들이 주도한 새 황제 옹립은 공석이 된 황제 자리를 두고 내전이 시작되는 배경을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새 황제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 체제 아래에서 방치된 국가 문제 해결과 비대해진 프라이토리아니 개혁을 시도하다가, 재위 3개월만에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자리를 경매 방식으로 내걸어, 경쟁을 유도해 제위를 팔아치운다. 이때 제위를 움켜쥔 인물이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인데, 그는 페르티낙스의 동료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 아래에서 충신이자 장군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사였다.
율리아누스는 페르티낙스와 비교해, 확실히 유능했지만 제위를 돈을 주고 산 까닭에 민심을 잃었다. 따라서 그는 라이투스가 모반을 일으킨 혐의로 처형했음에도, "돈으로 제위를 샀다"는 이유로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반발하여 각자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면서 로마 제국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판노니아군 사령관 세베루스였는데, 그는 먼저 공동 황제 즉위를 조건으로 브리타니아의 알비누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로 진군한다. 이에 원로원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살해했는데, 로마에 들어온 세베루스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기존의 프라이토리아니를 강제해산시키고 판노니아 출신 병사들을 새로운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으로 완전히 교체한다. 이후 세베루스는 원로원에게 살해당한 율리아누스의 시신을 정중히 유족에게 넘겨 정식장례를 치르게 하면서, 스스로 페르티낙스의 후계자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AD 194년 이수스 전투에서 시리아의 니게르를 대파한 후 마지막으로 AD 197년 2월 리옹 전투에서 알비누스마저 격파하고 단독황제가 되어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하였다.
단독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니게르, 알비누스를 지지하면서 자신을 제거하려고 한 로마 원로원을 손보며, 원로원 내 불안요소를 제거했다. 그러면서 그는 원로원을 인위적으로 개편했다. 표면상 그의 조치는 잔혹했고 그 과정에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같이 억울하게 자결을 명받은 안토니누스 왕조 황족들도 있어 '푸닉술라'라는 악명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억울하게 사형판결을 받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유족들에게는 보복하지 않았고, 재산도 압류하지 않는 등 일정부분 상식선에서 국가를 안정화시키는데 노력했다. 이때 세베루스는 옛 알비누스파 의원들의 재산을 압류해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을 안정화시킨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하고, 황제 자문 및 관료층으로 실무에 능한 기사계급 관료들을 키우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군단의 숫자를 30개로 늘리고 이들에 대한 봉급을 인상하면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면세 특권을 누리던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걷었다. 또한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콤모두스를 신원복구하면서, 스스로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계를 자처해 정치적 선언으로 양자입적을 선언한다. 물론 이 방법은 진짜 안토니누스 가문에 입적된 조치는 아니었다.
그는 부자세습 형태를 정례화하여 로마 내전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자신의 장남 카라칼라를 일찌감치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황제권을 공고히 하였다. 세베루스는 AD 197년 동방 속주를 침공한 파르티아 제국을 공격하여 AD 199년 티그리스 강 근처에서 파르티아군을 물리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AD 210년 칼레도니아(지금의 스코틀랜드) 전역을 재패하고자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였다가 AD 211년 2월 에보라쿰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카라칼라 시대
카라칼라의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였지만,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스스로 안토니누스 가문를 자처하면서 이름을 개명했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공식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였다. 하지만 그는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라는 이름보다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 달린 망토를 개량한 새로운 형태의 망토에서 따온 '카라칼라'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아버지의 최후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대결 당시, 카이사르에 임명되었고 일찍부터 공동황제였다. 그런데 어머니 율리아 돔나와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의 연년생 동복동생 게타에게도 공동황제 자리를 내렸다. 따라서 카라칼라와 게타는 세베루스 생전부터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는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하게 악화됐다. 따라서 세베루스가 요크에서 사망한 이후, 카라칼라와 게타는 칼레도니아인들과 휴전 교섭을 맺고 로마로 귀환한 이후 권력암투를 시작했다.
카라칼라와 게타의 대립은 황궁과 원로원, 법정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형제는 로마 제국을 둘로 갈라 나눌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어머니 돔나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는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죽이기 위해 암살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여러 번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하자 카라칼라는 본인이 직접 게타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동생 게타를 어머니의 방으로 유인한다. 따라서 AD 212년 2월, 게타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형의 손에 살해당한다. 이때 카라칼라는 "동생이 날 죽이려고 했다"며 자신의 패륜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원로원과 군대를 찾아간 다음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그렇지만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게타가 형 카라칼라보다 확실히 인격적이고 지지가 강했기 때문에, 카라칼라는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충성 보너스를 지급해 그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이후, 카라칼라는 옛 안토니누스 황족들을 포함해, 원로원 의원들과 장군, 관료, 해방노예, 인기 전차기수와 검투사 스타, 철학자와 시인 등 수천명을 재판없이 모조리 살해하고 동생 게타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추락하게 된다.
이에 카라칼라는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대목욕장을 건설하고 병사들의 급료를 인상하였으나 이로 인한 재정부족이 발생했다. 따라서 그는 세금을 올리고 화폐의 질을 낮추어 주조하기도 하였다. 카라칼라가 한 정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AD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우스 칙령'이었다. 이제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로마의 모든 속주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카라칼라는 군사적 재능, 업적과 행정가적 자질이 평균 이상으로 뛰어났다. 하지만 그 성격이 잔인하고 독불장군인 까닭에 이런 장점은 업적에 비해 부각되지 못했다. 또 그는 본래부터 허영심이 많았고 스스로를 마케도니아의 전설적인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여겨 로마를 비우고 군인황제로 활약했다. 이런 이유로, 로마를 위협하던 레누스와 다누비우스 일대의 게르만족들은 수십년간 로마를 공격하지 못했고 동방 역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말년까지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AD 212년 게르만족에 대한 원정 당시 무분별하게 동맹부족까지 학살한 행동은 지나칠 정도로 그의 잔혹함을 돋보이게 했다. 또 AD 215년 파르티아 원정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중단한 이후,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을 처형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을 학살한 행동은, 서방과 동방 일대의 로마인들에게 잔인함과 허영심만 더 부각시켜 인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군사적 업적과 재능은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게 했고, 그가 취한 군제 개편 및 방어선 정비 등은 후기 로마제국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AD 216년 카라칼라는 재차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다. 이때 그는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고, 동방 여행 당시 사소한 이유로 부하들을 혹독하게 다룬 행동 등은 카라칼라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결국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백인대장에 의해 AD 217년 암살되었다.
마크리누스는 소원대로 황제가 되었지만 카라칼라가 벌인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왕의 어머니와 그 때까지 손에 넣은 모든 전리품을 반환하는 불리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면서 인기가 떨어졌다. 결국 카라칼라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가 음모를 꾸며 자신의 외손자인 14세의 엘레가발루스를 카라칼라의 서자로 둔갑시켜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결국 시리아의 군단까지 엘라가발루스의 편에 서자 마크리누스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향해 도망쳤으나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엘라가발루스 및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시대와 시리아 여제들
엘라가발루스의 본명은 바리우스 아비투스 바시아누스였지만 어머니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의 가문이 대대로 태양신 바알을 섬기던 엘라 가발이라는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에 엘라가발루스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해졌다.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의 음모 덕분에 카라칼라의 서자로 꾸며져 마크리누스를 죽이고 동방 출신으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인에게 바알 신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면서 로마인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경박하고 장난이 지나쳐 거미집을 수집하고 각종 동물들로 마차를 끌게 하는 가 하면 손님들에게 유리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음식에 거미를 넣거나 말똥을 섞기도 하였다.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이 계속되자 율리아 마이사가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하여 사촌 동생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삼게 만들었지만 곧 변심하여 알렉산데르를 죽이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근위대가 AD 222년 폭동을 일으켜 엘라가발루스와 율리아를 살해하게 된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새롭게 즉위했지만 그의 나이도 14세에 불과했지만 유명한 법학자인 울피아누스를 등용하고 로마 원로원과의 관계도 개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인 율리아 마마이아가 울피아누스를 실각시키면서 내정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부상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AD 226년에 처들어오면서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병사들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지만 군사적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패배하였다. 하지만 AD 234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레만니족이 라인강을 건너 처들어 오자 개선식을 거행할 욕심에 알레만니족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였고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근위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3세기의 위기의 시작
이렇게 하여 5대에 걸친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졌고 이후 로마 제국은 AD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위에 오를 때까지 내부적으로 로마 군단이 황제를 마음대로 폐립하며 약 50년간 무려 18명의 황제(공동통치자까지 포함하면 26명)가 교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특히 군인 황제 시대로 불리는 이때 로마황제 중에 천수를 누린 사람이 2명 뿐일 정도로 혼란이 극심하였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도 동방에 새롭게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압박과 북방에서 날로 증가하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그동안 왕위다툼의 혼란을 겪던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동방의 강국으로 등장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로마의 동방 속주를 끊임없이 위협하였고 북방의 게르만족은 비록 통일된 정치체계는 없었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부족해진 식량을 찾아 로마 제국이 라인강 중류에서 도나우강 상류까지 연결하여 만든 방벽인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쉴새없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 로마는 계속된 어려움 속에서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면이 이전과 달라지게 된다.